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조/명
이종암 시인
│시인 프로필│
1965년 경북 청도 출생
1993년 『포항문학』으로 등단
시집?
『물이 살다 간 자리』
『저, 쉼표들』
『몸꽃』
<시인이 뽑은 대표시 5편>
봄날, 하동 외 4편
이종암
매화 피고 나니
산수유 피고
또 벚꽃이 피려고
꽃맹아리 저리 빨갛다
화개花開 지나는 중
꽃 피고 지는 사이
내 일생의
웃음도 눈물도
행行,
다 저기에 있다
홍매도 부처 연두도 부처
황사 심하던 어저께 통도사에 갔다
마음과 몸뚱어리
모래 먼지 뒤덮인 허공만 같아
대웅전 바닥에 한참 엎디어 울었다
속울음 실컷 울고 나니
내 허물 조금 보이는 것만 같다
금강계단 되돌아 나오는데
천지간 황사 밀어내며 막 눈뜨는
홍매 한 그루, 나를 꾸짖는다
암아, 암아, 세상 살면서
제대로 핀 니 몸꽃 하나 가져라
산문을 나오며 바라본 먼 산
잿빛 겨울을 지우며 올라오는
연두가 또 회초리를 든다
백중百中
늦은 밤 방문을 열고 나오다가
하늘에 떠 있는 살빛 꽃 한 송이를 보았다
엷은 구름 속 보름달이어서
그 모양 갖가지로 보이는데
고향집 툇마루에서 허허 웃고 있는 아버지가 거기에 있고, 나 때문에 삐쳐 토라진 동생이 있고, 6·25 때 운문산 어디에서 전사하였다는 삼촌도 있고, 왜정 때 일본에서 객사하였다는 우리 할아버지도 있는데
저 커다란 달꽃 한 송이 내 속으로 자꾸 건너오고
살빛 속으로 내가 마구 스며드는 것은
그렇다, 피의 일은 멈춤 없이
속수무책 흘러 흘러 내려오는 것이어서
오동경經
비우고 비워낸 겨울 빈 자리에
새봄 기운이 든다
대지와 가지에 봄은 기어코 올라와
촘촘히 번져가는 연둣빛 천지
장육사 가는 길 늙은 오동나무는
보랏빛 말씀들 주렁주렁 매달고
머리 굵어진 초록 중생들 앞에서
천천히 오동경 읽고 계신다
꾹꾹 눌러 제 몸에 경經 받아 적는
길 가는 봄 들판은 바쁘다
연두는 자기를 지워 초록으로 가는데
나는 나를 지워 어디로 가는가?
오동나무에 피는 오동꽃 말씀들
끝내 바닥으로 내려가 땅의
퉁소소리로* 출렁댄다
그리고 봄날이 다 간다
*『장자』의 「제물론」에서 땅의 퉁소소리를 지뢰라고 한다. 이 시는 이성희의 글 「평담 속에 무궁한 기운이 생동하니(하)」(『신생』 2004년 봄호)를 읽다가 .
초생달
──동생
대구 가서 일곱 살 조카와 목욕탕엘 갔다
지 아비를 꼭 빼닮은 아이
맨살이 닿는
이 자리로 네가 건너오면 어떨까
어릴 적, 나 때문에
왼쪽 팔뚝에 초생달 모양으로 새겨진
네 상처 자국 환하게만 보여서
맨살의 아이 몸을 꼭 껴안는다
아버지 보고 싶냐, 원석아
예, 큰아빠도 우리 아빠 보고 싶어요?
목욕탕 나와 원석이도 나도 봤다
서쪽 하늘의 초생달
가만히 점점 더 크게 웃고 있는
또 가만히 울며 길 가는
갓 돌 지난 아이 달랑 놔두고 먼 데로
훌쩍 건너 가버린
<시인의 신작시 5편>
수를 놓다 외 4편
그러니까 까닭 없이 답답하고 우울하면
아니, 세상에 나를 내보낸 인연 그리워
태어나고 자란 곳
금천 지나 매전 고향 마을 찾아간다
동곡재 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황사 구름 속
겹겹의 산 능선들 눈앞에 마주 선다
병풍같다
무릎 꿇고 절하고 싶다
병풍에 새겨진 그림은 내 아버지의
아버지들 누대의 삶이 수繡 놓은 것
저 속으로 걸어가고 싶다
병풍, 손으로 만져볼 수 없는 저기
아버지 마중 나오는 소리가 있다
언젠가 나도 내 아들도 가서
병풍 속 수 하나 또 놓을 것이다
홍홍
여기로 붓글씨를 배운 지 몇 해
한자를 찾다가 옥편에서 우연히 만난
글자, 囍희
사십년 전 동네 잔치마당을 펼쳐놓는다
한 일一도 두 이二도 모르던 일곱 살
무슨 글잔지 아무도 모르는 애들 앞에서
잘난 체 했다 홍홍이라는 글자 아니냐고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囍희를 세로로 나누면 喜희가 둘이니
홍홍이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니다)
동네 잔칫날이면 회관 창고에서 나온
마을 공동소유 사기 그릇 밑바닥
또렷이 새겨진 글자, 囍희
쌀밥에 고깃국 실컷 먹으니 얼마나 기쁘냐
그러니 囍희는 홍, 홍 좋다는 말이라고
홍홍이라고
한자 모르는 애들 앞에 자랑처럼 빛나던
사십년 전 잔치마당처럼 쌓여가던 삶의
무늬 囍희, 시나브로 지워져 이제는 헐겁다
아버지들은 다들 어떻게 떠났을까
여기 홍홍을 놔 두고서
피아노를 치던 여자
──K에게
너는 공중의 빗방울을 파종하는 구름*
이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를 읽다
문득 생각났다, 오래 전 그 여자
십 년이 지나 겨우 지울 수 있었는데
장맛비로 다시 가슴이 흠뻑 젖는다
태풍 지나간 칠포해수욕장
물결무늬 모래를 밟고 먼 데를 보며
저 바다 건너서라도 길 함께 가자던
마지막 그날 너는
모래펄에 쓰러진 나무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 푸른 노래를 나는 불렀지
피아노 소리 바다에서 들려온다
나를 지나간 네 물결무늬 자국
쿵, 쿵, 쿵 돋을새김으로 일어선다
*장석주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애지』, 2005)
해국의 꽃잎에서 바다는 가깝다
가을도 다 지나 이제 겨울인데
해국은
아직 있을까 몰라
열사흘 달빛 아래 해국 자생지 대보
아직도 거기 꽃은 피어 있다
네게 붙들린 내 가슴처럼 피었다
가운데 달색 통꽃도 연보라 혀꽃도
덮쳐오는 해풍에 점점 스러져간
성마른 해국, 거기 너는 분명 꽃이었다
어질머리다, 아픈 사랑
달빛과 파도의 흰 소리를 베어 물고
그리 오래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자고
바싹 마른 목마른 너를
막무가내 껴안는다
해국의 꽃잎에서 바다는 가깝다
귀무덤
──댕강무디
사천 팔경 유람하는데 어디서 누가
댕강무디*
댕강 댕강 댕강무디라 말한다
정신이 번쩍 든다, 무슨 말인가
도요쿠니신사 앞 사백년 천하게 버려진
십이만 육천 생목숨의 귀무덤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칼에 댕강댕강 베어져
소금에 절인 전리품으로 수거된 선조들의 귀
적장 신사 앞 왜놈 땅에서는 사백년이어도
소금보다 매운 원한 풀 수가 없는 것이다
사천에 그 무덤 모시고 온 것
옳다
마음은 빛보다 빠른 것이니
저, 피맺힌 원한의 댕강무디
마음으로 우리 진정 보듬어 안아야
설운 땅에 해원解寃의 봄풀 피어난다
*댕강무디 : 경남 사천시 선진리에 있는 귀무덤, 즉 이총耳塚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그 전과물로 우리나라 사람의 코와 귀를 칼로 마구 베어 소금에 절여서 가지고 갔다. 교토 토요토미 히데요시 신사 앞에 그것을 한 데 모아둔 곳이 이른바 이총이다. 삼중 스님이 1990년 4월 교토의 이총 봉분에서 채취한 흙을 가져와 자신의 절에 봉안하다가 2년 뒤 조명군총 옆에 그것을 묻고 상석을 올렸다. 2007년 9월에 이총의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종암 시인의 체험적 시론___
세상을 노래하는 퉁소 소리
내 시詩의 첫걸음은 언제 어디서부터였을까? 적성도 고려하지 않고 진학한 공업고등학교 1학년, 그러니까 1981년 여름. 지금도 이름이 생소한 기계 다듬질, 용접, 선반 작업 등 공업학교 실습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움과 절망 속에서 연습장에 휘휘 써 갈겼던 낙서가 내 시의 첫 걸음이었던 것 같다. 겨우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오랜 갈등과 번민 끝에 부모님을 설득하고, 인생의 향방을 새롭게 수정한 그 힘의 하나가 연습장에 침 묻혀가며 내 마음 속의 무늬를 써 내려간 언어들이었다. 시가 뭐 별난 것이랴. 내 몸과 마음이 토해내는 넋두리가 시아닐까. 그리고 재수를 하여 인문계 학교로 진학하여 찾아간 문학 동아리에서 시라는 것과 얼굴을 처음 마주했다. 그 시라는 놈은 얼굴도 예뻤고 몸매도 고왔다. 나는 단박에 그의 매혹적인 향기에 포박되었다. 운동권이었던 대학 시절, 나는 일부러 문학을 멀리 하기도 했지만 그와 끝내 헤어질 수는 없었다. 내가 등을 돌리고 있을 때에도 그는 그림자처럼, 하늘의 구름처럼 내 몸과 마음에 늘 붙어있었던 것 같다.
대학 4학년 때 염무웅 교수가 심사를 본 천마문학상 문학평론이 당선된 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평론을 하려고 몇 년간 애를 써 봤지만 그리 쉽지가 않았다. 문학평론을 제대로 하기에는 직장의 여건도 따라주지 않았지만 시의 향기가 자꾸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시의 매혹에 이끌려 창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포항 지역의 여러 시인들과 함께 시작한 <푸른시> 동인 활동에서였다. 내 시의 첫 모양새는 모두 <푸른시> 동인 활동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졌다. 그때 시 창작의 교본으로 집중해서 읽었던 것이 장석남과 황동규, 정진규 시인의 시집들이었다. 이들의 시는 내게 시 창작의 고혹蠱惑을 일깨워줌과 동시에 커다란 절망감을 안겨다 주었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그 낭패狼狽를 조금씩 지워내면서 시를 매만지게 되었고, 어느 날 나는 시인이 되었다.
내가 갖고 있는 시집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읽었고 또 앞으로도 가장 많이 읽을 시집은 아마도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집일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시집이 아니라 이른바 ‘이종암 시인이 가려뽑은 서정주 대표시선’이다. 미당이 남겨놓은 한 권의 『서정주문학전집』(일지사, 1972)과 15권의 시집 속에서 110편을 뽑아서 워드로 작업한 것을 손수 묶은 것이다. 이 시선집 제목을 나는 어떤 평론가도 주목하지 않은 미당의 9시집 제목을 빌려 ‘학鶴이 울고 간 날들의 시詩’라고 했다. 미당의 9시집에는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대동운옥』 『연려실기술』 『고려사절요』 같은 역사서에 기술되어 있는 설화와 역사적 사실을 차용하여 우리 민족의 원형적 삶을 시로 건져 올리고 또 거기에서 우리네 삶이 지향해야 할 삶의 빛과 그늘을 그려내고 있다. 아쉬움이 있다면 미당 시 창작의 절정을 이루었던 4~50대가 아니라 이미 한국시단의 대가大家로 불려지던 60대 후반의 나이에 씌어진 것이어서 그 극단으로까지 시의 내용을 밀고가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앞으로의 내 시가 추구할 방향의 한 몫을 감히 말한다면 미당 서정주 선생이 노래하려다 다하지 못한 그 부분일 터이다. 덜 지어진 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미당未堂’, 서정주 시인은 자기 시의 집을 세우고 부숴버리고 다시 세우기를 거듭해온 시인이다. 그런 면에서 미당은 한국 시단의 단연 독보적인 존재가 아닐까.
미당을 비롯하여 소월, 백석, 지용, 목월 등의 선대先代 시인들과 우리 시대 여러 선배, 동료 시인들에게 내 시는 크게 ‘빚’을 지고 있다. 더 멀리로는 신라시대 세계적 고승 원측화상의 만법 유식사상과 고운 최치원 선생의 저작 『난랑비서』에서 말한 포함삼교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풍류도風流道 사상과 『진감선사비문』의 도불원인道不遠人의 큰 마음에 내 시는 역시 빚을 지고 있다. 시를 포함한 전 예술의 역사는 바로 이 ‘빚’의 관계로 가능할 터이다. 그리고 내 몸은 아버지와 또 그 아버지의 아버지로 끝없이 이어지는 혈연血緣의 ‘빚’으로 지금 여기에 와 있다. 이 또한 엄청난 빚이 아닐 수 없다. 19대조 이암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목은 이색의 스승이었던 할아버지는 고려말 조맹부체의 일가一家를 이룬 서예가요 시인이었고, 또 한국학의 대학자였다. 인민의 복지를 위해 원나라에서 『농상집요』를 가져왔고, 민족의 역사서 『단군세기』를 저술한 할아버지는 말년에 강화도에서 불계佛界와 선계仙界를 노닐며 시를 쓰시던 분이다.
沙泉帶草堂사천대초당 모래샘이 초당과 마주하고
紙帳卷空牀지장권공상 책갈피가 책상 위에 뛰논다.
靜是眞消息정시진소식 고요함은 이것이 진정 소식이러니
吟非俗肺腸음비속폐장 읊조리는 시구 속세의 마음 아니라네.
園林坐淸影원림좌청영 정원 숲속의 맑은 그늘 아래 앉아
梅杏嚼紅香매행작홍향 매실과 살구 씹으니 붉은 향기 그득하다.
誰住原西寺수주원서사 누가 원서사에 머물러
鐘聲送夕陽종성송석양 종소리를 저녁 햇살 아래 보내는가.
이암 할아버지의 「초당草堂」이라는 오언율시五言律詩이다. 나는 우리 집안의 족보와 『철성연방집』을 통해 이암 할아버지를 만나고서부터 서예書藝의 길로 입문했다. 먹과 붓으로 내 시詩의 빛깔을 깊고 새롭게 더해갈 작정이다. 내 삶이 다하기 전 이 세상에 미미한 ‘빚’ 하나를 남겨두기 위해 나는 거듭 공부하면서 내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시인이라는 자, 천둥과 지뢰가 아니라 사람 사는 이 세상을 울리는 커다란 퉁소소리 한 자락 남겨둬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