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흐린 가을비
- 류근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
흐린 비 온다
자주 먼 별을 찾아 떠돌던
내 노래 세상에 없다
한때 잘못 든 길이 있었을 뿐
붉은 간판 아래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같은 추억이
지나간다 이마를 가린 나무들
몸매를 다 드러내며 젖고
늙은 여인은 술병을 내려놓는다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슬픔의 자세를 보여주는
나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신다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
가을이 너무 긴 나라
여기선 꽃 피는 일조차 고단하고
저물어 눕고 싶을 땐 꼭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잎사귀를 허물면서 나는
오래전에 죽은 별자리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흐린 비 온다
젖은 불빛들이 길을 나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내 노래 술집 쪽으로 가고
추억 쪽에서만 비로소 따뜻해지는
내 슬픈 잎사귀 또 비에 젖는다
―시집『상처적 체질』(문학과지성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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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슬픔에 무슨 일류, 이류, 삼류가 있을까마는
누구나 공통되게 느끼는 슬픔, 함부로 눈이 마주치면 삼류라는 시인의 허무가 아픕니다
고등학교 입학할 무렵, 방 모 소설가의 삼류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공연히 슬프고 공연히 외롭고 공연히 여자(?)가 그립던 철부지들이
낄낄대며 호박꽃 피는 밤을 돌려읽었지요
고개 숙이고 술마시기를 내기하던 철없음도 인제 가을비 속에서 슬퍼집니다
어제는 온종일 내린 가을비가 겨우 5mm안팎-흐린 비였습니다
저녁 시간에 띄어쓰기를 기초한 원고지쓰기 강좌에서 실습하시는 분들을 보면서
오래전에 죽은 별자리들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