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먹는다는 것/정한용 시인
우리는 매일 세끼 밥을 먹는다.
오늘 아침 식사로 나는 식빵과 과일, 요구르트를 먹었다.
점심은 친구와 중국집에서 사천탕면을 먹을 예정이고
저녁엔 아마도 집에서 잡곡밥에 김치찌개를 먹을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가 '밥'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쌀밥 한 그릇만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매일 살기 위해 그 밥을 먹으며
가끔은 먹기 위해 사는 것처럼 기를 쓰고
유명 맛집을 검색해 찾아다니기도 한다.
오래전 소설가 K와 밥을 먹을 때 일이다.
예기치 않게 양이 너무 많아 K는 일찍이 숟가락을 놓은 상태,
나는 남은 걸 꾸역꾸역 먹고 있었다.
그때 그가 살짝 비웃는 듯한 말투로
"자기 몸을 쓰레기통으로 만들지 마"라고 했다.
내가 좀 미련하긴 해도 '쓰레기'라니, 그건 충격이었다.
나는 웬만해선 음식을 남기지 않는다.
거기엔 내 나름의 그럴싸한 이유가 있는데, 한번 들어 보시라.
첫째, 물론 남은 음식이 아깝기 때문이다.
나는 시골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 밥상머리에서 밥알 한 톨이라도 흘렸다간
엄청난 꾸지람을 들으며 자랐다.
2013년 통계로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가 9천431 톤이고,
이걸 처리하는데 톤당 약 10만원이 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 년에 적어도 수천억 원을 날리는 셈인데,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어린이들 수만 명이 일 년간 밥을 먹을 수 있는 돈이다.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음식을 버리는 건 죄악이다.
둘째, 밥 한 그릇이 내 앞에 오기까지 수고한 모든 손길 때문이다.
어려서 나는 논에서 모를 찌고 벼를 져 나르며 일손을 보탠 경험이 있다.
그러면서 세상에 농사만큼 힘든 게 또 있을까 절감했다.
그야말로 삭신이 저리는 일 년 간의 정성을 거쳐야 비로소 한 톨의 쌀알이 생긴다.
그리고 쌀을 씻어 솥에 안치고 불 조절을 잘하며,
반찬을 굽고 튀기고 무쳐야 비로소 밥상이 차려진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하나의 음식이 내 입에 오기까지
50여 차례의 손길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그런 밥을 배가 좀 부르다고 버리는 것은 결코 예의가 아니다.
셋째, 밥을 먹는 게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한 행위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혼밥'이 사회적인 관심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밥을 먹는 건 적어도 '사회적 행동'이라고 나는 믿는다.
밥은 가족끼리, 혹은 친구끼리 어울려 먹어야 맛이 난다.
음식의 질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같이 먹느냐 하는 것이 밥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요리문화연구가 아사코 이와마 같은 이는
"배고픔을 깨닫는 것은 타자를 만나기 위한 순환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든 식사는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기 위한 제의이고,
따라서 그 제물을 버리는 불경한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넷째,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바로 밥의 재료가 되는 것들,
그러니까 쌀이나 채소나 고기 같은 것들의 생명 때문이다.
오늘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밥상을 한번 둘러보시라.
깨소금으로 무친 콩나물, 석쇠에 구운 고등어, 고추장에 볶은 돼지고기가 있을 것이다.
보자, 이들은 모두 '시체'들 아닌가.
지금 얌전히 내 앞에 놓여 있지만, 한때는 살아서 꿈틀대던 생명 아닌가.
밥을 먹는다는 건 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저 목숨을 빼앗고 살해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게 기꺼이(?) 목숨을 내민 저 생명들 앞에서 어찌 경외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설가 K가 '쓰레기통' 운운한 것이 물론 내게 과식하지 말라는 충고인 줄 안다.
요즘 다이어트 때문에 '먹고 살기'보다 '안 먹고 살기'에 더 애쓰는가 하면,
소위 '무한 리필'을 제공하는 음식점에 엄청난 손님이 모이기도 한다.
세상은 정말 다양해졌고 먹거리는 넘쳐난다.
이제 먹을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예전 같은 시절은 아니다.
그래도 밥은 알맞게 만들어 맛있게 먹는 게 좋겠다.
가정에서든 음식점에서든 남겨 버리지 말자. 우리에겐 그럴 권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