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례 (외 1편)
이화은
재의 수요일
사제는 내 이마에 재를 얹었다
이곳의 죄는 모두 소멸되었다
순결의 땅임이 증명된 것이다
내게 죄 없는 몸이 한 뼘이나 있다니
이마에 닿았던 뜨거운 입술의 흔적은
이제 유적이 되었다
그들이 내 얼굴에 침을 뱉았다
⸺야곱은 밤새도록 하느님과 씨름하여 동 틀 녘 결국 신의 축복을 받아냈다는데
밤마다 내게 싸움을 거는 저 작자 지금 하느님 흉내를 내고 있는 거다 나도 그 자를 알고 그 자도 내 속을 꿰뚫고 있으니 뻔한 결말을 두고 지리한 싸움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데 그는 그런 나를 가만 내버려두지 못한다
조급함이 그 자의 최대 약점이다 잠자는 시간에 편히 잠자는 내 꼴을 보지 못한다
벌떡 일어나 그 자의 샅바를 잡는 순간 이미 나는 지는 것이다
그러나 저열하고 비겁한 방식에는 나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니,
공들인 내 시에 허접한 관념어들을 함부로 방목하여 난장을 만든다거나
느닷없이 죽은 연애의 기억을 몰고 와 무념무상 아침 차의 첫잔을 소태로 만든다거나
늙은 선풍기의 모가지를 비틀어 딸깍딸깍 온 집안을 소음으로 가득 채우거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리모컨을 움켜쥐고 손가락만 까닥까닥 막장 재방송을 보고 또 보고
소파에 단물 빠진 껌딱지처럼 딱 들러붙어 졸다 깨다 졸다 깨다
설핏 해가 기운다 하루가 기운다 한 계절이 기운다 한 생이 그렇게 기울어 갈 것이다
냠냠 잘 잡아먹었다 시간이라는 징한 짐승
시계 바늘이 원형 경기장 같은 문자판을 지친 듯 돌아가면 카악! 침을 뱉았다
神이 내 얼굴에 침을 뱉았다
⸺월간 《시와 표현》 201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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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 경북 진량 출생. 1991년《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이 시대의 이별법』『나 없는 내 방에 전화를 건다』『절정을 복사하다』『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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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9.04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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