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隨筆분과 방 작가와 작품(118) - 브람 스토크의 '드라큘라'
이동민 추천 0 조회 69 23.02.17 07:20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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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02.17 07:21

    첫댓글 (비평)
    호러 소설의 거장 스티븐 킹은 미국 호러문화를 비평한 그의 저서 죽음의 무도에서 드라큘라를 프랑켄슈타인,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와 함께 현대 미국 호러 문화를 이루는 근간으로 평가했다. 프랑켄슈타인이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괴물들(거대 괴수, 방사능 오염, 핵전쟁, 기계의 반란)을 상징한다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는 선악이 바뀐다는 두려움(늑대인간, 비만, 외모적 히스테리)을 상징한다. 한편 드라큘라가 상징하는 것은 '절대적인 사악함'이다. 즉 코즈믹 호러와 유사하게, 외부로부터 온 절대악의 상징이라는 것.

    드라큘라는 거침없이 기독교와 신에 반감을 표한다는 것과 동유럽에서 영국에 있는 렌필드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모습을 보여 일부에서는 적그리스도나 반그리스도를 상징한다는 비평도 있었다.

  • 작성자 23.02.17 07:22

    20세기에 들어서 이 소설은 심리주의 경향의 비평을 많이 받았다. 특히 프로이트 숭배자들은 이 소설에서 갖은 성적 상징과 이미지를 찾아내느라 혈안이었다. 물론 이 책은 그런 차원에서 많은 은유가 포함되어 있다. 동성애, 윤간, 강간 등 갖은 이상 성행위의 이미지가 난무하는데, 사실 이것은 그 가운데서도 지고지순한 인간애를 발하는 주인공 일행의 인간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이 선과 악의 비장한 대결을 장식하기 위한 수단이다. 결국 그들은 온갖 악덕의 총화인 드라큘라 백작을 쓰러뜨리고 미나에게 걸려진 저주가 풀리면서 순결을 회복한다.

    현대에 와서 윤리관이 19세기 말과 달라져서 드라큘라에 동정의 시선을 보이거나 주인공들을 외국인혐오자로 보는 시각도 발달했다. 또한 70년대 들어서는 드라큘라를 흑인이나 게이 등 인권을 탄압받는 소수자의 상징으로 여겨서 그에 동정적인 소설도 많았다.(하지만 90년대 들어 에이즈가 심해지자 '병을 옮기는 몹쓸 인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 작성자 23.02.17 11:44

    성적인 비평 외에 드라큘라를 반식민주의의 상징으로 보는 비평도 존재한다. 또한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고, 실체도 환상도 아니고, 동양도 서양도 아닌[5], 남녀 성별 또한 모호한[6] 드라큘라와, 모호하지 않고 뚜렷한 주인공들을 대비시킴으로서 이성과 비이성의 대결 구도를 만든다는 비평도 존재한다. 그 외에 유명한 비평론으로는 과거 대 현재, 전통 대 과학, 본능 대 이성 등이 있다. 이같은 다양한 대비론이 드라큘라로 하여금 다른 공포소설이나 흡혈귀 물을 제치고 오랫동안 "문학"으로서 인정받게 한 것이다.

    발매 당시에는 "왜인지 모르지만 불안하게 한다."라는 말이 많이 나왔다. 이것은 19세기인들의 도덕관념 때문이라는 설이 상당하다.

  • 작성자 23.02.17 11:44

    <브람 스토커>
    에이브럼 "브램" 스토커 (Abraham "Bram" Stoker, 1847년 11월 8일 – 1912년 4월 20일)는 아일랜드의 소설가, 단편 작가이다. 유명한 고딕 소설의 고전, 《드라큘라》 (1897년)가 대표작이다. 생애 동안에는 배우 헨리 어빙의 비서, 어빙이 소유한 라이시엄 극장의 사무 책임자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스토커는 1847년 11월 8일 아일랜드 더블린 북부 지방인 클론타프 마리노 크레센트에서 일곱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1][2][3] 아버지 에이브럼 스토커 (1799년–1876년)는 더블린 출신이며, 샬럿 머틸다 블레이크 손리 (1818년–1901년)는 도니골 주 밸리섀넌 출신이었다. 에이브럼과 샬롯은 아일랜드 성공회 클론타프 교구의 신도였으며, 자녀들과 함께 교회를 다니고 세례도 시켰다.

  • 작성자 23.02.17 16:14

    병약한 스토커는 일곱 살까지 걸을 수 없었다. 이 당시에 스토커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원래부터 생각이 깊었는데, 병에 걸렸던 시간들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였고, 나중에는 종류에 따라 가치있는 생각들이 되었다." 병이 나은 후에는 윌리엄 우즈 목사가 운영하는 사립 학교에 입학하였다.[4]

    학교에 다닌 뒤부터 별다른 건강 문제 없이 성장한 스토커는 1864년부터 1870년까지 다녔던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뛰어난 운동 선수로 이름을 날렸으며, 수학 우등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그는 칼리지 역사 협회의 청강생이었으며, 유니버시티 철학 협회의 회장으로 일하면서 첫 논문인 "소설과 사회의 선정주의"를 쓰기도 하였다.

  • 작성자 23.02.17 16:14

    스토커는 학창 시절동안 친구 마운셀 교수를 통해 연극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고딕 소설 작가 조셉 셰리든 르 파뉴가 공동 소유했던 《더블린 이브닝 메일》 (Dublin Evening Mail)의 연극 비평가로 활동하였다. 그의 연극 비평에 대한 평가는 낮은 편이었지만, 수준 높은 글로 주목을 받았다. 1876년 12월, 스토커는 더블린의 로열 극장에서 공연한 헨리 어빙의 〈햄릿〉을 호평하였다. 어빙은 이에 보답하고자 자신이 머물던 셀번 호텔로 스토커를 저녁 식사 초대하였고, 서로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스토커는 1872년에는 런던 협회를 통해 출판된 소설 《섐록》 (The Shamrock)의 네번째 작품 "운명의 사슬" (The Chain of Destin)의 다음 편인 "크리스탈 컵" (The Crystal Cup)을 쓰기도 하였다. 1876년부터 더블린 관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동안에는 표준 작품으로 남은 논픽션 서적 (《아일랜드 즉결 재판소 사무종사자의 업무》, The Duties of Clerks of Petty Sessions in Ireland, 1879년 출판)을 저술하였다.[4] 또한, 예술에도 관심이 많아 1874년 더블린 스케칭 클럽을

  • 작성자 23.02.17 16:15

    1878년 스토커는 1 마리노 크레센트의 제임스 발콤브 중령의 딸, 플로렌스 발콤브와 결혼하였다. 그녀는 유명한 미인으로, 오스카 와일드가 청혼을 하기도 했다.[6] 와일드는 스토커가 대학교의 철학 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 그에게 회원 신청을 한 인연이 있었다. 플로렌스의 거절에 와일드는 화가 났지만, 이후 스토커가 다시 그녀와 교제하였고, 이것이 와일드가 미국으로 떠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7]

    스토커는 런던으로 이주하여 어빙의 비서이자, 어빙의 라이시엄 극장의 사무 책임자로 일하였고, 27년 동안 지속하였다. 1879년 12월 31일, 브램과 플로렌스는 외동 아들 어빙 노엘 손리 스토커를 낳았다. 어빙과의 협업은 스토커에게 중요한 계기로, 이를 통해 그는 런던의 상류 사회에 진출하게 되어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아서 코난 도일 경 (스토커와 먼 친척)을 알게 되었다.

  • 작성자 23.02.17 20:27

    스토커는 당대의 가장 유명한 배우였던 어빙을 위해 일하였고, 런던에서 가장 성공한 극장을 경영하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그만큼 유명해졌다. 어빙에게 헌신한 스토커는 회고록에서도 그를 숭배한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스토커는 런던에서 홀 케인을 만나기도 했는데, 가까운 친구 중 하나가 되어 그에게 《드라큘라》를 헌정하기도 했다.
    어빙의 관광 여행에 함께 하면서 스토커는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정작 자신의 가장 유명한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동부 유럽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스토커는 어빙이 유명했던 미국에 가는 것을 즐겼는데, 어빙과 함께 백악관에 두 번 초대 받았고, 윌리엄 맥킨리와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만났다. 스토커는 두 편의 소설에서 미국인을 등장인물로 설정하였는데, 퀸시 모리스가 유명하다. 문학적 우상인 월트 휘트먼을 만나기도 했다.

  • 작성자 23.02.17 20:28

    스토커는 어빙의 비서, 라이시엄 극장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1890년 첫 소설 《뱀 길》 (The Snake's Pass)을 펴냈고, 1897년에는 《드라큘라》 (Dracula)를 발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이 기간동안 스토커는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문학부 직원이었으며, 공포 소설 《수의를 입은 부인》 (The Lady of the Shroud, 1909년), 《흰 벌레의 소굴》 (The Lair of the White Worm, 1911년)을 쓰기도 하였다.[8] 1906년, 어빙이 죽은 후, 그는 어빙의 전기를 출판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4] 웨일즈 왕자 극장에서 계속 저작을 해나갔다.

  • 작성자 23.02.17 20:28

    1890년, 스토커는 민속학에 정통했던 헝가리 부다페스트 대학의 교수 아르미니우스 뱀버리를 만나서 동유럽의 흡혈귀 설화에 대해서 듣고 《드라큘라》에 대한 착상을 얻게 되었다. 이후에 몇 년 동안 도서관을 다니며 블라드 체페슈를 비롯한 흡혈귀에 대한 유럽 설화와 전설을 조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출간된 《드라큘라》는 현실적인 가상의 글을 모아 놓은 형태의 서간체 소설로, 그가 신문 작가로 일하면서 쌓은 실력을 토대로 구성한 일기, 전보, 편지, 항해 일지, 신문 스크랩은 소설의 세부적인 현실성의 수준을 더하였고, 실제가 아닌 이야기를 실제처럼 보이게 하지만 다시 허구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독자를 소설에 몰입시킨 후 다시 현실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한다.

    잦은 뇌졸중 증세를 겪던 스토커는 1912년 4월 20일, 성 조지 광장 26호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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