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위기의 시대, 시는 추락하고 있는가?
이 승 하
오늘날 신춘문예와 각종 문예지 신인상 당선작의 공통적인 특징은 난해성, 장형화, 산문시풍이다. 심사에 참여해보면 당연히, 이런 시를 보게 되지 전통서정시는 찾아볼 수 없다. 실험성이 짙은 시라고 해도 심사자(혹은 독자)와 일말의 소통이 이뤄져야 할 텐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신인의 투고작도 기성시인의 발표작도 도무지 감동을 주지 않는다. 또 어떤 시는 낡은 서정시의 문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길이에 상관없이 지루함만을 줄 뿐이다. 필자는 대학 문예창작학과의 시 창작 교수이기에 학생들의 시창작 지도를 하고 있는데 선생도 이해할 수 없는 시를 내거나 시라고 볼 수 없는 산문을 내고 있다. 당선작들과 기성시인의 시가 그러니 학생들의 시 또한 난해하고, 길고, 운문이 아니라 산문이다. 여러 대학의 문예창작학과가 존망의 기로에 봉착해 있고, 문학의 제 장르 중에서도 ‘시’는 대다수 학생들에게서 창작열을 찾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조차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시를 쓰고 있는 학생들조차도 대체로 독백 같은 시를 쓰고 있어 자신의 의도를 독자에게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시가 어느새 문학의 제 장르에서 밀려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문예창작학과가 영락하고 있는 것이나 시가 쇠퇴하고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서 시 창작 관련 과목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으로서 논의의 장을 마련해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2016년 현재 전국 각 대학에 개설되어 있는 문예창작학과들은 대학 구조조정의 회오리바람 한복판에 들어가 있다. 학과가 폐지되는 대학이 있는가 하면 국문학과와 통폐합되는 경우도 있다. 학과명이 ‘문화콘텐츠’니 ‘스토리텔링’으로 바뀌기도 한다. 문예창작학과 중 역사가 가장 오랜 중앙대학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어서 2011년부터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가 미디어스토리텔링학과로 학과명이 바뀌었고, 2015년부터 일반대학원 문예창작학과가 문학예술콘텐츠학과로 학과명이 바뀌어 신입생을 모집한다. 시전공ㆍ소설전공ㆍ비평전공이 이미지콘텐츠전공ㆍ스토리텔링콘텐츠전공, 문예이론전공으로 바뀌었다. 강좌의 내용은 비슷하지만 시대의 변화에 맞춰 이렇게 명칭이 바뀐 것이다. 문예창작학과에 영어 강좌가 도입된 것도 2005년부터이므로 11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번역 실습’과 ‘번역 워크숍’ 같은 과목을 개설해 영어교육을 시키고 있다. 이와 함께 두드러진 현상은 시 관련 과목의 축소다. 소설은 지망생이 줄어들지 않음으로써 명맥이 유지되고 있지만 시는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지망생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소설이 세 반으로 분반수업을 할 때 시는 한 반으로 꾸려가고 있으며, 창과 당시부터 개설되어 있던 ‘시론’ 같은 과목이 폐강되고 있다. 시를 공부하려는 학생이 줄어들고 있는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를 공부하면서도 시인을 직업으로 삼고자 한 학생은 예전에도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시인’을 직업으로 삼기란 애당초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한다. 시는 모든 장르의 글을 쓰는 데 기본이 되므로 시를 써본 경험이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데도 중요하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학생들은 이를 잘 수긍하지 않는다. 문학 장르를 전반적으로 공부하려고 문예창작학과에 들어온 학생일지라도 시를 공부하는 것, 시를 쓰는 것에 대해서는 어려움과 두려움을 느끼며, 피하는 경향이 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의 경우 1, 2학년 때는 시와 소설 창작수업을 블록강의로 무조건 듣게 하지만 3학년이 되면 전공을 찾아가게 하는데 이때 시 전공자는 1/7 미만으로, 4학년이 되면 1/10 미만으로 줄어들게 된다. 시가 어느새 인기도 시세도 없는 예술로, 가장 시시한 학문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시집의 발행 종수는 ‘시의 전성기’라고 일컬어지는 1980년대에 비해 많이 늘었지만 시집의 판매 부수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시집을 쇄를 거듭하여 찍는 경우는 대외적으로 유명한 시인일지라도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개인의 창작시집은 대체로 초판 발행에서 멈춰버린다. 인터넷 매체가 발달함으로써 시를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통해 읽을 수 있게는 되었지만 전반적인 출판계의 불황, 순수문학의 퇴보, 시집 구매자들의 감소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다. 이러한 때에 시 창작 교육이 예전의 시 창작 교육을 그대로 답습하면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교육일선에 서 있는 교육자이자 시인으로서 사양일로에 있는 시를 지키고 보급하고 교육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지, 그 방법을 설명하고 공유하려는 것이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다. 우선 시인이 될 꿈이 있든 없든 습작생으로서 시를 쓰는 이들이 어떤 병폐에 물들어 있는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타개책을 강구해보고자 한다.
2. 습작기 창작시의 문제점
1) 일상은 있되 주제가 없다
지금 20대 습작생들은 대체로 비슷한 성장 과정을 거쳐 대학생이 되고, 입학한 후에도 비슷한 생활 패턴을 보인다. 그래서 성장 과정에서 시의 소재와 주제를 독특하게 가져오기란 쉽지 않다. 예전에는 이혼한 부모의 이야기, 사별한 조부모의 이야기를 슬쩍 비틀어 시로 쓰면 색다른 작품이 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대단히 진부한 소재, 식상한 주제가 된다. 이혼이나 사별은 이미 범상한 소재여서, 문학은 특별한 것이라는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습작생 대다수가 자신의 생활 주변에서 시의 소재를 가져오는데, 그런 작품에는 주제도 특별한 발상도 없다. 시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평범한 일상 스케치라 건져낼 만한 진국, 즉 ‘내용’이 없는 것이다.
흰 빛이 가득한 방, 접시가 같은 방향으로 포개져 있고 바람 부는 방에서 항아리에 물을 담는다 찻잔은 찻잔만큼 항아리는 항아리만큼. 항아리의 배가 나온 만큼 그녀도 배가 나왔겠지 물이 가득 담긴 배 최근에는 책장을 하나 버렸다 먼지 가득한 책장을 버리는 데는 삼년이 걸렸다 그러자 그녀의 배는 푸시식 소리를 내며 꺼져 버렸다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누군가 주워 가지 않았을까 그것은 길이 들지 않았으므로 다음 사람은 접시를 바람에 날려 보낼 것이다 마른 접시가 돌아오면 그녀의 배도 다시 차오를 것이다 ―「집을 정돈하는 방법 2」 전문
최근에 낡은 책장을 버렸을지도 모를 한 대학생의 작품이다. 그런데 이 시를 통해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다. 접시를 바람에 날려 보낸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배가 나온다는 것은 비만인가, 임신인가? 물이 가득 담긴 배라는 것은 복수(復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시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쓴 것일까? 이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결국 시를 이해하는 일을 포기하고 만다. 요즈음 대학생들은 이와 같이, 시에 대한 고민 없이 노트나 수첩에다가 생각나는 대로 썼을 법한 내용의 시를 쓰고 있다. 일상의 한 단면을 무심코 일별하는 식의 시 쓰기인 것이다. 이때의 일상이 시 소재로 부적절하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이라는 주름에 감춰진 의미를 캐내려는 열정과 의욕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무심코 올려본 밤하늘이 오늘따라 처연하고 씁쓸하다 툭 하고 내뱉어도 돌아오는 대답 하나 없는 그런, 그저 그런 나날들의 연속이다 열병을 앓아도 술이 취해 돌아와도 싸늘한 공기 속에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잠든다 침을 삼켜도 물을 마셔도 밥을 꾸역꾸역 처넣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이지 오늘은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대고 싶다. ―「체증」 전문
이 시 역시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 시로서의 형상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로 형상화할 수 있는 일상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답답한 일상사를 토로하는 데 그치고 있고, 등장인물의 소소한 일상사를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처연하고 씁쓸하다는 형용사와, 힘껏 소리를 질러대고 싶은 감정을 토로하는 것으로는 시가 될 수 없다. 감정을 절제한 채 시적 화자의 호흡과 맥박을 진지하게 짚어볼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요즈음 습작생들은 소재는 가까운 곳에서 가져오지만 주제는 뭐라고 말하기 어려운 작품들을 쓰고 있다.
2) 산문시 쓰기가 유행이다
대부분의 시인 지망생들은 시가 운문이라는 의식을 하지 않고 쓰고 있다. 산문시 쓰기가 유행임은 고등학생들이 백일장에 와서 쓰는 시에서도 나타난다. 중앙대고교백일장에서 학생들이 써낸 작품 중에 산문시가 거의 절반에 이르러 그 다음해부터는 산문시 형태로는 쓰지 말라고 백일장 시제를 내줄 때 덧붙여 공지하기도 했다. 산문시를 쓰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예 산문의 일부분을 잘라낸 것 같은 시를 써내는 경우도 왕왕 있다.
수리산 정상에 오르면 아득하게 높아 보이던 빌딩도 손바닥 손금 보듯 잘아지고 고밀도(高密度)를 자랑하던 아파트 단지는 다만 레고 블록처럼 보인다 구름 도는 너럭바위 두 개에는 등산화 벗고 모자 쓴 남자들이 앉아 부르튼 발 주무른다 지상의 버덩에 묻어 있던 발은 오늘에야 산의 기운을 쐬고 맑아진다 누군가 아이스박스를 열고 누군가는 배낭을 열어 바리바리 싸온 술과 고기와 과일을 꺼내면 이끼 낀 바위는 태곳적 올림포스에서 차려진 적 있는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곁들인 술상이 된다 바위에 빙 둘러앉은 사람들은 제우스, 디오니소스, 아폴론, 포세이돈 등등 하나의 신을 선택하고 양은으로 만든 술잔을 돌린다 술독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이면 다 큰 남자들의 말투는 북녘 혁명가의 연설처럼 웅변조를 띠거나 아니면 롯드로 만 머리칼처럼 구불구불해진다 그들은 술김에 서로 애인처럼 껴안기도 하고 레고처럼, 손금처럼 보이는 저 아래 지상에 탈탈탈 오줌도 갈긴다 그렇게 신과 투사와 아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다 보면 해는 어느새 아래로 뚜욱 떨어지고, 버덩으로 갈 시간이다. ―「수리산」 전문
이 시를 쓴 대학원학생은 어느 날 수리산에 올라가본 모양이다. 사내들이 그 산에 올라와서 술추렴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그 광경을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 서술하였다. 이 작품은 시가 설명이 아니고 묘사이며, 서술이 아니고 서정임을 모르는 상태에서 쓴 명백한 산문이다. 아파트 단지가 레고 블록 같고 사람이 레고 같다는 표현에는 직유법을 동원했기에 시로 접근하려는 노력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자신의 목격담을 들려준 범상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세계로 설정한 수리산 정상과, 속세로 설정한 버덩의 대비가 전혀 시적인 성취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아래 시도 대학원생이 쓴 것이다. 소통의 공간 사통팔달 예부터 사람들 모이기 딱 좋은 곳 사람들 많은 거야 당연하지
어릴 적 엄마 손에 이끌려 광화문 광장에 첫발 디딘 어느 날 “공부 열심히 하면 우리 딸도 잘 살 거야.” 엄마는 미소 짓는 세종대왕을 우러러 보았지, 딸은 바로 옆 대형서점에서 엄마가 방금 사준 펜글씨교본을 품에 안고 있었어, 그 다음엔 전과를, 참고서를, 새 학년 앞둔 겨울방학이면 늘 그랬지
대학 졸업 앞두고 선배에게 이끌려 광화문 뒷골목에 들어선 겨울날 “신문쟁이들 동네야. 나도 신문쟁이잖아.” 신문쟁이 선배는 술집에 들어서며 다 피운 담배를 구둣발로 짓이겨 자기 구역을 표시했지, 딸은 취업 걱정에 작은 키가 더 쪼그라들었어, 그 다음엔 하이힐로 훌쩍 자라나 미래를 보장하는 보험 팔러 광화문 빌딩숲을 누볐지
세월이 흘러 딸도 엄마가 되었지만 광화문 광장에 누워 버렸어 아이 잃은 부모들과 때론 비명을 때론 혼잣말을 뱉고 있어, 심장에 빨려 들어간 눈은 푹 패고 속은 텅 비어 온몸이 쪼그라들었지, 세종대왕은 여전히 미소 짓고, 신문쟁이들은 여전히 뒷골목에 있고, 역사 깊은 우체국 실시간 소통 보장하는 통신사도 코앞에 있어
사람들 많은 거야 당연하지, 여전히, 그럴 수밖에 없지 소통의 공간 사통팔달 예부터 사람들 모이기 딱 좋은 곳이니까 ―「2014 광화문연가」 전문
이 시는 행과 연이 나뉘어 있기는 하지만 시라기보다는 서사문이다. 시 중에는 백석이나 최두석의 시처럼 서사성을 강조한 시가 있어 ‘이야기시’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이런 시는 이야기시가 아니라 그냥 이야기다. 운문으로 형상화한 사유, 시다운 비유나 은유․상징․운율이 전혀 안 보이므로 서사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 쓰기 숙제를 내주면 이와 같이 짧은 산문을 제출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3) 시를 길게 쓰는 것이 유행이다
시를 길게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기성시인들의 시를 답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인다. 산문 형식으로 시를 길게 쓰면 시 한 편을 읽는 데도 제법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그렇게 구구절절 길게 쓴 시가 소통조차 안 되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소통도 안 되는 긴 시를 오랜 시간 끌어안는 고통을 독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 시인들 중 조연호의 ?농경시?(2010)는 시 1편이 시집 1권인 극단적인 예지만, 김경주의 ?기담?(2008)에는 10쪽, 15쪽, 22쪽에 달하는 시가 나온다. 장석원의 시집 ?아나키스트?(2005)에는 4쪽 이상의 시가 11편에 달하고 14쪽이나 이어지는 시도 있다. 같은 시인의 ?태양의 연대기?(2008)에는 40쪽에 달하는 시가 나온다.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2005)에는 4쪽이 넘는 시가 12편에 달하고 9쪽짜리 시, 10쪽짜리 시가 나온다. 박성준의 ?몰아 쓴 일기?(2012)에도 10쪽, 12쪽에 이르는 시가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난해하여 읽어나가기가 어려운데 10쪽 이상이나 되는 시를 집중력을 갖고 끝까지 읽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의 시가 긴 것도 문제지만, 학생들이 시단의 유행에 편승해 시를 길게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당신이라는 거대한 제국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어디에나 없고 누구에게나 있는 거기에서부터 수수께끼는 시작된다 흙을 빚은 당신은 세상의 문을 열어젖힌다 벌거벗은 채 바위에 걸터앉아 턱을 괸 채 깊은 한숨을 쉰다 도서관 앞에서 바닥을 골똘히 응시하고 있다 극성스러운 진눈깨비들, 점점 사나워지는 눈의 발톱들이 당신의 근육질 어깨에 내려앉는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한 새처럼 당신은 다시 태어나기를 원한다 당신은 꿈꾼다, 고로 존재한다 도서관 앞에서 축제를 벌인다 랭보와 춤을 추기도 하고 버지니아 울프와 와인을 마신다 우스꽝스런 얼굴로 잠자는 미녀의 팬티를 훔쳐보고 있다 가면을 씌우자 책 속의 주인공은 광대로 변한다 도서관 앞은 소란스럽다 최루탄의 신음소리로 호기심이 온몸을 뒤집어씌운다 나는 겁먹은 눈으로 폭력이라는 단어에 죽은 시늉을 한다 당신의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신기하게도 폭력 앞에 호기심마다 빛깔이 다르다 트로이 목마 속에서 일곱 난장이가 튀어나온다 수수께끼는 통통 살이 올라 호기심을 잠재우지 못한다 어디선가 분주한 발소리가 들린다 도서관을 오가는 사람들은 수수께끼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당신은 오랫동안 외롭게 앉아 있다 나는 당신의 쓸쓸한 어깨에 잠시 앉아 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듯 당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 뒤에 감춰진 그림자를 눈치 채자 부러진 시간을 흔든다 당신은 화석이 될 때까지 1인 시위를 한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 아니라는 듯 당신의 제국에 머물다가 날아간다 ―「생각하는 사람」 전문
이 시가 이렇게 길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풍부한 상상력과 섬세한 관찰력을 지니고 있지만 너무 길게 씀으로써 시라는 것으로부터 이탈한다. 시상도 좌충우돌하고 독자를 향한 발언도 횡설수설이다. 혼란이나 부조화, 무질서, 혹은 불협화음이 요즈음 대학생들이 쓰는 시의 중요 특징인데 이 시도 논리정연하지 않아 혼란스럽다. 현대시의 장형화 현상을 탓할 수는 없다. 현대인의 복잡한 일상과 복잡다기한 심리를 표현하려면 시는 의도와 달리 더 길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는 길이도 길지만 의미망이 잘 잡히지 않는다. “내 뒤에 감춰진 그림자를 눈치 채자 부러진 시간을 흔든다 당신은 화석이 될 때까지 1인 시위를 한다 나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현실이 아니라는 듯 당신의 제국에 머물다가 날아간다”는 마지막 부분,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보아도 의미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다.
4) 문장도 너무 길다
오늘날 습작생들이 쓰는 시는 시 자체가 길 뿐만 아니라 문장을 대체로 길게 쓰는 경향이 있다. 영어로 치면 중문과 복문을 아무렇지 않게 씀으로써 시 읽기를 지루하게 한다. 즉 운율감이나 리듬감을 살린 시를 쓰지 못하고 있다.
피비린내가 강바닥에 가라앉은 진흙을 먹고살지 도도한 물살이 역사가 되어 거슬러 오르고 지나간 물고기가 다시 알로 태어나는 곳 다시 태어나고 다시 태어나 물고기로만 살지 공습처럼 퍼붓는 비가 좋아 논을 쓰고 수직 낙하하는 먹구름들은 잠든 물고기들의 꿈속까지 가볍게 침입하지 비는 노를 젓는 뱃사공이 되어 물고기가 지나간 빛을 쫓아가 생선장수의 좌판에도 쌀국수장사의 젓가락에도 소년들의 자전거 바퀴에도 공안들의 제복에도 물고기가 가파르게 헤엄치는 중이야 시끄럽게 탁하게 목숨 걸고 죽음처럼 살아서 물결을 흔들며 폭풍우 속에서 붉은 깃발 형형하게 나부끼며 메콩델타는 물고기들이 춤추고 있어 ―「메콩델타」 전문
처음에는 단문으로 시가 진행되다가 중반부부터 장문으로 변하여 5행과 4행짜리 문장을 쓰고 있다. 대학생, 대학원생들의 습작품에서 긴 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다반사다. 산문으로 쳐도 아주 긴 문장을 시라고 써놓고 왜 이것이 시가 아닌지를 모르고 있다. 시를 읽으면서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면 그건 이미 시의 운율을 잃은 것이다.
연꽃잎이 하나둘씩 피어오르고 마침내 꿈속처럼 만발하였다 연꽃 뿌리는 깊숙한 흙탕물 속에서 토지의 자양분을 향유하고 수면에 솟아오른 꽃잎이 따뜻한 공기를 느꼈다
짝을 이루어 헤엄치던 붕어는 방울방울 거품을 내뱉고 새로이 태어난 연꽃을 스쳐 지나가는데 헤엄치던 수초가 물속을 가로질렀다 왁자지껄한 밤중의 연못 자유로운 붕어들이 큰 소리를 내며 즐거워하고 술 향기가 길 잃은 물고기의 모든 것을 이튿날 동이 틀 때까지 지켜주며 불고기 향기는 축제를 더욱 고조되게 만드는데 서서히 이곳은 취하였고 서서히 이곳은 또 다시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였다. ―「흑석에서의 첫째 날 밤」 전문
제2연이 한 개 문장, 제3연이 두 개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제3연의 “왁자지껄한 밤중의 연못”을 한 문장으로 보면 일곱 개의 행이 한 개 문장을 이루고 있다. 학생은 시라고 쓰고 있고 행과 연을 나누기도 하지만 복문으로 된 긴 문장을 써놓고 이것이 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외에도 조어(造語)의 사용, 비문의 구사, 소통불능의 난해성 등 기성시단 일부 시인들의 폐습이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져 학생들은 의미 전달이 좀처럼 되지 않는 시를 써 제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학생들은 숙제를 해야 하기에 시 쓰기를 할 뿐, 시집을 읽지도 않고 시 쓰기를 즐겨하지도 않는 것이다. 한국 시단의 침체도 문제지만, 대학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의 습작시도 이런 상태이기에 문제 제기를 해본다.
3. 시를 쓰려는 습작생들에게 필요한 것
1) 시의 효용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학생들의 습작시가 위와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면, 한 편의 시를 위해 학생들에게는 어떤 인식과 노력이 필요한가. 감동적인 시는 시 한 편 자체가 복음성가나 찬불가의 역할을 한다. 가슴속에서 늘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어 우리의 삶을 밝혀주고, 힘이 되어 준다. ‘시란 무엇인가?’란 질문이 던져질 때면 모방론적 관점ㆍ표현론적 관점ㆍ효용론적 관점ㆍ구조론적 관점 등 다양한 관점에서 논하게 되는데, 동양에서는 주로 효용론적 관점에서 시를 논하였다. 시라는 것을 사람에게 필요한 것으로 인식했기에 ?논어? 「陽貨篇」에서는 시를 두고 “可以群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라고 하였다. 필립 시드니가 “시는 가르치고 즐거움을 주려는 의도를 지닌 말하는 그림이다”라고 한 것이나, 매튜 아놀드가 “시는 유용하고 즐겁게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라고 한 것도 모두 효용론적 관점에서 말한 시의 정의들이다. 시가 우리의 삶에서 왜 필요한가, 왜 중요한가를 먼저 가르치지 않고 시 쓰기의 방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순서가 바뀐 것이다. ?論語? 「爲政篇」에 나오는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란 말은 ?詩經?의 시(고대민요) 300편을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그만큼 시의 사회적 효용 가치를 염두에 둔 시에 대한 이해는 ?禮記? 「經解篇」의 “其爲人也 溫厚敦厚 詩敎也”나 ?論語? 「八儒」 권3의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으로 이어진다. 요컨대 시는 “저만치 홀로 피어 있는” 산유화 같은 꽃이 아니라 인간의 정서와 갈망, 내면에 작용하는 정신의 정화(精華)요 영혼의 발화(發話)임을 학생들이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오늘날 인간의 거의 모든 행위는 경제관념으로서의 교환가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시를 쓰는 행위, 그리고 시를 감상하는 행위만은 효용가치에 근거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2) 전통과 용사(用事)와 독서
공자의 말에 따르면 시를 잘 쓰기 위해서는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300편의 시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들을 전부 암송하지는 못해도 의미를 새기며 공부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시인 지망생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시에 어떤 것이 있는지 잘 모른 채 시를 공부하거나 습작하고 있다. 300편의 시를 수십 차례 읽어 암기할 정도가 되어야 시라는 것의 형식과 특성을 체득할 수 있는데, 3편의 시도 암송하지 못하면서 시를 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시문학사에 대한 공부,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시인에 대한 공부, 연대별 대표 시인의 대표작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난 연대건 지금이건 좋은 시인의 대표 시집과 대표작에 대한 나름의 독서가 필요하다. 예컨대 우리 시의 커다란 흐름이 순수전통시의 기조를 띤다고 할 때, 김소월과 김영랑의 시집을 숙독하지 않고 시를 쓰고자 하는 것은 연목구어 같은 섣부른 행위다. 생명파 시인으로 일컬었던 서정주ㆍ유치환ㆍ오장환의 시를 모른 채 시를 쓴다는 것도 어불성설이요, 김기림과 백석의 차이, 김수영과 김춘수의 차이, 한용운과 임화의 차이를 모르고 시를 쓴다는 것도 연목구어 행위와 다를 바 없다. 주요 시인들의 주요 시집에 대한 폭넓은 독서 위에 시 쓰기가 행해져야 함은, 고려조 말의 문신 이인로가 말한 ‘용사’에도 그 뜻이 깃들어 있다. 창작자가 과거의 명문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독서밖에 없기 때문이다. 용사에 대해서는 조동일이 자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이인로는 산문에서든 시에서든 용사(用事)를 소중하게 여겼다. 용사란 과거 명문의 표현이나 관련 사실을 재활용하는 창작 방식이다. 용사를 통해서 문학의 고전적인 규범과 가치를 재현할 수 있고, 용사를 얼마나 능란하게 구사하는가는 글 쓰는 사람의 능력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척도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문학 수련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옛사람의 명문을 읽어서 자기 것으로 하는 데 있다고 했으며, 현실의 문제와 바로 만나는 경험을 그렇기 때문에 배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의 용사는 중국의 명문 명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가 하는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인식에 근거하고 있는데, 잘만 활용하면 시를 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인로가 용사를 적극 옹호하면서 매편의 시를 모화사상에 입각해 쓴 것은 아니다. 용사를 했을 경우 조어(造語)를 교묘하게 하여 ‘無斧鑿之痕’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용사는 짧은 시형 속에서 시의 뜻을 확산시키고 심화시키기 위한 한 방법으로, 용사의 대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암유(暗喩)의 수법으로 여겼다. 한편 이규보가 주장한 ‘신의(新意)’는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시 쓰기를 가리킨다. 이인로에 비해 36년이, 이규보에 비해 20년이 연하인 최자는 ?보한집?에서 두 선배 문인의 시작법의 차이를 두고 아래와 같이 말한다.
학사(學士) 미수(眉叟, 이인로)가 말하기를 “나는 문을 닫고 들어앉아 황정견(黃庭堅), 소식(蘇軾) 두 사람의 문집을 읽은 뒤에 말이 굳세고 운이 맑은 소리를 내게 되었으며 시 짓는 지혜를 얻었다”고 했다. 문순공(文順公, 이규보)이 말하기를 “나는 옛사람을 답습하지 않고 신의를 창출했다”고 했다.
오늘날에 와서 조현설은 최자가 한 이 말을 두고 “이인로는 옛사람의 문장과 문체를 갈고 닦아 자신의 말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상태를 지향했고, 이규보는 그런 답습을 부정하거나 혹은 답습을 넘어 생경하더라도 새로운 뜻을 표현하려 했다는 것이다”라고 부연 설명했다. 이와 같은 고려 말 시인 겸 학자들의 말을 종합해서 보면, 앞서 시를 썼던 시인들의 작품을 폭넓게 읽으면서 시를 마음과 몸으로 받아들여야만 시의 언어를 배울 수 있고 응용할 수 있지, 문학적 전통을 무시하고 시를 쓰겠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의 체험이란 일천할 수밖에 없는데, 그 일천한 체험을 메워주는 것이 독서체험이다. 책 가운데서도 시집을 많이 읽어야 이인로가 말한 ‘용사’도 가능할 것이다.
3) 전통과 실험이 다 중요하다
용사와 신의 중 어느 하나를 우위에 두는 시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좋은 글을 짓기 위해서는 新意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되는데, 新意를 나타내는 좋은 글을 짓기 위해서도 用事는 종종 필요한 일이며, 좋은 글을 짓는 데 用事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用事가 얼마나 精切하고 공교롭게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이지, 用事를 한다고 新意를 나타내지 못할 것은 아니기 때문에, 用事하는 것과 新意의 창출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고 하겠으며, 用事와 新意는 결코 상대적인 개념을 지닌 용어가 될 수 없다고 하겠다.
이 글의 핵심은 용사론을 편 이인로가 한 수 아래고 신의론을 편 이규보가 한 수 위라는 식의 평가는 잘못된 것이며, 크나큰 오해라는 것이다. 좋은 시를 짓는 데 용사와 신의는 모두 필요하며, 이 둘은 상호보완적인 기능을 하므로 어느 것을 우위에 둔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한때 판타지 소설이 크게 유행하였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해리포터? 시리즈 등은 황당무계한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만은 할 수 없는 의미를 갖는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신화나 설화에서 태동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판타지 장르의 태생은 곧 신화나 설화의 현대적 양상이기 때문이다. 전통에 기대지 않는 새로움이란 없다. 전통에 상상을 입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재창조한 것이 바로 위의 작품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예술 작품에서 완전한 창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술은 전통이라는 받침대 위에서 재창조되는 것이다. 전통에 상상의 무늬와 색깔을 입힐 때 새로움은 탄생한다. 시는 사실과 허구의 접점에 있으며, 체험과 상상력이 절묘하게 버무려진 밀가루 반죽 같은 것이다. 이 밀가루 반죽으로 빵을 만들거나 국수를 만들거나 자장면을 만들거나 그것은 만드는(글을 쓰는) 사람의 자유일 것이다. 즉, 체험과 상상력이 모두 중요하다. 체험이 전통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실험은 상상력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4) 독창적인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
일단 마음 내키는 대로 쓰되 상상력을 발휘하여 개성 있게 써보아야 한다. 시를 쓰기 위해 특별한 경험을 해야 하고, 그 경험만을 바탕으로 시를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자신의 부족한 체험을 얼마든지 메우고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 상상력이다. 에세이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은 역사는 기억에, 문학은 상상에, 철학은 이성에 직결된다고 말해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말한 적이 있다. 사실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추악하게, 더 진실되게, 때로는 더 거짓되게 만들어야 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상상은 공상이나 망상과는 다르다. 상상은 허구의 진실, 즉 문학적 진정성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황당무계한 공상과 혹세무민하는 망상과는 다르다. 16세기 영국의 시인 에드먼드 스펜서는 “상상력이란 것은 우리들이 전에 경험했던 것을 기억케 하며, 그것을 어떤 다른 환경에 적용하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상상력은 체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체험을 확장하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 P.B. 셸리는 “상상력이야말로 도덕적 선(善)의 훌륭한 방편”이란 말을 한 적이 있다. 비슷한 시대의 존 키츠도 “상상력이란 것은 죽어가는 열정을 되살리기 위하여 살[肉]을 잡아두는 불사의 신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체험은 현상과 실체를, 상상력은 꿈과 환상의 세계를 지향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두 사람은 오히려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상상력이란 쉽게 말해 조금 엉뚱한 생각인데, 조금 엉뚱한 생각이 모든 예술의 원천이 된다. 이규보는 ‘신의(新意)’라는 창작방법론을 주장하였다. 그가 신의를 주장하게 된 것은 시인들마다 독창적인 시세계를 구사해야 한다는 시관에 의한 것이었으며, 이것이 또한 최자가 이규보를 신의론자로 규정짓게 된 근거가 되었다. 전형대는 이규보의 신의론이 탈 모화(慕華)라는 시사적인 의미로도 높이 평가되어야 하며, 한국시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되어야 할 거라고 말했다. 신의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서구 모더니즘의 이입이며, 19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이다. 모더니즘의 이입 경위를 모르고서는 이상의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정지용이 모더니즘 시의 최초 창작자라는 사실, 김기림의 서구 이론 소개, 이상의 등장, 9인회의 활동, 서구의 모더니즘 역사 등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이상이라는 시인의 난해한 시편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상상력의 측면에서 한 경지에 이른 김춘수의 무의미 시론, 이승훈의 비대상 시론, 오규원의 날이미지 시론이 어떤 것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80년대 전반기, 이른바 ‘해체시’의 등장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일정한 역할을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탈정치성과 비역사성은 이성복ㆍ박남철ㆍ황지우와 이들의 후예인 장정일ㆍ김영승ㆍ유하ㆍ함민복ㆍ박상순 등에게서는 보이지 않으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은 패러디ㆍ패스티시ㆍ콜라주ㆍ몽타주 등 시 창작의 방법론 창출에만 약간의 기여를 했다고 본다. 5) 그 다음 단계에서 참고할 책들
창작자는 시가 현대사회에서도 효용성을 잃지 않았다는 자긍심을 갖고 있는가. 그런 뒤에는 시에 대한 애정을 갖고 이 땅의 문학사를 수놓은 많은 시인들의 시집을 숙독했는가. 그리고 작은 체험을 촉발시켜 멋진 상상력에 입각해 시를 마음껏 써보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런 과정에서 참고할 것이 시작법에 관한 책이다. 시작법부터 공부한다고 해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습작 중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만났을 때 조언을 구한다는 생각으로 이런 책들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학생들에게 시창작법을 가르친 경험을 살려 대학교수들이 쓴 시 창작을 위한 안내 책자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영국의 시인 테드 휴즈(1930~1998)의 ?시작법 Poetry in the Making?은 BBC 교육방송에서 글쓰기 교육 프로그램에 사용한 자신의 원고를 모은 책이다. 이 책은 각 장의 제목이 동물과 시, 바람과 기후, 사람들에 대한 글쓰기, 생각하는 법, 풍경에 대한 시 쓰기, 주변 인물에 관한 글쓰기, 환상 속의 생물에 대하여, 시와 경험 등으로서 다양한 소재의 시를 써볼 것을 권유하고 있다. 오톤 M. 리치오가 쓴 ?시 창작 입문?은 인간의 발육 과정을 시 쓰기에 빗대어 시에의 서약, 두뇌와 심장, 시의 골상학, 뼈와 근육, 신경계와 가운뎃귀, 시의 음성, 생명의 신호, 성숙의 문으로, 영양물 공급, 젖떼기 단계 등 10개 장으로 나누어 시 쓰기에 대한 자신감을 서서히 키워가는 식으로 책을 썼다. 국내에서는 박제천 시인이 ‘문학아카데미’라는 시 창작 사숙을 경영하면서 수강생들을 위한 교재를 개발했는데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1994), ?시를 어떻게 고칠 것인가?(1997), ?시를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1999)가 그것이다. 박제천은 어떤 시가 좋고 어떤 시가 안 좋은지를 말해주면서 퇴고의 중요성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대학에 재직하면서 구상은 ?현대시창작입문?(1988)을, 이형기는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1991)를, 박명용은 ?현대시창작법?(2003)을, 이승하는 ?이승하 교수의 시 쓰기 교실?(2004)을, 이지엽은 ?현대시 창작 강의?(2005)를, 김동수는 ?시적 발상과 창작?(2008)을 펴냈다. 가장 최근에는 박현수가 ?詩 창작을 위한 레시피?(2014)를 펴냈다. 모두 대학의 문예창작학과나 국문학과에 재직 중 학생들에게 시 창작을 가르치면서 터득한 본인의 현장 경험을 살려 쓴 책이다. 교재로 채택되어 그 학교의 학생들에게는 읽혔을 것이고, 습작기에 있는 시인 지망생들도 참고했을 법한 책이다. 이 밖에도 시인 오철수는 ?시 쓰기 워크숍?(1997) 4권을, 고려대 평생교육원 강사인 김순진은 ?효과적인 詩 창작법?(2013)을, 서울대 명예교수인 오세영은 ?시 쓰기의 발견?(2013)을, 시인 공광규는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2013)을 펴냈다. 평생교육원에 다니면서 뒤늦게 시 쓰기 공부를 하게 된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쓴 책이라 내용이 비교적 쉽고, 창작 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재미있게 쓴 특징이 있다. 문제점을 알고 있으면 개선책을 도출하기도 쉽다. 이 글의 논점은 창작 전공 대학생들의 시가 얼마나 완결성이 있는가, 혹은 완성도가 높은가에 있지 않다. 그들이 창작하는 시가 어떤 문제점을 갖고 있는지를 진단하는 데 있었다. 대학생들이 쓰는 시의 문제점으로는 일상만 나열할 뿐 주제가 없다는 점, 학생들이 기성 시인들의 산문시와 긴 시를 답습한다는 점, 문장이 지나치게 긴 점 등을 지적하였다. 한마디로 줄여 말한다면 지금 대학생들은 상당수가 운문이 아닌 산문을 쓰고 있다. 30대 이상 연배 습작생들의 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회고지정에 지나치게 사로잡혀 지금도 ?백조?나 ?폐허? 동인지의 작품을 방불케 하는 시를 쓰는 사람도 있고 미래파들의 시보다 더 미래적(?)으로 써야 시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소통이 안 되게 시를 쓰는 습작생도 있다.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는 시의 효용성을 숙지해야 한다는 것, 우리 시의 계보를 이루는 주요 시인과 작품을 숙독해야 한다는 것, 독특한 상상력으로 독창적인 시를 써야 한다는 것, 실험성은 전통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마지막으로 시창작법에 관한 이론서를 참고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였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만으로 창작시의 문제점이 개선되지는 않는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조금 더 구조적인 것으로서, 우리 사회 전반으로까지 시야를 확장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연구자의 의견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시도 하나의 상품이라는 사실 앞에서 시는 길을 잃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시의 효용성은 옛 사람들의 견해일 뿐, 시는 이미 교환가치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뼈아픈 인식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시 창작자들은 시의 생존을 위한 처방전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시가 부흥하는 날은, 시가 가장 시다울 때일 것이다. 학창 시절에 책상 앞 바람벽에 붙여 놓고 수시로 들여다보았던 시 한 편과, 친구와 연인에게 들려주었던 시 한 편은 외우기에 좋은 운율을 지니고 있었다. 시에도 문법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문법을 충실하게 따른 시편들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시의 부흥은 바로 그런 시들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이승하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천상의 바람, 지상의 길? ?불의 설법?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등 문학평론집 ?집 떠난 이들의 노래?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향일성의 시조 시학? ?한국 시문학의 빈터를 찾아서 2? 등 지훈상, 시와시학상 작품상, 인산시조비평상 등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
출처: 하루 시 한 편 읽기 원문보기 글쓴이: 흐르는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