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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들에게 자랑이 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4,2-6
2 그날에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 영화롭고 영광스럽게 되리라.
그리고 그 땅의 열매는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에게 자랑과 영예가 되리라.
3 또한 시온에 남은 이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이들
곧 예루살렘에 살도록 기록된 이들이 모두 거룩하다고 일컬어지리라.
4 주님께서는 심판의 영과 불의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오물을 씻어 내시고
예루살렘의 피를 닦아 내신 뒤에
5 시온산의 모든 지역과 그 회중 위에
낮에는 구름을, 밤에는 타오르는 불길로 연기와 광채를 만들어 주시리라.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6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하늘 나라로 모여 올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8,5-11
5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6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7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8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9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10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싹, 곧 다가올 메시아를 통하여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모든 이가 정화되고 주님의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백인대장은 자신의 종이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감탄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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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밀려드는 환시를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카파르나움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많은 시간을 보내셨으며,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함께 당신 권능을 가장 많이 드러내신 고장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병을 앓던 베드로의 장모를 낫게 하셨고, 중풍 병자를 고치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이방인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시기까지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대답을 들으신 다음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유다인이 아닌 백인대장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환자의 병을 먼 거리에서 치유하실 수 있다거나, 질병에 관한 특별한 권능을 지니신다고 믿는 것에만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부여된 더욱더 깊고 특별한 ‘권위’, 곧 하느님을 대신하여 말씀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 로마 군대에서 백 명의 군인을 총괄하는 백인대장의 말이 로마 황제를 대변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을 드러낸다는 굳건한 믿음과 신뢰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고단한 일상을 살다 보니 우리도 특별한 은사에 목말라합니다.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과 질병 때문에 마음 졸이며 간절히 하느님께 치유를 청하기도 합니다. 고통의 현실에서 샘솟는 목마름과 간절함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백인대장 같이 예수님께 온전히 내맡기는 굳은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김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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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시기에는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준비합니다. 주님을 수동적으로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분의 오심은 우리에게 은총이 아니라 단죄의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강력한 정화를 통한 준비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 정화는 주님과 참된 만남을 위하여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을 올바로 정화하지 못한다면 이런 수고에 부담을 느끼고 낙담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그분과 애정이 담긴 만남에 마음을 열 때 정화의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기다림이 곧 정화입니다. 기다림은 바라는 것을 아직 얻지 못하였음을 뜻하므로 이따금 노력과 희생이 요구됩니다.때때로 우리는 주님의 위로를 받고 싶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느끼면 이내 불평하고 맙니다. 기다림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가지게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정화할 수 없고 주님께서만 정화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오시기를 열렬히 기다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느 모로 우리를 정화하시려고 이미 우리 안에 현존하십니다.복음에서는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주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괴로워하는 종을 위하여 주님의 개입을 필요로 합니다.둘째,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셋째,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을 취하시고 그분 친히 개입하는 방식을 결정하십니다.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한 말씀만이라도 해 주시면 고통받는 종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정한 대로 외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을 통하여 주님께서 개입하시기를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께 더욱더 충실해야 합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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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메시아께서 주시는 영원한 평화의 하느님 나라로 끝없는 평화 속에 수많은 백성들이 다시 모여 올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 백성들은 주님의 새순이 당신 백성의 영광이요 희망이기에, 하느님의 빛 속에 걸어가며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으로 드러누운 종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로마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면서 이르십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이런 종말에 이르고자 우리는 인간의 자손 안에서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통하여 사람이 되시는 하느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시작되는 대림 시기 4주간 동안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대림 시기의 전례는 우리에게 특별한 표상, 곧 이사야 예언자, 세례자 요한, 성 요셉과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처럼 신앙의 탁월한 모범을 보여 준 이들을 제시해 줍니다.
12월 16일까지 제1독서는 날마다 이사야 예언서를 봉독하고, 대림 제2주간 목요일부터 12월 16일까지 복음의 중심에는 날마다 세례자 요한이 자리하게 됩니다. 이사야와 요한은 그리스도 이전 메시아 오심의 기다림을 구체적으로 제시합니다. 12월 17일부터 마태오와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통하여 육화하신 예수님을 신앙의 무대에 등장시키는 요셉과 특히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특별한 역할을 강조합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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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구원이 온 세상을 향해 활짝 열립니다. 주님의 집이 있는 산이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리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대림 시기에 이사야 예언자가 들려주는 첫 번째 기쁜 소식입니다.
기다림은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기다림은 가장 기본적인 특성입니다. 이 기다림을 통해 평화의 씨를 심고, 세상의 폭력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기다림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되려면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겸손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회개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백인대장은 진정한 회개와 겸손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그는 지도자급 인물이었지만, 예수님을 찾아와 중풍을 앓고 있는 자신의 종을 치유해 주시라고 허리를 굽힙니다. 자기 밑에 군사와 종을 부리는 사람임에도,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자신의 종이 비록 자기가 부리는 사람이지만, 그도 구원받고 치유받아야 할 하느님의 자녀이고, 그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똑똑하거나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우리 모두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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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한 말씀’에 담긴 힘을 믿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말씀의 힘에 관하여 베르나르도 성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날 때에는 처음 태어날 때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를 단 한마디 말씀으로 만드실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다시 만드실 때에는 말씀도 여러 차례 하셨고, 기적도 여러 번 보여 주셨으며, 숱한 어려움마저 겪으셔야 했다.” 주님의 말씀이 아무리 강력한 힘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굳이 우리의 믿음을 전제하실까요? 믿음이 없더라도 당신의 말씀만으로 온갖 기적을 우리에게 베푸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세상에는 두 종류의 제품이 있습니다. 바로 상품과 작품입니다. 상품은 대부분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생산하는 제품이지만, 작품은 사람의 체취와 혼이 담긴 수제품입니다. 그래서 상품은 금방 가져다가 쉽게 사고팔 수 있는 반면, 작품은 그 소중한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만이 사고팔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상품과 같은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말씀과 우리의 믿음이 어우러져 탄생된 하느님의 ‘작품’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오늘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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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 자존심, 자만심은 비슷한 것 같지만 다릅니다.
어떤 사람에게 자존감이 높다고 하면 긍정적으로 들리지만, 자존심이나 자만심이 강하다고 하면 부정적인 느낌을 줍니다.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속이 잘 익은 과일처럼 성숙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대인 관계에서도 스스로 존중감이 있어서 내면 깊숙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을 방어하려고 화를 내거나 변명하지도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스스로 내면에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열등감으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두려움을 방어하고자 내세우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센 사람들은 열등감을 감추고 자신을 지키려고 상대를 먼저 공격을 하거나, 고집을 부려서 자신을 보호합니다. 사람들에게 쉽게 상처받고, 분노하고, 사람들과 관계가 원만하지 않은 까닭은 자존감이 낮아서 그 방어 기재로 자존심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자만심 역시 자존심처럼 자존감이 낮은 데서 비롯합니다. 이런 사람들도 스스로 내면에 별로 든 것이 없다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의 빈 곳을 엉뚱한 것으로 채워 넣습니다. 곧 자신이 가진 조그만 지식이나 재물이나 재능을 부풀려서 내면의 빈 곳을 채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드러내 보이고 자신을 내세우고 싶어 하며, 공명심과 허영심이 많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을 가진 것이나 능력으로 평가합니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과는 가까이 사귀고 싶어 안달하고,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기면 무시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백인대장이 보여 준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겸손은 자존감이 낮은 자기 비하와는 다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신의 부족함, 죄스러움, 약함,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느님께서 잘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약함과 부족함을 오히려 더 사랑하신다는 믿음에서 겸손함이 나옵니다. 우리의 높은 자존감은 겸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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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信〕은 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성장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하물며 주님과 맺는 관계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서로 관계에 문제가 있다면, 믿음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사람들과 맺는 관계가 진실하지 못하다면, 주님과 맺는 관계도 진실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과 관계가 진실하다면,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도 떳떳할 것이 분명합니다.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파견하신 아드님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이제 그는 주님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이미 들어와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께 신앙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백인대장의 태도를 보시고,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고 하시면서 칭찬해 주십니다. 그 백인대장은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대림 시기의 첫 번째 기다림은 오실 분이 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심을 느끼는 데 있습니다. 이미 나의 생애 한복판에 들어와 계신 주님을 느낀다면 곧 그분을 믿을 수 있고, 믿는다면 알아뵐 수 있으며, 알아뵙는다면 그분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맺는 관계에서는 백인대장처럼 믿음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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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진심으로 아룁니다. 그는 로마 군대의 장교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군대에서100명가량의 보병 책임자를 흔히 ‘백인대장’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평민 출신으로, 사병에서 승진해 올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실력 있고 리더십이 강한 지휘관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동하십니다. 그러기에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의 마음을 진하게 움직였겠습니까?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과 따뜻한 애정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한 말씀만 하셔도’종이 나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의연하면서도 겸손했던 청원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받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의 종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애정을 베풀던 사람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아랫사람을 아끼는 열정이 있었기에 백인대장은 스스럼없이 나왔을 것입니다.
사랑이 강하면 믿음도 강합니다. 애정이 많은 사람은 신심도 깊은 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모습에서 강한 애정과 깊은 믿음을 읽으셨던 것입니다. 열정이 넘치는 믿음을 백인대장은 보여 주었습니다.
자녀에게 너무나 서운하다고 말씀하시는 어느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그래도 자녀를 위해 노력을 하며 평생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은퇴 후 별일 없이 집에만 있는 힘없는 상태가 되니 자녀들이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아내는 자기들 사느라 바쁘니 서운해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만, 서운한 마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어느 책에서 사람에게 서운함을 느끼는 이유는 상대방이 정말로 문제 있는 사람이거나 내가 바라는 것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상대방이 문제 있으면 안 만나면 그만이지만, 가족을 어떻게 만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서운함을 이겨낼 수가 있을까요? 특별한 방법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바라는 것을 줄이면 됩니다.
사실 서운함을 느끼면 그 대상을 향해 좋은 말과 웃는 얼굴로 마주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상대방 역시 내게 좋은 말과 웃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요. 나쁜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내게 해주는 것이 없는데 어떻게 좋은 말과 웃는 얼굴을 보여줄 수 있느냐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갓난아기를 생각해보십시오.
갓난아기를 보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또 아기를 향해 좋은 말과 웃는 얼굴로 마주합니다. 이 아기가 내게 특별한 무엇을 줍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는 갓난아기에게 특별히 무엇인가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바라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 모습을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상대방 역시 긍정적으로 변화시켜 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의 바람을 들어주시던 분께서 이번에는 발 벗고 나서십니다. ‘백인대장’이라는 권력 때문일까요? 백인대장에게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 도움을 주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믿음을 보일 것을 미리 아신 주님께서는 사람들도 알 수 있도록 그러한 장을 만들어주십니다.
우선 백인대장은 자신의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즉, 바라는 마음 자체가 욕심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주님께서 직접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는 무엇을 강요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먼저 늘 우리에게 호의를 품고 계실 뿐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고 주님의 뜻을 향해 나아가보십시오. 분명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어려울 때 우리는 가장 많이 성장한다는 것을 기억하라(조지 워싱턴).
나를 먼저 사랑하십시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늘 갈구합니다. 혹시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기본적으로 원하는 마음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길 바랍니다. 그런데 정작 나를 스스로 사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스로 자책하고 포기하며 좌절하는 모습은 분명 사랑하는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기만을 바라기에 앞서, 내가 먼저 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이 나에게 웃음 지어 주기만을 기다리지 말고, 먼저 내가 나를 향해 미소지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내가 될 때, 남에게도 나의 사랑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차고 넘치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을 때, 사랑을 나누는 것이 힘들지 않게 됩니다.
그 시작은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강한 믿음은 치유와 구원의 은총을 입기 위한 가장 첫째 가는 조건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스라엘은 신앙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서 신앙은 삶의 중심이요 전부, 존재의 이유요 최종적인 목표였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과 횡포로 셀수도 없이 나라를 빼앗기고, 머나먼 이국땅으로 유배를 떠났어도, 신앙 하나는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간직해왔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신앙의 수호자들인 지도자들의 나태함과 타락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부침과 쇠락을 거듭했습니다. 율법과 성전, 잡다한 예식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신앙의 가장 본질인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사랑의 실천은 점차 뒷전으로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이 사제들과 레위인들에게는 먹고 사는 수단, 생존 방식으로 전락했습니다. 신앙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오만과 논쟁의 구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이비 지도자들의 그릇된 가르침 앞에, 참과 거짓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신앙은 악세사리요 도피처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이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생생한 만남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 경로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와 참 신앙에로의 복귀를 호소하셨지만,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집단적 불신앙과 완고함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백인대장이 카파르나움에 머물고 계시던 예수님을 만나러옵니다. 그는 헤로데 안티파스 직속 이방인 장교였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그는 백명의 군인들을 부하로 두고 있는 장교였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중대장 계급 정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건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통해서 그가 얼마나 성숙하고 인간미 넘치며, 동시에 참된 신앙인인가를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첫마디 부터가 예수님 마음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오 복음 8장 6절)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릅니다. 이를 통해 그가 지닌 신앙의 깊이를 잘 알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능을 지닌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병이나, 자신의 아들 딸의 치유를 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의 치유를 청하고 있습니다.
점점 백인대장이 마음에 쏙 드셨던 예수님께서는 즉시 그의 청을 수락하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오 복음 8장 7절)
그러나 백인대장은 뜻밖의 말씀을 예수님께 건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오 복음 8장 8절)
백인대장의 말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당시 율법 규정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유다 사람에게는 다른 민족 사람과 어울리거나 찾아가는 일이 불법임을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0장 28절)
이렇게 백인대장은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 모든 생각들이 성숙했고 신중했으며 배려심으로 가득했습니다. 거기다 주님을 향한 깊은 신앙으로 가득했으니, 예수님의 마음에 쏙 들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 마음의 표현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오 복음 8장 10절)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악령의 힘을 분쇄하는 메시아로서 하느님의 주권을 실현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굳게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오늘 과연 우리에게는 백인대장이 지녔던 그 확고한 신앙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습니까? 본인이나 가족이 아니라 종의 치유를 청하는 백인대장의 인간미와 자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습니까?
강한 믿음은 치유와 구원의 은총을 입기 위한 가장 첫째 가는 조건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이웃에게 좋은 것만을 주려고 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일본 제1위 납세자인 사이토 히토리는 자신의 제자인 미야모토 마유미에게 이런 충고를 해 주었습니다.
“오늘부터 만나는 사람,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 모든 이들에게 ‘이 사람에게 온갖 좋은 일이 눈사태처럼 일어납니다.’ 라는 말을 마음속으로라도 좋으니 중얼거려보세요. 하루에 100명씩, 1,000일 동안 실행해보는 겁니다.”
마유미씨는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실천하자.’ 란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로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아하는 상대방에게는 쉽게 이런 말이 나왔지만 불편한 사람,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억지로라도 그 말을 계속하다보니 싫은 마음이 점차 사라지거나 상대가 싫은 행동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그 말을 계속하다보니 자신이 기분이 좋고 감사하는 마음이 끓어 넘치더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행복을 빌어주었는데 자신이 행복해진 것입니다.
그렇게 1,000일이 지났을 때 사이토 히토리가 말했습니다. “마유미씨 얼굴이 좋아졌어요. 운을 부르는 얼굴이 되었네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빌면 얼굴에도 그 마음이 나타나는 법이에요. 이제 당신이 두 번 다시 불행해질 일은 없습니다.”
실제로 이런 내용을 책으로 쓴 ‘돈을 부르는 말버릇’의 저자 미야모토 마유미는 몇 년 뒤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행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부자가 되려면 돈의 통로가 되어야합니다. 저수지는 썩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은총을 인간에게 전해주시는 통로가 되어 주셨습니다. 통로가 되어야 나도 살고 이웃도 삽니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연법칙이고 이 법칙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백인대장을 보시고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의 장군이 이스라엘의 야훼 하느님을 믿었을 리는 없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에서 기적을 일으키는 하늘에서 내려온 분으로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 노예의 치유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기적을 청합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이 아는 가장 작은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누구에게나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어떤 통로로 만드느냐에 의해 측정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자신을 저주의 통로로 만들기도 합니다.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던 장사꾼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가게는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침에 눈 뜨고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 하는 데만 신경을 썼습니다.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어느 날 천사를 한쪽 상인에게 보내셨습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천사는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요.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줄 것이요. 단 조건이 하나 있소.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 경쟁자는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요. 그대가 금화10개를 원하면 그는 금화 20개를 얻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였습니다.
천사의 말을 들은 상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제가 무엇을 바라든지 다 그렇게 이뤄진다는 말씀이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천사가 그렇다고 하자 상인은 크게 숨을 한번 쉬고는 결심한 듯이 말하였습니다.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
믿음이 있으면 축복의 통로가 되고 없으면 저주의 통로가 됩니다. 어느 것을 받아 전하든 그 전하는 것의 반을 가지게 됩니다. 이웃에게로 흘러가는 것이 나를 채우게 되어있습니다. 성모님께서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세상으로 내려오시는 통로가 되셨듯이 참 믿음은 나를 축복의 통로로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축복을 전해주려는 백인대장에게 믿음이 크다고 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이웃에게 좋은 것만을 주려고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웃 본당의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신부님께서 한국에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습니다. 수녀님께서 미리 와서 고백성사를 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30분 전에 가서 성사를 주었습니다. 미사 시간이 되어서 나오니, 봉사자께서 미사 마치고 성사를 더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미사 후에 저녁 약속이 있었기에 저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나 봅니다. 다시 마음을 풀고, 성사를 드리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봉사자는 밝은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순간이었지만, 마음에 파문이 일었습니다. 고백성사를 미사 전후로 1시간 드리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령성월에 미사참례하고, 성지 순례하고, 고백성사를 보면 ‘전대사(全大赦)’를 받는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교우들은 전대사를 받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저는 성사를 주는 시간을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바리사이파나, 율법 학자보다 로마의 백인 대장을 칭찬하였습니다. 그가 굳건한 믿음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교만한 기도는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리의 겸손한 기도는 칭찬하셨습니다. 부유한 이들이 내는 헌금은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은 칭찬하셨습니다. 강도를 당한 이웃을 외면한 율법 학자와 사제는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이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강도를 당한 이웃을 치료하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착한 이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변을 보면 예수님께 칭찬을 받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은 매주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을 통해서 어려운 이웃의 안타까운 사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문의 독자들께서 후원을 해 주십니다. 어려운 이들의 따뜻한 이웃이 되어 주십니다. 매달 첫 번째 목요일에는 어르신들이 신문사에 오십니다. 오셔서 봉투 작업하십니다. 평균 연세는 84세입니다. 저희 어머니와 같은 연세입니다. 평화신문이 시작하면서부터 봉사하셨으니, 30년이 넘으셨습니다. 어르신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점심을 먹습니다. 평화신문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십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입니다. 백인 대장의 굳건한 믿음, 세리의 겸손한 기도,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나눔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는 성탄 선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노와 키 잡을 사람 되어주십시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백인대장의 부탁에서 부하사랑의 아날로그와 믿음의 디지털을 봅니다.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디지털 신념에 감탄하셨다는 점이 멋지다봅니다.
탄생 죽음은 디지털인데 산다는 건 이랬다저랬다하는 아날로그입니다.
세상변화무쌍에 기인한 아날로그 감정에 갈대인생을 내맡기지 맙시다.
백인대장의 믿음처럼 우리도 하늘영원 향한 디지털신앙의 인간됩시다.
디지털믿음 결정적 신념으로 부탁하는 점에 예수님은 감탄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하늘믿음 디지털 신앙행진 굳게 지키기로 합시다.
인류항해가 하늘 향해가도록 당신이 노와 키 잡을 인물 되어주십시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가파르나움에서 한 백인대장을 만나셨고, 그의 종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백인대장의 청을 들으시고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셨을 때 백인대장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모습 속에서 겸손과 회개의 모습과 참된 사랑과 믿음의 모습을 배우게 됩니다. 먼저 백인대장의 경우는 신앙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을 찾아뵙고 겸손되이 부탁을 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예수님께 겸손하게 다가와 청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당시 종의 경우는 주인의 재산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진정 그는 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주님을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그는 그렇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께 자비를 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예수님께 ‘한 말씀’만 하시면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정적으로 그러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믿음이라고 칭찬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대림시기를 지내면서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모습처럼 겸손과 회개와 사랑과 믿음의 모습을 살아갈 수 있기를 청하며 오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이방인 백인대장과 유대인 예수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취급 못 받던 보잘것없는 종을
제 몸처럼 아끼는 백인대장이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종과 함께 아파합니다.
하찮은 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려는 이방인이
염치불구하고 이름난 치유자
유대인에게 다가갑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를
허물 수 없었던 이방인 백인대장은
감히 유대인 치유자 예수님을
제 집에 모실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내가 가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유대인 예수님은 단번에 허뭅니다.
잘난 유대인들의 날 서린 시선도
버림받은 이방인들의 불안한 낯빛도
이방인과 하나 되는
유대인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무수히 많은 세상의 경계를 허물려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예수님을 따르다 쓰러집니다.
경계에 빌붙어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은
결코 멈춘 적이 없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여전히 예수님께서 경계를 허물고 계시기에.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한 사람으로서
여전히 희망할 수 있습니다.
나를 쓰러뜨리려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다 해도.
내가 쓰러져도 또 다시 내 뒤를 이어
예수님을 따르는 벗들이 있을 것이기에.
숲길을 걸으며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힐링’이란 단어가 온통 유행이었다. 그런데 ‘힐링’이란 단어가 퇴장하고 ‘치유’로 바뀌었다. ‘치유’가 얼마나 친근한지 거부감이 없다.
엊그제 ‘치유’의 숲을 걸었다. 나무 숲이 사람에게 주는 효과는 다양해서 내 자신을 숲에 맡기면 정신적 영역까지 치유를 받는다. 이는 숲에 자신을 기대면 자연스럽게 주는 숲의 혜택이다.
하느님의 사랑, 당신께서 낮아지길 한없이 낮아 지셔서 우리를 드높여 주시는 사랑이 ‘성탄’이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겸손의 사람이 되시어 가장 비천한 존재로 우리에게 오신다. 그 사랑으로 내가 들어가면 성탄이 이루어져 모든 아픔이 치유되고 존귀한 존재로 태어난다.
백인대장의 부하가 몸쓸 병에 걸려 죽게 되었다. 대장은 방법을 찾아 나섰다. 백인대장은 하느님의 사랑, 그 사랑이 현존하심을 주님을 통해 보았다. 대장은 즉시 매달린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마태8,6).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마음을 보셨다.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에 가대서 거닐고 있는 대장의 마음을 보셨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오실 필요 없습니다. 한 말씀으로 족합니다. 사실 모실만한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명령하달은 대장과 부하 사이의 관계가 그렇듯이 하느님과 저희 사이의 관계 또한 그렇습니다.”
백인대장은 겸손과 믿음으로 하느님의 숲을 거닐고 있으며, 하느님의 사랑은 자기 종을 치유시켜 주신다는 확신이 있다. 백인대장은 이미 성탄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그로인해 부하의 병에대한 치유는 물론 하느님 나라의 잔치상에 초대 받고 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백인대장은 부하를 끔찍히 사랑하다가 백인대장이 더 크게 치유를 입고 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는 하느님의 숲길을 걷다가 보게 된 위대한 치유의 기적이다. 성탄이 다가 온다. 기뻐하고 줄거워하자!
'순명'(마태오 8장 5~11)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수도생활하면서 저에게 가장 힘든것은 순명입니다.
자신을 꺾는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을때가 있으니까요.
1차적 순명은 억지로, 마지 못해서 하고 2차적 순명은 명분이 서고, 이해되니 받아들이고 3차적 순명은 가라 하면 두말 없이 가는것입니다.
백인대장은 그가 평소에 종들의 모습에서 본 3차적 순명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있는지 체험하고 있었기에 자신도 예수님 말씀 한 마디에 순명하겠다는 믿음을 보입니다.
'오롯한 순명은 기적을 낳습니다.'
하느님의 꿈, 이사야의 꿈, 예수님의 꿈. -뭇민족, 뭇백성의 구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대림시기 제1독서는 모두 이사야서입니다. 그러니 제1독서의 주인공 이사야와 복음의 예수님은 좋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가장 좋아했던, 예수님께 절대적 영향을 미쳤던 분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일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하느님의 꿈은 그대로 이사야를 통해,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면면히 계승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꿈, 이사야의 꿈, 예수님의 꿈은, 비전은 무엇입니까? 바로 뭇백성의, 뭇민족의 구원입니다. 우리 교회가 결코 잊어서 안되는 온인류 구원의 보편적 전망이자 시야입니다.
바로 이런 전망과 시야를 그대로 견지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뭇백성, 뭇민족의 구원이란 하느님의 꿈, 이사야의 꿈이 실현되고 있음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적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당대의 유다인뿐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앞에, 예수님 앞에 일체의 기득권은 없다는 것입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그리스도교인이라 하여 무조건 구원 받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겸손한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뭇백성의 구원이 바로 오늘 백인대장의 경우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봅니다.
사실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지 않지만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을 지닌 이들은 세상 곳곳에 있고 이들은 백인대장처럼 우리의 믿음에 신선한 충격과 자극이 됩니다. 사실 저는 신심 깊은 불자들을 통해서도 이런 겸손한 믿음을 배우기도 합니다.
어제 헬무트 슈미트(1918-2015) 전 독일 총리가 1995년 8월 히로시마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으면서 행한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꿈, 이사야의 꿈, 예수님의 꿈이 실현된듯한 연설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나는 전몰병사에 대한 사후의 영웅화나 미화도 진실에 대한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들에게 그들의 자식이 영웅으로 죽었다는 말을 하는 것은 부도덕한 기만입니다. 전쟁이야 말로 압도적인 죄악입니다. 전쟁을 피하는 것은 통치의 책임을 진 자들에게는 무엇보다 큰 책무이고 사명입니다. 평화는 인간성 내부에 있는 본능의 힘에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의도적으로, 그리고 성실히 언제까지나 반복해서 노력해야만 유지됩니다.
우리 모두가 인류 전체를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역사는 선의의 추구만으로 불충분합니다. 선의를 행동으로 옮겨 현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합리성과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명시적으로 믿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지만 온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과 평화가, 참 그리스도교 신앙이 깊이 체화된 전 독일 총리 헬무트 슈미트 인격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독일 헌법 1조 1,2항은 성서의 인간 존중과 사랑이 고스란히 요약되어 있습니다.
-제1조 ①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② 그러므로 독일 국민은 이 불가침不可侵, 불가양不可讓의 인권을 세계의 모든 인류공동체, 평화 및 정의의 기초로 인정한다.-
헬미트 슈미트 전 독일 총리 같은 분들이 오늘날의 백인대장이요 예수님의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예수님을 가장 충실히 따랐던 제자로 힌두교의 성자, 간디를 예로 든 경우도 읽은 적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꿈은, 이사야의 꿈은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은 우리에겐 부단한 자극이 되고 우리 역시 백인대장처럼 활짝 열린 믿음과 사랑의 자세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우리의 배타심排他心이, 독점욕獨占慾이 또 사회 곳곳에 만연된 소위 ‘갑질’이라는 천박한 행위들이 얼마나 비복음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종파에 관계 없이, 모든 이들에게 차별없이 열려 있는 환대의 영성과 겸손한 믿음은 얼마나 복음적이고 예수님의 생각에 일치하는지요. 우리가 진정 가톨릭 교회의 참된 전통에 깊이 뿌리 내려 예수님을 닮아 갈수록 우리 역시 이웃에 활짝 열려 있는 환대의 사람,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새삼 ‘환대의 집’으로서 우리 요셉 수도원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또 하느님의 꿈, 예수님의 꿈의 실현에 크게 기여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꿈을 현실화하는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 따뜻하고 친절한 환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주님 영광의 축복이 제1독서 이사야서 마지막 대목에서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친히 우리의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시고, 우리 모두 당신 꿈의 사람으로, 환대의 사람,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우리 모두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믿음과 환대의 사랑으로 주님의 성체를 영하도록 합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아멘.
그저 한 말씀만 하소서.
김귀중
나에게는 늘 행운이 함께했다.
격동기 힘든 시기에 세상에 태어나 6.25가 일어나던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제대로 학업을 할 수 없었으나 졸업은 예정대로 마쳤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으나 대학과정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3년이란 군 생활 내게 맞는 보직으로 과격하지 않은 후방에서 제대를 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행운이었다.
내 사랑하는 아내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사업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지금의 삶을 유지하고 사는 것도 행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느님을 믿게 해주고 키워주고 대학까지 공부시켜 주신 부모님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이다.
지나보면 나에게 행운 아닌 것이 없다.
다만 내가 한 때 불행했던 것은 교만이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찿아와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아래 모실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마태오 8.5-9)
어떻습니까?
백인 대장의 겸손된 믿음이 종을 살렸습니다. 아랫사람에 대한 보살핌과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누구나 일생 닥치는 어려움이 없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곤경이 닥칠 때 어떻게 대처를 하는지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것을 어느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자신을 위한 일로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거느린 종의 아픔을 예수님께 믿음과 겸손으로 그저 한 말씀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대림 첫 월요일 복음이 백인대장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교회는 주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을 강조하려는가 봅니다. 다른 많은 치유기사는 청원자들이 직접 주님께 청하고, 주님께서 몸소 움직이시고 행동을 취하셔서 고쳐주시기를 바라고, 또한 주님께서도 청원자들이 원하는 대로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의 이야기는 자못 다릅니다. 청원자가 환우 본인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직접 오셔서 치유해주시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백인대장은 주님께서 그저 마음만 먹으시면 원격치료로도 고쳐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청할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로마 병사의 집으로 들어가심으로써 혹여 생길지도 모르는 루머와 스캔들이 돌지 않도록 배려마저 합니다. 그 마음의 표현에는 주님께서 고쳐주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마태 8,8-9)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0-11절)
오늘 우리는 되새기게 됩니다. 다가오실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우리를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도록 우리 마음속에 각인시켜 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알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는 마음만으로도 구해주실 수 있으며, 급기야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기까지 희생제물로 자신을 바치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 마지막 날 우리를 구하시러 다시 오시리라는 희망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오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 바쳐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며, 바로 이번 성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시리라 믿고 기다립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구원과 희망을 마침내 이루어주시기를 청합니다.
좋은 소문은 행복의 시작이다.<마태,8/5-1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 백부장은 그리스도에 대한 좋은 소문을 듣고 찾아와 도움을청하고 집엡보시기 부당하다고 “ 함 말씀만하소서.” 하며 주님의 위력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종의 병을 낳게 해주었습니다.
요사히는 상담을 청하는 사람이 수도원 찾아오는 사람보다 전에 상담받고 소문을 듣고 찾아와 청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전해주는 사람도 고맙고 믿고 서울에서 찬아 오는 사람도 감사합니다. 후에 18년 동안 하열하든 사람도 소문을 듣고 옷자락만 만저도 병이 낫게 되리라 믿었고. 지풍을 뚫고 내려온 반신불수도 그들의 믿음을 친송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오리라 하신 말씀은 주님이 오신후 역사가 증명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힘으로 하느님 나라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좋은 소문을 만드는 사람과 나쁜 소문을 만드는 사람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좋은 소문을 만드는 공장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 공장은 이미 모든 성당에서 매일 같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그거은 미사입니다. 미사는 카톨리교회의 생명이며 믿음의 공장입니다. 미사 끝에 “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하시오” 하지만 소문의 본질을 모르고 살면 내용이 없는 실속이 없는 공장이여서 재미도 없고 유인하지도 않습니다. 본질은 백부장처럼 “이종을 불상히 여기소서.“ 하며 자비를 구하고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백부장은 말씀 한 마디만 하소서. 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일치의 정신을 믿음으로 고백 함으로 ” 이런 믿음을 본일이없다.“ 하심 같이 미사에 들려조고 듣게 되는 모든 말씀은 주님의 말씀이고 힘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후 종을 생명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미사르통해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하느님의 힘으로 살게 됩니다.
저는 18살 때 피난민 판자촌에 살고 있으면 미사의 은혜를 알고 동내 천주교신자 자녀들을 아침이며 10명 이상 이끌고 미사에 갔습니다.
신학교 들어가 방학 때이면 3명의 수도원 청원자 함께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다른 두사람은 미사를 나가지 않아도 혼자 나가며 미사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두 사람중 한 사람은 신학생 때 나가고 한 사람은 신부돠어서 교회를 떠났습니다. 저는 모든 것이 미사의 은혜로 알고 있습니다.
미사 끝에 복음전도사 되어 복음을 좋은소식을 전하는 사람은 바로 주님의 자비 일치 생명을 받고 전하는 사람입니다.
미사는 주님을 만나서 주님을 살게 돠는 은총입니다. 미사는 카톨릭 교회의 생명 줄입니다. 좋은 소문의 근원지입니다 미사참례를 생명처럼 여기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대림 시기를 맞아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의 ‘사목 서간’에서(Acta Ecclesiae Mediolanensis, t. 2, Lugduni, 1683, 916-917)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지금 이시기는 매우 장엄하고 성대한 시기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듯 이 시기는 “주께서 인자를 보여 주시는 때요, 구원과 평화와 화해의 때입니다.” 이때는 성조들과 예언자들이 열렬한 갈망과 탄식으로 그리워하고 마침내 의인 시므온이 넘치는 기쁨으로 보게 된 때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매우 성대하게 이 시기를 경축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 시기를 경건한 마음으로 경축해야 하고 이 시기에 기념하는 신비 안에서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보여 주신 자비에 대해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를 바쳐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외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신 것은 우리 죄인들에 대한 측량할 수 없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즉 우리를 마귀의 포악한 권세에서 해방시키어 천국으로 초대하시며 천국까지 인도하여 거기에 들어가게 하시고, 또한 진리 자체를 보여 주시어 우리 마음속에 도덕의 씨앗을 뿌려 주시며 당신 은총의 보화로 부요케 하시어, 마침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영원한 생명의 상속자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교회는 매년 이 신비를 기념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이 위대한 사랑을 끊임없이 기억하도록 독려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한 신앙과 성사를 통하여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얻어 주신 은총을 받고 또 순종 안에서 그 은총에 따라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나오는 은총은 그 당시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현재 우리 모두에게까지 미치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또 주님이 일단 육신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우리 안의 온갖 장애물이 제거된다면 어느 시간 어느 순간이라도 다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영혼 안에서 풍성한 은총을 지닌 채 거처하고 싶어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를 맞아 교회는 우리 구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경건한 어머니처럼, 찬미가와 노래와 성령의 말씀과 전례를 통해서 우리가 이 하느님의 위대한 은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리스도께서 이제 세상에 오시는 듯한 그런 마음으로 이 대림 시기를 맞이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구약의 조상들도 말과 행동으로써 우리에게 본보기를 남겨 주면서 같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왕진
김정일 신부님
백인대장에게 보이는 예수님의 태도는 그동안 병자를 고쳐주시던 방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의 바람을 듣고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만으로 치유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몸소 나서는 모습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우 이례적으로 당신 스스로 발 벗고 나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 8,7) 하시며 적극적인 치유 의사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직접 찾아가 진료하는 최초의 왕진往診 사례이지요. 이로써 백인대장의 믿음은 더욱 부각되는 효과를 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두 번 더 강조하는데,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며 칭찬하신 뒤, 백인대장의 이 믿음을 보고 “많은 사람이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믿음의 조상들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렇게 백인대장을 극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백인대장의 겸손함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마태 8,8)라고 한 백인대장의 고백 덕분이지요. 자격이 없다는 ‘무자격자’를 굳이 ‘유자격자’로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의 왕진, ‘직접 나섬’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변화의 힘이자 치유의 능력인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
김성민
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중풍이 걸린 자신의 종을 낫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예수님의 한 말씀만으로도 자신의 종이 나을 것이라는 굳은 믿음을 드러냅니다.
백인대장의 이런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크게 감탄하십니다.
어제와 그제 프란치스칸 젊은이들과 일박 이일로 천안 성거산 수도원에서 피정을 가졌습니다. 전국 각 지역의 프란치스칸 청년들과 청년담당들이 국가영보신부님과 함께 모여 현재를 사는 젊은이들의 고민과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한 지혜를 모았고, 3명의 유프라들이 사부 프란치스코성인의 삶을 따르고자 축복된 '약속식'을 가지고 친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젊은이들이 기도하는 공동체, 봉사하는 공동체, 사랑하는 공동체로 거듭 다시 태어날 것을 다짐했습니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고, 모든 것을 뛰어넘게 하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제일 중요하고, 이 믿음을 키우는 것이 가장 첫 번째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그러기 위해서 미사와 말씀 안에서 복음을 실행하자는데 마음을 모았습니다.
전례력으로 새해 첫 날인 대림 제1주일을 보내고, 둘째 날을 맞이했습니다.
유수(流水)와 같이 빠르게 지나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이러한 바쁨 가운데에서도 우선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조금 더 키우는데 우리의 정성이 모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러스도께로 향한 나의 믿음이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예수님을 감탄하게 하는 백인대장의 믿음이기를 청해봅니다.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이사4,5b-6)
"성경은 복음화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귀 기울이는 훈련을 끊임없이 받아야 합니다. 교회가 끊임없이 스스로 복음화되지 않는다면 복음화하지 못합니다."('복음의 기쁨', 174항)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송영진 모세 신부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마태 8,8-9).”
이 말은,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병자에게서 떠나고), 그러면 병에 걸린 사람이 낫게 됩니다.
<병을 고치는 일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간에 주님이신 하느님은 한 말씀만으로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빛이 생겨라.” 하고 명령하시면 빛이 생기고(창세 1,3),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라.” 하고 명령하시면 죽은 사람이 살아납니다(루카 7,14).>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여기서 ‘이런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는 말씀은, 어떤 백인대장이 “예수님은 하느님”이라고 믿음을 고백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렇게 믿은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잘 고치시는 예언자”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긴 했지만, 아직은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에 도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백인대장은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의 믿음에 대해서 “‘하느님의 인도’를 받았을 것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고, 혼자 공부해서 내린 결론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에, 예수님께서는 그의 신앙고백에 대해서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17).
믿음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은총입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인도해 주셨더라도 우리 쪽에서도 응답해야 합니다.
단순하게 믿고, 믿는 대로 사는 것이 ‘응답’입니다.
성탄절은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으로 오신 날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자라서 나중에 메시아가 되고 하느님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세속의 명절과는 다른, 대단히 특별한 날입니다.
인간의 역사가 완전히 새롭게 시작된 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 년도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 서력기원을 사용하는 것도 예수님의 성탄이 인류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하느님이신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에는 민족의 구분과 차별이 없습니다.
인종차별도 없고, 직업이나 신분이나 남녀차별도 없고, 빈부차별도 없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나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더라도,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와 존경을 받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서 특별대우를 받지는 못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았느냐, 거룩하게 살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성탄절은 모든 사람을 위한, 모든 사람의 명절”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만의 명절이 아닙니다.
성탄절을 지낸다면서 신자들끼리만 모여서 파티를 하고, 신자들끼리만 모여서 선물을 주고받고,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신자 공동체 안에서만 불우이웃 돕기를 하고...
그렇게 세상을 향해서 문을 닫고 있으면, 그것은 성탄절이 아닙니다.
불우이웃 돕기는 교회 공동체 밖으로 나가서 하는 것이 옳습니다.
성탄절 선물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주는 것이 옳습니다. 잔치를 하려거든 ‘모든 사람’을 초대해야 합니다.
각 개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주님이신 하느님”이라고 믿는 믿음과 “나를 잘 도와주시는 예언자”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신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은, 주님의 뜻에 따라서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기도를 할 때에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고, 나아가서 온 세상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먼저 생각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소원을 빌고, 그냥 그것으로 그칩니다.
다른 사람의 사정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남을 위한 기도는 하나도 바치지 않습니다.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 그런 모습을 자주 봅니다.)
그런 사람의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기복신앙’입니다.
(‘기복신앙’은 신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미신입니다.)
대림 시기를 지내면서, 우리가 반성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나를 위해서만 살았나? 주님의 뜻에 따라서 모든 사람을 위해서 살았나?
혹시 내 형편이 안 좋다고 핑계 대면서 이웃 사랑 실천을 외면하지는 않았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믿음을
반성하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믿음은 믿음으로
치유됩니다.
가장 아픈 곳에서
가장 뜨거워지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모두가
소중한 하느님
자녀입니다.
믿음의 잔치는
언제나
사람들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여기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힘은
치유의 힘입니다.
동쪽과 서쪽
모든 것이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자주
찾아야 우리의
믿음도 성장합니다.
믿음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입니다.
믿음의 길을
따라가는 믿음의
대림시기 되십시오.
한 사람을 살리는
믿음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먼저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제가 오늘부터 베트남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옵니다. 3박 5일의 일정입니다. 이 기간 중에 새벽 묵상 글은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몰라서 이렇게 공지합니다. 현지의 인터넷 사정이 나빠서 묵상 글을 올릴 수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튼 베트남 성지순례는 저도 처음 가보는 곳이라 많은 기대를 안고 출발합니다. 성지에 가서 많이 기도하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의 묵상 글 시작합니다.
창작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어느 작가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저 역시 부족함이 너무 많지만 매일 새로운 묵상 글을 쓰는 창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글을 쓰는데 고통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새벽 묵상 글을 쓸 때에는 어렵고 힘들었지요. 그러나 묵상 글을 쓴 지 18년째 되고 있는 지금, 고통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글을 쓰는 것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제게 주어진 일상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리 즐거운 것도 일의 개념으로 넘어가면 어느 순간에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냥 원래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어렸을 때, 저는 씻는 것이 제일 싫었습니다. 학교 다녀오면 어머니께서는 곧바로 “손 닦고, 발 닦아라.”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때마다 어차피 더러워질 것을 왜 씻는지 모르겠다 싶었습니다. 머리 감는 것, 목욕하는 것도 커다란 고욕이었습니다. 머리 감을 때 비누거품이 눈에 들어가면 얼마나 따가운지 모릅니다. 또한 목욕할 때에 때밀이 수건으로 미는 것은 너무나 아팠습니다. 그래서 씻는 것이 정말로 싫었습니다.
지금 현재 저는 씻는 것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나면 목욕탕을 찾아가서 오랜 시간 머무르기도 합니다. 씻은 뒤의 깨끗함과 상쾌함은 제게 큰 만족을 가져다줍니다.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씻는 것을 반드시 치러야 할 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자신이 하고 있는 그 모든 것 역시 일이 아닌 그냥 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떨까요? 일이 아니라,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주님께 대한 믿음 역시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 싶습니다. 많은 이들이 신앙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신앙생활이 나의 삶을 만드는 과정이 아닌 해치워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에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믿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철저하게 주도권을 주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그는 나름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요. 이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불러서 치료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직접 찾아와 도움을 청했으며, 자신의 종에게 굳이 갈 필요 없음을 고백합니다. 대신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종이 나을 것이라는 이 말은 주님께 주도권을 맡겨드리는 모습입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이 정도는 해줘야한다는 식으로 주님을 대하게 되면 결국 주님과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주님의 뜻을 따르기도 힘들어질 것입니다.
주님께 주도권을 맡기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뀝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큰 잘못은 아무 잘못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토머스 칼라일).
어떤 질문을 하십니까?
힘들어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에게 “괜찮아?”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까요? 대다수가 간단히 “괜찮아.”라고 대답합니다. 이 질문은 상대방에게 긴 대답을 유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렇게 물었다면 어떨까요?
“지금 기분이 어때?”
몇 년 전에 코칭을 공부할 때, 상대방의 짧은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은 나쁜 질문이라고 배웠습니다. 상대방을 제대로 코칭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하고 지지하기 위해서는 긴 대답을 유도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질문은 대체적으로 짧은 답을 유도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왜 이렇게 대답이 짧냐면서 마치 상대방의 잘못인 양 말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잘못은 나에게서 시작할 때가 더 많습니다.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는 나의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많은 말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질문을 통해 우리는 이웃을 좀 더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각별한 관심이 요청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외면하는 3D업종에서 묵묵히 제몫을 해내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이지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들어보면 얼마나 마음이 저며오는지 모릅니다.
물론 좋은 업주를 만난다든지, 사람이 야무져서 꽤 큰돈도 모으고, 우리나라 생활에도 잘 적응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많은 분들이 참담한 고통 속에 살아가지요.
너무도 배우기 어려운 한국말, 향수, 암담한 현실이 원인이 되어 갖은 스트레스를 받다가 소리 없이 죽어 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로부터 당하는 차별대우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아마도 은연중에 민족적 우월성이 우리나라 사람들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보다 경제사정이 열악하다고 생각되는 나라 사람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내리누르는 성향이 많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외국인 근로자들이 털어놓는 섭섭함 중에 큰 섭섭함은 자신들의 문화나 생활 양식을 철저하게 깔보는 말들이라고 합니다.
"너희 나라에는 이런 것 있어? 너희는 이런 것 먹기나 해?"
그들 역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전통이 있고, 관습이 있고, 음식문화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민족성이니 차별대우니 하는 말을 하는 이유는 백인대장을 칭찬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고 있는 백인대장은 당대 가장 잘 나가던 로마제국의 시민이었습니다.
속국이던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못될 정도로 탁월한 민족의 후예였습니다.
그런 로마 제국의 백인대장이 겸손하게도 이스라엘에서도 깡촌 나자렛 사람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애원합니다.
"주님, 제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하면서 하인의 병을 고쳐줄 것을 하소연합니다.
계속되는 백인대장의 발언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이미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 사람, 그 누구보다도 충실한 그리스도 신자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이렇게 탁월한 신앙을 지닌 백인대장이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백인대장을 크게 칭찬하십니다.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을 극진히 칭찬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의 예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 불가능은 없음을 굳게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통과 눈물, 기막힌 사연들을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에게 그 모든 시련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주님,
당신만을 믿습니다.
당신만을 신뢰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꾸준한 묵상을 통해 믿음을 키우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엊그제 책이 나와서 오늘은 대놓고 책에 대한 홍보를 하려합니다. 제가 이번에 낸 책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는 지금까지 제가 교회의 가르침을 묵상을 통해 이해한 모든 내용을 실었습니다. 그 첫 장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그 믿음이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는지를 저의 체험을 통해 풀어가려 했습니다.
부모가 아기에게 가장 사랑을 쏟을 때는 잉태되고 태어나서 젖을 뗄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이 큰 사랑을 받은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아기가 어머니로부터 젖을 먹은 것을 기억한다면 어머니가 4살 이후까지 젖을 먹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거의 4살 이전의 일은 기억을 못하게 돼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통해 부모를 믿게 되고 자신이 인간임을 알게 되는데 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면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어머니를 의심한 적이 있었습니다. 길에 사는 아이를 집에서 키우려고 하는 행동이나 또 이유 없이 저희를 야단치시는 모습, 학용품 살 돈은 안 주면서 제사상은 잘 차리고, 저를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하실 때는 어머니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믿지 못하면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공부도 안 하게 되고 착하게 자라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믿는 여정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어머니가 식사 하실 때 생선 몸통을 드시는지 대가리를 드시는지, 삼겹살 먹을 때 먼저 드시는지 마지막에 드시는지, 먹고 싶은 것을 당신이 드시는지 우리에게 먼저 주시는지 등을 관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어머니가 확실하다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 생기는 과정입니다.
저는 이 경험이 똑같이 하느님을 믿게 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저희를 사랑하셨는지를 추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그렇게 어머니가 어머니임을 알기 위해 그분의 사랑을 살피는 과정처럼,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기 위해 그분을 살피는 과정이 ‘묵상’이라 불리는 것을 알았고 그 묵상을 통해 믿음이 생겼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묵상의 내용은 그분의 사랑이고 그 열매는 그분께 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라자로가 죽었을 때 그의 여동생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함께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하였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시면 죽을 병도 고쳐진다는 믿음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린다거나 먼 거리에서도 병을 치유해 줄 수도 있는 분이라는 믿음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오늘 이방인이면서 예수님을 본 적도 없는 백인대장은 마르타의 믿음보다 더 높은 수준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하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려던 참이셨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자신의 하인들에게 자신이 명령만 내리면 하인들이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을 예로 들면서 예수님께서 굳이 자신의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놀라시며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해 더 잘 안다는 말과 같습니다. 믿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믿게 됩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어떻게 이스라엘의 사람들까지도 도달하지 못하는 그런 믿음과 지식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매우 많은 묵상을 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굳이 당신 집까지 오실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셨지만, 이것이 주님께서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한 배려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인들에게 명령하듯이 주님도 명령을 통해 기적을 행할 수 있으심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는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자신과 하인과의 관계와 비교하며 묵상하였기에 주님께 대한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번에 내는 책도 많이 부족하지만 저의 평생의 묵상의 결과들을 엮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저의 믿음에 대한 성장과정을 써서 유아세례만 받고 아직 성당에 다니지 않는 고등학생 조카에게 읽혔고 그 조카는 갑자기 믿음이 생겨 첫 영성체를 하고 주일미사를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교회를 믿어야만 하게 된 묵상이 다른 이들의 믿음을 증가시키는 데도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왜 성당에 다녀야 하느냐?’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묵상은 믿음을 증가시키는데, 책을 읽는 것도 묵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책을 통해 믿음이 커졌고, 이 책도 그런 작은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길을 가는데 새로 개업을 했는지 문 앞에 축하 화환이 많았습니다. 가족, 친구, 거래처에서 보냈을 것입니다. 새로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은 많은 준비를 하였을 것입니다. 장소, 업종, 실내장식을 신중하게 선정했을 것입니다. 당분간은 아는 사람들이 찾아오겠지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성실한가와 얼마나 맛이 있는지 입니다. 길을 지나면서 새로이 사업을 시작하는 분을 위해서 잠시 기도하였습니다.
남과 북의 철도 연결을 위한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유엔 안보리에서도 이번 사업은 재제에서 해제하였다고 합니다. 미국도 이번 사업은 재제에서 해제하였다고 합니다. 유엔과 미국의 재제완화는 다른 어느 축화화환보다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제가 해제되지 않으면 남과 북의 철도 연결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70년 동안 분단된 남과 북의 철도가 연결되면 좋은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기차를 타고 북한을 거쳐서 유럽으로 여행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수출품을 기차를 이용해서 유럽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운송비용이 저렴해질 것이고, 수출 경쟁력도 좋아질 것입니다. 단순히 철도가 연결되는 것을 넘어서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의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야 할 산도 많습니다. 북한의 비핵화가 가시적으로 성과를 내야 할 것입니다.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으로 나가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철도의 연결, 더 나아가 남과 북의 협력과 화해는 우리의 침체된 경제를 회복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70년이 걸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마치 유리 위를 걷는 것 같아서 언제 깨질지도 모르는 현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화해와 협력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몇 천 년을 함께 살았던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입니다. 그러한 믿음과 동질감이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의 후손들에게 휴전선을 평화의 상징으로 물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휴전선은 축제와 화합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백인대장은 강한 믿음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기적은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 하십니다. 언제나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문을 열면, 희망의 문을 열면, 사랑의 문을 열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품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드님까지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센스 있는 신앙인이 됩시다.
김기현 요한 신부님
2007년도 1학기 어느 날 신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제본 할 것이 생겨서 강화 카피랜드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전화번호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학생처에 가서 물어봤습니다.
자매님은 전화번호를 적어 주시면서, ‘거기에 전화 해 보면, 제본하시는 분이 언제 학교에 들르는지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 손을 포개며 뭔가 달라는 동작을 취하면서 저를 쳐다봤습니다.
저는 작은 목소리로 ‘뭐요’라고 하니까, 자매님이 ‘사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옆에 학생들 먹으라고 준비해 놓은 사탕을 하나 집어 주니까, ‘그 사탕 말고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자매님은 무슨 일을 도와준 대가로 사탕을 바라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다음에 드릴께요.”라고 말하며 학생처를 나왔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생각 해 보니, 그 날이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선물로 주는 화이트 데이라 자매님이 그런 행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얘기를 후배 신학생에게 했더니, 그 신학생이 “반 대표가 센스가 있으면, 여자 교직원 분들에게 사탕을 챙겨줬겠죠 뭐...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내가 반 대표야~”라고 했더니. 후배가 죄송하다는 표정의 웃음을 짓더라구요..^^;
당시에 반 대표를 맡고, 크고 작은 일들을 처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센스 있다.’라는 말을 들을 수 없겠구나...’
저와는 달리 복음에 보면 센스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백인대장은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잘 헤아리고,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그의 믿음을 칭찬해 주시죠.
또 마르코 복음 2장에 보면 중풍병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갈 수 없게 됩니다.
그러자 중풍병자를 데려 온 사람들은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시며 그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또 마르코 복음 7장에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십사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여인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태도에 감탄하시며 여인의 딸을 고쳐주십니다.
주님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오시나요?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 우리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대한 믿음을 삶 안에서 고백할 수 있을 때,주님은 우리를 칭찬하시며 ‘센스 있다.’ 라는 말을 해 주실 겁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연세 많으시고 사투리 쓰시는 할머님이 고해소에 들어오셨다.
“죄를 지었슈... ~ 하면 죄 진거 아니유?”
연세 많으시고 몸이 불편하신 할머님이 고해소에 들어오셨다.
“이런 이런 죄를 지었는데, 몸 좀 안 아프게 해 주셔~”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에서 한 백인대장을 만나시고 그의 종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이 복음 말씀을 대하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 백인대장의 인품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먼저 백인대장은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종의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 다가와 간청을 드립니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아랫사람을 위해서 베푸는 자애로운 마음을 우리는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하고 드린 말씀을 통해서 그의 믿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백인대장의 사랑과 믿음을 보시고 그의 종을 낫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준 백인대장의 모습은 우리가 공동체 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곧 공동체 안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곧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하고 말씀드렸던 백인대장의 모습처럼 언제나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과 믿음의 삶을 이루어 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또 다른 기적을 이루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김성 세례자 요한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동방의 사도라고 일컬어지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기념일을 맞아서 그의 기도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당신께서 제게 약속하신 천국을
원하기에 당신께로 향하지는 않습니다.
지옥이 그만큼 두려워서 당신께 저를 내어드리고,
저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당신께로 향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주님, 당신께서 조롱받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도록
저를 이끌어주십시오.
당신의 몸이 그만큼 상처 입으신 것을 보도록 해 주시고,
당신이 모욕 받으셨고, 죽으신 것을 보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 마지막까지, 오로지 당신의 사랑, 당신의 방법으로
비록 천국이 없다 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도록 저를 이끌어주시고,
비록 지옥이 없다 하더라도 당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일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께서 제게 사랑을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 제가 기다린다 하더라도 오지 않을 수 있고,
이처럼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저는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이 “주님,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주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를 표현했던 것처럼, 하비에르 성인의 삶은 주님께 대한 애정과 헌신, 의탁의 삶이었습니다. 비록 천국이 없다하다라도, 비록 지옥이 없다하더라도 라고 표현한 그의 기도문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원하는 것을 사랑한 하비에르 성인의 삶에서 우리는 그 깊은 고백이 우리의 입에서 마음에서 또한 그와같이 우러나오길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백인대장과 부하병사의 만남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먼 옛날 아야기이다. 내가 소위시절 중대장의 이름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병사들에게 공적으로 아버지처럼 엄격하고 사적으로 자상한 어머니였다. 알고 보니 병장 출신으로 후에 장교가 된 분이었다. 오늘 복음(마태8,5-11)을 만날 때면 그 중대장이 생각난다.
필연적 만남은 나와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하느님은 절대불변의 필연으로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는 모두 우연이다. 그 만남을 우리는 우연한 만남이라고 한다. 내가 만나고자하는 원의가 있었던 만남이 아니다. 살다보니 우연히 만남이 있었다. 우연한 만남에서 극적인 만남도 있다. 그리고 필연적 만남으로 연결된다. 신세를 고치는 만남이다.
백인대장(중대장)과 부하병사의 만남 또한 우연한 만남이다. 로마인과 노예병사 사이는 상하 주인과 물건 사이였다. 노예는 전리품이며 또한 소모품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중대장과 중풍병으로 고생하는 노예 병사 사이는 그 만남이 예사롭지 않다. 부하병사에게는 중대장이 극적인 만남이다. 중대장은 부하병사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연민을 가진다. 그 연민이 있었기에 중대장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다. 그리고 예수님께 다가가 부하병사를 낫게 해달라고 자기를 한껏 낮춰 사정을 한다. 이로써 극적인 만남이 생겨났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
예수님께서 감동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8,10-11).
우연한 만남은 극적인 만남으로 그리고 필연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된다. 중대장도 부하병사도 잔치상에 앉게 된다. 이 얼마나 훌륭한 만남인가. 나는 살아오며 어떤 만남으로 살아 왔는가? 만남을 돌아 보는 것도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다.
<이방인 백인대장과 유대인 예수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취급 못 받던 보잘것없는 종을
제 몸처럼 아끼는 백인대장이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종과 함께 아파합니다.
하찮은 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려는 이방인이
염치불구하고 이름난 치유자
유대인에게 다가갑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를
허물 수 없었던 이방인 백인대장은
감히 유대인 치유자 예수님을
제 집에 모실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내가 가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유대인 예수님은 단번에 허뭅니다.
잘난 유대인들의 날 서린 시선도
버림받은 이방인들의 불안한 낯빛도
이방인과 하나 되는
유대인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무수히 많은 세상의 경계를 허물려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예수님을 따르다 쓰러집니다.
경계에 빌붙어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은
결코 멈춘 적이 없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여전히 예수님께서 경계를 허물고 계시기에.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한 사람으로서
여전히 희망할 수 있습니다.
나를 쓰러뜨리려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다 해도.
내가 쓰러져도 또 다시 내 뒤를 이어
예수님을 따르는 벗들이 있을 것이기에..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1506년 스페인의 바스크 지방 하비에르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성인은 프랑스 파리에서 공부하다가 만난 이냐시오 성인의 영향으로 수도 서원을 하였습니다. 1537년에 사제가 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예수회 첫 번째 회원으로 자선 사업에 헌신하였습니다. 그 뒤 그는 인도와 일본에서 열정적인 선교로 많은 이를 교회로 이끌었습니다. 중국 선교를 위하여 중국으로 향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1552년 12월 중국 땅이 바라보이는 상촨섬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성인은 1622년에 시성되었는데, 바오로 사도 이후에 가장 많은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인은 수많은 위험과 역경을 딛고 먼 거리를 여행하며 선교에 헌신하였습니다. 1927년 비오 11세 교황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을 아기 예수의 데레사(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이사 2,3) 라고 예언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디로 몰려갑니까? 족집게 과외나 연예인 양성소인 엔터테인먼트 회사들, 모델 하우스, 증권거래소, 해외여행사 등등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내 주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쫓고 있는 목표를 통해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길이 내 생명을 보장해 줍니까?
예수님이 일러주시고 인도해주시는 복음의 길은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화려하고 높아만 보이는 자리에 비하면 인기도 없어 보이고 화려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진정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새 생명을 주시리라는 확신과 희망이 있다면 그 믿음으로 오늘을 사랑합시다.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마태,8/5-1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내가 믿는 하느님과 주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분이고 온갖 생명이 그로부터 나오고 그로인하여 생명이 보존되오니 믿고 따름은 저의 행복입니다.
시간과 일정한 공간에 사는 사람은 무엇을 깨닫기 시작부터 자신의 힘을 얻을 수 있는 보존해 주는 분을 찾아 안전함을 누리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안보는 스스로 해결 한다고 하지만 국제 시회의 조직과 형상 속에 혼자서는 부족하여 우리는 오래전에 가장 강한 나라인 미국과 동맹을 맺어 나라의 안보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유혹과 악의 세력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 도와주는 존재가 없으면 안전하게 살갈 수 없어 우리는 믿어야 할 존재를 찾고 의지하려 합니다.
인류 역사 안에 의지하고자 하는 신은 인간보다 강하고 힘이 있어 보이는 것 모두 신으로 섬기고 빌고 또 빌어 안전하게 사르려고 합니다. 얼마 전 일본 대마도에 가서 돌아 보다 왜 이렇게 곳곳에 신당이 많은지 그 신에게 운명을 마기고 사는지 그래서 일본 선교는 어렵고 힘이 드는 선교지고 박해도 많은지 알게 되었으며 그래도 최고의 신은 태양신을 믿고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 로마의 백인대장의 믿음을 친찬하신 주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하느님이 찬치 상에 사람이 동쪽에서 서쪽에서 모여 오신다는 말씀은 주님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의 믿음을 온 인류와 연결시키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어려운 처지에 힘들 일을 겪으며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는데 사실 하느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부활하신 것과 같이 우리의 고통은 참 삶의 안내자입니다. 앞은 사람이 병원을 찾는 것은 병을 치유받기 위함이며 더 건강하게 살려는 마음이라면 주님은 가난한 사람 불행한 사람 죄를 짖는 사람
외로운 사람 소외된 사람 밤길을 걸으며 무서워 떠는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 평화를 주시고자 우리를 부르시며 어디서나 주님을 찾아 만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에게 초대받은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난해서 부르시고 배고파서 부르시고 고난에 시달려서 부르시고 당신의 십자가가 곁으로 부르심니다. 다만 찾는 사람에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저는 그런 하느님 주님을 찾아 수도원에 들어왔고 들어와 주님을 찾고 80평생 행복하게 살고 있어 아침저녁 밤과 낮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l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모두가 참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만나 평화와 기쁨 중에 행복한 나날을 보내시기 기도합니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간절하고 겸손한 믿음 -하느님 꿈의 실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아주 예전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라는 지작 시가 생각납니다.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죽어있는 것들은 꿈꾸지 못한다
연초록 새싹으로/화사한 꽃들로/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3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그날의 주님 성탄을 앞당겨 꿈꾸며 부르는 대림시기 어제 아침성무일도 첫 후렴이 참 좋아 짧은 기도로 계속 바칩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리리라. 알렐루야-
꿈꾸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만이 꿈을 꿉니다. 예전에는 태몽도 많았고 유명인사들에게는 태몽도 있었지만 요즘 태몽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꿈과 희망이, 비전이 있어야 비로소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바꿔주는 강력한 동기도 꿈에서 시작됩니다. 꿈과 희망이 없어 날로 거칠어지고 삭막해지는 세상이요 시詩도 사라져가는 세상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 예수님과 그 제자들,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공통적인 점은 모두 하느님의 꿈입니다. 하느님의 꿈, 하늘나라는 이들을 통해 실현되고 오늘의 우리를 통해 실현됩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입니다. 아시아 선교 활동을 통해 하느님 꿈의 실현에 올인한 파란만장한 46년동안 믿음의 생애가 끝없는 감동입니다.
대림 제1주간, 제2주간 제1독서는 거의 이사야서가 소개됩니다. 하느님의 위대한 예언자이자 꿈의 사람인 이사야입니다. 이사야가 환시로 받은 말씀, 바로 하느님의 비밀스런 꿈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집이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 않으리라.-
이사야의 하느님 꿈이 참 아름답고 웅대합니다.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됩니다. 영원한 평화의 꿈입니다. 오늘날 전쟁의 시대에 참으로 절실하고 간절한 평화의 꿈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 대림시기 우리를 통해서 실현되어야 할 하느님의 꿈입니다. 이제 주님의 집이 있는 산은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의 하느님 꿈은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고 다시 예수님은 그 꿈을 확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바로 이의 상징적 모범적 첫 손님이 이방의 백인대장입니다. 하늘나라 잔치를 앞당겨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잔치입니다. 하느님의 아름답고 원대한 꿈이 이미 거룩한 하늘 나라 미사잔치를 통해 오늘도 이렇게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사야서 말씀대로 주님의 산, 하느님의 집이신 예수님께 가서 그분의 길을 배우고 그분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화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느님 꿈의 실현입니다. 복음의 백인대장이 참 좋은 그 모범입니다. 주님을 감동, 감탄시킨 믿음의 내용이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 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백인대장은 배려와 연민 가득한 자비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백인대장의 따뜻한 자비심에 감동한 예수님의 응답에 대한 백인대장의 고백에서 그의 겸손한 믿음이 환히 드러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주님 말씀에 대한 백인대장의 확고한 믿음이 놀랍습니다. 바로 이 표현은 우리가 주님의 성체를 모시기전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 저절로 겸손입니다. 겸손이야말로 믿음의 표현임을 깨닫습니다.
믿음과 함께 가는 겸손이요 이런 이들을 통해 하느님의 꿈은 실현됩니다. 믿음과 말씀의 은총이 만나니 치유의 기적이요 하늘 나라의 실현입니다. 주님의 일방적 기적은 없습니다. 이런 치유의 기적에 전제되는 바 우리의 간절하고 겸손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에서 참 용기도 나옵니다. 주님을 감동, 감탄케하는 길은 믿음뿐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신 주님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고 감탄하신 주님이십니다. 새삼 믿음도 보고 배움을 깨닫습니다.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믿음을, 선배들의 믿음을, 동료들의 믿음을, 부모들의 믿음을 보고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런 백인대장의 자비와 겸손한 믿음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겸손한 믿음으로 당신을 모시는 우리 모두를 통해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켜 주십니다. 끝으로 다음의 간절한 믿음의 고백으로 하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생명, 저의 사랑,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선물의 하루이옵니다."
"형제들이여!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갑시다."(이사2,5). 아멘.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 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이사 2, 2~3)
김웅태 신부님
+ 찬미 예수님!
오늘도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 사제 기념일입니다. 이분은 소화 데레사 성녀와 함께 선교의 수호자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으셨습니다. 이 두분은 선교 지방의 수호자이신데 그 삶을 보면 참으로 극단적으로 대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화데레사 성녀는 가르멜 수녀원에 입회해서 수녀원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온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는 선교 지방을 무수히 다니면서 직접 복음을 선포하고 무수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자녀로 이끌어 드렸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같은 분이 선교의 모범이 되시고 직접 발로 뛰는 선교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은 사도 바오로 와 마찬가지의 삶을 살았다는 뜻에서 제2의 바오로 사도라고 말하기 까지 합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는 두 가지 면에서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두 가지 면이 다 선교에 필요하기 때문 이지요.
먼저 소화 데레사 성녀가 선교사의 수호자가 된 것은, 그녀는 직접 발로 뛰며 선교 한 적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녀원 안에서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교사들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내고 그분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편지 속에 사랑의 마음을 담아 그들을 격려했기 때문입니다. 소화데레사 성녀는 말하길, 자기는 교회 안에 사랑이 되겠다고 했으며, 이 사랑이야말로 바로 선교사들이 먼 지방으로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는 힘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선교을 떠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어떻게 그 먼 지방에 가서 모든 고난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로 그 사랑이 되기 위해서 자신은 수녀원에서 기도하고 격려의 편지를 쓰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 사제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주고 공동체를 만들어 교회가 설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교회가 오늘날도 필요로 하는 기도와 활동의 두 모습이라고 보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냐시오 성인과 함께 예수회 초창기 7인 창립 멤버 중의 한 분이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성으로 교회를 쇄신시키고자 하였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은 당시 개신교의 확장과 더불어서 지리상 발견과 막강해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힘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 설정된 아시아의 여러 지방들을 다니면서 복음을 힘차게 선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도와 일본의 선교사로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의 말씀 속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모든 산들 위에 굳게 세워지고, 언덕들 보다 높이 솟아 오르리라.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사 2, 2~3)
이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며 온 세상 곳곳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데 일익을 담당하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의 공로도 포함 된다고 보겠습니다. 인도와 일본의 여러 지역에 세워진 그리스도의 교회는 높은 언덕들 위에 세워지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을 맞아서 발로 뛰는 선교와 또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기도의 힘이 함께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나도 선교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아서 실천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아멘.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선교에 대하여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이에 대한 나의 느낌은 무엇입니까?
조응照應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오늘 복음을 읽으며 탁 떠오른 단어가 <조응照應>입니다.
사전적인 정의는 이렇습니다.
-둘 이상의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서로 비추어 꼭 맞게 대응함.
-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타남.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과 예수님의 조응이 참 아름답고, 그래서 대림 시기 첫 번째 얘기로 오늘 얘기를 꼽은 것 같습니다.
우리도 백인대장과 같아야 한다고 본보기로 제시하는 거겠지요.
백인대장은 주님께서 구원자 주님으로 와 주시기를 청하는 이의 모범입니다.
백인대장은 우선 청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청하는 사람에게는
-간절함
-겸손함
-믿음
-사랑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건 남을 위해서건 바라는 것이 간절하지 않으면 청치 않지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간절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밥으로 치면 한 대여섯 끼는 굶었을 때의 상태입니다.
제가 무전순례를 처음 할 때 밥을 빌어먹어야 하는데 한두 끼 굶어가지고는 밥 주십사 청하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존심이랄까 부끄럼이랄까 이런 것이 있기 때문인데 배고프고 먹고픔이 극에 달해 간절함이 자존심과 부끄러움을 내려놓게 할 때 청하는 겁니다.
두 번째로 백부장은 겸손하기에 청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결코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음을 볼 때 백부장이 참으로 겸손하기에 청한다는 것은 긴 말이 필요 없지만 점령군의 장교가 점령지의 사람에게 겸손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인간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런 겸손이라는 면에서 우리의 모범입니다.
그는 놀랍게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청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백부장은 프란치스코가 권고 19에서 얘기하는 겸손의 경지입니다.
프란치스코는 겸손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백부장은 믿음이 있기에 청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믿음이 있기에 청한다는 것도 너무 자명하여 설명이 필요 없지만 그 믿음이 주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사랑을 믿은 거리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청할 때 그가 부자이기는 하지만 노랭이라고 생각하면 청하지 않잖아요?
마지막으로 백부장은 대단한 사랑의 소유자이기에 청합니다.
자기 종을 엄청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종을 사랑하는 자기의 인생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하며 사는 삶을 돈을 많이 벌거나 권세를 부리는 삶보다 가치 있게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백부장의 요청에 주님께서는 감탄하시며 흔쾌히 OK하시고 직접 왕림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 백부장과 같이 청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오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교회의 전례는 대림 시기의 첫날 이 얘기를 배치한 것을 감사하며 배우는 우리이고 오늘입니다.
믿음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님
양의(洋醫)는 증상을 듣고 온갖 검사와 사진으로 환부를 눈으로 확인한 후에 치료한다. 한의(韓醫)는 증상을 듣고 맥을 짚은 뒤에 치료한다. 명의(名醫) 혹은 신의(神醫)는 검사는 물론 맥도 짚을 필요가 없지만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증상을 물어보고 맥도 짚어준다고 한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를 치료하셨다. 예수님도 증상을 보고 묻고 침을 바르거나 만지기도 하고 기도도 하시며 치료해주셨다. 그런데 이 모든 치료행위에 앞서 환자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당신께 대한 전적인 믿음이었다. 환자가 할 수 없으면 그 보호자에게라도 그것을 요구하셨다. 그런 것을 보면 예수님의 치료행위도 환자와 보호자를 안심시켜주기 위한 것이었던 것 같다. 처음부터 당신께는 그런 것들이 불필요했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는 대로가 아니가 믿는 대로 산다. 이정표를 믿고 내비게이션의 지시를 따른다. 다리가 튼튼하고 천정이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그것들을 조사연구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것을 따른다. 믿음은 그런 것이다. 완전한 믿음이란 그것을 따라도 될 아무런 이성적인 근거도 찾을 수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래서 믿음은 밝음이 아니라 어두움이라고 말하나 보다.
자신의 종을 치유해달라고 예수님께 온 그 백인대장의 고백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그는 이방인이어서 유대인들이 말하는 메시아를 몰랐고, 치유 행위는커녕 예수님을 그 종에게 모셔가지도 않았다. 그는 그분의 한 말씀, 마음 한 번 먹음으로 충분할 거라고 믿었다. 그는 군인이고 또 종을 부려봤기 때문에 명령이 무엇인지 잘 알았을 것이다. 명령과 복종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명령과 복종은 하나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그분은 그것을 증명하실 필요가 없지만 우리는 필요했다. 십자가 위에서 죄인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신이라고 믿을 세상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그분의 행적은 얇은 책 몇 권에 쓰인 것이 전부이고 부활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믿는다. 그분이 마음만 바꾸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분처럼 영원히 살 거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신성을 감추시더니 이제는 성체 안에서 그 인성마저 감추셨다, 우리가 믿게 하시려고. 어쩌면 완전히 믿는 사람에게는 성체도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것은 그 이방인 군인의 고백뿐 일 거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내가 가서 (너를) 고쳐주마”
이영근 차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합니다. 곧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 곧 성탄은 그저 때가 되면 찾아오는 일이거나 또는 단지 어떤 재미나고 멋진 일에 대한 기억이 아닙니다. ‘다시 오심, 곧 재림 또한 그저 때가 되면 찾아오는 놀랍고 떨린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둘 다 모두 거룩하고 신비로운 변형이 분명히 일어나는 구원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날을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처럼 믿음과 희망을 품고 그 만남을 위해서 찾아나서는 대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그분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시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우리를 새롭게 탄생시키고 변형시키는 분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치유하셨지만, 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종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의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 ‘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서 (너를) 고쳐주마”(마태 8,7)
오늘,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 ‘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렙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어,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제 안에 당신 성체와 성혈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신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차려놓으신 하늘나라의 잔칫상에 우리를 앉히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하오니, 주님! 제가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시 122,1 참조).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 8,8)
백인대장의 이 말에는 예수님을 탄복시킬 만한 굳은 믿음,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깔려 있습니다.
고통받는 종의 구원을 위해 백인대장이 청한 이 "한 말씀"은 인류 구원을 위해 강생을 준비하시던 성자께서 세상을 위해 성부께 올리신 간곡한 청을 직관하게 합니다.
그 한 말씀이 곧 '사람이 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방 민족의 구원을 선포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육화로 우리는 구원의 보편성이라는 축복을 얻어누리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이렇게 민족이나 혈연, 인종, 가문, 지위나 신분에 달려있지 않고 그 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 달려있습니다.
그대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시는지요? 오늘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믿음의 예로 백인대장을 제시하시네요.
그는 놀랍게도 자기 가족, 자기 피붙이를 위해 청하지 않고, 무시해도 좋을 법한 자기 종을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청하네요.
자기 가족친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의 표지는 아니겠지요? 그건 믿지 않는 사람도 누구나 하게 마련이니까요?
또한 백인대장은 존경하고 사랑하는 예수님도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요. 제 집까지 안 오셔도 된다고... 그저 나을 거라고 한 말씀만 해주시면 된다고 무한한 신뢰와 배려를 보여줍니다.
"내가 존경하고 섬기고 사랑하니 다른 집은 못가도 우리 집에는 오셔야지요! 오셔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셔야죠! 안 그러면 난 더이상 당신 사랑하지 않을래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진 않나요?
참다운 믿음은 나보다 남을 미리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백인대장처럼, 내 피붙이보다 남의 피붙이를 먼저 배려하고, 나의 필요보다 상대방의 필요를 더 겸손하게 배려하는 마음입니다. 나에게는 최소한의 응답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마음입니다.
매일 주님의 몸을 받아모시기 직전에 우리는 백인대장의 고백을 나의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대체 나의 믿음은 어디쯤에 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주일에 교회에 꼭 가야합니까? 좋은 일 하고푸 사랑실천하면 그걸로 족하지 않나요?" 이렇게 질문하는 현대인들에게 답변하십니다: 미사에 오는 것은 무엇을 청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힘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미사성제로부터 힘을 얻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겠냐고.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똑같이 말하네요.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3)
그렇습니다. 성당엘 가야만 그분이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미사성제의 은총이지요.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화답송)
여러분은 미사에 올 때 어떻습니까? 이렇게 기쁩니까?
이렇듯 미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시는 "하늘 나라 잔칫상"(마태 8,11) 입니다. 이 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는 얼마나 복됩니까?
오늘 기념하는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그 어려운 선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혹자는 말하겠지요. "꼭 그렇게 힘들게 선교 해야합니까? 냉담자가 그렇게 많은데 그냥 세례받지 않고 착하게만 살면 되지 않나요?"
"하늘 나라 잔칫상"을 맛본 사람은 자신만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다른 사람들도 그 잔치상에 오도록 초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로마 10,15) 백인대장도, 성프란치스코 하비에르도 그래서 우리 믿음의 모델입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이사 2,3)
하느님 현존의 자리로 우리를 초대하는 예언자의 독려는 듣는 이를 설레게 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화답송)는 초대에 기꺼이 응해 머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향을 돌려 하느님 계신 곳을 향하는 그 순간,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화답송) 하고 시편 저자는 노래합니다.
순간 공간이동이 일어난 걸까요? 우리가 주님의 초대를 믿고 마음으로 동의하는 순간 물리적 한계를 지닌 육신에게는 호응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지만, 우리 영혼은 "이미" 주님의 산 밑둥에, 주님의 집 지척에 가 닿은 것입니다.
믿음이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 공중에서 스러져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앎이고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이 백인대장이 믿는 대로 그의 종을 구원했듯이 모든 민족의 구원을 선포하신 주님의 초대는 이를 믿고 주님의 산, 주님의 집으로 방향을 돌리는 모든 영혼을 "이미" 구원의 성문 가까이로 데려갑니다.
죄인임에도 구원을 꿈꾼다면 믿음이 그 답이 될 것입니다. 아멘.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 10)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느새 새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할지를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이 은총의 대림시기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뿐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이끌어
복음을 살게합니다.
참된 믿음은
세상과의
거리를 좁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새로운 세상은
백인대장처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사제처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은
그리 순탄치
않습니다.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떠났습니다.
이질적인 문화와
맞닥뜨리며 끊임없이
믿음의 정신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아름다운 삶은
믿음의 삶입니다.
이 대림시기가
믿음으로 돌아가
믿음을 실천하는
은총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중요한 믿음이
빠졌음을 반성합니다.
믿음으로
하느님을 위해
기쁘게 살아갑시다.
매일 성지를 지키고 있지만 부득이하게 성지를 비워야할 때가 있습니다. 지난주가 바로 그런 날이었지요. 오래전에 부탁을 받았던 특강이 잡혀 있어서 하루 종일 성지를 비워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제가 없다고 해서 성지에 어떤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미사를 할 수 없다는 상황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에 연락을 해서 미사를 해 줄 수 있냐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신부들이 쉬는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성지의 11시 미사를 해 줄 신부를 찾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게는 많은 동창신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동창신부들끼리 연락하는 SNS 사이트에 미사를 부탁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저의 믿음대로 곧바로 몇몇 신부가 도와주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사목하는 본당에서 성지까지의 거리가 상당해서 부담이 될 텐데도, 또한 아침 9시 미사가 있는데도 미사 후에 곧바로 와서 미사를 해주겠다는 신부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유일하게 쉬는 날이고, 다른 약속도 있었을 텐데도 동창이라는 이유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기꺼이 도와주겠다는 말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역시 동창이야.”
굳게 믿고 있었지만, 여기에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행동을 더 해주면 감사한 것은 물론이고,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갖게 될 것입니다. 마치 동창들에게 느꼈던 저의 감정처럼 말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조금 이상합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달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종의 상황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었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라면서 자신이 어떻게 해 줄 것인지를 이야기하십니다. 이 말씀에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지요. 직접 보고 손이라도 만져줘야 치유될 것만 같은데,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 줍니다.
이 백인 대장의 믿음을 보면서 왜 처음에 고쳐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가 이해됩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그저 상황만 이야기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자신의 종이 치유되는 것이 옳다면 고쳐주실 것이고, 치유되는 것이 옳지 않아서 다른 행동을 하시더라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후에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어떤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요? 믿음에 믿음을 더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것이며, 주님께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기쁘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아홉 가지 잘못한 일을 꾸짖기보다 한 가지 칭찬을 해주는 것이 그 사람을 개선하는 데 효과적이다(앤드루 카네기).
도전하라.
컬럼비아 대학교 심리학 박사이며 동시에 작가인 수잔 제퍼스(Susan Jeffers)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극복할 수 없는 고난은 오지 않아. 너에게 고난이 생겼다면, 너에게 어려움이 생겼다면 그건 네가 극복할 수 있는 고난이고 어려움이라는 의미야. 고난과 어려움을 성장의 발판으로 사용하자.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면 너는 분명히 전 보다 더 성장하고 발전하게 될 거야. 그리고 도전하라.”
어렵고 힘든 일이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이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잊고 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고난에 대해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고난에 지난 뒤에는 성장한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지요.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포기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도전하라.”
실망스런 날들에
김명겸 디모테오 신부님
올 11월은 유난히 을씨년스럽네요. 쌀쌀한 바람에 낙엽이 떨어져서 그런 기분이 드는 것 이 아니라 국민이 뽑은 박근혜 대통령 때문이랍니다.
2013년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취임하여 여성 특유의 친화력으로 국민들을 이끌 것이라 기대되었습니다.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녀는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라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대통령 취임 후 4년이 되어가면서 우리는 그녀가 이러한 선언을 지키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언론을 통해 연일 터져 나오는 각종 비리는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탐욕과 욕망에 가득 찬 최순실의 꼭두각시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과 그 일당에 둘러싸여 귀와 눈이 막혀 있었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과 책임을 국민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박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국민의 대통령이 되기를 바랐는데 그들만의 대통령이었습니다. 그녀는 대통령 선거전 때 국민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자신들의 꿈만 이루는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외쳤던 그녀는 국민도 속이고 하늘도 속이려고 했던 “참 나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자괴감과 실망감에 빠진 국민들이 어찌 촛불을 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식적으로 무교라고 주장하는 박 대통령은 고교시절 율리아나란 본명으로 세례를 받았고, 성심여고에서는 수녀들로부터, 서강대학교에서는 신부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고 참 희한한 사람들과 함께 사욕과 탐욕에 빠져있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에서 “이루 말할 수없는 큰 실망과 염려”를 끼쳤으며, “사태는 모두 저의 잘못이고 저의 불찰”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국민들은 대통령이 직접 이번 사태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기를 기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은 진심어린 회개의 모습이 아니라 무덤에 회칠만 하는 참으로 실망스런 날들을 만들고 있습니다.
실망스런 대통령과 함께 많은 정치인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진정성보다는 당리당략을 위한 행동을 보이고 있습니다. 촛불을 밝혀든 국민이든 그렇지 않는 국민이든 갈수록 꼬여만 가는 현실의 모습에 자괴감만 커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대통령이 진솔한 고백을 하고, 법에 따른 책임을 지는 길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삶을 살기에도 벅찬 이 시대에 또 많은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찬 바람이 부는 길거리로 나서야 합니까?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남은 애국심을 발휘할 수는 없는가요?
하느님, 이제 더 이상 이 나라에서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찬 바람 부는 길거리로 나아가지 않도록 은총 베풀어주소서. 아멘!
사랑으로 다시 세우는 새 예루살렘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이사야 예언자는 다가올 메시아를 통하여 예루살렘이 부흥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4,2).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피를 닦아내시고,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주고, 폭풍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4,4-5)고 전합니다.
한마디로 구세주가 오심으로써 하느님의 정의가 드러나고 구원의 손길이 펼쳐지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이지요. 대림시기는 이런 영원한 생명, 세상 그 어떤 것도 줄 수 없는 구원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취하고 찾아가며 손에 쥐게 되는 것들에 대한 애착과 미련을 버리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어야겠지요.
오늘 이 땅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가권력의 심각한 부패와 부조리한 사회 구조의 민낯을 보며 자괴감에 빠지고, 집단적 박탈감과 절망을 느끼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당사자들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인식하지도 못하는 무딘 양심과 무책임 속에, 어리석게도 한가닥 지푸라기를 붙들고 바둥대고 있습니다.
권력과 돈의 단맛에 젖어들어 눈이 멀고 귀가 막혀 제멋대로 살아가는 결말은 늘 그렇게 예외 없이 비참할 뿐임을 망각해서는 안되겠지요. 이 대림절에 우리는 한낱 먼지에 지나지 않는 현세의 것들에 사로잡히거나 휘둘리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께 마음을 모아야겠습니다.
그저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에 만족하는 안일함에서 벗어나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실현해나가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해야겠지요. 가장 중요한 준비는 모든 이를 차별 없이 사랑함으로써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증오와 경멸을 가다듬어 사랑과 관심으로 변형시키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자비심과 겸손과 관대함이야말로,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새로운 예루살렘을 세우는 핵심적인 몸짓임이 분명합니다.
백인대장은 얼마든지 종을 부릴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을 다 지닌 세력가였습니다(마태 8,9). 그런 그가 중풍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종의 딱한 처지를 헤아려 고쳐주려고 나섭니다(8,6). 또한 예수님께는 감히 자기 집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다며 한 말씀만 해달라고 겸손하게 청합니다(8,8). 그의 자비심과 관대함, 겸손한 태도에 예수님도 감동하시어 고쳐주십니다. 겸손한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부른 것이지요.
사랑이신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렇게 내 안에 사랑을 채워 사랑의 사람으로 변형되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이 땅에 사랑이신 주님께서 오실 수 있도록 정의를 실현하고, 말과 행동으로 선이신 주님을 증거하도록 투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의 질서는 정의가 실현될 때 바로 설 수 있지요. 정의에 뿌리내린 사랑이 평화를 가져옵니다.
오늘도 희망 가운데 주님을 기다리며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를 실현함으로써, 내 안에, 이 땅 위에 새 예루살렘을 세우도록 해야겠습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정화, 진리와 정의를 통한 자비의 실행을 통해 참 기쁨이신 주님을 맞이했으면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캐나다에서 지인이 오셨습니다. 제가 캐나다에 있을 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음식도 주셨고, 차량도 빌려 주셨고, 은행 업무도 도와주었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음식도 사드리고, 차량도 빌려드리려고 합니다. 지인과는 여러 추억들이 있습니다. 처음 머물던 집은 교통이 불편했고, 너무 추웠습니다. 지인께서 교통이 편하고, 따뜻한 집을 찾아주었고, 정해진 날 아침에 함께 짐을 옮기기로 했습니다. 사정이 있었는지 지인께서는 약속시간보다 30분 정도 늦었고, 성격이 급한 저는 택시를 불러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저는 1시간도 기다리지 못하고, 꼭 올 거라는 믿음도 없이 떠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지인은 저를 찾아오셨고, 그때는 많이 서운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지금은 웃으며 말하는 추억이 되었지만 조급한 저의 성격과 믿음이 부족한 저의 모습을 반성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많은 분들이 저를 기다려 주셨고, 저의 부탁을 기쁜 마음으로 들어 주셨습니다. 1989년의 일입니다. 예비자 교리를 가르쳤던 학생이 취업을 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고 연락을 하였습니다. 저녁식사 약속을 하였지만 저는 깜빡하였고, 천마산으로 친구들과 산행을 하였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면서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4시간이나 늦게 약속장소로 갔습니다. 대학다방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을 보았습니다. 제가 올 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미안한 마음도 컸고, 고마운 마음도 컸습니다.
공자께서는 ‘사람을 믿는 것도 어렵지만 의심하지 않는 것은 더욱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생각한대로 판단하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하면 ‘그럴 수도 있지.’가 되고 남이 하면 ‘그럴 수가 있나!’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웃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십시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잘못을 탓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의 배신을 벌하지 않으셨습니다. ‘평화를 빕니다.’라는 말씀으로 제자들을 위로해 주셨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희망을 이야기 합니다.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리라.” 우리는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입니다. 분쟁과 갈등, 폭력과 전쟁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혜를 모아 일치와 화해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평화와 공존의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백인대장의 하인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서로를 신뢰한다면, 서로를 믿어준다면 인내하고 기다려 준다면 우리는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보여 주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
한마디 말이 갖는 위력
윤경재 요셉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마태 8,5~9)
몇 년 전에 한 침대회사 광고 문구가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 라는 카피였는데 이를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초등학교 학생들이 학교 시험에서 오답을 내었다고 해서 학부형들이 문제를 삼았습니다. 언론에서도 이 카피 문구가 정확한 사실을 오도할 수 있다고 보도해서 결국 그 광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언어 습관과 사회가 얼마나 편협되고 ‘비유’에 인색한지 여실히 드러난 사건이었습니다.
또 차동엽 신부께서 미국에 특강을 갔다가 느낀 소회를 묵상글로 쓴 적이 있는데 그 내용도 이와 비슷합니다. 교포들에게 한국어로 ‘여러분, 행복하세요?’ 하고 물으면 어딜 가나 약간 뜸을 들이고 마지못해서 단답형으로 ‘예’ 라고 작은 소리로 대답하는데, 영어로 ‘Are you happy?’하고 질문하면 거의 즉각적으로 우레와 같은 대답을 한답니다. ‘Yes, I’m happy.’ 두 질문 내용이 동일한데 그 대답하는 태도는 천양지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말로 돌아오면 진지해지고, 영어로 돌아가면 happy 해진다.”라고 유머러스하게 결론을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언어생활에서 지나치게 진지하고 비유를 비유로 받아들이는데 약점을 드러낸다는 점을 새삼 느꼈다는 말이죠.
비유를 낯설어하니 성경에서 나오는 수많은 비유와 은유를 얼마나 제대로 정확하게 이해할는지 사실 의문스럽습니다.
비유에 약한 사람은 도리어 비교에는 강점을 드러냅니다. 특히 남과의 비교에 몰두합니다. 비교의 대상이 남일 때 사람들은 불행해집니다. 내가 얼마나 잘했는지 평가 기준을 남에게 둘 경우, 왜 내가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만큼 부자유스러워집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자신의 꿈을 좇는 삶을 살아가지 않고 남과 비교하면서 목적의식을 상실한 채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삶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 속도감에 또 자신을 잃고 맙니다. 악순환이 연속됩니다.
그래서 ‘비교는 비극으로 가는 길이고, 비유는 비전으로 가는 길이다.’ 라는 어느 작가의 말도 나왔습니다.
우리가 모성이라는 추상적 단어를 떠올릴 때에도 자신이 어머니에게 사랑을 받았던 장면을 먼저 떠올린 다음 그 이미지를 적절히 표현하는 개념을 찾아 기억하는 것이 비유를 사용한 예입니다. 모성이 어떻고 저떻고 하는 장황한 논리적 설명을 통한 비교보다 ‘어머니 옷고름을 적셨다.’라는 촌철살인의 감성적 비유가 사람들을 매혹하게 하죠.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예수님과 자신 그리고 자신과 자신이 아끼는 종의 관계를 비유로서 풀어내며 주님의 치유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중풍병든 종을 바라볼 때 자신이 느끼는 안타까움과 통절함을 주님도 같이 느낄 거라 믿었습니다. 그럴 때 나오는 한 말씀은 커다란 위력이 있을 거라는 비전을 알아챈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그런 치유능력이 없지만 주님께는 가능할 거라는 비전을 가진 것입니다. 자신이 잘하는 점이 있는 것처럼 주님께 맡겨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비유로 풀어내었습니다.
동물 유치원에 오리, 토끼, 참새가 엄마 손에 이끌려 공부하러 모였습니다. 즐거운 수업시간이 끝나고 방과후 수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수영 시간에는 오리가 제일 빨랐고, 등산 시간에는 토끼가 오리를 따돌렸습니다. 노래 시간에는 참새가 음악 선생님께 칭찬을 들었습니다. 토끼는 아예 아무 소리도 못 내었습니다.
토끼가 수영을 못한다고 극성쟁이 엄마가 수영대표 팀 코치에게 개인교습을 해준들 오리를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등산 시간에 토끼에게 뒤떨어졌다고 오리의 발을 성형수술 해준들 제대로 달리 수나 있을까요? 노래 못 부르는 토끼에게 성대 수술을 해 주어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냥 자기가 잘 하는 것의 성공체험을 가지고 살면서 타인이 잘하는 것에 박수를 쳐주는 게 올바른 길입니다. 그런 삶이 비유의 삶입니다. 비교가 아닙니다. 비교할 대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쓸데없이 남과 비교하면 자신이 본래 가진 능력마저 퇴보하는 우를 범할 것입니다. 가장 현명한 처사는 남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어제의 자신과 비교하여 자신의 한계를 조금씩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유의 비전을 여는 방법입니다. 그럴 때 그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백인대장이 덧붙여 한 말을 우리가 매 미사 시간에 되풀이하여 합송 합니다. 영성체 시간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외칩니다. 한 사람의 비전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발휘되는 장면입니다. 백인대장의 시의적절한 한 마디 말이 신앙인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꿈의 현실화現實化 -오늘이 그날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때로 주변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목격하면서 ‘영성이 없구나.’ ‘천박한 영성이구나.’라는 탄식 비슷한 말이 나올 때도 있지만, ‘아, 이것도 한계이자 현실이구나’ 생각하며 침묵할 때가 많습니다. 참 한치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입니다.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을 생각합니다. 어제 뜻밖의 부고를 받았습니다. 퇴임후 마산 트라피스트 수녀원에서 지도신부로 계시던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님께서 어제 아침 대림 첫주일 미사 집전하러 가시던중 선종하셨습니다. 놀랍고도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얼마나 덧없는 인생인지요.
“떠날 때는
외롭고 쓸쓸히/소리없이 고요히
떠나고 싶다/만추晩秋의 수도원길 따라”
어제 아침 혼인미사 주례차 외출할 때 만추의 수도원길 걸으며 떠오른 글입니다. 정말 떠날 때는 만추의 쓸쓸하고 평화로운 길을 따라 그분께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깨어 살아야 하는 대림시기입니다. 그날의 꿈을 오늘 현실화하여 살아야 하겠습니다. ‘꿈의 현실화-오늘이 그날이다-’바로 오늘의 강론 주제입니다.
“그날에 모든 산에서 단 것이 방울져 내리고, 언덕들에서 젖과 꿀이 흐르리라. 알렐루야.”
대림시기 끊임없이 노래할 짧은 기도말입니다. 가사도 곡도 얼마나 흥겨운지 모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꿈의 사람,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그날의 꿈을 오늘 현실화하며 살면서 모든 이들에게 희망과 기쁨으로 부풀게 했던 예언자였습니다.
“그날에 주님께서 돋게 하신 싹이 영화롭고 영광스럽게 되리라. 정녕 주님의 영광이 모든 것을 덮어 주는 지붕과 초막이 되어 낮의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되어 주고, 폭우와 비를 피하는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리라.”
오늘이 그날이며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오늘 지금 이 자리가 시온이요 예루살렘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피신처와 은신처가 되어 주시는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꿈을 우리 꿈으로 현실화하여 아내야 할 자리는 바로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바로 복음의 백인대장이 그 모범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간절한 꿈은 현실화 되고 소원은 이뤄집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일련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겸손한 믿음의 참 사람 한 분을 만납니다. 주님을 감탄케 한 백인대장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미사중 주님을 모실 때의 고백도 바로 백인대장의 이 고백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참 아름답고 겸손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런 진정성 가득 담긴 고백과 더불어 주님을 만날 때 영육의 치유요 꿈의 현실화입니다. 주님을 감동, 감탄케 하시는 유일한 것은 우리의 믿음뿐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일이 없다.”
말씀하신후 은연중 이런 백인대장 같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들이 하늘 나라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을 예고하십니다. 그대로 오늘 백인대장같은 겸손한 믿음을 지니고 하늘나라 잔치상의 예표와도 같은 미사잔치에 자리 잡은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나라 꿈을 현실화시켜주십니다.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참조).
아멘.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넣어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대림의 첫 월요일을 맞이했습니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첫 번째 오심’을 묵상하며,동시에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전례가 지향하고 있는 바는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 하늘나라의 잔칫상에 초대하고 계십니다.
사실, 성탄은 그저 때가 되면 찾아오는 일이거나 또는 단지 어떤 재미나고 멋진 일에 대한 기억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하고 신비로운 탄생과 변형이 분명히 일어나는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날을 위해서는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처럼 믿음과 희망을 품고 그 만남을 위해서 찾아나서는 대림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이 우리를 만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먼저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찾아오시어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분은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탄생시키고 변형시키는 분은 바로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으로 누워있는 종은 백인대장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은 예수님을 모시기에는 자격이 없는 이방인의 지붕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당혹스런 일을 벌이십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을 찾아오거나 당신께 데려온 병자들을 치유하셨지만,이번에는 당신이 먼저 발 벗고 나서십니다. 그의 종을 치유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 곧 주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죄인 이방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나서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 8,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찾아 나서기도 전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오심’으로 이미 인류라는 집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마치, 나무에 올라가 있는 자캐오에게 “오늘은 내가 너희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모든 이들이 매국노의‘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침 뱉고 피해가던 그 ‘집’으로 들어오셨듯이 말입니다.
오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고쳐주셨습니다. 새롭게 탄생시키시고 변형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마태 8,7)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실 자격이 없는 저희‘마음의 집’에 들어오시겠다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그러니, 오늘 제 마음이 기뻐 설레 입니다. 주님께서 제 마음에 ‘당신의 집’을 지으신 까닭입니다. 제 안에 당신 성체와 성혈로 하늘나라의 잔칫상을 차려주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기뻐하며 주님의 집으로 가리라”(시 122,1 참조)
순종의 삶은 말로만 아니다.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순종은 말을 통해 명령자의 뜻을 전달 받고 실천에 옮기지만 말이 아니라도 우리를 진, 선, 미의 삶으로 살도록 하는 것들이 많이 있으며 그중에 환경, 사회적 조건, 정신적 육체적 요구에 따라 순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죽음의 때가 되어 죽음을 맞아하게 되면 우리도 어김없이 순종해야 합니다. 더우면 옷을 벗고 추으면 옷을 입는 행위도 순종이며 순종으로 환경의 보호를 받습니다, 본래 우리는 내가 원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 자연적 명에 의하여 존재 하였으니 자연이 나를 부르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더구나 하느님에게서 낳으니 하느님에게로 돌아 가야함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본적 자세입니다. 아니 됩니다. 아니 됩니다.몸부림 처도 영원한 세상에 부르시는 소리에 세상의 인연을 끊고 아니 버려두고 어떤 위치에 있던지 무엇을 하고 있었든지 때가 되어 부르시면 순종해야합니다.
요사이 아무리 대통령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드라도 자기 체면을 차려야 하드라도 그 자리를 물러나와 한다는 뜻이 있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저는 수도자로 여러 가지 일을 하였지만 언제나 순종의 삶을 통해 일을하였습니다. 이제 나이 들어 귀도 들리지 않고 눈도 어두어 지고 생각도 둔해지는 것은 제가 하는 일 처한 위치에서 떠나 순종하는 것이 말보다도 먼저입니다.
순종에 때에 뒤를 돌아보거나 앞을 불필요가 없습니다. “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주님의 눈짓 하나 몸 움직임 하나 어떤 때 주님의 생각하나에 순종하는 마음이 모두에게 요구됩니다. 또한 수도자는 규칙이나 회헌에 따라 교통법규에 순종해야 안전한 운행이 가능하듯 순종하는 삶이 수도자가 목적한 바에 이를 수 있습니다.
신자는 교회법을 익히고 따라야 올바른 신자생활이 가능합니다. 누구나 자기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면 진, 선, 미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순종은 자기를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생산하는 길이며 누구나 그 길을 따라 살 때 행복해 지도록 기도합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자기 종을 위하여 도움을 청한다. 그 백인대장은 종을 예수님께 데려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6절)고 하는데, 종이 숨을 거두려 한다는 말 같다. 루카 복음에는 그가 “죽게 되었는데”(루카 7,2)라는 뜻으로 보인다. 그의 믿음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낸(루카 5,19) 일보다 더 큰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종이 일어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일을 하신다. 발 벗고 그 종을 치유해 주시겠다고 하시며,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7절) 하신다.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되어 우리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알게 된다. 그냥 종을 치유해주셨으면 우리는 그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 하고 대답한다. 여기서 백인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이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기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자격이 있는 자임을 보여 준다. 그분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 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에 주님께서 그의 집에만 들어가시고 마음에는 들어가지 못하셨다면 기쁨은 없었을 것이다.
백인대장의 말은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짐작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에 관해 그렇게 믿은 그의 지성을 드러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도 사람으로서 제가 다스릴 권한을 받은 사람들을 제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권한을 받은 당신께서는 말씀만으로 틀림없이 병을 떠나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요 주님으로 알고 찾아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받은 분으로 여기고 찾아왔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말씀만 해 주십시오.”(8절)라고 했고, 이 말은 하느님께만 어울리는 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그분이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그를 칭찬하신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선물을 베풀어 주신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10절)
예수님께서 육으로는 이민족이지만 믿음의 가족인 백인대장을 칭찬하셨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11절)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을 거절한 백성들은 쫓겨나고 그리스도인들은 동서에서 몰려와 그 복된 잔칫상에 앉게 된다.
굳이 오시겠다는 주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님과 백인대장의 관계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주님과의 관계가 이러하면 좋을 것입니다.
오늘 얘기는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직접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의 도움을 청하는 루카복음과 비교되는데 이로써 마태오복음은 백인대장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드러냅니다.
그렇지요. 보통의 경우는 루카복음에서처럼 정복국의 백인대장이라면 직접 오기보다는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는데 마태오복음에서는 자기 종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기까지 사랑을 합니다.
저도 사랑을 하긴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저를 낮추거나 그를 존경하는 사랑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겸손한 사랑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겸손한 사랑이어야 완전한 사랑이고, 겸손해야만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이잖아요?
게다가 백인대장은 대단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저 스승이라고 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은 자기의 주인이요 자기는 예수님의 종이라고 한 것이기도 하지만 구원자로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었기에 한 말씀으로도 치유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실 한 말씀으로 치유하실 수 있다는 이 이방인의 믿음은 말씀의 창조주께 대한 창세기의 믿음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1장의 창조는 2장의 창조와 비교가 됩니다.
2장에서 하느님은 땅으로 내려오시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숨을 인간의 코에 불어넣어 생명을 창조하시는데 비해 1장에서 하느님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그저 한 말씀으로 창조하십니다.
생기라고 명령하시면 그대로 생기는 것이 생명이요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영성체 전에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복되도다.’라고 한 뒤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라.’고 고백할 이 백부장처럼 우리가 믿는다면 몸과 영혼의 치유가 참으로 이루어지리라 저도 믿고 여러분도 믿어야겠지요.
그런데 백부장의 이런 겸손하면서도 대단한 믿음의 고백에 예수님께서도 상응하는 칭찬과 사랑을 보이십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고 하십니다.
백부장의 고백대로 가시지 않고 한 말씀으로 원격치료하실 수 있지만 굳이 가셔서 당신의 손을 백부장의 종에게 얹어 치유해주려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의 사랑이요, 따듯한 내재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지 않고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한 말씀으로 무에서 창조하신 분이 한 말씀으로 구원하실 수 없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구원키를 원치 않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입니다.
전화 한 통화, 편지 한 통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지만 사랑하는 자식의 손을 잡아주고 밥 한 끼 먹이고픈 것이 부모의 사랑이듯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이런 내재적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대림절은 이렇게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고, 이렇게 오셔서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갈망하는 시기입니다.
<이방인 백인대장과 유대인 예수님>
상지종 배르나르도 신부님
사람 취급 못 받던 보잘것없는 종을 제 몸처럼 아끼는 백인대장이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종과 함께 아파합니다.
하찮은 종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하려는 이방인이 염치불구하고 이름난 치유자 유대인에게 다가갑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경계를 허물 수 없었던 이방인 백인대장은 감히 유대인 치유자 예수님을 제 집에 모실 엄두조차 내지 못합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내가 가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유대인 예수님은 단번에 허뭅니다.
잘난 유대인들의 날 서린 시선도 버림받은 이방인들의 불안한 낯빛도 이방인과 하나 되는 유대인 예수님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무수히 많은 세상의 경계를 허물려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한 사람 두 사람 예수님을 따르다 쓰러집니다.
경계에 빌붙어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은 결코 멈춘 적이 없습니다.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여전히 예수님께서 경계를 허물고 계시기에.
그러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한 사람으로서 여전히 희망할 수 있습니다.
나를 쓰러뜨리려 달려드는 사람들이 많다 해도.
내가 쓰러져도 또 다시 내 뒤를 이어 예수님을 따르는 벗들이 있을 것이기에.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마태 8, 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입니다.
치유는
소중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용의 대상
정보의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아픔을 사랑으로
치유하시는 예수님을
찾게됩니다.
우리의 아픔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예수님 마음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우리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 사랑을 다시
만나게됩니다.
우리의 믿음을
고쳐나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백인대장과 종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입니다.
사람을 향한 소중한
마음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
기도입니다.
마음을 나누는 것이
치유의 핵심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마음을 나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귀를 막고 눈감은
우리들이 이제는
마음을 나누시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시간입니다.
치유의 모든 길은
마음에서 나오며
마음은 믿음을
고쳐나가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 8)
두고 볼게, 너를 믿는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주님 저의 고민을 거두어주십시오. 저는 이런 고민들이 너무 싫습니다.
주님 저에게 돈 많이 벌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가 합격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 한다면 주님은 ‘너는 자유의지를 포기한단 말이냐? 하실 겁니다.
주님 저에게 고민을 거두라고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고민을 그만하겠습니다.
주님 저에게 노력하고 끈기 내라고 명하십시오. 저는 정신 차리겠습니다.
이렇게 기도 한다면 주님은 ‘그래, 두고 볼게. 너를 믿는다.’하실 거고요.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오 8,10)”
빛 속에서 걷는다는 의미는?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1920년대 후반 매사추세츠 주의 법정에서 일어났던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은 부둣가를 거닐던 사람이 로프에 걸려 차갑고 깊은 바다 속에 빠진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허우적대면서 도와 달라고 소리치다가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어떤 이유로 그는 헤엄을 칠 수도 없었고 물위에 떠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멀리서 그의 외치는 소리를 들었지만 구하러 오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미터도 못 되는 거리에 젊은이 한 사람이 의자에 기대어 앉아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이 “도와 줘요. 난 헤엄칠 수 없어요”라고 애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수영에 능숙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비극은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돌려서 그 사람이 빠져 죽는 것을 무심하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익사자의 가족은 그토록 무관심한 것에 분노한 나머지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판결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가족이 패소했던 것입니다. 약간 거리낌이 있었지만 법정은 부둣가에 앉아 있던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어떠한 법적 책임이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성모님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모른 척 해도 누구에게도 비난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포도주가 떨어진 것에 대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혼인잔치의 즐거움을 잃어가는 것에 대해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아기를 가지게 되면 엄마가 그 아기와 무관하게 이전처럼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는데도 무관심하다면 사랑이라는 것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사랑에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주위의 필요에 무관심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그렇다면 그 빛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사야는 그 빛이 바로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모든 가르침과 하느님의 말씀이 시온에서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곧 ‘빛’인 것입니다. 빛 속에 걸어간다는 말은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사야가 말하는 시온산이나 예루살렘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그 교회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교회는 모든 언덕들, 즉 다른 종교들보다 우뚝 서서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이 그 주님의 산으로 모여올 그런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즉, 지금의 가톨릭교회만큼 역사상으로 오랫동안 가장 높이 솟아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그 빛과 가르침을 준 종교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가톨릭교회를 상징한다고 보아도 무관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 교회의 말씀과 가르침의 영향을 받으며 걸어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종교에 속해있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빛 속에 있다면 빛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교회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아야만 참 예루살렘 백성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황님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가난을 강조합니다. 함께 나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자고 주장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요구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 여겨 나는 계속 부를 축적하고 있다면 실제로는 그 교회의 가르침이나 빛 속에서 걷는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들도 주님의 빛 속에서 걸어야합니다. 매 순간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영향을 받아 내 행동이 아닌 그분이 원하는 행동을 하게 될 때 참으로 빛 속에서 걷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래전의 일입니다. 대전 공설 운동장에서 한국성체대회가 거행되던 날, 눈부시도록 파란 하늘이었고 태양은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추기경님의 파견 강복이 있기 직전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 뭐 나타났어요?”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 참가자 모두가 환호하며 하늘을 바라보았고 저도 태양을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성체모양으로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런 현상에 부정적인 저였지만 저도 모르게 성호경을 그으며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반복하였습니다. 그때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은 보고라도 믿어야죠!”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의 두 기둥은 성모신심과 성체신심입니다. ‘성모님을 통하여 예수님께로’나아가는 신심이니만큼 핵심은 성체입니다. 성체신심을 고양하고 성체께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며 성체를 모시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임을 감사하는 성체거동(성체현양대회)을 1914년부터 거행해 왔습니다. 지난 10월 100주년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100주년을 준비하면서 매주 목요일 오전 11시 순례미사 후 성체를 현시하고 오후 4시 성체강복으로 마감하는 성시간을 갖게 되었는데 감사한 마음으로 지금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시된 성체 안에서 예수님 또는 성모님의 모습을 보시고 감동한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저는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말씀 안에 머물러라! 그러나 보여주실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봐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믿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을 요구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충실히 사는 곳에 무엇이든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보여주신 의미를 찾을 필요는 있습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가운데 사셨고, 살고 계십니다.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계신 생명의 빵’으로 믿고 영성체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으셨지만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마태13,58). 주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셨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믿음을 바탕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렇다면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힘을 내느냐 못 내느냐는 그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고 행하면 능력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라 하시면 그대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명하는 것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사람을 유다인이 아닌 한 이방인 백인대장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움을 사게 된 것은 당연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소위 열심하다고 하는 사람, 활동을 많이 하고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은 사람들, 성직자나 수도자도 믿음을 자신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많을지 모르나 주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믿음에는 소홀할 수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야하겠습니다.
사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그분께서 계시다는 것과 그분께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히브11,1. 6). 믿음으로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기도로 마칩니다. “오 하느님, 믿음으로 당신을 부르나이다.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당신을 선포하신 아드님의 일생을 통하여 제게 불어넣어주신 그 믿음으로 오 하느님! 당신을 애타게 부르나이다.” 사랑합니다.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 갑시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탄츄리 나무 판매 이틀 째인 11.29(토)일 에도 사람들은 오전부터 끊임없이 줄을 이었습니다.
오늘(미국시간11.30일) 대림 1주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오리라 예상되어 주일미사도 07:15분으로 앞당겼고, 저녁기도는 오후 6시로 늦췄습니다.
가능한 최대 인원의 수사님들이 9시-오후6시 저녁기도 전까지 일하게 되고 앞으로도 이런 일정은 계속될 것입니다.
여기 사무엘 원장신부님 역시 매일 차를 운전하며 베어 놓은 성탄츄리를 부지런히 나르며 솔선수범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 전 식탁에서 나눈 덕담도 생각납니다.
"사무엘 원장 신부님은 오후에 밭에서 일하시대요.“
제 말을 받은 마티아 부원장 수사님의 재치 있는 답변입니다.
"아, 밭은 원장님의 '놀이터'입니다.“
'놀이터'라는 말이 참 재미있고 신선했습니다.
놀이를 잊고 지내는 한국의 어린이들이, 과외 공부로 인해 텅텅 비어 있는 한국의 놀이터들이 생각났습니다.
"일터가 놀이터가 됐군요. 일과 놀이가 하나가 됐으니 영성이 최고의 경지입니다. 참 좋습니다.“
저의 덕담에 모두 웃었습니다.
사실 일이 놀이가, 일터가 놀이터가 되는 경지라면 이보다 더 이상적인 일은 없습니다.
성탄츄리나무를 구입하러 오는 분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입니다.
모두의 얼굴이 한결같이 평화롭고 밝습니다.
빛나는 얼굴들입니다.
혼자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식구가 총동원되어 오기도 하고 최소한 부부나 자녀를 대동하고 옵니다.
그러니 완전 축제의 분위기입니다.
'가정의 힘'은 '나라의 힘'과 직결됨을 깨닫습니다.
"가톨릭 신자들만 옵니까?“
"아뇨. 가톨릭 신자는 일부입니다. 개신교는 물론 신자 아닌 사람들도 많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즐기는 것은 미국의 문화입니다.“
그대로 만인의 축제가 된, 구세주 예수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임을 깨닫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쁜 마음으로 성탄츄리나무를 함께 꾸밀 때 가정의 일치와 평화는 저절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그 가정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복음의 주님 말씀이 실현됨을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잡을 것이다.“(마태8,11).
보십시오.
하늘나라 잔치의 예표인 미사축제는 전세계적으로 하루 24시간 끊임없이 봉헌되며, 주님 성탄 축제 역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가 아닙니까?
언젠가는 이사야를 통해 계시된 다음 주님의 간절한 소원인 평화도 실현되리라 믿습니다.
"그분께서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수많은 백성들 사이에 심판관이 되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2,4).
아, 바로 이게 우리의 미래입니다.
주님이 주신 아름답고 원대한 평화의 비전입니다.
대림, 성탄시기가 목표하는바도 이런 비전의 실현입니다.
이런 평화의 주님을 모시고, 평화의 비전을 지니고 사는 정치지도자가 참으로 목마른 시대입니다.
하여 저절로 나오는 평화를 위한 우리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시편106,4-5).
모두에게 활짝 열린 주님의 집이요 주님의 축제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을 믿는 이들은 물론 만민을 향해 주님의 집으로 올라 갈 것을 촉구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2,3).
바로 이런 주님의 초대에 자발적으로 응답한 자가 오늘 복음의 이방인 백인대장입니다.
주님의 산을, 하느님 집을 찾듯이 예수님을 찾은 겸손한 믿음의 백인대장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얻기 위해 이 거룩한 주님의 집 미사잔치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백인대장과 예수님의 주고 받는 대화 장면 역시 아름답습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8,5-10참조).
예수님을 감동시킨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믿음의 고백을 마음에 담아 우리 믿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심으로 우리 역시 치유받는 은혜로운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은 은총의 대림시기 영적 야곱 집안에 속하는 우리 모두를 격려하며 말씀하십니다.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이사2,5).
아멘.
자비와 겸손으로 만나는 평화의 나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스산한 날씨가 우리의 영적 감각을 더욱 자극하는 때이다. 모든 시대의 인간들은 다 평화를 갈망해 왔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빛 속에서 걷는 법을 터득할 경우를 전제로 그 평화가 이스라엘에서 흘러나오게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이 주님께로 몸을 돌린다면 뭇 민족들이 야곱의 하느님 앞에 밀려와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광경을 그렸다. 민족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이사 2,4) 이사야는 자신의 말이 새 이스라엘인 교회 안에서 비로소 실현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땅에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천사들은 ‘지상의 평화’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실패했듯이 혹시 교회도 실패한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 주시기 위해 오신 그 평화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어떤 의미에서 정의와 평화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미래를 응시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상태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오심으로써 갑자기 뒤바뀌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교회 즉 우리 자신을 최종적인 정의와 평화의 나라에 가능한 한 비슷하게 바꿔가면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을 변형시키는 일은 점진적인 과정이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사람들을 교회 안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대로 우리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살 때 그들은 감화되어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3) 하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뭇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게 하려면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증오와 경멸을 가다듬어 사랑과 관심으로 변형시켜야 한다. 뭇 민족들로 하여금 창을 쳐서 낫을 만들게 하려면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겸손과 관대함으로 자신을 변형시켜나가야 한다. 백인대장은 얼마든지 종을 부릴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을 다 지닌 사람이었는데(8,9)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종이 중풍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딱한 처지를 마음으로부터 동감하고 고쳐주려고 하였다(8,6). 또한 고쳐주시려는 예수님께는 감히 자기 집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다며 한 말씀만 해달라고 청한다(8,8). 그의 자비심과 관대함,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한 마음은 예수님을 감동시켰다. 이렇게 ‘지금’ ‘여기서’ 실행하는 사랑은 평화를 가져온다.
대림절은 비단 우리에게 성탄을 맞을 준비를 시키는 일 외에도 주님께서 오셔서 온 세상을 정화시키는 마지막 주님의 날을 대비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때때로 세상의 종말을 끔찍한 파멸의 시간으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사실상 그 날이 오기를 고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결코 세상을 파멸시키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상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선한 것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오직 사악한 것만을 쓸어 없애실 것이다. 세상에 악을 끌어들인 것은 인간들이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이 하느님 손에 정화되고 나면 우리의 세상은 새로운 아름다움을 갖추고 재창조될 것이다. 그때 가면 또 다른 악들이 나타나더라도 하느님의 영광이 은신처요 방벽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현재 세상에 온갖 악과 증오가 존재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에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성 프란치스코에게서 특징적으로 드러났던 긍정적 시각과 희망이 우리 눈길의 특징이 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과 영혼을 지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님, 당신의 자비로 저희를 죄와 온갖 속박과 애착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시고, 온갖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지켜주시며, 백인대장처럼 자신을 낮추어 사랑함으로써 저희로 하여금 기쁨 어린 희망 속에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소서!”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주일에 한번은 예비신학생을 위한 기숙사 ‘베리타스’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학생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은 말로만 듣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과 함께 수학특강을 들으면서 예전에 배웠던 수학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가정방문을 다니곤 했습니다. 가정방문을 할 때, 교적을 가져갑니다. 교적을 보면 간단한 인적사항이 있고, 판공성사를 본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 교적에 있는 것 이상의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교적에 있는 것은 정말 아주 작은 것들이었습니다. 30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면, 그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신앙이 삶의 중심에 있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가족이 모두 세례를 받았지만, 몇 명만 성당에 나오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시간이 되면 성당에 나오세요.’가정 방문을 다니면서 구역장님들께서 수고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구역장님들께서는 구역과 반의 상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정말 방문이 필요한 가정에 연락을 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설득을 해 주셨습니다.
물질적인 도움이 꼭 필요한 가정도 있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자녀를 잃은 슬픔에 가슴아파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다 큰 자녀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못해서 애를 태우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좋은 직장에 다니는 딸과 사위가 혼배 성사를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가정도 있었습니다. 평생 혼자 사시면서 기도와 봉사의 기쁨을 직접 보여주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가정 방문의 가장 큰 보람은 무엇일까요? 가정 방문을 하였을 때, 반갑게 맞아 주시고, 성당에 나오지 못 하던 분들이 성당에 나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작은 것들이지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입니다. 어두운 얼굴에 늘 그늘이 있었던 분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가정 방문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있었습니다. 자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출가한 딸들에 대한 걱정이 컸습니다. 딸들이 세례를 받았고, 사위들도 세례를 받았는데, 성당에서 혼인을 하지 못 했다는 거였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서류를 준비해서 성당에서 혼인 예식을 할 수 있도록 도와 드렸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사회에서 혼인을 한 세 딸들이 성당에 와서 고백성사를 보고, 혼인 예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던 딸과 사위들이 성당에 나오고, 혼인예식을 하였고, 그것을 본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가정 방문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었습니다. 구역장님들의 도움으로 신앙생활을 다시 하는 분들도 있었고, 고통과 슬픔이 기쁨과 희망으로 변화된 분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바로 그런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 힘들고 아픈 이들을 알려 주었고, 그를 통해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창과 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만, 그것은 많은 상처를 만들어 냅니다. 관심과 배려, 사랑과 나눔은 조금은 느릴지 모르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커다란 힘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만남에 대해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중풍으로 앓아누운
종과 그 아픈 종을 바라보는
백인대장의 마음에서
참된 신앙이 무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종의 아픔에 함께하는
백인대장의 마음에서
성탄은 함께하는
기쁨임을 깨닫게 됩니다.
신앙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안쓰러워하는 그 마음에서
고쳐주려 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대림의 은총은
마음의 치유입니다.
함께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만이
우리의 쓸쓸한 마음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랑의 시작에는
살아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아픔또한
나쁜 것이 아니라
백인대장과 종을
서로 치유해주는
선물이 되게 하십니다.
어쩌면 성탄은
마음과 마음사이에
일어나는 탄생의
기쁨이지도 모르겠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무모한 욕심속에서
신앙의 길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참된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역사는
함께 해야 할 때에
함께 하는 역사입니다.
종과 주인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믿음일 것입니다.
사랑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신비입니다.
낡은 믿음에 안주하는
대림시기가 아니라
병든 신앙을 치유하는
대림시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탄은 우리를
건강한 신앙인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예수님처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진심어린 마음입니다.
마음과 마음안에
성탄이 이루어지길
기도드립니다.
이해인 수녀님의 ‘어떤 결심’이라는 시에 나오는 시구입니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도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아플 때, 분명히 있습니다. 그 순간 정말로 이기기 힘들 것 같고, 미래가 전혀 없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런데 꼭 하루씩만 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그리고 꼭 한순간씩만 살겠다는 마음으로 산다면 어떨까요? 고통과 시련이라는 것들이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커다란 짐들로 보이지만, 하루만큼은 또 한순간만큼은 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러한 하루, 그러한 순간들이 모이다보면 어느 순간에 고통과 시련이 내 곁을 떠났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입니다. 좌절과 포기의 마음이 아니라, 한순간을 버티면서 희망을 찾는 마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제 형수가 지금 많이 편찮으십니다. 큰 병으로 인해 힘든 투병 생활을 하십니다. 그런데 형수는 항상 밝게 웃으면서 지내고, 식사도 누구보다도 잘 하신답니다. 같은 병실에 같은 병으로 다섯 명이 입원해 있었는데, 다들 치료가 힘들어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데 형수는 식사도 잘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셨지요. 그래서 같은 병실 환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잘 이겨낼 수 있냐고 묻더랍니다. 이에 형수는 곧바로 “신앙의 힘이죠.”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왜 이런 병을 주었느냐고 원망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형수는 너무나도 감사하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렇게 많은 분들이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고 또 보살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만 있다면 과연 불가능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해주시는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내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을 찾고 따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내 뜻과 정반대의 상황으로 나아갈 때에도 감사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한 백인대장이 나와서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백인대장은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종이 치유될 수 있으리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요. 이 사실에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굳이 오지 않으셔도 당신의 말씀 한 마디로 자신의 종이 치유될 것이라고 말하는 데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백인대장을 통해 믿음이란 하느님께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하느님께 계속해서 내 뜻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믿음이 아닌 자신의 이기심이고 오만 그 자체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의탁한 모습이 진정한 믿음임을 기억하면서, 이 믿음을 내 마음 안에서 키워 나가야겠습니다.
믿음에 대해 가르치기는 쉽지만, 믿음을 삶 안에서 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잘 드는 가위와 잘 붙는 풀
아는 지인이 보내주신 글입니다. 이런 가위와 풀이 있다면 세상 삶이 훨씬 쉽겠습니다. 내 마음에 이런 가위와 풀을 만들어 봅시다.
잘 드는 가위
근심 생기면 근심을 끊고,
슬픔 생기면 슬픔을 끊고,
걱정 생기면 걱정을 끊고,
절망 생기면 절망을 끊고,
미움 생기면 미움을 끊고,
욕심 생기면 욕심을 끊고,
만용 생기면 만용을 끊고,
두려움 생기면 두려움을 끊고 살게,,,
잘 붙는 풀
믿음 떨어지면 믿음을 붙이고,
정이 떨어지면 정을 붙이고,
열정 떨어지면 열정을 붙이고,
긍정 떨어지면 긍정을 붙이고,
용기 떨어지면 용기를 붙이고,
배려 떨어지면 배려를 붙이고,
웃음 떨어지면 웃음을 붙이고,
희망 떨어지면 희망을 붙이고,
사랑 떨어지면 사랑을 붙이고 살게 ..
잘 드는 가위로 끊을 것 생기면 명확하게 끊고,
잘 붙는 풀로 붙일 것 떨어지면 확실하게 붙이고 살자.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살아 계실 때 기자가 이러한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수녀님은 매일 기도를 오래하신다고 들었는데 기도할 때 주로 어떤 말을 하세요?”
그러자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듣기만 해요.”
기자는 다시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그러자 수녀님께서는 아무렇지도 않는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분도 듣기만 하세요.”
데레사 수녀님의 이 말을 통해 듣기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도 나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듣는 것보다는 말하는 것에만 집중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 참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 듣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말을 들으신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신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지요. 하느님께서 완벽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이는 우리들의 입장을 배려하고 당신 자신을 낮추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과연 잘 듣고 있었을까요? 하느님의 말씀도 잘 듣지 않으면서 내 뜻만 관철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간직하며 살고 있는 우리인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셨듯이, 우리 역시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입장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내 이웃의 입장을 배려하는 넓은 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나를 높이는 이기심이 아니라 나를 최대한도로 낮출 수 있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을 보십시오. 그는 당시의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로마의 백인대장입니다. 따라서 자기네가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리와라 저리와라 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배려하며 동시에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지요.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이 주님의 기적을 일구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혹시 듣지 못하고 말하기만 하는 이기심으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저버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러한 상태에서는 주님과 나의 간격이 더욱 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대범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멀리 있는 다른 사람과도 가족처럼 가까워질 수 있다.(뤼신우)
소주 한 병에 몇 잔의 술이 나올까요?
얼마 전, 뉴스에서 약간 어이없는 기사 하나를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소주 한 병에서 몇 잔의 술이 나오는지 논쟁을 벌이다가 주먹질을 서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동료에게 주먹을 휘두른 남자에게 징역형이 내려졌다는 기사였지요. 사실 이 둘은 실제 측정까지도 했다고 하지요. 그러나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아서 홧김에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입니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우는 모습. 또한 자신의 생각과 뜻만을 고집하는 모습.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기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최대한 낮춰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위와 같은 웃지 못 할 사건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
정희성 신부님
어느 때부턴가 ‘쿨’하다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이 단어에 많은 이가 매력을 느낍니다. 누구나 쿨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쿨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쿨하게 만나고 사랑하고, 또 쿨하게 헤어집니다. 쿨해야 멋진 것이고 쿨하지 못하면 초라해진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는 일들에 그렇게 쉽게 쿨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무덤덤할 수 있을까요?
좋아하는 이와 헤어졌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열심히 노력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담담할 수 있을까요? 분명, 우리의 마음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그럴 수 있다.’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모습이거나, 남들에게 그렇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자신이 아끼는 종을 위해 자신보다 사회적 신분이 낮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쿨하지 못하게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하지만, 이 쿨하지 못한 그의 진심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예수님 역시 쿨하지 못하셨습니다. 쿨하지 못하게 사람들의 장사속에 어지럽혀진 성전에서 화를 내셨고, 죽은 이를 애도하는 사람들의 아픔에 같이 눈물을 흘리셨습니
다. 당신이 지니신 뜨거운 마음 앞에서 그분은 결코 쿨하지 못하셨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쿨함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겸손이란
최인비 신부님
어느 대학에서 “복사할 것이 5장밖에 안 되는데 먼저 좀 하면 안 될까요?”라는 부탁을 어떻게 표현할 때 성공률이 높은지 실험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그냥 “미안합니다만, 복사할 것이 5장 있는데 먼저 좀 하면 안 될까요?” 다른 하나는 공감할 수 있는 이유 6글자를 덧붙여서 “미안합니다만, 복사할 것이 5장 있는데 먼저 좀 하면 안 될까요? 많이 바빠서요.” 마지막은 반복되는 이유를 달았습니다. “미안합니다만, 복사할 것이 5장 있는데 먼저 좀 하면 안 될까요? 왜냐하면 복사를 꼭 해야 돼서요.”
실험을 마치고 통계를 내어보니 각각 60퍼센트, 94퍼센트, 90퍼센트의 성공률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 번째 실험에서 “왜냐하면 복사를 꼭 해야 돼서요.”와 같이 반복되는 내용을 이유로 댔는데도 많은 사람이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인 것일지라도 이유를 대며 친절하고 정중한 말씨’로 부탁을 하면 들어줄 확률이 높다고 결론을 냈다고 합니다. 곧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대할 때 상대방은 나의 부탁이나 청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림 첫 주간에 등장한 백인대장의 모습에서 겸손한 자세를 봅니다. 겸손은 솔직한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백인대장은 예수님 앞에 세속적인 지위는 잊고 그분을 신뢰하며 겸손한 한 인간으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맞는 대림의 첫걸음도 이런 겸손이길 바라봅니다. 우리 자신을 먼저 살펴서 덧씌워진 허영과 허식을, 헛된 자존심과 욕심을 치워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어 봅시다.
병의 치유가 아니라 사랑의 체험인 구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저는 요즘 가슴이 저미는 아픔을 느낍니다.
전에는 이 아픔이 어떤 것인지 솔직히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아픔이 제 가슴에 온통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머니 덕분입니다.
몇 달 전부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 지셔서 지금은 거의 잡수지도 못하고 입이 거의 타들어가 말씀도 간신히 하십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는 벌써 되어 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이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지만 돌아가시기 전의 마지막 고통을 힘겹게 견뎌내시는 것을 보면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음에 생각할 때마다 속으로 눈물이 납니다.
저의 어머니뿐이 아닙니다.
제 주변에 너무나 아픈 분들이 많습니다.
몸으로도 아프고, 마음으로도 아픕니다.
저의 어머니 덕분에 그들이 겪는 아픔을 생각하면 가슴을 저미는 아픔을 느낍니다.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외로울까.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마음이 이런 것 같습니다.
자기 종의 고통을 너무도 마음 아파하여 주님께 찾아옵니다.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까짓 종이 아픈데!"하고 무시해버리지 않고 괴로워하고 있는 종과 같이 괴로워하고 있음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열이 잘 전도되는 전도체 같은 백인대장입니다.
어떤 열도 전류도 흘러들어오는 것을 마다하는 절연체도 있는데 백인대장은 감정의 빗장을 열어놓고 가슴을 청진기마냥 그의 가슴에 대고 그의 아픔을 그대로 전해 받습니다.
백인대장의 그 아픔을 예수님도 그대로 전해 받습니다.
그래서 지체 없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두 가지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몸소 가시는 수고가 그 하나이고 고쳐주시는 수고가 다른 하나입니다.
백인대장의 말처럼 한 말씀으로도 얼마든지 고쳐주실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몸소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몸소 오심.
하늘에서 한 말씀으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으시고 육화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것,
이것이 우리 주님의 사랑이고 이것을 우리가 이 대림시기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원은 병의 치유가 아니라 사랑의 체험입니다.
요즘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보면 도대체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낮 역시 책을 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피곤함을 많이 느끼거든요. 그래서 안경에 문제가 있나 싶어 며칠 전에 안경점을 찾아갔습니다. 노안이라고 합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말했지요.
“제 나이가 몇인데 벌써 노안이 옵니까?”
그러자 책이나 컴퓨터 모니터를 많이 보는 사람들은 일찍 노안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경렌즈를 고르는데, 카탈로그에 ‘노안렌즈’라고 쓰여 있습니다. 왠지 서글프더군요. 괜히 확 늙은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이 눈을 40년 넘게 잘 썼으면 이제 좀 성능이 떨어질 때도 됐지 뭐.’
사실 많은 사람들이 젊어지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젊어지기보다는 다른 이에게 젊게 보이길 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젊어 보여요. 동안이세요.’라고 말하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이는 화장품 가게만 가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노화방지’라는 선전을 내 걸고 있는 화장품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늙는 것을 거스르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피부의 노화는 시간이 지나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피부의 노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정신의 성숙도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육체가 아니라 겉으로 보이지 않는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즉,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성능이 떨어지는 보이는 육체에 신경 쓰기보다는 영원히 성능이 향상되는 정신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아닌 겉으로 보이지 않는 부분을 더 강조하는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의 부탁을 들어주셨지요.
오늘 복음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백인대장이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그는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렇게 대답하지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직접 듣고 직접 봐야 믿겠다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더군다나 백인대장은 로마의 직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사람을 왔다 갔다 하게 할 수 있는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서 직접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겉으로 보이지 않는 믿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더욱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해 보았으면 합니다. 눈에 보이는 부분, 내가 직접 체험해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굳은 믿음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서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정을 가장 잘 하는 사람은 자기 결정에 따르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할 용기를 가진 사람이다.(스캇)
조건 밖에 해결책이(‘좋은생각’ 중에서)
옛날에 아버지와 아들 셋이 오순도순 살았는데 아버지가 그만 병이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죽기 전에 세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너희들은 내가 가진 소 열일곱 마리를 내 말대로 나누어라. 첫째는 2분의 1을 갖고, 둘째는 그 나머지의 3분의 2를, 셋째는 그 나머지의 3분의 2를 갖도록 해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세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소를 나눠 갖기로 했다.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계산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동생들은 형에게 한 마리를 반으로 나눌 수 없으니 형이 양보하여 여덟 마리만 가지라고 했다. 형은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며 아홉 마리를 가지겠다고 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세 아들은 지혜롭다고 알려진 랍비를 찾아갔다. 전후 이야기를 들은 랍비가 말했다.
“내가 소를 한 마리 빌려 줄 테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나눠 보시오.”
소 열일곱 마리에 한 마리를 합치니 열여덟 마리가 되었다. 큰아들이 열여덟 마리의 2분의 1인 아홉 마리를 갖고, 둘째 아들은 그 나머지 3분의 2인 여섯 마리를 갖고, 나머지 세 마리 중에서 셋째 아들이 3분의 2인 두 마리를 갖자 한 마리가 남았다. 그래서 한 마리는 랍비에게 되돌려 주었다. 랍비가 말했다.
“풀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때는 주어진 조건에서만 생각하지 말고 그 조건 밖에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나눔과 희생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한 말씀
오민환
예수님께 다가오는 사람들은 보통 장님, 거지, 나병 환자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혀 뜻밖의 인물, 카파르나움에 주둔하던 로마 장교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상종 못할 이방인 장교였고, 예수님은 유다인이었습니다.
전혀 왕래할 수 없었던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백인대장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넘어서는 안 될 경계를 넘은 셈이겠지요. 그는 겸손했고 자신의 종을 위해 주님을 설득한 사람입니다.
명령권을 지닌 장교였지만, 동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군인이라는 자신의 직업에 매여 타성에 젖어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강력한 권력을 쥔 로마황제의 장교로서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중병에 걸린 자신의 유다인 노예를 위해 자신을 지켜주는 소중한 가치를 버렸습니다. 그는 살려달라는 외침으로 예수님을 재촉한 것도 아니고 오직 주님의‘한 말씀’에 절대적인 신뢰를 가졌습니다. 그의 믿음은 아주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신앙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누구에게서도 이러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칭찬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누가 이러한 칭찬을 받은 사람이 있었나요. 주님을 따른다는 제자들은 부끄러울 뿐입니다. 우리는 과연 옹졸하고 편협한 이기심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이웃에게 나를 열어놓고 있나요. 주님의 한 말씀만 바라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나요.
실 (實)을 기억하며 살자.
진우섭 신부님
사제는 영성체 예식 안에서 성체를 신자들에게 들어 보이며“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라고 말하고 신자들과 함께“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라고 응답합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자기 성찰이며 굳은 믿음입니까 !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난 백인대장은 이러한 모습을 오늘 주님께 보여드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실제로 그의 종은 나을 수 있었습니다.
영성체 때 제 자신을 떠올려 봅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달라는 경문을 되새기지만 그것에 온전함이 있었는가 ? 성체 분배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성체를 모시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가 ?
문득 예전 주임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3실 (實)을 마음속에 지니고 살자.’ 여기에서3실 (實)이란 신앙인으로서 진실한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며 그 모든 것 안에 절실함을 담자는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삶 속에서 진실과 성실 그리고 절실함이 묻어납니다. 그렇다면 백인대장의 믿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보여주신 치유 기적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루어 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 우리 삶이 진실하고 성실하며 절실하다면 말입니다. 앞으로 오실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를 시작하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금 이 순간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리는 거대한 유적으로 중국 역대 왕조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세운 방어용 성벽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 베이징을 가면 빠뜨리지 않고 관광한다는 만리장성입니다. 솔직히 저는 가보지 않아서 그 웅장함을 잘 모르겠지만, 높이 9m에 너비 5m 길이가 2,700km나 된다고 하니 얼마나 거대한 성벽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 성벽은 그 누구도 기어오르거나 뚫을 수 없는 철옹 벽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도저히 뚫리지 않을 것이라는 만리장성이, 세워진 뒤에도 예상과 달리 북방민족의 공격은 계속되었고, 실제로 자주 뚫렸다고 합니다. 아니 높이 9m, 너비 5m, 길이 2,700Km나 되는 엄청난 성벽이 왜 뚫렸을까요? 그것은 부실공사를 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성벽의 어느 한 곳이 무너져서 그랬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벽이 끝나는 부분을 돌아서 공격한 것일까요? 물론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만리장성을 지키는 문지기에게 뇌물이 주어졌고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순식간에 적군들이 침입했던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니, 성벽이 제 아무리 튼튼하고 잘 쌓아져도 어떤 문지기가 있느냐에 따라서 만리장성의 역할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문지기 한 사람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을 때 그토록 튼튼한 철옹성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유혹들을 이길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바로 교회라는 이름의 토대이지요.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들은 각종 성사 활동을 할 수 있고, 이로써 악을 피해서 주님 앞에 온전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어떤 악도 들어올 수 없는 철옹성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교회가 악에 의해서 자주 무너집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어떤 허점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바로 이 교회를 지키는 우리들의 마음이 즉, 우리의 믿음이 허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특히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처럼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강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말씀 한 마디를 통해서도 자신의 청원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강한 믿음, 또한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데려오기 보다는 자신이 직접 찾아가서 부탁하는 겸손이 가득한 믿음. 더군다나 남을 위해서 그것도 자신의 종을 위해서 청원을 드리는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는 믿음. 이러한 믿음들로 인해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종의 치유를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떠한가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충만히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굳건한 교회를 세우셨는데, 우리의 나약한 믿음으로 인해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백인대장의 믿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의 강하고 겸손한 믿음을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는 그 믿음을 말이지요.
나에게 믿음이 부족하면 남이 나를 믿지 않는다.(노자)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교향곡(‘삶에 휴식이 되는 이야기’ 중에서)
인간의 가슴 안에는
수많은 교향곡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인생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은
바로 ‘감사’라는 음악입니다.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감사’라는 음악을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가장 추하고 쓸모없는 ‘불평’이라는
음악을 애용하는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하루하루의 삶은 우리가
‘불평’이라는 음악으로
낭비하기에는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울리는
불평의 음악을 이제 꺼 두십시오.
당신 입에서 나오는 불평, 그것들이
하나하나 모이면 당신 인생 전체를
무너뜨리고도 남을
힘을 지닐 테니까요.
인간 = 축제인(祝祭人)
김현태 신부님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 문제는 아직까지 정확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토록 인간학이 발전했어도 인간을 모른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역사는 인간을 두고 지혜인, 경배인, 해악인, 축제인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수식어를 덧붙였습니다. 인간은 고해(苦海)와도 같은 세상 삶을 살아가면서도 축제적 삶을 견지하고자 한 욕구는 늘 강렬했습니다. 더구나 결정적인 순간, 지복직관(至福直觀)으로 충만한 천상계의 잔치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인생역정에서 높은 수준의 정신적 갈망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지난 가을날 수백여 종류의 축제들이 사방곳곳에서 펼쳐졌습니다.
축제라는 미명 아래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흥겹게 삶을 노래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축제는 인간들만의 잔치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바탕이 되고 아브라함을 비롯한 신앙의 선조들이 총망라된 한마당 잔치여야 합니다. 그래야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진정한 축제일 수 있습니다. 인생이란 삶과 죽음을 포함한 신비의 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알고 사는 인간은 더 이상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일 수가 없으며 진정한 축제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불랙 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가 처음 외국을 나간 것이 1987년이고 제일 처음 간 곳이 필리핀입니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강하지만 그때는 국수주의에 가까운 잘못된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었고 서구의 논리분석적인 사고방식이나 문화에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저였기에 외국어는 배우기도 싫어했고 억지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고등학교 때까지 괴로움 중의 하나였습니다.
이런 제가 처음 필리핀에 가서 놀란 것 중의 하나가 이들은 혼혈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일민족, 한 핏줄을 자랑스러운 것으로 교육받아 순혈주의자인 저에게 이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하느님 나라를 향해가는 저의 지난한 신앙여정 중의 하나가 바로 배타적이고 잘못된 이 민족주의를 깨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하느님 나라는 구별이 없고 차별은 더더욱 없는 곳.
하느님 나라는 양단의 개념도 없는 곳.
그래서 선에 대한 악도 없고 악에 대한 선도 없는 곳.
성에 대한 속도 없고 속에 대한 성도 없는 곳.
그래서 선으로 악을 단죄하는 독선이 없는 곳.
성으로 속을 배척하는 근본주의가 없는 곳.
그래서 다름으로 갈등이 없는 곳. 다름으로 전쟁이 없는 곳.
오로지 하느님과 하느님 통치만이 있는 곳.
불랙 홀에 모든 것이 빨려들 듯 온갖 다름이 하느님 사랑으로 빨려들어 하나로 용해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백부장의 놀라운 믿음 고백을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잡을 것이다.”
주님께 전적인 신뢰를 주는 삶
이영묵 신부님
유교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3가지 강령과 5가지의 인륜을 소위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고 합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이라 하여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녀,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입니다.
맹자에 나오는 오륜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그리고 붕우유신(朋友有信)인데 저는 지금 붕우유신에 눈이 갑니다.
한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친구들이 어떤가를 보면 대개 짐작이 간다고 합니다. 오륜의 붕우유신은 친구간에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정을 나누는 바탕은 신뢰와 믿음인 것입니다. 친구에게 돈을 빌리고 안 준다거나, 또는 진실이 아닌 거짓을 말한다거나, 이 친구 저 친구에게 이간질을 한다거나 하면 누가 친구로 사귀겠습니까? 어쩌면 우정을 나누는 사이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신뢰가 그 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자의 믿을 신(信)은 사람 인변에 말씀 언의 합성어입니다. 사람 사이의 오고 가는 말은 믿음이 있어야 그 관계가 지속 될 것입니다. 인격의 바탕은 올곧은 말에서 나옵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 모습은 어떠합니까? 어두운 면 보다는 밝은 면이 많고 숨은 데서 묵묵히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정치현실, 경제질서, 나아가 사회의 구조 안에서 서로 믿지 못해 아귀다툼하는 불신의 현상들 또한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신뢰의 관계가 인생관을 바꾸어 놓는다는 사실에 귀 기울입니다. 예수님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의 지배하에 놓인 식민지 사회입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로마제국의 통제를 받음은 물론입니다. 로마의 군대체계로 보아 100명 정도의 장병을 거느린 지휘관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있던 차에, 가파르나움에 오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예수께 와서 하인의 중풍병을 고쳐 주십사 간청합니다.
예수님께 전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기에 이런 말을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이 말에 예수님도 감탄하십니다. 유다인도 아닌 로마의 한 백인대장 즉 이방인의 이런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가톨릭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 첫 주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로서 믿는다고 하는 것보다 생활에서 주님께 전적인 신뢰를 주는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곱씹어 봅니다.
아이의 편지
최용진 신부님
주일에는 가끔 먼 지역의 어려운 본당에서 도움을 청하러 올 때가 있습니다. 미사 시간에 그 본당의 신자가 올라와서 본당의 어려운 처지를 이야기하고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2차 헌금을 걷기도 하고, 특산물을 팔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금액이 죄송하리만치 적을 경우도 있습니다.
그날도 도움을 청하러 온 본당이 있었습니다. 그 본당의 신자는 자신의 말이 아니라 본당의 여섯 살 난 아이가 쓴 글을 읽어주셨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특별하지도 않았고 굉장히 잘 쓴 글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엄마가 본당 보수 기금 마련을 위해 애쓰며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가 고생하는 게 불쌍하다고…. 엄마가 전처럼 자주 놀아주지 못한다며 속상한 마음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마싯어요.’라고 썼습니다. 그날은 다른 때보다 몇 배 이상으로 모금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아이의 글이 듣고 있던 신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백인대장이 하인에 대해 가졌던 마음과 그의 믿음·겸손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감동을 줘야지.’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감동은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릴 때 나올 수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나의 생각과 감정에만 치우치다 보면 남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것을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나만이 아니라 이웃과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바로 그 모습에서 서로의 마음에 감동이 전해지고 서로 아픔을 치유해 주는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을 울리세요.
장재봉 신부님
가끔 성경을 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세상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던 예언자들의 글들을 읽으며 하느님을 향한 인생의 화답과 사랑에 감격하고 그들의 희생에 울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언자들의 말이 때론 단호하고 냉정하며 혹 무시무시한 경우도 있지만 이 모두가 그들이 알고 느낀 하느님을 알리는 가장 솔직한 방법이었지요.
그들은 자신이 아는 만큼의 진리를 전혀 숨기지 않고 혼자 차지하려 하지 않고 모두에게 알리고 일깨우기 위해서 갖은 정성을 쏟았던 혼신을 다한 결과일 것입니다.
무지하고 막되고 도무지 먹혀들지 않는 사람들을 버려두지 못하는 애타는 마음만이 ‘이스라엘아 들으라’고 외치게 하고 ‘형제들아’하고 타이르게 할 수 있으니까요.
가슴마다 영혼마다 하느님의 자비와 기다리심과 오래 참으심을 전했던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사랑의 흔적을 기억하며 일일이 목 메이는 사랑을 전했던 사도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이의 자세이며 몫이라 싶어 내가 지닌 성의와 헌신과 희생을 되돌아보며 송구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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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로마군인의 백인대장이 주님의 마음을 감탄하도록 하였습니다.
솔직히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종의 처지를 참으로 염려하는 상전의 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것을 하라면 해야 하는 낮은 종의 괴로움을 진심으로 덜어주려는 마음도 지극히 마땅한 처사입니다.
그런데 이 당연하고 마땅한 일이 사라져버린 세상이 주님을 놀라게 했던 모양입니다.
오늘, 인간의 귀한 가치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대우하는 사람을 만나신 주님의 감격이 무량했던 까닭이 아닐까 짚어봅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비천하게 빚지 않으셨으며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배려하는 일만으로도 예수님의 탄성을 듣게 되는 일은 지금 우리에게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슬픕니다.
상대를 향했던 날카로운 말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상대를 낮추이 보던 차가운 시선을 데우고 하느님께서 만드신 그 소중한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돕고 참으로 염려하는 마음으로 살 것을 서로 독려해야할 까닭이라 믿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감탄을 넘어 예수님께서 감격하여 울어버리는 삶을 살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막가는 세상을 위해 찾으신 이 땅이 온통 그리스도인의 사랑으로 흥건해서 아기 예수님이 깜짝 놀라
왕-
감격의 울음을 울리는 대림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 사우나 라커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모두들 옷을 갈아입느라 정신이 없는데 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 옆에 있던 한 아저씨가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휴대전화는 성능이 워낙 좋아서 전화를 귀에 대지 않고 있어도 상대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서 통화 내용을 모두 다 들을 수가 있었지요. 그 통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화기: “아빠, 저 mp3 사도 돼요?”
아저씨: “어, 그래라.”
전화기: “아빠, 저 또 살 거 있는데요. 새로 나온 휴대전화가 너무 이뻐요. 그것도 사도 돼요?”
아저씨: “그럼.”
전화기: “아빠, 아빠, 하나 더... 저 컴퓨터 바꿔도 돼요?”
옆에서 듣기에도 컴퓨터까지는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저씨: “그래, 너 사고 싶은 거 다 사.”
그렇게 모든 부탁을 다 들어주고 휴대전화를 끊은 아저씨는 갑자기 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외쳤습니다.
“이 휴대전화 주인 누구죠? 방금 전에 전화 왔어요.”
맞습니다. 자기 전화도 아니었는데, 자기 전화인척 했었던 것이지요. 전화 속의 인물은 자신의 아빠로 착각을 했었던 것이고요. 이 가족이 집에 가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를 보면서,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도 이렇지 않나 싶어요. 즉,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막 대하는 모습을 늘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잘 되든, 잘 안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원하지 않으시지요. 아무리 상관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당신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으로 연결되는 우리들의 모습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안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을 그토록 칭찬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백인대장은 이교도이면서 로마인의 장교라고 알려져 있지요. 따라서 그는 세상에서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자기 하인을 고쳐달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 자기 가족도 아니며 그저 거느리고 있는 많은 종 가운데 한 명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 부탁의 말을 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했으며, 예수님 앞에 겸손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나아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바로 이 모습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감탄하셨고, 그를 칭찬하셨으며, 그의 소원인 종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지금 나는 어떤 사랑을 실천하고 있나요? 혹시 내 자신만을 사랑하고, 내가 아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더군다나 그 사랑 때문에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은 도저히 인정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한 마음이 들 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랑은 백인대장처럼 해야 합니다.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맙시다.
지혜있는 사람이란('지혜롭게 사는 사람' 중에서)
지혜있는 사람이란
남겨 둘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다 써버리지 않고
여분의 것을 끝까지 남겨 둘 줄 아는 사람
말을 남겨두고..그리움을 남겨두고..
사랑도 남겨두고.. 정도 남겨두고..
물질도 남겨두고..건강도 남겨두면서..
다음을 기약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어떤 이들은 불타는 사랑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날마다 더욱 사랑해 가는 모습이 더 아름답습니다.
마음의 정도
다음 사람을 위하여 남겨 두는 것이 좋고
기쁨도 슬픔도 다 내보이지 말고,
다음에 얼마라도
감추어 두면 더 아름다울 것입니다.
사랑 중에 가장 값진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오래 참고
인내하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림으로 만나는 사람이 참으로 반가운 사람이고
오래가는 사랑이 귀한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
강영구 신부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기 대림절(待臨節)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사람 예수님을 기다리는 사람도 아름답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사람이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로마 군인 백인대장은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그의 겉모습은 강인한 군인이지만 가슴 속에는 따뜻한 사랑이 있습니다.
중풍으로 괴로워하는 하인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자 하는
그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카파르나움의 통치자이지만 권력과 힘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하지 않고
자신을 무한히 낮추는 겸손이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권력자이면서도 가난한 떠돌이 랍비 예수님에 대한
그의 무한한 신뢰심과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예수님이 감동하면 언제나 기쁘고 행복한 일이 벌어집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인이 나음을 받고(마르5,24-34),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딸이 마귀에게서 해방됩니다(마르7,24). 어린 아이가 내민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게 되고(요한6,9), 세관장 자케오가 새 사람으로 거듭납니다(루가19,1-10).
당신의 오늘 하루도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믿는 대로 되리라.
백광현 신부님
신학생 때 모 소년원에서 4일간의 여름 신앙학교를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잘 따라오던 아이들이 마지막 날 계획된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에 술렁거리며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담당 선생님이 설명하는 이유는 당초 운동계획은 오전이었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 일사병이 우려되어서 오후로 바꾼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밖의 날씨는 사실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럼 구름이 끼면 운동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구름이 끼면 운동할 수 있다. 그러니 기도하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밖에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었습니다.
돈 보스코 성인의 기적 이야기를 해 주며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들어 주신다고, 그분께는 불가능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오랫동안 운동을 못한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프로그램이란 생각이 들어 저도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점심을 먹고 체육관에 모인 아이들 중 하나가 밖에 구름이 꽉 찼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모두 뛰어 나가 함성을 질렀고 담당 선생님도 이런 상황에선 허락할 수밖에 없겠다고 했습니다. 구름도 우리 운동장을 중심으로 진하게 형성되었고 먼 곳은 파란 하늘이어서 더욱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작은 믿음으로 기도했는데 놀라운 일이 펼쳐져서 기쁨이 더욱 컸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오 마리아 수녀님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우리는 영성체 전에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하고 간절히 기도한다. 이 간절함에는 백인대장이 보였던 모습처럼 확고하고 실천적인 의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백인대장이 부하에게 명령할 때 병사들이 자기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라며 자기 명령대로 된다고 확신하여 말하고 있다. 실제로 말은 상징이며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말 이면에 깔려 있는 명령과 말의 힘과 믿음이 중풍병으로 누운 자기 하인을 치유하게 했다. 우리 신앙생활의 전부가 언어로 된 상징으로 되어 있다.
이제 묵주기도와 그 밖의 여러 가지 기도를 할 때 우리는 백인대장이 보인 믿음처럼 지금 내가 청하는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기도하자. 열심히 기도하고 난 뒤 내 믿음이 약해서 그것이 이루어질까라는 의구심을 갖지 말자. 하느님께 향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림 없이 항구하게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 속에 욕심대로 선택하여 하느님을 피하거나 욕심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가릴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름 저편에 계시는 주님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계심을 믿는다. 이것이 주님께 보이는 우리 믿음의 표현인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너희가 무엇을 청할 때 항상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여기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자. 그래도 부족하다면 믿음을 더해주시라고 항구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 천부당만부당한 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사회에서 상식적으로 통용되는 예절이 있습니다.
보통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기에 앞서, 제자가 먼저 스승을 찾아뵙고 인사를 올립니다. 장관이 실무자를 먼저 찾아가기보다는 실무자가 결재판을 들고 장관을 찾아갑니다. 명절 때 부모가 자녀들 집을 먼저 찾아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녀들이 먼저 부모님을 찾아가 인사를 올립니다.
그런데 성체성사는 그런 보편적인 인간의 틀을 완전히 뒤집습니다.
성체성사는 어떤 성사입니까?
크신 하느님, 만물의 창조주, 세상만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부족한 죄인인 우리가 먼저 찾아가 뵈어야 당연한 일인데, 황공스럽게도 그분께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너무나 송구스런 일이기에, 천부당만부당한 일이기에, 정녕 기적 같은 일이기에 성체를 영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사실 우리가 송구스러운 나머지 미사 때 마다 외치는 위 성체성사 전례문은 백인대장이 오래 전 외쳤던 말이었습니다.
백인대장의 신앙은 무척이나 올바르고 깊은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 중의 왕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비 충만한 치유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사도들 못지않은 신앙, 유다인 저리가라 할 정도의 제대로 된 신앙을 지니고 있었던 백인대장이었기에 겸손하게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이런 백인대장의 열렬한 신앙, 깊은 신앙 앞에 예수님께서도 감탄하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병자들은 치유나 기적을 이루어지기 위해 예수님께서 현장에 계셔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의 몸에 손을 대어야만 치유가 가능한 것으로 알고 그렇게 기를 쓰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백인대장은 그들의 신앙을 뛰어넘습니다.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느님, 굳이 오시지 않아도 말씀 한마디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뢰, 예수님을 향한 신앙심이 그 누구보다도 투철했습니다. 이런 백인대장 앞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우리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는
인내의 주님,
너무나도 부족한 믿음을 지닌 우리들입니다.
청하면서도 의심하고,
구하면서도 의혹에 찬 시선을 거두지 않는
불쌍한 우리를 용서하여주십시오.
부디 청하오니
오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주십시오.
백인대장의 그 견고한 성채 같은 믿음은 아닐지라도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오늘 우리에게 내려주십시오.
깊은 믿음과 사랑의 마음을 지닌 백인대장
경규봉 신부님
예수님께서 선교의 중심지로 삼으셨던 카파르나움은 당시 군사적 요충지로서 헤로데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었다. 헤로데의 군인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으며, 백인대장은 100명의 병사를 거느린 지휘관이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예수님에 대하여 독실한 믿음과 존경심을 가지고 찾아왔다. 당시 유대인들은 점령자인 로마인을 침략자며 이방인이라고 경멸하고 있었고, 로마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편협하고 독선적인 피지배자로 멸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에서 백인대장이 예수님을 찾아가 자신을 낮추며 간청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극히 겸손하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종이 중풍으로 드러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드린다. 당시 로마인들은 종을 말하는 가축 정도로 생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인대장은 자신의 부모나 형제, 친구나 상관이 아닌 종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아와 부탁드린다.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겸손한 그를 보시고 몸소 가셔서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자신이 주님을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며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자기 종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드린다. 그는 예수님을 전능하신 분, 절대자로 믿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예수님을 어떤 뛰어난 의사로 생각했다면 특효약이나 손으로 만지는 등의 치료 요법을 요청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을 위대한 종교 지도자로 생각했다면 기도나 안수 등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님의 말씀 자체에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처럼, 예수님이 말씀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는 주님이요 메시아임을 믿고 고백한 것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만나 본 유대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말씀만으로도 병이 나을 것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없었다. 하느님의백성인 유대인들도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한데,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그처럼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구원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진실로 감탄하시며 그러한 믿음으로 인하여 온 세계의 백성들이 신앙의 조상들과 함께 천국의 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백인대장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당시 말하는 가축처럼 취급되던 종을 위하여서도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유대인인 예수님에게 머리를 조아릴 정도로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믿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받기에 충분한 믿음이었으며, 그가 지닌 사랑의 마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백인대장과 같은 깊은 믿음과 사랑이 가득하길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망부석
이찬홍 신부님
망부석 전설을 아십니까?
신라시대 박제상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눌지왕이 오랫동안 근심을 하자 찾아가 그 이유를 묻습니다.
왕은 자신은 이렇게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 있는데,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동생 생각만 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그 이유를 말합니다.
왕의 말을 들은 박제상은 ‘제가 가서 폐하의 동생 분을 구출해 내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집에도 들리지 않은 채, 바로 일본으로 갑니다. 일본에 가서는 신라왕을 피해 이곳으로 망명 왔다며, 자신의 속마음을 숨깁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박제상은 왕의 동생을 탈출시키기 위해 바닷가로 여행을 갑니다. 왕의 동생에게 자신이 일본에 온 이유를 밝히고, 왕의 동생을 탈출시킵니다.
‘함께 가자’는 권유에, ‘함께 가면 들통이 나 바로 잡힐 수 있으니, 혼자만 가십시오, 저는 다음에 가겠습니다.’ 라며 자신의 소임을 다합니다.
왕의 동생이 일본을 탈출한 사실이 밝혀지자, 박제상은 많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박제상의 충심을 알아본 일본 관리들은 그 충심에 감탄하며, 일본의 신하가 되기를 권합니다. 그러나, 박제상은 ‘차라리 신라(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충신이 될 수 없다.’며 죽음을 선택합니다.
그러는 동안, 박제상의 부인은 매일 일본이 보이는 바닷가에 나와 남편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끝내 남편은 오지 않고, 부인은 바닷가에서 죽어서 돌이 되어버립니다. 남편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바로 망부석 전설입니다. 예화가 길었습니다.
복음에 예수님께서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종들에게 ‘집을 떠난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주인이 올 때를 깨어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복음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대림 시기는 회개와 보속을 통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요, 오시는 예수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 삶이 어떻게 변하고, 그 무엇이 달라지기에 그토록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독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빚어 만드신 분이요, 우리는 모두 진흙으로서 하느님의 작품이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의 말씀처럼, 곧 “하느님 당신 위해 우리를 내시었으니, 당신 나라에 가기 까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 없나이다.” 라는 말씀처럼, 하느님 안에 우리의 참된 행복, 기쁨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잘 맞이하기 위해 늘 깨어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사실은...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역시 우리가 당신께로 나아가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늘 마음을 돌이켜, 삶의 전화를 이루어 당신께로 되돌아오기를...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분이십니다.
늘 떠나간 탕자를 마을 어귀에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의 회개를 더 기뻐하시는 마음으로... 그렇게 당신을 떠나 양한마리를 찾아 길을 떠나시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그만 방황하고, 그만 고민하고, 그만 마음아파하며 돌아오기를 애타게 촉구하시며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바로 하느님 안에 참된 행복과 평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주기 위해... 마음에 받아 안고 늘 간직하며 살아가라고 말씀해 주시기 위해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당신께 돌아오기를 촉구하시는 하느님을 더 이상 망부석이 되지 않게 해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아버지께 돌아가야 할 그 탕자가 바로 자신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 회개해야할 죄인 하나가... 길을 잃고 헤매는 그 양 한 마리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주님을 기다림에 있어 스스로 망부석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자, 내가 왔다. 네가 그토록 애타게 찾고 불렀던 내가 너에게 왔다.’ 라고 말씀하시는 그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그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 하느님을 느끼지 못한 체, 계속 주님의 오심만을 기다리는 망부석인양 살아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말씀을 통해서, 성체를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한 분을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 만큼 마음이 무디어지고 돌처럼 변해버렸다고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망부석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더 이상 주님을 망부석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 또한 망부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은총의 대림시기에 이루어야 할 것은... 바로 외적인 재물, 봉헌이 아니라 내적인 회개입니다.
그 찢어지고 쓰라린... 안쓰러워하는 마음입니다. 아멘.
대림(待臨)의 구체적인 방법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우리 모두는 이제 막 시작한 대림시기에로 초대를 받았다. 대림시기는 ‘예수님의 성탄과 인자의 재림’, 이 두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묵상하는 기간이라고 했다. 이 초대는 그래서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4주간의 준비를 통해 이미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나의 “주님”으로 알아 모시는 구유에로의 초대이다. 즉, 나를 위한 하느님의 성탄파티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자의 영광스러운 재림과 그분께서 주최하는 공심판에로의 초대이다. 이것도 말하자면, 나와 온 세상이 인자의 재림과 심판파티에 초대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탄과 대림의 초대에 응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 앞에 의롭게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준비하고 기도하는 것”(마태 24,44; 마르 13,37; 루가 21,36)이다.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은 이미 사람이 되어 오셨던 주님이시며, 세상의 완성을 위해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이시며, 또한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 앞에서 깨어 기도한다면 대림의 초대에 잘 응답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루 24시간 잠도 없이 깨어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내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 방법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어 기도하기도 하고, 미사참례도 하며, 내 할 일도 하고, 하기 싫고 시키는 일을 해야 하기도 하며, 멍하니 있기도 하고, 걱정하며, 다투고, 화내고, 싸우며, 기뻐하고, 아파하며, 슬퍼하면서 하루의 마지막에 가서는 반성하면서, 아니면 지쳐서 생각 없이 잠자리에 든다. 이 모든 일 가운데 하느님을 현존시킨다는 것, 이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우리 삶의 한가운데 현존시킨다는 것’은 방법상 그 출발점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백인대장이 중풍병을 앓고 있는 하인을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8절) 하고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아무도 주님의 현존을 내 안에 받아들일 자격이 없다. 그럼으로 불구하고 우리는 미사성제에서 주님의 거룩한 몸을 받아 모시기 전에 백인대장과 같은 말로 고백한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주님의 한 말씀으로 내가 깨끗하여 질 수 있다는 믿음, 그럼으로써 감히 주님을 모실 수 있겠다는 믿음이 바로 그 방법이다. 이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깡그리 모아 하느님의 현존 안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 옳은 방법일 것이다. 이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이 입증하고 있다. 예수님의 기적이 바로 하느님나라가 이 땅에 와 있다는 표징이며, 우리가 또한 이미 와 있는 하느님나라의 땅에서 숨쉬며 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내가 가서 그의 병을 고쳐주마(마태 8,5-13)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의 병을 고쳐주마."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 대장의 청을 들으시고 "내가 가서 그의 병을 고쳐주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출애급의 하느님을 떠오르게 한다. 하느님이 모세를 부르시면서 "나는 내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 가서 그들을 에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하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 한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 온다."(출애 3,7-9)
인간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인간 역사 안에 들어오시는 하느님, 나의 고통과 병을 치유시켜 주시기 위해 우리 집에 오시는 하느님, 나의 삶 속에 깊이 개입하시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신다."내가 가서 그의 병을 고쳐 주마."
오늘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가? 어떻게 나의 병을 또는 우리 집의 우환을 없애주시는가? 백인 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신다. 예수님이 나의 병을 그리고 우리 집의 우환을 없애주시기 위해 굳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오실 필요가 없다.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시켜 주신 것도 당신의 몸으로가 아니라 "가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라고 그저 한 말씀으로 고쳐주셨다. 오늘 복음은 곧 나에게 오시는 예수님이시다. 우리 집의 우환을 없애주시러 오시는 예수님은 말씀이시다. 말씀은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치유받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도 감탄하신 말씀에 대한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이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의 병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말씀으로 오시는 주님을 맞는 자세이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놀라운 일을 하시는 것은 말씀에 대한 전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서 또 백인대장처럼 지극히 겸손한 사람 안에서 역사 하신다. 말씀은 시공간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시고 언제 어디에서든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진 이에게 놀라운 능력으로 다가 오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그의 병을 고쳐 주마."라고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갖고 있는 이를 찾으신다. 오늘 말씀이 바로 나를 위해서 하신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자.
<예수님의 자비>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오늘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쳐 주시는 이야기인데, 그 병든 종은 이야기 속에서 그냥 무대 배경 같은 존재이고, 진짜 주인공은 예수님과 백인대장입니다.
(그 종이 예수님을 알았는지, 예수님을 믿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고, 또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백인대장의 믿음입니다.)
그 백인대장은 이방인이고,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유대교 회당도 지어 준 사람입니다(루카 7,5).
그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실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마태 8,8) 일차적으로는 그의 겸손을 나타내지만,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것과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가면 부정을 탄다는 유대인들의 율법을 알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유대교의 율법과 관습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면서도 유대인들이 믿는 야훼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던 것 같고, 예수님에 관한 소문만 듣고서도(루카 7,3) 예수님을 믿었던 것 같습니다.
(소문만 듣고서도 믿었다는 말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인데도 이미 믿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꼭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 보아야만 신앙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빌라도나 헤로데 같은 사람들은 바로 앞에서 예수님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는다면 누구든지 언젠가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게 될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라고 칭찬하실 정도로 특별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직접 만나지 않고 멀리서 말씀만 하셔도, 또 어떤 예식 같은 것을 행하지 않아도 병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구약성경 열왕기에 나오는 '나아만'의 믿음과 비교됩니다.
나아만이 병을 고쳐 달라고 청했을 때, 엘리사 예언자는 그를 만나 주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서 요르단 강에 가서 몸을 씻으라는 말만 전하게 했습니다(2열왕 5,10).
그러자 나아만은 화를 내면서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병을 고쳐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합니다(2열왕 5,11).
그러면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2열왕 5,12)
(그랬는데 그의 부하들이 설득해서 엘리사 예언자가 하라는 대로 했고, 그래서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에 대해서 감탄하시면서 그가 청한 대로 멀리서 그냥 한마디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의 집으로 가는 것을 사양하지 마라. 집에 가서 직접 병자를 보고 만지면서 고쳐 주겠다." 라고 하시면서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한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백인대장의 믿음이 흔들리는 일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집에 가시지 않은 것은 그가 오시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믿음에 대한 응답, 또는 배려 차원에서 가시지 않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 응답과 배려도 자비입니다.
예수님께서 꼭 병자 앞에 직접 나타나셔야만 따뜻한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아주 대조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안수를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가락을 그 장애자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고, 그 다음에는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에, 그에게 "에파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7,32-34).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다른 이야기들과는 달리 아주 복잡합니다.
이 복잡한 예식은 믿음이 없는 그 장애자를 위한 배려라고 해석됩니다.
믿음도 없고 듣지도 못하기 때문에 우선 시각적인 행위를 보여주고, 그의 귀가 열린 다음에는 말씀으로 치유를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병자마다 다른 방식을 사용하신 것도 예수님의 자비입니다.
(요한복음 5장,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믿지도 않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병자를 딱하게 여기셔서 믿음과 상관없이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처럼 자비라는 것은 원래 조건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믿어야 예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상관없이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자비를 어떤 방식으로 베풀어 주실 것인지는 예수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쪽에서 어떤 특정한 '방식'을 예수님께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직접 집으로 오셔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든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말씀만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시든지 간에 그것은 예수님께서 정하실 일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손엘디
하루, 한 달, 한 해를 위해서 목표가 있었고 날마다 더 나아지기 위해 더 발전하기 위해 …. 이것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뭔가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그런 일들이 주님 앞에서는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영화 <교황 바오로 6세 - 폭풍 속의 교황>을 보고 바오로 6세 교황님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완성하셨음을 배우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공의회를 통해 새롭게 변화된 지금의 교회는 또 다른 세상의 도전과 싸우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전쟁이 터져 군인들이 밀려들어 온다 해도 지금처럼 미사를 드릴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순간에 주어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그 힘든 세상의 도전 앞에서 교황님에게는 지금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편지를 쓰는 일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었고 그 편지가 무용지물이 된 것처럼 보였지만 의외의 한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 또 다른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말씀이 하느님에게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교황님이 극도의 혼란과 어지러웠던 그 순간에 미사를 드리시고, 한 사람을 위해 편지를 쓸 수 있었음도 주님께 대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