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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삼상 8:1-9
1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4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삼상 8:1-9 / [타락한 사무엘의 두 아들] 사무엘이 늙어서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자기의 두 아들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다. 2) 큰 아들의 이름은 요엘이고, 작은 아들의 이름은 아비야였다. 그들은 유다 남부의 성소 브엘세바에서 재판관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3) 그러나 이들은 아버지의 모범적인 사사 활동을 본받지 않고 재산을 모으려고만 하였다. 그들은 부당한 이익을 탐하여 뇌물을 받고 부정한 재판을 하면서 법을 지키지 않았다. 4) [왕의 병폐를 설명하는 사무엘] 사무엘이 세운 사사들의 악행으로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두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가 5) 사사 대신에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신은 늙으셨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을 본받지 않아 백성을 공평하게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이방의 모든 나라와 똑같이 왕을 세워 주셔서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 6) 그러나 사무엘은 장로들의 요청을 악한 일로 보고서 이 문제를 여호와께 아뢰었다. 7)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와같이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원대로 해주어라. 그들은 지금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있다. 그들은 나를 더 이상 그들의 왕으로 모시려 하지 않고 있다.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이후로 그들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찾아다니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 네게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9) 그러므로 너는 그들의 소원대로 해주어라! 그러나 왕을 세움으로 인한 온갖 병폐를 그들에게 엄히 경고해 왕이 누리는 온갖 특전과 그것 때문에 당하는 백성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세히 알게 하여라.'
사무엘의 늙고 그의 아들들이 악행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합니다.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1-3) 에돔 왕국(창 36:31b)이나 초기 로마역사 가운데에서 왕정이 부자 간의 세습이 아닌 형태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왕정은 부자 간의 세습 형태입니다. 하지만 사사는 왕정 제도와는 달리 세습직이 아닙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을 사사로 삼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사사가 아닌, 아버지 사사 사무엘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사사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원칙이 아닌 자기들의 방법대로 판결을 하게 됩니다. 이 장면은 마치 사무엘의 스승이었던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생각나는 장면입니다(삼상 2:12-17). 사무엘의 장자는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고 차자의 이름은 ‘여호와는 아버지’라는 아비야입니다. 사무엘의 신앙을 볼 수 있는 이름입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이름과 같이 살지 못하였습니다. 뇌물로 그들의 눈과 귀는 가려지게 됩니다. 뇌물은 성경에서 지도자들에게 엄격하게 금지된 것입니다(출 23:8; 사 1:23; 암 5:12 등).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4-5)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외세가 두려웠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도자 사무엘이 늙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무엘의 아들들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자체는 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모세시대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정에 대하여서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신 17:14).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되어야만 합니다. 왕을 세우는 것도 하나님 마음에 합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왕을 세우려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인본주의적인 이유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6-9) 인본주의적인 왕의 요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이어온 사사제도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신뢰하지 못하고 왕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자신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성도의 삶은 내 생각과 나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방법을 구하여야 합니다.
적 용 :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을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것을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함께 나누며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운동선수들의 연습을 지켜보면 참된 인내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경기장에서의 짧은 시간을 위해서 수 백, 수 천 배의 시간 동안 같은 행위들을 반복합니다. 만약 그들이 일정기간 이상을 쉬게 되면 운동기능이 둔해져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도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디서 시험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짧은 기간의 시험과 환난을 이기기 위해서는 쉴 새 없이 육체와 영혼을 복종시키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호크마 주석
=====8:1
사무엘이 늙으매 - 이때 사무엘의 나이는 약 50살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이렇게 추정할 수 있는 까닭은 사무엘이 소명받은 때가 12살 때인 B.C. 1088년이라고 보고(2:26;3:1-14), 당시를 사울이 왕으로 취임한 해인 B.C. 1050년으로 본다면 (Leon Wood), 그의 나이는 50살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는 미스바 전투(7:5-14)가 있은지 약 5년 후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한편, 유대 탈무드(Talmud)는 이당시 사무엘의 나이를 52살로 보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학자들(Abravanel, Lange)은 그들의 연대 추정법에 근거하여 당시 사무엘의 나이를 70세 정도로 보고 있다. 그 아들들로...사사를 삼으니 - 이것은 사사직(士師職)의 안전한 이양이나 계승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사무엘은 자신을 돕도록 하기 위하여 두 아들들을 보조 사사로서 임명한 듯하다(Keil).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상 사사직이 세습 계승된 일은 전혀 없었다. 물론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왕(사사)으로 자처하기는 하였으나(삿 9:16), 그러나 그것은 사사직의 합법적 승계는 절대로 아니었다.
=====8:2
장자의 이름은 요엘 - '요엘'(Joel)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란 뜻이다.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 - '아비야'(Abiah)는 '여호와는 아버지'라는 뜻이다. 결국 이 두 아들의 이름은 사무엘의 믿음과 영감이 깊이 반영된 신앙적인 이름임을 알 수 있다(Smith, Fay).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 '브엘세바'(Beersheba)는 '일곱의 우물' 또는 '맹세의 우물'이란 뜻으로, 족장 시대로부터 유서 깊은 곳이었다(창 21:31). 또한 고대로부터 이곳은 근동과 애굽의 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요충지로서, 이스라엘의 최남단 곧 라마로부터 약 80km나 떨어진 먼 곳이었다. 바로 이러한 곳에 사무엘은 두 아들 보조 사사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 (1) 사무엘 자신이 늙었기 때문에 이곳까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2) 그리고 이곳에 사사를 둠으로써 인접국인 블레셋의 간섭을 배제 시키기 위함이었다. 아무튼 사무엘의 통치 중심지인 라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 가나안 남부 지역까지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사무엘 외에 별도의 보조 사사가 반드시 필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런데 사무엘이 한 지역에 왜 두 명의 사사를 임명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따라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사무엘의 두 아들 중 한 아들은 가나안 북단의 '단'에 배치되었다고 주장하나(Josephus, Antiquities, VI, 3, 2), 그 근거는 확실치 않다.
=====8:3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 여기서도 엘리 가정에서와 같은 비극적 모습이 비쳐지고 있다(2:12). 그러나 여기의 사무엘의 경우는 엘리의 경우와는 완전히 다르다. 즉 성경은, 엘리가 아들들의 신앙 교육을 게을리했다는 점을 강력히 암시하지만(2: 29), 사무엘의 경우에 대해서는 그러한 암시를 전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여기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자식 교육을 위한 사무엘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만 아들들이 거기에 순종치 아니했음을 시사해 주는 말인 것이다. 결국 사무엘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보여준 신앙과 삶의 본(本)은 말할 나위없이 대단히 훌륭했음이 분명하다(12: 3).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 이(利)의 추구(출 18:21), 뇌물 수수(출 23:8; 사 1: 23;5:23; 암 5:12). 판결의 왜곡(출 23:2, 6, 8; 신 16:19;24:17; 사 5:23) 등은 특별히 성경이 지도자된 사람들에게 절대로 금지시킨 조항들이다. 따라서 사무엘의 아들들의 이 같은 행위들은 그들이 사사의 본분을 망각한, 대단히 타락한 지도자들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출 23:6-8; 신 16:19 주석 참조.
=====8:4
개역 성경에는 번역이 안되었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그래서'(so, NIV)의 의미인 '와'( )로 본절이 시작됨으로써, 3절의 내용이 본절의 내용을 유발시켰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 - 이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 들의 대표자들이다(15:30; 삼하 5: 3; 왕상 8:3). 보다 자세한 내용은 신 21 :1-9 강해, '성경에 나타난 장로직'을 참조하라.
=====8:5
본절에서 이스라엘 각 지파 장로들은 두 가지 이유를 내세워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 하고 있다. 곧 그 이유는 (1) 사무엘의 노쇠에 따른 불안감, (2) 사무엘의 아들들의 악행과 무능에 대한 불신감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사 사무엘의 생전에 그의 권위로써 자신들의 왕이 세움받기를 강력히 원했던 것이다. 열방과 같이...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 여기의 '열방'은 특히 이스라 엘과 혈통적 연관성이 있었던 모압 . 암몬 . 에돔 등 주변 국가들을 가리킨다. 물론 애굽에도 왕이 있었으나, 당시 그 나라는 초강대국이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여건을 소유했으면서도 이미 왕을 갖고 강력한 왕정 제도를 실시하고 있던 모압. 암몬 . 에돔 등을 자신들의 모범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이때 지파(tibe) 차원의 부족 동맹 체제에서 벗어나서 왕(王)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왕정 국가 체제를 형성함으로써, 주변의 이웃 나라들과 동등한 차원의 군주국(君主國)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한편, 그런데 이처럼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원 자체가 악하다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스라엘 왕정 제도는 이미 모세에 의해 예언된 바 있었고(신 17: 14), 따라서 때가 이르면 이스라엘도 필연적으로 왕정 제도로 발전할 수 밖에 없을 운명이었다(Keil, Fay, Calvin). 그러나 그 모든 일의 진행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과 방법대로 행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인본주의적 욕구를 따라, 자신들이 원하는 방법대로 왕을 세우고자 했다. 바로 이 점이 지금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점이었던 것이다.
=====8:6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 '기뻐하지 아니하여'란 의미이다(삼하 11:25, 27).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자신의 노령과 아들들의 실정(失政)을 들먹이면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왕을 요구했다는 사실 때문에 이같은 악감정을 품은 것은 결코 아니다(Keil, Matthew Henry, Smith). 사무엘은 그러한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근본 동기를 파악 했기 때문에 기뻐하지 않은 것이다. 즉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 동기는 신정(神政) 정치를 불신하는 그릇된 왕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사무엘은 그들의 요구에 불쾌감을 표시한 것이다(E.J. Young).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주변 국가에 압제당하는 이유가 자신들의 범죄와 불신앙과 우상 숭배 행위에 있는 줄 깨닫지 못하고, 사사(士師)제도와 같은 신정 정치의 결함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태도는 이제 더이상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행위로, 곧 선민(選民)으로서의 고유한 특권과 사명을 포기하는 이른바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독립 선언과 같은 방자한 행위였다.사무엘은 이러한 점을 바로 파악하고 백성들의 요구에 깊이 괴로워 한 것이다. 여호와께 기도하매 - 이것은 사무엘이 자신의 판단에 혹시 인간적인 감정이 개입되지나 않았을까 염려하여,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물어보는 진지한 태도이다.
=====8:7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 즉 백성들이 요구하는대로,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 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 들의 요구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음을 보여 주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여호와의 통치를 거부하고 인간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적인 허용일 뿐이다(호 13 : 11).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가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한 백성들의 요구에 응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인간 왕이 가져다 주는 온갖 폐해를 깊이 체험케 하여,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된 왕이요 유일한 통치자임을 깨우쳐 주려고 하셨던 것이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 장로들이 공식적으로 왕을 요구했을 때, 사무엘은 일면 그들이 자신을 싫어하여 자신의 사사직(士師職)을 사임케 하려는 것으로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 이 여호와의 말씀은 백성들의 요구가 그러한 단순한 동기 이상의 것임을 분명히 지적해 준다. 즉 백성들은 단순히 사무엘 이후 자신들을 다스릴 신정적(神政的)왕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열방의 뭇 왕과 똑같은 정치적(政治的) 왕을요구한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의해 예언된 바(신17:14-20) 신정적 왕, 곧 여호와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율법을 보존 .전수하고 우상 숭배 행위를 척결하며 여호와 신앙으로 단결시켜 국력을 튼튼하게 하는 일 등을 주임무로 하는 그러한 왕을 요구했더라면, 오히려 그것은 사무엘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그러한 정치적이고 무력적인 절대 군주를 원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여호와의 통치를 거부하는 일로서 곧 여호와를 버린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Pulpit Commentary).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 성경은 도처에서 선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왕권을 강조하고 있다(출 15:18; 신 33:5; 삿 8:22,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자신들을 강력하게 다스릴 또다른 왕을 요구한 것은 곧하나님의 왕권을 인정치 않는 것과 동일한 행위였다(10:19;12:12). 나아가 이 행위는지금까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해 주신 여호와를 저버리고, 대신 절대적으로 의뢰할 또다른 그 무엇을 섬기고자 하는 우상 숭배 행위와 다름없었다(Keil).
=====8:8
이스라엘 장로들이 왕을 요구한 행위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또한 당시 성실히 사사직(士師職)을 수행하던 사무엘에 대한 반역임을 말하고 있다.
=====8:9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 여기의 '그러므로'( , 웨)는 본절의 내용이 8절의 결과임을 보여 주는 접속사이다. 따라서 '그들의 말을 듣되'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형벌적 성격을 띠고 있음이 분명하다. 엄히 경계하고...알게 하라 - 여기서 '경계하고'( , 타이드)는 '증거하다', '증인이 되다'란 의미이다. 또한 '알게 하다'( , 히가데타)는 '선포하다', '고하다'의 의미이다(시 97: 6). 본절은 이같은 유사한 동사를 반복 사용함으로 써, 이스라엘이 스스로 택한 왕으로 인하여 후에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 라는 점을 못박고 있다(롬 3:25, 26). 왕의 제도( , 미쉐파트 하멜렉) - 여기서 '제도'로 번역된 '미쉐파트'( )는 '다스 리다', '심판하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솨파트'( )에서 파생한 말로 곧 '심판', '특권', '권리' 등의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 '왕의 제도' 란 말을 직역하면 '왕의 권력', '왕의 특권'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문맥을 따라 이 말을 풀어 해석하면, 곧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택한 왕이 취하게 될 부정적인 행동(Hertzberg), (2) 그같은 왕이 행사하게 될 부정적인 권력(Caird) 등을 뜻한다. 따라서 여기의 이 문구는 본서 10:25에 언급된 긍정적 의미의 '나라의 제도' 와는 전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10:25에 언급된 '나라의 제도'는 왕이 지켜야 할 율법적 의무를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설 교 >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소서!
사무엘상 8장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시대는 어느 사사시대보다 안정적인 시대였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블레셋을 막았고, 아모리와의 사이에도 평화가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한 것은 여호와의 왕됨을 거부하는 언약의 배반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보다는 세상의 다른 나라들처럼 인간이 왕으로 다스려주는 그런 나라를 원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430년간 인간 왕의 다스림을 통하여 고난을 당하고 부르짖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4백년이 지나면서 그들은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긴 것은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제도의 문제로 본 것입니다. 곧 세상의 나라들처럼 왕이 없어서 그렇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늙고 그 아들들이 사사의 자질이 없다는 핑계로 자신들에게 왕을 세워달라는 것입니다. <자질이 부족하다면 아론과 훌처럼 뒷받침하는 봉사는 할 수 없는지>
1-3절을 보면 사무엘이 나이 많아 늙자 자신의 두 아들을 사사로 임명했습니다. 사사는 세습이 되는 직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나이 많아 늙어서 영력이 떨어졌어 그런지 자신의 두 아들을 사사로 세운 것입니다. 그 아들들의 이름이 장자 요엘과 차자 아비야 입니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고, 아비야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들의 이름이 얼마나 신앙적인 이름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이름과는 달리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눈 앞의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은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신 16:18-20 /여러분은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면 성읍마다 지파별로 재판관과 감독관들을 세우십시오. 백성 누구나가 자기 권리를 누리며 살도록 돌보는 책임을 그들에게 맡기십시오. 19) 여러분은 법을 왜곡시켜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편파적으로 재판을 해서도 안 됩니다. 뇌물을 받아서도 안 됩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뇌물을 받고 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도 뇌물을 받고 나면 바른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20) 여러분이 존중할 것은 정의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틀림없이 살아남아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사사로 세움을 받은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이 율법을 따라 뇌물을 받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백성을 공의로 재판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뇌물을 받아먹고 아버지 사무엘과 달리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지 않고 굽게 재판하였습니다.
본문 4-5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삼상 8:4-5 / [왕의 병폐를 설명하는 사무엘] 사무엘이 세운 사사들의 악행으로 백성의 원성이 높아지자,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모두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가 5) 사사 대신에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였다. “당신은 늙으셨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을 본받지 않아 백성을 공평하게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이방의 모든 나라와 똑같이 왕을 세워 주셔서 우리를 다스리게 해주십시오!”
이들이 왕을 요구하는 이유는 사무엘이 늙었고, 사무엘이 사사로 세운 그 아들들은 사무엘과 같이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같이 자신들에게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든 나라와 같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을 배반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하고 이방의 나라들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하여 내셨습니다.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거기서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출 19:4-6 / `내가 애굽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또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어떻게 내게로 데리고 왔는지 너희는 다 보았다. 5) 온 누리가 다 나의 것이 아니냐?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잘 지키면 너희는 뭇 민족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되리라. 6) 너희야말로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반드시 일러주어라'
이 땅에는 많은 민족과 사람들이 있지만 이스라엘을 택하여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리라는 약속이니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다 행하겠다고 동의 했습니다(출 19:8).
출 19:8 / 백성이 일제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을 우리가 그대로 실천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보다는 세상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제사장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보다 세상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사무엘은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기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삼상 8:6 / 그러나 사무엘은 장로들의 요청을 악한 일로 보고서 이 문제를 여호와께 아뢰었다.
그러면 사무엘이 왕을 구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❶ 그 이유는 자신이 세운 아들들을 백성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❷ 또한 자신이 지금까지 평생토록 단 한 번도 뇌물을 받지 않고 정직하게 백성을 다스린 것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섭섭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무엘 선지자는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이러한 요구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더 명확히 하나님을 구하기 위하여 여호와 앞에 나아가 기도한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삼상 8:7-9 /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이와같이 대답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원대로 해주어라. 그들은 지금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고 있다. 그들은 나를 더 이상 그들의 왕으로 모시려 하지 않고 있다. 8)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온 이후로 그들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찾아다니며 살았다. 그런데 이제 네게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9) 그러므로 너는 그들의 소원대로 해주어라! 그러나 왕을 세움으로 인한 온갖 병폐를 그들에게 엄히 경고해 왕이 누리는 온갖 특전과 그것 때문에 당하는 백성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자세히 알게 하여라.'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왕정을 요구하는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7). 왕정은 하나님의 구속역사 계획 속에 이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왕정을 구한 것 자체는 악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뻐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왕정을 요구한 이면에 숨겨져 있던 반신국적(反神國的)인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장로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삶에 싫증이 났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 이후에 나온 인간의 악한 마음으로 전심으로 하나님만 의지함으로써 삶의 안전을 보장받는 신정정치(神政 - 하나님의 대변자인 제사장 혹은 사사가 지배권을 가진 정치)가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앙이 없어도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파악하시고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왕을 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사무엘에게도 그렇게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사사인 사무엘을 버리는 것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왕을 허락하되 엄히 경고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고 합니다.
삼상 8:10-18 /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그대로 백성에게 전하였다. 11) `여러분이 왕을 세워 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그렇게 하였을 때 왕에게 얼마나 많은 특권이 주어지는가를 명백하게 알아야 합니다. 왕은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온갖 일을 다 시킵니다. 자기가 타는 말을 키우게 하고 수레도 맡겨 놓고, 자기가 행차할 때에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그 앞에서 달려가게도 합니다. 12) 그는 또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장교나 사병도 만들고, 자기의 밭에서 일하는 농부도 만들고, 무기나 전차를 만들게도 합니다. 13) 그는 여러분의 딸들도 데려다가 자기의 왕궁에서 온갖 일을 시키며 부려먹습니다. 왕을 위하여 요리도 하고 떡도 굽고 향유도 만들고 옷에 수도 놓게 합니다. 14) 그는 여러분의 농토와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나는 가장 좋은 것들을 강제로 거두어다가 자기의 관리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15) 그러고 나서 여러분이 수확하는 곡식과 포도 가운데서 10분의 1을 세금으로 거두어다가 자기의 신하와 종들에게 줍니다. 16) 그는 여러분의 남종과 여종들도 데려다가 자기 일을 시키고, 여러분의 소와 나귀 중에서도 제일 좋은 것만 끌어다가 부려먹습니다. 17) 그는 여러분의 양 떼 중에서도 열 마리에 한 마리씩은 세로 받아 갑니다. 결국 여러분 자신은 모두가 왕의 종이 됩니다. 18) 여러분이 그렇게 당하는 날이 오면, 지금 소원하던 왕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러주시는대로 사무엘은 왕을 세우면 그들이 얼마나 과중한 부담을 담당해야 할지를 이방의 나라들의 왕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징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군비를 부담해야 하고, 딸들도 왕과 신하와 군대를 위하여 징집당할 것이며, 모든 소산물의 십일조를 바쳐야 하고, 백성들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왕이 자기 일을 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왕을 세운다는 것은 왕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왕들과 왕정의 모습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삼상 8:18 / 여러분이 그렇게 당하는 날이 오면, 지금 소원하던 왕 때문에 탄식하며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는 여호와께서 여러분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앞에서 본 출애굽기 19장의 시내산 언약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여호와의 왕됨을 버리고 인간 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행위는 언약을 배반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구한 왕에게 부담해야 할 각종 부담과 왕이 백성을 자기 소유로 삼아 마음대로 착취함으로 고통이 가중되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들어주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와 같이 엄중하게 왕의 제도를 말하여도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래도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삼상 8:19-20 /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무시하고 모두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왕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20) 다른 이방 나라들이 모두 왕을 세우는 것처럼 우리도 똑같이 왕을 세워야 되겠습니다. 왕이 있어야 우리의 법적인 문제도 판결해 주고, 전쟁이 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서 싸우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듣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과 같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불신앙인지 지금까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그들을 앞서 인도하시고 친히 싸워 오셨는데 그들은 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과연 그들의 요구대로 왕이 백성들을 위해 나아가 싸웠을까요? 사울왕의 경우를 보면 절대로 아닙니다. 부끄럽게도 자기 목숨이 아까워 결국은 소년 다윗이 나아가 싸우게 됩니다.
출 15:3-7 / 여호와는 용사이시요, 그분의 이름은 여호와시라. 4) 바로의 병거와 그 모든 군대까지 바다에 처넣으시니 뒤따를 자 없다는 사령관들도 홍해에 잠겨 버렸다. 5) 깊은 바다 덮치니 돌처럼 늪속에 가라앉았네. 6) 여호와, 오른손 휘두르시어 영광드러내시고 여호와, 오른손 휘두르시어 원수들 때려 부수었네. 7) 놀라운 위엄 드러내시어 주께 맞서려는 자들 꺾어 버리셨네. 주께서 한번 분노하시면 주님의 원수들 검불처럼 타버리리라.
이 말씀은 여호와께서 용사가 되셔서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셨습니다. 그들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여호수아 5:13-15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웠을 때에 눈을 들어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그가 가로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 보다 먼저 약속의 땅에 와 있었습니다. 사사시대의 전투들도 여호와께서 친히 앞장서서 싸우셨음을 그들이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인간 왕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사무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요구를 여호와께 고합니다.
삼상 8:21-22 / 사무엘이 백성의 주장을 그대로 여호와께 아뢰었다. 22)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경고도 무시한 채 왕만을 요구하였기 때문에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들의 소원대로 왕을 세워 주어라!' 하고 결정을 내려주셨다. 사무엘은 백성에게 왕을 세워 주기로 약속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기를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고 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먼저 백성들을 각자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왜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을까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이 요구한 왕으로 인하여 고생을 해 보아야 정신을 차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하실 것을 이미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허락하신 왕은 세상의 왕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 17:14-20 / [왕에 대한 규정]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하고 살다보면 여러분도 주변의 다른 민족들처럼 왕을 세우고 싶어질 것입니다. 15) 그러면 반드시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뽑아 주시는 사람만을 왕으로 세우십시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동족이 아닌 외국인을 왕으로 세울 수는 없습니다. 16) 또 왕은 말을 많이 보유하려고 해서도 안되고 말을 많이 도입하기 위해서 백성을 애굽에 용병 노예로 팔아서도 안됩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노예가 되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17) 또 왕은 아내를 많이 두어서도 안됩니다. 아내가 많으면 왕의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게 됩니다. 또 왕은 자기를 위하여 은과 금을 너무 많이 쌓아도 안 됩니다. 18) 또 그는 왕위에 오를 때부터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보관하는 이 율법책을 베껴다가 19) 항상 가까운 곳에 두고 평생 동안 읽어야 합니다. 왕은 이 책에서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배우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키며 이 규정들을 실천해야 합니다. 20) 그렇게 하면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들을 얕잡아 보는 마음도 생기지 않을 것이며 주님의 명령에서 좌로나 우로 빗나가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왕과 그의 후손들이 오래오래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 왕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에서 언급하는 왕은 세상 왕들과 같이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며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왕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전제군주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그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있기에 이 세상에 독재가 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부분에서도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고 제어하여 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역사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이단의 교주들이 나오는 것은 이런 독재적인 교주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단의 교주들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교회들도 목회자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축복과 저주라는 당근과 채찍을 휘두르면 꼼짝 없이 순복합니다. 그런데 자신을 낮추고 성도를 섬기면 능력이 없는 자라고 무시합니다. 이런 일들을 바울 사도가 이미 증거하였습니다.
고후 11:19-20 / 여러분은 혼자 똑똑한 척하면서 그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어째서 그렇게 잘 속아 넘어갑니까? 그들이 여러분을 노예로 만들든 말든, 가진 것을 다 빼앗고 여러분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든 말든, 잘난 체하며 뺨을 때리든 말든 여러분은 비위 좋게 참고 지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하면서 종의 모습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은 사도의 자격도 없어서 그렇게 하였다고 하면서 거짓 선생들이 교인들을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면서 뺨을 치는데도 용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무엘에게 왕을 요구한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들이 어떠하였습니까? 정말 신명기 17장의 모습대로 다스린 왕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 중에 다윗이 가장 하나님의 뜻에 맞는 왕이었지만 다윗조차도 백성들을 자기의 소유물인양 밧세바를 간음하고 충성된 우리야를 살해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땅에 참된 왕이 오셨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왕으로 오신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왕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원리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힘으로 누릅니다. 사무엘서의 왕의 모습입니다. 백성들을 자기의 소유와 종으로 삼고 백성들의 것들을 착취하여 가는 왕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눅 22:24-27 /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제일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논쟁이 벌어졌다. 2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상에서는 임금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를 둘러선 종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또 종들은 자유가 없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26) 그러나 너희 가운데서는 남을 가장 잘 섬기는 사람이 너희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27) 이 세상에서는 주인이 자리에 앉아서 종들에게 섬김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너희의 종으로 왔기 때문이다.
제자들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왕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 왕 옆에서 무언가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섬기는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면 자기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왕을 원하십니까? 마태복음 20:28절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이 주님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왕을 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리의 교훈으로 삼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오직 우리 주님을 우리의 왕을 삼게 하시고 그 분의 통치를 온전히 받아가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삼상 8장 1~22절 / 조영태목사
사무엘도 늙었습니다. 사람의 한계입니다.
사무엘은 12살 되는 나이에 첫 소명을 받았고 30세 되던 해에 본격적인 사사로 활동했던 것으로 본다면 당시의 나이는 대략 55세로 볼 수 있습니다. 늙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아무래도 예전보다 힘이 떨어질 것이고 활동영역이 좁아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무엘의 경우는 젊었을 때 벧엘, 길갈, 미스바로 다니면서 순회하면 다녔다면 예전처럼 활동적으로 순회하면서 다스리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아들들을 그의 지도하에 사사로 세워서 사역을 분담하게 했습니다.
특히나 브엘세바에 아들들을 보낸 것은 자신의 고향인 라마와 거리도 멀고 블레셋과 인접한 중요한 지역으로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길로 따르지 않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며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면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되는가 봅니다. 엘리의 아들들같이 제사를 무시하거나 방자히 행한 것 같지는 않지만 공평해야 할 사사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그들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 밑에서 신앙훈련도 받았을 것입니다. 영적인 자질이 있었기 때문에 중책을 맡겼을 것인데 아버지로부터 멀리 있게 되고 높은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그것을 겸손하게 바르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때가 되면 자신의 믿음으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 합니다. 사무엘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성품과 경건의 능력을 배우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을 믿고 체험하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위로부터 오는 거듭남을 체험해야 합니다. 거듭남은 내 속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신의 사람에서 영의 사람으로 바뀌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성령으로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위에 부어질 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이며 심판받아 죽어야 마땅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대속의 죽음이 없이는 전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나를 위하여 죽어주심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 앞에서 신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이번 중, 고등부 수련회 주제를 ‘거듭남’으로 했습니다. 새로 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으로 아는 영적인 체험의 현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기 직전에 그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달라고 한 것은 엘리사의 시대가 더욱 치열한 세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점점 더 패역한 세대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모 또는 신앙의 선배들 세대보다 우리가 갑절의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녀들이 부모 세대보다 갑절의 영감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세대를 감당합니다.
더욱 더 세속화와 인본주의의 물결 속에 나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입니다.
훈련이 더욱 강한 특수부대원들이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이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한 강한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
한편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은 라마에 있는 사무엘을 찾아옵니다. 5절입니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사사시대에 공포와 억압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늙고 그의 아들들이 사무엘의 행한 길대로 행하지 않는 모습들을 보면서 불안함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른 민족들처럼 왕을 몹시 열망했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자신들의 전쟁에서 원수들을 물리치고 자기들을 지켜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장에서 미스바 성회 당시에 블레셋의 침공을 받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해달라는 간절함은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그 신앙의 결단 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산다고 하면서 오직 믿음만으로 살 것 같았던 그 고백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줄 알게 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지만 예수님을 보고 물 위를 걷고 있다가 주변의 풍랑을 보고 겁을 집어먹은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놓치고 다시 내 힘으로 걷다가 바다에 빠져 버리는 모습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시선입니다. 누구를 어디를 주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세상은 변합니다. 수시로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입니다. 그 분의 말씀은 영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믿음은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의 성령충만은 오늘의 성령충만입니다. 내일의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거룩해지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신랑을 기다리는 10명 은 똑같이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했습니다. 열처녀 비유의 차이점은 그 하나입니다.
타오를 때는 계속 타오를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져간 불이 커져 갑니다. 기름이 필요합니다. 계속해서 태울 성령의 기름을 부어달라고 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멈추지 않도록 간절히 찾고 찾아야 합니다.
왕을 주어 다스리게 하라는 요구에 사무엘은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기뻐하지 않았다는 정확한 표현은 오히려 ‘떨다’, ‘근심하다’입니다. 백성들의 요구를 들었을 때 사무엘은 먼저 백성들이 자신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 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나를 버리는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곧 그에 대해서 하나님께 구하자 하나님은 오히려 백성들의 요구대로 들어주라고 하십니다. 사실은 사무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그랬다고 하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아론을 부추겨서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송아지였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좋아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시로 하나님을 믿지 못했고 불신앙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도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어 섬기면서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꼬집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왕을 세워 달라고 하는 백성들의 의도가 잘못되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맞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구한 것은 ‘모든 나라와 같이’ 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하나님 없는 나라들을 따르려는 인본주의적인 생각의 결과였고 결국은 이스라엘의 유일하신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나라요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하나님 없는 주변 국가들과 같아지려고 한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왕만 잘 세우면 우리는 잘 된다는 논리였습니다.
곧 하나님은 왕정 통치의 문제점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낱낱이 알려주라고 말씀하십니다.
11-18절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첫째, 11-13절은 젊은 남녀의 강제 징집 및 노동력 착취입니다.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11절 ‘어거한다’는 것은 ‘배치하다’ ‘설립하다’ 라는 뜻입니다.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12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왕들이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딸들은 향료 만드는 자 요리하는 자 떡 굽는자로 삼을 것이며 13절
자식들을 데려다가 왕을 섬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둘째, 곡물 및 가축의 징용 및 징세입니다. 14-17절 까지에서
백성들의 밭과 과수원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왕의 신하들에게 주게 하고 소산의 십일조 양 떼의 십분의 일을 세금으로 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셋째, 왕의 폭정 및 실정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18절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하나님의 경고는 역사적으로 사실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왕정체제는 값비싼 댓가를 요구하였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자기들을 보호하고 자신들을 위해서 전쟁을 하고 자신들의 편에서 통치하리라고 기대했지만 실제 왕들은 기대와 다르게 자신의 나라를 세우는 대에 급급했습니다. 자신과 왕궁을 위하여 막대한 사람과 재물을 필요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재산을 국고로 들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난 왕들은 나라의 불안정을 가져왔고 백성들은 큰 고통에 빠졌습니다. 멀리서 그 예를 찾지 않더라도 초대 왕인 사울이 다윗을 경쟁자로 삼으면서 왕으로서의 자질을 잃게 되면서 폭정에 가까운 통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고 나라전체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윗 왕과 솔로몬 전성기 까지 이스라엘이 부강했으나 곧 르호보암 때에 나라가 분열되고 남, 북 으로 분열된 이스라엘은 많은 왕들이 세워졌지만 하나님 앞에서 통치한 왕 때에 비로서 평화를 누렸고 그 외에는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국은 나라가 망하고 70년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러한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거절합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합니다.
그래도 우리의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다른 나라들 같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고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되겠다고 떼를 씁니다.
만약에 사무엘이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폭동이라도 일으킬 기세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가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사사로서의 통치 25년간이 헛된 것이었는가 하고 자책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하나님은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요구에 너무 쉽게 허락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잘못된 것일지라도 허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떼를 쓰면 잘못된 것이지만 들어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려고 할 때입니다. 결국은 이스라엘의 왕들의 실패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자녀의 약속을 기다리다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아내 사래가 아닌 몸종 하갈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게 됩니다.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 때문에 가정에 문제가 야기되고 결국은 약속의 자손이 이삭이 태어나기 까지 15년을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아브라함은 그의 실수를 깨닫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간의 조급함은 고통만 가져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하심으로 그들의 결정이 얼마나 불신앙적인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수많은 왕들 중에 진짜 왕 메시야를 하나님의 약속하신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실수와 허물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써가시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열매를 먹음으로 죄를 범했을 때에도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죄의 고통을 주시면서도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심으로써 희생제물 피를 흘림으로써 다시금 용서하시고 구원의 길을 허락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요구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인가를 살피시기를 바랍니다.
늘 “주 예수님 나의 생각과 나의 결정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라고 기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왕의 통치는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종으로 부리고 우리 것을 빼앗습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빼앗아 우리를 통치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평강의 왕으로 오십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먼저 모든 생각을 하나님 앞으로 사로잡아 오시기를 바랍니다. 헛된 생각, 악한 생각, 나쁜 생각을 사로잡고 오직 생명과 회복과 치유와 기쁨의 생각이 샘 솟기를 바랍니다.
또한 생각이 들어와서 흘러오는 마음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은 통치의 격전장입니다. 치열한 전쟁터입니다. 사단은 생각과 그의 나라를 심기 위해서 우리의 육을 자극합니다. 먹고 마시는 것, 보고 즐기는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 심령에 거룩한 열정을 부어주십니다. 위로부터 성령의 강물을 흘려보내주십니다. 메마른 땅이 거룩해지도록 강퍅한 마음을 부드럽게 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주십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 1:13
우리 성도들을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사실상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백성들입니다.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진리와 성령을 통해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나 칼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성령의 음성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왕이신데 누가 우리를 정죄하며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통치를 거부하고 때로는 고난과 시련이 올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르 보호하시고, 우리를 안전하게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이 참된 하나님 백성의 고백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통치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통치를 갈망하십니까? 하나님의 통치에 목마름을 느끼십니까?
무엇에 목말라 하십니까?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6
나의 갈망은 주께서 날 알듯 나도 주님을 온전히 아는 것
나의 갈망은 주 날 사랑하듯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
엄히 경고하라
김정호목사(번동제일교회) / 삼상 8:1-9
엄히 경고하라
대원군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던 시절에 한 선비가 찾아왔습니다. 선비가 큰절을 했지만 대원군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머쓱해진 선비는 자신의 절을 보지 못한 줄 알고 한 번 더 절을 했습니다. 그러자 대원군이 벼락같이 호통을 쳤습니다. “네 이놈! 절을 두 번 하다니. 내가 송장이냐?” 그러자 선비가 대답했다. “처음 드리는 절은 찾아뵈었기에 드리는 절이옵고 두 번째 드리는 절은 그만 가보겠다는 절이었사옵니다.” 선비의 재치에 대원군은 껄껄 웃으면서 기개가 대단하다며 앞길을 열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간혹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상반될 경우를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때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이지만 실제로는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뜻을 고집하고 하나님의 뜻과 의도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뜻을 고집할 때에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이유들을 대어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거나 정당화시키려고 합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을 이기고 압도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왕을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명백히 어긋나는데도 자신들의 요구에 그럴듯한 이유를 대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키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우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자기의 맘과 뜻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늙었다는 것과 사무엘의 아들들이 범죄했다는 이유를 들어서 이방 나라들 같이 왕을 세워서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는 계속적이고 끈질긴 요구를 사무엘에게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떠난 것을 아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백성들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우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6·25 상기 주일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게 하라
본문 1-3절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은 늙고 아들들은 아버지만 못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원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사무엘은 종신 사사였으므로 그의 아들들은 아비를 돕는 보조 사사였습니다.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었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입니다. 여호와는 아버지시라는 뜻으로 모두 아버지가 믿음으로 지은 이름이었습니다. 브엘세바는 맹세의 우물을 뜻하고 이스라엘 족장들과 깊이 관련된 성읍입니다. 가나안 최남단에 속합니다. 라마에서 약 80km나 되는 원거리이므로 연로한 사무엘은 아들들을 파송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철저한 신앙을 따라 청렴결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들은 아비같지 않아 불신앙적이고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하였습니다. 율법에서 엄히 경계한 바였습니다(출23:6-8, 신16:19). 이와같은 아들들의 부족이 백성들이 왕을 구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장로들의 주장은 이스라엘 중에서 왕을 세워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해결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모든 잘못을 하나님과 사무엘과 아들들에게 전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마음이 따스하여 대하기 편한 사람, 만날 때마다 먼저 즐거운 인사를 하는 사람, 조그마한 호의에도 고맙다는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 틈날 때마다 책을 읽는 사람, 전화를 잘못 걸면 미안하다고 사과할 줄 아는 사람, 잘못 걸린 전화에도 친절한 사람, 얼굴에서 훈훈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사람, 잘못한 걸 알면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는 사람, 자기보다 못한 사람 앞에서도 목에 힘주지 않는 사람, 때로는 손해를 보고도 생색내거나 소문내지 않는 사람, 늙어도 나이 들어가는 모습이 깨끗한 사람, 비싼 옷이 아니더라도 늘 단정한 사람, 어느 자리에서나 맡은 일에 열중하는 사람, 남에게 말한 대로 자기도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 한 포기의 들풀과 한 송이의 야생화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우리는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들은 어떠한 부모이며 자녀이며 성도인지를 살피고 점검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본이 되고 부모에게 영광과 면류관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는 부모와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의 신앙과 삶을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책임을 통감하여 기도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나 환경이라고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사람의 눈은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부모와 가정과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바르지 못한 모습에는 엄히 경고하여 하나님의 자리로 회복되는 은혜가 가정과 교회에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재물이 되게 하라
본문 3절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신앙과 재물은 건강하고 깨끗하지만 불신앙과 재물은 결코 깨끗하기가 어렵습니다. 부정과 부패는 같이 있는 쌍둥이와 같고 분리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이익과 뇌물을 요구하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재판을 왜곡하였습니다. 특별히 성경이 지도자된 사람들에게 사람들에게 절대로 금지시킨 조항들입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의 이같은 행위들은 그들이 사사의 본분을 망각한 대단히 타락한 지도자들이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왕을 세우기를 요구하였습니다. 장로는 각 지파의 지도자이며 원로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는 애굽에서부터 있었고 광야생활 때에는 70장로가 있었습니다(민11:25). 장로들은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와 더불어 정치와 종교의 모든 분야에서 백성의 지도역할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라마에서 전국을 다스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삼상 7:17).
미국의 동기부여 연설가로 저명한 ‘노먼 빈센트 필’ 목사에게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와 상담을 청했습니다. 실의에 빠진 듯 힘이 다 빠져 있는 그는 말했습니다. “목사님, 평생 노력한 제 사업이 한순간 부도가 났습니다. 제 인생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 이제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와 가족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노먼 빈센트 필 목사는 종이와 팬을 꺼내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셨다고요? 그럼 부인은 있습니까?" "네, 항상 제 뒷바라지를 해주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습니다." 목사는 종이에 '훌륭한 아내'라고 적었습니다. 목사는 중년 남자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자녀들은 있습니까?" "네, 항상 함박웃음을 짓는 착하고 귀여운 세 아이가 있습니다. 가족들을 생각하니 더 마음이 아픕니다." 목사는 종이에 '착하고 귀여운 세 아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중년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에게 소중한 친구는 있습니까?" "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좋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목사는 종이에 '좋은 친구들'이라고 적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중년 남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건강은 어떤가요?" "건강은 자신 있습니다. 아주 좋은 편입니다. 목사님, 그런데 저는 이런 게 아니라 모든 것을 잃은 제 처지를 상담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목사는 종이에 '건강한 몸'이라고 쓰고 지금까지 적은 리스트의 맨 위에 '모든 것을 잃었다는 당신이 아직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이라고 제목을 적었습니다. 순간 중년 남자가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제게는 아직 귀한 것들이 남아 있었네요.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나요? 당신의 삶이 실패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드나요? 당신은 아무런 의욕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런 생각이 당신을 쉽게 좌절시킵니다. 하지만 한 번만 더 소중한 것을 생각해서 적어보세요. 분명 당신에겐 여전히 귀하고 소중한 것들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을 테니까요. 그것이 당신의 삶에 희망의 불씨가 되어 다시 일어서게 할 것입니다.
돈이나 물질이나 직장과 사업이 너무 귀합니다. 그러나 가장 귀하거나 전부는 아닙니다. 가족과 친구와 건강은 물질보다 더 귀합니다. 특별히 물질보다 하나님이 더욱 귀합니다. 재물을 잘 모아야 하고 바르게 써야 합니다. 재물의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직하고 정당하게 벌어야 합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할 때 행복하고 존경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어느 교회 성도는 재물을 많이 모았으나 병이 들어서 목회와 불치병자와 장학 사업을 위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인 요엘과 아비야처럼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는 어리석고 저주 받은 인생이 아니라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고 청결하게 재물을 모으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사용하는 지혜로운 물질의 청지기가 되라고 엄히 명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백성들이 되게 하라
본문 7-9절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은 일찍부터 왕정제도를 가져 강력한 중앙집권제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왕을 구한 것을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첫째는 사무엘을 거부하는 행동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신정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의 뜻을 따라 장로들에게 답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철저한 신앙적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은 기쁨이 아닌 노여움이었습니다. 배은망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한 것은 다른 신을 섬기며 하나님을 떠난 행위였습니다. 인간적인 조직과 주권을 요구한 우상숭배이었습니다. 왕의 제도는 권력주의에서 파생되는 위험성이 있었습니다. 선민으로서의 고유한 특권과 사명을 포기하고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 선언과 같은 망자한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적 허용일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보다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우월한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여 더욱더 하나님 앞에서 구별되고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았어야 했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우리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절대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무 불만도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불러와 비싼 음식 앞에서는 빨리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주머니에는 늘 돈이 넉넉히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오해’라는 글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잘 모르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잘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참으시고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고 허락하십니다. 깨닫고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성도들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고 좋아보이는 것을 위해 하나님과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화려함과 찬란한 유혹이 있어도 하나님을 섬기고 선택해야 합니다. 사탄과 세상은 수천 수만 가지로 성도를 유인하고 유혹하여 넘어지고 불행하고 지옥을 몰아넣습니다. 하나님을 버리는 세속화에 속거나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나라와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엄한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평생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여러분!
누구나 늙고 실수합니다. 자녀들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무엘도 그러하였습니다. 모든 비난과 핑계거리를 버려야합니다. 변명을 버리고 더욱 회개하며 조심성 있게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와 재물과 백성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왕을 세워 주소서
이강웅목사 / 삼상 8:1-9
서론: 선지자 사무엘이 사사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는 이전 어느 사사시대보다 안정적인 시대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막아주셨고(7:13), 아모리와의 사이에도 평화가 있게 하셨습니다(14절). 그런데 사무엘이 나이 들어 늙었을 때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이 왕을 요구합니다. 그것도 ‘열방과 같이’ 왕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 국가에서 인간 왕이 통치하는 왕정 국가로 국체를 바꾸기를 요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호와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배반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백성으로 살기보다는 열방 국가들처럼 인간이 왕으로 다스리는 그런 나라를 원한 것입니다.
430년 동안 바로의 압제 아래 노예 생활하던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자유인으로 풀어 주셨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 가게 하셨습니다. 그후 4백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인간 왕을 세워달라고 합니다. 인간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위 이방인들의 침입과 압제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위 이방인들에게 고통을 당한 까닭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긴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하여 해결하려 하지 않고, 제도를 변경해서 해결하려 했습니다. 세상의 나라들처럼 왕이 없어서 그렇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데 그들은 세상 법칙대로 살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것은 정치체계를 개선해서 왕을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늙고, 그 아들들이 사사의 자질이 없다는 핑계로 자신들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합니다.
오래 계속되는 코로나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우리의 삶에 참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가치관과 세계관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전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일이 이제는 하찮은 일이 되었고, 이전에는 별로 였던 일이 이제는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혼란과 혼동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전 보다 더 세상의 정신과 가치관에 빠져서 세상적인 것들에게 더 많이 집착할 수 있습니다. 힘들다 보니 내게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붙잡으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썩은 동아줄을 붙잡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법칙에 따라 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할 하나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고 구하고 문을 두드려야 할 분은 하늘에 계십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원수를 발등상 삼기 까지 불가불 왕으로 다스리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신뢰하고 섬겨야 할 진정한 왕이십니다.
이 아침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 주셔서 왕중의 왕이신 예수님의 참 가치를 알아 볼 수 있는 안목을 주시기 원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오직 그리스도만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그 분의 통치를 온전히 받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 왕국을 위해 충성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그의 나라는 쇠하지 않고 영원 무궁할 것입니다.
1.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사무엘이 늙어 자신의 두 아들을 브엘세바 지역의 사사로 임명했습니다(2절).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최남단입니다. 아마 그곳까지 오고가며 다스리기에는 기력이 허락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본래 사사직은 세습하는 직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의 두 아들을 사사로 세운 것입니다. 그 아들들의 이름이 장자 요엘과 차자 아비야 입니다. 요엘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이고, 아비야는 ‘여호와는 나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신앙적인 이름입니까? 그런데 그들은 이름과는 달리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눈 앞의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습니다(3절).
이같은 행위는 율법이 명백히 금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16:18-2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좇으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얻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재판장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굽게 판단하지 말고,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하며 의인의 말을 굽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사로 세움을 받은 사무엘의 두 아들들은 아버지 사무엘의 신앙과 자질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뇌물을 받아먹고, 공의로 재판하지 않고 굽게 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와서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합니다. 5절입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이들이 왕을 요구하는 이유는 사무엘이 늙었고, 사무엘이 사사로 세운 그 아들들은 사무엘과 같이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나라와 같이 자신들에게 왕을 세워 자신들을 다스리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열방과 같이’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열방으로 부터 구별하여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포기하고, 이방의 나라들과 같이 되려고 합니다. 자신들의 정체성 마저 부정하는, 언약에 배신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대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하여 주셨습니다.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주시고 거기서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출 19:4-6)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찌니라”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큰 영광이요 특권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다 행하겠다고 동의했습니다(출 19:8). 그런데 이제 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보다는 세상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보다 세상 나라들처럼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는 신정 정치에서 인간 왕이 다스리는 왕정 정치로 전환하는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국가의 정체성과 형태를 탈바꿈하는 변혁입니다.
2. 인간 왕을 구한 죄
사무엘은 이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기뻐하지 아니하였습니다(6절). 그 이유는 지금까지 백성들을 위해 수고해 온 자신을 거부하고, 또 자신이 세운 아들들을 백성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지금까지 평생토록 단 한 번도 뇌물을 받지 않고, 정직하게 백성을 다스린 것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한 섭섭함일 수도 있습니다(12:3).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이러한 요구가 하나님을 버리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앞에 나아가 기도한 것입니다.
그때 여호와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7-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왕정 제도 자체를 거부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구원사의 계획 속에는 다윗 왕과 그 계보를 이은 메시아가 출현하여 은혜의 왕국을 이루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그들의 요구를 기뻐하시지 않는 이유는 왕정을 구하는 이면에 드리워져 있는 그들의 본심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삶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그들의 안녕과 행복이 보장받는 신정 정치가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이도 스스로 안전을 확보할 있는 제도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아시기에 사무엘을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을 버린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사무엘에게도 그렇게 한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기 욕심과 욕망의 충동에 따라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겼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왕을 허락하되 엄히 경계하여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고 합니다. 8장 10-18절을 보면 사무엘은 백성들이 구한 왕정제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상세히 증거합니다. 왕을 세우면 그들이 얼마나 과중한 부담을 담당해야 할지를 이방의 나라들의 왕의 경우를 예로 들어서 백성들에게 전합니다. 군대 징병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군비를 부담해야 하고, 딸들도 왕과 신하를 위하여 징집 당할 것이며, 모든 소산물의 가장 좋은 것을 바쳐야 하고, 곡식과 포도원의 소출의 십일조를 취할 것이고, 백성들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왕이 자기 일을 시킬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왕을 세운다는 것은 왕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왕들과 왕정제도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요구한대로 세운 왕이 앞으로 각종 부담을 지우고, 백성을 종처럼 착취하여 고통이 가중될 그때에 아무리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실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엄중히 말하였는데도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19-20절입니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어서 다른 나라들과 같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일이 얼마나 큰 불신앙인지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을까요?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과 어리석음이 좀처럼 벗겨지지 않기에 뼈저린 고생을 허락한 것이 아닐까요? 그들이 요구한 왕으로 인해 고통을 당해 보아야 정신을 차리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백성에게 주는 형벌은 어리석은 왕이 다스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신정 국가가 제대로 작동 되려면 어느 정도 민도의 수준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사기서에서 보듯 그들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거 역사로 부터 배우지 못하고, 오히려 갈수록 더 악화 되었습니다. 결국 인간 왕이 강압적으로 억누르고, 강요하는 왕정 체제 아래 살아가야 할 정도로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왕제도를 허락하실 것을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왕은 세상의 왕들과는 전혀 다릅니다. (신 17:14-20)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세상 왕들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며 섬기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자기 멋대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왕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왕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전제군주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종노릇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였어요.
그들은 현재 자신들이 받은 자유의 가치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지킬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아무 통제 없이 자기 멋대로 살고 싶고, 그러는 한편 자기를 붙잡아 줄 수 있는, 힘있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독재자들이 출현하고, 이단 교주들이 설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축복과 저주라는 당근과 채찍을 휘두르고 군림하면 꼼짝 없이 순복합니다. 그런데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성도들을 섬기면 능력이 없는 자라고 무시합니다. 이런 일은 바울 사도이 이미 체험했습니다. (고후 11: 20)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 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찌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도시에서 자비량 선교를 했습니다. 직접 장막을 짓는 육체적 노동을 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아직 미약한 교회에 짐이 되지 않기 위한 사도 바울의 배려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의 모습에 대해 거짓 교사들이 모함하기를 그가 사도의 자격이 없어서 그렇게 하였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거짓 모함에 넘어간 교인들을 자기 종으로 삼고, 잡아 먹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면서 뺨을 치는데도 용납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무엘에게 왕을 구하던 백성들의 수준입니다.
이렇게 구한 이스라엘의 왕들은 어떠하였습니까? 정말 신명기 17장의 모습대로 다스린 왕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중에 다윗이 가장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지만 다윗조차도 백성들을 자기의 소유물인양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야를 살해했습니다. 이것이 세상 권력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먼 훗날 다윗의 계보를 통해서 이스라엘 땅에 참된 왕이 오십니다. 그 분이 이 땅에 도래케 한 그 분의 왕국은 이 세상 나라의 원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 자를 힘으로 누릅니다. 연약한 자가 힘 센 자를 섬겨야합니다. 강한 자가 대접을 받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찾던 왕의 모습입니다. 결국 백성들을 자기의 소유와 종으로 삼고, 백성들의 것들을 착취하는 왕입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다윗의 후손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군림하려고 백말을 타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겸손히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절을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시기까지 섬기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땅에 은혜의 왕국이 임하도록 하기 위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를 이 땅에 가져오기 위함입니다. 이 분이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결론: 신앙생활이란 하나님과 그 나라를 믿고 통치를 받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과 순종과 겸손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으로 다스리심을 수용하고, 그 분의 왕국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계 4:2-3)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 앉으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지금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역사가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생이 거저 되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는다면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환란이나 곤고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단코 패배로 끝나지 않습니다.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왕이 되신 그 분이 우리를 지켜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눈을 들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그분은 이기고 또 이기시는 승리자이십니다. (계 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승리하실 것입니다. 그분을 볼 때 우리는 다시 싸울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승리를 확신하게 됩니다.
우리가 코로나팬데믹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이 믿음으로 살아가면 우리의 인생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결코 수치를 당치 않습니다. 그 분의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는 영원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의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우리의 왕인가?
삼상 8장 1~22절 / 정준모목사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왕의 제도가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엔 왕이 없었습니다. 왕정이 주변 나라들엔 보편적 제도였지만, 이스라엘엔 왕이 없었습니다. 출애굽 때, 모세가 영적 지도자 역할을 했지만, 세상의 왕과는 달랐습니다. 여호수아도 가나안 정복 시에 군사적 영적 지도자 역할을 맡아서 했지만,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 사사 시대엔 나라의 위기 시에 적과 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사들을 세워서 쓰셨지만 그들도 왕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요청한 적은 있지만, 기드온이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나와 내 아들은 여러분을 다스리지 않을 것입니다.”(삿8:22-23)
사사 시대 이스라엘 공동체는 열두 지파의 동맹 내지 연합 국가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다른 이방 나라들처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왕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언제까지요?
오늘 본문에 보니, 사무엘 선지자가 활동할 당시까지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던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 왕은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찾아와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를 내세웠습니다.
1) 하나는, 사무엘은 이미 늙고, 그의 아들들은 사사로서 제 역할을 잘하지 못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삼상8:1-3절을 보세요.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의 두 아들은 이전의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처럼 심하게 타락하지는 않았다해도, 아버지 사무엘에 비하면 너무나 부족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브엘세바에서 사사로서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름은 좋은 이름이었는데, 이름 값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요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
아비야: “여호와는 내 아버지시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또 다른 이유는, 이것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해 온 이유인데요, “이스라엘도 다른 나라처럼 왕권 중심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게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보편적 국가 시스템을 갖춰야 하겠다, 라는 것입니다.
삼상8:4-5절입니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이 구절에서 ‘모든 나라와 같이’에 밑줄을 그어 보세요.
왕의 제도는 당시에 세상에서는 보편적인 제도였던 것입니다. 이집트와 같은 큰 나라에도 왕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보다 작은 나라에도 왕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에도 다섯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이 왕을 요구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이웃 나라인 암몬의 영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삼상12:11-12절을 보세요.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을 첫 왕으로 세우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룹바알과 베단(바락)과 입다와 나 사무엘을 보내사 너희를 너희 사방 원수의 손에서 건져 내사 너희에게 안전하게 살게 하셨거늘 너희가 암몬 자손의 나하스가 너희를 치러 옴을 보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 시대부터 사무엘 선지자 시대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셔서 다스리셨으며, 필요할 때엔 사사들을 통해 구원을 베풀어 주셨는데,(얼마 전에도 미스바에서 블레셋을 물리치지 않았느냐?) 이제 인간 왕을 요구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는 백성들의 요구를 들었을 때 몹시 기분 나쁘게 생각했습니다. 사무엘은 큰 배신감도 느꼈고, 인간적인 섭섭함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마음이 본문 6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나(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셨습니다.
7절을 같이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영어 성경, “And the Lord told him : Listen to all that the people are saying to you; it is not you they have rejected, but they have rejected me as their king.”(NIV)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워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백성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했습니다.
- 여기 하나님은 왕의 제도를 허락은 하시지만, 승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승락과 허락은 다릅니다. 승락- 청하는 일을 이해하거나 동의해서 들어주는 것(영어로, agree, acceptance)입니다. 그러나 허락은 청하는 일을 그냥 들어주는 것(영어로, allow)입니다.
예화) 부모가 자녀들이 울면서 떼를 쓸 때, 승락하지는 않지만 허락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마트에 가서 갖고 싶은 장난감이나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떼를 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원치 않지만 아이에게 허락하고 사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허락하였지만 마음이 내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알고 계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가는 세상 나라와 같은 왕의 제도를 요구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 미리 왕의 제도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명기17장에 보면,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진다면 어떤 왕이 되어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여기 보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가지 나오고,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한 가지 나옵니다.
이스라엘 왕이 해서는 안 될 것(피해야 할 것)
(1)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 –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의지하게 된다.
(2) 아내를 많이 두지 말 것 -마음이 미혹될 수 있다.
(3) 자기를 위해 은금을 많이 쌓아 두지 말 것
반드시 해야 할 것
(1) 율법책을 복사하여 항상 곁에 두고 읽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하나님은 이상주의자라기 보다는 현실주의자이신 것 같습니다. 사랑 때문에 그렇게 되시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지만, 그들이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 계속 요구하니까,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의 위험성을 경고한 후에 허용해 주신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왜 사무엘 선지자가 왕의 제도에 대해 반대했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이것은 너를 버림이 아니고 나를 버린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뿌리 깊은 문제 중에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의 통치 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에는 비록 선지자를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지만, 보이는 왕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이방 나라들에 비해 자기들이 너무나 무질서하고 무능하게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서, 왕 중심의 강력한 국가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더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특히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훨씬 효율적이지 않겠나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찾아와서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잘못 생각한 것은,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문제는 왕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왕 되신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한데 그 원인이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왕이 없어서 그랬던 것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만 했던 생각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인들도 얼마든지 비슷한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요구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왕을 허용하시면서 왕의 제도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해 주도록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삼상8:10-18절에 나옵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왕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말과 마차를 몰게 할 것이다.
군대에 끌고 가서 천부장, 오십부장을 삼아 전쟁에 참여시킬 것이다.
또는 강제 노역에 동원되게 할 수도 있고, 전쟁 무기를 만드는 일에 끌어들일 것이다.
또한 아들들뿐 아니라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노비처럼 부릴 것이다. 향료를 만들거나 요리하게 할 것이다.
또한 너희의 가장 좋은 포도원이나 밭을 빼앗아 갈 수도 있고, 곡식을 거둔 후에 1/10일을 세금으로 거두어 갈 것이다.
심지어 너희의 남종과 여종, 소와 나귀와 같은 재산도 강제로 빼앗아 갈 것이다.
그 때에 너희들이 뽑은 왕으로 인해 울부짖어도 여호와께서 대답하지 않으실 수 있다.
이렇게 경고했는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고집 피우는 아이처럼 요구하였습니다.
본문 삼상8:19-20절입니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그래서 여러분,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첫 왕이 바로 문제 많은 사울 왕이 된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기 위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 세 개가 있습니다.
1)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2) 어떤 리더십이 참된 리더십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3) 누가 우리 인생의 주님이시며, 왕이신가? 하는 질문입니다.
1. 여러분은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리더십과 관련해서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세요? 세상 나라나 군대나 회사처럼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있고, 그를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는 다르기 때문에 좀 무질서해 보여도, 사람의 영향력은 크지 않고, 하나님의 영향력이 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교회가 좋은 교회인가?
저는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왕과 같은 개인의 영향력이 커지는 교회가 아니라,(즉 제왕적 리더십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교회에 대해 언급하실 때, 가장 강조한 말씀 중에 하나가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마16장에 보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이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럼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질문하십니다. 베드로가 유명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 때 예수님이 교회에 대한 언급을 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베드로를 첫 교황이라고 하면서, 교황 제도를 합리화하였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인간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칭찬하신 것이며, 신앙 고백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습니다.
“On the rock I will build My Church”
요한복음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주시면서 다시 목회의 사명을 주실 때에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하시며, 각각 베드로가 사랑의 고백을 할 때, 새롭게 사명을 주십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어떻게 말씀했는지 기억하세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Feed my lambs. Take care of my sheep.)
예수님은 여기서도 1인칭 소유격을 사용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말씀하실 때도, 내 교회라고 하셨고, 양을 말씀하실 때에도 내 양이라고 하시면서, 교회에 대한 소유권을 강하게 주장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는 항상 카리스마적인 사람 중심이 아니라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어떤 리더십이 좋은 리더십인가?
요즘에 리더십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사용되고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용어를 사용할 때에도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한 것처럼, 세상적인 의미의 리더십(또는 제왕적인 리더십)을 좋은 리더십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듣는 이야기가, “정목사는 리더십이 부족하다, 카리스마가 없다”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저는 이 말을 들을 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는 리더십은 어떤 카리스마적인 리더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년 전 2007년 2월에 제가 우리 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그 때 부임하면서 제가 처음 한 말이 있는데, 여러분 중에 기억하는 분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교회의 담임 목사는 제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교회의 담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목회를 운전에 비유하면서, ‘주님께서 운전석에 앉으셔서 인도하시고, 저는 조수석에 앉아서 주님의 뜻을 받들겠다’라고 했습니다. “왜 제가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알라바마로 오면서 겪었던 하나의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2월 초에 우리 차로 이사 오는데, 버밍햄에서 몽고메리쪽으로 오다가 차가 그만 고속도로에서 서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고속도로 길가에서 차를 세워두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날은 춥고 어두어져 갔습니다. 그때 경찰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렵게 견인차회사와 연결되어, 견인차가 와서 그 차에 실려 밤늦게 어번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직접 운전하지 않고 견인차의 조수석에 앉아 오면서,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번 오펠라이카한인 교회를 목회하게 하실 때, 내가 직접 드라이브하기 보다,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목회를 해야 하겠다, 라고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떤 목사님께서 어떤 리더가 참은 리더인가,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1) 참된 리더는 자기를 따르게 하는 리더가 아니라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도록 인도하는 리더이다, 라고 했습니다. 자기의 제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리더라고 했습니다.
2) 누가 진정한 리더인가는 그 리더가 그 교회에 있을 때보다 ‘ 언젠가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을 때 판명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중에 깨닫게 된다, 라고 했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를 안다’ 는 말이 있듯이, 누가 떠났을 때, 그 사람의 리더십이 평가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목회에만 적용된다고 보지 않습니다. 진정한 리더십은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습니다.
어느 공동체에서든지 내 영향력을 세우려고 하면, 결국 실패하는 것입니다. 누가 주인인가를 우린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목회든, 가정이든, 비지니스든,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맘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내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공동체에 덕을 세우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복하기로 할 때, 비로소 그 공동체는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마20:28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주장하는 자세로 사역하지 않았습니다. 섬기려 하였고, 마지막엔 목숨까지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감사) 저는 어제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 리더십을 생각해 봤습니다. 너무 감사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장로님들부터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권사님들, 안수집사님들, 부서장들, 목자목녀들이 다 예수님처럼 솔선수범하고 섬기는 모습으로 인해 감사가 나왔습니다. 지난 번 체육대회 때에 새벽부터 장로님과 안수집사님들이 나와서 섬겼습니다. 매주 토요일에 목장마다 나와서 청소하는 것도 너무 귀한 섬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왕권에 대해 두 견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 사무엘의 견해입니다. 백성들의 왕의 요구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이신데, 왜 인간 왕을 구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은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2) 왕에 대한 다른 견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견해입니다. 우리에게도 세상 나라처럼 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의견에 동의하시면서도 백성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왕의 제도의 위험성을 경고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무엇인가를 강하게 요구하면 허락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승락이라고 보시면 안됩니다. 허용은 하셨지만 기꺼이 승락하신 것은 아닙니다. 왕의 제도가 그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되심, 왕되심을 인정하고 그의 다스리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복된 삶이 있는데, 그 길을 외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세상적인 방식으로 살겠다고 할 때엔, 고통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좋은 왕이 세워지면 좋겠지만, 악한 사람, 악한 권력자가 세워지면 그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여러분의 인생의 왕입니까? 누가 여러분의 가정과 비지니스의 주인입니까? 누가 우리 교회의 머리이십니까?
우리가 부르는 찬양처럼,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 놓고’, 오직 주 예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삼상 8장 1~9절 / 이수영목사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사무엘상 8장은 이스라엘의 역사문헌 중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민족이나 나라들과는 달리 예언자나 사사 같은 인물에 의해 다스려지던 이스라엘이 주변의 다른 나라들처럼 왕에 의해 다스려지는 정치체제로 옮겨가는 문제를 처음 명시적으로 거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4-5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몰려가서 요구하기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합니다. 장로들이 왕정체제를 요구하면서 그 이유로 제시한 것이 두어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무엘은 늙었고 변방 브엘세바에서 사사로 있는 그의 아들들(본문 1-2절)은 행실이 그들의 아버지 같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 따르면 사무엘의 아들들이 자기들의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바르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장로들이 왕정체제를 요구한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모든 나라가 다 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장로들의 요구에 접한 사무엘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본문 6절은 장로들이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기의 생각과 감정에 따라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우리는 7-9절에서 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드러나는 이스라엘의 왕정체제 요구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우리는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왕정 그 자체를 악하고 부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왕정 그 자체를 악하고 부당한 것으로 여기셨다면 이스라엘에게 왕정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는 장로들의 말을 들어주라 하셨음을 봅니다(본문 7, 9절). 이것은 왕정 그 자체가 악하고 부당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참되고 유일하신 왕은 영원히 하나님뿐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잘 받들려는 왕이 있기만 하면 왕정체제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왕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고 악함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장로들이 왕정을 요구하는 구실로 사무엘의 나이 많음과 그의 아들들의 못된 행실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그들이 사무엘과 그의 아들들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7절 하반절을 다시 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앞서서 하나님께서는 왕정 그 자체를 악하고 부당한 제도로 보신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사실상 이미 왕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영원히 유일하고 진정한 왕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가 아니라 다른 나라들처럼 사람이 왕인 나라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하게 보신 것은 왕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왕인 왕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새로울 게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그동안 줄곧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로 기울어져온 이스라엘의 배신의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8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셋째는 왕을 달라고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왕정체제에서 백성에게 닥쳐올 위험성을 경고하시고 스스로 왕을 원한 일에 따르는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요구하는데 사람을 왕으로 삼는 제도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알기나 하고 왕을 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왕의 제도"라고 번역된 말의 보다 좋은 번역은 "왕들의 권리주장"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왕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이 치러야 할 대가로서 왕들이 그들에게 주장하고 강요할 사항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사무엘이 분명하게 경고했음을 우리는 본문을 뒤따르는 10-1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길지만 한 번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이렇게 왕을 가진다는 것이 백성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울 수 있는 일인지를 가르친 후에 사무엘은 한 가지 경고를 덧붙였습니다. 18절입니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실제로 이 경고는 훗날 솔로몬의 시대가 끝나고 르호보암이 다스린 시대부터 뼈아픈 현실로 나타났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습니다. 19절을 봅니다: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한 말 중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라는 말과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열방 중에서 택하신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백성 삼고자 하신 민족이었습니다. 다른 민족이나 나라들과는 달라야 하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뜻과 선택과 소명을 내던져버리고 다른 나라들 같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은 여태까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친히 싸워주셨고 그래야만 늘 승리할 수 있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전쟁이 아닌 자기들 스스로의 싸움을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왕을 갖겠다는 이스라엘의 요구는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고유성과 열방 가운데서 갖는 특별한 위치 대신 평범성을 요구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시는 사자가 이끄는 나라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원히 유일하신 왕 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요구는 단지 정치적 제도의 변화를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타락의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영도 아래 이집트로부터 나와서 그때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싸워 이긴 모든 전쟁은 하나님이 친히 앞장 서 싸우신 전쟁이라는 사실과 이스라엘은 큰 나라를 상대하든 작은 성읍을 상대하든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친히 싸워주셔야만 이길 수 있었던 역사를 망각하고 부인하는 일입니다. 점차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로 빠져 들어간 이스라엘이 그 불신앙의 역사 속에서 다시 한 단계 걸음을 내디디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어리석고 배은망덕한 막무가내적인 요구 앞에서 사무엘은 개탄과 분노를 금할 수 없었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21-22절을 봅니다: "사무엘이 백성의 말을 다 듣고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을 들어 왕을 세우라" 하시니 사무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성읍으로 돌아가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고와 함께 이스라엘에게 왕정을 허락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사람을 그들 위에 왕으로 세움으로써 당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그들의 죄과를 깨닫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끝까지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으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깊은 뜻에 따르신 것이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어떤 정치체제를 취하든 간에 하나님을 사실상의 참된 왕으로 받들고 그의 뜻에 따라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싸워주시고 이기게 하시고 지켜주시는 나라이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세상나라들과 같이 되려고 해서는 이스라엘이 존재할 이유가 없고 따라서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오늘날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뒤늦게 복음을 받아들인 이 민족이고 120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는 한국교회이지만 우리는 택하심을 받은 민족이라는 소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기독교인의 숫자가 전 국민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으므로 기독교국가가 될 수 없고 신정정치를 행할 수는 더더욱 없는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민족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민족이고 이 나라가 하나님께서 세워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하신 나라라는 확신과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민족과 이 나라는 하나님께서 왕이신 민족이 되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어야 행복하고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을 확고히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이 땅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 나라 온 국민으로부터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가 자청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이 나라 구석구석에서 모든 일에 있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되고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튼튼히 서고 국민과 사회는 교회의 소리를 경청함으로써 이 나라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단절된 나라들을 동경하고 닮아가려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온 국민이 한 사람의 노예가 되며 한 사람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기쁨조로 전락하고 거짓 신을 만들어내어 온 국민을 우상숭배에로 몰고 간 끝에 나라를 통째로 파탄 낸 체제를 비호하며 함께 파멸의 길을 걷는 민족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집트의 억압통치의 고난과 설움으로부터 해방되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갔으며 소수약체민족이면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써 강대국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곤 했던 이스라엘이 세월이 흐를수록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숭배에 눈을 돌리며 다른 나라들처럼 되려고 함으로써 멸망의 길을 재촉했던 이스라엘의 전철을 우리는 밟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본제국의 침탈과 학정으로부터 해방시키신 이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북한의 공산정권과 괴뢰군의 기습남침으로 인해 사라질 뻔했던 위기에서 건져내신 이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교회와 주의 백성을 일으켜 세우신 이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선교사들을 뽑아 세워 전 세계에 복음의 전파자들로 보내시는 이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21세기에 온 세상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택하여 쓰시기를 원하시는 이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위에 서있고 그 은혜 안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민족과 이 나라를 하나님 앞에 배은망덕한 나라, 구별되지 않은 민족 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고 그의 뜻을 열심히 구하며 그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주권이 살아 역사하는 이 나라 이 민족이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일 것입니다.
왕의 출현
정용섭목사 / 삼상 8:4~11, 16~20
구약성경의 배경에는 유대 민족의 사회 발전과정이 나옵니다. 그들의 족장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활동하던 시절이 바로 씨족사회입니다. 씨족사회의 마지막은 야곱이 대 흉년을 당하여 대략 70여 명에 달하는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이주하는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4백여 년을 지내면서 인구수가 크게 늘었습니다. 후손의 한 사람인 모세가 유대 민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했고, 이어서 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영토 전쟁을 주도했습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지도자들을 사사라고 부르는데, 그 시대를 부족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사사는 사무엘입니다. 그 시기는 기원전 11세기입니다.
왕정 요구
사무엘은 늙은 한나가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바쳐서 낳은 아들입니다. 그런 사람을 ‘나실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실로의 성소에서 제사장 엘리와 함께 지내다가 엘리가 죽은 다음에 자연스럽게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유대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가 않았습니다. 강력한 지도 체제를 갖췄던 블레셋이 늘 위협적이었습니다. 블레셋이 유대의 열두 지파를 무력으로 공격할 때마다 위대한 사사들이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곤 했습니다. 백성들은 사사 체제로는 이런 곤경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대표 격인 장로들이 당시 제사장이자 사사였던 사무엘에게 와서 자신들의 의견을 전했습니다. 한 마디로 왕정을 시작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들의 주장을 5절이 이렇게 전합니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그들의 주장이 이해됩니다. 강력한 세력을 갖춘 주변 민족들은 대개 왕정 체제였습니다. 왕정 체제가 유대 백성들에게도 매력적으로 비쳤습니다. 당연합니다. 왕정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왕권이 왕 후손에게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왕은 왕권의 혈통을 지켜내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경제를 발전시켜야 하고,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이겨야 합니다. 왕을 중심으로 강력한 나라가 되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상비군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왕권의 강화와 직결됩니다. 사사 시대에는 상비군이 아니라 예비군만 있었습니다. 평소에 농사를 짓거나 양을 치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무기를 드는 겁니다. 사사들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이런 예비군을 데리고 블레셋의 정규군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여기 가나안에서 다른 민족들과 영토 분쟁을 벌이기 훨씬 이전인 이집트 시절에 이미 왕정의 힘을 경험했습니다. 이집트 백성들의 왕인 파라오는 신격화되었습니다. 나일강 유역에서 나오는 풍부한 농산물이 국력의 토대였습니다. 피라미드가 상징적으로 가리키듯이 이집트는 당시에 지중해 인근의 그 어느 나라보다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역사 경험이 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지금 당장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고 해서 유대 백성들은 왕정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약점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사무엘의 아들들이 백성들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무엘의 스승인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도 백성의 신임을 얻지 못해서 결국 사무엘이 지도자가 된 일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사무엘은 장로들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장로들이 사무엘 자신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분 나빠했는지 모릅니다. 담임 목사에게 장로들이 이제는 다른 목사를 데리고 와야겠다고 말하는 상황과 비슷하긴 합니다. 평생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살폈던 사무엘은 더 본질적인 이유로 반대했을 겁니다. 그는 여호와께 기도했습니다. 기도 응답이 7~9절에 나옵니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이어서 왕정 체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관한 내용이 길게 나열됩니다. 그 내용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젊은 남자들은 군대에 가야 합니다. 군사비도 지출해야 합니다. 왕궁을 화려하게 지어야 하고, 왕을 보필할 관료를 둬야 합니다. 이게 다 세금으로 충당해야 할 일들입니다. 왕과 가족을 시중들 젊은 여자들도 필요합니다. 17절에는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백성들은 다른 나라처럼 왕이 있어야만 전쟁에서 잘 싸울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가 바로 왕정의 본질입니다. 로마 시대에도 전쟁 승리가 절대 이데올로기였습니다. 황제가 되려면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한 업적을 보여야만 했습니다. 왕정이 아니라 민주시대인 오늘날도 이런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정치 지도자를 백성들은 갈망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백성의 갈망을 이용합니다.
요담 우화
사무엘 시대 이전에 이미 유대의 왕이 되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기드온의 아들 중의 한 사람인 아비멜렉입니다. 사사 기드온에게는 70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부인도 여러 명이었습니다. 세겜이 고향인 여자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아비멜렉입니다. 기드온이 죽자 아비멜렉은 외가가 있는 세겜 사람들을 설득하여 왕이 됩니다. 그가 설득한 논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기드온의 아들 70명이 지도자가 되는 것보다는 세겜 출신의 어머니를 둔 자신이 왕이 되는 게 당신들에게 훨씬 좋은 거라는 논리입니다. 70명을 섬길래, 한 명을 섬길래, 하는 압박입니다. 거기에다가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라고, 즉 “우리가 남이가.” 하는 말로 설득했습니다. 그는 세겜의 왕이 되었고, 날을 잡아 기드온의 남은 아들들을 다 죽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왕자의 난이었습니다. 한 왕자만 용케 죽음을 면했습니다. 요담입니다. 그는 세겜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 왜 잘못인지를 우화 형식으로 전합니다. 삿 9:8~15절입니다.
나무들이 왕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감람나무에게 가서 “너는 우리 위에 왕이 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감람나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나니 내가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감람나무가 사람보다 낫군요. 나무들은 다시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단 것과 나의 아름다운 열매를 내가 어찌 버리고 가서 나무들 위에 우쭐대리요.” 나무들의 세계가 사람들의 세계보다 훨씬 수준이 높습니다. 나무들은 다시 포도나무에게 가서 부탁했으나 똑같은 이유로 거절당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갔습니다. 가시나무는 자기에게 복종하고 아부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대답합니다. 감람나무의 기름도 없고, 무화과나무의 아름다운 열매도 없고, 포도나무의 포도주도 없는 가시나무만 우쭐대기를 좋아하는 겁니다.
정곡을 찌르는 우화입니다. 그림에 자신의 영혼을 담는 화가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되어달라는 요구를 거절할 겁니다. 목회를 소명으로 받아 열심히 일하는 목사 역시 기업 총수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당연히 손사래를 칠 겁니다. 풀꽃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나태주 시인에게 대학교 총장이 되어달라고 하면 사양하지 않겠습니까. 대학교 행정 업무에 시달려서 시를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니까요. 지나가듯이 인터넷 뉴스에서 들은 말인데, 문재인 대통령은 다시 태어나면 농사를 짓든지 나무를 심는 사람이 되겠다고 합니다. 정말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정치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은 사람인데, 우여곡절 끝에 정치를 운명으로 받아들였을 뿐입니다. 자기 삶을 희생하는 중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으니, 대통령직 마무리를 잘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짓고 나무 심으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내기 바랍니다.
저는 정치를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치 혐오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생각은 현실적으로도 옳지 않습니다. 인류는 왕정에서 시작하여 봉건제와 민주 공화제를 거치면서 정치를 떼어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와 로마의 카이사르로 대표하는 권력의 맛을 포기할 수 없게 된 겁니다. 백성들도 간접적으로 그런 맛을 즐기려고 기꺼이 종으로 사는 걸 택합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최선은 정치 권력의 문제점을 주시하고 정치의 본질을 뚫어보며 끊임없이 대안적인 정치제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정치 영역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인생 자체에 해당합니다. 우리 개인도 부단하게 왕정 지향적으로 살아갑니다. 백성들이 왕을 원한다는 말을 들은 사무엘이 기도했을 때 들은 대답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무엘을 버리는 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유대 백성의 미래를 확실하게 지킨다는 사실을 알고 믿었다면 굳이 골치 아픈 왕정을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확신이 없으니 눈에 보이는 왕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신으로 섬겼던 일의 반복입니다. 유대 백성은 출애굽 이후로 반복해서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가나안의 신인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런 우상숭배의 결정판이 왕정 시도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사울이 왕으로 옹립되었습니다. 유대 백성은 전쟁의 소용돌이 안으로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구약성경이 보도하는 역사의 마지막은 유대 백성의 바벨론 포로였습니다. 그 포로 역사의 출발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신 왕의 출현이었습니다.
피조물의 절대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다.”(삼상 8:7)라는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마치 세속 왕과 경쟁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성경에 여호와 하나님은 분노하고 시기하는 분이라는 표현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런 표현은 모두 문학적 수사입니다. 문학적 수사와 실체적 진실을 혼동하면 곤란합니다. 유대 백성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들이 피조물을 절대화한다는 뜻입니다. 왕정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그것의 절대화에 대한 경고입니다. 피조물의 절대화는 우상숭배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파멸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무엇을 왕처럼 절대권력으로 믿고 종처럼 사는지를 보십시오. 어떤 이는 과학이나 돈이나 가족이나 쾌락을 절대화할 겁니다. 일일이 제가 거론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요담 우화의 표현을 따르면 우쭐대는 세력이 바로 절대권력입니다. 가장 노골적으로 우쭐대는 권력은 물론 정치입니다. 저는 정치인들과 가깝게 지내본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나, 언론에 나오는 몇몇 이야기만 보더라도 그들이 매우 우쭐댄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정치 권력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그들은 무슨 말이나 하고 무슨 일이든지 합니다. 자신의 권력의지를 실현하려고 국민을 도구로 여깁니다. 모든 정치인이 그렇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정말 겸손하고 자기 주제를 파악하고 상대 정치인을 인정하면서 품위 있게 정치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 분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전반적으로는 우쭐대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여긴다는 말은 이 세상을 실제로 통치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의 사랑이, 그의 선하심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고대 유대 백성도 자신들이 원하는 일들이 그대로 일어나지 않기에 하나님의 통치를 실감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삼상 8:8a)라는 문장을 보십시오. 홍해가 갈라지고, 만나가 내리고, 요단강이 멈추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런 일들도 하나님의 통치를 실감하게 만들지 못합니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게 불만스러운 겁니다. 세상이 불만스러우면 불만을 해결해줄 다른 대상을 찾게 됩니다. 다른 대상을 찾아도 문제는 계속됩니다.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도 여전히 곤란한 일들이 나타나듯이 말입니다. 모두에게 불만이 없는 세상이 가능할까요?
저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도움이 될까 해서 요담 우화를 다시 짚겠습니다. 왕이 되기를 원치 않았던 나무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외부가 아니라 자신 안에서 찾았습니다. 남 앞에서 우쭐대는 방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 기름을 내고, 과일을 맺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런 일을 찾은 사람은 자기를 높이는 엉뚱한 일에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로 살면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이 안하무인으로 굴지는 못할 겁니다. 아무도 그들 앞에서 종이 되려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왕이 잘난체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 안에서 존재 근거를 찾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니까요. 그렇습니다. 그 창조의 기쁨이 충만한 사람은 다른 데에 자기 인생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걷고 청소하는 데서 존재의 기쁨을 안다면 조금 큰 집에 살거나 작은 집에 살거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약 밥 한 그릇만으로 충분한 기쁨을 누릴 줄 안다면 공연한 일로 다투지 않습니다. 이런 존재의 기쁨 끝자락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가 궁극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의 찬양을 부릅니다. 그분이 바로 생명의 세계에서, 또는 존재의 세계에서, 자유의 나라에서 왕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또는 무엇을 왕으로 섬기면서 사십니까? 여러분은 어디서 삶의 희열과 존재의 기쁨을 충만하게 느끼십니까?
예수님의 출생 전승에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천문학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마 2:2)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새로 태어난 아기를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바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도 왕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를 심문하는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마 27:11)라고 묻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왕 중의 왕(king of kings)라고 믿습니다. 그는 평화의 왕이고, 정의의 왕이고 사랑의 왕이십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실감 나지 않는 분이 혹시 이 자리에 계십니까? 안타깝지만 저의 설교는 여기까지입니다. 성령께서 그분들의 영혼을 선하게 이끌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누가 당신의 왕입니까?
전승문목사 / 삼상 8:19~22
똑같은 세상을 똑같이 사는 거 같아도 아닙니다. 인생을 행복하고 기쁘게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불행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어째서 누구의 인생은 행복한데 누구의 인생은 불행한 것일까요? 환경 탓일까요?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은 행복하고 좋지 못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은 불행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은 다 행복해야 하는데 그런가요? 아닙니다.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불행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반면에 좋지 못한 환경이라 할지라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겨운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행복하게 삽니다. 그러니까 행복은 환경의 탓이 아닌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요? 사실은 아주 간단한 문제입니다.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살면 행복한 겁니다. 정말 단순한 이치인데 이걸 잊고 살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불행해지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지 않아서 불행한 겁니다.
오래 전에 첫 목회를 하던 때의 일입니다. 저는 첫 목회를 강원도 삼척에 있는 두메산골에서 시작했습니다. 강원도 삼척시 가곡면 탕곡리 그곳이 제가 목회를 시작한 곳입니다. 동네사람들을 다 합쳐도 100명이나 될까 싶은 작은 마을입니다. 그런데 인근에 그 마을보다 더 작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마을 전체가 10가구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덕풍마을이라는 곳인데 자동차도 들어갈 수 없는 오지 중의 오지였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산길을 2시간이나 걸어야 하는 마을입니다. 그런데 그 오지마을에 교인이 한 가정 있었습니다. 남편은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저는 장애인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인이기는 해도 교회는 올 수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집에 한 달에 한 번 우리 부부가 심방을 가곤 했습니다. 2시간 동안 산길을 걸어서 심방을 간 겁니다. 심방을 가는 날은 배낭을 메고 그분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사가곤 했습니다.
그 부부는 원래는 그 동네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소아마비를 앓은 남편은 서울에서 피아노 학원을 경영하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런데 서울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오지마을을 찾아 홀로 내려온 분입니다. 그리고 그 아내는 우연히 그 마을에 들렸다가 남편을 만나 함께 살게 된 겁니다. 그 부부는 나이 차이가 아주 많이 났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20년 차이였습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두메산골 오지마을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날마다 찬양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 남편은 바하의 곡을 연주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바하의 곡을 연주하면 하나님이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그 집에 가면 피아노 연주를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 연주를 듣다보면 행복이 무엇인지 마음속까지 울려오는 듯 했습니다. 집은 흙집이고 연탄도 들일 수 없어 나무를 때며 살았지만, 먹는 것도 직접 농사지은 것들이 전부였지만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 다른 사람들도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같은 동네에서 얼마나 불행하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며 늘 술에 취해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자신들은 배운 게 없어서 이런 곳에서 산다고, 좋은 부모를 만나지 못해서 이러고 산다고, 그렇게 환경을 탓하고 남을 원망하면서 얼마나 불행하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분명 똑같은 환경에서 사는데, 누구는 행복한데 누구는 너무너무 불행하게 살았던 겁니다. 사실은 똑같은 조건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교인은, 그분의 성함은 정세근 성도인데 그분은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행복하게 사는데, 건강한 몸을 갖고 살면서도 불행한 사람은 불행했던 겁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건, 제가 볼 때는 스스로 그렇게 만드는 거였습니다. 게으르고 투덜거리고 늘 남의 탓만 하고, 어쩌다 돈이 생기면 술 마시는 거에 다 써버리고, 그러니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는 문제가 없는데 환경이 문제라고 생각한 겁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게 살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 건데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이게 정말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겁니다.
미스바의 승리가 있은 후 20여년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사무엘이 동분서주 하면서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습니다. 벧엘에서 길갈로, 길갈에서 미스바로, 미스바에서 다시 라마로.. 한시도 쉴 틈 없이 이스라엘 전역을 오가면서 최선을 다해 이스라엘을 다스린 것입니다. 무너진 이스라엘을 그렇게 차근차근 일으켜 세우고 있었던 겁니다. 사무엘의 그러한 노고 덕분에 이스라엘은 점차적으로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따로 군대를 조직하지는 않았지만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의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특별한 조직이 없어도 이스라엘은 아무런 문제없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군대가 없어도 경찰이 없어도 공무원이 없어도 문제가 없었던 겁니다. 오히려 국가 조직이 없으니까 세금도 없었습니다. 또한 군대가 없으니 강제징집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겁니다. 특히 위대한 선지자, 위대한 사사, 사무엘이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니까 전혀 문제가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20여년이 흘러갔습니다. 사무엘의 통치하에 나라가 잘 운영되며 백성들이 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겁니다. 어느 새 30대였던 사무엘도 50대가 되었습니다. 사무엘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요엘과 아비야였습니다. 사무엘이 나라의 변방에는 그 아들들을 보내 통치를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당시 사무엘의 공식적인 직함은 사사(士師)였습니다. 사사는 말 그대로 재판을 관할하는 법관 곧 판사였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결을 내려주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사무엘이 아들들에게 맡긴 일도 그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아니면 실수를 했는지 아들들이 제대로 판결을 하지 못한 겁니다. 그것도 그만 뇌물을 받은 겁니다. 뇌물을 받고는 판결을 어긋나게 하는 바람에 문제가 된 겁니다 :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그러자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사무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의 나이는 아직 50대 중반 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늙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들들의 잘못을 빌미로 사무엘에게 물러나라는 겁니다. 사무엘은 물러나고 다른 나라들처럼 이스라엘에도 왕을 세워달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그 영토가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로 정해져있습니다. 단이 가장 위쪽이고 브엘세바가 가장 아래쪽인 겁니다. 사무엘이 아들들에게 다스리게 한 지역은 브엘세바였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 변방 가장 아래쪽 지역이 그들이 다스린 지역이었던 겁니다. 나라의 중심부는 여전히 사무엘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20여 년 동안 아무 문제없이 아니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안전하게 잘 다스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무엘에게 물러나라는 겁니다. 저 멀리 변방 브엘세바에서 아들들이 실수를 했으니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겁니다. 얼마나 기막힌 요구입니까? 배은망덕도 유분수라 했는데 정말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에게도 왕을 세워달라고 했습니다.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다른 나라처럼 왕이 다스리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제 사무엘이 다스리는 건 그만하고 왕을 세워달라는 겁니다. 사무엘이 때마다 일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는 건 그만하고 세속적인 왕을 세워 세상 나라들처럼 통치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은, 다른 나라가 더 좋아보였던 겁니다. 이스라엘보다 다른 나라들이 더 좋아보였던 겁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는 나라보다 세상의 왕이 자기 뜻대로 통치하는 세상 나라가 더 좋아보였던 겁니다. 사실은 하나님도 이미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사무엘의 후계자로 다윗 왕을 계획하고 계셨던 겁니다. 하나님도 알고 계셨던 겁니다. 이제는 이스라엘도 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 다윗을 예비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러니까 기다리면 되는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때가 되었을 때 적절하게 이루실 일이었던 겁니다. 사무엘이 은혜 가운데 잘 물러나면 그 뒤를 다윗이 이을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 우리의 모든 필요를 너무너무 잘 아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게다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마다 일마다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이 그러지 못한 겁니다. 그들은 세속적인 왕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이루어줄 왕을 원한 겁니다. 사실은 그것이 이스라엘이 불행해진 원인이었습니다. 사사시대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이 불행하게 살았던 진짜 원인인 겁니다. 사사기는 두 번이나 이렇게 말씀합니다 -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사사기 17:6 21:25)” 그랬습니다. 그 때에는, 사사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 자기가 보기에 옳은 대로 행동한 겁니다. 그게 사사시대입니다. 그래서 가장 암울하고 가장 불행하고 가장 힘들었던 시대인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무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무엘을 보내주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주셨던 겁니다. 그런데 그게 싫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건 싫고 다시 사사시대처럼 살겠다는 겁니다. 아니 다른 나라들처럼 인간의 왕을 세워 자신들 마음대로 살겠다는 겁니다. 사무엘은 그들의 요구를 접하고는 너무너무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엎드려 기도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전혀 뜻밖의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했을 때에 사무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참으로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사실은 에덴동산에서부터 재림의 날까지 계속해서 이러는 겁니다. 선악과를 범한 날부터 오늘까지 계속해서 선악을 주장하는 겁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뜻을 고집하는 겁니다. 중요한 건 그걸 하나님이 용인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가는 걸 하나님이 용인해 주시는 겁니다. 이분이 하나님입니다. 떠나겠다고 하면, 버리겠다고 하면, 버리고 떠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겠다면, 떠나게 허락하시는 분인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다고 다 괜찮은 게 아닌 겁니다. 성도는 이걸 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한다고 곧바로 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고집을 부리면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다만 그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고 고집을 부리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결과를 책임져야 하는 겁니다. 고집을 부리고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려주라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왕을 세우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하나하나 설명했습니다. 우선 강제로 군사를 징집하고 인원을 동원하고 신하로 삼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각종 세금을 거두어들일 것이고 무엇보다 가혹한 폭정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경고한 뒤에 사무엘이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세상의 왕을 세우면 그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합니다. 그 때는 기도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책임은 고스란히 다 감당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가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는 이 모습이 여러분의 현실은 아닌가요? 그렇다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합니다. 과연 나의 왕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돌아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님이, 나의 왕이 맞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책임지실 겁니다. 어떤 문제든 어떤 어려움이든 하나님이 다 책임지실 겁니다. 그러면 믿고 기다리면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의 왕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
결과는 고스란히 스스로 책임져야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왕인지는 스스로를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나는 누구 뜻대로 하는 사람인가요?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돈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인가요? 돈이 된다면 얼마든지 말씀을 어길 수 있는 사람입니까? 돈이 된다면 주일도 범하고 십일조도 안 바치고 그러는 사람인가요? 혹은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입니까? 남편이 시키면, 아내가 시키면, 직장 상사가 시키면, 그대로 다 따르는 사람인가요? 악인들의 꾀를, 죄인들의 길을, 오만한 자들의 자리를, 따라가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의 왕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의 왕은 돈이고 사람이고 세상인 겁니다. 그러면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똑같은 세상에서 똑같이 한 평생을 살아도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고 불행한 사람은 불행합니다. 이건 절대로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왕입니다. 누가 왕인지 누가 다스리는 것인지 그것이 중요한 겁니다. 여러분의 왕은 누구입니까?
사무엘상 8장 1-9절
묵상 내용
1. 사무엘의 아들들의 타락 (1-3절)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 요엘과 아비야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했습니다. 이는 영적 지도자의 후계자 준비의 실패와 지도자들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줍니다.
2. 이스라엘 장로들의 요구 (4-5절)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나아가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주변 나라들과 같이 눈에 보이는 왕을 통해 안전과 통일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요구였습니다.
3. 사무엘의 반응과 기도 (6절)
사무엘은 이 요구를 듣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그는 백성들의 요구가 잘못되었음을 알았고, 이를 하나님께 토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중요성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응답과 진단 (7-8절)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인도함을 받은 이후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긴 결과입니다.
5.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9절)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백성들의 말을 듣되,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선택이 가져올 결과에 대해 분명히 알고 선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 의지를 존중하시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6.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의 왕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신 신정 정치를 버리고, 인간 왕이 다스리는 군주제를 원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안정을 찾으려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왕은 완벽하지 않으며, 종종 부패와 억압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7.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
오늘날 우리도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보다는 세상의 방법이나 물질적인 것에 의지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의 통치 아래 있을 때에만 참된 평안과 안전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적용
이 말씀을 통해 내 삶의 왕은 누구인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혹시나 하나님보다 세상적인 것들이나 나 자신의 욕심을 왕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다짐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통치 아래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길 원합니다.
또한 주변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왕 되심을 전하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싶습니다.
기도
이 되시고 왕이 되십니다. 그렇기에 저는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때가 너무나도 많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매일의 삶이 제가 왕이된 삶이 아니라 참된 왕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