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저는 어깨에 기타를 매고 빨간 머리카락으로 쇄골을 훑으며 다니던 놈이었지만, 가난하고 보수적인 집의 분위기는 뼛속에 자리잡아, 인권을 외치면 모두 빨갱이인 줄 알았고, 문신을 한 사람을 보면 덜컥 겁부터 났었어요. 내가 문의 브이넥 니트 안쪽에 있는 천사를 목격했을 때 분명 그것도 저를 쳐다봤습니다. 검은자 없는 눈으로 제게 말을 걸었어요. ‘너의 간과 신장은 다른 곳에 쓰임새가 있느니라.’ 혹은 ‘원양어선에서 귀인을 만날 것이니, 그가 네게 물 위를 걸으라 하리로다.’ 이런 얘기였던 것 같은데, 그때부턴 저는 혼비백산, 도저히 영화에도, 스킨십에도 집중할 수가 없더군요. 우리에게 무슨 일이 없나, 제발 무슨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방을 훔쳐보던 DVD방 알바의 실루엣이 저의 간과 신장을 거두러 온 저승사자 같았습니다. 라고까지 하는 건 좀 뻥이고, 그냥 전혀 예상치 못 한 문신을 보고는 좀 쫄았던 것 같아요.
이리저리 공략해 들어오는 문의 손이 차갑길래, “손이 차네. 추운가보다. 이거 덮어.” 라며 외투를 폭 싸서 꽁꽁 묶어줬습니다. 저의 배려에 감동 받아서인지, 아님 따뜻해서 렘 수면에 돌입한 것인지 숨결이 거칠어지고 귀가 빨개지더군요. 그러더니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가 무섭게 외투에 묶인 채로 벌떡 일어나 DVD방을 먼저 나서더라고요. 제가 허겁지겁 따라 나섰더니 이미 저만치쯤 가고 있습디다.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떡대들이 없는 걸로 보아 장기 밀매나 원양어선은 아니었나봅니다.
나 “집 어디야? 데려다 줄게,” 문 “…” 나 “어디 가는 중이야?” 문 “..야, 너 진짜.. 참 나..”
길 가에 대기하던 택시 하나를 잡아 타고 문은 떠났고, 내가 괜히 쫄아서 걔를 무안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며 한 달간의 이불킥을 예약했더랬습니다.
그 이후로는 남사친, 여사친 같이 편하게 지냈습니다. 내가 사는 동네와 걔가 노는 동네가 겹쳐서 종종 마주칠 일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문은 아슬아슬 선을 넘는 농담을 건네고는 호탕하게 웃으며 꼭 이런 말을 덧붙였어요. “어떻게 이렇게 만나냐? 너랑 나랑 뭐 있는 거 아냐?ㅋㅋㅋ”
어느날 패스트푸드점에서 제 친구와 둘이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데, 문과 그 친구가 들어오더군요. 문의 친구는 당시 청순한 외모로 인기를 끌었던 배우를 닮은, 상당한 미녀였습니다. 편의상 ‘가영’이라고 하겠습니다. 합석해서 넷이 키득거리며 떠들고 노는데 가영이 문에게 뭔가 제안하는 것 같았습니다. 작은 소리라서 대충 들리기로는, 그 오빠들 만나지 말고 여기서 놀자, 뭐 이런 식이었던 것 같아요. 패스트푸드점을 나선 우리는 작고 떠들썩한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내 침이 반, 네 침이 반, 하는 무슨 국물 요리에 소주를 마셨어요. 제 친구는 술을 진짜 못 해서 맥주 한 캔만 마셔도 취해버리는데, 그날 가영에게 이끌려 소주 몇 잔을 연거푸 들이키고는 당연하다는 듯 화장실에 토하러 가서 그대로 귀가했습니다. 친구를 배웅해주고 술집으로 돌아와보니 원래 사각 테이블의 한 변에 붙어 앉아 있던 문과 가영이 이젠 마주보는 자리에 앉아 있더군요. 원래 제 자리에 앉고 보니 가영의 옆이었습니다. 셋이서의 술자리도 뭐, 그럭저럭 화기애애했어요.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요.
“하도 다시 데워달라고 했더니 이제 국물에서 아무 맛도 안 나는 것 같다. 안주 뭐 하나 더 시킬까?” 가영의 제안으로 메뉴판을 가져다 달라고 해서는 저와 같이 안주를 고르는데, 어째 가영의 눈이 메뉴판이 아니라 저를 향하고 있네요. 안주로 제 눈알이라도 주문하고 싶었던 걸까요. 근데, 보면 볼 수록 닮았습니다, 그 배우랑요. 음.. 취한 채로 봐서인지 좀 더 예쁜 것도 같.. 갑자기 가영이 입술을 포갭니다.
첫댓글 뭐야 뭐야.. 그 배우는 누구입니까? 청순하다고 하면 어! 누구지?
필력이 정말 장난 아니십니다. 고마워요 호
그 배우는.. 제 예전 쓴 글의 대댓글에 답이 있지요!ㅎㅎ
@고양이목에쥐달기 찾았습니다. 감사해요. 4편 고고!!
중국 배우 소개글인줄 알고 스킵 했다가 지금 봤네요 갑자기 키스 ㄷㄷㄷ
중국 배웋ㅎㅎㅎㅎ
ㅎㄷㄷ
농구 카페에서 이 무슨 글인가 싶죠..후..
존잘러셨군요. ㅠㅠ
가영 이 못된 것이 저를 이용한 거였어요. 다음편에 이유가 나옵니다. ㅎㅎ
와.. 너무 재밌네요!
ㅎㅎ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