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비사벌 초사가 기로岐路에 서 있다.
삶이 고달프고, 절망스러웠던 시절,
가끔씩 읊조렸던 시가 있었다.
신석정 시인의< 들길에 서서>라는 시였다.
”.....뼈에 저리도록 생활은 슬퍼도 좋다.
저문 들길에 서서
푸른 별을 바라보라
푸른 별을 바라보는 것은
하늘 아래 사는
나의 거룩한 일과이거니,“
전북 부안이 고향인 신석정 시인은
나와 성이 같은 매울 신辛, 창녕의 영산신씨와 영월 신씨, 그래서 신라면 신씨이다.
<어머니 그, 먼나라를 아십니까?>를 비롯한 수많은 주옥같은 시를 남긴
신석정 시인이 고향인 부안을 떠나 제 2의 고향으로 여기고 살다가
작고한 곳이 전주시 남노송동이다.
일제와 독재에 항거하면서 <어머니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 라는 시를 남긴 신석정 선생이 1954년 전주고에 교편을 잡으면서 정착했던 자택이 비사벌초사比斯伐艸舍이다. 신석정 시인은 전주의 옛 지명 ‘비사벌’과 볏짚 등으로 지붕을 인 집을 뜻하는 ‘초사’를 결합해서 비사벌초사라는 이름을 짓고서 살았기 때문에 전주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그 비사벌이라는 이름이 요즘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비사벌은 삼국사기에서 비롯되었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권 제 4 <신라본기> 제 4 진흥왕 조”에 “16년 봄 정월에 완산주를 비사벌에 설치하였다.(置完山州於比斯伐)”
<삼국사기> 권 제 36 잡어 제 5에 지리“전주는 원래 백제의 완산인데, 진흥왕 16년에 주로 만들었고, 26년에 주가 폐지되었다가 신문왕 5년에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건치연혁’에 ”백제의 완산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 16년에 완산주를 두었다가 동왕 26년에 주를 폐하고 신문왕 때 다시 완산주를 다시 설치하였다.
<여지도서>의 ”<완산지>에 실린 글을 보자.‘건치연혁建置沿革에 “본래 백제의 완산이다. 비사벌比斯伐이라고도 하며,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진흥왕 16(555)년에 완산주를 두었다가 26년에 주를 없앴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편찬은 영조 33년인 1757년 홍양한(洪良漢)이 임금에게 아뢴 것이 계기가 되었고,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팔도 감사에게 명을 내려 각 읍에서 읍지를 올려보내도록 하였으며, 그해부터∼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성책(成冊)한 전국 읍지(邑誌)이다.
그렇다면 경상도 창녕군의 창녕현 편에는 어떻게 실려 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 창녕현의 건치연혁에는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 또는 비사벌이다.”
군명, 비사벌, 비자화, 화왕, 하주,. 창산, 창성, 하성, 하산이라고 부른다.
<여지도서>“건치연혁’에 ”본래 신라의 비자화군(다른 이름으로 비사벌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16년(555)에 하주를 두었다가 진흥왕 21년에 폐했다.“
≪여지도서≫에는 읍지 편찬의 역사에서 중요한 진전이 이룬 저작으로 여지도(輿地圖)와 서(書)의 결합이라는 의미로 ≪여지도서≫라는 서명을 붙일 정도로 지도가 중시된 것이다.
영조 때까지 비사벌이라는 이름이 창녕과 전주에서 함께 썼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일대가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비사벌은 창녕이기 때문에 시인의 집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신석정 시인의 고향인 부안에는 신석정 시인의 문학관은 새로 만들어졌지만 생가는 사라졌다가 복원되었기 때문에 신석정 시인의 삶의 편린이 남아 있는 곳은 전주 비사벌초사뿐이다.
비사벌초사 일대를 <시인의 마을, 시인의 정원>으로 보존하면서 <신석정문학관>을 건립하여 문화마을로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시청 앞에서 집회를 하는 것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없는 것도 만들어내는 시대에 있는 것조차 지키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것을 속수무책 지켜보아야 하는 마음, 슬프지 아니한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이 시작된다. 내일, 또 내일에 해는 다시 떠오르고, 비사벌초사도 새로운 전기를 맞지 않을까?
2021년 7월 28일 수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