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은 집에서 지척 거리에 있다. 광교산에서 뻗어내린 산줄기가 비로봉 형제봉을 거쳐 버들치에서 주저앉으려다가 다시 일어나 매봉을 이루고 동남쪽으로 내달리다 멈춘 곳, 오늘 산행은 신분당선 상현역 부근 조광조 선생 묘소 옆 들머리에서 시작한다.
정암 묘역은 광교산 남쪽 끝자락에 산뜻하게 조성되어 있는데 앞과 옆면은 온통 아파트 숲이 병풍처럼 들어서서 시야가 가로막혀 답답한 느낌이다.
야은 길재에서 비롯된 사림학통은 그의 고향 선산에서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그리고 부친 임지 희천에서 무오사화로 유배중이던 김굉필로부터 정암에게 이어지고 퇴계와 이이로 계승되어 유림 정신의 꽃으로 만개했다.
정암이 영면하고 있는 자리 바로 앞 도로는 절세의 충신 정몽주를 기려 붙인 '포은대로'다. 옛 43번 국도의 광주시 역동 사거리에서 용인시 상현동 광교상현 나들목 구간을 '포은대로'로 명명한 것은 용인시 능원리에 그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정암의 집터가 있었다는 평택에 정암로, 유배지였던 능주에 정암길이 있는 것을 보면, 도로명 부여 변경 폐지권을 가진 시 도 지자체들이 아전인수격으로 쌩뚱맞은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얕은 응봉과 매봉약수터를 지나는 능선 길에는 유난히 각시붓꽃이 많이 눈에 띈다. 도학정치를 추구하다 정적들의 모함으로 유배되고 사사된 개혁가, 오백년 전에 꺽여버린 그의 꿈은 겨우내 얼었다가 풀린 땅에서 꽃을 피워낸 각시붓꽃 처럼 현세에 살아 다시 발아할 수 있을까?
유배지 능주까지 스승을 따라갔다가 그의 죽음을 목도했던 죽정 장잠 할아버지와 새로운 조선을 꿈꾸던 사림들의 좌절은 또한 가히 가늠할 수 없다. 약수터에 들러 방울방울 감질나게 찔끔거리며 떨어지는 약수를 받아서 한 모금 마셨다.
* 장잠 할아버님은 황상파 분파조입니다.
용인 성복동에서 광교산 골을 타고 수원 광교로 넘어가는 버들치 고개에서는 인근에 있는 한 교회의 신우들이 산객들에게 캔음료와 사탕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버들치에서 형제봉으로 가는 능선길 옆으로 소나무 상수리나무 굴참나무 진달래 철쭉 등 숲 식구들은 신록의 향연을 벌였고 날씨도 이들의 잔치에 화답이라도 하는듯 나무랄데 없이 산뜻하다.
침엽 활엽 수종별 나무군락들이 능선을 따라 펼쳐놓은 꿈틀대는 초록과 청색 톤 자연의 그림은 인상주의 고흐의 화풍보다 더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중간에 나타나는 천년약수터는 말끔하게 단장된 모습과는 달리 정작에 세균이 허용치의 34배에 달해 음용으로 '부적합'하다고 경기도 보건환경연구원장 명의 공고문이 고하고 있다.
해발 442미터 형제봉 가는 길 바로 밑을 가로막아 선 10여 미터 높이 암벽을 밧줄을 타고 올랐다. 바위 봉우리 위에 자리한 형제봉 표지석에 인사하고 비로봉으로 향하는 계단길을 내려간다. 형제봉과 비로봉은 긴 능선을 사이에 두고 형과 아우처럼 광교산 주 능선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비로봉엔 정자가 자리하고 있어 그 위에 올라서면 사방을 넓게 조망할 수 있다.
산행 시작 세 시간여 만에 해발 582미터 광교산 정상에 도착했다. '가르침을 주는 산', 고려 왕건이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고 명명했다는 광교산(光敎山)은 지척 거리에 있지만 자주 찾지 못해 늘 마음으로 빚진 느낌이었다.
백운산은 광교산과 능선을 끼고 있는 이웃인데 그 서남쪽 줄기 끝자락에 지금은 폐교된 모교 캠퍼스가 안겨있다. "광교산 뜨는 해는 우리의 상징, 광교산 소나무 숲 우리의 의지~". 잠시 입 언저리에서 나즉이 맴돌던 교가는 바람에 실려 멀리 흩어졌다.
백운산 북서쪽에 자리를 튼 모락산 정상을 거쳐 의왕 오전동 쪽으로 날머리를 잡았다. 모락산으로 가는 백운산 자락 오른편 백운호수 주변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는 산의 푸름과는 대조를 이루며 민낯을 드러내고 있다. 주민들의 휴식공간이 되고 있는 산에 둘러쌓인 호수주변 공원에 대형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게 의아하다.
특정 소수에게 특혜를 준다는 것은 역으로 나머지 대다수의 이익을 해치거나 희생시킨다는 의미다. 특히 경제분야에서 소수에게 특혜를 주는 행정이나 제도는 원칙적으로 진입과 탈출이 보장되고 자유경쟁을 추구하는 시장경제채제와 자유민주주의 이념과도 상치된다.
백운호수와 오메기 마을을 잇는 고갯길로 내려가는 백운산 좌측 산자락에 포근한 햇살을 받으며 안겨있는 공원묘원은 정비사업으로 여기저기 비석이 드러누웠고 이곳저곳 패여 산행객의 눈은 어지럽고 망자들도 잠을 설치지 싶다.
백운과 모락을 경계짓는 포장 길을 넘어 모락산으로 들어서면 조선시대 10대 도로 중 가장 긴 도보길로 남태령에서 해남 땅끝 마을을 잇던 옛 삼남길을 만난다. 통행로의 기능을 잃은 좁고 희미한 옛 산길이 의엿이 자기 이름을 또렷이 지키고 있으니 얼마나 대견한가. 작년 삼남길 종주를 했던 두 친구가 주고받는 무용담은 무궁하다.
두 세번 올랐지만 방향을 달리해서 오르는 모락산은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르는 방향과 구간에 따라 완만한 능선길 가파른 경사길 흙길 암반길 등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해발 백여미터 고개에서 해발 385미터 모락산으로 오르는 길은 녹록치 않다. 경사길이 한참만에 끝나면 나오는 절터 약수터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빈 보온병에 약수를 한 통씩 담았다. 숨을 고르고 정상으로 향해 오르다가 6.25 전적지 능선을 지나면 온통 바위로 덮인 모락산 정상이 나온다.
오전동 방향 하산길은 급경사 암반길로 멀리 수리산까지 툭 트인 전망과 함께 조개바위 손가락 바위 등 특이한 볼거리도 선사한다. 왼편 모락산 능선 아래 자리잡은 성나자로 마을은 캐롤 주교가 1951년에 건립한 곳으로 이를 계기로 천주교회가 본격적인 나환자 구호사업을 펼치게 된 성소(聖所)다.
의왕초교와 모락중 사이로 모락산에서 난 계단길은 모락로와 만난다. 바로 옆 도로변 약수터에는 주민들이 물통에 약수를 받고 있다. 부근 담장에는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앞두고 사진과 공약 등이 담긴 대통령 후보들의 프로필이 길게 내 걸렸다. 후보마다 정치 외교 경제 복지 교육 군사 등 분야별로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오늘날 민주주의 하에서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당리당략에 휘둘리는 일이 허다한데, 전제군주 왕조시대에 천인무간(天人無間)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실현코자했던 정암의 이상은 현세의 눈으로 봐도 높고도 높아 보이기만 하다.
'잔인한 달'이라고 시인이 노래했던 사월, 그 사월 마지막 주말 한낮이 지나가고 있고 바야흐로 꽃의 여왕 장미가 피어날 오월이 눈앞에 있다. 2017-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