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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숙청은 지역 정치의 완전한 파괴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지역의 새로운 세대들은 더이상 명령-행정 경젱 의문을 표하거나 중앙 정책에 대놓고 반기를 드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지역 이익을 사수하고자 했죠. 그들은 우선 고스플란이나 인민위원회 같은 정부부처 위주의 계획 대신 영역에 근간한 계획이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을 냇웠습니다.
역설적으로, 대숙청은 행정과 계획에 있어서 지역의 역할에 새로운 기회를 부여했습니다. 체포와 처형은 권력의 기관차에 타있던 모두를 건드렸고, 이는 경제적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죠. 기존의 관료들은 훨씬 덜 경험을 쌓은 신출내기들로 교체되었습니다. 제3차 5개년 계획은 시작부터 공포분위기에서 수행되었고요. 결국 다시 어느 정도 지역으로의 권위 이양이 이어졌습니다.
고스플란과 인민위원회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역이 제출한 제3차 5개년 계획들은 대거 짤렸습니다만 이번엔 고스플란이 비판을 받았습니다. 몰로토프가 이런 움직임을 이끌었습니다. 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의 독자적 "제도상의 이익"을 추구해와 하부 공장들의 운영을 방해 해왔다고 지역의 당 위원회들에 의해 비판 받았습니다. 중앙 지도자들은 이제 지역에 어느 정도 동정적인 시선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나치가 침공해왔죠. 전쟁은 행정 구조의 극단적 단순화를 요구했습니다. 최대한 정책 결정과정을 단순화하기 위하여 단일 전시 내각으로 결정건들이 모두 집중되었습니다. 지역 지도자들은 전쟁으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게 되었습니다. 지역의 전권대사들과 함께 일하긴 했지만 그들은 예상치 못한 자치를 누렸습니다. 고정된 목표를 맞추냐 못 맞추냐보다 전쟁에서 살아남느냐 못 살아남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이었죠.
지역 지도자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독자적 경제 운용 경험을 배웠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중앙위에서 이런 얘기도 나왔습니다. 첼랴빈스크 주의 아브라모프는,
"현재 이곳에 계신 사람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우랄과 시베리아에서 전시에 일했었습니다. 그들은 전시 경제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지역 당조직들은 많은 문제들을 해결했고 우리들은 군수장비 생산을 정말 잘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장비들로 파시트들을 격퇴시켰습니다!"
"옳소!"
그러나 이는 짧은 희망이었습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전된 산업단지를 재확인하는 문제, 전후 복구 등은 지역 독자적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1946년, 이제 인민위원들은 장관이 되었고 인민위원회는 부서들로 전환되었고 그들이 다시 주도권을 쥑 되었습니다. 지역의 독자 계획에 대한 논의는 정치국에서 고스플란과 장관들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소브나르콤의 계승자인 소련 장관회의였죠. 게오르기 말렌코프 아래에서 장관회의는 경제 정책 결정을 독점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이 죽었습니다. 말렌코프는 장관회의 의장으로 남았고 흐루쇼프가 당 상무회의(정치국의 후계자)를 접수했습니다. 장관회의가 이제는 권력의 핵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흐루쇼프는 여기서 역전을 꿈꿉니다. 말렌코프의 지지자들인 장관들을 약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흐루쇼프는 1956년 중앙위에서 그는 경제 행정을 지역 단위로 재편하는 것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제시합니다.
이 파워게임에서 흐루쇼프는 장관들의 반발에 부딪히고 게임은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중앙위에서 현재 당 지도부의 승인 없이 토론을 촉발시킵니다. 뉴욕 헤럴드 트리뷴과 같은 외국 언론들과도 서슴없이 얘기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이제 지역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기반하여 경제적 행정을 짜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말렌코프와 상무회의 일원들은 흐루쇼프의 독단적 행동에 매우 분노하였으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흐루쇼프는 거기에 "처녀지 프로그램"이라는 농업계획도 제시하였고, 미국을 축산업과 낙농업에서 따라잡고자 하는 야심찬 계획도 발족시킵니다. 아나스타스 미코얀에 따르면 당 지도부의 분위기가 흐루쇼프에 매우 적대적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말렌코프, 몰로토프, 카가노비치는 그를 제거하고자 했죠. 1957년 6월, 흐루쇼프는 사임을 요구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부 했습니다. 중앙위에서 표결된 바가 없지 않느냐?
그리고 다들 아차! 했겠죠. 중앙위 표의 40%는 지역 대표들이 차지하고 있던 점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지역 대표들은 모스크바로 달려가 흐루쇼프를 결사옹위 했습니다. 말렌코프, 카가노비치, 몰로토ㅡ가 역으로 제거당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장관회의 의장 직함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때 이후 말렌코프는 카자흐스탄 수력발전소 소장으로, 카가노비치는 우랄의 작은 칼륨 공장장으로, 몰로토프는 몽골로...;;;)
이제 경제 행정의 기초 단위는 지역의 "소브나르호즈"(SovNarKhoz, 인민경제회의)로 바뀌었습니다. 스베르들롭스크 주는 이 때를 틈타 과거의 우랄 주로의 회귀를 희망했습니다. 자치권을 얻을 수 있을 것이었고 계획 달성으로 갈굼 당하지도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40년 전, 그들의 선배들이 제시했던 "거대한 우랄계획"과 같은 종류의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흐루쇼프에게 지역의 이와 같은 자치권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중앙위와 장관회의는 지역에 대해 몇가지 제한을 걸기 시작합니다. 고스플란이 힘을 받았죠. 1959년 21차 당대회에서 흐루쇼프는 지역주의를 비판합니다. 소브나르호즈 개혁은 그리고 어떠한 성과도 내지 못한채, 흐지부지 되어가고 있었고 어떤 면에서는 혼란만을 가중시켰습니다. 상황은 1930년대 초와 비슷해졌습니다. 흐루쇼프는 그의 전임자였던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지역 당조직의 지지 하에 정치권력을 독점했습니다. 그 후의 행보도 비슷했습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지역의 자치 열망을 박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지역에 대한 통제를 다시 높이려 했죠. 스탈린이 거대한 주들을 잘게 쪼갰듯이 흐루쇼프는 지역 당 위원회를 농업위와 산업위로 분할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가 달랐습니다. 스탈린은 중앙을 견고히 다스리고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등 뒤를 취약하게 남겨둔 상태에서 공세에 나섰죠. 그는 자신이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있었는지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지역을 공격하면서 그는 중앙위에서 그동안 받았던 표결에서의 우세를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흐루쇼프의 동료들은 그의 대내 및 대외정책에서의 실패에서 책임을 공유하고 싶지 않았고, 1964년 10월 12일 흐루쇼프가 휴가에 가있던 동안 흐루쇼프는 실각당하게 됩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지역 기반 체제를 해체하고 장관 체제로 다시 경제를 재편했습니다. 지역은 이에 대해 불만이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표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경제적 쇠퇴가 가시화되자 새로이 논쟁이 생겼습니다. 1981년, 스베르들롭스크 당 서기였던 우리의 인기스타 보리스 옐친은 중앙에 올라가서 지역 중심 경제 체제로의 재편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변화도 없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변화를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혼란만 줬죠. 그는 지역들과 장관들 모두에게 힘을 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격렬한 갈등이 이어집니다만 이제는 동시에 경제 자체가 와해되고 있었습니다. 예산은 수직낙하했고 생산은 계속 위축되어갔습니다. 인플레이션이 폭주했고 상품은 사라졌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본질적으로 흐루쇼프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이제 선출된 정부에 기반하여 정통성을 행사하고자 하였으나 그마저도 역시 혼란만 가중시켰습니다. 고르바초프도 끝났죠.
그 와중에 모두가 타격을 받았습니다만 장관들이 더 심한 타격을 받았습니다. 시장경제로 이행하면서 그들의 힘은 계속 줄어들어만 갔습니다. 지역 당조직도 소련의 와해로 위축되었지만 그들은 어쨌든 경제 행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계속 할 수 있도록 살아남았습니다. 스베르들롭스크 주는 다시 새로이 기회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장관들의 명령이 없어진 상태에서 지역 경제를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다시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우랄만의 경제를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비슷한 일들이 시베리아와 중앙 흑토지대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거의 주의를 받지 못했는데 그보다 더 한 일들이 옆에서 폭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공화국들은 아예 완전한 주권을 부여받은 새로운 나라를 원했습니다. 지역주의를 넘어 내셔널리즘이 소련을 강타했습니다. 이제 연방 자체가 버티지 못하고 있었죠. 새로이 온 보리스 옐친은 지역 경제의 자치를 보장해주리라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10년 전과 그는 이제 위치가 달랐죠. 대통령이 된 그는 자신의 권력을 지방과 공유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강력한 중앙 정부 하에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씁니다.
그러나 지역 지도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부를 이끌어가는 게 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의회? 옐친? 행정부 부처? 군대? 결국 그들은 연방에 협조하기를 거부했습니다. 1992년과 1993년 거의 반이 넘는 지역들이 국고에 돈을 납부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스베르들롭스크의 에두아르트 로셀은 "우랄 공화국"의 창설을 제안할 정도였습니다.
상황은 그래도 계속 바뀌고 있었습니다. 옐친이 전차를 몰고가서 의사당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정국은 어찌어찌 잡혀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옐친은 로셀에게 계속 깝치면 안 된다고 위협을 줬죠. 연방의 단일성을 해치면 지역 지도자들의 목이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이들은 선출직이었죠. 잘린 로셀은 선거에서 이겨 다시 스베르들롭스크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러시아의 중앙-지방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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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정치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국가 주도의 변화가 스탈린의 독재의 등장에 곧바로 뒤따랐다고 가정했습니다. 그간 닫혀 있던 문서고는 회색 인간 스탈린에 의해 조종되는 대중들이라는 이미지만을 만들어왔죠. 이 책은 우랄을 예시로 들어 그와는 사뭇 다른 얘기를 전해줍니다. 거대한 관료제의 내에서 각 기관들과 지역들은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 자기 이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차 혁명"이라고 불리는 스탈린 시기의 사회적 대격변들을 이런 것과 떨어트려 놓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 그들은 체제의 가장 급진적 정책 수행의 지지자들이었습니다. 이를 스탈린 일 개인의 행동이나 정치권 최상층부의 몇몇 지도부의 일로 한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스탈린 본인이 막대한 권력을 행사한 것은 사실이나 일 개인이나 그룹은 그런 막대한 변화를 홀로 주도할만큼 능력에 한계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일을 수행하기 위해 협조자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협조자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반하여 행동할 때, 그들은 분노했죠.
지역 지도자들은 중앙에 완전히 거스를 힘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압력을 행사할 순 잇었습니다. 계획을 만들어야할 때 중앙은 그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지역은 이 위치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또한 중앙위가 분열되어 있을 때도 그들이 운신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습니다. 정치국 내부의 분파 다툼에서 40%의 표 수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좌익, 우익 대신에 그들은 스탈린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중앙의 지시에 대해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중앙의 지시가 많은 경우에 무시되었습니다. 굴락의 운영이 그 대표적인 사례였죠. 노동력 부족으로 추진된 수용소 체제의 대규모 확장을 중앙에서는 예상하지도 못했습니다만 이는 그대로 밀어붙여졌습니다. 또한 그들은 지질학적 조사결과를 숨기기도 했고, 스타하노프 운동을 약화시키고 잘못된 정보를 보고하곤 했습니다.
새로운 명령-행정 경제의 성숙과 그에 따른 관료제의 기율과 책임 문제는 결국 대숙청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대숙청은 이런 관행을 어느 정도 일소시켰습니다만, 완전히 종결시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스탈린 시대가 끝나자, 지역의 이야기들이 다시 본격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스탈린 사후, 1920년대처럼 중앙이 분열되기 시작하자 그들은 다시 정책 결정 과정에서 한 팩션을 지원함으로써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이는 소련의 해체 후 현 러시아 연방까지도 이어졌습니다.
다양한 정부 기관들 사이의 이익이 존재함은 여러 세기에 걸쳐 러시아와 소련 정치에 있어서 분명한 사실입니다. 국가의 전제적 통치자는 이 상황을 결코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으나, 그 상황을 완전히 일소할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스탈린마저도, 당 기구에 대한 완전한 억압을 행사했던 스탈린도 오랜 세월에 걸친 이 압력들에 종지부를 찍을 순 없었습니다. 중앙 지도자들은 사실 항상 싸워 온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때때로, 그들 서로는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위하여 서로를 수용하고 이용했습니다.
첫댓글 다음 주부터는 '스탈린의 철도'가 연재될 예정입니다. 봐주신 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새로운것도 알게되고 재미있게 잘봤습니다.
스탈린의 철도도 기대되네요
고맙습니다!
으어 기나긴 우랄의 파란만장한 경제와 정치이야기가 이렇게 막을 내리는군요 수고하셨습니다!!ㅜㅜ
철덕은 아니지만 철도 상당히 끌리네요. 기대!
연재하느라 졸지에 같은 책을 두 번 읽은... ㅠㅠ 연재하면서 읽은 건 영어공부한 셈 치고 있습니다 ㅋ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17편이나 나갈 줄은 저도 예상 못했네여.. 적당히 10편 쓰고 치울 줄 알았는데
ㄷㄷㄷ
ㄷㄷㄷ
한국사에서도 비슷한 논지의 연구가 슬금슬금 시작되는 걸로 압니다. 일본인들의 압제에 조선인들은 일방적으로 희생되기만 했던 것으로 비춰지던 일제강점기에 대한 시각이, 일본계 자본의 우위 속에서 영합과 반발을 반복한 조선인들과 더불어서 이런 조선인 지주자본가들의 목소리를 묵살할 수만은 없었던 조선총독부의 징징거림(...)에 초점을 맞추는 거죠. 다양한 이익집단들이 서로 경쟁하고 타협하다가 어느 순간 전쟁 또는 숙청에 휘말려 다 쓸려나가는(?) 스토리는 과연 언제 봐도 재밌는 것 같습니다.
주체성을 지닌 인간을 단순히 객체로 만들어버리면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기 힘들겠죠. 저런 연구들이 점차 확대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제가 고맙습니다
사람들이 정치라는 것, 특히 권위주의 독재정치에 대해 흔히 상상하는 대로 정치라는게 이뤄진다면 실제로는 다스리는 사람만 남고 다스려지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게 되죠.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려지는 사람은 상호작용한다, 심지어 누가 다스리는거고 누가 다스려지는거냐 라는 경계조차 완전히 분명하지는 않은 것... 물론 그렇다고 다 헛되도다, 식의 상대주의는 단지 대상을 이해하려하지 않는 허무주의일 뿐이지만. 결국 명확한 진실이라는 것에 대한 환상이 사람들이 잘못생각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테죠.
아마 사람들은 대숙청의 다이내믹로동! 을 기대했을 텐데, 의외로 대숙청 부분이 그렇게 똑부러지게 서술되지 않은 것도 그러한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은 상황속에서의 유동성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좋을테고... 그런 불명확함 속에서 중심을 잡고 흐름을 이해해야하기 떄문에, 중심을 잡고 이해한다, 라는 누구나 쉽게 말로만 하는게 왜 어려운지도 드러나는 것일테죠. 그런 부분을 잘 보여준 글들이었다고 봅니다
잘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여담이지만 뭐랄까... 글의 마무리를 후일담식으로, 그것도 뭔가 흐릿하게 썼다는 점이 인상깊은 여운을 남겨준다는 생각이 드네요. 마무리가 맘에 들었습니다!
역시 역사는 민족주의의 폭풍에 휩쓸려가는 것일 뿐~
저도 대숙청 끝나고 20쪽 정도 더 남았길래, 대체 뭔 얘기가 더 남았나... 하고 봤는데 참 여운이 깊더라고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옐친 이후의 연방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아도 좋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