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최고의 한국영화 중 하나가 [꽃섬]이다. 서사를 지탱해가는 풍부한 이미지, 한 번 몸 안에 들어오면 쉽게 빠져나가지 않는 울림 있는 영상들, 그것들은 서사의 산문성을 넘어서서, 불가해한 삶의 신비를 설명할 수 없는 시적 세계로 전환시켰다.
단편 [소풍]으로 칸느 영화제 단편부분 대상을 받은 송일곤 감독의 첫 장편 영화 [꽃섬]은, 저예산 디지털 영화로 촬영되었고 흥행에 실패했다. 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 [거미숲]은,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뛰어난 작가주의 영화의 정수를 보여준 [꽃섬]의 성공을 이어가지는 못한다. 호소력 있는 스타급 연기자를 출연시키고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도입해서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상업적 시도를 해보지만, 차라리 결연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게 좋을 뻔 했다. 송일곤 감독은 대중과의 화해의 악수 대신, 더 예리하고 차가운 자기응시의 과정이 필요했다. 흥행 성공에 대한 압박감이 한 재능 있는 감독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이 영화, [거미숲]은 보여준다.
영화 시작 5분 안에 영화의 핵심 비밀이 숨어 있다는 감독의 충고를 듣고, 정신을 집중하며 오프닝 타이틀부터 화면을 주시했지만, 나는 점점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저것인가? 너무나 결말이 훤하게 보이는 구조, 외딴 산장에서의 치정 살인사건과 그것을 목격한 주인공, 도망치는 범인의 정체는, 스릴러 장르의 틀을 빌려온 영화답지 않게 너무나 정직하게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거듭 의심한다. 정말 저것인가? 저것뿐인가?
불행한 것은, 우리들의 그 예상이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감독은 관객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패인이다. 그 정도 트릭으로 관객의 허를 찌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스릴러가 아니다. 스릴러가 갖고 있는 긴장과 공포가 없다. 오히려 인간의 내면적 상처를 다루는 심리 드라마이다.
[거미숲]은 한 남자의 사라진 기억 속에 저장된 고통스러운 상처 탐방기이다. 외형적으로 그 상처들은 사라졌지만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의 깊은 동굴 속에 저장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일종의 통과제의다. 자신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두운 동굴을 통과하여 새로운 세계 속으로 우리는 길 떠나지 않으면 안된다.(실제로 영화의 핵심공간인 거미숲에는 외부와 연결되는 깊은 동굴이 있다. 그 동굴을 통과하면 또 다른 터널이 나온다. 그것은 현실과 비현실, 자신의 내면적 상처와 외면적 상처를 연결하는 일종의 통로이다)
방송국 프로듀서 강민(감우성 분)은 비행기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낸다. 그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다가온 여자는 새로 들어온 신입 아나운서 황수영(강경헌 분). 그녀 역시 같은 비행기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상처를 갖고 있다. 똑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은 쉽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다. 그렇다면 강민에게 다가오는 또 한 사람의 여인, 거미숲 근처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민수인(서정 분)과 강민은 어떤 상처의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이 영화를 해독하는 지름길이다.(서정은 민수인과 아내의 1인 2역을 하고 있다)
강민은 불가사의한 미스터리 세계를 취재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 청취자의 제보로 그는 거미숲의 전설을 취재하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간다.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민수인은 그를 거미숲으로 안내한다. 그 거미숲에는 아픈 상처의 과거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과거는 현재의 강민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의 두 여자, 아니 세 여자, 즉 그의 아내 또 새로운 여자 황수영, 지금 곁에 있는 민수인까지 거미숲의 끈끈한 거미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신차려보니까 죽은 사람이 바로 나야, 믿을 수 있겠어?]
숲과 동굴의 상징은 의외로 간단하다. 풍요로운 자장을 형성하며 다양한 변주를 이루어낼 수 있는 영화 속의 핵심공간은, 그러나 내러티브의 효과적 전개를 위해 심층적으로 탐구되지는 않는다. 송일곤 감독의 뛰어난 단편 [간과 감자]를 기억하는 관객들이라면 왜 그가 직설적 화법으로 관객들에게 프로포즈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거미숲 별장의 끔찍한 살인사건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러나 오프닝 시퀀스를 눈여겨 본 관객들이라면, 영화의 반전은 기대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스릴러의 묘미가 살아나려면 내러티브가 진행되는 사이에 조금씩 비밀을 풀어놓고 그것들을 서로 얽어가야만 한다. 그러나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흘리는 정보들은 치밀하지 못하고, 그것들은 지속적으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며 관객들을 유인하지 못한다.
[거미숲] 역시 [꽃섬]처럼 몇 개의 울림 있는 이미지를 거느리고 있다. 검은 숲을 배경으로 등을 돌린 여인의 설명할 수 없는 신비, 햇빛의 손이 닿지 않는 음습하고 빽빽한 숲의 상징, 이런 것들이 영화 전체에 광휘로운 빛을 던져주고는 있지만, 치밀한 사건 전개의 매력도, 충격적인 반전도 등장하지 않는 미스터리 스릴러다. 우리들이 읽을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통과제의를 거치고 있는 한 불행한 영혼의 내면이다. [거미숲]은 차라리 그쪽으로 더 깊은 탐구를 했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