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주류主流, 역사의 진정한 리더는 누구인가?
서울 중랑구, 구립도서관(관장 신남희)에서 진행된 <길 위의 인문학> <조선의 리더를 만나다> 네 번째 강의를 어제 마쳤다. 두 번은 도서관에서 진행하고, 답사와 또 한 번은 코로나 때문에 집에서 온라인으로 강의를 마쳤다.
눈을 마주치면서 가끔씩 묻고 답하며 하는 강의가 재미있는데, 세상이 하수상 하다가 보니 어쩔 수가 없었었다. 그렇다면 조선이 리더, 우리 역사 속의 진정한 리더는 누구인가? 나는 2001년에 낸 책 <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역사의 현장을 돌아다니다 보면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다. 경상도 지역의, 내노라하고 문벌을 자랑했던 사람들의 집에 들르면 “집은 이렇듯 쇠락해 가고 있지만 우리 아무개 선조가 누구 누구였다.”고 오래 묵은 족보부터 가져와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가 누구의 몇 대 자손’이라며 큰 소리 치는 사람들도 있다.
답사를 함께 한 일부 사람들은 고래등 같은 기와집들을 바라보며 그 당시 일반 민중들을 수탈한 재산으로 저런 집들을 지은 게 아니겠냐 하면서 분노를 표시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지구상에 사람이 뿌리내리고 살면서부터 그러한 불균형한 질서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을 것이고 그나마 그렇게 남아있는 유형무형의 문화재들로 그 시대의 상황과 문화 척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답사길에서 그와는 정반대의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더 많다. KBS〈역사스페셜〉‘정여립의 난’을 취재하면서 만났던 정여립의 친척이었던 정인겸의 경우가 그러하다. 정인겸은 당시 정여립과 14촌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무덤이 파헤쳐지고 유골은 바람에 날려 흩어져 버렸다. 비석은 두 동강이 났으며 묘소를 지키던 석상은 머리와 귀가 잘린 채 땅속에 4백여 년을 묻혀 있었다가 1979년에야 복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수많은 답사길에서 목 잘린 부처들은 많이도 보았지만 목 잘리고 귀가 잘린 석상에 시멘트로 머리를 만들어 붙인 경우는 처음 보았다.
정여립뿐만이 아니었다. 광산 이씨 그 쟁쟁했던 이발의 가문은 이발의 장조카 이원정만 살아남아 밀양 이씨로 변성하여 목숨을 부지했고, 270여년이 지난 1860년대에야 우여곡절 끝에 원래의 성을 되찾았으니 그 한많은 세월을 어느 누가 보상해 주랴. 그들뿐만이 아니고 동학농민혁명 당시 지도자였던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봉준은 대를 이어갈 후손이 끊어졌고 손화중이나 김개남의 자손들은 살아남기 위해 성을 바꿔야 했다. 김개남의 증손자인 김상기씨는 1950년대 중반에야 그때까지 써왔던 박씨 성을 버리고 본래의 성을 되찾았으며 도강 김씨의 족보에 올랐다고 한다. 후손들이라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신돈, 허균, 정여립 등 그 이름을 들먹이는 순간 ‘그 간신! 그 역적!’하는 손가락질을 받는 역적으로 몰려 죽은 사람들은 무덤은 커녕 앞서 말했던 ‘우리 선조가 누구’라고 기억해 줄 후손들마저 끊어져 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돈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옥천사 터는 수풀만 무성하고〈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은 이중 역적으로 몰려 죽은 뒤 무덤조차 없다.
필자는 이러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그들의 삶의 궤적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한 세월들이 차곡차곡 쌓이다 보니 그들을 위한 여러 행사를 주관할 수 있는 여건이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동학농민군들을 위한 씻김굿, 지리산 빨치산과 토벌대들의 해원굿, 정여립 추모 해원굿, 김개남 장군 추모제 등 크고 작은 작업들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한 시대를 그토록 절절하게 살다 간 그들에 대해 주제넘게 이렇게 저렇게 논한다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기가 했지만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도 의의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오래 전에 모 정치인이 ‘주류론’으로 대선을 돌파한다(?)는 발언을 한 것을 두고 주류․비주류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주류(Main Stream)의 사전적 정의는 ‘강의 원줄기가 되는 큰 흐름’이나 ‘어떤 사상이나 운동 따위 여러 갈래에서 으뜸이 되는 중심 갈래’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주류란 무엇인가? 인하대 최원식 교수는 “한 사회를 끌고 나가는 데 필요한, 많은 사람들의 합의하는 규칙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통합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계층”이라고 주류를 정의하고 있다.
그러한 개념 속에서의 주류는 대세, 다수, 파워엘리트, 지배집단, 강력한 파벌 등을 의미하는 용어라고 볼 수 있는데 한국 현대사에서의 주류는 시대에 따라 약간의 옷만 갈아입으면서 변천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한국사회에서의 주류는 역사평론가 이덕일 선생이 “조선 후기 노론에서 시작해 한번도 기득권을 놓치지 않고 역사를 망친 세력들”이라고 지적했던 것처럼 조선후기부터 국민의 정부라고 일컬어지는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기 전까지 수많은 문제점들을 야기한 채로 붙박이처럼 이어져 왔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애를 70세라고 볼 때 ‘잘 먹고 잘 살고 자식 건사 잘하고 권력과 부로 떵떵거리는 것’을 성공한 인생의 전형 즉 주류라고, 수많은 민중들을 위하여 사회를 개혁하려고 전 생애를 걸고 일을 도모하다가 기득권층에 의해 그 일이 결국 불발로 끝나고 마는 것을 실패한 인생의 전형 즉 비주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누가 주류이고 누가 비주류인지가 분명치 않게 이합집산이 계속되면서 여러 정부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있다. 그렇다면 질곡 많았던 우리 역사 속에서 진정한 주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변혁을 꿈꾸며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역사 속에 묻혀 버린 사람들이 주류라고 말하고 싶다.
니체는〈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의 제 1부 ‘자발적인 죽음’에서 예수를 빗대어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너무도 늦은 것이며 소수의 사람들의 죽음은 너무도 빨랐다.” 그렇다. 그들은 충분히 고귀한 인간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죽음은 너무도 빨랐고, 그들의 죽음으로 반대급부를 받은 사람들은 오래도록 행복한 삶(?)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림자는 오직 빛이 있음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선’도 ‘악’이 있음으로 존재한다면 그들의 그러한 죽음 역시 당연한 것이리라. 역사에 가정이 없는 것처럼 사람의 한 생애에도 가정은 없는 것이지만 그들이 좀 더 오래 살아 새로운 개혁 사상과 정치이념을 펼쳤더라면 세상은 눈부시게 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람을 섬기고 백성을 한울처럼 섬겼던 그들의 죽음과 함께 그들이 시도했던 개혁사상들은 깊숙한 역사의 바다 속에 영원의 형태로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은 밟혀도 밟혀도 되살아나는 질경이처럼 질기게 살아남았다. 불태워져서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그들이 남긴 글과 사상, 개혁의지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그들의 뒤를 잇는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로 역사를 진전시켜 온 것이다.
“이른바 군자와 소인小人이라는 것이 서로 멀지 않아서 같은 패거리면 군자라고 부르고 다른 패거리면 모두 소인이라 한다.”는 허균의 말처럼 우리의 현재 상황도 내 편이 아니면 모두가 적이고, 더 자세히 보면 적도 동지도 이념도 없다. 오직 불나방처럼 권력과 황금이 있는 곳이라면 죽음도 불사하고 뛰어드는 사회지도층(?) 또는 상류층만 있을 뿐이다.
“그윽히 생각건대 털끝만큼 작은 것이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지금 이를 고치지 않으면 반드시 나라가 망하고 말 것입니다.”라고 다산 정약용이 말했던 것처럼 오늘의 시대는 어디 한군데 성한 곳이 없다. IMF를 만났고, 전대미문의 코로나 19가 닥쳐왔는데도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분단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가고 오는 우주의 섭리’처럼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이 나라가 괜찮을까? 자문해 보지만 잘 모를 일이다.
“운수는 가까워도 기회는 잠시로다”라고 말한 수운 최제우의 말이나 인류가 기나긴 역사의 노정에서 터득한 “영광은 짧고 오욕은 길다.”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것이 정설이라면 역사의 주류는 한 시대를 변혁하고자 한 꿈을 접은 채 크나큰 좌절과 절망 속에서 숨져 간 그들일 것이고, 우리는 그들을 자랑스럽게 역사 속에 주류, 그리고 선각자라고 자리매김해야할 것이다.
증산 강일순은〈대순전경〉5장 4절에서 “모든 천하天下를 건지려는 큰 뜻을 품고 시세가 이롭지 못함으로 인하여 구족九族을 멸하는 참화를 당하고 의탁할 곳이 없이 한을 머금고 떠도는 만고역신萬古逆臣”을 상기시킨 후 5절에서는 “원래 역신은 곧 시대와 기회가 지은 바라 그 회포를 이루지 못하여 원한이 하늘에 넘치거늘 세상 사람들은 사리事理를 잘 알지 못하고 그들을 미워하여 비할 데 없는 악평으로써 일상용어에 모든 죄악의 머리라고 일컬으니”라고 말하며 그들을 새롭게 신원하는 것에서부터 후천개벽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옛 사람은 ”반란이 없다면 인류는 정체할 것이고, 불의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며 반역이나 반란이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순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 역사는 항상 승리자의 기록이었고 승자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실패한 사람들은 세상의 온갖 허물들을 뒤집어쓴 채 침묵만 바람에 날려 보내고 있다.
삼족이 멸하여 혹은 구족이 멸하여 대마저 끊긴 채 무덤조차 없는 그들. 그리하여 오랜 세월 동안 구천을 떠돌고 있는 모든 역신들의 삶의 궤적들이 다시금 이 땅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삼가 그들의 명복을 빌고 또 빈다.
그런데, 지금 이 난세라면 난세인 복잡한 한국 사회에서 진정한 리더는 누구일까?
2021년 8월 1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