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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에 관한 논쟁 거리 중 하나는 "언제 시작했냐"는 것입니다. 기존의 관점은 스탈린이 키로프 암살 이후 대숙청을 향한 단계 단계를 밟아갔다는 식이었죠. 다른 이들은 1937년을 지적합니다. 데이비드 호프만이 모스크바 당 문서고에 근거해서 제시한 논문은 대숙청이 1936년 8월 갑작스럽게 시작했다고 주장합니다.
호프만이 얘기하는 것은 대숙청의 기초는 1936년 7월 29일 중앙위에서 지역 당 위원회에 모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뿌리 뽑으라는 요지의 특급기밀 서한으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지역 당위원회에서 각 공장과 당세포들로 이 지시가 이어지며 당원들끼리 서로 기소, 역기소를 해대면서 저자들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다 아니다 니들이 트로츠키주의자 아니냐 라며 상호 비방전이 시작되다는 것이죠.
저자인 제임스 해리스에 따르면 호프만의 논문은 당 문서고가 처음 열렸을 때 가볍게 묘사한 수준이라 디테일한 분석을 담고 있지는 않다고 하네요. 그래서 왜 하필 그 시기가 결정타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없다고... 스베르들롭스크 주의 NKVD 문서고 등은 7월 중앙위의 서한이 결정타였던 것은 맞으나, 중앙이 폭발적 대숙청 자체를 이거로 의도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의도치 않게 서한이 지역 내 갈등에 불을 붙여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는 기본적으로 1935년 1월 26일에 중앙이 보낸 '키로프 죽었으니 트로츠키주의자 잡아내라 ㅇㅇ' 편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실제로 별 볼일 없던, 과거 좌익반대파였거나 좌익반대파 일원과 친했던 몇몇 희생양들이 걸려서 숙청당한 것까지도 유사했죠. 1936년 서한이 보내진 후 중앙위에 보내진 첫번째 보고에 따르면 주 공산당은 즉각 69명의 당원을 숙청했습니다. 8월 16일, 주 공산당은 당조직들에게 중앙위에서 받은 것과 유사한 종류의 명령을 내립니다.
1935년 서한과 마찬가지로 이 때에도 늘 비슷했습니다. 위원회가 열렸고 비방전이 시작되었죠. 그리고 주 공산당에서는 해왔던 것처럼 몇 명 적당히 잡은 다음에 끝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달랐습니다. 8월이 지나고, 9월이 지나고, 가을이 끝나갈 때까지도 서로 간 비방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약한 고리는 비철금속 기업체, 상호 비방과 폭로에 가장 취약했던 곳이었습니다. 10월까지 모스크바는 이들의 생산 수치에 대해 "굉장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를 계속 보여줬었고, 최고비철금속산업부는 계속 이들을 닦달했었죠. 소련 비철금속 산업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산업재해의 절반 이상이 이곳에서 우랄에서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35년과 36년의 경제상황이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돌아가다보니 공장 관리자, 기업체 관리자, 지역 당조직들 간의 관계가 점차 적대적으로 변해갔습니다. 35년 서한 이후 36년 봄까지도 그들은 몇몇 희생양을 찾아서 본보기로 보여주는 것으로 대처해왔으나, 36년 7월의 서한 이후 NKVD의 조사가 들어갔을 때는 분위기가 뭔가 싸했습니다. 키로프그라드의 구리 제련소의 노동부 장과 동료들이 "반소비에트적 행동"으로 비난 받았습니다. 사유는 그들이 임금을 의도적으로 낮게 주었다는 것이었죠. 같은 공장에서 스타하노프 운동가들은 스타하노프적 방법론을 발전시키지 못한 사유로 엔지니어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갔습니다. 크라스노우랄 구리 제련소는 지역 당 위원회와 공장 위원회의 갈등이 폭발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기소하여 모두 숙청당했습니다.
상호 비방의 물결은 몇달 동안 계속 퍼져나가 우랄의 가장 큰 비철금속 기업의 장이 체포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우랄 비철금속 기업체 장, 우랄 구리채광 기업체 장, 중부 우랄 구리화학 콤비나트 장까지 체포되었습니다. NKVD와 당통제위원회 문서고에 계속 걸려 있는 열람 제한 때문에 이 상호비방 물결의 모든 케이스를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만, 카바코프가 그의 심문자에게 한 다음의 진술로 미루어봐 주 공산당 지도부는 9월에는 이 기소의 폭풍을 통제하고자 하는 어떠한 희망도 버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역 NKVD 대표 레셰토프가 교체되고 새로운 대표인 드미트리예프가 도착했을 때,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소. 우리 발 밑의 땅이 너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어서 나는 곧바로 나와 나의 동료들의 일들이 밝혀지는 것은 오직 시간 문제라는 것을 이해했소."
카바코프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마 그의 심문자를 조금이라도 기분 좋게 하려는 의도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9월을 지목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죠. 레셰토프는 그의 친구였고 파벌을 보호해주는 데 협조하고 있었으며 관련 정보들도 다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드미트리예프는 그와 같지 않았죠. 동부 철강 기업체의 세다셰프의 증언에 따르면 카바코프는 레셰토프의 제거로 거의 패닉을 겪게 됩니다. 드미트리예프에 대한 공포는 재빠르게 현실화 되었죠. 그의 조사를 막을 방법은 없었습니다.
레셰토프의 제거는 NKVD의 인민위원이 야고다에서 예조프로 교체된 직후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게티는 1936년 9월, 케메로보 광산의 폭발이 변화를 초래했다고 합니다만 제임스 해리스는 소련 산업현장에서 만연하던 산업재해를 감안했을 때 이는 가능성이 낮다고 하네요. 에조프가 당통제위원회의 의장으로서 갖고 있던 정보를 야고다를 족치는 데 썼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NKVD 인민위원으로 예조프의 승진은 억압 수준에 대한 중앙 정책의 즉각적 변화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역 하부의 상호비난의 파도가 NKVD를 떠밀었죠. NKVD 심문자들은 줄줄이 나오는 이 상황에 꽤 놀랐습니다. 동부 철강 기업체의 관료이자 오블리스폴콤의 일원인 소베트니코프는 그의 심문자들에게 이런 경고를 받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소련의 가장 중요한 산업 지역들 중 하나의 지도적 관료들의 지하 조직의 일원으로 지목되었소. 우리는 이 지목의 완전한 중요성을 당신에게 강조해야만 하겠소."
스베르들롭스크 NKVD는 "독자적으로 활동했다"는 그들의 항변은 받아들일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어차피 하부 조직들에서 계속되는 새로운 "범죄들"에 대한 비난은 끊길 기세가 없었습니다. 비철금속 산업체와 함께 당조직들 전반에 대한 체포도 이어집니다. 우선 기존 좌익 반대파와 친하게 지냈던 스트리가노프를 잡아와서 족쳤습니다. 3개월 안에 주의 최고위급 관료 몇몇이 걸렸습니다. 오블플란의 푹스, 오블리스폴콤의 골로빈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산이 너무 부족했다고 항변했습니다. 실제로 예산이 부족한 것은 맞았죠. 그러나 이에 NKVD는 주의 식량 행정을 맡은 랴보프가 푹스와 골로빈의 행정을 비난하며 보내준 27 쪽 짜리 문서를 들이밉니다. 랴보프의 비난은 치명타였죠. 그들이 어떻게 계획을 과장했고 예산을 받아왔는지가 들어가 있었던 문서였죠.
주 공산당에서 밀실 회의가 열렸습니다. 원래대로라면 희생양을 찾아야 했지만 푹스는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겁에 질려 있었죠. 골로빈의 경우 관련 문서가 연구자에게 열려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카바코프는 골로빈이 곧 체포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개인 비서인 코스티나야의 증언에 따르면 카바코프는 골로빈의 "트로츠키주의적 활동"을 밝혀낸 것이 자기라는 식으로 홍보를 해 위기를 모면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카바코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올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골로빈에 대해 가능한 한 날카로운 용어를 써야만 하오." 그녀는 카바코프가 "굉장히 분노해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카바코프의 희망은 가을까지는 골로빈의 지위가 손상되는 선에서 체포의 물결이 중단되는 것이었습니다.
4주 뒤, 2월 중앙위 회기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중앙 지도부에서는 최근의 비난들과 그에 따른 조사들로 지역 지도부가 그들 지역의 진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숨기고 중앙 정책에 저항한 법을 어떻게 숨겨왔는지 잘 알고 있었죠.
그리고 즈다노프의 연설이 시작되었습니다. 지역 내에서 집단적 지도력의 쇠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지역 내 좁은 그룹끼리 뭉쳐다니고 상호 비판이 없어왔다고 말했죠. 스탈린이 연설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당원 그룹의 리더십 대신에, 평화롭게 살고자 신중하신 당원들로 구성된 가까운 친구들의 자그마한 파벌들을 잘 이해하고 있소. 그들은 자신들의 더러운 빨래를 말리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칭찬의 노래나 불러댔고, 그리고 이따금 구역질나고 알맹이 없는 '성공'의 보고서나 보내왔소."
스탈린도, 중앙의 지도자들도 이 "결탁"을 트로츠키주의 활동과 등치시키지는 않았습니다. 1937년 전까지 "관료주의적 관행을 향한 투쟁"과 "인민의 적에 대한 수색"을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전자는 관료주의적 "타성"의 묹였고 후자는 체제에 적대적인 "요소"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었죠. 그러나 경제적 문제가 지역 관료집단을 휩쓸고 가고 상호비난의 폭풍에 이르게 되자 대체 누가 "인민의 적"이고 누가 "관료주의적 무능아"인지 구분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중앙 지도자들은 NKVD에게 그러한 기준을 딱 잘라서 말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2월 회기에서 제시된 것은 그래서 "자아비판" 캠페인이었죠. 공장의 최말단에서 중앙위 최고위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실수"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권장되었습니다. 아 물론 다른 사람들 것도 말해주면 좋았죠.
본질적으로 중앙 지도부는 당 기구 내에서 비방의 흐름을 지속시키고 강화시키는 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지역 지도자들은 연단에 올라 그들의 "잘못"들을 고백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각자 집으로 돌아가 자신들이 맡은 각급 조직에서 똑같은 일을 해야한다는 건 덤이었죠. 이 결과는 새로운 비난의 연쇄였습니다. 숙청과 체포는 공장 당세포부터 주 공산당 중앙회의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5월 말까지 주 공산당의 가장 중요한 관료들 전원이 비난 받았고 체포 되었고 NKVD에 의해 구류되었습니다. 주 공산당의 비자금, 생산 장부 조작, 중앙 정책에 대한 의도적 무시, 그리고 키젤 탄전까지 모든 일들이 고발되었습니다. 자아비판 캠페인은 관료주의적 타성과 인민의 적의 스파이 활동을 구분하기보다는 체제에 대한 거대한 간첩활동이 존재한다는 인상만 남겨주었습니다.
1937년 여름, 대숙청의 새로운 페이즈가 시작되었습니다. NKVD는 더욱 활동적이 되었습니다. 체포는 더욱 무차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약식 처형이 일반화 되었습니다. 진짜 대숙청의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중앙 지도부는 파시스트들의 점증하는 위협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고, 이 혼란은 산업 생산량의 지속적인 감소와 맞물려 강화되었습니다. 산업의 후퇴는 경제 관리자들을 향한 대규모 체포가 초래한 결과이기도 했죠.
모스크바는 여전히 지속되는 대비방시대를 막을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숙청은 현 시국이 비상사태라는 공포와 함께 추진되었습니다. 몰로토프는 "반대파들의 위험은 너무 막대하오. (중략) 그리고 시간이 얼마 없소." 각각의 체포는 또다른 체포를 낳았고 공포의 사용은 야만스럽고 흉포한 형태로 지속되었습니다. 지역 지도자들의 행한 일들에 "독일간첩" 등등의 죄목이 붙여졌습니다.
사실 대숙청의 씨앗은 제1차 5개년 계획에 뿌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반대파, 집단화, 초고속 산업화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역 지도자들은 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 막대한 중앙 투자를 받기 위한 열정으로 넘쳤습니다. 그들은 좌익과 우익 반대파에 대항해 스탈린을 밀어올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협조 관계는 32-33년에 개졌습니다. 기근과 경제적 혼란 속에서 말이죠. 모스크바는 더욱 온건한 투자와 성장율을 지지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계획에 대한 즉각적이고 의문 없는 달성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지역 지도자들은 기존의 초고속 투자와 건설 분위기가 지속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부유하고 자주적이고, 상대적으로 탈중앙집권적인 연방 체제 내에서 경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행정구역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명령-행정 시스템"이 진화해가면서 모스크바는 계속되는 실패와 그에 대비해 야심찬 계획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지역도 이런 현상을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일단 그들은 투자를 받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중앙은 더 이상 지역 지도자들의 도움이 필요 없었습니다. 중앙 내부에서의 갈등도 사라졌고, 계획을 만드는 것은 중앙 정부 부처도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 후 테러가 뒤따라왔습니다. 실제로 지역 간 결탁이나 스파이 활동에 대한 어떤 범죄적 계획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지역 지도자들이 행한 중앙 정책에 대한 저항이나 조작된 보고서를 올려보내는 일들은 문제가 되었습니다. 위기가 심해질 때 그들은 희생양들을 찾았으나, 이런 것으로도 버티지 못할 임계점에 도달하자 물결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이런 전략은 자기파괴적인 전략이었습니다. 경제의 상호연결성 때문에 하나가 죽으면 다른 하나도 같이 죽어야만 했죠. 경제 전반에 걸친 위기가 지소되자 긴장과 갈등과 불만이 모두 한꺼번에 터져나왔습니다. 지역 지도자들은 이 물결을 도저히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모스크바는 하부 단위에서의 상호 비방과 기소의 물결을 촉진시키며 모가지 수확을 준비하고 있었죠. 그러나 그들도 예상 못한 건 그간의 희생양 만들기 관행이 빚어낸 화학적 결합이었습니다. 사보타주, 외국 첩자, 반대파, 인민의 적 등의 라벨링 관행이 이 폭발적 비난의 물결과 맞물렸습니다. 서로의 비난에는 이제 이러한 라벨링은 필수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체포되거나 처형당할 수 있었습니다. 라벨들이 더 견고했습니다.
첫댓글 혁명을 비롯한 각종 정치적 파동에 있어서는 그 배후에 경기불황이 뒤따르는 경우가 많지만, 대숙청 역시 마찬가지였던 거군요.
그 관료주의적 행태와 그로인한 경제성장률이 저하되는 현상이겠죠. 타성에 젖었고. 예산만 타먹고 제대로 안쓰는것이죠. 영토가 거대할수록 지방이 반독립내지는 풍부한 자치를 누리는데. 바로 저런꼬락서니가 터진거죠. 기만되고 거짓된 보고서 올려서 예산이나 축내고. 자기네 영향력과 지역팽창만 힘을쓰니. 국력의 발전보단 서로간의 견제와 뻥치기로 예산만 소모되고. 비단소련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나라에서도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벌이고 있는 진행중인 상황이죠
성장할 땐 문제제기가 비교적 덜 하겠죠. 쇠퇴할 땐 책임을 누군가 져야하겠고. 역시 쇠퇴해도 책임을 안 진 브레즈네프 시대가 유토피아야!
@첝 고르바초프: ㅠㅠㅠㅠㅠㅠㅠㅠㅠ
옐친: ㅋㅋㅋㅋㅋㅋ큐ㅠㅠㅠㅠㅠ
푸틴: 유가가! 유가가아아아아!
삭제된 댓글 입니다.
펑펑
이전부터 궁금했던건데, 왜 쏘련냥반들은 하오체를 쓰나양
스탈린동지께서 양체 쓰면 귀여울거같아양 "너놈은 굴라그행이에양!"
빟빟하오
아흐....시작된거다. 진짜가 나타난다.....
뎅겅뎅겅
X발! 혼자 죽을 순 없엉! 같이 죽자!
Fire!!!!
스탈린 동무께선 알고계신데~ 누가 삥땅쳤는지 주작했는지~ 엔카베데 다녀가신데~
선물은 루뱐카에서 직접 수령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니까 이게 일종의 디바이드 앤 룰이 된 측면이 있는거 같군요. 그 조건은 산업화로서 산업화과정에서의 성과와 책임을 둘러싼 하부조직들간의 만연한 갈등의 조건속에서 어떤 특정한 계기나 시점을 기점으로 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그 전체를 통제하고 총괄하는 중앙의 입장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 대숙청이다, 그렇게 보면 될지도...
여담인데, 쏘련의 20세기 중반을 수놓은 강력한 첩보능력은 이러한 내부갈등의 과정에서 저놈을 조지고 나는 살기위해 벌어졌던 수많은 "첩보전" 들로 쏘련 사회 자체가 첩보국가화 되어 단련된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그래서 저거 읽으면서 느낀 게 소련 사회의 상호 신뢰가 완전 박살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추후 대조국전쟁을 같이 치르면서 어떻게 되었을런지는 모르지만서도..
@첝 제가 틈틈이 이야기하는게 신뢰 라는 점에서 본다면... 만약 저러한 사회모델이 성공했다면 신뢰라는 것에 근간하지 않은, 전혀 다른 형태의 사회모델이 가능했을 것인가? 같은 떡밥도 흥미로울거 같긴 합니다. 물론 그런 것을 디스토피아적으로 묘사한게 스탈린 동지의 비망록인 1984 같은 거지만, 그렇게 아마이하게, 특히 정치적 목적론을 갖고 이야기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
@앙겔루스 노부스 혹시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시다믄 다음에 같이 이야기해봅세다. 제가 잘 기억못할지도 모르니 동무가 기억을 해 주시면 감사~
자폭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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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보셨습니다 ㅋㅋ 의도된 바도 있지만 의도되지 않은 혼란도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