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오까가 예리한 눈빛으로 조서를 훑어 내리고 있다. 그 앞에 앉아 있는 두한은 담담한 모습이다. 마루오까가 그 옆에서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형사를 향해 다가오라고 손짓을 한다.
마루오까: 담배 있으면 좀 꺼내 놓게. 그리고 자넨 그만 나가 봐.
형사: 예.... (주머니에서 담배를 내어주고 나간다)
마루오까: (두한 앞으로 밀어 놓으며) 태워도 좋다.
두한은 담배를 바라볼 뿐 손을 대지 않는다.
마루오까: 긴또깡... 네가 지금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는지 알고 있나?
두한: .........................
마루오까: (계속 조서를 넘기며)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다시 구속되면 가중처벌에 잔여 형기까지 채워야 하겠군. 족히 몇 년은 세상 구경하기가 어렵겠어.
두한: 잘 알고 있소.
마루오까: 그런 줄 알고 있으면서도 함부로 주먹을 휘둘렀다 말인가?
두한: ...........................
마루오까: 정말 대책이 서지 않는 친구로구만. 이번 일로 넌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결코 무사히 빠져나갈 수가 없어.
두한: 마음대로 하시오.
마루오까: 마음대로?
두한: 그렇소.
마루오까: 그야말로 배짱이로군. 이봐 긴또깡.... 너는 23명이나 되는 운동선수들을 반병신으로 만들었다.
두한: (비웃듯)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요?
마루오까: 뭐라고..........?
두한: 그들은 여럿이었지만 나는 혼자였소. 더구나 그들은 술에 취해 추태까지 부렸소.
마루오까: .....................
두한: 그들은 자신들의 수와 힘을 믿고 시비를 걸어왔소. 헌데 내가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찰들은 나를 체포했소.
마루오까: 반성을 해도 모자랄 판에 아주 큰소리를 치는구만..
두한: 적어도 나는 부끄러운 싸움을 한 적이 없소.
마루오까는 두한 모르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마루오까: 정정당당했다.....?
# 2 혼마찌깡 거실
하야시가 고압적인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나미꼬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미꼬: 모든 게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하야시: ..................
나미꼬: 김두한 오야붕이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머리를 바닥까지 조아리며) 부탁드리겠습니다, 형부.
하야시: (싸늘하게)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으니 그만 물러가라.
나미꼬: 형부...........
하야시: 물러가라 하지 않는가.
나미꼬: 도움을 주신다는 말씀을 듣기 전에는 일어서지 않겠습니다.
하야시: 내 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인가?
나미꼬: .....................
하야시: 처제는 지금 대단히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 김두한은 적이다. 그것도 상당히 위협적인 적이지. 헌데 처제는 사적인 감정 때문에 심지어는 내 앞에서조차 그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다.
나미꼬: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하야시: 그렇다면 처제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 그리고 앞으로 사쿠라 운영을 제외한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도록 해. 아무리 처제라고 해도 내 뜻에 어긋나는 행동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나미꼬: 형부....?
하야시: 이야기는 다 끝났다. 그만 나가봐. (외면한다)
나미꼬: ...............(절망스럽고)
# 3 종로 경찰서 외경(아침)
미와: (E)그예 긴또깡이 또 사고를 쳤구만.
# 4 동 고등계
미와가 고등계 형사들과 조회를 하고 있다.
미와: 내 그럴 줄 알았어. 도대체가 사고를 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것이 바로 놈에 타고난 기질이란 말이야. 어리석은 놈... 쯧쯧쯧
김태서: 마루오까 경부가 놈을 맡았다니 일이 아주 재미있게 될 거 같습니다.
문달영: 그렇습니다, 경부님. 마루오까 주임은 아마도 지난번에 망신을 당한 빚을 톡톡히 받아내려 할 것입니다. 게다가 긴또깡에게 폭행 당한 피해자들 중에는 내노라하는 집안의 자제도 다수 포함돼 있다고 합니다.
미와: 안됐어.. 형무소에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말이야.
오무라: 형무소가 제 집 같은 녀석이 아니겠습니까? 나중에 돌아보면 아마 바깥에서 산 날보다 형무소에서 산 날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게 그 녀석의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미와: 어쨌든 한동안은 쓸데없이 골치를 썩일 일은 없겠구만.. 막중한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그 긴또깡 생각만 하면 집중이 안된단 말씀이야.. 전생에 나하고 도대체 무슨 악연이었는지...
도리질을 치는 미와의 모습에서...
# 5 동 종로서 밖
정진영과 김무옥, 문영철, 양코, 워싱턴, 번개들이 정문 앞에서 목이 빠져라 경찰서 안을 바라보고 있다.
양코: 어떻게 돌 것 같냐, 진영아? 지난번처럼 또 두한이가 징역을 살아야 하는 거냐?
정진영: 글쎄...
양코: 글쎄라니... 넌 거시기 뭐냐 변호사가 되려고 했던 놈 아니냐? 그런데 니가 모른다니?
정진영: 기다려보자...
잠시 후, 경찰서 정문으로 김영태가 나온다. 김영태를 둘러싸며 몰려드는 그들...
김무옥: 워떻게 되어부렀습니까, 형님?
김영태: (도리질 치며) 좋지 않아. 두한이를 담당하고 있는 경찰이 바로......마루오까 경부다.
모두들: ................?
양코: 마루오까요?
와싱턴: 이거야, 원.... 완전히 원수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격일세.
양코: (침을 뱉으며) 젠장, 재수도 더럽게 없지...
번개: 그러게 말이에요.
정진영: 두한이는 만나보셨습니까?
김영태: ...............(고개를 가로젓는다)
정진영: 난감하게 됐군요.
김영태: 일단은 우미관으로 돌아가서 대책을 마련해 보세. 자 가자...
김영태가 앞서가면 모두들, 한숨을 쉬며 어깨에 힘이 빠진 듯이 따라간다.
# 6 권번 방안
설향이 멍하게 앉아 생각에 빠져 있다. 그 위로....
정운경: (E)나와 결혼을 해주시지 않겠소?
# 7 회상(36회에서)
정운경: 그러니까 이를테면... 청혼을 하는 것이오.
설향: 손님?
정운경: 갑작스럽게 이러는 것이 당황스러울 거요. 하지만 이건 내 진심이오.
설향: 죄송합니다. 저는...
정운경: 지금 대답을 달라는 것이 아니오. 물론 그대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소.
설향: ..................
정운경: 나는 서두르지 않겠소. 천천히 설향씨의 마음을 얻고 싶소.
설향: 저는..........
정운경: 지금은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시오. 나중에.... 깊이 생각해서 답을 주시구려...
# 8 다시 방안
설향이 생각에서 깨어난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 때 아이란이 설향을 부르면서 부리나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아이란: 설향아.. 큰 일 났어.. 두한 오라버니가...
설향: ..................?
아이란: 글쎄 두한 오라버니가........
설향: 숨 좀 돌리고 천천히 말해. 두한씨가 어떻게 됐는데?
아이란: 경찰서에........또 경찰서에 끌려갔대.
설향: (놀라며) 경찰서? 왜?
아이란: 왜긴 왜겠어? 간밤에 대판 싸운 모양이야. 일본 운동선수들을 여럿 다치게 했대.
설향: 일본 사람들을...?
# 9 종로서 유치장
두한이 철창 안에 갇혀 있다. 외근계 정복 순사 두 명이 다가와 문을 연다.
순사1: 긴또깡....
두한: ...........?(고개를 돌려 경찰을 본다)
순사1: 나와라.
두한: 조사할 게 더 있소?
순사1: 잔말 말고 나와..
두한이 일어나 나오면 순사들이 두한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그리고 끌고 가면...
# 10 동 복도
복도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향하자 두한이 멈칫한다.
두한: 조사실은 저쪽이 아니오?
순사1: 잔말 말고 따라와.
두한: ...........?
그렇게 어디론가로 끌려가면...
# 11 유도장
마루오까가 정 중앙에 정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양편 벽쪽으로 유도복을 입고 있는 수십 명의 사내들이 역시 정좌하고 있다. 그들 뒤로는 정복 순사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다. 잠시 후 순사들이 두한을 데리고 들어온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한을 향한다. 두한은 어리둥절하다.
마루오까: 이리 데려와라.
두한이 마루오까의 옆으로 끌려와 선다.
마루오까: 이 자는 종로의 건달 긴또깡이다. 현재 이 자는 폭행혐의로 우리 종로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자는 어제의 싸움이 정당했다며 무죄를 거듭 주장하고 있다.
두한: ....................?
마루오까: 이 신성한 도장에 이 자를 세운 이유는 과연 이 자의 주장이 합당한 것인지 제군들의 의견을 묻기 위함이다. 부디 무사도 정신에 입각해 판단해 주길 바란다.
유도복들: 하이....
마루오까: 긴또깡.. 너에게 이런 기회를 주는 것은 네 스스로 협객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너는 지금부터 한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하라. 알겠나?
두한은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마루오까의 눈을 직시한다.
마루오까: 대답하라, 긴또깡. 진실만을 말하겠는가?
두한: 좋소.. 그렇게 하겠소.
마루오까: 싸움의 발단은 어떠했는가? 시비는 누가 먼저 걸었지?
두한: 나는 그들과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소. 주먹패가 아닌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건달의 수치요.
마루오까: 먼저 시비를 건 쪽은 피해자인 운동선수들이었단 말인가? 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는가?
두한: 그렇소. 그들은 나와 함께 있던 여자를 희롱하고 내 자존심을 짓밟았소. 그리고 여럿이 내게 한꺼번에 덤벼들었소.
마루오까: 상대는 몇이었지?
두한: ................?
마루오까: 나에게 답하는 자리가 아니다. 말해 봐라.
두한: 자세히는 모르나 스무 명이 넘었던 것 같소.
마루오까: 그 많은 상대와 혼자서 싸웠단 말인가?
두한: 그렇소.
그러자 좌중에서 탄성이 인다.
마루오까: 싸움을 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함께 있었던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 것인가?
두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소.
마루오까: (끄덕이고는) 훌륭하다. 너는 정말로 무사도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로구나.
두한: .............?
마루오까: 제군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 자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걸고 이십삼 대 일로 싸웠다. 긴또깡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모두들 아무런 말이 없다. 좌중을 둘러보던 마루오까는 더욱 큰 소리로 묻는다.
마루오까: 유죄인가 무죄인가?
제자1: 무죄입니다.
제자2: 무죄입니다.
모두들: (일제히) 무죄입니다.
두한: ......................?
마루오까: ............(흐뭇하게 웃으며 끄덕인다) 긴또깡, 너는 이제 자유의 몸이다. 나가도 좋다.
두한: ................?
여전히 어리둥절한 두한의 표정에서...
# 12 동 유치장 면회 대기실
설향과 아이란이 유치장 면회 담당 순사 앞에 서 있다.
순사: (서류철을 뒤적거리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아이란: 김두한이요. 김두한...
순사: 김두한이라.... 어 여기 있구만.. 근데 벌써 나갔구만...
설향: ...........?
아이란: 예? 나가다니요?
순사: 석방이 됐다구..
아이란: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 번 확인해 주시겠어요?
순사: (다시 보며) 맞아. 내가 교대하기 전에 석방이 됐어.
설향: 정말이죠? 석방된 게 확실하죠?
순사: 아 그렇다니까...
아이란: (설향을 보며) 어떻게 된 거지...?
설향: 별 일 아니었나보지.. 아무튼 다행이다. 정말 잘됐어...
아이란: .............?
# 13 설렁탕집
마루오까가 씩씩하게 설렁탕을 먹고 있다. 그 앞의 두한은 숟가락도 들지 않은 채, 우두커니 마루오까의 얼굴을 보고 있다.
마루오까: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고는) 여기 한 그릇 더 주시오.
주인: 예. 알겠습니다요.
마루오까: 조선의 설렁탕은 참으로 그 맛이 일품이란 말이야.. 먹어도 먹어도 전혀 질리지가 않아.. 허허허...
두한: .....................
마루오까: 왜 그러고 있는가? 입맛이 없나?
두한: 이유가 뭡니까? 나한테 원한이 많을 텐데 왜 풀어주는 겁니까?
마루오까: 여태 그 생각을 하고 있었나?
두한: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오.
마루오까: 나는 경찰이기 이전에 무도인이다. 패배를 승복하지 못한다면 어찌 무도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두한: ....................?
마루오까: 이 마루오까에게 패배의 아픔을 가르쳐준 너를 존경한다. 그런데 존경하는 사람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을 어찌 가만 볼 수만 있겠는가?
두한: ...................
마루오까: 이 정도면 충분한 이유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두한: 놀랍소. 일본인들 중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니 참으로 놀랍소.
마루오까: 나 또한 그렇다. 자네로 인해 조선인들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두한: ....................
마루오까: 실은 우미관으로 자네를 만나러 가려고 했었네.. 그런데 자네가 너무 빨리 잡혀 들어왔어. 나는 자네에게 의형제를 맺자고 하려고 했었네.
두한: ..................?
마루오까: 어떤가? 나와 의형제를 맺겠는가? 일본인과 조선인을 떠나 사내 대 사내로서 말일세...
두한: .....................
마루오까: ..................?
두한: 나는 일본 사람을 싫어하오.
마루오까: 역시 거절이군. 허허허..... 그럴 거라 생각했었지.
두한: 하지만...........
마루오까: ..................?
두한: 마루오까 당신이라면, 사내 대 사내로서 기꺼이 형님으로 모시겠소.
마루오까: 정말인가? 하하하... 고맙네. 꽉 막힌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구만. 내 제안을 받아줘서 고맙네, 아우님...
두한: .......(미소).........
마루오까: 내가 술은 즐겨 하지 않지만 오늘은 좀 마셔야겠네... 이보시오, 여기 술 좀 가져오시오.
두한: 오늘 느낀 게 참 많습니다. 사내다운 게 무엇인지, 진정한 협기가 무엇인지 오늘 마루오까 형님한테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술은 이 두한이가 사겠습니다.
마루오까: 하하하... 술이야 누가 사면 어떤가? 우리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음껏 마셔보세나. 하하하하..
# 14 종로서 고등계
미와가 책상을 박차고 일어선다.
미와: 긴또깡을 석방하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김태서: 그게..... 일이 좀 이상하게 됐습니다.
미와: 왜 그 놈을 놓아주었단 말인가? 자세히 말해봐라. 자세히....
김태서: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긴또깡에게 죄가 없다해서 석방을 했다고 합니다.
미와: 무슨 소리야? 없는 죄목을 만들어서 잡아둬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죄가 없어? 이거 우리 종로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구만.
김태서: ................
미와: 감히 그런 결정을 내린 자가 누군가? 실무 책임자가 있을 것이 아닌가?
김태서: 마루오까 경부가 직접 내린 결정이라고 합니다.
미와: 마... 마루오까 경부가.......?
김태서: 예, 경부님...
미와: 이런.......이런 미친 자를 보았는가? 그런 망신을 당해놓고 긴또깡을 풀어줘?
# 15 우미관 앞
번개와 삼수들이 부리나케 뛰어오고 있다. 번개가 제일 앞서 쏜살같이 기도들을 밀치고 들어간다.
번개: 야야.. 비켜봐. 급해...
# 16 사무실
김영태들이 침통하게 앉아 있는데... 번개가 급히 뛰어들어온다.
번개: 형님.. 형님들...
문영철: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번개: 큰형님이 풀려나셨습니다. 두한 형님이요..
모두들: ................?
김무옥: 니 시방 뭐라고 혔냐? 누가 풀려나?
삼수들도 뒤따라 들어온다.
번개: 아 두한 형님이 풀려나셨다구요.
양코: 참말이여? 두한이가 참말로 풀려났어?
번개: 아 그렇다니깐...
삼수: 어떻게 된 건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종로회관에 술을 마시고 계십니다.
양코: 뭐, 종로회관........? 사람을 잘 못 본 거 아니여? 풀려났으면 여그로 왔겄지, 거그서 혼자서 술을 마셔?
삼수: 혼자 계시는 게 아니구요..
양코: 그럼 누구랑 있는디? 우린 여그 다 모여 있는디...
삼수: 마루오까 경부하고 함께 계십니다.
문영철: 뭐, 마루오까?
김무옥: 헛것을 본 것이구만... 아야 삼수야, 두한이가 마루오까랑 술을 마시고 있다고? 차라리 신선하고 장기를 두고 있다고 혀라...
삼수: 정말입니다. 정말로 두한 형님이셨다구요.
번개: 우리가 바봅니까? 두한 형님도 몰라보게요. 야 병수 너두 봤지?
병수: 예...
정진영: 정말인가 본데요, 영태형님.
김영태: 설마 세 녀석이 다 잘못 봤을 리는 없겠지... 종로회관이라고 했냐?
세사람: 예, 형님..
와싱턴: 이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만.. 방금 전까지 면화조차 안되던 두한 아우님이 종로 한 복판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김영태: 가보자.. 가보면 알겠지..
김영태가 일어나면 모두 일어나 나간다.
양코: (따라 나가며) 만약 두한이가 아니면 넌 그냥 콱... 알제?
번개: 가자고.. 가보면 될 거 아니야..
그렇게 모두들 사무실을 빠져나가면..
# 17 사쿠라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나미꼬의 얼굴 위로 두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두한: (E)이보시오, 나미꼬양.. 난 일본 사람이 죽도록 싫소. 일본은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의 원수요.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아시오? 만주의 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이시오. 아시겠소?
나미꼬는 고개를 가로젓다가 다시 술잔을 들이킨다.
나미꼬: (E)김좌진이라면 우리 일본에겐 그야말로 대역적이 아닌가? 만약 이 사실을 아버님께서 아신다면.....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다시 도리질을 치는데 노크소리와 함께 시바루가 들어온다.
시바루: 다녀왔습니다, 사장님..
나미꼬: 그래 좀 알아봤나요?
시바루: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미꼬: 이상한 일이라니요?
시바루: 김두한은 벌써 석방되고 없었습니다.
나미꼬: 뭐라구요?
# 18 종로회관
김영태를 비롯한 우미관패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술상을 놓고 마주 앉은 두한과 마루오까를 쳐다본다.
두한: 앉으라니까 왜 그렇게들 보고만 있어? 영태 형님도 이리 와 앉으십시오.
김영태: ...............
두한: 아무래도 형님께서 권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모두들 경찰이라면 진저리를 치는 사람들이라서요.
마루오까: 이리들 와 앉게, 아우님들.....
양코: 아... 아우님들.........?
정진영: 두한아... 어떻게 된 거냐?
두한: 오늘부터 마루오까 경부님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내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이니까 너희들도 앞으로 나를 대하듯 형님께 대하도록 해라.
모두들: ....................?
김영태: 두한이.. 나하고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나?
두한: 일단 앉으십시오. 다 말씀드릴 테니까요. (사이) 괜찮습니다. 어서요..
김영태: 그럼 잠시 앉겠습니다.
마루오까: 아 물론....
두한: 제가 종로서에서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 마루오까 형님의 덕택이었습니다.
김영태: .................?
두한: 하지만 그것 때문에 의형제를 맺은 것은 아니구요. 마루오까 형님은 무사도를 지닌 진정한 협객이십니다. 그래서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습니다.
김영태: ........그랬..나?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얼떨떨하구만...
두한: (마루오까에게) 여기는 김영태 형님이시고, 제 동료들입니다. 형님께서도 다들 안면이 있을 겁니다.
마루오까: 그렇구만. 지난 일은 내가 진심으로 사과를 하겠네... 지난 일은 다 잊고 앞으로 잘들 지내보세.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가 성심껏 도와주도록 하겠네..
모두들: .........?(어리둥절)
번개: 저.. 정말이십니까?
마루오까: 하하하. 그렇다고 너무 사고 치지는 말고. 하하하... 자 드세나..
마루오까와 두한이 술을 마신다. 김영태와 부하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들이다.
# 19 혼마찌깡 거실
미우라의 보고를 받은 하야시와 가미소리가 심각하다.
하야시: 마루오까가 나서서 김두한을 풀어줬다?
미우라: 예. 당시 유도장에 있었던 자들에 의하면 김두한이 진정한 무사도를 지녔다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가미소리: 제 정신이 아니구만.. 그게 대일본제국 경찰 간부의 입에서 나올 소리란 말인가?
하야시: 일이 그렇게까지 될 줄이야. 혹을 떼려다가 오히려 혹을 붙인 격이 되었군.
가미소리: 크게 신경 쓰지 마십쇼, 오야붕. 마루오까 그 자가 워낙에 엉뚱하다보니 그런 일이 벌어졌을 뿐입니다.
하야시: 아니다.... 마루오까는 분명 김두한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풀어준 것이다.
가미소리: ................
하야시: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참으로 무서운 자가 아닌가? 자신을 잡으러 온 저승사자를 제 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언젠가 이 혼마찌를 넘보겠다던 김두한의 공언이 이제는 실언처럼 들리지 않는구나.
하야시의 그 모습에서 길게 디졸브 되면...
# 20 우미관 외경(낮)
두한: (E)시장통이 넘어가다니요?
# 21 동 사무실
두한이 눈을 부릅뜨고 김영태와 정진영을 번갈아 쳐다본다.
두한: 시장의 점포들이 하야시에게 넘어갔단 말씀입니까?
김영태: 그렇게 되었네. 이미 상권의 삼할 이상은 하야시가 심어놓은 일본인 상인들에게 넘어 갔다네.
두한: 그 말씀을 왜 이제야 하시는 겁니까?
정진영: 그 동안 너한테 복잡한 일이 많았잖아. 인애씨 문제나 마루오까 경부와의 결투도 그랬고.. 당장 손을 쓸 수도 없고 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야.
두한: ..................
정진영: 그간 일본 상인과 조선 상인들의 싸움으로 시장통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어. 속셈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상인들은 장사는 뒷전이고 매일 사고만 일으켰어. 그 때문에 힘없는 조선 상인들이 많이 밀려났고.
김영태: 자네가 감옥에 가 있는 사이에 하야시가 시장을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했던 것일세..
두한: 상인들의 고통이 말이 아니었겠군요.
김영태: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자네가 마루오까를 물리친 뒤로는 일본 상인들의 횡포가 잠잠해 졌다는 것이야.
두한: 2정목의 시장은 제겐 고향과도 같은 곳입니다. 그 분들이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김영태: 나도 잘 알고 있네.
두한: 지금 당장 시장에서 하야시패를 쓸어버려야겠습니다.
정진영: 그건 안돼, 두한아. 어찌 됐든 그들은 합법적으로 점포들을 사들였어. 그들에게 손을 댔다가는 경찰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야.
김영태: 진영이 말이 맞네.. 이 일은 차근차근 풀어야 하네. 함부로 움직였다간 다시 형무소 신세를 지게 될 것일세.. 우선 시장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네..
두한: 일단 가보시죠.
두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 22 우미관 부근 종로 거리(낮)
연도에 늘어선 인파들이 일장기를 흔들고 있다. 길 한 복판으로 군장을 맨 일본군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행인들 사이에 끼어 김무옥과 양코들도 군악대의 연주가 흥겨운 듯 박수까지 친다.
양코: (고함치며) 중국에 가서 뙤놈들을 박살내고 돌아오라구!
김무옥과 와싱턴도 일본군가를 따라 부른다. 양코들의 뒤로 두한과 김영태, 정진영이 와서 선다.
김영태: 여기서 뭣들 하고 있는 거냐?
김무옥: 형님........
양코: 헤헤헤. 군인들이 중국으로 간다기에 잘 싸우라고 응원을 해주는 겁니다.
정진영: 뭐, 응원?
양코: 그려.. 뭐가 잘못 됐냐?
정진영: 저들이 지금 누구와 싸우러 가는건데.. 중국에는 우리 조선 사람들의 군대도 있어. 독립군 말이야..
두한: ................?
양코: 잉? 도, 독립군?
김영태: 말소리를 낮추게... 사람들이 들어.
정진영: 한심한 짓 그만 하고 할 일 없으면 들어가서 잠이나 자.
김무옥과 와싱턴들도 머쓱해진다.
양코: 아따 난 그런 것도 모르고... 에라, 이거나 먹어라..
양코가 보이지 않게 군인들을 향해 감자를 먹인다. 두한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 군인들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다.
# 23 그 일각
이곳에서도 일본군의 행렬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최동열이 한쪽에 서서 지켜보다가 외면하듯 돌아선다.
# 24 잡지사
최동열이 책상 위로 가방을 내려놓고 앉는다. 직원1이 창밖을 내다보다가
직원1: 오늘따라 유난스럽네요. (한숨) 하긴 신바람이 나겠지요. 연일 일본군의 승전보가 날아들고 있으니.. 이러다가 정말 중국이 넘어가는 게 아닐까요?
최동열: 중국은 쉽게 쓰러질 나라가 아닐세.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결사항전에 나서고 있다고 하네. 사실 신문지상에 보도가 안되어서 그렇지 결코 일본에 유리한 전황은 아니라고 하더구만..
직원2: 그래요?
최동열: 걱정되는 건 우리 조선 백성들일세.. 거리에 나와 일장기를 흔들며 일본군을 환송하는 사람들을 보게. 그들은 일본군을 마치 조선의 군대와 착각하고 있어. 이것은 총독부의 우민화, 신민화 정책이 먹혀들고 있다는 증거야.
직원들: .....(끄덕인다).........
최동열: 더구나 일본은 학도병이라 해서 우리 조선의 학생들마저 사지에 몰아넣으려 하고 있어. 말이 지원이지 대부분 무언의 압력 때문에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끌려나가는 것이지. 그런데도 일부 친일인사들은 조선인도 병역에 복무하게 된 것이 영광이라며 지원을 독려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닌가?
# 25 카페 비너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카페는 한산하다. 김이수가 커피잔을 들었다 내려놓는다.
김이수: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게 이 커피만큼이나 쓰군.
최동열: 그러게 말일세.
김이수: 모두가 전쟁의 광기에 휘말리고 있어. 일본인... 조선인 할 거 없이 말이야.
최동열: 세월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르지. 벌써 30년 가까이 일제의 지배를 받아오지 않았나?
김이수: 슬픈 현실일세.. 참으로 비통한 현실이야...
최동열: .......................
김이수: 그런데 자넨 대낮부터 이렇게 나와 있어도 되는 건가?
최동열: 차 마시고 또 들어가 봐야지.
김이수: 내가 카페를 하지만 대낮부터 죽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스러워. 그렇게 유유자적하는 인간들 대부분이 소위 유한 계층 아닌가?
최동열: (주위를 둘러보며 쓴웃음)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구만..
# 26 시장통 외경
부감으로 보여오는 시장통의 전경이다.
# 27 그곳 사무실
두한이 그곳을 가득 채운 상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다. 정진영은 옆에서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본다.
상인1: 우리도 어쩔 수 없었네. 어리석게도 일본놈들의 농간에 당했지 뭔가?
상인2: 그 일만 생각하면 잠을 자다가도 벌떡 벌떡 깨어난다네. 생각해보게. 돈을 낮은 이자로 꿔준다기에 조금 빌려 쓴 것일 뿐인데, 날짜를 며칠 어겼다고 가게를 빼앗다니.... 눈앞에서 가게를 도둑맞은 꼴이 아니고 뭔가?
두한: .....................
김영태: 상점들을 다시 되찾을 방법이 있겠나?
정진영: 계약서가 너무 완벽합니다. 일단 본인이 도장을 찍은 이상.....
상인2: 무식이 죄지. 무식이 죄야. 어이그...
두한: 다시 장사를 하실 생각은 있으신 거죠?
상인2: 그렇다마다...
상인1: 우리같은 무지렁이들이야 천상 장사나 해먹고 살 팔자일세. 할수만 있다면야.
두한: 그렇다면 가게를 되찾아 드리겠습니다.
상인들: .................?
김영태: 두한이... 쉽게 할 이야기가 아닐세..
두한: 걱정마십쇼. 저한테 생각이 있습니다. 상인 여러분께서는 예전에 받았던 돈을 준비해 놓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 다음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나 상인들은 믿기지 않는듯 서로의 얼굴만 본다.
상인2: 정말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두한: 저를 믿고 맡겨주십시오.
상인1: 그렇게 호락호락할 놈들이 아닌데...
고깃집: 이 사람들아 두한군이 나서서 안되는 일을 보았는가? 마음 푹 놓고 다시 시장에 나와서 돈이나 많이 벌 궁리들이나 하라구.
두한: ...................
# 28 시장통
두한과 김영태들이 복잡한 시장길을 빠져나오고 있다.
김영태: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어쩌자고 그런 약속을 했어?
두한: 제 부모님과 같은 분들께서 일하는 터전을 빼앗겼는데 가만있을 수는 없습니다.
김영태: 하지만 상대는 하야시야.
두한: 그래서 더욱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정진영: 방법은 생각해 둔 게 있어?
두한: 일단 부딪쳐 봐야지. 그래서 안되면 싸우는 수밖에.....
김영태: ...................
두한: 혼마찌에 사람을 보내 주십쇼. 이 김두한이가 만나자고 한다고 말입니다.
김영태: 소용없는 일일세. 하야시는 절대로 계약을 파기할 사람이 아니야.
두한: 그렇게 될 겁니다.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입니다.
두한은 성큼성큼 시장을 빠져나간다. 김영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앞서가는 두한의 뒷모습을 보기만 한다.
# 29 명동 거리
설향이 외출복 차림으로 어딘가를 가고 있다. 뒤로 촐싹맞은 모습의 아이란이 몰래 뒤를 따른다. 설향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느 찻집으로 들어간다. 아이란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간다.
# 30 동 찻집 안
꽤 고급스러운 찻집이다. 설향이 들어오자 정운경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설향: 제가 좀 늦었나 봅니다.
정운경: 아니오. 제 시간에 맞춰 오셨소.
정운경이 설향의 자리를 빼 주고는 자리에 가서 앉는다.
정운경: 차부터 시킵시다. 웨이타.
종업원이 주문을 받는 동안 뒤늦게 아이란이 들어온다. 아이란은 정운경과 설향의 모습을 보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혼자 눈을 흘기고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는다.
정운경: 설향씨가 날 보자고 하다니.. 이런 날도 있구려..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와 있었소.
설향: 지난번에 하신 말씀에 대한 답을 드리려고 뵙자고 했습니다.
정운경: ...........아니오....지금은 듣고 싶지 않소.
설향: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제 대답은 같을 것입니다.
정운경: 그렇지가 않소. 세상 어느 누가 앞일을 예단할 수 있겠소? 지금 설향씨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 해도 나는 계속 기다릴 것이오.
설향: 정선생님?
정운경: 기왕 나왔으니 좋은 이야기나 나누다 가십시다.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아니겠소?
설향: ..................
그 한편에 앉아 있는 아이란이 갸우뚱하며 바라보고 있다.
# 31 그 밖
설향이 정운경과 나오고 있다. 그 앞에는 정운경의 차가 대기해 있다.
정운경: 타시오. 권번 앞까지 바래다 드리겠소?
설향: 아닙니다. 그냥 걸어가겠습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닙니다.
정운경: (미소) 알겠소. 강요하지는 않으리다. 그리하시오.
설향: 그럼 살펴가세요.
설향이 가면 정운경이 잠시 보다가 차에 오른다. 곧바로 아이란이 찻집에서 튀어나와 설향의 팔을 잡아챈다.
설향: 어머나..
아이란: 나야 나.. 뭘 그렇게 놀라니?
설향: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쩐 일이야?
아이란: 곱게 차려 입고 외출을 하기에 따라와 봤다. 아닌 척 하더니 너 그분한테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구나?
설향: 그런 거 아니야..
아이란: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왜 자꾸 만나는데...?
설향: 그럴 일이 있었어. (정색하며) 근데 너 이게 무슨 짓이니? 남의 뒤나 따라다니고...
아이란: 내가.......남이니? 섭섭하다 얘...
설향: 앞으로 다시는 이러지 마.
설향이 가면 아이란이 팔짱을 낀다.
아이란: 알았어.. 알았으니까 화 풀어.. 그냥 궁금해서 한 번 따라와 본 거야. (사이) 근데 뭐라 그러디? 한 살림 차려주기라도 하겠대?
설향: ..................
아이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했냐구? 결혼이라두 하재?
설향: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하러 왔어. 그런데...
아이란: (놀라 서며) 뭐, 그럼 진짜 청혼을 했단 말이야?
설향: ...............
설향은 아무 대꾸도 없이 길을 간다. 아이란의 놀란 모습에서...
# 32 종로서 외근계
미와가 오무라와 함께 분기탱천해 채찍을 불끈 쥐고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는 마루오까를 향해 다가온다.
미와: (책상을 쿡 찍으며) 나좀 봅시다, 마루오까 경부.
마루오까: 무슨 일이십니까?
미와: 듣자하니 마루오까 경부께서 긴또깡을 풀어줬다는데.. 그게 사실이오?
마루오까: 그렇습니다.
미와: (비꼬듯) 그래요?
마루오까: 조사를 해본 결과 죄가 없어서 풀어주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미와: (버럭) 죄가 없다니...! 무고한 우리 일본 운동선수를 무려 스물세명이나 반병신으로 만들었는데 죄가 없다니?
마루오까: 죄가 있고 없고는 담당인 내가 판단할 문젭니다. 고등계에서 관여할 사안이 아닙니다.
미와: 뭐라? (가라앉히며) 이보시오, 마루오까 경부. 아직 뭔가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긴또깡 그 녀석은 우리 고등계의 특별 감시대상인 요시찰 인물이오.
마루오까: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요시찰 인물이니까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라도 하라는 말씀입니까?
미와: 당신은 지금 대일본제국 경찰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있소. 혹시 그 자한테 뇌물이라도 받은 것이오?
마루오까: 뭐요?
미와: 그렇지 않고서야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나?
마루오까: 김두한은 여자를 지키기 위해 23명이나 되는 운동선수와 싸움을 한 것이오. 그 용기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진정한 협객의 그것이었소.
미와: 협객?
마루오까: 그렇소. 내가 본 김두한은 무사도를 아는 진정한 협객이었소.
미와: 정신이 나갔군.. 정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어.. 당신이 종로서에 파견된 이유를 안다면 절대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야..
마루오까: 그 역시 잘 알고 있소. 나를 이용해 김두한을 제거하고 종로를 장악하려는 하야시의 속셈 말이오. 허나 그 일은 그들의 문제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미와: .....................
마루오까: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그만 가보시오. 피차 할 일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오? 한가하게 남의 부서 일에 관여할 시간이 없다, 이 말씀이오. 아시겠소?
미와: 건방진.... 좋다, 두고보자 마루오까...
미와가 매섭게 노려보고 돌아서 간다. 그러나 마루오까는 여전히 여유롭다.
# 33 혼마찌 대문 앞
정진영이 문영철, 김무옥과 함께 그곳에 와 있다. 문 앞으로 지키고 있는 야쿠자들이 잔뜩 경계를 한 채 묻는다.
야쿠자: (일어) 무슨 일인가?
정진영: (일어) 우리는 종로의 우미관에서 왔다. 하야시 오야붕께 우리 김두한 오야붕의 말씀을 전하려고 온 것이다.
야쿠자: (일어) 종로?
정진영: (일어) 그렇다.
야쿠자: (일어) .........(보다가) 알았다. 잠시 기다려라.
야쿠자 사내가 주위 사내에게 고갯짓을 하면 그 사내가 잽싸게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정진영들: .................
# 34 동 거실
하야시가 일본도의 날카로운 칼날 부분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미우라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온다.
미우라: 오야붕... 종로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하야시: .........종로라 했나?
미우라: 하이... 김두한의 말을 전하러 왔다고 합니다.
하야시: 김두한이...........? (잠시 생각) 안으로 들여라.
미우라: 하이...
미우라가 뒷걸음질쳐 나가면 하야시가 칼을 칼집에 집어넣는다. 잠시 후, 정진영이 들어와 예의를 표하고 앉는다.
정진영: 저희 큰형님의 전갈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야시: 말해 보라..
정진영: 저희 김두한 큰형님께서 이른 시일내에 하야시 오야붕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하야시: 김두한 오야붕이 나와 만나고 싶다?
정진영: 그렇습니다.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로 약속을 잡으셨으면 하는 것이 저희 형님의 뜻이십니다.
하야시: ....................
정진영: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야시: 좋다.. 그 쪽에서 원하는 일시와 장소를 말해보라.
정진영: 장소는 어디든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일시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하야시: ................
# 35 동 정원
나미꼬와 시바루가 대문을 들어서는데, 현관 앞으로 김무옥과 문영철이 서성거리고 있다. 나미꼬가 가까이 다가와 그들을 보고 의아하게 두 사람을 쳐다본다.
나미꼬: 종로분들이 아니세요? 여긴 어쩐 일이시죠?
문영철: 하야시 오야붕을 만나뵈러 왔습니다.
나미꼬: 형부를요? 무슨 용건으로요.........?
김무옥: 나중에 댁의 형부한테 직접 들어보씨요.
나미꼬: .................?
# 36 우미관 사무실
두한이 책상에 앉아 가볍게 턱을 쓰다듬고 있다. 김영태가 창가에 선 채로 말을 걸어온다.
김영태: 다시 한 번 잘 생각하게. 자네가 하려는 일은 혼마찌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를 바가 없네.
두한: .................
김영태: 전면전은 우리가 너무 불리하네. 현실적으로도 엄청난 조직력을 가진 혼마찌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네.. 설사 하야시패를 물리친다고 해도 우리는 끊임없이 여러 야쿠자들의 도전을 받게 될 걸세.
두한: .................
김영태: 야쿠자들은 만주나 상해와 같은 대륙 진출의 기지로 경성을 택했다고 들었네. 그들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걸세.
두한: 저 또한 포기하지 않습니다. 제 몸이 부서질 때까지 싸울 겁니다. 우린 언제나 그래왔습니다. 이기리라 예상했던 싸움을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김영태: ..............아니야.. 이번엔 달라.. 이건 마치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야...
두한: 걱정마십쇼. 죽기로 싸운다면 못 이길 적은 아무도 없습니다.
김영태: ...................
택시운전사: 어이구 손님, 조심하십쇼..
박인애: 고맙습니다. 제가 모시고 들어갈 테니 그만 가보세요.
택시운전사: 예... 그럼...
박인애가 이군을 부축해 들어가려는데 이군이 팔을 뿌리친다.
이군: 여긴 어디야? ......뭐 이래.. 이건 우리 집이잖아? 아니 이 사람이.. 술집으로 가자고 그랬더니...(다시 돌아 나가려는데)
박인애: (붙잡으며) 왜 이러세요? 아버님, 어머님 주무시고 계세요.
이군: 당신은 또 누구야? 오... 박인애씨.. 잘난 내 와이프시구만..
박인애: 들어가세요. 어서요.
이군: (뿌리치며) 놔.. 그 불결한 손을 어디다 갖다 대는 게야?
박인애: ...................
이군: 그럼 아닌가? 당신 가슴속엔 온통 다른 사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차 있지 않소? 당신은... 내 여자가 아니야..
박인애: ....................
이군: 며칠 전에 그 자가 왔을 때 차라리 따라나서지 그랬어? 왜, 갑자기 겁이라도 났나?
박인애: ..................?
이군: 아니... 아니지... 그땐 경황이 없어서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았을지도 모르지... 개같은 자식... 아무리 막돼먹은 불량배라지만 남의 아내를 넘보다니..
박인애: 함부로 상상하지 말아요. 그 분은 그런 분이 아니예요.
이군: ...오.... 이제야 본심을 드러내시는구만..
박인애: 저에겐 무슨 말씀을 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그 분을 욕되게 하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어요.
이군: 뭐야?
이군이 박인애의 뺨을 거세게 후려친다. 박인애가 저만큼 쓰러진다.
이군: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다니...
박인애: .......(눈물) 당신이... 원했던 거잖아요? 아버지와 함께 당신이 그 분에게 무슨 일을 했는지.. 나도 알고 있어요.
이군: ..................?
그 때 현관문이 열리며 시어머니가 나온다.
시어머니: 웬 소란이냐? 거기서 뭐하고 있는 게야? (놀라) 새애기는 왜 저러고 있는 게냐?
다가오면... 이군이 말없이 돌아서 안으로 들어간다.
시어머니: 무슨 일이냐니까? 얘...?
이군이 대꾸 없이 스쳐지나간다. 시어머니가 다가가 박인애를 일으킨다.
시어머니: 일어나거라.. 아닌 밤중에 이게 무슨 일이라니...
박인애: ...................
눈물 범벅인 박인애의 얼굴에서........
# 38 우미관 사무실
두한이 언제나 그렇듯 창가에 서서 창밖으로 종로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 39 사쿠라
종업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미꼬가 그들을 독려하고 있다.
나미꼬: 서두르세요. 곧 종로와 혼마찌에서 손님들이 도착할 시각이예요. 지배인.
지배인: 예, 사장님...
나미꼬: 테이블에 올릴 음식 준비는 다 됐나요?
지배인: 예.. 사장님...
나미꼬: 좋아요. 그럼 시바루상은 나가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하세요.
시바루: 예, 알겠습니다.
나미꼬: 지배인은 따라오세요.
나미꼬가 별실로 간다.
# 40 동 별실
나미꼬가 문을 열고 하야시와 두한이 만나게 될 그 방을 둘러본다. 긴 테이블의 양편에 빈자리가 하나씩 있다. 끄덕이는 나미꼬..
나미꼬: 좋아요.. 수고하셨어요.
왠지 상기되어 있는 나미꼬의 표정에서..
# 41 우미관 사무실
모든 우미관패들이 모여 있다. 김영태가 계약서와 돈뭉치들이 가득 들은 가방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는 닫는다.
김영태: 준비는 다 끝났으니 그만 일어나세.
두한: 아직 시간이 좀 이르지 않습니까?
김영태: 우리가 먼저 한 약속일세. 조금 일찍 가는 게 예의일세.
두한: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두한이 일어나면 삼수가 중절모를 내민다.
김영태: (모두들에게) 다들 정신 바짝 차려라. 혹 빈틈이 보이는 놈들은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 알겠나?
모두들: 예.
두한: 가시죠..
두한을 필두로 우미관의 전 주먹들이 그 뒤를 따라 그곳을 빠져나간다.
# 42 혼마찌깡
승용차들이 서너 대 문 앞에 대기해 있고 하야시패 사내들이 굳은 표정으로 도열해 있다. 하야시와 가미소리들이 나오면 일제히 허리를 굽히는 야쿠자 사내들... 야쿠자 사내가 차문을 열어주면 하야시와 가미소리가 차에 오른다. 그리고 중간급 오야붕들도 일제히 차에 오른다. 승용차들이 그 곳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 43 사쿠라
두한이 호위를 받으며 홀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나미꼬가 직원들과 함께 정중하게 인사한다.
나미꼬: (사무적으로) 어서 오세요.. 조금 일찍 도착하셨군요. 혼마찌에서도 출발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두한: ...(고개를 끄덕인다)
나미꼬: 이 쪽입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두한은 나미꼬의 뒤를 따라 거침없이 안으로 향한다. 부하들도 그 뒤를 따른다.
# 44 동 별실
두한이 자리에 앉아 하야시를 기다리고 있다. 그 뒤로 우미관패들이 진을 치고 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지배인이 들어온다.
지배인: 하야시상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지배인이 출입문에서 비켜서면 야쿠자들이 들어와 두한의 반대편으로 하나 둘 정열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미소리와 함께 하야시가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웨이터가 들어와 양쪽에 물잔을 놓고 나간다. 침묵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두한: 오랜만이오, 하야시 오야붕..?
하야시: 반갑네.. 서로 구면이니까 말을 놓기로 하겠네..
두한: 좋을 대로 하시오.
하야시: (미소) 고맙네... (사이) 참으로 뜻밖의 자리일세.. 자네가 먼저 나를 불러줄 지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
두한: ....................
하야시: 분위기가 좀 무겁군. 술부터 한 잔 하는 것이 어떻겠나?
두한: 술은 됐소. 그 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소.
하야시: 급한 성격은 여전하구만.. 좋아.. 말해보게..
두한: 내가 그렇게... 두렵소?
하야시: ...............?
순간, 하야시의 낯빛이 싸늘해진다.
하야시: 다짜고짜 그게 무슨 소린가?
두한: 내가 잠시 종로를 비운 사이에 종로2정목의 시장통을 집어삼키려고 하시지 않았소?
하야시: .....(미소) 그래... 그런 식으로 해설될 소지도 있겠어.. 하하하.. 그 일 때문에 화가 난 게로군?
두한: 긴 말 하지 않겠소. 그 점포들을 모두 돌려 받아야겠소.
하야시: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되겠네.. 그 점포들은 우리가 합법적으로 사들인 것일세.. 자네가 나에게 내놔라 어쩌라 할 대상이 아니란 말이야. 그 정도 상식은 갖고 있을 줄 알았는데...?
두한: ......(뚫어져라 보며) 영태형님, 그거 이리 주십쇼.
김영태가 김무옥이 들고 있던 가방을 건네 받아 두한의 앞에 정중하게 놓아준다.
하야시: .................?
두한이 가방을 열고 그 안에서 계약서와 돈을 꺼낸다. 두한은 막무가내로 하야시 쪽에 돈다발을 밀어놓고 계약서를 들어보인다. 하야시의 눈꼬리가 가늘어진다.
두한: 계약은 끝났소.
두한은 그대로 계약서들을 찢어버린다. 가미소리를 비롯한 하야시측 사람들이 모두 경악하고 있다. 그건 종로패들도 마찬가지다. 하야시의 두 어깨가 부들부들 떨고 있다.
두한: 종로가 그렇게 탐이 난다면 정정당당하게 도전을 하시오. 이런 건 협잡꾼들이나 하는 비겁한 짓이 아니오? 오야붕이면 오야붕답게 행동을 하시오. 알겠소?
하야시: .................
두한: 가자..
두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하야시: 김두한!
두한: ................?
하야시: 너는 나에게 큰 실수를 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두한: (미소) ... 기대하고 있겠소.
두한과 우미관패들이 나가려는데.. 가미소리를 비롯한 야쿠자들이 문을 막아선다.
두한: 벌써 시작이 된 건가? 하지만 여기는 너무 비좁지 않나?
가미소리: 빠가야로...
하야시: 보내드려라, 가미소리...
가미소리: ...............
가미소리들이 어쩔 수 없이 물러나면 두한들이 그곳을 빠져나간다. 어느 누구도 분노에 치를 떠는 하야시에 말을 걸지 못하는데....
하야시: 가미소리.
가미소리: 하이..
하야시: 지금 즉시 혼마찌와 경성의 모든 오야붕들을 소집하라.
가미소리: 하이!
하야시: 지금 이 순간부터 종로와 전면전을 시작한다! 전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