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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영원한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모든 민족들을 모아들이신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1-5
1 아모츠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환시로 받은 말씀.
2 세월이 흐른 뒤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리라.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3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4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5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13,11-14ㄱ
형제 여러분, 11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12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13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14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는 준비하고 깨어 있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7-4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7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38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39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40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42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43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4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모든 민족들이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의 신자들에게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예고 없이 올 것이므로 늘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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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모든 민족들이 밀려들고 민족들이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으리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니 늘 깨어 있으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한겨울 매서운 추위에는 봄날의 햇살을 기다립니다. 한여름 숨막히는 더위에는 가을의 선선한 바람을 기다립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에서 기다림을 경험합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인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이날을 시작합니다. 이 기다림은 어떤 특징이 있을까요?
제1독서는 메시아 임금에 대한 기다림을 예언합니다. 그날에 하느님의 심판이 메시아 임금에게 전해질 것인데, 많은 백성 사이에서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으로 모두 모일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분의 길”,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라는 표현은, 신앙인이 삶 안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덕목으로 하느님의 말씀인 율법을 제시합니다.
한편 제2독서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지금은 구원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잠에서 깨어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고 새로운 삶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분의 재림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라고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 들에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맷돌질을 하던 두 여자의 이야기처럼 당신의 재림도 갑작스럽게 닥칠 것이니 늘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 안에서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을 재확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삶과 실천으로 늘 깨어 준비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만남을 기다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아기 예수님을 기다립니까?(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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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시기를 맞이하여 빛으로 오시는 주님을 뜨겁게 기다립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시대의 종말에 관한 이사야의 환시를 들려줍니다. 세상에는 평화에 대한 강한 열망이 있지만 끊임없는 갈등도 많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평화를 멀리하고 많은 슬픔과 불행과 함께 고통을 자아냅니다.주님께서는 화해를 이루시는 분, 평화의 사자로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하느님의 뜻, 곧 구원과 평화, 정의와 사랑의 길을 알려 주시러 오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전하는 이사야는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하고 초대합니다.제2독서에서 바오로도 똑같은 가르침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육체적인 잠이 아니라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는 일이 절박합니다. 육과 육이 주는 쾌락을 따르지 않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밤이 물러가고 새날이 밝아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관심이 없음을 지적하시며 그분의 오심을 깨어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예수님께서는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시대의 징표에 관심 없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거나 실천하려는 마음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쾌락에 젖어 살았던 홍수 이전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보인 행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우리는 각자의 본능과 사악한 경향에 휘둘리지 말고 올바른 방향, 곧 하느님과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 언제 와도 당황하지 않습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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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오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삶 안에, 그리고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어느새 우리 곁에 서 계십니다. 새로운 눈을 뜨고,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준비한 사람만이 그분의 현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큰 희망이 없는 순간에 다가오셨습니다. 세상에 아무런 의미가 없던 조그만 백성은 하느님을 말씀이요 재판관으로 맞이하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어, 세상에 종교적 영적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작품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고, 이처럼 보잘것없고 미천한 백성이 하느님의 계획을 알아채고 따르는 것은 신앙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하느님의 오심을 알아차리고자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오늘 복음서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는 일들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시각으로 깨어 있으면 부르심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노아의 시대에 홍수에 휩쓸려간 사람들과 같은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삶은 점점 더 정형화되어 가고 ‘컴퓨터화’되어 갑니다. 모든 것이 계산되고 계획된 삶에서 삶의 여백은 점점 줄어 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휘저으러 오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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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두 가지 방식으로 오십니다. 첫 번째는 ‘숨어서’ 오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강생은 비천한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뒤에도 숨어서 오십니다. 곧 그분께서는 가장 보잘것없는 이의 모습으로 오시며(마태 25,40 이하 참조),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그분의 이름으로 함께 모였을 때에도 그 자리에 오십니다(마태 18,20 참조). 성체성사를 통해서 오시는 방식도 숨어서 오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영광 속’에 오십니다. 당신의 권능으로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러 오시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님의 ‘재림’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오시면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소돔에서 일어난 일이 벌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르지 않고 비슷한 처지에서 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 따라 어떤 이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이 심판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숨어서 오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자 평소에 노력했던 사람은 분명코 그분께서 영광 속에 오시더라도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영광에 싸여 오시는 예수님을 더욱 기꺼이 맞이하며 반길 것입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하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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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말합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어쩌면 우리 생애는 기다림의 연속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다림 속에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인생 4고(四苦)가 들어 있고,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의 7정(七情)이 모두 열거되어 있습니다. 이런저런 기다림은 언제나 인생에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깁니다. 그러나 그런 흔적마저도 말끔히 씻어 주시고, 눈물마저 씻어 주시며, 당신의 생명에 참여시켜 주실 분을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설레는 일이겠는지요?
이사야 예언자는 그분에 대해서 예언합니다. 그분께서는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고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스러운 광경입니까? 그것을 인류에게 주실 분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는 참으로 많은 기다림을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이 체험은 언제나 새로움을 가져다주며, 사람을 새롭게 변화시켜 줍니다. 그러나 기다리지 못하고 현실에만 안주하며, 보이는 것에만 급급하게 매달리는 사람에겐 더 이상의 새로움이란 없을 것입니다. 새로움이 없다면 변화된 삶을 꿈꿀 수 없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러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뵐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불행한 사림이겠는지요! 깨어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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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많은 기다림을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설레는 기다림도 있었고, 피하고 싶은 기다림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그 모두는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든 사건이든 밝은 관계는 기쁨을 남겼지만, 어두운 관계는 활력을 앗아 갔습니다. 기다림은 어떤 형태로든 인생에 의미를 남깁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럴 때에는 주님과 맺은 관계를 잊고 살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린이들은 기도를 잘합니다. 기도하자고 하면 금방 눈을 감고 중얼거립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순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큰 힘을 지니셨고, 어머니처럼 사랑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의 이러한 마음이 기도를 쉽게 하도록 합니다.
믿음은 관계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러니 주님과 맺은 관계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 인생에 들어와 계시는 그분을 만나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대림 시기의 첫 번째 기다림은 이러한 주님을 느끼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에 한 해가 가고 새해를 맞는 길목에 성탄 시기가 있습니다. 새롭게 새해를 시작하라는 메시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실 것입니다. 아기와 맺는 관계를 어렵게 생각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우리의 뇌는 기본적으로 게으른 욕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피곤하면 꼼짝도 하기 싫습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 뇌를 쉬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쉬고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뇌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움직이고 창의적인 활동을 하면, 뇌면 ‘어쩔 수 없구나, 차라리 동조하자.’라면서 활동을 시작합니다.
과학자들은 이를 ‘뇌의 가소성’이라고 말합니다. 신경계의 구조와 기능이 변함에 따라 그에 적응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뇌 구조를 분명히 바꿀 수 있습니다. 만약 자신에게 유능하고 강하고 영리하다고 말하면 뇌는 그에 따라 행동하지만, 반대로 자신에게 무능하고 약하며 똑똑하지 않다고 말하면 뇌는 문자 그대로 그에 적합한 수단을 취합니다. 결국, 자신을 향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그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히 긍정적인 말을 통해 우리는 건강까지도 얻을 수 있습니다.
킹스 칼리지 런던의 정신의학과 심리학과 신경과학 연구소에서 실시한 연구에서 부정적 생각을 반복하면 알츠하이머에 걸릴 위험이 크다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주님께서 강조하셨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해서 더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을 실천하는데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다. 자신의 만족만을 채워줄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언급하신 노아 시대의 사람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홍수로 모두 휩쓸어 갈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 육신을 위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노아와 같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노아의 방주에 탄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종말 때에도 교회라는 방주에 탄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을 날을 안다면 분명 남은 시간 동안 잘 살려고 열심히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특별한 시간만 열심히 살게 하지 않으시려고 그날과 그 시간을 알려주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노력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하며, 늘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은 날마다 기쁨이고 기적입니다(크리스토퍼 디브).
우리와 함께 하는 관계
미국에서 14만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 결과는 하루에 6~7시간씩 친구나 가족과 교제하는 사람의 행복도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월등하게 높다는 것입니다.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가 자신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제시합니다.
1. 명확한 메시지 전달.
2. 경청.
3. 피드백 주고받기.
4. 공유하고 싶은 것을 항상 염두에 둘 것.
5. 현재에 충실할 것.
6. 질문할 것.
7. 몸짓 언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
8. 말투에 주의할 것.
9. 설교하듯 하지 말고, 담소하듯 편하게 말할 것.
10. 긍정적인 피드백을 할 것.
11. 낯선 사람에게도 인사할 것.
풍요로운 삶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웃과 함께 하는 관계의 변화는 반드시 필수적입니다.
세상의 옷을 벗고, 불멸의 옷, 예수 그리스도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또 다시 맞이한 대림 시기, 첫번째 주일 독서들과 복음 말씀을 쭉 읽고 묵상하다가 유난히 눈길이 가는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품위’라는 단어였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서 13장 12~14절)
품위라는 단어를 접하니 많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분의 제자로서,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에 걸맞는 품위나 품격을 갖추고 살아가고 있나?’ 반문해보니 더욱 큰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저뿐만 아니라 적지않은 분들이 품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국민의 지도자요 대변자, 봉사자로서 그에 걸맞는 품위는 기본인데, 품위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모 정당 국회의원들은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품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인간 존재로서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나 예의범절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찌 그리 똘똘 뭉쳐 집단적 천박함과 몰상식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지 안타깝습니다. 너무 신기한 것이 백명도 넘는 그 많은 분들 가운데, 품위는 고사하고 평범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분이라고는 단 한명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꿈꿉니다. 품위있는 삶, 품위있는 언어, 품위있는 행동, 품위있는 노년, 품위있는 죽음...그러나 백방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품위는 커녕 추악함과 천박함만 덕지덕지 남게 됩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자신의 신학 사상을 나름 정리합니다.(사상편: 1장~11잘) 이어서 그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의화되 그리스도인으로서 윤리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훈계합니다.(훈계편: 12장~16장)
훈계편에서 바오로 사도는 의화된 그리스도인에게 걸맞는 행동거지,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생활 방식에 따른 새로운 삶, 다시 말해서 성령에 따른 행동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시대’‘결정적인 시점’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강조합니다. 그 때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때이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입니다.
주님 재림은 역사의 밤과 낮은 가리는 결정적인 분기점입니다. 따라서 재림이 가까이 다가오면 인류 역사의 밤은 종말을 고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립니다. 그때 모든 죄악은 사탄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선과 의가 구현되는 때이므로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죄와 저주 상태에서 의화와 구원의 상태로 변화됩니다.
새로운 세상, 결정적인 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상의 옷, 어둠의 옷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대신 빛의 갑옷, 불멸의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일일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매사 매 순간 그분께서 나와 동행함을 강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과 나는 따로 따로가 아니라 일심동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갑옷으로 바꿔입는 과정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낡은 옷, 과거의 남루한 옷, 옛사람의 옷을 미련없이 훌훌 벗어던지는 일입니다.
낡은 옷을 벗는 행위는 자신의 지난 죄와 허물을 깨닫는 일, 회개하는 일, 새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의 새로운 탄생으로,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 십자가에 의한 새로운 탄생입니다.
깨어있음은 사랑을 삶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늑대가 양 무리의 어린양을 자신의 저녁식사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무리에 끼어 있으면 그 양을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 인척 흉내 내며 늑대 무리에 잠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 지난 해 내 욕하고 다녔지?”
어린양이 대답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그러자 늑대가 말합니다.
“그러면 네 형이었나 보지.”
“전 형이 없는데요?”
“그러면 네 가족 중에 누구였을 거야.”
“저희 가족은 남의 험담을 하지 않아요.”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어린 양인 자신이 무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늑대는 양에게 이렇게 말하고 잡아먹었습니다.
“어, 상관없어. 이젠 저녁시간 다 됐거든.”
우리 안에 우리를 깨어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자꾸 말을 시키면 나는 정신없이 그것과 대화하다가 무리를 이탈하고 맙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체로키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그는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싸움이어서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도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인데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분개 자기연민 죄의식 열등감 거짓 허영 잘난 체하고 자신의 거짓자아를 나타낸단다.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이놈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선의 고요함 겸손함 동정심 관대함 진실 연민 신뢰를 나타낸단다. 이 같은 싸움이 네 안에서도 일어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도 일어난단다.”
손자는 잠시 동안 그 말을 생각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 노인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우리 안에는 항상 두 목소리가 있습니다. 한 목소리는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라는 것이고, 한 목소리는 이웃을 죽여 나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한 목소리는 나의 생존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이웃이 나를 이용해 이득을 보게 하라는 목소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한 목소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자기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라는 목소리와 대화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목소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그 목소리를 내는 것에게 영원히 잡아먹힙니다. 그 상태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늘 깨어 있지 못한 것의 결과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의 첫 날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나타나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알려주러 오신 목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고도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400m에 출전한 에릭 리델은 예선에서 최고의 기록으로 수립, 금메달 획득이 유력했습니다. 그는 예선 때 출발선에서 흑인 선수와 악수를 나누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습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망의 결승전이 주일에 열리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러자 리델은 주저 없이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과 인간 평등의 정신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원칙으로 삼고 살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엔 예수님께서 오심이 곧 심판이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마치 노아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방주를 만들었는데 다른 이들은 그 목소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배를 짓지 못한 이들은 심판 때 모두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아버지, 성모님을 어머니로 하는 가족공동체를 꾸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살아온 사람은 마지막 때에 그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태어납니다. 매 순간이 작은 심판인 것입니다. 내가 어느 목소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지옥의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깨어있음이란 원칙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 원칙이란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원칙을 깨고 누군가 미워지는데도 용서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배를 만들지 못해 결국 물속에 잠기고 맙니다. 노아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배를 만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인 사랑을 지켜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될 방주를 만들어야합니다. 사랑의 계명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사는 사람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목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 별처럼 내 마음 깊은 그곳에
고요히 밝아오는 빛의 향기로 우리 사랑은 영원히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내 마음 깊은 그곳에
마르지 않는 샘물 되어 흐르오, 우리 사랑은 영원히
때로는 외로움에 눈물지어도 그대 나에게 등불이 되어
말 없는 눈빛으로 기도해 영원한 우리 사랑을 위해
나 이제 당신 위해 꽃을 드려요. 눈빛 순결한 사랑에
고요한 두 마음이 두 손을 모아 영원한 사랑을 위해.”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 별처럼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지친 이웃에게 희망의 등불, 사랑의 등불이 되면 좋겠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선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듯이, 우리도 주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것이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거주자 등록증’입니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면담하였습니다. 전산에 문제가 있어서 보통은 1주일이면 나오는데 1달 정도 걸렸습니다. 거주자 등록증이 있으면 미국에서 취업할 수 있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저에게 직원은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이주민 센터에도 신자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운전 면허증’입니다. 비자, 거주자 등록증, 신용카드가 있으면 필기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필기시험을 마치면 2주 정도 지나서 임시 운전 면허증이 발급됩니다. 1달 정도 기다리면 실기시험이 정해집니다. 감독관인 경찰이 신자였습니다. 제게 미소지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긴장은 되었지만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사제복을 입고 가서 좋았습니다. 사제복 뒤에 계신 하느님의 힘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성사 집전 허가증’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속지주의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사목하던 사제는 현지 교구의 교구장에게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교구장이 서면으로 요청합니다. 제가 속한 브루클린 교구의 교구장님이 성사 집전 허가증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조건은 다 갖추었습니다. 남은 건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 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수학,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미는 진, 선, 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 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깨어 있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 있는 걸까요? 가치의 차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대림 제1주일 2020년 서울대교구장 사목교서 요약 (가해) 마태 24,37-44; ’19/12/01
“새로운 시대, 새로운 복음화”
-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본당 공동체 -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구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복음화를 이루기 위하여 신앙의 기초를 다지고자 노력해왔습니다. 2020년에는 가정이 맺은 열매를 바탕으로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본당 공동체’를 만드는 데 힘을 모으고자 합니다. 그리고 2021년에는 교구의 모든 신자들과 본당 및 기관이 힘을 모아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교구 공동체’를 이루려고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는 2019년 전교주일 담화문에서 “저는 언제나 선교사이고, 여러분도 언제나 선교사입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선교사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세례를 받은 우리 모두가 무엇보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본당 그리고 사회 안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복음을 체험하고 전하는 선교적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본당 공동체는 복음을 전하고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선교적 노력을 통해 세상 속에 복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의 참된 성사(聖事)가 될 수 있습니다. 이제 올 한 해 ‘복음의 기쁨을 선포하는 본당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다음의 세 가지 측면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본당은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본당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화되고 복음화하는 공동체’입니다. 다시 말해 본당은 ‘복음의 기쁨을 믿고, 체험하며,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신앙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는 알게 되었고 또 믿게 되었습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라고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요약하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본당 공동체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둘째, 본당은 ‘하나 되는 공동체’입니다.
본당은 복음의 기쁨으로 하나 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평신도, 수도자, 성직자가 화목한 한 가족을 이루는 모습이야말로 ‘살아있는 복음의 증거’이며, 세상을 ‘복음화하는 삶’이 됩니다. 아울러 본당의 여러 가정들, 다양한 세대들, 소공동체들, 교회 운동과 단체들이 조화를 이루게 될 때 본당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기쁨 안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본당 공동체는 진리를 목말라하는 모든 사람들이 목을 축일 수 있는 ‘동네 샘’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평신도 그리스도인’, 27항).
셋째, 본당은 ‘선교하는 공동체’입니다.
본당은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선교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급변하는 세상 가운데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 됩니다. 때로는 그 도전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질 때도 있을 것이며, 사람들의 냉대와 무관심 등으로 인해 두렵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도전 앞에 우리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마음을 모아 복음을 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는 풍성한 열매를 맺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본당이 각 지역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증거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사제 여러분, 교구장 주교인 저와 일치하는 가운데 사목활동 안에서 선교를 위한 노력에 더 힘을 기울입시다. 본당 신자들뿐 아니라 구역 안의 다양한 사회복지 시설, 학교, 병원, 관공서 등에도 더 큰 관심을 가져주십시오. 특히 독거노인이나 이주민 등과 같은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돌봄에 힘써주십시오. 본당 구역 안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기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찾아가는 사목’에 힘을 기울여 주십시오.
남녀 봉헌 생활자 여러분, 여러분의 고유한 신분 안에서 선교에 충실합시다. 여러분의 기도와 고유한 활동을 통해 선교를 지향하고 노력하는 사목자들의 좋은 협력자가 되도록 힘써주십시오. 또한 선교의 바탕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시작되어야 함을 알 수 있도록 본당의 신자들에게 기도와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십시오.
신자 여러분, 가정을 비롯한 학교, 직장, 각종 모임뿐 아니라 본당과 지역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갑시다. 자신의 재능, 시간, 그리고 가진 바를 복음화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도록 합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첫 시작부터 지금까지 복음화를 위해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을 증거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는 말씀처럼 우리 교구의 모든 본당 공동체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기쁨을 체험하고 나누며 전한다면 진정 선교의 공동체, 복음화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교구의 모든 본당 공동체가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공동체가 되도록 여러분을 위해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는 주님의 말씀이 올 한 해 각 본당 안에서 더욱 풍성히 열매 맺기를 바랍니다. 이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 공동체를 넘어 세상 곳곳에 ‘복음의 기쁨’이 도달하는 길이 될 것이고, 2031년에 맞이하게 될 ‘교구 설정 200주년’의 마중물이 될 것입니다.
♱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증언한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이 땅에 복음의 빛을 전하신 한국의 순교자들,
◉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돌아올 것이 또 돌아오고야 말았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교회력으로 새해가 밝아왔다. 긴 신앙의 여정, 순간 순간 성탄과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경축하며,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경배하며, 예수성심과 성체와 성혈을 흠숭하고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에 감사드리며 성모님 마음을 해아리며 연중 34주일을 살아왔다. 드디어 돌아올 것이 또 돌아오고야 말았다. 교회력으로 새해인 대림제1주일을 맞이하고 있다.
하루를 시작하며 새롭게 시작했고, 한달을 열며 새롭게 시작했다. 그렇게 살았기에 또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먼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만난 예수님이 계셨다. 함께 걸었던 사람들 덕분에 예수님을 만났고 나에게 구원의 시간이 있었다. 매일의 시작이 기다려지고 설레인다. 이는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가 되었으며,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였다.
또 주어진 시간으로 또 주님과 함께 먼길을 가자. 그 먼길 걷다가 사람들 만나고 그 속에서 구세주 예수님 만나고 회개도 했고 그리고 깨어있었다. 인생은 머리 속에서 생산한 뜬구름 잡는 미사여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이다. 사람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먼길을 걸어 보아야 예수님도 만나고 회개도 한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4,42).
사람의 아들의 오심
곽승룡 비오 신부님
오늘 복음은 종말 이야기를 한다. 마태오가 전하는 종말이란? 우리에게 시대의 긴박성이 나타나고 있기에, 지금 내가 깨어 있어야 한다고 전한다. 지금이 내가 깨어 있는 그때인데 ‘때’란 하느님 구원계획의 충만함이 드러나는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마태오가 말하고 있는 종말에 관한 비유들은 ‘준비하고 깨어있음’에 대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다.
‘준비하고 깨어있다’는 것은 회개와 보속을 하는 공간으로서 세상을 제공한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는 우물 밖의 공간을 알지 못한다. 그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유익하지 않다.
결론은 장가, 시집가는 것도 유익하지 않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일까 ‘늘 깨어 있어야 한다.’ 재앙이 노아 때 같이 갑자기 온다. 깨어 있되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인간들의 생활이 하느님 없이 모두 무겁게 사는 것과 깊이 관련된다.
목적 없이 세대가 가고 있는 듯하다. 의미, 미래, 목표를 향하는 목적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새로운 해를 위한 대림시기 시작에 교회는 우리를 하느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도록 분명하게 제안하고 있다.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또 상상 할 수 있다. ’끝’은 신적인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변모라는 신적인 것이다. 그렇게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가 유일성, 현실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에서 선포되고, 거행되며, 따랐던 ’신비’ 안에서 사는 그런 현실을 지금 준비하는 순간이다.
구요비 주교님
제가 서울 포이동본당에서 사목할 때 한 복사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초등학생 안토니오가 동화책을 읽다가 주인공 어미 토끼가 어린 새끼 토끼들을 남겨둔 채 죽는 대목에서 “아니 그러면 나를 사랑해 주는 엄마도 돌아가신단 말인가!” 하고 소리쳐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무려 3일간이나 식음을 전폐하고 깊은 슬픔에 잠기더랍니다.
어머님은 당신이 아는 온갖 교리 지식을 다 동원하여 “우리는 죽더라도 영원히 산단다!”라고 설득하였고 그제야 아이는 겨우 울음을 그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불교의 창시자 싯다르타가 젊은 시절에 생로병사(生老病死) 안에 깃들어 있는 인간의 실존적인 고통을 통찰한 지혜가 떠올라 어린이 미사 중에 “우리 안토니오는 천재다! 종교적인 천재야!”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오늘 대림절을 시작하는 첫날에 주님의 재림(parousia)을 깨어 준비하는 삶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죽음으로 운명 지어진 인간의 기본 처지를 번뇌와 슬픔으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노아의 홍수 때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상기시켜 줍니다.(마태 24,37-39)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매일 겪고 있는 일상의 삶을 여실히 밝혀 줍니다.
특별히 한국 사회에 만연한 끔찍한 재난 사고 앞에서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한 채 소홀히 대하고 살아가는 시민들의 안전의식 불감증과 국가 기관들의 감독 소홀과 늦장 대응에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물질적 풍요가 안겨주는 소시민적인 안락함과 유물(唯物)주의에 온전히 매몰되어 ‘지금 여기’의 삶이 전부인 양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그러니 깨어 있어라!’(마태 24,42)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도 창조하셨기에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현재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시간관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갈파하였습니다.
“따라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세 가지 시간이 있다고 말함이 옳지 못할 것이요, 차라리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가 영혼 안에 있음을 어느 모로 알 수 있으나 다른 데선 볼 수 없사오니, 즉 과거의 현재는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입니다.”(고백록 11권 20장)
그렇다면 이 영원한 오늘이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금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시고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신 주님(묵시 3,20)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감각적인 온갖 유혹과 우리의 영혼을 헷갈리게 하는 이 세상의 그릇된 사조(思潮)와 악령(惡靈)에 대항하는 영적인 투쟁(에페 6,10-20)을 용감히 받아들이고 사는 나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12)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초등학생 시절 독립기념관에 갔을 때,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를 보고 충격을 받아 며칠 동안 잠을 잘 못 이루지 못했었다.
미물도 해방을 원한다. 그러니 이성과 자유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해방은 곧 생명이다.
외적인 해방만해도 큰 기쁨을 준다. 그러나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해방은 내적 해방, 즉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러 오신다.
대림 시기에 회개를 강조하는 것은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합당히 맞이하기 위함이다. 만약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며칠 후 우리집을 방문하신다는 것을 미리 안다면, 집만 말끔히 청소해놓을 것이 아니라, 당연히 영혼도 합당히 준비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미리 볼 것이다.
***
한국에서 보좌 신부를 할 때부터 대림 시기를 지내며 매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은 주님의 "마굿간에 오심"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우리가 완전한 사람이라서, 우리의 방이 깨끗해서, 우리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냄새나는 삶을 함께하시고자 사람이 되어 오신다.
죄의 시작이 되었던 아담의 교만한 꿈을, 하느님이신 분께서 겸손하게 죄에 물든 땅에 내려오심으로서 이루신다.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하늘과 땅이 만난다.
이 위대한 강생의 신비. 이 신비가 사람에게 영원한 해방을 줄 것이다.
영원생활 할 내혼 잠 깨우자는 때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 오심 기다리자는 대림시기 첫 주라는 전례주간 의미가 좋습니다.
대림 첫 주의 전례의미는 우리에게 영원구원 준비를 일깨워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죽을 준비는 중요하니 언제나 준비하고 살자는 권고입니다.
하늘에 기인한 ‘나’라는 인간의 존엄성을 신앙으로 재인식하자는 겁니다.
나의 육신 말고 나의 원천인 그곳을 알고 그곳에 맞게 깨치자는 겁니다.
육신생활에 온통 인생 쏟지 말고 영원생활 할 영혼 잠 깨우자는 겁니다.
세상의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 살림 요동쳐 스트레스 혼란이 심합니다.
세상의 스트레스 속에 인생 병들지 말고 하늘본향 귀향준비하잔 겁니다.
기다림 (깨어 있어라)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대림” 곧 기다림의 시간으로 교회는 한 해를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들의 구세주를 수천 년 기다려왔던 것처럼, 교회도 이미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을 재현하며 그분을 기다리고, 또다시 오실 그분을 고대하며 역사의 완성과 종말을 기다립니다.
이렇듯 대림시기는 이미 역사에서 이루어진 기다림을 재현하는 동시에, 미래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 곧 “성탄”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두 번째 오심, 곧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 시기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간으로만 알고 지냅니다.
그런 착각 속에서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지나간 사건만을 재현해내는 과거의 종교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교는 절대로 과거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분이 살아계시기에 현재가 바로 그분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현재를 살아가는 종교이며, 미래를 고대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교회는 대림시기를 통해 성탄과 재림이라는 두 가지 성격의 기다림을 동시에 제시해 줍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깨어 있어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제2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통해 이 깨어있음의 의미와 방법에 대해서도 함께 말해줍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로마 13,12)
단순히 깨어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마음과 몸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대림은 희망의 찬 기다림의 시기인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로 질서 지우는 회개의 시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례를 통해 빛의 갑옷을 입듯,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몸에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세례의 빛이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 안에서 환히 빛날 수 있도록 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깨어 기도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대림의 의미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들은 다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온전히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의 기준
양상윤 빈첸시오 신부님
제가 대만으로 와서 처음 지내기 시작한 곳은 남쪽에 있는 ‘타이난’이라는 도시입니다. 대만에서 가장 먼저 개발되고 가장 오래된 도시로 과거 통치 중심지였던 것에 비하면 현재는 상대적으로 그 위상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약 190만 명의 인구가 있는 대만의 6대 직할시 중 한 도시입니다.
새로운 곳에 도착했으니 당연히 많은 것들이 새롭고 신기했는데 그중 하나가 타이난 도로에는 좌회전과 유턴 신호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수도원에서 시내 중심을 거쳐 어학원까지 거의 왕복 한 시간 이상 자전거를 이용했는데 제가 늘 다니던 도로에는 좌회전 신호와 유턴 표지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도로에서 좌회전과 유턴이 금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녹색 직진 신호 시 어느 곳에서나 비보호 좌회전과 유턴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의 교통체계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위험하고 불합리한 교통 체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가 있는 쪽이 녹색 신호라면 보통은 반대편 차선도 녹색 신호이고 또한 사거리 같은 경우에는 다른 쪽 방향의 차들 그리고 횡단보도의 보행자들과 함께 상황이 더 복잡해집니다.
이럴 경우의 비보호 좌회전이나 유턴은 큰 교통사고를 초래할 수 있지만 놀랍게도 제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교통사고를 목격한 것은 가벼운 접촉사고 몇 번이 전부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보기에는 상당히 위험한 교통 체계를 가지고도 생각보다 교통사고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이곳 사람들의 여유 있고 양보할 줄 아는 운전 습관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호가 바뀌어도 바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출발하고 반대 차선에서 좌회전이나 유턴을 준비하고 있는 차를 보면 나에게 우선권이 있더라도 상황에 따라 쉽게 양보할 줄도 압니다.
아마도 이런 운전 습관 때문에 한국 사람들이 보기에는 엄청나게 불합리하고 위험한 교통체계이면서도 사고율이 낮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결국,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교통 체계도 중요하지만 운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자세가 안전운전에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치자면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보다 더 행복해야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무언가를 남에게 받을 때가 줄 때보다 더 행복해야 하지만 때론 받을 때 보다 줄 때 더 행복했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이성’이나 ‘합리성’을 따지지 말고 그보다 먼저 내가 지금 어떤 마음가짐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볼 일입니다.
특히나 우리들은 신앙인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기준은 이성과 합리성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행복의 기준은 그것과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과연 나의 행복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진실되이 물어봅시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늘 신앙적으로 깨어 있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함께 기도했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깨어 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고 있는 것의 의미가 아니라 의식이 깨어 있으면서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늘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무엇인가는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 곧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화를 하나 들려드리자면 어떤 여인이 시력이 안 좋아서 눈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그 수술이 잘못되는 바람에 결국 실명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러한 아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매일같이 수발을 같이 해 주었고, 직장에도 다닐 수 있도록 매일 동행해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거 같으니까 혼자 다니도록 해봐.” 그 말에 여인은 알았다고 하며 혼자 해 보겠다고 대답을 했지만 내심 그렇게 말한 남편이 너무 야속하고 배신감이 느껴졌습니다. 그 날 이후 여인은 혼자 지팡이를 손에 쥐고 출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여인은 여러 번 부딪히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했지만, 몇 달이 지나고 나니 어느 덧 다니는 것이 조금은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인이 버스에 올라탔더니 버스 기사가 여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인은 참 행복하시겠어요. 남편이 매일같이 그렇게 동행하시면서 보살펴주니까요.” 알고 보니 남편은 하루도 아내를 혼자 보내지 않고 뒤에서 그림자처럼 동행하면서 아내를 수행했던 것이었습니다.
예화 속의 여인의 남편처럼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의 곁에서 늘 동행하시고 보살펴 주시지만 우리는 그 하느님을 좀처럼 알아보지 못하고 살아가곤 합니다. 우리가 깨어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우리의 하느님께서 나와 동행하시고 보살펴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림시기, 우리의 예수님께서 우리의 곁에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진정 깨어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깨어있는 신앙인에게 주님의 성탄은 너무나도 가슴 벅찬 기쁨으로 다가오리라 믿습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이사 2,1-5)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가자고 합니다.
요탐과 우찌야가 통치하던 때로서 유다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더불어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백성은 여전히 이교도들의 산당에서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웠습니다(2열왕 15,32-38). 이런 상황이 지속될 때 이어지는 것은 외세의 침략이었습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통치자들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이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께서 주신 계명을 잘 지킨다면 예루살렘은 약속된 땅의 중심이 될 것이며,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현존과 같은 도시로 바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루살렘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법이 선포되는 곳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모여들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보편성과 평화를 선포하는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에 모여든 모든 이들이 주님의 법을 따라 걷게 된다면 예루살렘에는 평화가 찾아오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칼이 필요 없어 씨뿌리기 위해 필요한 쟁기의 보습을 만들고, 창이 필요 없어서 곡식을 수확할 낫을 만들 것이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평화는 단순하게 전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잘 살기 위해 지녀야 하고, 모든 일에서 추구해야 할 평화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오늘 1독서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법을 외면했기 때문에 바빌론에 끌려가 50년 동안 유배의 아픔을 겪고 난 뒤에야 이루어질 일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하느님의 빛으로 나아간다면, 빛 속에서 걸어간다면 반드시 예루살렘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마태 24,37-44)은 사람의 아들이 오실 때를 대비해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올지 모르는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기 위한 태도를 말씀하시기 위해 하느님과 함께 걸었다는 노아의 시대와 당신께 몰려든 이들을 비교하십니다. 홍수가 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었고, 하느님의 말씀과 아무런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었고, 많은 이들이 타락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독 노아만 주님의 눈에 들었습니다(창세 6,11-12). 일상적인 일에 집중했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자로서 언제든지 개입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고 살았다는 것을 탓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지만 갑작스럽게 오시면, 비록 노아시대의 홍수 같은 물리적 재난은 아닐지라도, 하느님의 눈에 들지 않는 이들은 감당하기 어려운 심판이 있을 것을 두 가지 비유로 예고하십니다.
첫째 비유는 사람의 아들이 오면 같은 일을 하던 두 사람이 서로 갈라질 것인데, 하나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곳으로 데려갈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버려질 것이라고 합니다. 선별되는 기준을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 나라로 데려가시고, 받아들이지 않는 이는 버려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놀라운 일에 대비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비유는 도둑처럼 오시는(묵시 3,3) 사람의 아들을 마치 밤중에 외출한 주인을 기다리는 종과 밤중에 훔치러 오는 도둑에 비유하는 것으로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회자되던(1테살 5,2)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기면서(묵시 3,3) 늘 깨어 있다면 주인이 언제 돌아오든지, 그리고 도둑이 언제 쳐들어오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그리고 받아들였다 해도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이들에게 방심하지 말고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한편 집을 영혼으로, 집주인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석하고, 도둑을 유혹으로, 집을 감각기관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체험하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도둑이나 외출한 주인처럼 다가오는 유혹을 막아내려면, 하느님께로 향하는 마음이 갈라지지 않도록 하려면, 마음의 문인 감각 기관을 잘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유혹은 늘 도둑처럼 우리 곁에 와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나약해지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우리를 공격하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로마 13,11-14ㄱ)는 주님의 두 번째 오심을 잘 맞이하기 위해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바오로의 종말론적 권고는 이미 여러 번 반복되었습니다.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라고 이미 말했는데, 구원이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바오로는 유다인이었다가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이 많았던 로마 공동체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는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온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바로 구원의 때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때라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돌아서지 않는다면 구원의 때를 놓치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은 빛 속에 걸어가는 이들이므로 악을 물리치고 선을 선택했으므로 이제껏 어둠 속에서 자기 욕망에 따라 살았다면, 마치 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가라고 권하면서 새 생명을 얻기 위해 모든 악습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입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으로서(갈라 3,27)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콜로 3,9)을 뜻합니다. “품위 있게 살라”는 것은 세례를 받았으므로 “거짓을 버리고”(에페 4,25), “분노, 격분, 악의, 중상, 그리고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리라.”(콜로 3,8)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과 함께 하기 위한 영적 투쟁을 견뎌내기 위해 욕망에 끌려가지 말고, 어둠의 행실에서 벗어나 “모든 더러움과 그 넘치는 악”(야고 1,21)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빛이시기(요한 1,8) 때문에 그분을 따라서, 그분에게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빛으로서 오셨음을 기억하고, 두 번째 오심을 기다리면서 하느님의 뜻을 깨우치는 시기입니다. 첫 번째 오심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오셨다면,
두 번째 오심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매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마태 10,40), 세상에 사랑의 불을 지르러 오신 성령을(루카 12,49) 따라 사는 이들에게 삶의 축복으로 이루어지는 오심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늘 “주님, 어서 오십시오.”(마라나 타!: 1코린 16,22; 묵시 22,17.30)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첫 번째 오심에서도 당신이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와 계신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종말을 강조하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여러 가지 위기 상황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예루살렘의 종말을 예언합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두 번째 오실 것인데 그것을 대비하지 않고 흥청망청 살아가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 있지 않는다면 이사야가 강조했던 평화는커녕 유배라는 혹독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구원을 위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주님께서 다시 오심은 구원의 때가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애타게 기다려야 할, 감사와 기쁨의 순간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와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구원의 때(죽음)가 별안간 우리에게 다가오듯이, 그렇게 오실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있으라는 것이고, 빛으로 다가가라는 것이며, 빛이신 그리스도를 입으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맞이하는 성탄절, 즉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념하고, 두 번째 오심을 맞이하기 위해 “주님, 어서 오십시오.”라는 기도와 함께 먼저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의 입은 부지런히 거룩한 말을 하고, 우리의 귀는 경건한 소리를 담으려 하고, 우리의 눈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을 바라보려 하고, 우리의 마음은 거룩한 생각을 하면서 깨어 있는지”(익명의 교부, 마태오복음 미완성 작품) 돌아봅시다.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은 말씀에 젖어 살아야 하기 때문에 악습을 하나씩 벗어던져야 합니다. 빛이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마치 유배에서 돌아오던 유다인들처럼 말씀이 선포되는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몹시 기뻐할 줄 압니다. 또한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 깨어 있는 사람은 내 이웃이 겪고 있는 고통에 귀를 기울일 줄 압니다.
땅에 임한 하늘의 시간표, '대림'
장재봉 신부님
대림 시기, 교회는 기다림을 이야기합니다. 온 마음으로 예수님을 기다리라고 권합니다. 임마누엘 하느님을 믿고 기다리는 영혼은 썩지 않는 희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을 때, 우리의 삶이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삶이란 기다림의 연속이 아닐까 싶은데요. 우리 모두는 다음을 기대하고 내일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물론 그 기다림이 계획하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내 원의를 벗어나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이런 우리의 곤혹스러운 삶을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이루어지지 않은 희망은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이루어진 소망은 생명의 나무가 된다”(잠언 13,12)라는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는 듯합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창세 이래 끊임없이 세상을 향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고백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대림 첫 주일을 맞는 우리의 시선이 세상 때문에 마음을 앓으시는 하느님께 고정되기 원합니다. 세상에서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희망을 이루어드려야 하는 주인공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새겨 살아주시길 청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표현하는 하느님의 모습은 아주 다양한데요. 이 다양함이야말로 이사야 예언자가 얼마나 하느님께 관심이 많았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어쩌면 알량한 인간의 지식으로 지혜이신 주님을 도무지 설명할 수가 없다는 고백 같기도 하고 감히 하느님을 판단하고 대들기까지 하는 인간의 오만을 참회하라는 따끔한 지적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 마음도 이사야 예언자처럼 온통 주님만을 기리며 깊이 묵상하는 때가 되면 정말 좋겠다 싶습니다. 삶에서 주님을 찾고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급한 일은 다시없으니까요.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하느님을 묵상하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이야말로 묵상에 대한 오해인데요. 주님을 향한 묵상은 자잘한 일상 안에서 주님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순간마다 하느님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순간에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영으로 예배드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한 송이 꽃에서도 불어오는 바람에서도 그분의 위대하심을 찬미한다면 최고의 묵상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담은, 온전한 하느님의 것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대림 첫 주일,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노아의 삶에 비추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노아야말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또 원하면서 제대로 된 기다림을 살았던 인물인 까닭이라 싶은데요. 노아의 방주사건이야말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니까요.
노아가 방주를 만든 기간이 꼬박 100여 년이었습니다. 이를테면 노아가 방주를 지으려 마음먹은 그때부터 자그마치 10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아의 방주야말로 기다림의 결실이었던 셈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대림 시기를 맞는 그리스도인의 묵상주제는 단연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방주를 설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주의 모습에 비추어 우리가 지어야 할 방주의 모습을 구상하는 것이 아닐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왜 우리에게 방주가 필요한지, 과연 방주를 짓는 재료는 무엇으로 해야 할지, 누구와 함께 지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노아의 이야기를 들려주신 이유를 살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하느님의 눈과 마음이 교회와 가정 공동체가 빚어내는 믿음과 사랑의 방주에 주목하고 계신다는 점을 알려주신 것이라 싶으니까요. 그리스도인의 가정이야말로 하늘나라의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솔직히 노아가 그 긴 세월을 바쳐 방주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노아 홀로 이루어낸 개인의 업적이 아닐 겁니다.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받았을 것이란 뜻입니다. 하느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명했던 노아일지라도 홀로 독불장군처럼 그 긴 세월을 견뎌낼 재간은 없었을 테니까요. 한마디로 노아가 영적가장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은 불평불만 없이 협조해준 가족들의 배려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에 맞는 본당과 가정을 꾸리기 위해서 서로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우시는 게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자녀를 가르치는 가장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는 고백이 아닐까요?
히브리서는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히브 11,7)라고 기록하고 있는데요. 노아가 그 오랜 세월을 방주를 짓는 일에 몰입했던 이유가 바로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노아가 그토록 긴 세월 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고 정성을 쏟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을 위해서 일하는 아버지, 가장을 존경하여 따르는 가족들의 마음이야말로 성가정의 모습임을 깊이 새기도록 합니다. 하느님께 순명하여 말씀대로 실천하는 바로 그 행위가 곧 가족을 위해서 귀하게 봉헌될 것이라는 진리의 귀띔이라 듣습니다. 가족 간의 사랑이야말로 진정 복된 구원의 길이라는 선포라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에도 노아처럼 가족을 위해서 정성 들여 믿음의 방주를 짓고 있는 가장을 찾으신다는 뜻이라 헤아립니다. 주님께서는 집안의 가장이 믿음으로 우뚝하여 그 믿음이 자자손손 대대로 이어지는 일을 무엇보다 기뻐하시니까요.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시나리오를 만천하에 공개하십니다. 주님의 시나리오는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오늘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는 것임을 밝히십니다.
대림, 주님을 기다리는 땅의 인간에게 하늘의 시간표가 주어진 때입니다. 하늘의 시간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현재를 더 열심히 살아가는 것으로 충실히 따를 수 있습니다. 내가 만든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방주가 가족과 이웃을 구원하는 축복의 터가 될 것이라 약속하셨으니 최선을 다해서 하늘의 시간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임마누엘’ 믿음이 지금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희망의 역사가 되도록 최선을 쏟읍시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사제는 기도합니다. 전 교우님들이 주님을 향한 그리움에 흠뻑 젖는 대림이 되시기를, 주님의 오심을 고대하며 오직 하늘의 시간표에 충실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고유함', 기쁜 소식의 시작
오대석 신부님
하느님은 존재하시고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만드신 것들에는 하나같이 다르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일란성 쌍둥이도 분명 다른 사람이고, 한 나무에서 나온 잎들이라 하더라도 크기와 색깔은 저마다 다릅니다. 여기서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은 왜 피조물을 서로 다르게 만드셨을까?’ 질문을 바꿔 봅니다. ‘하느님은 다름을 통해 우리에게 무 엇을 알려 주시는가?’ 또 바꿀게요. ‘그분은 왜 나를 고유하게 만드셨는가?’ ‘고유함’은 그분을 만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대로 나(우리)를 만드 셨습니다. 그분의 모상대로 창조된 나(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그분의 모상성’, 즉 고유함을 통해 하느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보다 큰 행복은 없습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과의 만남에 비하면 세상의 지식, 시공간, 재화 등은 뒤로 미뤄짐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착각합니다. 고유 함을 잊은 채, 행복하려면 남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이죠. 학교는 어디를 나와야 한다거나, 직업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거나, 재산은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거나, 자녀 농사(?)는 남부끄 럽지 않게 지어야 한다거나,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 한다거나, 남들의 비판을 받으면 안 된다 거나, 외모는 어떠해야 한다거나, 죄를 많이 지으면 안 된다거나, 뛰어난 재주가 있어야 하 고 취미생활은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등등. 과연 그럴까요? 하느님으로부터 온 고유함은 결코 없어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그분 안에서 깨 달은 사람은 행복하고 저절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고유함이라는 선물은 반드시 행복과 감사를 낳습니다. 그리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구원 받았음을 확신할 뿐 아니라 이웃의 구 원도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구원의 시작인 고유함이 그에게도 있음을 아니까요. 이 사실, 아니 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신앙의 언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내 고유함을 통해 들려주신 그분의 말씀들은 나에게만이 아니라, 내 입을 통해 이웃에게 신앙의 언어, 기쁨의 언어로 다가갑니다. 그러니 “깨어 있으십시오.”(마태 24,42) 오늘 복음 ‘깨어 있음’은 ‘고유함’을 놓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이 누군지 모른 채, 남들처럼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 양 착각하지 않는 삶을 사십시오. 이를 통해 우리는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이웃을 받아들이며, 주님께 받은 은총을 신앙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것입 니다. 기쁜 소식(복음)은 고유함에서 시작됩니다. 오늘도 화이팅! ^^
깨어 준비하는 사람!
박강수 신부님
대림 시기는 구세주의 탄생을 기쁨과 희망 속에서 깨어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구세 주께서 오시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구원의 소식은 신앙인인 우리들에 게 기쁨으로 가득 찬 새로운 미래를 약속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만남을 깨어 기다리며 오늘을 기쁘게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진정한 기다림 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을 깨어 준비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삶을 성실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에 관심이 없음을 지적하시며 그분의 오심을 깨어 준 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 기 때문이다.” (마태 24,44) 예수님께서는 노아 때처럼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 고 시대의 징표에 관심 없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거나 실천하려는 마음 없이, 그저 먹고 마시며 쾌락 에 젖어 살다가 멸망한 홍수 이전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보인 행실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대림 시기를 시 작하는 우리에게 각자의 본능과 사악한 유혹에 휘둘리지 말고, 올바른 방향으로 회개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축복받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 아가십시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로마 13,13-14)
그렇다면 오늘을 기쁨으로 살아가며 깨어 준비하는 참된 신앙인은 누구일까요? 우리의 본능대로 그저 먹고 마시며, 쾌락에 젖어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믿음의 사람이 참된 신 앙인입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 5,16-18)
그러므로 이 은혜로운 대림 시기에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잘 실천하여 기쁨을 누리는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서공석 신부님
오늘 복음은 시작하면서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상기시켰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상에 골몰하다가 다가오는 불행을 몰랐습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 깨어 있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하면서 오늘 복음은 끝났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은 초기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자고 말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하느님에게로 시선을 돌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은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신앙인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신앙인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빌며 삽니다.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일컫는 것은 그분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생명의 기원이시며, 또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자비롭고 선한 실천을 하는 사람은 그 하느님을 자기 생명의 원천(源泉)과 원동력(原動力)으로 영입합니다. 유대교는 율법준수 여하에 따라 상도 주고 벌도 주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하느님이 그들과도 함께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선하신 하느님을 영입하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여 우리가 퇴치해야 하는 고통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면서 고통이 하느님이 주신 벌이 아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은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우리는 그분이 하시는 일을 실천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진리의 영, 그분이 오시면 그대들을 모든 진리 안에 인도하실 것입니다.”(16, 13).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진리를 실천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제1독서로 읽은 [이사야서]는 하느님은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서,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의 길을 걷는 우리의 마음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그분의 길을 걷는 것은 자기 한 사람 먹고 마시는 일상(日常)에 묻혀 사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찾아 그분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자녀의 삶이 발생합니다. 그 삶에서는 나와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였던 내 이웃이 내가 돌보아주고 사랑해야 하는 형제자매로 보입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새로운 길을 걷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가꾸고, 내가 획득한 자격증을 과시하면서, 내가 가진 재물에 의존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숨결이 일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또 “준비하고 있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들은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게 살라 는 말입니다.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기심(利己心)과 허세(虛勢)에서 한발 물러서면, 하느님의 진리가 보입니다. 그 진리는 나와 내 주변을 하느님이 베푸신 은혜로운 것으로 보게 해줍니다. 은혜롭게 베풀어진 우리의 삶입니다. 나 한 사람을 위해 살라는 생명이 아닙니다. 그 진리를 깨닫고 선하고 자비로운 실천을 하여 은혜로움이 주변으로 흐르게 해야 하는 생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깨어서 준비하고 실천해야 진리입니다.
우리의 시야(視野)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 시야 안에 하느님은 보이지 않고, 우리 자신만 크게 보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우리 자신이 유리할 것만 찾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소중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누리는 것을 절대시합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거나 우리의 편안함을 위협하는 것을 우리는 단호히 거부하고 배격합니다. 그것이 우리 자신만 보고 사는 우리가 하는 일입니다. 오늘 [이사야서]가 말하듯이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간다’는 것은 주님의 시야 안에서 주변을 보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웃 앞에서 우리의 몸짓도 선하고 자비로운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미래는 ‘먹고 마시는’ 일이 보장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영입하고, 그분의 시야 안에서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그 시야 안에 우리의 생명을 위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 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시야에서 진리를 배우고 실천한 사람과 자기 한 사람 먹고 마시는 일에 골몰한 사람의 운명이 서로 다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 가서” 하느님의 생명이 열어주는 새로움을 찾아 배우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높이, 멀리 계시고, 우리가 정성을 바쳐 섬겨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은혜로움 안에 그 원천으로 살아계십니다. 은혜로움을 이웃에게 실천하는 사람이 그분의 진리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요한 8, 32). 성령은 그 자유를 주는 하느님의 숨결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또 다양하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도록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십니다. “꽃처럼 피어났다가는 스러지고, 그림자처럼 덧없이 지나가는” 우리의 삶이라고 구약성서 [욥기](14, 2)는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쉴 때만,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우리 일상의 세상살이가 그 덧없음을 넘어 하느님의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오늘부터 대림시기가 시작합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말씀과 같이 우리도 “사는 길을 주님께 배우고 그 길을 따라...주님의 빛을 받으며 걸어가야” 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시야(視野) 안에서 은혜로움을 찾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시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오심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Cat. 15,1-3: PG 33,870-874)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합니다. 한 가지 오심만이 아니라 첫번째 오심보다 한층 더 빛나게 될 또 다른 오심도 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첫번째로 오실 때에는 고통과 인내심 가운데 오셨고, 두번째 오실 때에는 하느님 나라의 면류관을 쓰고 오실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은 대부분 이중적입니다. 그분의 탄생이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시간이 생기기 전 하느님으로부터의 탄생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 찼을 때의 동정녀로부터의 탄생입니다. 그분의 강림도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양털 위에 내리는 이슬 같은 은밀한 강림이고 다른 하나는 장차 밝히 드러날 강림입니다.
첫번째로 오실 때 그분은 강보에 싸여 구유 위에 누워 계셨고 두번째 오실 때에는 빛을 겉옷 삼아 입으실 것입니다. 첫번째로 오실 때에는 십자가를 지고 치욕을 당하셨고, 두번째로 오실 때에는 천사들의 무리에 둘러싸여 영광 속에 오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첫번째 오심만을 생각하여 만족하지 모사고 두번째 오심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첫번째 오실 때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라고 우리가 말한 것을 그분이 두번째 오실 때에는 천사들과 더불어 마중 나가 경배하면서 되풀이할 것입니다.
구세주께서 두번째로 오실 때에는 다시 재판 받으러 오시지 않고 당신을 재판정에 불렀던 이들을 심판정으로 부르러 오실 것입니다. 첫번째 오셔서 재판받으실 때 침묵을 지키셨던 그분은 십자가에서 무엄하게도 모욕했던 이들에게 그 모욕을 상기시키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이런 짓을 했어도 나는 잠자코 있었노라.” 첫번째 오실 때 주님은 당신 자비의 섭리에 따라 온유한 설득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자 하셨지만, 장차 다시 오실 때에는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의 왕권에 복종케 하실 것입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이 두 가지의 오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애타게 기다리는 너희의 상전이 곧 자기 궁궐에 나타나리라.” 이것은 첫번째 오심에 대한 말씀입니다. 두번째 오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가 와서 계약을 맺어 주기를 기다리지 않느냐? 보아라. 이제 그가 온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그가 오는 날, 누가 당해 내랴? 그가 나타나는 날, 누가 버텨 내랴? 그는 대장간의 불길 같고, 빨래터의 잿물 같으리라. 그는 자리를 잡고 앉아, 풀무질하여 은에서 쇠똥을 걸러 내듯, 깨끗하게 만들리라.”
바오로 사도도 디도에게 이 두 가지 오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은총은 우리를 훈련해서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한 생활과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하고 이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바르고 경건하게 살게 해줍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하느님과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그 복된 희망의 날을 기다리게 해줍니다.” 여러분도 보다시피 이 말씀에서 바오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첫번째 오심을 말하고 우리가 고대하는 두번째 오심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전해 받은 신앙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부터 오실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날 무렵 마지막 날 영광 속에 오실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은 끝을 고하고 창조된 이 세상은 다시 새로워질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37-39).”
이 말씀은 ‘예언’이 아니라, 사람들의 무심함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만 신경 쓰면서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심판을 대비하지 않는 것을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오늘의 일’만 신경 쓰면서, ‘내일의 일’은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의 삶’을 위해서 저축도 하고, 보험에 가입도 합니다.
그러나 저축이나 보험은 현세적인 일이고, 그런 것들이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회개를 해야 하고,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충실한 신앙생활은 영혼을 위한 저축이고, 회개는 심판 때를 대비하는 보험입니다.
여기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대홍수가 닥칠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대홍수는 타락한 세상에 대한 심판 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대홍수를 노아에게 예고하셨고, ‘방주’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창세 6,13-22).
아마도 노아는 방주를 금방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고, 꽤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홍수가 닥친다는 것을 혼자서만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고,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을 텐데, 노아와 노아의 가족들만 살아남았습니다.
가족들이 살아남은 것은 노아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창세 7,1).
이 말은, 만일에 다른 사람들도 회개했다면 살아남을 수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지 못해서 멸망을 당한 것이 아니라, 회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때에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마태 24,40-41).”
이 말씀은, ‘회개’는 각자 자신이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회개를 남이 대신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가족이라고 해도 회개를 대신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들에 있는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이거나 형제일 것입니다.
또 맷돌질을 하는 두 여자는 어머니와 딸이거나, 시어머니와 며느리이거나, 자매일 것입니다. 가족이라도 구원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갈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심판으로 이산가족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고, 서로 도와주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노아 덕분에 대홍수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아마도 노아의 권고에 따라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를 보면, 롯과 그의 두 딸만 살아남았고, 롯의 아내와 사위들은 죽었습니다.
사위들은 피난을 가야 한다는 롯의 말을 ‘우스갯소리’로만 생각했고(창세 19,14),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창세 19,26).
롯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가족이라고 해도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고, 회개를 거부하는 사람은 버림을 받을 것이다.”로 해석이 됩니다.
버림받는 사람은 자기가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그렇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것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기도와 노력을 외면하지는 않으시는데, 당사자 자신이 회개를 거부해 버리면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가족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2-44).”
이 말씀은, “회개는 ‘지금’ 해야 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도둑이 몇 시에 오는지는 몰라도, 온다는 것이 확실하면, 집주인은 깨어 있으면서 자기 집을 지킬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 재림,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것과 그 날이 언제 인지는 모른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니까 대비를 해야 하는데, 그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대비를 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더욱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대비’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회개의 기회’로 주신 시간입니다.)
“대림 시기가 시작되는 첫날에 왜 종말의 심판에 관한 말씀을 듣는가?”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신앙인의 마음가짐과 종말의 심판을 준비하는 신앙인의 마음가짐은 다르지 않습니다.
둘 다 ‘나에게’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해마다 정해진 때가 되면 의례적으로 치르는 연례행사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을 향해서 날마다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올해는 작년보다,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성숙해져 있는 신앙인이 되어 있어야 하고, 주님께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이불'(마태오 24장 37~44)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예수님 기다림의 시작!
교회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깨어산다는 의미가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모든게 제자리에 있게 하는것이라 ~ ᆢ
지저분한 곳을 정리하고 더러운 곳을 깨끗이 하며 흥청대던 몸짓을 그만두고 시샘하고 속시끄러운 마음 버리기 마음과 몸의 힘을 빼고 편안하게 ~
부드러운 말씨와 몸짓이 예수님 모실 구유가 되고 마음의 이불을 잘 준비하여 덮어드립시다.
'대낮처럼 품위있게 깨어 준비'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마태2,39)
김혜선 아녜스
주님,
이 세상 끝날 무렵,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갈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가
세월의 강물에 맥없이
쓸려가지 않게 하소서.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언제 오실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늘 감사한 마음으로
어둠의 옷을 벗어놓고
주님의 발소리를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벗을 위하여 기꺼이 제 목숨 내어놓는
보잘것없지만 위대하고
자신을 감추지만 환히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을 섬기며
다툼과 시기 가득한 처절한 경쟁에서
제 살 길 찾기 위해
무기 삼아 그리스도를 몸에 두른
거룩한 척하지만 속되고
고상한 척하지만 천박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추악한 어둠이 지배하는 광란의 시간에
희망의 새벽을 맞으려
여린 몸 아낌없이 작은 빛으로 사르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기나긴 밤과 찰나의 낮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들며
탐욕과 무관심 가득한 암흑을 탐닉하면서
오히려 섬김과 돌봄의 빛의 자녀라 자처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억압에 대한 굴종이
평화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불의한 권력을 꾸짖고
억울하게 짓밟힌 이들을 일으켜
정의로운 평화를 보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모든 이가 더불어 함께하는 삶보다
가진 이들의 안락과 평안을 위한
버려진 이들의 침묵과 사라짐을 강요하는
평화라는 이름의 죽임을 즐기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 말해지는 때에
모든 것이 평화롭다고 느껴지는 때에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버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고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야 할 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주님을 모신 성전에서
주님을 모신 성전으로서
감사와 찬미를 드릴 때에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처럼 보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일하시는 세상에서
주님을 드러내야 할 성전으로서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아우러지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
같이 들에 있던 두 남자가
하나하나 갈라지듯이
함께 맷돌질 하던 두 여자가
하나하나 갈라지듯이
천하고 낮은 곳에 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증언해야 할 때
살림을 위한 죽음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
그리스도인은 갈라질 것입니다.
언젠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생각하지 않은 때에 불현 듯 다시 오실,
지금 여기 삶의 순간순간 불쑥 오시는
사람의 아들께서
기쁘게 품에 안아주실 그리스도인과
슬픈 낯으로 밀어내실 그리스도인으로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나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마음 <마태 24, 37-4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일의 시작은 희망입니다. 교회 달력으로 오늘은 새해, 새날, 새 아침입니다. 어제 저녁기도부터 대림절이 시작되고 4주 후 하느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아니, 이미 오셨음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여기 대림초 네 개는 4주 후에 주님의 오심을 상징하지만 이미 우리에게는 오셔서 함께 현존하시는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어제저녁 ‘무엇을 기다려야 하나? 사순절 대림 4주 4가 의미하는 뜻은 완전히 아닌가?’ 완전하기 위해서는 어제가 아니고 내일도 아닌 지금입니다. 저는 저녁에 사방이 어두워지면 아침을 기다립니다.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내일 더 행복한 하루가 되려고 기도와 깊은 잠을 청합니다. 아침이 오면 받은 하루의 날을 감사와 찬미로 맞이합니다.
저는 나이 들어 내일은 없고 오늘만 있습니다. 오늘 지금 감사와 찬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무엇을 하든 지금 나는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주님을 만나고, 함께 있고, 함께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 합니다. 기다림을 생각하니 열 동녀의 신랑을 기다리는 비유가 생각이 납니다. 그들은 어떻게 준비하였습니까? 기름을 넉넉히 준비한 지혜로운 사람과 덜 준비한 미련한 사람과 갈리게 되어 한쪽은 만나고 한쪽은 거부당했다고 합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에 속하지만 575만 명의 신자 중 110만 명만 주일 미사에 나온다고 생각하니 우리는 더 준비해서 문을 열고 더 많은 사람이 우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고, 함께 기도하도록 전례에 참석하게 하고 기다리고 준비하는 일이야말로 바로 오늘 여기에 대림 첫 주를 지내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지금 여기서 진실과 사랑을 준비하고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어리석게 내일을 살지 말고 지혜롭게 오늘을 살도록 지금 해야 할 일을 지금 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기도합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교회가 또 다시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린다. 12월 달력을 펴니 주중의 빨간날 하루 있었다. 성탄절이다. 달력에서 성탄절은 그리 멀지 않으나 인생길에서 성탄은 나름 멀어서 여전히 그 먼 길을 걷고있다. 기다림을 간직하고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그 목적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날마다 새롭게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드린다.
우리는 각자 먼 길을 떠났다. 달력 속 한 달의 먼 길이 아니라 일생의 먼 길 말이다. 혼자 걷는 길이지만 혼자 걷는 먼 길은 없다. 누구와 함께 걷는 먼 길이다. 동방에서 길을 떠난 세명의 박사들이 혼자 걷는 것처럼 보이나 혼자서가 아니었다. ‘그분의 별’이 있었다. ‘그분의 별’과 함께 걸었다. 그들은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 그래서 함께 걷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분의 별’은 내 길의 안내자였다. 그러기에 안내자를 잘 만나야 한다. 동방의 박사들은 안내자를 잘 만났다. 그리하여 인생 목적지에서 멈처섰다. 그곳에는 구세주 그리스도 계셨다.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드렸다. 또 인생을 다 살고 경배드랄 것이다. 동방의 박사들이 예물을 아기 예수님께 드렸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다.” 우리도 예수님께 예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스승님, 살아계신 만왕의 임금이신 하느님, 우리의 구세주이시다.”
어제 일행과 조계종 사찰에 들렀다. ‘명부전’ 앞에서 안내자의 해설이 있었다. 흥미롭게 들었다. 저승사자가 죽음을 불렀다. 죽음은 염라대왕 앞에섰다. 염라대왕은 서책을 머리 위에 이고, 거울을 들고 죽음의 혀를 길게 빼 놓고 살피고 있다, 혀로 지은 죄였다. 지장보살이 옆에서 이를 지켜본다. 몸의 욕망으로 지은 죄를 보다가 지저분하고 추잡한 죄에 지장보살도 놀랐나 보다. 코와 턱의 수염이 하향게 쇴다. 성의 욕망에서 저지른 사람의 죄가 엄청나다는 뜻일게다. 해설을 듣다가 사람들은 숙연해짐 없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며 히죽히죽 키득키득 자기들끼리 웃고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목적없이 먼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달력 속 아기 예수님의 성탄의 기다림도, 태어나 먼 길을 걷고 기다리는 재림의 기다림도 목적없이 히죽 히죽,키득 카득 웃고만 살아간다. 재림이란 성탄의 기다림도 막연할 뿐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지상地上에서 천국天國을 삽시다. -배움, 싸움, 깨어 있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로 11월 위령성월이 끝나고 오늘 12월 첫날은 대림 제1주일이 시작입니다. 새삼 끝은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희망이 우리 마음을 기쁨으로 물결치게 합니다. 영롱하게 빛나는 대림초 하나가 마침내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 출발하셨음을 알려 줍니다.
사순시기가 어둡고 긴 산문散文같다면 대림시기는 짧고 아름다운 시詩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을 기다림의 동심童心으로 돌아가게 하며 기쁨으로 설레게 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참으로 교회 전례력이, 전례영성이 고맙습니다. ‘사탄의 시스템’ 같은 험하고 거친, 어두운 세상에서 밝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하늘 나라 시스템’같은 세상을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하늘 나라 시스템 같은 전례주기에, 전례영성에 한결같이 충실할 때 참된 내적성장과 성숙도 뒤따릅니다. 참으로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게 하는, 사탄의 시스템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천국을 살게하는 하늘 나라 시스템의 전례주기입니다. 오늘 아침성무일도 후렴들 셋의 가사와 곡은 얼마나 아름답고 흥겹고, 마음을 희망과 기쁨으로 물들였는지요.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1.“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2.“들이여 주님 앞에서 흥겹게 우쭐거리고 숲을 이룬 나무들도 손뼉을 쳐라. 주께서 오시어 영원히 다스리시라. 알렐루야.”-
-3.“보라 위대한 예언자 오시어, 새 예루살렘을 세우시리라. 알렐루야.”-
사순시기와 단연히 구별되는 대림시기의 기쁨이기에, 후렴마다 ‘알렐루야’, ‘주님 찬미’가 뒤따릅니다. 그렇습니다.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오늘부터 벌써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저 내리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대림시기, 천국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니 지상에서 천국처럼 삽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대림의 희망과 기쁨이, 행복이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합니다. 구체적으로 다음 셋처럼 살면 됩니다.
첫째, 배우십시오.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배움중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배워서 사람입니다. 평생 배움의 여정에 충실할 때 비로소 무지의 속박에서 해방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공동체를 배우는 것입니다. 어제의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참으로 저를 자유롭게 한 깨달음이었습니다.
-“1.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신다. 하느님은 나보다 더 지혜로우시다. 그러니 하느님을 믿자. 하느님을 사랑하자. 하느님을 공부하자. 하느님께 순종하자.”-
-“2.공동체에 속해 있음에 감사하자. 공동체가, 이웃 형제들이 나를 구원한다. 공동체를, 형제들을 떠나 내가 어디서 사랑을, 겸손을, 온유를, 순종을, 섬김을, 비움을, 친절을, 환대를 배울 수 있을까.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도반들이요 주님의 평생 배움터가 공동체이다. 눈만 열리면 공동체 형제들 하나하나가 다 보고 배워야 할 스승임을 깨닫는다.”-
그러니 내 몸담고 있는 평생 배움터인 공동체는, 형제들은 하느님의 참 고마운 구원의 선물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도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무엇보다 배워 실천해야할 말씀이요 평화입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마침내 말씀이 실현되어 우리는 주님의 산 ‘불암산’에 있는 하느님의 집 ‘요셉 수도원’에서 주님의 길을 배워 걸을 수 있도록 시온이자 예루살렘인 성전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께 가르침을 받고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렇게 항구히 충실히 하느님 말씀을 배우고 공부해야 무지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인이 됩니다.
또 무엇보다 하느님께 배워야 할 공부가 평화입니다. 그대로 미사를 통해 실현되는 평화의 이상과 현실입니다. 흡사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내전內戰상태를 방불케 하는 작금의 시대에, 참으로 평화의 이상과 실현보다 절실, 절박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얼마나 고무적이고 아름다운 평화의 이상이자 현실인지요, 바로 말씀의 공부와 실천과 더불어 이런 평화의 공부와 실천이 절박한 시대입니다. 멀리서가 아닌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실현되어야 할 평화입니다. 배움이 무르익어갈수록 자유인이자 평화인이 됩니다.
둘째, 싸우십시오.
배움에 이어 싸움입니다. 초년에는 공부와 싸우고, 중년에는 일과 싸우고, 노년에는 병마病魔와, 치매癡呆와 싸운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실 삶은 영적전쟁입니다. 이것은 수도영성생활의 주제들 중 하나입니다. 죽어야 졸업인 평생 현역인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공동체는 배움터가 되고 싸움터가 됩니다.
공동체란 배움터에서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들’인 우리들이요. 공동체란 싸움터에서 평생 싸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무엇보다 밖에 있는 적이 아니라, 안에 있는 내가ego, 무절제한 욕망의 내가, 또 태만한 내가, 무자비한 내가,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괴물같은 내가 적입니다.
마성魔性, 악성惡性, 수성獸性, 인성人性이 혼재한 인간입니다. 영적싸움에 항구하여 승리할 때 비로소 영성靈性 깊은 사람이 됩니다. 세상의 축소판같은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것 같은 마음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아우구스티누스를 회심케한 로마서 말씀이 싸움의 진상을 잘 보여줍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시오.”
영적 싸움에 빛의 갑옷은 무엇입니까?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그러니가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 ‘신망애信望愛의 전사’로 살 때 모든 욕망을 물리치고 ‘진선미眞善美의 사람’으로 품위있고 기품있고 품격있게 살 수 있습니다. 절대 영적 싸움의 승리 없이는 이런 품위 있는 삶을 불가능합니다. 결코 노고勞苦없이 저절로 오는 값싼 은총은, 영적승리는 결코 없습니다.
또 참 좋은 빛의 갑옷이 회개와 기도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영적 무기도 없습니다. 대림시기,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빛의 갑옷을 입을 때 천하무적天下無敵의 주님의 전사, 영적 전사가 됩니다.
기도와 회개를 통해 온유하고 겸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옷을 입게 되니 이보다 더 좋은 빛의 갑옷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란 말씀이 새삼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빛의 갑옷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입는 시간입니다.
셋째, 깨어 있으십시오.
대림시기 무엇보다 깨어 있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전사로 필수 전제조건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은 종파를 초월하여 모든 종교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림시기가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바로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에 갈수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루중 깨어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막연한 진공 상태에서의 깨어 있음은 불가능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과 기쁨이, 주님을 만나고 싶은 깊은 갈망과 열망의 사랑이 깨어 있게 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요 기쁨입니다. 기다릴 사랑하는 주님이 없다면 희망도 기쁨도 행복도 깨어있음도 아예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설렘의 기쁨으로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아니 특정한 시기만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가 사랑하는 주님을 찾고 기다리는 대림시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바도 깨어 있음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가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얼마나 허망한 죽음인지요! 이래서 죽음을 날마나 눈앞에 환히 두고 깨어 살라는 옛 사막교부들은 물론 분도 성인의 충고입니다.
오늘 복음의 똑같은 환경중에서도 들에 있던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림 받았다는 일화나, 맷돌질을 하단 두 여자중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림 받았다는 일화, 바로 깨어 있음이 그 구원 기준임을 봅니다.
참으로 깨어 있을 때 하늘 나라의 시스템을 살지만, 영적으로 잠들어 있을 때 사탄의 시스템속에서 자기를 잊고 살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중에도 내면에 따라 천국을 사는 이도 있고 지옥을 사는 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로 우리 모두의 경각심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도둑처럼 오는 사건들이요 죽음들이요 종말이요 주님의 도래입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 다고 사실 깨어 있지 않고 방심放心, 방일放逸, 방종放縱하다가 불시에 닥친 불행이나 사고, 죽음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니 유비무환, 맑은 의식으로 깨어 있음의 수행이, 수련이 참으로 절실합니다. 영적 잠에서 깨어나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에, 깨달음의 은총들입니다.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 오매불망寤寐不忘 사랑하는 주님을 기다림의 희망과 기쁨, 행복이 우리를 지상에서 천국처럼 살게 합니다. 사탄의 시스템같은 세상의 한복판에서 하늘 나라 시스템같은 삶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 1.배우십시오, 2.싸우십시오, 3.깨어 있으십시오. 평생 수행입니다. 평생 여정입니다. 평생 ‘주님의 학인’, 평생 ‘주님의 전사’로, 평생 ‘주님의 각자覺者’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 때 비로소 지상에서, 대림의 희망과 기쁨, 행복 가득한 천국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 은총의 대림시기, 자, 주님의 빛속에 걸어갑시다!”(이사2,5). 아멘.
종말을 기다리며
김정일 신부님
그리스도께서는 그날과 그 시간이 언제인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를 종말에 대한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모르니까 더 불안합니다. 이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때가 언제인지 ‘알고 싶게’ 만듭니다. 따라서 불안은 확실성에 대한 갈망에서 옵니다. 그렇다면 그날과 그 시간을 예수님 자신은 알고 계셨을까요? 일단 성경은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로지 아버지만 아신다.”(마태 24,3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모르고 하신 말씀일까요?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하신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때가 언제인지 몰라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그날은 천사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조차 모르신다고 못 박음으로써, 우리가 그 날짜에 아예 관심을 갖지 않도록 하십니다. 아는 것이 힘일 줄 알았는데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겁니다. 사실, 종말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고 하신 것은 불안감을 조성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안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두려움을 떨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종말이 언제인지 ‘아는 것’에 있지 않고, 그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불안은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함’에서 일어나기 때문이지요. 어차피 세상 종말은 죽음처럼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 분명합니다. 죽음처럼 막연하면서도 확실한 것이 또 있나요? 결국 종말은 받아들임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받아들이는 태도를 기초로 삼습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4)
김성민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교회 달력(전례력)으로 새해(가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사랑하는 영적 동행자들이신 여러분 모두에게 새해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새해에는 주님의 큰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길 빌며, 가까워진 우리의 구원에로 더욱 더 가까이 나아가는 복된 한 해가 되고, 영육(靈肉)도 건강하시길 빕니다.
새해 첫 날, 첫번 째 주일에 예수님께서는 가까워진 나의 구원을 위해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림(待臨)시기'는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기다림, 곧 구세주의 탄생과 세상 종말에 오실 구세주를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설레임입니다. 이 설레임이 나에게 큰 현실이 될 수 있도록 깨어 잘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잘 준비된 자만이 오시는 구세주를 기쁘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가 권고하고 있는 것처럼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도록 합시다!
그것은 날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 해보다 더 함께 기도하고, 더 함께 미사에 참례하고, 더 믿고 더 희망하고 더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야2,5)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시기가 나의 삶에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쁘게 새해를 시작합시다!
"참다운 영적 동행은 언제나 복음화 사명에 봉사하는 상황에서 시작되고 꽃피웁니다."('복음의 기쁨', 173항)
"그러니 너희는 준비하고 있으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제병영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기도 중에 두 가지 단어가 함께 한다. 기다림과 조급함이다. 어떤 때 1분이 한시간 같고 어떤 때는 찰나와 같다. 이는 다 나의 마음의 상태를 말하고 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조급함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이 조급함 때문에 많은 경우 넘어지고 만다. 그래서 기다림을 포기하곤 한다. 죽음도 마찬가지 안일까? 그 시간은 정한 때 그냥 나에게 다가온다. 조급함이 시간을 변경하지 않는다. 대림 1주일을 맞이하며 예수님을 기다리는 마음을 청한다. 기다림에 익숙하고 지혜로우면 이미 와 있는 많은 것을 보게 된다.
구름과 파란 하늘이 함께 하고 있는 공존의 순간은 나를 다시 기다림으로 초대하고 있다!
임상만 신부님
동창 신부들이 대부분 회갑을 보내고 있어서인지 만나면 유난히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한다
'치매 예방법'
'은퇴후의 건강유지법' 등등...
따져보니 우리가 그동안 대체로 21,500일 남짓 살았는데 한국 남성 평균 기대수명으로 본다면 앞으로 살날이 10,000일 정도 남는다.
물론 건강에 문제가 없다고 전제한 경우지만. 살아갈 날이 생각보다 짧아 당황스러우면서도 매 순간들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래서 시편 저자가
"저희의 날수를 셀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90,12) 하며 노래했나 보다.
언제부터인지 '삶의 질'을 강조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웰빙(well--being) 이라는 말이 보편화되었다.
'웰빙족'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이들이 제시한 방법대로 살면 오래오래 살것이라는 환상을 갖게 함으로써 인생의 본질을 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다가올 죽음을 건강하게 맞이하는 것이 아닐까.
서양 속담에 '죽음은 사람을 잊지 않는데 사람은 죽음을 잊고산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가 '잘산다'는 것은 우리가 '곧 떠날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사는 것이다.
어머니께서 때때로
"막내 신부,내가 자다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줘..." 라고 하셨다.
한번은 농담으로 "네,어머니. 꼭 오늘밤에 천국 가시도록 기도할게요." 했더니 "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기도하면 어떡하냐*." 야단을 치면서도 늘 그때를 준비하셨다.
그 어머니께서 선종하시기 전
"막내신부, 고마웠어.내가 먼저가서 기다리다가 신부가 올 때 제일 먼저 마중 나갈게." 하시며 주님 안에서 당신의 삶을 마감하셨다.
사실 잘 죽을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살고 있는 경우는 없다.
그리고 잘살아온 사람들만이 잘 죽을 수 있다.
왜냐하면 깨어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현실에 급급하여 인생을 정리하고 마무리할 기회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죽음을 준비하면서 살 때 현재도 행복할 수 있다.
대림절은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동시에 우리의 죽음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주님의 오심으로 우리에게는 영원한 복락, 천국의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주에는 희망의 촛불,
둘째주에는 평화의 촛불,
셋째 주에는 기쁨의 촛불,
넷째 주에는 사랑의 촛불,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촛불을 켜 들고 주님 탄생을 축하하게 된다.
이 큰 기쁨의 잔치에 빠짐없이 참석할 수 있도록 오늘을 잘 살아야 하겠다.
'늘 깨서 있으라'
"그러니 깨어 있어라."(마태 24,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기다림으로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깨어 있음과
준비라는
기다림은
가장 좋으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다림의
여정에서는
주님보다
앞설 수 있는
순서는 없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기다림 뒤에
찾아오는
주님의 탄생입니다.
기다림이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의
만남이 됩니다.
기다림이라는
만남 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길은
우리가 돌아갈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기다림의 여정을
필요로합니다.
기다림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사랑임을
깨닫는 시간 되십시오.
기다림안에
주님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다림이라는
대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제게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신부가 되면서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것에 많이 능숙해졌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이렇게 능숙한 것을 보면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 외에 설명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기도 했겠지만 갑자기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옛날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정말로 오래전에 모아 놓았던 자료를 보게 되었습니다. 자그마치 25년 전에 모았던 자료입니다. 당시에 저는 글을 쓰는 것과 말하는 것을 정말로 어려워했지요. 초등학생보다도 더 못쓴다는 평가를 받는 저의 글 실력과 남들 앞에만 서면 울렁증 때문에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 신학생으로 신부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하고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보다가 좋은 구절을 찾으면, 또는 주보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신부님들의 강론들을 신학교 저학년 때부터 모았습니다. 그리고 게을리 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면 바로 꾸준히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지요. 어느 한 분야에 1만 시간만 소비를 하면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루에 2~3시간씩 10년을 소비하면 1만 시간이 됩니다. 저 역시 글을 잘 쓰고 말을 잘 하기 위해서, 신학교 들어가자마자 책 읽는 것이나 스크랩 등의 준비를 10년 정도 하다 보니 사제서품을 받음과 동시에 전문가는 아니지만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만약 신학생 때 그런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지금의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글을 잘 쓰지 못하고 울렁증으로 인해 제대로 말하지 못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러한 부족함이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결국 저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새해에 해당하는 대림 제1주일입니다. 이 땅에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복음은 주님께서 오실 날을 위해 준비하고 깨어 있을 것을 명합니다. 노아시대에 방탕과 타락의 생활로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홍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열심히 방주를 만들어 준비를 했던 사람들은 살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허망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아의 가족들은 정말로 흠 없는 사람들이었을까요? 다른 사람들보다는 의로운 사람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부족함이 많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로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에 또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그들은 방주에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준비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즉, 주님의 바람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 준비와 노력을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준비된 상태가 성공의 비결이다(H. 포드).
다람쥐의 건망증
다람쥐는 도토리철인 가을이면, 도토리를 입주머니 가득 넣어서 자기만의 공간에 감춰둔다고 합니다. 겨울잠을 대비한 행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 같으면 한 곳에 크게 창고를 만들겠지만, 다람쥐는 여러 곳으로 분산해서 저장을 합니다. 한 곳에 쌓아두면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다람쥐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다람쥐의 지능입니다.
건망증이 심한 동물로 알려져 있는 이 다람쥐는 자신이 숨겨둔 창고가 어딘지를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겨둔 도토리에서 싹이 나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지나서 커다란 도토리나무로 성장하게 됩니다.
겨우내 먹을 양식을 준비하는 행동이지만, 심한 건망증으로 자신의 노력이 헛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커다란 도토리나무로 성장시킬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떠한 준비도 쓸데없는 준비가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어떠한 준비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특별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너’는 데려가고 ‘나’는 버려지고?
정연정 신부님
오늘부터 교회는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 곧 새로운 ‘때(時)’를 시작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교형자매 여러분들께 한없이 자비로우신 주님의 은총이 늘 충만하시길 기도드립니다.
1. 칼로 보습을 만들 때(제1독서, 이사 2,1-5)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더 이상 칼을 쳐들 이유가 없으니, 전쟁 무기를 농기구인 보습으로 개조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할 점은 ‘민족들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후, 공동으로 협약하여 전쟁 무기를 파기(破棄)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빛 속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은 전쟁과 파괴를 일삼는 삶을 내던지고 평화와 보존을 추구하는 길을 택하게 됩니다.
언젠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전쟁은 미친(어리석은) 짓입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교황님께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우리들에게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비신앙적인 전쟁의 속성을 끊임없이 깨우쳐주십니다. 모름지기 주님 안에 사는 이는 지혜롭게 거듭나게 됩니다.
2. 빛의 갑옷을 입을 때(제2독서, 로마 13,11-14ㄱ)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가」에서 “무엇인지 모르는 나는 말을 더듬는다오”라며 자신의 모습을 고백했습니다. 성인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께 관한 특별한 지식(깨달음)에 대하여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무엇인지 모르는 나’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하느님 앞에 깨어 있는 영’이 될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한다고 항상 가르쳤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형제 여러분, 지금 잠에서 깨어납시다! 그러면 빛의 갑옷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어둠을 감싸서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라고 권고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기로 회심했다고 합니다. 이렇듯이 자신으로부터 새롭게 깨어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어둠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3. 이제 마음을 바꿀 때(복음, 마태 24,37-44)
오늘 복음에 보면 ‘때’라는 표현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즉 ‘노아 때’,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 ‘사람의 아들이 재림할 때’,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신 ‘때’는 바로 우리들의 믿음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알아보는 것이야말로 ‘구원의 때’를 누리도록 이끌어 줍니다.
「레미제라블」의 작가로 잘 알려진 빅토르 위고는 하느님 현존을 느끼며 “왕이여! 아버지시여! 피난처여! 죄인의 희망이여! 영원한 일꾼이여! 영원한 추수꾼이여! 태초의 주인이며 종말의 심판자여! 빛으로서 세상을 만드신 분은 바로 당신이십니다”라고 찬미하면서 “그분 없이 걷는 자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라며 늘 자신을 깨우쳤다고 합니다.
4. 나를 주님께로 재촉하는 ‘때’
저는 지난 8월 30일에 화곡본동 주임 신부로 부임했습니다. 약 11년 6개월 만에 이른바 ‘본당 공동체’ 안에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제로 산다는 것이 어디서나 같은 것입니다만, 제가 느끼는 ‘본당 신부’는 ‘예수님의 마음’을 실제로 더 살 수 있는 자리라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다른 어떤 소임 때와는 달리, 그다지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더라도 ‘병든 이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갇힌 이들, 잃어버린 이들’을 좀 더 쉽사리 찾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주임 신부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안도감(?)보다는 오히려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재촉하는 ‘때’에 올바로 응답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려고 합니다.
교형자매 여러분, 지금도 주님께서는 “깨어 있어라”고 하시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당신께로 재촉하여 부르십니다. 부디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서 선사(膳賜)하신 ‘때’ 안에서 구원의 은총을 충만하게 누리시길 빕니다. 아멘.
늘 깨어 있어라.
염철호 요한 신부님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는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이 두 가지 기다림을 모두 표현합니다.
먼저,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세월이 흐른 뒤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이사 2,1-5).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길을 배울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이 모든 민족들의 재판관이 되실 것이고, 모든 민족이 화해하여 한 나라, 곧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여기서 구심점 역할을 하도록 선택된 이들이 이스라엘 민족이고, 이스라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당신께로 모여드는 것이 하느님 계획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되었다고 선포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예수님께서도 당신과 함께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시고, 당신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온전히 드러났음을 선언하십니다(마태 4,17).
하지만 하느님 나라가 아직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신을 통해 이미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왔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다시 오실 날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마태 24,37-44).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그날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그날이 되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이 당신께로 모여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비로소 온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이 드러나고, 오직 그분의 뜻으로 통치되는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세상 마지막 날, 곧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날은 갑작스럽게 닥칠 것입니다. 아니 그 시간이 이미 우리 코앞에 닥쳐와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야기합니다(로마 13,11).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날과 시간을 알지 못하기에, 또 그렇게 2000년을 기다려왔기에 재림에 관한 그분 약속에 많이 둔감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재림이 오지 않으리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당장 하느님 나라가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해 살아가는 이들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고 그 나라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로마 13,12) 살아가면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지 않으리라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번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다시 한 번 우리 모두 종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임을 명심합시다. 그리고 항상 깨어서 그날을 준비합시다. 그러지 않으면 생각지도 못한 때에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말씀하신다면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루카 13,27)
깨어 있어라.
문성호 신부님
오늘 우리는 교회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을 맞이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 시기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기념적 의미와 언젠가 맞이할 재림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미래의 사건인 종말론적 의미가 중첩되어 있는 기다림의 시기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고 구세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 대림 시기를 시작하면서 교회는 신자들이 스스로를 정화하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 것을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깨어 있어라”는 것입니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 국내외정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워서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치 바다 위에서 갑작스러운 큰 풍파를 맞닥뜨린 조각배 마냥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는 신세처럼 느껴집니다.
한 나라의 국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이 특정한 인물과 결탁하여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잃어버린 채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였고, 야당 지도자들 역시 당리당략에 사로잡혀 이 땅에 살아가는 민초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게다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은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는 보호무역주의 정책과 아메리카 우선주의를 공공연하게 내세울 것으로 예상되어 우리나라 방위와 대미무역관계의 험난함이 예상되는 절박한 시점에 놓여 있습니다. 총체적인 난국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우리는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조심스럽지만 가지게 됩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 시기가 과거의 기념적 의미와 종말론적 의미인 미래의 희망을 함께 포함하고 있듯이 불안과 위기와 불확실함이 가득 차있는 이 시기가 이 땅에 살고 있는 국민의 성숙한 의식과 단합된 힘으로 독재적 정치 상황과 한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는 경제적 불평등 상황을 극복하고 모든 이가 인간다운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새로운 도약을 마련할 기회라는 사실을 믿고 싶습니다.
시대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는 이 시기에 신앙인으로서‘깨어 있음’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우리 자신이 이 땅에 살면서 나 자신의 눈앞의 이익과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보다 큰 시대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새롭게 전개될 미래의 시대에 무엇을 희망하고 살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언젠가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그분께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바라는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날이 속히 도래할 수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아멘.
구원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정치를 하는 데 있다.
박영식 야고보 신부님
‘대림절’은 구세주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또한 구세주께서 세상종말에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시기이다. 교회는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 시대(590-604년)부터 예수님의 성탄일을 준비하고 그분의 재림을 준비하기 위해 그분의 성탄 전 네 주일을 대림절로 정했다. 예수님의 성탄은 우리 구원의 시작이요 그분의 재림은 구원의 완성이다. 그분은 인류구원의 역사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와서 결정적으로 구원을 베풀고 최후심판을 집행하실 것이다. 그래서 고대 갈리아 지방(프랑스)에서는 대림절을 회개의 시기로 정하고 회개를 상징하는 자색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리며 대영광송과 알렐루야 기도를 바치지 않았다. 교회는 오늘도 이 전통을 지키고 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세상종말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이미 실현되기 시작했다.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것이 세상종말에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세상종말을 당신의 부활로 앞당기셨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세상종말에 살기 시작한 것이다. 하느님이 주실 최종적인 보상과 심판이 이미 집행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지금 선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한 상을 받고 지금 죄를 짓는 자는 최후심판을 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세상종말에 베푸실 포상과 집행하실 심판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이미 실현되고 있으며 세상종말에는 성취될 것이다. 세상종말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서 현재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보라, 나는 세상종말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마태 28, 20)
예수님은 사랑, 진리, 정의를 실행하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며 이미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으로 가득 채워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임금님이심을 증언하자. 만일 많은 사람들이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았다면 순식간에 세계는 재앙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눈에 띄지 않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이 세상이 이 정도라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곳이 된 것이 아닐까?
“사랑이다. 이 세상을 돌게 하는 것은 사랑이다.”(프랑스 민요 가요집)
우리는 인류가 예수님의 권능에 힘입어 오늘보다 더 많은 사랑과 진리를 실천하기를 희망한다. 그분이 인류를 세상종말이라는 완성을 향해 이끌고 가시기 때문이다.
정치와 종교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국민의 생명과 인권과 행복에 관계되는 모든 정책을 입안하여 시행하는 과정에서 신자들과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밝혀주어야 한다. 특히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이 헌법을 어기고 뇌물수수를 강요했다고 해서 물러가라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 오늘 국익을 위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대안을 제시해야 하겠다. 국정이 마비상태에 빠져 경제가 망가지고 있다. 특검으로 대통령의 잘못을 밝히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라 살림이 거들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정치인들은 각기 당리당략에 치우쳐 국익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부패의 장본인인 대통령처럼 매국행위를 저지르게 되지 않을까? 신자들은 당리당략을 확보하기 위해 언론을 매수하고 국민들을 기만하고 비리와 부정을 저지르는 우리나라 정치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세례 때 받은 그리스도의 왕적인 직무와 예언직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하겠다.
성직자들도 정치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국민이기 때문에 헌법에서 보장한 권리를 보장받는다. 신자들은 정치에 참여하는 성직자들을 비난할 수 없다. 다만 교회법에서 성직자들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기 때문에 정치가가 될 수 없다. 미국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된 신부들이 몇몇 있었는데 교황청에서 사제직을 포기하든지 상원의원직을 그만 두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이르셨다. 그들은 다 사제로 남는 쪽을 택했다. 아르젠티나에서는 어느 주교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는데, 교황님이 양자택일하라고 명하시자 그는 사제직을 버리고 대통령직을 택했다.
“변화란 항상 불안하게 한단다.” 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은 반대로 변화가 없으면 불안합니다.”하고 대답했다.
이는 나이의 차이를 드러낸다. 스스로 추진하는 변화는 젊고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변화가 요구되는 시대에 제자리에 머무르는 것은 후퇴이다.
“변화는 살아남기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다.”(K. Lagerfeld)
변화는 두렵고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생존에 필수적이요 안주하는 것보다 모험이 적다. 오직 바보나 죽은 자만이 절대로 자기의 의견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깨어 있어야 만날 수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국 ‘더 선’은 사자와 인간의 12년지기 우정을 소개했습니다. 사연의 주인공은 현재 콜롬비아에서 동물보호센터를 운영 중인 애나 줄리아 토레스(52)로 그는 12년 전 여행 중 본 서커스에서 사자 한 마리를 만나게 됐습니다.
서커스에서 불구덩이를 넘으며 묘기를 보이던 이 사자는 당시 영양실조 상태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토레스는 서커스단과의 끈질긴 협의 끝에 사자를 구출하는 데 성공, 자신이 운영하는 동물보호센터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녀의 정성어린 간호 끝에 사자는 기력을 회복했습니다.
그 뒤 12년이 지난 지금까지 토레스와 사자는 우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특이하게도 사자는 토레스가 구해준 뒤부터 무슨 일이 있으면 감사의 표시로 포옹을 했습니다. 공개된 사진에서도 사자는 토레스를 앞발로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있습니다. 그런 사자에게 토레스는 볼에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다.
사자와 인간의 감동적인 우정 스토리는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지난 1969년 영국의 두 남성은 백화점에서 새끼 사자를 구입한 뒤 집에서 키웠습니다. 하지만 몇 년 후 사자의 덩치가 너무 커져 키울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사자를 케냐의 한 국립공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 두 남성은 ‘사자가 주인을 기억하지 못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우려 속에서도 사자를 만나러 케냐로 향했습니다. 당시 밀림에서 나타난 사자는 이들을 보자 힘차게 달려와 마치 인간처럼 감격의 포옹을 했습니다. 또 사자는 자신의 가족들을 데려와 소개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재회 모습이 담긴 영상은 2008년 유튜브에 공개돼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감동 영상 리스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마치 사자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기간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하느님의 어린양이셨지만 우리가 만나게 될 그분은 사자와 같은 심판자일 것입니다. 야생 사자는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라면 공격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면 기억하고 안아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이는 마치 야곱이 에사우를 만나러 가는 과정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에사우는 자신의 장자권을 내어주었고 야곱은 그 에사우를 만나기 위해 그 은혜를 받은 것만큼의 노력으로 얻은 것들을 에사우에게 바쳐야했습니다. 이 삶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는 삶이란 그리스도께서 언제 오시던가에 상관없이 그분을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삶입니다. 게임을 하지 말고 공부를 하라고 했다면 아이는 엄마가 들어올 때 게임을 하고 있지 말아야합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깨어있으라고 말씀하시며 ‘노아 시대’를 그 예표로 보여주십니다. 노아 시대 때 배를 만드는 사람이 없었을까요? 분명 바다 옆에 사는 사람들은 배를 만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배들은 커다란 홍수를 견뎌낼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나러 오시는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노아에게 마지막 날 구원받을 수 있는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이 함께 맷돌질을 하여도, 두 사람이 함께 밭을 갈아도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한 사람은 주님의 뜻임을 알고 하는 것이고 한 사람은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그 행위가 주님의 뜻에 맞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나치시대 때 히틀러의 뜻에 따라 수많은 독일 군인들이 선량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었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 명령에 항거하여 투옥되거나 죽거나 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히틀러의 명령에 복종하였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명령에는 불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전쟁 통에 죽어간 이들의 구원은 노아 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를 지배하는 어둠의 세력 밑에 살아왔습니다. 사실 그것이 우리를 지배하는지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삶이 아니라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당신 뜻을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의 뜻은 이웃을 살리는 것이지 죽이는 일이 아닙니다. 노아가 평생 한 일도 배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이는 동물들을 살리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동물들이란 나의 도움이 없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는 우리 이웃들입니다. 평생 그들을 위한 삶만 살아왔기 때문에 마지막 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만이 주님의 뜻이었지만 사람들은 각자 자아숭배교에 빠져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갔습니다. 그 자아가 바로 히틀러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런 삶이 잠자는 삶입니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입니다. 동굴 우상으로도 잘 알려진 이글은 현실에 묶여 아무 생각없이 살고 있는 인간들을 풍자한 글입니다. 사슬에 묶여있는 인간들은 동굴 벽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들을 실체라고 착각합니다. 사슬을 끊고 동굴 밖으로 나가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철학자)가 동굴로 돌아와 이데아의 모습을 전하며 사람들을 각성시킵니다. 그렇지만 비루한 현실에서 안주하기를 바라는 동굴 속 꼭두각시들은 그 선각자를 죽여 버립니다.
깨어있음이란 ‘자각’과 같은 뜻입니다. 무언가를 깨어 볼 수 있는 상태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처럼 혼자만 눈을 뜨고 있고 나머지는 장님이라면 그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이 보는 세상이 바로 깨어있는 세상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동물처럼 살아가는 이들을 깨우치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어둠에 사는 사람들은 빛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어둠의 삶에 불을 키려는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박해를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노아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악하고 어둡습니다. 그 어둠에서 촛불을 켜는 일인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사람은 밤이 와도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 촛불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 불이 켜 있다면 그 사람에겐 밤이 없고 죽음도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대림은 주님의 오심을 깨어서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빛의 갑옷을 입고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선물을 준비해서 먼 길을 떠났던 동방박사처럼 우리들도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우리들의 나눔, 희생, 사랑을 선물로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는 2013년 ‘신앙의 해’를 맞으면서 새로운 시대의 복음화를 이야기 하였고, 5가지의 과제를 교서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매년 하나의 과제를 실천하고자 다짐하였습니다. 오늘은 5가지의 실천과제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2017년도에 우리가 실천해야할 과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신앙은 말씀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서품 성구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시편 126장)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마음에 담았고, 제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들이 열매 맺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없으면 어떻게 복음을 믿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어떤 쌍날칼 보다 날카롭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빛이었습니다. 말씀은 희망이었습니다.
둘째, 신앙은 기도로 자라납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있어야 달릴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시작되는 신앙은 기도가 있어야 하느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나의 시간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이제 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성모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항상 기도하십시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은 감사하게 되고, 기도하는 사람은 기쁨으로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신앙은 교회의 가르침으로 다져집니다. 복음화에는 4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 공동체의 모임, 복음의 실천, 보편교회와의 일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셨고,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시대의 징표를 해석하고, 신앙인들이 가야할 길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성당의 재정에 관심을 갖고, 성당에서 하는 행사, 피정, 전례에 기쁜 마음으로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본당 주보, 평화신문, 가톨릭 신문, 신심서적, 교황님의 회칙을 자주 접하면 좋겠습니다.
넷째, 신앙은 미사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미사는 ‘교회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우리 각자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쪼개진 빵이 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삶을 쪼개어 나누어 줄 수 있는 힘은 바로 성체성사에서 비롯됩니다.우리는 오늘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며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주님 사랑의 힘을 믿고 전해야 합니다. 사제는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교우들은 미사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다섯째, 신앙은 사랑으로 열매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굶주리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나에게 해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말만 앞세우고 행동하지 않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나무라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실천이 없는 신앙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기다림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기다림은 어떤 약속을 의식하고 기다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입니다. 기다림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다림은 함께 하는 행동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시간, 매년 다가오는 성탄이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했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세상은 업적과 실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살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집안에 손님이 오시면 청소를 하고 손님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듯이 우리는 판공성사를 통해서 우리 마음에 오시는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모셔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왜 오셨는지, 무엇을 하셨는지, 무엇을 주셨는지 생각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평화의 길-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1주일 아침성무일도 첫째 번 후렴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도 수도영성에 지대한 몫을 합니다. 가사에 곡까지 곁들이면 말할 수 없이 흥겹고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 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언젠가 그날이 아니라 대림시기 하루하루가 기쁨과 희망의 젖과 꿀이 흐르는 그날입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 대림 제1주일입니다. 마침내 임재臨在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마라나 타! 오소서, 주 예수님!’
어제 화답송 후렴처럼 주 예수님께서 마침내 우리를 향해 출발하셨다는 기쁜 소식의 촛불 하나가 영롱하게 어둠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제 2016.11.26.토요일, 대림 제1주일 제1 저녁기도 시간에 맞춰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희망의 촛불들, 평화의 촛불들이 하늘의 별들처럼 한반도 남반부를 환히 밝혔으니 이 또한 주님의 놀라운 은총의 표지입니다. 분명 이 희망과 평화의 빛은 동시에 한반도 암흑의 북반부 및 동북아를 환히 밝혔을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기다릴 분, 궁극의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대림시기입니다. 아니 우리 일상의 삶 모두가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입니다. 영롱하게 빛을 발하는 촛불이 우리 모두 주님의 빛 속에 살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오늘 강론의 주제입니다.
첫째, 평화롭게 살아갑시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이들이 주님의 빛 속에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이런 평화의 비전과 실행 또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비전은 평화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실천해야 할 평화의 비전입니다.
오늘 주님은 1독서를 통해 우리의 영원한 평화의 비전을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의 결의를 대변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하느님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하느님의 산, 불암산 기슭 하느님의 집인 성 요셉수도원 대림 제1주일 미사에 참석하여 주님으로부터 당신의 길, 평화의 길을 배우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하여 평화의 길을 걷게 된 우리들입니다.
이사야를 통해 계시된 다음 인류의 영원한 평화의 비전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런 주님을 닮은 위대한 평화의 지도자들이, 평화의 일꾼들이 목마르게 그리운 시절입니다. 그러나 이런 평화의 사람을 그리워할 것도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제 삶의 자리에서 각자 평화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주님의 행복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둘째,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오늘 제2독서 로마서를 통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품위있게 살아가는 이들이 주님의 빛속에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정한 처신을 일깨웁니다. 대림시기의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무슨 말을 더 붙이겠습니까. 주님의 빛이 밝아오기 시작했습니다. 바야흐로 빛의 갑옷을 입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주님의 빛 속에서 품위 있게 살아가야 할 대림시기입니다.
매일의 영적전투에 이보다 더 좋은 준비는 없습니다. 대림시기뿐 아니라 평생을 이렇게 살아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깨어 살아갑시다.
깨어 사는 이들이 주님의 빛 속에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깨어있는 자들이 진정 살아있는 이들입니다. 잠들어 있을 때는 어둠이지만 깨어 있을 때는 빛입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 영혼들 어둠 속에 잠들어 살다가 화를 당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 두 사람이 들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 합니다.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 합니다. 깨어 있던 이는 데려가고 잠들어 있던 이는 버려둘 것이라 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외적환경이지만 내적환경은 빛과 어둠, 깨어 있음과 잠들어 있음 등 너무 달랐습니다. 하느님이 내린 심판이 아니라 깨어 살지 않음으로 스스로 자초한 화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님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늘 회개하는 마음으로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주님은 대림 제1주일 우리 모두 주님의 빛 속에서 평화롭게, 품위 있게, 깨어 준비하며 살 것을 촉구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으로 옷입혀 주시고 또 그위에 빛의 갑옷을 입혀주십니다.
“자, 우리 모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갑시다!”(이사2,5). 아멘.
품위 있게 살아간다는 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술을 마셔보니 그렇더군요.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에 꼭 뒤따르는 것이 이성상실이요 초대형사고입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들이마시지만 나중에는 술이 사람을 들이마십니다. 평소 성인군자처럼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바뀝니다. 갑자기 기고만장해집니다. 평소 마음 속 깊이 담아두었던 분노와 공격성을 아낌없이 표출합니다. 아침에 깨어나 보면 멀쩡한 가재도구가 없습니다. 결국 술로 인해 큰코다치고 풍비박산 난 가정 한두 번 본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이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꼭 뒤따르는 것이 갖은 불평불만이요 험담이요 뒷담화입니다. 멀쩡한 사람들 도마 위에 올려놓고 돌려가면서 난도질합니다. 과도한 음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로 발전합니다.
이런 면에서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니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노력해야할 덕목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품위’입니다. 과도한 술꾼들을 위해 바오로 사도께서 정확한 처방전을 내려주셨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생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로마서 13장 12~13절)
품위 있게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모습일까, 고민해봅니다. 아무래도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요?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존엄성과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 인간이 기본적으로 갖춰야할 상식과 예의범절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구분 짓는 영혼을 돌보며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깨어있는 삶이겠습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깨어있어라.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오복음 24장42~44절)
품위를 상실한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이성과 평정심을 상실한 상태이니 행실이 얼마나 기괴하겠습니까? 한 인간 안에 이성과 지성이 사라지고 육체만이 남게 되니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고방식이나 행동거지가 유치원생보다 못합니다. 결국 동물적 본능에 따라 행동하게 됩니다.
품위를 상실한 사람들은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은 뭔가에 잔뜩 취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뭔가에 잔뜩 빠져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대체로 무엇에 취해 있고 무엇에 빠져있습니까? 술에 잔뜩 취해 있습니다. 재물에 완전 빠져있습니다. 부질없는 명예욕에 취해 있습니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인기와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빠져있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품위 있는 삶’이 쓰레기 취급당하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여기도 쓰레기 저기도 쓰레기, 쓰레기 천지입니다. 저리도 갖은 악취가 진동하면서도 그 냄새를 맡지 못하고 스스로를 더 이상 우아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잠을 못 이루는 시대입니다. 품위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저 착해빠져 정도(正道)만을 걷고 있는 착한 사람들이 모자란 사람 취급당하는 슬픈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살레시오 회원이자 사목자로서 요즘 크게 가슴을 치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나라가 이 꼴이 되기까지 방관하고 있었던 소극적인 제 모습이 너무나 송구스럽습니다. 몇몇 거짓 예언자들이 잔뜩 뭔가에 취해 있을 때 목숨 걸고서라도 반대의 깃발을 올려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해 크게 후회가 됩니다.
시야를 좀 더 넓혀야겠습니다. 나만, 우리 공동체만 챙기지 말고 고통 받는 이웃도 생각하고, 우리민족도 생각하고 국가도 더 많이 생각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암울해도 또 다시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참담함에도 불구하고 동녘에서는 다시금 해가 떠오릅니다. 힘겨워도 힘을 내야겠습니다. 납득하기 정말 힘든 이 고통스런 현실 앞에 신앙인으로서 각자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결코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어디선가 신선한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아야겠습니다. 어떻게든 툴툴 털고 일어서야겠습니다. 어떻게든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이 참혹한 세상을 견뎌내야겠습니다.
하느님을 잃지 않으려면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교회력으로 한 해가 지나고 새해를 맞이했고 그래서 대림절입니다.
그런데 한 해를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을 사람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후회를 합니까?
아니 무엇에 대해 후회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허송세월虛送歲月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십니까?
주식투자를 잘못하여 돈을 잃은 것에 대해 후회를 하십니까?
말실수 크게 하여 신의를 잃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은 것을 후회하십니까?
이런 것들도 우리가 후회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겠지요.
그런데 우리 신앙의 관점에서 후회한다면 무엇을 제일 후회해야겠습니까?
이러저러한 이유로 교회 일을 소홀히 한 것?
서로 사랑하라고 주님 말씀하셨는데 그러지 못한 것?
우리 프란치스칸들에게는 우리 영성을 충실히 살지 못한 것?
역시 이런 것들도 우리가 후회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제일 후회해야 할 것은 이것 이상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잃은 것 또는 하느님을 놓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참으로 후회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어찌 보면 하느님 뜻을 실천치 않은 것보다도 더 후회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을 잃지 않는다면 하느님 뜻도 실천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하느님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고 하느님을 얻으면 진정 모든 것을 얻는 것임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지난 해 하느님을 잃은 것을 제일 후회하는 사람이라면 올해는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느님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정신을 팔지 않는 거고, 뒤집어 얘기하면 정신을 차리는 겁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정신)과 주님의 영에 대해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술이나 먹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 하느님을 잃었다면 이는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서 파우스트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팔듯 육의 영에게 우리의 정신이 팔아 주님의 영을 잃은 것이고, 주님의 영을 잃었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팔지 않는다는 것은 먹고 노는데 정신이 빠지지 않거나 그렇게 하기 어렵다면 술 먹고 노는 것을 아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거 우리 교회가 과거에 많이 하던 단식이나 재계의 방법이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런 것을 어둠의 행실이라고 하며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적극적인 방법이 아니고 제일 좋은 방법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떻게 안 먹고 안 놀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정신을 팔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정신을 차리는 것이고 잃었던 주님의 영을 찾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깨어있으라고 하시는데 깨어있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프란치스코는 기도와 헌신의 영(정신)을 끄지 말라고, 다시 말해서 지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의 영을 지니고 언제나 기도할 때 그리고 헌신의 영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할 때 우리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하느님을 잃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 거기에서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대림시기, 우리 모두 잃었던 주님을 찾도록 하십시다.
잠에서 깨어 가면을 벗고 맞이하는 주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절은 자비와 온유를 갖추시고 죄스런 인간을 구원하시려 오시는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묻혀 있는 이 세상에 빛을 주시기 위하여, 몸소 빛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니 기쁨으로 맞이해야겠지요.
또한 대림절은 세상 종말에 당신의 왕권을 온전히 세우시려고 심판자로 영광스럽게 오실(24,30)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 끝날에 다시 오시어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 괴로움과 눈물을 영원히 씻어 주실 것이므로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기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어떻게 주님을 기다려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누구를 왜 기다리는지를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인생사에 수많은 기다림이 있고 그 동기도 천차만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사랑으로 오시는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찾기도 전에 먼저 기다리시는 사랑과 관계회복과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성탄 캐럴이나 일찍부터 반짝거리는 장식에 파묻힌 낭만적인 분위기나 감성적인 기쁨을 주기 위해 오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이 전하는 예수님의 성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요. 경배하러 한걸음에 달려온 목동들도 있었지만, 아기를 죽이려 말을 몰았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구유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려고 험하고 먼 길을 걸어 온 동방박사들과는 달리 헤로데의 군사들은 인근의 사내아이들을 몰살해버렸지요. 그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고 끊임없는 반대와 비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는 것으로 막을 내렸지 않습니까!
대림절은 수난을 통해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신 그 주님을 사랑으로 기다리며, 사랑으로 고통을 수용하는 때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고,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실 것이기에 잠에서 깨어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깨어 있음은 늘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을 말하고, 틀에 박힌 사고방식, 습관과 세속적인 행동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을 뜻합니다. 성 베르나르도도 늘 깨어 있기 위해 “이것이 영원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계속 물었다고 하지요.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나, 주님을 사랑으로 바라보고 기다렸으면 합니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그분의 온유와 연민에 적극 참여해야겠습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품위 있게 살아가야겠지요. 거짓과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사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로마 13,13).
우리 모두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시고 관계를 회복하시며, 새로운 질서를 이루시려 오시는 주님을 합당하게 맞이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무심코 젖어드는 타성과 탐욕으로 어두워진 영적 감각, 진리를 식별하지 못하는 무분별, 복음적 가치관의 상대화, 자기중심적 사고로 굳어진 가면들을 벗어버려야겠지요. 나아가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여야 하고 불의에 맞서야 합니다.
기다림의 시작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성탄축일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합니다. 대림이라는 말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기다립니까? 주님을 기다립니다.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해 보면,
첫째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우리의 구원자로 탄생하셨고 실제로 인류에게 구원의 은총을 주시고 계시니 그 날을 경축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도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합니다.….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산다고 하잖아요…
둘째는 세상의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심판자 주님을 기다립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그때 하늘에 사람의 아들의 표징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세상 모든 민족들이 가슴을 치면서, 사람의 아들이 큰 권능을 떨치며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마태24,30).하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도신경에서도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미사 안에서도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복된 희망을 품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대림절에 자주 부르는 성가 91번 ‘구세주 빨리 오사’ 가사를 보면 1절. “구세주 발리 오사 어두움을 없이 하며 동정 마리아에서 탄생 하옵소서. 원조들이 범죄한 후 성조에게 허락하신 메시아를 보내소서. 어지러운 세상에 방황하는 우리들의 간구함을 들으사 보내 주옵소서. 2절. 우리 죄를 잊으시고 참회하는 자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 모든 유혹 항상 우리 괴롭히니 이 어려움 이기게 도와주옵소서. 3절. 고통 중에 만민들은 메시아를 고대하여 애타게 기다리오니 오소서 메시아여. 이 인류를 돌보소서. 구세주 언제 오나. 언제 오시나.” 입니다. 참회하는 자에게 용서를, 그리고 시련과 어려움, 온갖 유혹에서 지켜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바로 대림 기간에 준비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세주 빨리오사! 어두움을 없이하실 분으로 빨리 오시면 좋으련만 지금 당장 심판자로서 오셔도 당당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1코린1,8).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1코린1,9)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위치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쓰레기통’의 동의어는 ‘성직자’랍니다.
쓰레기통 같은 사람
남들이 인상 찌푸리는 것을 껴안는다. 아무 불평 없이.
가운데 자리 마다하고 구석으로 간다. 아무 불만 없이.
화려한 것, 화려한 곳만 찾는 성직자가 있다면
그는 쓰레기통 같은 사람이 아니라 쓰레기일지도 모른다. -정철-
각자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쓰레기가 됩니다. 이러저러한 환경이나 여건을 탓하거나 핑계 대는 일 없이 근본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 내리면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좋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말씀,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주 예수님 안에 머물러 오시는 주님을 당당히 영접해 드려야겠습니다.
예비자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성당을 찾게 된 동기가 이웃에 사는 부부의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부부의 기쁘고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성당에 가면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는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고 어린 자녀에게 일직 신앙에 눈뜨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나오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하느님 말씀 따라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전교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느님때문에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장가든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이웃집 남자랍니다. 어느 여성잡지에서 “우리나라 남편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1위는 바로 ‘이웃집남자’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도대체 이유는 뭘까?
이 설문에 참여한 한 남성이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허구헌날 우리집 마누라는 이렇게 소리쳐요~
“이웃집 남자는 돈도 잘 벌어온다더라, 인간성도 좋고, 날이면 날마다 부인에게 비싼 옷도 덥석 사주는데 당신은 뭐꼬? 집안일도 척척 잘하재, 게다가 아이들 공부도 도와주재, 처갓집 일도 꼼꼼히 챙겨주는 걸 잊지 않는다더라. 도대체 당신은 잘 하는 게 뭐꼬?”
그런데 참 이상하다. 아무리 이사를 다녀도 옆집엔 꼭 그런 남자만 산다!! 항상 비교를 해서 우리의 행복지수가 하위라고 하네요!
절대 비교금지!!!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모상대로 창조하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분께서 주신 탈렌트를 잘 활용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겠습니다. 욕심 부리지 않고 자기 그릇대로 빛을 발하는 것이 주님을 잘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빛을 가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꾸 비교하면 비참해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셋째 의미는 우리의 일상 안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기를 희망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뜨거운 감동을 주셨던 그 기쁨을 기다립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을 보면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키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서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묵시록 3장20절에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문을 여는 일은 우리의 몫입니다. 사실 성당에서는 매일 미사가 봉헌 되고 있습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 주시고 영혼의 양식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런 저런 핑계로 그분을 모시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미사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기도하는데 하느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불평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 분은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시편을 보면 “올바른 이라야 찬미가 어울리도다.” “겸손한 자의 기도는 하늘의 구름을 꿰뚫는다.”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사도는 청하여도 얻지 못하는 까닭은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3)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기에 앞서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허물이 있으면, 잘못이 있으면 고해성사를 통해 용서를 받고 청해야 효과 있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고해 성사를 통해 영혼을 맑게 하시기 바랍니다. 집에 손님이 오면 청소를 하고 꽃꽃이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무엇보다도 영혼의 청소를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기다리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을 조배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당신 앞에서 무릎 꿇어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보다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것을 가져갈 수 있기를 희망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지 않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에 앞서 언제나 기다려 주시는 주님이 계심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날들 이루시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끝 날이 언제 오든 아무 걱정 하지 마십시오. 기다리시는 그분이 계신데….그날을 대비하여 지금 깨어 있으면 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49,18).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새해 덕담
박영봉 안드레아 신부님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한 주간동안 사랑의 왕권을 행사하시면서 행복을 전해주고 또 누려보셨나요?
날씨가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겨울 맛이 납니다.
어제 오늘 본당의 성탄 장식을 준비하는데 많이 추웠습니다.
감기 걸리지 않게 건강 관리도 잘 하세요! ^^*
형제 자매님,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새해입니다.
새해가 되면 집안 어른께서 가족들에게 덕담을 해줍니다.
오늘 전례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에게 덕담을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 덕담을 함께 들어보도록 합시다.
오늘 전례의 독서들은 특정한 한 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세상 모든 민족들이 예루살렘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올 날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그날이 되면 주님께서 세상의 심판관이 되시고 사람들은 그분의 말씀에 따라 칼로 보습을, 창으로 낫을 만들고 이 세상에서 전쟁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나 그런 날은 쉽게 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멀리 동방에서도 현자들이 그분을 찾아왔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은 힘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유다인들의 임금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명패가 히브리말, 라틴말, 그리스말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전합니다(요한 19,19-20).
살아생전에 암탉이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 모으듯이,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께로 모으려고 애쓰시며, 응하지 않는 백성들을 보며 한탄하시고 눈물까지 흘리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 위에서 온 세상 사람들을 당신께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답하여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모여왔고 그래서 형성된 교회는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를 초대해주신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과 만날 날, 곧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얘기해주십니다.
그날은 모든 사람에게 같은 날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완전한 선택을 받게 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버림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깨어 있어라.”고 당부하십니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자지 않고 매일 깨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있어라.”고 하신 것도 그런 뜻은 아닐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깨어 있으라.”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만났을 때 버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쉽진 않습니다.
그래서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깨어있을 수 있는지를 잘 설명해줍니다.
바오로 사도가 권하는 깨어 있는 방법은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도 사람들에게는 양심이 있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할 때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합니다.
아무리 양심에 털이 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이 다 보고 있는 백주 대낮에 나쁜 짓을 하진 못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렇다면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믿는 하느님께서 언제나 지켜보신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언제 어디서든 어둠의 행실, 곧 나쁜 행실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빛의 갑옷을 입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벌이 무서워서 어둠의 행실을 피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라고 당부합니다.
그리스도를 입는 다는 것은 내가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치하여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구체적인 사랑을 기억하면서 내가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노력할 때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깨어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형제 자매님,
알로이시오 성인께서 소신학생이었을 때 이야기입니다.
한날은 교장 신부님께서 운동장에서 신나게 놀고 있던 신학생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 세 시간 후에 이 세상이 끝나고 공심판이 있다면 너는 지금 무엇을 하겠느냐?”
어떤 학생은 지금 당장 고해성사를 보고 누구와 화해하겠다고 하고, 어떤 학생은 남의 물건을 훔친 것을 돌려주고 성체조배를 하겠다고, 어떤 학생은 미루고 안한 보속을 먼저 하고 부모님을 찾아가겠다고 하는데...
알로이시오 성인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지금 하고 있는 놀이를 계속 하겠습니다. 저는 항상 예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의 말씀을 지킬 것이고 그러면 아버지와 당신이 그 사람을 찾아가 함께 머물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깨어 있는 사람은 하느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 두 분 사이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기 때문에 늘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해 아침에 듣는 “깨어 있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다시 오실 때,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고마운 덕담입니다.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당신의 계명을 잘 지킴으로써 당신 사랑 안에 머물라는 복된 덕담입니다.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면서, 가족과 이웃형제들을 더 많이 사랑하는 한 해가 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참된 행복을 매일 누리는 복된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제비꽃의 지혜
윤경재 요셉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24,42~44)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됩니다.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늘 설레게 하고, 피어오르는 희망을 꿈꾸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바야흐로 만물이 조락하고 움츠러드는 추운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에 사랑의 전령,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되는 아이러니를 생각합니다.
봄의 전령인 제비꽃은 세계 도처에서 피어납니다. 어여쁜 노란색, 보랏빛, 흰색을 온 세상에 듬뿍 선물합니다. 그것도 산과 들, 야생의 장소뿐만 아니라 도심 속 콘크리트 사이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뿜어냅니다. 크기도 작아 한 뼘 남짓 됩니다. 제비꽃은 전 세계 어떤 곳에서 한 줌 되는 땅뙈기만 있어도 가리지 않고 찾아듭니다.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고 처마 밑에 찾아와 집을 짓는 제비의 성품을 닮았다고 해서 제비꽃이라 붙은 이름입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뿌리를 내리기 위해 제비꽃은 나름대로의 전략을 일 년 내내 구사합니다. 대개 다른 꽃들은 바람을 이용하거나 나비나 벌들을 매개체로 하여 번식합니다. 그래서 벌과 나비가 살기 어려운 삭막한 콘크리트 도심 속에서는 꽃을 피우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비꽃은 지구 상 어디에서나 살고 있는 개미를 이용합니다. 개미들이 좋아하는 젤리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씨앗을 담아둡니다. 그러면 일개미들이 젤리를 물고 곳곳에 퍼진 개미집까지 날라다 놓습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저장해 둡니다.
막상 땅속 깊숙이 위치한 개미집에서는 싹이 트기 어려운데 제비꽃은 미리 개미의 특성을 파악하여 놓았습니다. 젤리와 씨를 분리하기 쉽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개미가 젤리만 먹고 나머지 씨앗은 지상 근처 개미 쓰레기장으로 옮겨 버리게 하는 지혜를 짠 것입니다. 쓰레기장에서는 싹이 쉽게 지표를 뚫고 나올 수 있습니다.
개미가 집을 짓는 곳에는 반드시 신선한 흙이 있게 마련입니다. 개미집 근처 쓰레기장은 개미의 분비물로 인해 영양이 풍부합니다. 한마디로 식물이 자라기 안성맞춤인 곳이죠. 이렇게 해서 개미가 사는 곳에는 반드시 제비꽃이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 상 어느 곳에나 흙만 있으면 제비꽃은 자기의 터전이 되는 셈입니다.
제비꽃이 구사한 지혜는 먼저 다른 동물에게 좋은 먹잇감이 되자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들 수 있는 제일 좋은 것을 베풀어 주고, 자신은 하찮은 쓰레기가 되어도 좋다는 전략입니다. 아무리 누추하고 험한 곳에서도 그 지혜는 통할 것을 알았습니다.
꽃말이 사랑이고 순수함인 제비꽃은 앉은뱅이 꽃이란 별명도 있습니다. 도심의 담벼락 돌 틈 사이에서도 필 정도로 작아서입니다. 그리스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사랑하던 연인 이오의 눈을 닮았다고도 전하는 이 꽃은 깊고 그윽한 향기도 일품이랍니다.
제비꽃의 지혜를 전해 들었을 때 탁하고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리도 예수님의 행적과 비슷한지 놀랐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 조건 없이 사람들에게 두터운 사랑을 베푸셨고, 당신은 인간쓰레기들이 처형을 당하는 골고타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것 같았던 그곳에서 당신의 왕권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윽한 향기가 온 세상에 퍼져나갔습니다.
한갓 미물처럼 보였던 제비꽃도 먼저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사랑의 아이러니를 베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잘난 체하는 인간은 도리어 그 아이러니를 깨닫지도 못하고 실천할 줄도 몰랐습니다. 자신을 먼저 내어주기가 그다지도 싫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벗을 위하여 기꺼이 제 목숨 내어놓는
보잘것없지만 위대하고
자신을 감추지만 환히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을 섬기며
다툼과 시기 가득한 처절한 경쟁에서
제 살 길 찾기 위해
무기 삼아 그리스도를 몸에 두른
거룩한 척하지만 속되고
고상한 척하지만 천박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추악한 어둠이 지배하는 광란의 시간에
희망의 새벽을 맞으려
여린 몸 아낌없이 작은 빛으로 사르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기나긴 밤과 찰나의 낮 사이를
교묘하게 넘나들며
탐욕과 무관심 가득한 암흑을 탐닉하면서
오히려 섬김과 돌봄의 빛의 자녀라 자처하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억압에 대한 굴종이
평화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불의한 권력을 꾸짖고
억울하게 짓밟힌 이들을 일으켜
정의로운 평화를 보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모든 이가 더불어 함께하는 삶보다
가진 이들의 안락과 평안을 위한
버려진 이들의 침묵과 사라짐을 강요하는
평화라는 이름의 죽임을 즐기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 말해지는 때에
모든 것이 평화롭다고 느껴지는 때에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처럼 보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들을 버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고
그리스도인임을 드러내야 할 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주님을 모신 성전에서
주님을 모신 성전으로서
감사와 찬미를 드릴 때에
그리스도인은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처럼 보입니다.
주님께서 몸소 일하시는 세상에서
주님을 드러내야 할 성전으로서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아우러지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
같이 들에 있던 두 남자가
하나하나 갈라지듯이
함께 맷돌질 하던 두 여자가
하나하나 갈라지듯이
천하고 낮은 곳에 오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증언해야 할 때
살림을 위한 죽음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
그리스도인은 갈라질 것입니다.
언젠가 세상의 마지막 날에
생각하지 않은 때에 불현 듯 다시 오실,
지금 여기 삶의 순간순간 불쑥 오시는
사람의 아들께서
기쁘게 품에 안아주실 그리스도인과
슬픈 낯으로 밀어내실 그리스도인으로
그렇게 그리스도인은 나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깨어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의 때에 이르렀습니다.
이 대림시기의 제일 큰 주제는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도 ‘깨어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구체적인 내용을 두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37-41절)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다.
대체 끔찍하고 잔인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흥미롭게도,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를 말씀하시면서, 그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곧 그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홍수가 들이닥쳤다고 말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타락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심판을 받은 그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곧 마구 먹고 마시는 사람들, 장가들고 시집가는 사람들, 들에 있는 사람들, 맷돌질하는 여자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가 사람들의 타락 때문이라기보다 사람들의 안일한 삶, 곧 삶의 안도에서 비롯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곧 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무관심과 안일한 삶, 그리고 타성에 젖은 평범한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나쁜 짓이나 방탕한 생활, 그리고 부도덕한 악행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그러한 것들에 빠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생활의 편리와 안주에 빠져있다면, 심판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죄를 피하고 있다할 지라도 사랑하고 있지 않으면 심판받게 된다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곧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선과 정의로 진리 편에 서서 이를 행하고 이를 위해 투신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둠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빛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항상 빛 가운데 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것이 ‘깨어있음’의 의미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집주인과 도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알다시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 지 집 주인이 안다면, 깨어 있어서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24,43)
이는 어느 한 순간도 주의와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으며, 하느님을 기다려야 할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생각지도 않은 시간에, 방심한 사이에,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준비하고 대비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중적인 오심을 항상 생각하여야 할 일입니다. 한 가지 오심은 세상의 종말에 그분이 오실 때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 모든 것에 대해 셈을 바쳐야 하는 그런 오심입니다. 또 한 가지 오심은 나날이 오시는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결국, 오늘 <복음>은 기다리지 않고 준비하지 않고, 빛 속을 걷지 않는 이들에 대한 경고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깨어있음’의 의미는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둘째>는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요, <셋째>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의미인 마지막 날에 오실 주님을 맞이할‘준비로서의 깨어있음’은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4,42)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첫 번째 분명한 사실은 주인님이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오시지 않는다면 굳이 고대하고 기다릴 필요도 없고, 굳이 깨어있을 필요도 없는 까닭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분명 오십니다. 그러기에, ‘깨어있음’은 그분이 오신다는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진정 믿는 자만이 진정 깨어있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언제 올지는 모릅니다. 그러기에 깨어 있음은 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오실 님을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4,44)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하는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깨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깨어나라’고 하지 않으시고, ‘깨어 있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깨어난 까닭입니다.
그러니 잠에서 깨어나라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잠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졸지 말라는 말입니다. 헛 군데 눈 돌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은 얼차려 입니다. 정신차려있는 것 입니다. 마음의 경계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깨어있음’의 <둘째> 의미인 유혹에 대한 ‘경계로서의 깨어있음’이 있게 됩니다. 곧 깨어있음은 한편으로는 빛에 대한 지향으로 깨어있음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어둠에 대한 경계로 깨어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둘째 깨어있음에 대해 말해줍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 13,12-13)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고서야 깨어있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와 ‘아직 아니’ 사이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오신 주님과 다시 오실 주님 사이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주님과 동행하여 걷는 ‘기도로서의 깨어있음’인 그 <셋째>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3)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을 걸어가자”(이사 2,5)
그러니, 이제 우리는 깨어, 이 빚 속을 걷고자 합니다. 이미 대림초를 밝혔으니, 깨어 그 길을 걷고자 갑니다. 오늘의 <화답송>으로 이렇게 노래하며 말입니다.
‘나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 주님의 집에 가자할 때, 나는 이미 기뻤노라~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시편 122,1 참조)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 4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 해를 시작하는
대림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대림시기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가장 소중한
시간입니다.
기다림이라는
희망찬 시간이
있기에 사랑이라는
참된 의미와 기쁨을
사랑이신 하느님에게서
다시 찾게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오시려하십니다.
사람이 되어
오시는 장소는
다름아닌
우리 마음이기에
준비하고 깨어있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마음에
기다림의 촛불을
밝혔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림의 시작은
언제나 우리자신을
인정하고 맞아들이는
사랑에 있습니다.
다시금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이
뜨겁게
시작되었습니다.
사랑과 기다림은
하나입니다.
참된 사랑은
기다림으로
구체화됩니다.
구체화된 기다림은
두려움을 훨씬 뛰어넘는
용기로 우리모두를
깨어있게 합니다.
빛을 기다리기에
이 기다림은
기쁘고 활기찬
기다림의 행복이됩니다.
따뜻하게 맞아들일
준비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기다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탄생을
가슴 설레게
기다려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가장 가난한 마음에
우리마음에 오십니다.
드디어 교회 전례력으로는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다’해가 지나가고, 오늘부터 ‘가’해가 시작되지요.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물론 이 다짐이 한 해의 마지막까지 계속 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아무튼 여러분들의 오늘 한 다짐들이 한 해의 마지막까지 계속되기를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것이든 꾸준히 하기란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매일 운동하는 것, 매일 어학 공부를 하는 것, 매일 기도하고 묵상하는 것 등등 매일 꾸준히 한다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매일 꾸준히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이 글, 새벽 묵상 글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매일 다른 글을 꾸준히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하시면서 저를 아주 신기하게 쳐다보십니다.
물론 쉽지는 않지만, 또 그리 어렵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새벽 묵상 글을 쓰기 위한 준비를 계속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묵상 속에 떠올려지는 것들, 생활 안에서의 소소한 체험들, 그리고 시간 날 때마다 읽는 책의 좋은 내용들 모두를 메모합니다. 이 메모의 양의 A4용지로 한 200페이지 정도 되지요. 그러한 준비를 미리미리 하다 보니 15년 가까이 꾸준히 쓸 수가 있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작업을 이루어지는 동안은 계속되지 않을까 예상하여 봅니다.
갓난아기도 태어날 때 10달이라는 준비기간이 있어야지만 세상의 공기를 마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준비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 준비가 바로 우리의 삶 자체입니다. 그래서 어떤 성인은 삶 전체가 죽음을 위한 준비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다시 오실 구세주를 기다리는 대림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요? 이 준비가 곧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말씀을 통해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올 날을 위해 항상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시지요. 왜냐하면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대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향락에 빠져서 결국 대홍수를 깨닫지 못해 죽음을 당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재림 때에도 똑같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재림의 정확한 때를 말씀하시지 않으실까요? 정확하게 몇 년 몇 월 몇 시에 재림이 온다고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더 잘 준비하지 않을까요? 바로 항상 경계하면서 열심히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악이 들어오지 않도록 언제나 방심하지 않고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재림의 정확한 때를 말씀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삶 전체가 죽음을 위한 준비, 곧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라는 어떤 성인의 말씀이 크게 공감됩니다. 안일하고 이기적인 마음 등 주님께서 싫어하는 모습을 버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평화의 마음으로 매 순간을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오늘 교회 전례력의 시작을 맞이하십시오. 이런 마음이 하루하루 더해져서 마지막 그날까지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될 것입니다.
당장은 노력해도 잘 안 보이잖아. 그건 ‘점’이기 때문이야. 차차 그 점을 순서대로 연결해 가면 그림이 완성되는 거야(김사라).
그래도 사는 길은 있다.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했던 어떤 형제님께서 퇴출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이제야 살 것 같아. 내가 오랫동안 회사에 얽매여서 가족들과 좋은 시간도 못 가졌고 또 내가 좋아하는 취미 활동도 전혀 못했잖아. 이제는 가족과 함께 하고 취미 활동도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잘 되었어?”
가족들 모두 정말로 그런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가족과 함께 여행도 다녀오고, 취미 활동도 열정적으로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3개월쯤부터 이 형제님의 말이 점점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형제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직장을 다니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해 보였고, 가족들에게 피해만 주고 있는 것 같아서였지요.
다행히 가족들이 먼저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 형제님의 생일에 가족들은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바로 남편이 있어 고마운 일, 아빠가 있어 자랑스러웠던 일 등등을 깨알 같이 종이 적어서 전해 준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서 형제님께서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다 무너져서 이제는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자기에게는 아직 소중한 가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분명히 사는 길이 있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에, 필요 없다고 쉽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돌봐주시고 책임져주십니다.
포기하는 삶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삶이 아닙니다.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주님을 찾고 힘차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주인공입니다.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하루가
새롭게 시작 되었습니다.
사람의 새 해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끝과 시작은 분명
새로운 은총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기다림의 성탄입니다.
기다림에도
순서가 있음을 일깨워주듯
대림시기는
하느님의 탄생을
깨어 기다리는 때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기다림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기다림이기에
기다림은 하느님을 맞이할
우리의 '깨어있음'과 '준비'입니다.
언제나
사랑과 기다림은
함께 합니다.
기다림 없이는
사랑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대림시기는
기다림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절정은
언제나 하느님 탄생입니다.
하느님 탄생을
기다리며 우리는
더 한층 성장해 갑니다.
대림시기는
우리가 가야할 길을
대림환의 촛불처럼
환하게 보여줍니다.
기다림은
우리가 믿고 살아갈
하느님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분명 은총입니다.
기다림이 깊을수록
사랑또한 깊습니다.
사랑의 기적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교회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 대림 제1주일입니다. 새해 첫날 석진호 발렌티노와 홍신실 루시아의 첫출발의 혼인미사가 거행되니 놀라운 축복의 기적입니다. 두 신혼부부는 늘 오늘 대림 제1주일의 기쁨과 설렘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기적입니다. 희망의 표지입니다. 두분의 결혼은 하느님의 사랑의 선물이자 기적입니다.
결혼 초대장도 사랑의 기쁨으로 넘실거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참 좋은 인연을 만났습니다-신랑 석진호, 신부 홍신실-’
‘사랑이 피어나는 날, 꽃다운 우리 결혼합니다’
‘평생을 같이하고 싶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서로 아껴주고 이해하며 사랑 베풀며 살고 싶습니다.’
초대장의 글귀가 아름답고 좋고 진실되어 모두 인용했습니다.
늘 잊지말고 이대로 오늘처럼 사십시오. 사랑은 기억입니다. 두분은 충실히 사실 수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이 두분의 만남이요 사랑입니다. 저절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감사할 때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두분을 처음 만날 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난 10월23일 주일 미사후 만나기로 약속했기에 저는 미사를 집전하면서도 두 예비부부를 찾았습니다. 좀처럼 비슷해 보이는 젊은이들이 보이지 않다가 미사시간이 좀 지났을 때 날라갈 듯 기쁨 가득한 두분의 남녀 젊은이가 들어서니 주변이 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순간 석진호, 홍신실 예비 부부임을 직감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두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두분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사랑과 생명으로 빛나는 얼굴과 눈빛이요 음성이었습니다. 정말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얼굴도 눈도 목소리도 그대로 사랑을 표현합니다.
어느 면이 좋았나 물어 봤습니다.
“성실하고 자상하고 배려심이 많아 좋았습니다.”
석진호 남편에 대한 홍신실 아내의 고백에 이어 홍신실에 대한 석진호 남편의 고백입니다.
“성격, 외모가 모두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크게 힘이 될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100% 마음에 든다니 정말 천생연분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환상幻想이 아니라 현실現實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창세기 제1독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두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평등한 존엄한 품위의 인격입니다. 그러니 서로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 때 닮습니다. 사랑하면 예뻐집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할 때 하느님을 닮고, 서로 사랑할 때 서로 닮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사랑과 서로 사랑에 항구하기 바랍니다.
또 특별히 당부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을 때 낳으십시오. 최소한 둘은 낳아야 합니다. 이 또한 하느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당신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됩니다.”
혼자서는 사람이 못됩니다. 영원한 반쪽일뿐입니다. 둘이 한몸이 될 때 온전한 전인적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혼인했다 하여 한몸의 완성이 아닙니다. 평생 사랑을 통해 한몸으로 완성되어가는 것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인생 과제도 없습니다.
인생의 성패와 행복이 달린 평생수행이 한몸의 부부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도 두려워하거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두분은 충분히 이렇게 살 수 있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좋으신 하느님께서 두분을 사랑하고, 혼인미사를 주례한 수도사제인 제가, 여기 혼인미사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여러분을 위해 늘 축복의 기도를 드리겠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혼인을 하늘이 기뻐하고 땅이 춤추며 기뻐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석진호 발렌티노, 홍신실 루시아 부부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
예수님 흉내내기로 예수님 태어나실 분위기를 만듭시다.
박용식 신부님
오늘부터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인간은 한번 태어난 후 또 다시 태어날 수 없지만 예수님은 다시 태어나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에 2000년 전 12월 25일에 태어나셨지만 또 다시 태어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성탄에 예수님이 또 태어나실 것을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내 안에 다시 태어나시어 나를 구원해 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학자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이신 주님이 마리아를 통하여 세상에 탄생하시지만 만일 내 마음에 태어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하고 질문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태어나시지 않으면 성탄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됩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은 어떤 사람 안에 태어나시는가? 어떻게 해야 내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실 수 있을까? 내 안에 예수님께서 다시 태어나게 하려면 내 안에 예수님 태어나실 풍토와 여건을 만들어야 합니다. 집안 분위기를 예수님께서 태어나고 싶은 분위기로 만들어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사제가 태어날 만한 집안분위기에서 태어나서 자랐기에 사제가 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자란 환경과 집안 분위기는 그야말로 사제를 탄생시킬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순교하시고 아버지마저 순교하실 만큼 신앙심이 깊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집안의 모든 분위기가 신앙 중심이었고 신앙이 삶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환경에서 자연스레 신앙심이 몸에 배였던 풍토였습니다.
신학생으로 마카오에 뽑혀갔을 때 마카오의 세 신학생들을 맞이한 조선신학교 책임자 칼르리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에게 전적으로 맡긴 세 명의 조선 소년들은 훌륭한 사제에게 바람직스러운 신심, 겸손, 면학심, 선생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전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라온 환경과 배경이 신부되는 데 손색이 없다는 표현이었습니다.
우리의 집안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방마다 중심에 십자가가 걸려있고 성모상, 성인들의 상본, 성경책, 묵주 등 신앙적인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방의 중심에는 사진이나 장식물이 걸려 있고 십자가는 구석으로 몰려 있어 그 위에는 걸레나 옷가지들이 걸려있거나 덮여있지는 않습니까? 아침ㆍ저녁기도, 식사전ㆍ후기도, 묵주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등을 자연스럽게 바치고 있습니까? 평일미사에까지 참여하며 성당에서 봉사하고 성서를 읽는 등 신앙적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일주일에 겨우 한번 마지못해 성당에 나오고 그 밖에는 예수님의 '예'자도 들어볼 수 없는 그런 환경입니까? 애들은 학교교육, 과외, 외모에만 신경을 쓰고, 연예인들이나 흉내내고 어른들은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잘 벌고 세속의 쾌락과 즐거움을 누리는 데만 중점을 두는 집안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하는 분위기입니까?
환경과 풍토가 사람을 만듭니다. 우리 집안 분위기를 신앙 분위기로, 집안 환경을 기도하는 환경으로 만듭시다. 그리고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세속적으로 출세한 사람을 따라하고 흉내내는 분위기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하며 예수님을 흉내내는 분위기로 만듭시다.
우리가 예수님을 흉내 내고, 예수님을 따라하고, 예수님이 하신 행동을 하면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집안 분위기를 예수님을 소중히 여기는 분위기로, 우리의 풍토와 환경을 예수님을 탄생시킬 수 있는 환경으로 만들면 우리 안에 예수님이 탄생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을 또 다시 기다리는 것은 이번 성탄에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셔야 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성탄에 예수께서 우리 안에 다시 태어나셔야 우리가 안고 있는 그 많은 문제들까지 해결하거나 또는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성탄에 우리 안에 예수님을 탄생시킬 분위기를 만들어 봅시다. 평소에 안 하던 기도를 하든가, 성당봉사나 청소를 하든가, 전에 안 하던 구역반 모임에 참가하든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좋은 환경과 분위기를 만드는 방법은 많습니다. 이번 성탄에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예수님을 흉내냄으로써 예수님을 탄생시킵시다.
후회없이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
손용환 신부님
우리는 기다립니다. 돈을 기다리고, 출세를 기다리고, 성공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을 때 후회를 합니다.
‘죽기 전에 하는25가지 후회’를 쓴 통증완화전문의 오츠 슈이츠는 천 명의 환자들이 죽기 전에 후회하는 것들을25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조금 더 겸손했더라면, 조금 더 친절했더라면,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했더라면,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내가 살아온 증거를 남겨두었더라면, 자식이 있었더라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했더라면, 건강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신앙을 가졌더라면 등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는 후회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꿈꾸는 대로 살고, 먹고 싶은 것을 맛보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원 없이 사랑하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살아온 증거를 남기는 것입니다. 기록을 통해, 결혼을 통해, 자식을 통해 자기의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만 하지 않고, 좀 더 겸손하고 친절하게 살며,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하고, 나쁜 짓을 멀리하고, 영혼과 육신이 건강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회 없이 살기 위하여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삽니까? 후회 없이 사는 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후회 없는 삶 위해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노아 때처럼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오24,37-39.42-44)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홍수 이전 시대의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습니다. 종말은 도둑처럼 슬금슬금 오고 있는데 잠만 자고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니, 도둑이 집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준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은 죽음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 후회 없이 사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잠에서 깨어나는 삶입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시간입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서13,12-14)
이것이 후회 없는 삶이며, 의미 있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그분께서 가지셨던 꿈을 꾸고, 그분께서 하셨던 말을 하고, 그분께서 사셨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꿈은 세상 구원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분의 삶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오게 하는 것이 그분의 바람입니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사랑과 감사를 표현합시다. 영과 육의 건강에 힘씁시다. 겸손과 친절로 살아갑시다. 나쁜 짓을 멀리하고, 세상 구원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합시다. 그리고 그 증거를 사람들 가슴속에 새깁시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가끔은 하고 싶은 것도 해 가면서 삽시다. 여행도 가고, 좋아하는 사람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먹읍시다. 그것이 삶의 조미료는 되니까요. 이렇게 살아야 후회 없이 살고, 후회 없이 살아야 깨어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대림절=‘이미’와‘아직’의시기=‘깨어있음’의시기
신희준 신부님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교회력(敎會曆)으로는 새해의 시작이자 세속력(世俗曆)으로는 묵은 한 해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이미’와 ‘아직’의 과도기적인 삶을 사는 우리 삶의 모습을 잘 대변해줍니다. 즉,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우리에게 강력한 구원자의 모습으로 ‘아직’ 오셔야 하고, 하느님나라는 ‘이미’ 이 세상에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우리는 ‘이미’ 구원과 영원한 행복을 약속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이지만 ‘아직’은 온갖 고난과 욕망의 질곡을 살고있는 세속의 자녀들이 기도한다는 사실을 대림절은 우리에게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대림절입니다. 우리시대는 우리가 대림절의 진리를 완전히 새롭게 배울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림절의 진리란 다름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대림절이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아직’도 대림절임을 말합니다. 즉, 달리 표현 하자면, 인류전체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하나임을, 인류전체가 어두움에 놓여 있지만 하느님의 빛을 받고 있다는것임을 말합니다”(교황베네딕토16세).
이렇게 ‘이미’와 ‘아직’의 시기인 대림절은 또한 우리가 깨어있으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깨어있어라…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2.44).
사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이 만만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직장을 가질수만 있다면, 안정된 수입을 확보할 수 만있다면, 원하는 학교에 다닐수만 있다면, 승진할 수 만 있다면, 월세와 전세를 벗어나 내 집을 마련할 수 만있다면, 자녀들이 공부를 잘할 수 만있다면, 안정된 노년을 살 수 만있다면, ….
이렇게 살아가면서 걱정거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또 새로운 걱정거리는 그동안 이루어 놓은 것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더 많은 것을 확보하고 싶다는 욕망을 우리안에 조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이 많이 있고 높은지위에 오르며 드높은 명예를 누리면서도 더 많은 것을 향한 질주를 멈추지 못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우리라고해서 우리지위를 전용하고 뇌물을 주고 받으며 세속의 ‘절대권력’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리라 자신할 수 만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교황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어두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고 새롭게 기운을 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두움에 놓여 있지만 동시에 하느님께서 우리를 향해 비추어 주시는 자비의 빛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부족함에 실망하지 말고 우리 안으로 겸손하게 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새해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묵은 지난해가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시기에 한 번쯤 여유를 갖고 우리 안을 들여다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어두움 속에서도 빛나는 하느님의 자비를 안경삼아 우리 주변을 둘러보도록 합시다. 이렇게 ‘깨어’ 사는 우리에게 아기예수님께서는 최고의 선물, 곧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것입니다. 아멘.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임숙희
시작 기도
하느님 아빠 아버지, 이 대림절 동안에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빛 안에서, 그 빛으로 옷을 입으며 살아갈 수 있는 마음을 주십시오.
독서
연중 제33주일에 우리는 루카복음의 종말 설교를 들었는데, 오늘은 마태오가 전하는 종말 설교를 듣게 됩니다. 복음에서 주님은‘깨어 있으라’,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이 어떤 자세로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려야하는지를 가르치십니다. 37,41절까지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를 가리킵니다. 주님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맷돌을 갈고 음식을 준비하며 일터에서 일하고 있을 때 우리 일상을 살아갈 때, 어느 날 갑자기 오십니다. 42절에서는 앞의 내용을 요약합니다.
첫째, 주님은 당신이 언제 올지 모르므로“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42절) ‘깨어 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잠에서 깨어 두 눈을 초롱초롱 뜨고 있다는 것입니다. 졸음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계가 아니라 맑은 정신이 지배하는 빛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오시는 주님을 보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가 로마인들에게 하는 권고는 복음에서 말씀하시는‘깨어 있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설명해 줍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13,11-14ㄱ) 바오로는‘입는다’라는 동사를 되풀이하면서 마지막에 그리스도인들이 입어야 할 적당한 옷은‘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고대에‘입는다?라는 말은 은유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 다른 사람의 행위를 그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라는 표현은 특히 세례와 관련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3,27) 제2독서의 빛을 받아 우리는 주님이 현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자세, ‘깨어 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에 인도된 자세와 생각들로 걸어가는 것, 제1독서의 이사야가 예고한 대로“주님의 빛 속에서 걸어가는 것”입니다.(이사2,5) 그분을 향하여 걸어가면“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이사2,3 참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주님의 길을 걷는 이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 그의 삶을 변형시키는‘빛’입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시편23,4)
둘째, 주님은 또한‘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세로 준비하라는 말씀일까요? 오늘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서 충실한 종이 멀리 떠난 주인을 기다리듯(24,45-51), 기름이 채워진 등을 가진 처녀들이 신랑을 기다리듯(25,1-13)준비하라고 알려주십니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고 한 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들리면, 준비된 처녀들은“잠깐만 기다리십시오.”가 아니라 즉시“오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그렇다, 내가 곧 간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묵시22,17.20 참조) 우리가 신랑을 기다리며 준비해야 할‘기름’이 무엇인지는 신약성경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선행에 전념하는 것을 배워 남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을 도와주는 것(티토3,14ㄱ), 간직하고 있는 주님에 대한 신앙에 대해 설명하는 것(1베드3,15), 세상의 속된 방식이 아니라 온전히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생활방식을 증언하는 것(2코린10,6),온갖 어둠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하느님 말씀, 평화의 복음으로 무장하는 것(에페6,15),그리고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는 것(1요한3,11).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중간기를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깨어 있으라’, ‘준비하라’는 말씀은 종말을 간절히 기다리던 초대교회만이 아니라 오늘, 2010년11월에 주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간절히 요구하시는 자세입니다.
성찰
깨어 있는 사람은 주인을 기다리는 충실한 종처럼,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주님, 제가 오늘 신랑을 기다리며 제 등과 함께 준비해야 할 기름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십시오. 대림절 하루하루를 그 기름을 준비하며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기도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22,20)
자동차 운전자의 80%는 자신이 평균 이상으로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하긴 제 주변에서 운전을 하시는 분들 중에서 못한다고 스스로 말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통계학적으로 가능할까요? 통계학적으로는 평균 이상인 사람이 50%를 넘을 수는 없으니까요. 즉, 잘한다고 말하지만 평균 이하의 사람들이 30%는 된 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스스로 잘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싶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칭찬하고 싶다면 “운전을 잘하시는군요.”라고 말하라는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신이 칭찬받고 싶은 것을 칭찬받을 때 상대방은 틀림없이 당신에게 호감을 가질 뿐만 아니라 아마 서로 마음도 통한다고까지 여기게 될 것입니다. 점쟁이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다수에 해당되면서 누구나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라고 하지요.
“보기보다 능력이 많은 사람”, “살이 빠진 것 같다.” 등등의 말을 얼마나 좋아합니까? 심지어 상대방을 칭찬해줄 적당한 말이 영 떠오르지 않으면 그냥 “당신은 입에 발린 칭찬 따위에 넘어갈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만 말해도 다 넘어간다고 하지요.
생각해보니 이렇게 좋은 말들이 많은데도 우리들은 나쁜 말들을 더 많이 하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아니, 말뿐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도 그렇습니다. 좋은 생각과 행동이 아니라 나쁜 생각과 행동들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었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과 상처를 줄 때도 얼마나 많은가? 물론 그 사람의 변화를 위해서 또는 정의를 위해서 외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단순히 나의 이익을 위해서 하게 되는 나쁜 말, 나쁜 생각, 나쁜 행동이라면 지금 당장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오늘은 대림 제1주일, 교회력으로는 새해 첫날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사람으로 오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바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것, 사랑의 실천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앞서 나쁜 말과 생각, 행동으로 주님의 뜻에 반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좋은 말과 생각, 행동으로 주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구원이 다가왔다고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이제는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권고하십니다. 대림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우리 역시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받아 빛의 갑옷, 예수 그리스도를 입어야 하겠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실 예수님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모든 좋은 것들을 들고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갑시다.
어떤 상황이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단 한가지, 바로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스티븐 코비)
특별한 비법은 없다(‘행복한 동행’ 중에서)
애니메이션 ‘쿵푸팬더’의 주인공 ‘포’는 쿵푸의 달인이 되고 싶어 하는 국수집 아들이다. 마을을 지켜 낼 예언의 인물로 점지되어 쿵푸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만 좀체 실력은 늘지 않고 아버지는 자꾸만 맘에도 없는 국수 가게를 물려받으라고 성화다. 실력 없는 포가 마을을 위협하는 무법자 타이렁을 이길 수 잇는 유일한 방법은 어마어마한 쿵푸 비법이 적힌 용문서를 손에 넣는 것이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 낸 용문서에 아무 비법도 적혀 있지 않자 포는 크게 실망하고 만다. 그때 평생 국수 맛의 비밀을 숨겨 온 아버지가 나타나 호들갑을 떨며 말한다.
“우리 가게는 국물에 특별한 비법이 있다고 소문난 장안 최고의 국수집이다. 내 오늘 너에게 그 숨겨진 국물의 비법을 말해 주마!”
아들은 도통 관심이 없지만 뒤이은 아버지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비법, 그러니까 그 비법은 말이지... 사실 없단다. 특별한 비법 따위는 없어.”
“없다고요?”
“그래, 그냥 맹물을 넣고 끓이기만 하면 돼. 그러나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야지. 특별하다고, 단지 특별하다고 믿으면 특별해지는 거야.”
국물 맛 좋기로 소문난 국수집의 비법이 고작 최면이라니. 그래도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것이라 믿었던 포가 실망감을 느낀 것은 잠깐이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쩍한 포는 서둘러 두루마리를 펼치고 텅 빈 용문서를 내려다본다. 그러곤 비로소 맨들맨들한 비단 종이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된다. 특별한 비법이란 건 없다. 특별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특별한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때부터 놀라울 만큼 유연한 포의 숨겨진 재능이 펼쳐진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하루아침에 모든 걸 뒤엎을 획기적인 마법을 기대하다간 돌아오는 건 실망뿐이다. 해답이 있다면 그건 이미 자기 안에 있으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자신을 믿는 것이다.
깨어 있음
오민환
사람의 아들이 다시 오시는 날,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날이 가까이 온 것은 확실한데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확실할수록 그 시점은 불확실해집니다.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는 사람만이 불안을 떨쳐 버릴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의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찼고 “정녕 모든 살덩어리가” 타락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의로운 사람’ 노아를 선택하셔서 방주를 준비하십니다. 홍수는 불의하고 타락한 세상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그날은 오직 하느님만 아셨고 노아는 단지 준비를 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날과 같은 심판이 아니라, 기다리지 않고 준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날에 대한 무지가 ‘선택된 사람’과 ‘버려진 사람’으로 갈려집니다. 들판에서 일하는 남자나 맷돌질을 하는 여자 모두 그렇게 나눠질 것이라 합니다. 그 일은 남의 일이 아니라 언제든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 일을 하고 일상을 살면서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 노아처럼 기다리고 준비합니다. 겟세마니의 피땀이 흐르는 그 밤에 홀로 깨어 있으셨던 외로운 주님은 오늘도 나와 함께 깨어 있자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지르고 나서 법망을 피해 오랫동안 도망을 다녔습니다. 그가 저지른 죄의 공소시효는 6년이었지요. 그래서 그는 늘 공소시효가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드디어 6년이 지났다고 생각한 그는 경찰서로 가서 자수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사람이 날짜 계산을 잘못해서 공소시효 만기 3일전에 자수를 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공소시효가 끝나지 않아 그 간의 고생이 헛되이 쇠고랑을 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억울하겠다. 정말 재수 없다. 시간 계산만 잘 했어도…….”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사람이 억울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시원하고 후련합니다. 사실 저는 그 동안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이제라도 죄 값을 치르게 되었으니 두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두 다리 뻗고 잘 지낼 수 있을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잘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를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그 불안감을 없애려고 하지만, 일시적으로 잊힐지는 몰라도 진정한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서는 이러한 죄의 상태에서 우리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더군다나 언제 올지 모를 사람의 아들이 재림하는 최후의 심판 때를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교회력으로 새해에 해당되는 오늘 대림 제1주일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았지요. 그들은 하느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인간적인 생활을 더 강조했고, 그래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쾌락만을 추구하는 급급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습니다. 세상 마지막 날 어떻게 될 지를…….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아무런 대책없이 쾌락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쾌락만을, 즉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권력과 부만을 좋아한다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온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대림 제1주일. 교회의 새해인 오늘,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뜻에 맞게 잘 준비를 하고 있는지, 여전히 다음에 하겠다면서 뒤로 미루고 있는지…….
나의 삶을 봉헌하며 묵주기도를 바치세요.
진짜 적(고도원, ‘나무는 자신을 위해 그늘을 만들지 않는다’ 중에서)
칭기스칸은 성을 쌓지 않았다. 그는 세계의 반을 정복했지만 어느 곳에도 성을 쌓지 않았다. 칭기스칸이 원한 것은 정복해서 그 자리에 안주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한 곳에 안주할 수 있는 편안한 길을 가지 않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말을 달렸다. 칭기스칸의 전사들은 소유를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들은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달린 것이 아니다.
그들이 달린 것은 칭기스칸이 만들어가는 세상의 질서에 동참하는 일이었으며, 그 미래에 대한 꿈과 기대가 자신의 현재를 끊임없이 일깨워주고 그들의 삶을 값지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회없이 말을 달렸다. 그리고 질주가 가로막힐 때마다 격렬한 전투를 피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것들을 소유하려는 자들과 소유가 아니라 꿈을 위해 달리는 자들의 싸움은 언제나 불을 보듯 뻔했다. 유목민의 승리였다. 꿈의 승리였다. 우리는 칭기스칸으로부터 정복과 피를 배우려는 것이 아니다.
맹목적인 질주를 배우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배우려 하는 것은 지치지 않고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신에 대한 그 끝없는 훈육이다.
인생의 가장 무서운 적은 자신의 내부에 있다. 그것은 바로 안락이며, 배부름이며, 육신의 편안함이다. 지금 현재에 안주하여 멈춰 서 있는 자기 자신이 가장 경게해야 할 적이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배광하 신부님
그리운 기다림
제과점 빵이 귀하던 시절, 성탄 때면 성당에서 나누어주던 그 맛있던 빵이 얼마나 먹고 싶던지 다가올 성탄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입학의 날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고, 멋진 수단을 입고 싶어 착의식 날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고, 사제로 수품 될 날을 고대하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어찌 보면 기다림의 연속된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고, 떠나간 자녀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승진될 날을 기다리며, 자식이 제대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식당에서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며, 경제가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결혼할 날을 기다리며, 심지어 술안주 나오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립니다.
미사 시간을 기다리고, 병이 낫기를 기다립니다. 신앙도 기다림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수천 년 메시아께서 오시기를 기다렸고, 신약의 하느님 백성들은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날을 기다립니다.
사실 우리네 삶에서 기다림이 아닌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날에는 우리가 이 지상에서 과연 무엇을 기다렸는가 하는 것이 심판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참다운 기다림은 두 손을 놓고 막연히 넋 놓음의 기다림이 아니라, 진정 내 전 존재를 투자할 가치의 존귀함 앞에 자신의 현재를 부단히 사랑하며 가꾸어 나가는 기다림이어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나누고 사랑하며 쓸 수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일 년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학점을 받지 못한 학생에게 물어 보세요. 한 달의 가치를 알고 싶다면, 미숙아를 낳은 어머니를 찾아가세요. 하루의 가치는 신문 편집장들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한 시간의 가치가 궁금하면,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일 분의 가치는, 열차를 놓친 사람에게, 일 초의 가치는 아찔한 사고를 순간적으로 피할 수 있었던 사람에게, 천 분의 일 초의 소중함은, 아깝게 은메달에 머문 육상 선수에게 물어 보세요.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또한, 당신에게 너무나 특별한, 그래서 시간을 투자할 만큼 그렇게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공유했기에 그 순간은 더욱 소중합니다. 시간은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 어제는 이미 지나간 역사이며,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이야말로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ant) 이라고 부릅니다.”
한 순간 순간을 진정 아끼고 사랑하며, 참된 진리의 생명을, 영원한 삶을 기다려야 합니다.
버림과 떠남의 기다림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의 아들의 재림도 그러할 것이다”(마태 24, 38~39).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 우리는 버림과 떠남을 기억합니다. 버림은, 세속적인 가치와 물질적 욕심에 집착함을 버리는 것입니다.
끝내는 그것들이 생명을 보장해 주지 못함이요, 결국 가져갈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떠남은, 우리가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기에, 결국 세상과 하직할 날이 오기 때문에 끊임없는 떠남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듭 우리 주변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가벼워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날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영원한 것에 희망을 둡니다.
그 기쁨의 희망은 계속된 버림과 떠남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버림과 떠남에 우리 신앙인은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 27).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1623~ 1662)’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가슴에 구멍 하나씩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빈 구멍을 세상 것으로 메워 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지식, 권력, 부귀, 영화, 온갖 흥미로운 일들과 미신적인 행위들로 말입니다.
그러나 인생 종말엔 그 모두가 허망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운명처럼 만들어진 구멍은 하느님께서 당신으로 메우도록 만드셨기에, 하느님으로만 구멍을 메울 수 있다고 파스칼은 말합니다. 우리의 고독과 황량함을 채우러 오시는 주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기는 참된 기다림의 대림이 돼야 합니다.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조명연 신부님
현관 앞에서 한가롭게 오후를 즐기는 노인에게 지나가던 부인이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은 무척 행복해보이는군요. 그렇게 행복하게 장수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요?”
이에 이 노인은 “저는 하루에 담배 3갑을 피웁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소주 1박스를 마시지요, 고기도 무척 좋아하지만 결코 운동은 하지 않습니다”라는 깜짝 놀랄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나쁜 것만 행하는데도 장수하는 것이 신기한 부인은 다시 물었습니다.
“정말로 신기하네요. 그런데 할아버지,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그러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요? 저 올해 스물아홉인데요?”
이 노인, 아니 청년이라고 말해야 하겠지요?
아무튼 이 청년은 건강에 대해서 잘 준비하지를 못했지요.
그래서 자기 나이와는 다른 모습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 그 준비를 바로 오늘, 아니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준비하고 있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아무런 대책 없이 쾌락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쾌락만을, 즉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권력과 부만을 좋아한다면, 앞선 이야기에 나오는 그 청년처럼 자기의 본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항상 깨어있는 자세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주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모든 ‘오심’을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오심’을 잘 준비하는 ‘깨어있는 자세’이다.
제1독서: 이사 2,1-5: 그들의 칼을 보습으로 만들 것이다.
1독서에서는 두 가지 사상을 전하고 있다. 첫째,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법과 말씀을 선포하실’(3절) 주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모든 민족들이 듣게 됨으로써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일치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란 바로 ‘형제애’와 ‘평화’가 정말로 실현되어야 할 공동체 즉 ‘멧부리 위에 우뚝 서서’(2절) 찬란히 빛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 즉 교회이다. 교회의 기능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와 전 인류의 일치의 표지이며 도구’(교회1항)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기록은 결코 끝나지 않는 ‘주님의 도래’, 즉 그리스도의 최초의 도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힘겨운 성장,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오시는 분’(사도 1,4 참조)을 만나러 가는 여정임을 기술하고 있다.
복음: 마태 24,37-44: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주님과의 ‘만남’을 한 순간도 그냥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 즉 오랜 기다림 속에서 엄습되는 잠이나 피곤함의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 오늘 복음은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노아 시대의 일을 회상시키면서(37-39절)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신다. 첫째, 하느님께서 ‘불시에’ 찾아오시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매일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 너무 빠져있으면 안된다는 것과, 둘째, 홍수 때처럼 주님의 ‘오심’에 따르는 위협적이며 위험스런 상황에 관한 점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파괴와 저주의 사건이기도 하였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위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하였다(창세 7,11-23 참조). 오시는 하느님 앞에서의 심판은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인내롭게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처럼 당신께 개방되어있고 당신의 말씀을 온순히 따르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을 거절하여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잘 받아들여 온순히 따르고 실천했는지 아닌지가 그 때에 드러날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언제이든 간에 두려움과 ‘깨어있음’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서워함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라”(42절). 이 말씀은 여러 군데서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다. 이는 밤을 지키는 야경꾼들과 같이 잠을 잠으로써 도둑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있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3-44절). 도둑이 오는 때는 언제인지 모른다. 항상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고자 하는 그 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깨어 기다림’은 주님께서 우리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그 모든 ‘오심’을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해 더 잘 준비하는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의미한다. 이것을 이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오심에 놀라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 오심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Enarrat. in Psalmos, Ps 95,14).
제2독서: 로마 13,11-14: 잠에서 깨어날 때
바오로 사도는 잠자지 말라는 권고에서 더 나아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과거생활이 그리스도라는 ‘빛’ 속에서의 삶이 아니라, ‘밤’에 묻혀있는 ‘잠’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에 들어와 계신 지금은 그 ‘밤’에서 벗어나 ‘대낮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위한 근본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과 더불어 ‘때가 찼기에’(갈라 4,4 참조) 구원의 마지막 국면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11절). 이 말씀은 이미 이 순간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더 실현되어 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래는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도래’의 종합이며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얼마나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깨어있고, 주님을 맞아 드릴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밤’의 ‘잠’에서 깨어나 빛 속에서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허영엽 신부님
신학생 시절 농촌 봉사활동을 갔을 때 시골에서 만난 한 할머니가 들려 준 슬픈 이야기이다. 그 날은 비가 많이 와서 밖에서 봉사활동을 못했다. 그래서 그 할머니 집의 마루에 모여 담소를 나누었다. 대학생이던 그 할머니의 외아들은 6·25전쟁이 터지자 학도병으로 전쟁터로 나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지만 할머니의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후 그 할머니의 아들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죽었다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지 30여 년이 지났는데도 할머니는 밤에 사립문을 잠그지 않고 잠을 잔다고 하셨다. 그 할머니는 이야기중에 머리에 쓰셨던 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할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아들을 지울 순 없었다. 그 할머니의 기다림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홀로 사는 그분에게 기다림은 삶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이제는 그 할머니도 그렇게 그리워하던 아들을 하늘나라에서 만나시지 않았을까?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첫 주간인 오늘, 우리는 “깨어 준비하라”는 권고를 듣는다. 대림시기는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것을 기다리는 때이다. 회개와 속죄로 구세주를 맞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로서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우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성탄 대축일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또한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두 번째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이다. 우리의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그 가운데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하느님의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며 완성의 시간이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따라 온갖 무질서와 애착에 빠져 현실적인 행복만을 추구한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항상 깨어 준비하는 삶을 산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언제 오실 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2.44). 이 말씀은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의 삶이다. 따라서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는 말씀은 죽음과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에게 거룩하고 위대한 기다림을 불어넣어 주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세상의 것을 기다리지 않고 영원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언젠가 바뀌고 변화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래서인지 “기다림은 욕망이 아니라, 무엇이든 받아들이기 위한 마음의 준비”라고 했던 앙드레 지드의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유다인과 동방박사들의 다른 두 기다림
이기양 신부님
유다인과 동방박사들은 메시아가 오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랫동안 기다렸지만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과 감사의 예물을 드린 사람들은 가까이 있었던 유다인이 아니라 산 넘고 물 건너 온 페르시아의 현자들이라 알려진 동방박사들이었습니다.
왜 가까이 있었던 유다인은 수천 년 기다려온 메시아를 만나지 못한 것일까요? 더구나 그들은 헤로데가 메시아가 태어 날 곳이 어디인지를 물었을 때 "유다 베들레헴입니다"(마태 2,5)라고 답하며 메시아가 어디에서 날 것인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유다인은 하느님 뜻이 아니라 그들 욕심을 채워 줄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로마를 쳐부수고 해방시켜 세계 일등 국민이 되기를 염원했기에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나고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이나 하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예수는 바로 그들 옆에 있어도 관심 인물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을 살피고 오실 메시아를 고대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했던 동방박사들은 그분을 직접 뵙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살면서도 유다인들과 같이 내 욕심으로 꽉 차 있다면 매년 성탄을 맞아도 곁에 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그분께 드릴 선물을 정성껏 준비한다면 오실 주님을 맞는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대림과 성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아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2-44).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 역시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로마 13,13)며 오시는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고백록의 저자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방탕한 생활 중에도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와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명예, 결혼, 재산 등의 문제로 갈등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해 살려는 소망이 불길처럼 치솟기도 했습니다. 이런 갈등 속에 정원을 산책하다가 어린이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들어서 읽어 보아라! 들어서 읽어 보아라!"
방에 들어와 상 위에 놓인 성경을 펴보니 로마서 13장의 말씀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13-14절).
아우구스티노는 이 말씀을 통해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되고 일생을 맴돌았던 의문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확신의 광명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참회의 일생을 통해 하느님 안에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대림의 완성인 성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한 순간에 내 전 존재가 바뀌어 지는 것, 곁에 계신 주님을 깨달아 하느님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 바로 성탄이지요. 예수님을 만나면 그 전에 내가 추구했던 모든 것의 가치가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와 자유에 감사드리며 기쁨과 소망에 찬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내 욕망에 가려 볼 수 없었던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욕심 덩어리들을 씻어내고 곁에 계신 하느님을 깨달아가는 시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성탄절을 맞아 송년회다 망년회다 하며 술에 취해 방탕하게 산다면 오신 주님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처럼 하느님 뜻을 헤아리며 준비하는 이들만이 주님을 만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사랑만이 살 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 참혹했던 대구 지하철 참사가 발생한 지도 꽤 세월이 흘렀습니다. 당시 온 나라를 뒤덮었던 분노도, 슬픔도 점점 우리 기억에서 사라져갑니다. 이제 온전히 남은 것은 살아있는 가족들의 슬픔뿐인 듯 합니다. 아비규환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생존자들이 당시 받은 충격으로 인한 악몽과 싸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금쪽같은 자식들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은 죽음과도 같은 나날들을 겨우겨우 견뎌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시간도 결코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남매를 한꺼번에 잃은 한 부부는 아직도 자녀들의 부재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금껏 단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어요. 아이들이 왜 그렇게 허망하게 먼저 가야 했는지…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을 거듭하던 부부의 머릿속에 퍼뜩 이렇게 무너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건 억울하게 먼저 떠난 자식들에게 차마 보일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의미있는 일을 찾자. 우리 아이들에게 미처 다 쏟지 못한 사랑을 누군가에게 주자. 사랑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을테니'하고 수천번도 더 다짐하면서 부부는 조금씩 마음을 잡아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떠난 빈 자리에 더 큰 사랑을 필요로 하는 한 아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한 가련한 어린아이를 입양한 것입니다. 부부는 새 아이를 통해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사랑만이 끝내 절망을 치유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말입니다.
두 분은 매달 자녀들의 흔적이 담겨있는 납골당을 찾아갈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자녀들과 나눈답니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착했던 너희들이 먼저 떠난 건, 남은 우리보고 그만큼 좋은 일 더 많이 하고 오라는 뜻이겠지? 그래, 엄마, 아빠가 그때까지 힘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게. 그러니 너희도 하늘나라에서 잘 지내야 한다"(이준희, 「세상 속으로」, 이문당 참조).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죽음과도 같은 나날을 보내던 부부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사랑만이 살길이다'며 어린아이를 입양해서 친자식처럼 키우고 계시는 두 분의 삶이 거룩해 보입니다. 애통함을 넘어 처절한 나날을 견뎌가면서도 아이들을 자신들보다 먼저 불러가신 하느님 뜻을 찾아나가는 두 분의 신앙이 진정 부럽습니다.
오늘 대림 제1주일을 맞아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또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깨어 준비하고 있음'이 어떤 상태인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 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가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십시오."
대림절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마지막 날을 준비해야 할 우리에게 참으로 적절한 권고요 탁월한 행동지침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가 비록 죽음과도 같이 힘겨운 나날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주신 '오늘'이란 선물에 의미를 부여하며, 빛의 자녀답게 최대한 밝고 단정하게 살아가려는 삶이야말로 주님의 날에 합당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끝도 없는 고통 그 한가운데를 걸어가면서도 '사랑만이 내가 살길이다'고 수백 번, 수천 번 다짐하는 길, 어렵지만 또 다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을 무장하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길, 그 길이야말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결국 주님의 날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매일의 좌절과 실의, 죽음과도 같은 슬픔을 잘 견뎌내는 일이며, 나란 존재의 부족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계속되는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기꺼이 하루를 살아 주님께서 오시는 날이 공포와 멸망의 순간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의 순간, 은총과 희망의 순간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 마지막 날은 오랜 세월 우리가 품어왔던 모든 두려움과 고통, 십자가가 영원한 삶으로 승화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그날은 하느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날, 하느님 얼굴을 마주 뵙는 은총에 너무 기뻐 뛰노는 날이 될 것입니다.
깨어 있어라.
최혜영 수녀님
오래 전에 보았던 폼페이 유적지의 인간 석고상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갑작스런 화산 폭발로 산 채로 화산재를 뒤집어쓴 수많은 남녀가 죽음 직전의 공포와 경악의 표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화석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이런 죽음이 다가오면 어떨까 생각하니, 온몸이 조여 오듯 그들의 두려움이 생생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종말이 도둑처럼 불시에 온다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실상 우리가 인류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만 한다면 개인의 죽음이나 역사의 종말이 필연적인 사건으로 찾아온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그 날과 그 시간을 하느님밖에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노아 때 홍수가 닥쳐 모든 것을 휩쓸어 갈 때까지 흥청망청 살았던 것처럼, 예수님 시대에도 또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일상사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듯합니다.
하느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분명 다릅니다.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놓은 양적인 시간 곧 연대기적 시간(chronos)과는 달리, 하느님의 시간은 결정적인 구원의 시간(kairos)이며 완성의 시간입니다. 그 운명적인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며 선택입니다. 이러한 각자의 선택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을 가져오고 어떤 이에게는 심판을 가져옵니다.
세상의 종말 곧 그리스도의 재림 때는 더 이상 선택이 불가능한, 인간이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는 ‘때’가 닥쳐옵니다. 겉으로는 똑같이 두 사람이 밭에 있거나 맷돌질을 하고 있지만, ‘그 때’에 이르러서는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지는 극적인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마태 24,40-41). 다시 말해 회개한 사람은 구원받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멸망당하는 상황을 절실하게 보여 줍니다. 그 판단 기준은 분명 하느님 눈에 비춰진 각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도둑을 지키는 집주인의 비유(마태 24,43-44; 루가 12,39-40)는 종말 위기가 언제 닥칠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순간이 종말이라고 여기시고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겠지만, 그리스도인은 종말이 되면 사람의 아들(인자)이 내림하여 하느님 나라를 이룩한다고 보았기에 “하느님 나라가 옵니다”를 “사람의 아들이 옵니다”라고 말합니다.
전례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첫 주간인 오늘, 우리는 ‘그 날과 그 시간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있어라’는 권고를 듣습니다. 하느님 나라 곧 영원한 생명을 위해 깨어 준비하는 회개의 결단을 내려야 할 때입니다.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로마 13,13-14).
“늘 깨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자.”
허성 신부님
장래 오실 주님
전례력으로 가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전에는 이날을 장래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첫번째 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의 꼬임에 넘어가 죄를 범한 탓으로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교활한 뱀에게 『너와 여인 사이에, 네 족속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원수관계를 맺어 주리니 너는 그의 발 뒤꿈치를 물으려 하다가 도리어 너의 머리를 짓밟힐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인류를 불행으로부터 구원해줄 구세주를 보내주실 것을 선언하셨기에 우리 선조들은 죄악과 고통에 시달릴수록 애타게 구세주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림의 첫 번째 뜻은 바로 그 시기를 뜻합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류 구원
하느님은 진실하시고 성실하신 분이시기에 마침내 당신이 약속하신 구세주를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보내주셨고 그 분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된 것은 아니고 구원 사업이 완성된 것은 더욱 아닌데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시고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사도들을 남겨둔 채 승천하셨습니다.
구름 속으로 사라지시는 주님의 모습을 넋을 잃고 쳐다보고 있는 사도들에게 『너희는 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느냐? 너희 곁을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던 그 모양으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천사들이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구세주께서는 이미 오셨다가 승천하셨지만 세상 종말에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다시 대림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마음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분이 먼 곳에서 나를 데리러 곧 오시겠다고 소식이 왔다면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까?
그 분을 맞이하기 위해서 얼마나 세심한 준비를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이 큰 축복이듯이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은 크나큰 괴로움인 것입니다.
불국사의 석가탑을 조성하러간 남편을 매일 서서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는 안타깝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떤 개는 자기를 키우던 주인이 며칠동안 여행을 갔다 왔더니 그동안 그 개는 밥도 안먹고 잠도 안자고 앉아서 주인이 떠난곳만 바라다보고 있더라는 애처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부산과 같이 바다를 끼고 있는 곳에는 해양가족들이 많습니다.
어선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늘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아내나 자식이 자기를 대신해서 가족들을 잘 돌보고 살림을 잘 살아주기를 바라며 귀항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가족들 역시 남편이나 아버지를 대신해서 성실히 알뜰히 살아가며 남편이나 아버지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간혹 남편이나 아버지가 안 계시는 동안 바람을 피우거나 재산을 낭비하거나 큰일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뒤탈이 겁이 나서 남편이나 아버지가 귀항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늘 준비하고 있어라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고 하십니다.
성 알로이시오께서 소신학생이었을때 일입니다. 교장 신부님께서 쉬는 시간에 학생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만일 내일 이 세상이 끝나고 공심판이 있다면 너는 지금 무엇을 하겠느냐?』고 질문을 하시니까 어떤 학생은 지금 당장 고해성사를 보고 누구와 화해하겠다고 하고, 어떤 학생은 남의 물건을 불법으로 가지고 있던 것을 돌려주고 성체 조배를 하겠다고, 어떤 학생은 미루고 안한 보속을 먼저 하고 부모님을 찾아가겠다고 하는데 알로이시오 신학생에게 너는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으니 지금은 쉬는 시간이니까 이대로 쉬고 있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우리도 등잔에 기름을 늘 채우고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립시다.
노아의 방주가 필요한 시대
황창연 신부님
현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이 노아 시대에 홍수로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쓸어 버렸듯이 도시 문명은 하루아침에 무너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도시는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일 외에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습니다. 도시의 밤거리를 상상해 보십시요! 온갖 네온싸인와 등불들은 석유 에너지와 원자력 에너지를 무한정으로 소비해 버리는 행위입니다. 또 각종 술집과 음식점은 엄청난 양의 식량을 소비합니다. 1992년도에 15달러 하던 석유 값이 앞으로 20년 내에 100달러를 돌파할거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2070년이면 북극의 얼음이 다 녹습니다. 지구 온난화로 빙하의 두께는 30년 전에 비해 그 두께가 반으로 줄어들었으며 지금도 빙하는 녹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라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석유값은 폭등을 할 것이며 우리나라 경제 시스템과 사회 시스템은 멈춰버리게 될 것입니다. 재생가능한 에너지(대체에너지)에 대한 국가적, 종교적 준비가 없다면 우리나라는 노아의 홍수에 해당하는 재앙을 맞이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우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도시를 떠나 전기 없이도 살 수 있고 석유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노아의 방주를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스콧니어링은 부부가 700평의 밭만 있으면 쌀을 제외한 모든 먹을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황토집을 잘 지어 나무로 불을 때면 에너지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도 생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금 평창 생태마을에 황토집을 짓고 있습니다. 벽두께를 60cm로 지어 여름에는 에어콘과 선풍기가 필요 없고, 겨울에는 한 번만 불을 때도 한 주일 정도 훈훈할 수 있도록 구들을 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회 풍토는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서 남보다 더 많이 벌어 더 넓은 아파트 사고 더 부자가 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죽는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우리네 인생은 키잡이를 놓친 방황하는 배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 구름, 별들을 느끼고 감탄하기에도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이제 많은 분들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는 경쟁사회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 삼아 존재의 충만함을 느끼는 전원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수원교구는 주교님의 특별한 배려로 평창(1만 9천 평)과 황간(13만 평)에 생태마을을 꾸며 놓고 있습니다. 이제 자식 다 키워 놓으시고 도시에서 살 만큼 사신 분들은 하느님과 함께 이 생태마을에서 농사를 지으시지 않겠습니까?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현대의 노아란 온갖 에너지를 소비하는 도시에서 빠져나와 농사를 짓는 사람들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정 세라피아 수녀
교회 전례력은 오늘부터 새해를 시작하며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그날은 개인적으로는 내 생의 마지막 날이요, 인류 공동체적으로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기도 합니다.
사형수들은 자신이 죽을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날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특히 아침마다 교도관의 발소리가 어느 방 앞에서 멈추는지 숨죽이는 그 마음을 생각하면 살아 있는 것이 그들만큼 절실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과연 마지막 날을 아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재림에 대해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마태 24,36ㄱ)고 하시며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모른다는 말씀을 짧은 문장에서 세 번이나 언급하십니다. “홍수 이전 시대에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24,38-39ㄱ)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어도 그것이 그들에게 아무런 경고가 되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날도 우리는 여전히 위기 불감증 환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상사’는 중요한 일입니다. ‘장애가 있기 전에는 일상의 평범함이 이렇게 소중하고, 행복한 일이란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어느 장애인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시집가고 장가가고 장사하는 것을 우선순위에 둔 사람들은 그 이유 때문에 주님의 잔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루카 14,15-21 참조) 그러나 깨어 있는 사람들은 똑같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지만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그렇게 합니다. 남전선사는 ‘도란 평상심이다.’고 했습니다. 똑같이 일상을 살지만 각기 다른 차원에서 할 수 있습니다. 잠자는 사람은 밥을 먹으면서 어제 일을 후회하고 길을 가면서 미래를 걱정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은 밥을 먹을 땐 밥만 먹고 잠잘 땐 잠만 자는, 현재를 충만히 사는 사람입니다. 현재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은 어린이다운 특성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24,42ㄱ) 어떻게 해야 깨어 있는 것입니까? 스물네 시간 잠을 자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 자신이 깨어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다고 다 보는 것도 아니고, 귀를 가지고 있다고 다 듣는 것도 아닙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요한 9,41ㄴ),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요한 10,3ㄴ),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0,6ㄴ) 곧 눈 뜬 장님도 있고 귀를 가지고도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양들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고문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으니 상처 속에 신음해야 할 것 같은 그가, 이 세상살이가 소풍이었고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 다른 차원의 시각으로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잠자는 사람아, 깨어나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비추어 주시리라.”(에페 5,14) 깨어 있지 않는 것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열려 있고, 열려 있는 사람은 쉽게 깨닫고, 깨달은 사람은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어둔 밤의 절망과 타는 갈망과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을 산행 길에서 절로 영글어 떨어진 밤 한 톨 줍다/만지작거리다 꽉 깨무는 순간 밤벌레 한 마리/고개를 쏙 내민다/나도 깜짝 놀랐지만/그 녀석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다/나는 하마터면 그 녀석의 징그러운 몸뚱이를/깨물 뻔했다는 사실에 놀랐고/그 녀석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세상 전체가/갑자기 두 쪽이 나고 생명까지 두 동강 날 뻔한/일생 일대의 엄청난 사태에 놀랐다/아, 누가 있어 어두운 밤 속에 있는 나의 이 집도/흔들어 깨물어 줄 것인가?/그 앞에 나도 이 추한 몸뚱이를 그대로 드러내고 싶다/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박살나면서 나타난/시리도록 푸른 하늘/그 하늘을 보면서 밤벌레는 죽었다/나도 그처럼 죽고 싶다/단 한번만 그 하늘을 볼 수 있다면/굳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지 않아도/그냥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이대근, <가을 산행 길에서>)
이 글을 읽는 순간 ‘푸르고 시린 하늘을 단 한번만 볼 수 있다면 굳이 애벌레가 나비로 변하지 않아도 그냥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그 깨어나고 싶은 절박함이 눈물겹도록 절절히 다가왔습니다. 저자가 밤벌레의 세계를 박살냈듯이, 주님이 바오로 사도의 세계를 박살냈듯이 나의 어둡고 단단한 세계도 깨물어 흔들어 주시기를 소망하며 한동안 ‘나도 그처럼 죽고 싶다’란 구절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문화와 상업 중심의 대도시 타르수스 출신, 벤야민 지파, 로마 시민권자,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율사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촉망받던, 누구보다도 철저히 율법을 준수하며 하느님을 섬겼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모조리 잡아 가두기 위한 임무를 띠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지금까지 지녀온 가치관 전체가 두 쪽이 나는 체험을 합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4-5) 그는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사흘 동안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박살난 충격과, 새롭게 열린 푸르고 시린 하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은 이로 인해 대전환을 맞고 새롭게 태어나 깨달은 자로서의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필리 1,20)
아, 주님께서 어둔 밤 속에 있는 나의 이 집도 흔들어 깨물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준비하는 삶
경규봉 신부님
오늘부터 교회력으로 새해가 시작된다. 교회는 예수님 기다리는 대림절로 새해를 시작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곧 기다림 - 자신의 완성을 기다리고 하느님을 기다리는 것임을 가르쳐준다.
기다림은 삶의 특징이다. 기다림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그것은 지독히도 지루한 삶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낙담과 절망에 빠지게 한다. 의욕을 잃게 하고, 우울증이나 기타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리게 한다.
미국의 어느 의과대학에서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다. 쥐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첫째 그룹의 쥐에게는 가두어둔 상태에서 음식을 풍부히 제공하여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둘째 그룹과 셋째 그룹의 쥐에게는 우리 안에 쳇바퀴를 넣어두고 매일 30분 동안 전류가 흐르도록 했다. 그런데 둘째 그룹의 쥐에게는 어떤 일을 해도 전류가 통하도록 장치해 놓았고 셋째 그룹의 쥐에게는 쳇바퀴를 50번 돌리면 잠시 동안 전류가 끊어지도록 장치를 해놓았다. 물론 전류가 흐르는 시간은 둘 다 똑같이 30분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3주 동안 실험을 계속 했는데, 첫째 그룹의 쥐들은 우울증이 시작되었고, 둘째 그룹의 쥐들은 거의 우울증에 걸려서 전기 자극에도 무감각해졌는데, 셋째 그룹의 쥐는 건강했다고 한다.
이 실험결과 ‘물질이 풍요로운가? 그렇지 않은가?’ 또는 ‘고생이 심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서 우울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의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고 한다(이상구저 “복음과 건강”).
기다림의 삶을 사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고, 기다림의 삶을 살 때 사람은 건강하고 밝은 삶을 살 수 있으며 모든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 수가 있다. 기다림은 우리로 하여금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하며 의미와 보람을 찾게 한다. 그리고 누구나 기다림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무엇을 바라고 기다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되고, 그의 삶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결정된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 이득만을 바라고 원할 때 그의 삶도 결코 아름다울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다갔지만, 우리에게 기억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은 까닭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현실적인 이익만을 바라고 살았기 때문이다. 나와 내 가족, 내 주변의 사람들에 대한 이익만을 꿈꾸었을 때,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 주변의 소속의 사람들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 같은 분은 조국이 일제치하에 있을 때에도 언제나 조국의 해방을 바라고 기다렸으며, 조국이 해방된 후 남북으로 분단되었을 때에는 조국의 통일을 바라고 기다리는 삶을 사셨다. 그래서 누가 당신께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 소원은 첫째도 통일이요 둘째도 통일이며 셋째도 통일이라고 답하셨다. 그분이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건강미가 넘치고 정력적이었던 이유는 당신의 숭고한 꿈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분이 비록 통일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비명에 가셨지만, 그분의 희망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분의 삶 또한 아름다웠고 모든 한국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분이 되셨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희망, 원대한 꿈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해준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인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바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지금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기를 기대하고 종말에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만물의 완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원대한 꿈과 희망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삶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세상을 보면 그가 비록 그리스도인이지만 그의 삶은 결코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성당 다니는 사람도 도둑놈이고 사기꾼이고 못된 놈이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대림절이 시작된 지 십 수세기가 흘렀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희망하고 기다리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한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너무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기를 아직도 기도하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세상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있으며, 오늘도 많은 이들이 불의에 쓰러지고 상처받고 신음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삶이 우리에겐 절실히 필요하다.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먼저 우리자신이 변화를 구해야 한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다림의 삶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때의 일을 말씀하시며, 노아가 방주에 들어갔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가 휩쓸러 갔다고 말씀하신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 그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고 극히 일상적인 일이다. 거기에는 선악의 구별이 있을 수가 없다.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삶의 밑바탕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홍수에 휩쓸려갔다. 더 나아가서 밭에 두 사람이 있고, 두 여인이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 버려둔다고 말씀하신다. 똑같은 상황인데도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고 시집 장가가는 일 자체에 관심을 두고 말씀하신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런 일상적인 일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일을 하는 중에도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갖고 사느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자세, 하느님을 가다리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아무리 그가 그리스도인이며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기다림의 자세에 대해 뒤이어 설명해 주신다.
“깨어 있어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지만, 그런 일상적인 일에 취해서 빠져있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정신을 흐트러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일상적인 것에만 얽매이게 하는 모든 것들에서 깨어있어라. 마약, 알코올, 도박, 춤 등 세상 것의 재미에만 빠지지 말고 깨어있어라. 형이하학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쏟지 말고 깨어 있음으로써 형이상학적인데 마음과 정신을 기울이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면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고 동물과 다른 바 없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은 저 높은 곳을 향해야 하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영혼과 지성이 맑은 상태로, 깨어있는 상태로 유지되지 않고 지상 일에만 마음을 쏟아 흐려진다면 우리는 결코 기다림의 삶을 살수도 없고 예수를 맞이할 수도 없으며 자신의 완성을 이룰 수도 없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준비하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다.
삶은 곧 준비이다. 미래를 향한 준비이다. 학생들이 시험을 준비하고, 결혼 적령기의 처녀들이 결혼을 준비하듯이, 삶은 어떤 결실을 얻기 위한 준비이다. 준비하지 않은 상태로 좋은 결실을 맺을 수가 없다. 화가가 한 점의 좋은 그림을 얻기 위해 수없이 그림을 그리는 연습을 하고, 똑같은 그림을 수없이 반복하여 그린다. 좋은 그림은 그가 얼마만큼 연습했고, 준비했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얼마만큼 나의 삶을 준비했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우리가 우리 삶의 결실을 얻고자 한다면, 자아 완성과 하느님 나라라는 결실을 얻고자 한다면 그에 알맞은 준비를 해야만 한다. 아무런 준비 없이 우리 인생의 결실을 맺을 수가 없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당에 다니고 아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위한 준비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준비이다.
오늘 대림 첫 주일을 지내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자.
나는 정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영혼과 마음과 정신을 맑은 상태로 깨어 있음으로서 그리스도를 맞이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의 결실을 맺기 위하여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하여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하고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준비하며 깨어있는 삶을 살 때,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시고, 종말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 우리의 삶의 열매가 풍성히 맺어질 것이다.
기다려라.
정승현 신부님
하느님은 우리의 꿈,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그분은 넘치게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십니다.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현실의 거짓과 부정에 맞서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사실 하느님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며 부르짖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어둠을 밝히려 애쓰며 진리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위해 투쟁합니다.
우리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그 꿈을 이루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바를 온전히 이루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이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이 되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의 꿈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그냥 물거품으로 사라지지 않음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꿈이 되셨습니다.
그분 안에 이루어졌던 그 꿈은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 우리 - 인류 공동체 - 안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충분히 깨닫지 못해, 정확히 표현할 수 없어 안타깝지만 분명 인류의 꿈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처음 오셨을 그때처럼 말입니다.
이사야는 그 꿈을, 그 꿈이 실현될 날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장차 어느 날엔가 주님의 집이 서있는 산이 우뚝 서고 모든 언덕 위에 드높이 솟아 만국이 그리로 물밀듯이 밀려들리라. 그때 수많은 민족이 모여 와서 말하리라. ‘자, 올라가자, 주님의 산으로, 하느님께서 계신 전으로! 사는 길을 그에게 배우고 그 길을 따라가자.’ 그가 민족 간의 분쟁을 심판하시고 나라 사이의 분규를 조정하시리니, 나라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 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
사람들이 하느님의 길을 따라 삶으로써 전쟁이 없는 그 날이 오리라는 우리의 꿈은 꼭 실현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실현되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두 종류로 구분하십니다.
하나는 깨어있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깨어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표현대로 한다면 꿈이 있는 사람과 꿈이 없는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어느 시대나 깨어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 날, 그 때에도 그럴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그리스도 예수의 탄생 때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노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바로 그럴 것이다. 사람들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다가 홍수를 만나 모두 휩쓸려갔다.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깨어있어라.”
바오로 사도는 진정한 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군대와 법으로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구가하던 사람들에게, 헛된 꿈에서 깨어나라고 외칩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왔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밤이 거의 새어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몸을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꿈은 “꿈 깨라!” 할 때의 그 꿈이 아닙니다.
그런 꿈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꿈, 하느님의 꿈이 아닙니다.
우리의 꿈은 하느님과 함께 꾸는 꿈입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꾸는 꿈이 아니라 대낮에 두 눈 부릅뜨고 꾸는 꿈입니다.
그 꿈을 위해 지금은 깨어있을 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깨어 기다립니다. 우리의 꿈을 이루어주실 그분을!
[“지금의,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에 만족하시오.”
“내가 만약 행복한 세상을 꿈꾸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할 것입니다.”
“어째서 당신은 그런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시오?”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일 이외에는 하고 싶은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L. 뒤발 뤼시엥, 『달과 놀던 아이』, 159면.]
하느님의 때를 준비하자.
강길웅 신부님
하느님의 계산은 인간의 계산과는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신앙인은 진정 하느님의 계산을 늘 염두에 두고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기쁨과 은혜는 바로 그것을 아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은혜를 모르면서 사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신앙을 자꾸 인간의 계산으로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믿으면서도 외롭고 팍팍하며 또 믿는 것만큼 고달픕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 또 기다림의 자세로 성탄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고 있고 또 그 준비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기다림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기다리셨습니다. 아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하느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도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성서가 전하고 있는 중요한 단어는 시간입니다. 즉 때를 말합니다. 그것도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계획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통 때가 아닙니다.
세상 만사는 다 때가 있습니다. 전도서(3장)의 말처럼 심을 때가 있으면 거둘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메뚜기도 철이 있다고 사업이나 장사도 때를 놓치면 큰 손해를 봅니다. 공부도 그렇고 사는 삶의 여러 부문이 그렇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구원의 때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또 그분이 원하시는 때를 말합니다.
성서가 말하는 중요한 때를 카이로스(Kairos)라고 합니다. 여기서 카이로스라는 말은 충분히 찬 시간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곡식이 익은 것은 익을 만한 시간과 노력이 충분히 차 있었기에 익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 때가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게 카이로스며 또 때가 차면 재림하십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때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분명히 하느님의 섭리요 계획입니다.
이처럼 대림절은 두 가지 형태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그 분을 영접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닦고 생활을 준비하는 경건한 때입니다. 그리고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시간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대림절은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때이지만 더 분명하게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를 뜻 없이 헛되게 지내서는 안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희망의 메시지가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북쪽의 이스라엘은 이미 망해 있었고 남쪽의 유다 왕국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나라의 운명은 풍전등화 격이었습니다.
백성들도 공포와 불안에 떨었으며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 이사야가 나타나서 하느님께서 다시 찾아오신다는 기쁨과 희망의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절망이라는 막다른 골목에서 새 길이 열립니다.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2독서의 말씀에서도 깨어나야 할 때가 왔다고 바오로 사도가 외치고 있는데, 성 아우구스띠노가 바로 이 성서 구절을 읽고는 완전히 변화되며 새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는 본래 행복은 쾌락에 있다 하여 온갖 탐욕적인 생활을 다 했지만 그러나 그럴수록 더 허전하고 삶은 메마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번민과 몸부림 끝에 우연히 "집어서 읽어라."라는 말을 듣고는 얼른 방으로 달려가 바오로 서간경을 펼쳐 보니 바로 로마서 13장 13절이 나왔습니다.
"진탕 먹고 마시고 취하거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분쟁과 시기를 일삼거나 하지말고 언제나 대낮으로 생각하고 단정하게 살아갑시다."
그때까지 눈물 속에서 몹시 괴로워하던 아우구스띠노는 바로 이 대목에서 너무도 큰 하느님의 은총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드디어 찾던 것을 찾았고 만나고자 하던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실로 구원의 때를 만났던 것입니다.
대림절은 우리가 지난 1년을 반성하면서 보다 더 성숙하고 새롭게 변화되는 은혜로운 시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림절은 성장의 시기이고 또한 회개의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계산은 우리의 계산하고는 다릅니다. 정말 다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에 그분이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불쑥 오십니다. 따라서 늘 단정한 몸과 마음으로 깨어 준비하도록 합시다. 그것이 축복의 길이요 또한 아름답고 멋지게 사는 길입니다.
새로운 전례주년의 첫날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오늘 대림 제1주일과 함께 교회는 새로운 한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한다. 전례주년의 기본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과 공생활, 그리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하느님의 인류구원역사를 “오늘”, 그리고 “여기”에 재현하고 기념하는데 있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인류에 대한 구원사건의 신비를 1년의 전례주년 안에서 시기별로 나누어 기념함으로써 구원사건의 신비를 재현하고 이에 신자들의 삶을 질서 지우고자 한다. 전례주년은 특히 시간(時間)과 장소(場所)의 성화(聖化)를 강조한다. 매년 반복되기에 지루한 감을 주기도 하지만, 전례주년은 하느님께서 전 인류와 전 역사에 베푸신 구원의 신비를 1년이라는 주기(週期) 속에서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사건으로 체험함으로써, 신자들이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찬미와 기쁨으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지속적으로 마련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은 이러한 전례주년의 신비 속에서 매번 그 사건(구원사건과 성인축일)의 의미를 충분히 묵상하여 전례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성화하여 이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참다운 ‘성사(聖事)’로서의 사도직을 충실히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전례주년의 중심은 예수님의 성탄과 부활사건이다. 그래서 주님성탄대축일과 주님부활대축일이 전례주년의 두 기둥이 된다. 교회는 12월 25일 성탄대축일을 준비하기 위해 4주간의 대림시기를 지내며, 그 다음 주님세례축일까지 성탄시기를 보낸다. 주님세례축일 다음 월요일부터 연중시기를 지내는데, 이는 대략 연중 제5~7주간으로 중단된다. 그 이유는 주님부활대축일을 준비하는 사순시기 때문이다. 부활대축일은 매년 “춘분(3월21일)이 지나 만월(음력 15일) 다음에 오는 첫 주일”로 정해진다. 당해의 부활대축일이 정해지면, 거꾸로 46일째 되는 날이 사순시기(총40일)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이다. 이 기간 중 6번의 주일은 사순시기에서 제외된다. 주님부활대축일부터 부활시기가 시작되는데, 이는 주님승천대축일과 성령강림대축일까지 50일간 계속된다. 그 다음 월요일부터 사순시기로 말미암아 중단되었던 연중시기가 계속된다. 우리는 편리상 사순시기 이전의 연중시기를 연중시기[I], 부활시기 이후의 연중시기를 연중시기[2]라고 할 수 있다. 연중시기[2]는 한해 전례주년의 마지막인 연중 제34주간으로 끝난다.
따라서 전례주년은 크게 그 순서에 따라 대림시기 -> 성탄시기 -> 연중시기[1] -> 사순시기 -> 성주간 -> 부활시기 -> 연중시기[2]로 구분되는 것이다. 전례주년의 모든 시기는 통상 그 날의 사건과 의미를 밝히는 특별전례와 함께 성체성사, 즉 미사로 기념된다. 미사는 “주일미사”와 “평일미사”로 구분되며, 그 미사의 등급이나 중요성에 따라 “대축일미사”, “축일미사”, 또는 “기념미사”로 불리며, 모든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된다. 특히 말씀전례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교회는 주일을 3년 주기 [가해, 나해, 다해]로 정하였고, 평일을 2년 주기 [홀수해, 짝수해]로 정하였다. 이는 말씀전례의 독서와 복음을 지정하기 위한 목적이다. 따라서 모든 주일미사에는 3년을 주기로 같은 독서와 복음이 봉독되며, 가해는 마태오복음을, 나해는 마르코복음을, 다해는 루가복음을, 부활시기에는 요한복음을 위주로 선택하였다. 평일미사의 독서는 홀수해와 짝수해의 원칙을 따라 신?구약성서에서, 복음은 매년 같은 복음으로 봉독된다.
그러므로 오늘 대림 제1주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2005년 “가해”와 “홀수해”의 전례주년을 시작한 셈이다. 따라서 올해의 전례주년동안 우리는 부활시기와 특별한 대축일을 제외한 모든 주일미사에서 마태오복음을 미사의 복음으로 봉독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전례주년은 매번 기다림과 준비로 특성화된 대림시기로 시작된다. 대림(待臨)은 말 그대로 “올 것에 대한 준비”를 말하며, 대림시기는 그 준비기간이다. 무엇이 온다는 것이며, 어떻게 준비하라는 것인가? 교회가 말하는 대림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느님의 이 땅에 “벌써 오심”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성탄과 인자의 재림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의 종말설교(24-25장)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늘 깨어 준비하고 기도함”을 인자의 재림에 대한 준비과제로 제시한다. 노아의 홍수(창세 6-8장) 때나 재산을 노리는 도둑처럼 인자의 재림이 들이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재림하시는 인자 앞에는 누구나 철저히 홀로 서야 한다. 따라서 ‘늘 깨어 준비하고 기도하는 일’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각자 스스로가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성탄과 재림”,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내포하고 있는 대림시기는 우리에게 과거지사의 성탄과 미래사건의 재림을 한꺼번에 묵상하도록 가르친다.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한꺼번에 현재의 순간으로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을 내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키는 것” 뿐이다. 매년 같은 일을 한다고 식상해서는 안 된다. 벌써 오셨던 하느님과 다시 오실 하느님은 한결같은 분이시나, 우리 자신이 달라졌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분명 작년의 내가 아니며, 어제의 내가 아니다. 거울을 앞에 놓고 자신의 겉과 속을 비추어 보라. 분명히 나의 모습을 달라졌다. 우리는 성장했고, 변했다. 그래서 올해의 대림도 그만큼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전례력의 마지막 날인 어제 연중 제34주간 토요일의 복음(루가 21,34-35)과 새 전례력의 시작인 오늘 대림 제1주일의 복음(마태 24,37-44)이 ‘늘 깨어 기도하고 준비하라’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하느님 안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부디 우리 모두에게 아주 특별한 대림시기가 되기를 기원한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도 기억이 사라지면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주었던 영화가 ‘내 머리 속의 지우개’입니다.
수진은 유달리 건망증이 심합니다. 편의점에서 콜라를 사고는 그냥 나와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남자가 자신의 콜라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 콜라를 빼앗아 마셔버립니다. 그런데 지갑까지 놓고 나온 것을 다시 기억하고서는 편의점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지갑은 물론 콜라까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인연으로 수진은 콜라를 영문도 모르고 빼앗겨버린 철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은 사랑이 깊어져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억력이 점점 사라져서 어느 날은 집에 오는 길도 떠오르지 않게 됩니다. 혹시나 해서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그 판정이 건망증이 아니라 알츠하이머, 즉 치매였던 것입니다. 치매는 가까운 기억부터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결국 수진은 철수에게 헤어지자고 합니다.
“내 머리 속에 지우개가 있대.”
그러나 철수는 끝까지 수진을 지켜내려고 합니다. 모든 물건에 사용법과 이름을 써줍니다. 수진의 머리에서 철수의 기억부터 지워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에게 상처만 주고 떠났던 옛 애인 영민이가 수진의 옛 물건들을 가져다주러 찾아왔습니다. 수진은 자신이 결혼한 줄도 모르고 옛 애인을 사귈 때의 기억만 남아있어서 그를 여전히 애인처럼 대합니다. 영민은 또 이런 수진을 이용합니다. 급기야 수진은 철수를 보며 영민이라 부릅니다. 철수는 영민처럼 행동해주지만 그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수진의 마음엔 더 이상 철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득문득 자신이 철수를 사랑했고 그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떠오르게 되는데 그 때 더욱 가슴이 찢어지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결혼한 것도 잊고 옛 애인 이름만을 불렀다는 것을 자신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기억이 지워질수록 사랑은 고통만 남게 됩니다.
지금 사랑하면 지난 기억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이 사라지면 사랑도 사라집니다.
기억을 조금씩 상실해 가는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청했습니다. 의사는 뇌수술을 하면 기억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러나 수술부위가 시신경과 접해있기 때문에 시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겠습니까? 시력입니까, 아니면 기억입니까?”
여러분은 기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시력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저는 기억을 선택하겠습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더라도 나의 부모님이 누구이고 내가 그리스도로부터 사랑받았고 또 사랑하는 수많은 사람들과의 추억을 버린다면 이 세상을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늑대에게 길러진 아이들은 자신들이 늑대로부터 길러졌다는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억이 온 삶을 지배합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 대한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와 같습니다. 정신이 팔리게 해서 기억해야 할 것을 망각하며 살게 만듭니다. 예를 들면 몇 년 전에 컴퓨터 게임에 빠진 젊은 부부가 자신의 자녀를 굶겨죽게 만든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게임을 하느라 자신들에게 아이가 있는지조차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오실 때가 마치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홍수가 들이닥치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닥쳐 모두 휩쓸어 갈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만은 하느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노아가 배를 만든 기간은 결코 짧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노아가 480세부터 600세가 될 때까지 120년간 방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즉 노아가 깨어있었다고 하는 뜻은 그 오랜 세월동안 하느님 말씀을 잊지 않고 실천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옛 일본의 한 성주가 새로운 성을 짓고 싶어 하였는데 성을 지을 때 기둥에 산 사람을 한 명 넣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성주는 누구든 자신의 성에 기둥이 되면 아들을 사무라이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무라이는 신라시대 화랑들처럼 귀족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된 높은 신분의 단체였습니다.
이에 평민 한 어머니가 새로 짓는 성의 기둥이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 성주는 그 어머니를 기둥에 넣고 성을 지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아들은 성주의 약속대로 사무라이가 되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높은 귀족신분이 아닌지라 함께 훈련받는 귀족 자제들로부터 심한 차별을 받게 됩니다. 몇 번이고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때마다 어머니가 들어가 있는 기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무라이로 만들기 위해 성의 기둥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생각하며 끝까지 참고 견뎌서 훌륭한 사무라이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있음입니다. 기억해내려고 노력해야만 기억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무라이는 깨어있었습니다. 깨어있다는 뜻은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기억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하고 우리는 수시로 그 기억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며 나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은 자꾸 사랑을 지워버리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사랑의 마음을 담아낸 아주 유명한 표현 가운데 하나는 타지마할입니다. 타지마할은 39세에 아이를 낳다가 유명을 달리한 인도 여왕 뭄테츠 마할을 위한 무덤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사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온 세상이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비를 건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강 근처에 있는 정원을 건축 장소로 선정했고,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가와 석공을 동원했으며, 귀한 건축 자재를 먼 곳에서 수입했습니다. 무려 20여 년에 걸친 공사 끝에 아름답고 정교한 건축물이 완공되었습니다.
결혼하면 그 결혼을 기억하기 위해 반지를 교환하고 반지를 항상 차고 다니며 자신이 결혼한 사람임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항상 어머니가 들어있는 기둥을 찾았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사랑을 ‘기억’하라고 ‘미사’를 제정했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미사를 드리면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사만 꾸준히 나와도 우리는 어느 정도 깨어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사에 빠지면서 하느님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입니다. 따라서 어떤 표징을 통해 항상 기억을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부모를 항상 기억한다고 하면서 성묘를 한 번도 가지 않는 것이 말이 안 되듯이, 미사를 하지 않으면서 그분을 기억했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리스도와의 영적혼인을 경험하고는 단 한 순간도 그리스도를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저절로 기억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기억하기 위해 그만큼 완전한 노력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잊지 않도록 미사와 밥 먹을 때, 혹은 아침저녁 기도나 삼종기도 등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우리도 내 시간을 억지로라도 잘라서 자주 기도를 바치며 그분을 삶 안에서 지우는 시간을 줄여가도록 노력합시다. 이것이 깨어 있으려고 노력하는 삶입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극이 필요한 것이라고 합니다. 깨어 있으려면 잠과 싸워야합니다. 마찬가지로 기억하려면 잊혀지는 것과 또 잊혀지게 만드는 것들과 맞서야합니다. 노력하지 않고서는 결코 깨어있을 수 없습니다. 자주 그분을 기억하기 위해 나만의 노력들을 만들어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