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들고 마루로 나와 앉았다. 이제서야 실내 나들이를 나선 까닭은 겨우내 냉기서린 마루가 적응이 되지 않아서였다. 밑자리를 깔고 등받이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건너편 빌라 뒤편에 심어놓은 소나무의 송화가루가 날릴세라 조심스레 창문을 여니 아직은 바람이 서늘한 느낌이다. 엇그제께만 하여도 금새 여름이 다가오는 듯 하였었다. 날씨가 변덕을 부리는 것은 수많은 어린 생명들을 앗아가버린 팽목항의 슬픔이 남아서일까? 연일 계속되는 뉴스를 보면서도 가슴 한구석에 아픔을 느끼는 것은 나 뿐만은 아니리라.
오전엔 머리에 염색을 하였다. 지난 주 이발을 하고 염색을 하였었는데 제대로 되질 않아서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은 몰라도 귀밑머리의 센 모습은 보기가 싫었다. 나이듬이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음아파할 것만도 아니다. 눈 침침해 오고 정신이 해맑지 않은 것도 다 사용한 것만큼 닳아 없어지는게 세상 이치일테니...
그러나 요즘 같아선 살아 간다는 것이 부질없고 피곤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통계적으로 따지자면 전체 세계인구가 먹고 사용할 곡물과 연료가 충분하다고 하였다. 위정자들마저 약육강식의 세상이라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남의 불행을 돌아보지 않는 현실에서 그 무슨 희망을 안고 살아간단 말인가?
선진 외국의 언론들이 우리나라를 빗대어 혹평을 하고 있다. 소위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였다는 나라가 이번 세월호 사고를 당해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육지에서 가까운 곳인데도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꺼져가는 생명들을 바라다만 보고 있었는지...사실 따지고보면 할말이 없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전후 저들의 원조를 받던 나라가 그새 돈 좀 벌었다고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리듯 까불고 우쭐대더니 그것 보란 식으로 고소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거 같다.
돈이 많다고, 군사력이 우수하다고 선진국이 아니다. 솔직히 나는 그동안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좋은 감정은 아니었다. 힘약한 인디언을 그들의 생활터전에서 무력으로 쫒아내고, 아프리카 흑인들을 잡아오거나 사들여서 부려먹던 약탈국가...
그래도 그들만의 리그일진 몰라도 어려울땐 철저하게 대의를 내세우며 국민의 생명을 끔찍하게도 귀하게 여긴다. 그게 우리와 그들 선진국의 다른 모습일 것이란 마음이 든다. 그러한 미국의 약탈문화와 일본의 퇴폐문화를 롤모델로 받아들인 우리사회...
많은 저명인사들이 언론에 나서서 국가를 개조하는 수준까지 틀을 바꾸어야 한다고들 한다. 시스템을 바꾸고 마음을 가다듬자는...그러나 이젠 선량한 국민들마저 믿거나 쉽게 동의하질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 스스로가 마음이 변하길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우리는 그렇게 수십년을, 아니 평생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냥 시간이 흘러 잊어버릴 수 밖에는...
마당에는 일찍 옮겨심은 고추모가 꽃잎을 피워 냈다. 아직은 아침기온이 3, 4도에 머무니 빼었던 목을 다시 움츠릴만 하다. 그래도 날이 갈수록 자두 열매가 점차 굵어져가고, 감나무도 꽃맺음을 준비해간다.
골목은 연휴를 맞아 야외로 떠났는지 간간히 들리던 애 울음소리도 그쳤다. 바야흐로 계절은 신록의 5월이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계절 중엔 4월이 좋았다. 녹음이 우거지면 좋다고들 하지만 5월이 되면 식물들에게는 각종 병해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어제 등산길에서도 독사를 만났다. 하마트면 발로 밟을뻔 하였었다.
바지를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서니 강변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시원하다고 해야 할 것인지, 서늘한 것인지를 가름하기가 어렵다.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이라지만 국민모두가 허탈감과 깊은 슬픔에 잠긴 이맘이면 평상심을 잊어버림직도 하겠다. 잠시동안 생각이 그곳에 머물러 있으니 차가운 바닷바람이 가슴으로 파고드는 느낌이다. 서편 하늘을 바라보며 불어오는 강바람에 옷깃을 여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