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씨는 운전석의 아빠를 보며 밝게 웃었다. 지난해 7월 서울에 살 집을 계약하고 아빠와 함께 광주 집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원하던 곳에 막 취업한 연희씨의 설렌 표정이 아빠는 지금도 생생하다.
경기도 직장에 다니던 아빠는 지난 설을 앞두고 가족이 있는 광주로 차를 몰았다. 그때처럼 서울에서 연희씨를 태우고 오순도순 내려갔다면 좋았겠지만, 그때와 달리 아빠는 혼자였다. 아빠는 텅 빈 조수석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딸의 이름을 불렀다.
"연희야... 연희야..."
지난달 26일 연희씨가 잠들어 있는 광주 영락공원에서 아빠 김상민(55)씨를 만났다. 당시를 떠올린 그는 "조수석 빈자리를 보는 것이 너무나 참기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딸의 고귀한 인생이, 아니 한 우주가 사라져버렸다"라며 눈물을 훔쳤다.
취업 꿈 이룬 지 3개월 만에...
고 김연희(1999년생)씨는 사회에 막 첫발을 내딛은, 밝은 웃음을 지닌 청년이었다. 아빠는 "자신의 꿈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던 모습이 항상 대견했고 현재의 삶에 자부심을 지닌 듬직한 아이였다"고 딸을 떠올렸다. 친구들은 연희씨가 떠난 뒤 쓴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누군가 내게 '연희는 어떤 친구였냐'고 물어보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제가 너무 좋아해서 쫓아다니던 친구', 그리고 '그 마음을 사랑으로 돌려준 친구'라고 말할 거야. 넌 따뜻하고 행복한 감정을 다 알려준 너무 근사하고 멋지고 좋은 친구야."
"멍하니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는 일이 잦아졌어. 그때마다 이 도시 한복판에 눈부시게 반짝이는 별이 보이더라고. 난 그때마다 옆에 있는 친구들, 가족들, 나한테, 그리고 너한테 '저거 연희다'라고 말해. 항상 기억하고 또 기억할게. 좋은 기억들만 남겨줘서 고마워. 연희야 다음 생에도 우리 꼭 다시 친구하자."
"우리 잠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몇 십 년이 지나도 우린 친구일 테니까 최강인싸 김연희, 친구 많이 만들어놔!"
항공승무원이 되고 싶어 관련 전공으로 대학 진학을 준비한 연희씨는 경기도 한 대학의 항공관광과를 졸업했고 학과에서 진행하는 해외연수 프로그램까지 마쳤다. 하지만 코로나19로 항공업계 사정이 여의치 않자 연희씨는 진로를 변경해 광주의 한 백화점에서 1년 간 근무한 뒤 자신이 희망하던 서울의 대형 백화점에 입사했다.
타지에서 일하며 딸을 물심양면 응원했던 아빠는 자신이 쓸 돈을 아껴 취업 준비 중인 딸에게 보낼 때마다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덧붙였다. 딸 역시 아빠에게 "사랑해"란 말로 화답했다. 아래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중 일부다.
아빠 : 연희야, 100만 원 보냈다. 연희가 배우고 싶은 거 학원 등록하고 용돈 사용해라. 그리고 아빠도 연희처럼 학교 졸업하고 나서 바로 취업이 안 돼 쉬고 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좀 답답했었지만 끊임없이 준비하다보니 취업이 되더라. 그러니 연희도 시간이 흐르면 좋은 결과 있을 테니 항상 앞으로 잘 될 거라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기 바란다.
딸 : 미안해고 답답해서 그러지 나는... 이번 달은 그냥 학원 안 다니고 독서실 끊어서 영어공부 먼저 하기로 마음먹었어. 아빠가 준 돈은 잘 놔뒀다가 다음 달에 학원 등록할게요. 더 노력할게. 나도 사랑해.
아빠는 "고교 시절부터 장래희망과 직업 선택에 있어서 자기 신념이 강했고 더욱이 자기 적성에 맞는 곳에 입사하며 너무나 기뻐했다"라며 "입사 후에도 업무가 재밌고 동료들과 근무환경도 좋아 오래도록 그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었다.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라고 전했다.
"악몽 속 헤맸다" 헝클어진 머리칼 쓰다듬던 그날
입사 후 3개월, 연희씨는 자신처럼 서울로 취업한 고향 친구와 이태원을 찾았다가 함께 참사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10월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는 새벽, "뉴스에서 수 십 명이 CPR(심폐소생술)을 하는 충격적인 모습"을 본 아빠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이는 참사 현장에서 딸의 휴대폰을 주운 남성이었다.
그 남성을 만나 휴대폰을 받았지만 아빠는 한동안 딸을 찾을 수 없었다. 10월 30일 오후 4시 병원에서 연락을 받을 때까지 아빠는 딸의 생사도 모른 채 응급실 곳곳을 헤매야 했다. "악몽 속을 헤매던 시간"이었다. 아빠는 결국 영안실에서 딸과 마주했다.
"싸늘한 얼굴에 시퍼런 멍 자국이 눈가에 선명했어요. 눈을 채 감지도 못한 우리 연희를 보면서도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며 다시 쳐다봤죠. 하지만 우리 연희가 맞았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채 감지 못한 눈을 감겨줬습니다. 살려볼 기회도 없이 딸을 보냈다는 생각에 아버지로서 이 상황이 너무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우리 연희를 어쩌나, 우리 연희를 어쩌나...' 흐느껴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연희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그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얼마나 외롭게 세상을 떠났을까요? 살아 있을 때 병치레 하나 없었고 크게 아파본 적도 없었던 우리 연희가 그 처절한 압사 현장에서 얼마나 살려달라고 애원했을까요? 당시를 상상하려니 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 . . 전문출처 참조
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경찰을, 사업가를, 음악가를, 간호사를, 배우를 꿈꿨던 159명의 바람은 이뤄졌을지 모른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편집자말]
아 기사 읽고 너무 슬퍼서 내가 글 쓸려고 혹시 중복일까봐 검색했는데 역시나 글이 있구나 해결된 건 하나도 없는데 관심도 많이 사라지고 희생자 가족분들 가슴이 얼마나 미어질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정말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청년이고 그런 딸을 사랑했던 평범한 아버지였는데... 누군가 줏어준 핸드폰을 건내받을 때의 기분은 어떠셨을지... 너무 가슴이 아프다 ㅠㅠㅠ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첫댓글 하... 눈물만 나
에구 진짜 ㅠㅠ 너무 슬프다
저 슬픔이 가늠도 안된다 얼마나 힘드실까
아 눈물난다.. 아버님 인터뷰에서 사랑이 너무 느껴지는데 슬픔이랑 고통도 고스란히 느껴져서.....
아이고 .... ㅠㅠ
아 기사 읽고 너무 슬퍼서 내가 글 쓸려고 혹시 중복일까봐 검색했는데 역시나 글이 있구나
해결된 건 하나도 없는데 관심도 많이 사라지고 희생자 가족분들 가슴이 얼마나 미어질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정말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청년이고 그런 딸을 사랑했던 평범한 아버지였는데...
누군가 줏어준 핸드폰을 건내받을 때의 기분은 어떠셨을지... 너무 가슴이 아프다 ㅠㅠㅠ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헉 지금 댓글봤어... 여시 댓글 완전 내 맘ㅠㅠㅠ 사연 읽을때마다 마음 아프고 화나더라.... 무능한 정부 때문에 앞길 창창하고 멋진 사람들이 희생된게 너무 화나.....
유족들의 슬픔을 어떻게 달래… 진짜 너무하다
넘 슬프다 다 꿈이 있던 사람들이었을텐데...
아이고 진짜 마음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