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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人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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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산행기록(글,사진) 스크랩 산행기 2/1 북한산
배슈맑 추천 0 조회 41 09.02.02 16:2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산행참가자) 김일상,이주형,김우성,장만옥,이병호,김기표,이승무,

                  정수진,정종기,방효근,정재영,김종석,배기호 (13명)

(산행시간표)

2/1  09:00   불광역 7번(서부시외버스터미널)

      10;00   북한산성 입구 출발

      10;25   보리사/원효봉,대남문 갈림길

      11:30   위문

      12:00-13:00 노적봉 안부/식사, 휴식

      13;20   용암문

      13;45   동장대

      14:00   대동문

      15:00   아카데미하우스

                    5시간   

 

 (원효봉)

2/1(일) 한 주일의 습관을 실행한다..

제목 붙인다면..'건강한 백수연습"이라고나 할까..

암튼 주말 아침 일찍 눈뜬 내 몸뚱아리 한짐에, 작은 배낭 걸치면 그런대로 어울리는 차림새다.

지하철과 버스를 연계시켜 차비를 절약하게 해준 어느 훌륭한 정책설계자님께 무한히도 고마움을 느끼며,

그렇게 착한 시민의 본분으로 불광동 지하역사 7번 구멍을 찾아 무심한 발길을 옮겨 놓는다.

 (보리사)

경기도 시외버스까지 연계하여 100원 추가로 북한산성 입구에 내려서고,..

공짜로 태워준다는 산성안동네 식당차를 애써 외면하고..성한 두다리로 등산객 본분도 지키며..

일제고사 거부로 퇴직당한 어느 선생의 복직을 위한 서명운동에 선뜻 답하질 못하고..

어린시절 학교 운동장에서 의자(걸상이라 했던가..)에 시험지를 올려 놓고 땅바닥에 앉아서 치루던 일제고사가 생각났다..

암튼 시험치는거 좋아할 아이들은 없을텐데...부디 어른들 진흙탕 싸움에 착한 아이들은 끌어들이지 말거라..

 (개연폭포)

좌우로 북한산성 12성문을 이어가는 원효봉,의상봉 능선을 훔치며..

훌륭하신 대사님들의 영혼을 호흡하며 작은 氣라도 받아 볼까 하며..

애써 양미리 소금구이 냄새를 외면하고 보리사 삼거리에서 쉬운 대남문 길 버리고

백운대 위문길로 접어드니, 얼음으로 굳어 버린 개연폭포 하얀 물길이 오늘 날씨와는 달리 봄날은 아님을 일깨운다.

 (노적봉 북사면)

대동사,상운사 갈림길에서 국립공원 산성 안을 누더기 깊는, 佛心의 난개발 증축에 구토하고..

애써 고개 돌리니 노적봉 낟가리가 겨울 눈에 축축하다.

기원 초기 삼국의 불타는 건국 의지가 이 계곡을 가득채우는 민족의 발원이었다면..

부아악 정상에서 내려다본 이곳이

한반도 호랑이의 심장부로 자처할만한 그런 땅으로 보였을까..

개루왕의 눈물이 녹아 내린다..

잃어버린 왕국의 썰렁함이 흘러 내린다..

 (만경대서사면)

北漢山이니 三角山이니 말들도 많지만..

인수,백운,만경 너희 셋은 뿔모자를 뽐내면 그만일터..

(南)漢山이 어찌 너희와 대비하겠느냐..

 (백운대서봉)

벼랑에 비쳐지는 핏줄같은 나목들을 올려다 본다..

이 땅, 어느 구석구석이라도 뻗쳐 나갈 생명의 역사를 느끼며..

내 발길이 아직은 살아 있음을 확인하며..

가쁜 숨과 뻐근한 장단지를 끌며 위문 발치에 올라선다.

 화사한 품위로 내 육신과 산길도 장식해 보고.. 

 (백운대)

강인하고

예쁜 뿔(角)들..

 곧은 내림으로 그 기상을 뽐내고..

 천년 도읍의 상징으로 살아..

 생명의 용트림을 간직하고 있는 네 심장을 뒤돌아 바라보며.. 

그윽히 바라보는 저 벌판에서..

오늘도 너를 향하는 수많은 백성들의 눈망울이

봄날을 기다리는 버들가지의 촉촉함처럼

배부른 행복을 쏟아 달라고 빌고 있을터인데..

 (백운대)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백운대 높은 뿔위에서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한 겨울 경제가 어려워 찬바람이 시려와도,

이른 봄날처럼 서럽게 펄럭입니다.. 

 (노적봉 안부)

만경대 릿지 길을 우회하는

용암봉 아래 능선을 따라 쇠줄잡이로 돌아 내려..

노적봉 아래 양지 바른 곳에서

낙엽 방석에 고단한 몸 앉히고,

한잔 이슬이에 불끈 솟아 나는 다릿심을 보충하고..

세상만사 하잘 것 없는 佛心을 확인하고..  

 

  (노적봉)

용암문으로 향하는 길에서 뒤돌아 보는 노적봉..

유달산 아니래도..

이순신 아니래도.

누가 저 봉우리에 이엉 엮어 노적가리 쌓아 올린듯이..

배불리 먹을 훌륭한 자본주의의 대박덩이를 이루어 주었으면..

그리하여 흐르고 넘쳐 또 흘러 흘러..

저 아랫 동네 우리 어린 백성 찬 문지방 바닥에도

온기 들어 궁둥짝 붙이고 앉아

한 술 쌀밥 배불리게 하였으면..

 (동장대갈림길)

용암문 지나 한 해 해맞이로 이름난 시단봉 갈림길

오른쪽 북한산 대피소 용암사지터에서

너나 할것 없는 본성의 시원한 생리를 해결하고

가볍게 돌아 내리니 대동문 넓은 공터에 착한 중생들이

힘든 삶의 발품을 잠시 멈추고 다리쉼을 하는구나..

어울리는 이슬이도 곁들이고..

  (대동문)

대남문까지 계획한 남은 3개의 성문이야

또 어디 이사갈일도 없으려니..

그냥 대동문밖 진달래능선 갈림길에서

아카데미매표소로 발길을 수정하고..

 (구천계곡)

굽이 돌고

九泉도 얼어 붙어 온통 사라진

황량한 겨울 계곡을 미끄러져 내리며

오른쪽 칼바위 능선으로 눈길만 따라 긋는다.

 (수락산,불암산)

수많은 중생들의 삶터를 건너

저 멀리 수락,불암이가 영 섭섭하다고..

그래 봄 바람 불면 한 번 찾아 볼껴..

 (구천폭포)

언제 녹을지 모를 찬 계곡을 올려다 보고..

다시 정신 차려 조심조심 살아 갈

아스팔트 길에 내려서서..

수유역 쌍문시장 뒷골목을 찾아들고..

꿈틀거리는 생낙지의 몸부림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2/2  道然

 

 (참고)    

북한산/ 부아악(負兒岳)

부아악이란 명칭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국망봉)의 어느 암봉 뒤에 애를 업은 형상의 바위가 붙어있다 해서 불렀다는 설(說 )과 산봉이 뿔

처럼 뾰족하게 생겨 불렀다는 (부아 →불→뿔)설이 있다.삼국시대에 부아 또는 횡악(橫岳)으로 불렀던 북한산은 고려 성종(成宗) 이후부터

1900년대까지 약 1천년동안 정상의 세 봉우리를 의미하는 삼각산(三角山), 또는 조선시대 중기까지 화산(華山), 화악(華嶽)으로 불렸다.북한

산이란 명칭은 1711년 조선 숙종이 축조한 북한산성을 염두에 두고 남한산(성)과 대비하여 "한강 북쪽의 큰 산" 이란 의미로 1900년대 초부

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 북한산 역사

(삼국사기) 기원전 18년경,고구려 동명성왕의 아들인 온조와 비류가 남쪽에 새나라(백제)를 건국하고자 북한산(부아악)에 올랐다고 하며, 백제의 개루왕이 서기132년 산성을 쌓았다. 삼국시대에는 전략요충지인 북한산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격전이후 진흥왕이 북한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를 비봉에 세우고, 557년 한강 이북지역에 행정구역인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사찰)신라시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수도를 하여 원효봉과 의상봉이라는 지명을 남겼으며, 원효대사가 상운사와 삼천사를 창건하였고 이

어서 승가사와 도선사가 창건되었다.

고려 시대 태조 왕건이 중흥사를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고려 8대 현종(顯宗)이 북한산에서 승려 생활을 할 때 진관(津寬) 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國師)로 봉하고 1011년 진관사를 창건하였으며, 거란족이 침입 하였을 때 북한산성 계곡 중흥동에서 피난 생활을 하

였다. 고려 예종 1109년 탄연(坦然)이 문수사를 세웠다. 고려 말 우왕 1388년 최영장군은 중흥성(북한산성의 전신)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

킨 바 있으며, 원증국사(圓證國師) 보우가 중흥사를 중건하고 그 옆에 태고암을 지었다.

조선 초 무학대사가 한양을 도읍으로 삼기 위해 북한산을 답사하였으며, 수양대군 (세조)이 천문관측을 위해 보현봉을 올랐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수도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이 멀리 피신하는 사태가 발생된 이후 북한산성 축조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이에 대한 오랜 기간

의 찬반양론 끝에 숙종(肅宗)이 1711년 전란 시 피난처 및 방어지로 삼기 위해 단 6개월만에 7,620보(步),약 8.5㎞에 이르는 오늘의 북한산성

을 축조하였다. 이어 북한산성의 외성 (外城)으로 1713년 탕춘대성을 축조하기 시작했으나 신하들의 반대 의견이 많아 완성을 보지는 못하였

다. 숙종 이후 북한산성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이 약화되어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로 인한 방치와 전란 시의 화재, 자연재해 등으로 성곽

을 비롯한 주요시설, 사찰들이 크게 훼손되었다.

일제 시대 때에는 일본 헌병대가 주둔하여, 의병과 독립군이 북한산을 거점으로 삼을 것을 우려, 북한산 성내 대부분의 시설과 사찰을 불태웠

다고 하며, 1927년 백운대에 쇠난간을 설치하고 철심을 박아 민족정기를 훼손하려하였다. 철심은 1980년대 모두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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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2.03 12:28

    첫댓글 정말 부지런하신 우리 고문님, 항상 감탄할 따름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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