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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성서읽기란 무엇인가?
-신앙과 삶의 불일치 넘어서기-
인문학의 위기와 신앙의 위기
“인문학적 성서읽기”라는 제목 앞에서 청중들은 몇 가지 반응이 있을 것 같다. 우선은 그 용어 자체에 대한 것이다. 귀납법적 성서읽기라거나 큐티 식 성서읽기, 또는 이야기 식 성서읽기라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조금 더 나아가서 신학적 성서읽기라고 한다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도대체 ‘인문학적’이라니 무슨 말이냐,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필자는 인문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궁금증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이렇게 방향만 잡겠다. 소위 전통적 의미의 인문학 분야인 문학, 역사, 철학은 어느 학자의 표현처럼 “인간 삶의 발자취, 혹은 흔적에 관한 성찰”이다. 따라서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성서도 역시 이런 인문학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는 성서는 바로 인간 삶의 발자취와 흔적이 담겨있는 텍스트이다. 이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당연히 문학, 역사, 철학에 관한 공부나 그런 사유가 필요하다. 물론 우리가 성서를 통해서 신앙을 배운다는 말은 옳지만 그 신앙도 인문학적 성찰을 필요로 한다. 그런 성찰이 없는 경우에 신앙은 곧 맹신, 광신, 미신으로 빠지고 말 것이다.
이와 달리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무조건적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옳다. 신앙은 당연히 그 어떤 조건이나 합리적 이유를 뛰어넘은 절대적인 성격이 있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 앞에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따르겠다는 사람을 향해 그런 일들은 세상 사람에게 맡기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절대적인 차원을 접어두고는 신앙이 아예 성립될 수 없다. 어린아이가 어머니 품 안에 안겨서 어머니를 절대적으로 신뢰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믿음이 곧 광신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예컨대 1992년 한국사회에 큰 해프닝을 일으켰던 “다미선교회” 사건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광신에 속한다. 무조건적인 믿음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되는 한국교회의 자화상이 바로 그 사건이었다. 그런 극단적인 사건은 드물게 나타나지만 그와 유사한 신앙형태는 우리 주변에 흔하다. 프로이트가 지적한대로 자칫하면 기독교 신앙이 ‘집단적 노이로제’로 변질될 수도 있다. 사이비 이단들의 종교행위가 우리 눈에 질병현상으로 보이듯이 정통으로 자처하는 우리의 종교행위도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지 모른다.
믿음의 절대성과 믿음의 질병현상을 구별하는 건 간단하지 않지만, 아니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라도 그런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노력을 교회 안에서 치열하게 제기하지 않으면 교회 밖에서 교회를 매도하게 될 것이다. 소위 안티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믿음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근본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피상적으로 드러난 교회 현상에 치우쳐서 일방적으로 기독교를 비난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직접적으로 대면해서 투쟁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 밖에서 교회를 비판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런 성찰이 바로 인문학적 성서읽기가 추구하는 목표이기도 하다. 인문학 정신이 성서를 바르게 읽고, 신앙의 중심을 잡게 하며, 기독교 영성을 담보하는 첩경이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걱정하듯이 요즘 인문학 정신은 땅에 떨어졌다. 예컨대 큰 학문의 배움터인 대학에서조차 철학은 냉대를 받고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하양에 대구가톨릭대학교가 있다. 정문에 들어서면 오르막 길 좌우에 많은 현수막이 붙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철학과 학생들이 내다 건 것이다. 철학과 폐지 반대 현수막이다. 대학당국이 철학과를 폐과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뻔하다. 철학과를 지원하는 학생들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대학의 책임자들이 나름으로 소신이 있다면 폐과하지 않고 살릴 방안을 찾겠지만, 지금 한국 대학교의 그 어떤 운영자들도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은 없다. 돈벌이와 경쟁력이 대학사회까지 완전히 장악한 오늘의 시대에서 우리가 그분들은 원망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인문학의 위기는 이렇게 외부적인 상황만이 아니라 인문학자들의 책임도 크다. 철학 선생들이 철학적으로 살지 않는데 어떻게 철학과가 살겠는가? 작년 언제인가 인문학의 위기를 타개하겠다고 모인 대학교 교수들이 대학당국과 기업체를 향해서 인문학을 위해서 재정적으로 지원하라는 말만 했다. 당연히 그런 기업풍토가 되면 좋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겠지만 그런 주장을 하기 전에 본인들이 인문학적인 삶을 실천해야하지 않겠는가. 비정규직 교수 문제만 해도 그렇다. 오늘 대학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비정규 교수문제이다. 실제 정규직 교수들과 똑같은 실력과 강의를 맡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삼분의 일, 오분의 일만 받고 있는 상태에서 학문적인 성과를 지속적으로 생산해닐 수는 없다. 이런 상황 앞에서 인문학 교수들은 자신들의 연봉을 동결하거나 감봉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인다면 어떨는지. 자신들의 내부조직 안에서 정의와 평화와 인간다운 삶을 해결하지 못하면서, 그런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으면서 세상을 향해서 인문학 위기 운운하는 그들의 행동은 밖의 사람들에게 허위(虛僞)나 위선(僞善)으로 비춘다.
필자는 위에서 인문학이 위기에 봉착하게 요인을 큰 틀에서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경쟁력 제고가 최고의 가치로 대두된 이 시대정신이다. 이런 시대정신은 오늘 한국교회의 교회성장 만능주의로 나타난다. 필자는 이 문제를 이 자리에서 길게 말하지 않겠다. 이 문제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인문학적 성서읽기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어느 정도 통찰력이 있는 신자라고 한다면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인문학의 위기 운운하면서도 인문학적으로 살지 않는 인문학자의 허위의식이다. 이것은 기독교인에게도 그대로 내면화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을 선포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신앙대로 살지 않는다는, 즉 신앙과 삶의 불일치가 곧 기독교 신앙을 위기로 몰아넣은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복음과 율법
우리에게 나타나는 신앙과 삶의 불일치는 표면적으로는 복음을 전하면서도 실제로는 율법적으로 살아간다는 데에서 가장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유앙겔리온’이라는 뜻의 복음은 복된 소식이라는 의미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 사건을 유앙겔리온으로 선포했다. 즉 예수 사건이야말로 인간에게 참된 기쁨의 소식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신자라고 한다면 이런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의 실체를 알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복음과 반대되는 율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조금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예수님의 비유를 한편 소개하겠다. 누가복음 18:9-14절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관한 말씀이다.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결국 의로웠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불의했던 세리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한다. 이 비유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8:14) 우리는 이 결론에 근거해서 기독교인들이 겸손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그렇게 정확하지는 않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누구에게 했는가를 보라. 9절 말씀이 그걸 명시적으로 지적한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여기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은 바리새인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2천 년 전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의(義)에 사로잡힌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멸시할 수밖에 없다. 이건 이상한 현상이 결코 아니다. 이층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눈에 아래층에 살고 있는 사람이 밑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자기 의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 우위에서 나오는 심리적 작용이다. 위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은 두 가지 종류의 기도를 드렸다. 하나는 네거티브이고 다른 하나는 포지티브이다. 전자에 속한 기도는 토색, 불의, 간음에 대한 부정이고, 후자는 금식과 십일조 행위에 대한 긍정이다. 말하자면 이 사람은 자신이 부도덕한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과 율법을 성실하게 감당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셈이다. 이 사람의 태도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오늘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 기준에 의하면 이 사람은 매우 성실한 기독교인이다. 오늘도 우리는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곧 세리와 다르다는 사실을 감사하고 있는 바리새인이 되겠다는 뜻이다. 예수의 비유는 바리새인은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했다고 분명하게 가르치는데, 우리는 지금 오히려 그런 사람이 되겠다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세리는 부도덕한 사람을 대표한다. 그 당시의 세리라는 직업은 우리의 경우에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 순사나 세무직원처럼 경원의 대상이었다. 그가 실제로 부도덕한 사람이었는지는 성서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기 의를 내세우는 바리새인과 대별되는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내세울 게 없었을 수도 있고, 실제로는 괜찮은 요소들이 있었지만 그걸 부정한 것인지 우리가 확인할 수는 없다. 그가 자기 의와 전혀 상관없었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만 의지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키리에, 엘레이송!”의 기도만 드릴 뿐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은 모두 표면적으로 이 세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속으로는 모범적인 바리새인이 되고 싶으면서 입으로만 세리로 자처한다.
어쩌면 오늘 우리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일종의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키고 있는지 모른다. 사람에게 다중인격이 나타나듯이 우리 기독교인에게 바리새인과 세리의 이중인격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런 정신적인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한쪽은 바리새인이고 다른 한쪽은 세리의 모습을 한 이상한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세리를 자처하는 바리새인이 우리의 실상이다. 세리의 가면을 쓴 바리새인, 즉 칭의를 얻기 위해서 세리처럼 포즈를 취하지만 실제로는 율법으로 완전 무장한 바리새인이 우리의 실제 모습이 아닐는지.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철저하게 자기 의에 기울어 있는지 생각해보라. 요즘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많은 프로그램들은 거의 자기 의를 강화하는 것들이다. 헌금, 봉사, 교회당 건축, 전도, 해외선교, 구제, 기도 등등, 우리가 소중한 신앙적 가치로 여기고 있는 것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이런 율법적인 것들이 전혀 무가치하다거나 그것을 해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가시적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율법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다. 이미 위의 비유에서 우리가 확인했듯이 여기서 문제는 이런 행위들이 자기를 의롭게 만드는 수단으로 인식되고 추구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십일조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이 더 많은 물질로 갚아 주신다고 풍을 치거나, 거꾸로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않으면 다른 사고로 돈이 빠져나간다고 협박하는 것들은 모두 철저하게 자기 의를 추구하는 율법신앙이다. 자기 의에서 어느 정도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위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자기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삶과 신앙까지 재단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이런 자기 의에 근거한 신앙은 기독교인의 품성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신앙의 연륜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남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취한다. 선생, 변호사, 목사 등등, 전문적인 지식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 바로 이런 것인데,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겉으로는 겸손한 듯 보여도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남을 판단하고 가르치려고 든다. 부끄럽지만 이런 현상은 설교비평에 신바람을 내고 있는 나에게도 그대로 나타난다. ‘다비아’(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에서도 자기의 지식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든다. 아마 교회 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신앙과 삶의 불일치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율법주의이다. 즉 자신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업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총에 의존하는 삶의 방식인 복음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업적에 사로잡히는 율법적인 삶이 바로 그것이다.
종말론적 공동체와 교회의 세속화
신앙과 삶의 불일치가 드러나는 또 하나의 다른 대목은 기독교가 표면적으로는 종말론적 공동체로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세속적인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이 대목도 위에서 언급한 ‘복음과 율법’의 관계와 비슷한 점이 있지만 필자는 이 문제를 교회의 대사회 관계에서 설명하려고 한다. 이를 도식화한다면 “복음과 문화”의 관계이다. 복음과 율법은 신앙의 내면적인 관점이었다고 한다면 이 대목은 신앙의 외면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 양자의 모습에서 신앙과 삶의 불일치가 그대로 노출된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은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데한 이해이다.
사회(문화)와의 관계에서 기독교 교회의 정체성은 종말론에 자리하고 있다. 예수가 선포했으며, 훗날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예수와 동일시된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종말론적이다. 복음 중의 복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상수훈도 기본적으로는 종말론적이며, 예수에 의해서 발생한 모든 구원 사건들도 역시 종말론적이다. 다른 건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예수의 메시아 성이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이라는 사실의 가장 결정적인 근거이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에게 그대로 인식되는 게 아니라 일부의 사람들에게만 인식된다. 그런 건 2천 년 전만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계속된다. 예수의 메시아 성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라는 마틴 부버의 주장은 그렇게 허튼소리가 아니다. 예수가 2천 년 전에 왔지만 이 세상은 전혀 변한 게 없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장할만한 실증은 없는 셈이다. 기독교는 예수의 메시아 성은 선취의 방식으로 역사 안에서 발생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종말론적으로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 공동체가 종말론적이라는 말은 예수의 메시아 성에 관한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현재 역사와 문화의 잠정성을 가리킨다. 교회력이 대림절로 시작한다는 것은 교회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예수의 재림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의미이다. 기독교는 궁극적인 생명의 완성이라 할 종말의 지평에서 이 세상과 관계를 맺었으며, 자기 자신도 그렇게 규정했다. 이 말은 곧 교회는 세속의 이해타산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콘스탄틴 이후 유럽 세계에서 기독교가 상당히 오랫동안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황제와 나누어 누렸지만 원래 기독교는 그런 세속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했다.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는 영적인 촉수를 종말에 두기 때문이다. 필자는 최근에 기독교 안에서, 특히 개신교회 안에서 벌어진 몇몇 당혹스런 사건들을 예로 들어야겠다. 이 사건들은 교회가 지켜내야 할 종말론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세속적인 기득권을 수호하는데 기울어진 좋은 예이다.
1) 사학법 재개정을 위한 예장 통합의 투쟁이 작년에 꾸준히 전개되다가 급기야 연말에는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순교의 자세로 삭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중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삭발을 하고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셨는지. 검은 양복에 짧은 머리는 조직의 힘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사학법이 과연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자세로 투쟁할만한 사안인지, 또는 목사들의 투쟁 방식이 삭발이어야야 하는지, 더구나 이런 문제로 한국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영락교회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반대집회를 열어야하는지 필자는 전혀 이해할 수도 없고 동의하지도 않는다. 이런 점에서는 사학법 재개정을 반대하는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 목사의 입장이 옳은 게 아닐는지. 필자는 여기서 사학법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우리의 이런 행동들이 사회에 교회의 기득권 지키기로 비친다는 점만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10년 동안 가톨릭교회는 70,80%가 성장한 반면에 개신교회는 미미한 숫자지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마당에 이렇게 악수를 반복한다는 건 머리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가톨릭은 내심으로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겠지만 개신교회처럼 이런 문제로 시위하지 않는다.
2) 한기총 신임 대표회장이 되신 이용규 목사는 대선 후보를 기독교 신앙의 차원에서 검증하겠다고 발표했다. 필자는 그런 뉴스를 전해들을 때마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염려스러워진다. 지금이 중세기 유럽이라는 말인가? 어떻게 기독교가 대선후보를 검증한다는 말인지. 그렇게 하면 불교도 역시 나설 게 불을 보듯 뻔한데, 이런 방식으로 서로 끝없이 싸우자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행태는 결국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어리석음이다. 참고적으로, 한기총은 김용옥의 요한복음 강연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방식으로 나가면 한국교회의 지성인들은 한국교회에 염증을 느끼게 될 것이다.
3) 얼마 전에 지구촌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회가 타(他)교회 신자들을 받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신자 빼앗기 식으로 전개되던 전도 풍토에서 만시지탄이지만 이런 선언이 교회 개혁의 작은 주춧돌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지구촌 교회라는 말을 듣고 찜찜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타교회 신자들을 끌어들여서 2만의 교세를 자랑하는 교회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선언을 한다는 것인지, 코미디 아닌가? 이는 흡사 수백 수천 개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국가들을 향해서 핵확산금지협약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다. 핵무기 보유국들이 그런 의지가 실제로 있다면 자신들의 핵무기를 실제로 폐기해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지구를 오염시키는 산업개발도 그렇다. 이미 지구를 오염시킬 대로 오염시킨 채 이제 뒤늦게 저개발국가들을 향해서 오염 수치 운운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만약 지구촌 교회가 교회일치와 연대를 소중하게 여긴다면 핵 국가들이 핵을 폐기해야하듯이 자신의 교회를 분리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필자의 말이 트집 잡기처럼 보이겠지만, 이미 충분히 배부른 사람이 남의 밥을 더 이상 빼앗아먹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처럼 뜬금없어 보였기에 하는 말이다.
필자가 위에서 제기한 그 현상들을 전혀 문제로 느끼지 못하고, 더 나아가서 그것이 바로 신앙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자주 인용되는 문제이지만 십자군 전쟁, 마녀재판, 식민지 정책을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옹호했던 과거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오늘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분열증적 현상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다시 질문한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왜 삶과 불일치하는가? 우리는 왜 복음을 율법으로 변질시키는가? 우리는 왜 종말론적 영성을 세속화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 대답을 성서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첩경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제와 연결해서 미리 결론을 내린다면 인문학적 성서읽기에서 그 대답을 찾으려고 한다. 물론 이런 성서읽기가 우리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속적으로 영성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서읽기도 역시 하나의 방법론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성서에 관한 궁금증
인문학적 성서읽기는 기본적으로 성서에 대한 궁금증으로부터 시작한다. 뭐가 궁금한가? 필자는 성서의 거의 모든 게 궁금하다. 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지, 그게 왜 타당한지,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족장들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인지 일종의 설화인지, 서로 다른 기자들에 의해서 기록된 작품들이 무슨 이유로 하나의 성경으로 묶였는지, 현재의 정경과 외경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 등등, 질문은 끊임이 없다. 이런 개론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서본문 안으로 들어가면 나의 궁금증은 더 많아진다. 나의 인식론적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낼 뿐이다. 언젠가 <신학비평>에 실었던 졸고 “당신 설교는 어떤데?”에서 이와 연관된 내용을 일부 여기에 옮겨 적는 걸 양해해 주기 바란다.
설교의 원(原)자료라 할 성서 텍스트 앞에 설 때 나의 이런 경험은 훨씬 심각해진다. 창세기 1장1절은 다음과 같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나는 이런 구절을 읽을 때마다 현기증이 난다. 우선 이 문장의 속내가 나를 두렵게 만든다. “한 처음”이라! 도대체 한 처음이 언제라는 것인지.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나이라고 말하는 120억 년 전이 곧 구약성서의 첫 마디와 일치한다는 것인가? 그 한 처음 이전은 또 어떻다는 말인가? 그 뒤로 등장하는 하느님, 하늘, 땅, 지어 내셨다는 단어도 역시 내 사유의 세계를 어지럽게 만들기는 마찬가지다. 신약성서의 마지막인 요한계시록 22장20,21절은 이렇다. “이 모든 계시를 보증해 주시는 분이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오소서, 주 예수여! 주 예수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도대체 예수가 다시 오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예수가 재림할 것으로 예측했다는데, 그의 재림이 이렇게 연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학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여러 대답들이 이런 사태를 얼마나 정확하게 해결해줄 수 있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타당하기나 한 것일까? 성서 첫 마디부터 마지막 마디까지 그것이 어떤 세계를 담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한발걸음만 더 들어가도 나는 어지럽고 막막하고, 그래서 두렵다.
성서 텍스트에 대한 나의 두려움이나 궁금증은 성서텍스트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그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으로 연결된다. 성서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한 처음’을 생각하게 되었을까? 그들의 삶에 어떤 원한이 사무쳐 있기에 그들은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남녀노소를 전멸시키는 게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새겨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 또 얼마나 심각한 삶의 절망감과 무의미 가운데서 나름으로 성서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했는지 나는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곧 우주와 같은 무게를 안고 있는데, 하물며 수백, 수천,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 성서 텍스트의 전승에 참여하고 있으니 내가 어찌 그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할 수 있겠는가. 꽃과 아침 안개와 요정들 사이의 대화에 전혀 끼어들지 못하는 내가 느끼는 그 소외감이 성서 텍스트와 그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의 관계 앞에서도 똑같이 작동되고 있다. 이게 곧 설교자로서 내가 처한 엄정한 실존이다.
세상과 인간과 성서와 그 전승에 참여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게 훨씬 많다는 사실만 확인되고 있는 마당에 내가 무얼 설교한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설교자로 나선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서 텍스트를 청중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이 요청 앞에서 무작정 도망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게 곧 우리 설교자로서 내가 처한, 그리고 우리 모두가 처한 숙명이다. 이는 곧 실제로는 사랑의 능력이 없으면서도 그 사랑을 설명하고, 더 나가서 사랑을 실천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사람의 처지와 비슷하다.
우리에게 놓여 있는 길은 그렇게 넓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합리적인 인식론적 근거를 포기하지 않는 방향에서 이런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곧 인간 삶의 역사적 무게를 단지 믿음 일원론이나 규범론에 빠지지 않고 성서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문학적 성서읽기란 인간 삶의 역사에 담긴 오묘한 깊이를 놓치지 않고 성서에 접근하는 자세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인문학에 대한 인문학자의 정의를 한번 짚자.
다시 정리해두자: 이 글의 중심에 자리잡은 개념, ‘인문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세상’을 만들려는 정신이며, 삶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가는 사람의 무늬(人文), 그리고 묘(妙)의 지극함을 존중하려는 태도다. <중략> 아울러 그것은 도구적 합리성과 기술패권주의의 그늘에서 제대로 피지 못했던 정신의 꽃을 다시 가꾸는 정신이기도 하다. 나아가서 이 땅,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학의 정신은 삶의 터와 역사에 충실해서 생각의 자생성과 주체성을 기르고 사대(事大)의 눈치와 추수(追隨)의 허위의식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신은 우리 현실과 우리 언어의 괴리를 메우려는 용기와 지략이며, 삶과 앎 사이의 소통과 공조를 구체화하려는 말하기와 글쓰기인 것이다. (김영민, 진리.일리.무리, 31.).
필자는 김영민 선생이 말하는 인문정신이 성서를 이해하는데도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인문정신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대목만 짚자. 첫째, 그에 의하면 인문정신은 “삶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만들어가는 사람의 무늬(人文), 그리고 묘(妙)의 지극함을 존중하려는 태도다.” 삶의 묘가 지극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서의 말씀을 규범적으로 적용하지는 못한다. 비록 성서에 율법으로 이해되고 있는 그런 규범들이 상당하게 자리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그런 방식으로 삶의 신비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고대인들의 처한 삶의 자리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둘째, 인문정신은 “우리 현실과 우리 언어의 괴리를 메우려는 용기와 지략이며, 삶과 앎 사이의 소통과 공조를 구체화하려는 말하기와 글쓰기”이다. 이 대목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현실과 언어의 괴리를 매우는 용기와 지략이다. 성서의 언어와 오늘 우리의 현실에 괴리가 크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그걸 어떻게 매울 것인가? 다른 하나는 삶의 앎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앎이 일종의 정보로만 남았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 둘을 어떻게 소통시킬 것인가? 이런 질문을 안고 우리는 앞으로 12회에 걸쳐서 구약의 중요한 인물들과 신약의 중요한 주제에 접근하게 될 것이다.
2007년 2월22일(목) 19:00, 대한성서공회
원문 : dabia.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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