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0년대부터 1380년대까지의 영토이다.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서쪽으로는 폴란드와 크레보 조약을 맺으며 친선 및 안정을 행하였다. 반면에 동쪽으로는 쇠퇴한 루스 계 국가를 흡수하며 모스크바 공국과 경쟁했으며 가장 잘 나갈 때는 노브고로드 공국과 크림 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킵차크 칸국과 동맹을 해 모스크바를 압박하였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현대 리투아니아의 정체성을 정립한 국가로 독일의 동방식민운동에 반동하여 등장한 국가였다. 말 그대로 리투아니아인들의 국가였던 리투아니아 공국은 키예프 루스 계통의 국가들이 약화가 되었고 더 나아가 그들에게 종주권을 행사하던 킵차크 칸국마저 쇠퇴하자 급격하게 확장하였다. 이 국가를 세운 가문은 민다우가스 가문으로 발트인들의 종교를 유지하며 자신들의 고유성과 루스 국가의 동방정교회, 독일기사단의 가톨릭에 대항하며 자리매김하였다. 하지만 민다우가스 가문은 루스 국가들과의 과도한 전쟁으로 인해 마지막 민다우가스의 남계 가문원이 전투 중에 사망하자 여계 가문원과 결혼한 게디미나스 가문으로 지배 가문이 넘어간다.
게디미나스 가문은 마침내 폴란드의 선교사들을 통해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이의 이유는 크레보 조약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혼인 동맹을 자주 맺었는데 덕분에 서쪽 국경 평화와 모스크바와의 루스 세계의 지배권을 경쟁하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게디미나스 가문 치세 하의 최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노브고로드의 내정 간섭 강화, 크림 칸국과의 복속 서약을 받으면서 동유럽 최강국이 되었다.
이런 게디미나스 가문의 정력적인 정복 활동과 합스부르크와 같은 축을 하는 수많은 정략결혼 활동은 황금기를 맞이했지만, 반대로 리투아니아를 흔들게 하였다. 일단 게디미나스 가문은 성공적으로 이룩한 게디미나스는 형제는 6남매에 자식은 13명을 낳았다. 그리고 이후에는 게디미나스 자식들간에 형제 상속 중 리투아니아의 최전성기를 연 알기르다스가 자식을 22명을 낳았기 때문이다. 굵직한 방계만 6개에 계승권을 가진 게디미나스 가문원이 40~50명은 되었고 딸이라고 해도 정략 결혼으로 인해 강력한 남편 세력이 있어서 내홍은 너무나 뻔했다.
한 가문과 이와 얽힌 루스 귀족 가문들이 서로 궁중 암투를 하던 중 결국 두 파로 귀결되었다. 타협적인 결론을 내린 압도적 다수파와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소수파로 나뉘었는데
바로 형제 상속을 지속해서 일단은 가문원 간의 경쟁을 막자는 게디미나스 가문의 케스투티스 파벌과 정치적 카리스마와 뛰어난 군사 능력으로 대공작직을 상속 받고 이제부터는 알기르다스의 자식들이 상속 받자고 주장하고 분가까지 해버린 자겔리온 가문의 요가일라 파벌로 나뉘었다. 실질적으로 리투아니아의 구세력과 정교회, 루스 귀족 연합과 리투아니아 신세력, 가톨릭, 폴란드 연합이었다.
결국 두 파벌은 리투아니아 내전을 벌이고 노환, 독살, 암살, 전사 등 게디미나스 가문원 간의 혈투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첫댓글 리투아니아가 땅덩이가 저리 넓은데 왜 망했나 했더니 내전으로 망했군요...그래서 폴리투도 리투폴이 아니고 폴리투가 된건가요? 리투아니아 대공작이 폴란드 왕위까지 받게 되었으니 리투폴이 맞는 것 같은데, 역사에서는 대부분 폴리투로 보는것 같더라고요. 크킹식으로 따지면 왕국이 먼저 나오는게 맞긴 한데...
리투아니아인 10%로 루테니아인 등을 지배하는 구조에 문화가 폴란드 아래라 폴리투된겁니다..
망하진 않았고 리투아니아 2차 최전성기 영역 재현으로 설명드리겠습니다.
류리크가문처럼 가문이 너무 번영해서 문제가 생긴거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