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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7대민(주일낮)
*부득불 할 일(고전9:16-23)
벌써 반년의 끝 달을 시작합니다. 6월은 신록이 푸르고 식물들이 왕성하게 자라나는 시기입니다.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우리가 부득불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실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하였습니다.
당시 이방지역에 복음전파는 난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진리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너무도 부끄럽고 황송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불러 주시고 직분을 맡겨 주신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부득불 할 일로 여기고 그 일을 하는데 온갖 정열을 다 바쳤습니다. 또 한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겠노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자랑으로 하지 아니하고 부득불 해야 할 일이라고 선포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 즉 전도는 부득불 할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복음전도는 성도된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민감하고 성실하여야 합니다. 전도에 무감각해져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복음 전도를 영적인 사명과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부득불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이 전도입니다. 우리에게 이 직분이 있습니다.
‘부득불 할 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낭케’라는 단어로 '마땅히 해야 할 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억지로’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숙명’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자신이 숙명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따라서 그 숙명인 복음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성경은 내가 받은 구원은 결코 나 한 사람에게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나만 구원받아 혼자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통해 이웃에게 복음이 흘러 들어가기 위한 통로로 나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을 향한 복음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웃과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우리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내게 베풀어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을수록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임을 알게 됩니다. 전도는 쉽게 말하면 내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만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전도는 꼭 해야 합니다. 부득불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을 때에 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일이며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는 전도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성도의 책임이며 의무입니다. 교회가 복음 전하는 일에 무관심하며 복음 전하는 기쁨을 상실하게 되면 교회의 위기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기쁨과 보람을 잃어버린 교회와 성도는 절대로 좋은 교회와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정체하며 퇴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열정과 전도하는 기쁨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전도의 열정과 기쁨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불러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전도해야 하며 전도하기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전도에 힘을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1.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16-18)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세상에 바울만큼 자신의 모든 생애를 복음을 위해 산 사람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의 이야기가 9장부터 28장까지 나옵니다. 여기에 나타난 바울의 사역은 기독교 역사상 엄청난 업적입니다. 이 정도면 정말 자랑할 만 합니다. 그런데 여기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랑할 수 있지만 자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랑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랑할 것이 있지만 그 자랑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랑할”이란 말은 헬라어로 ‘카우케마’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취한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느끼고, 그로 인해 갖는 즐거운 감정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도덕적 가치가 있다면, 그로 인해 즐거운 감정을 가진다면, 이것은 나쁜 것도 아닙니다. 좋은 것이나 잘한 것에 대한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즐거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이런 것마저도 포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복음 전하는 일도, 자급 전도 하는 일도, 일체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복음 전하는 일이 하나님께로 받은 사명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고, 만일 요나처럼 그 사명을 피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랑할 것이 없는 의무'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의 의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면, 국민의 3대 의무입니다. 첫째는 "교육의 의무"이고, 둘째는 "병역의 의무"이며, 셋째는"납세의 의무"입니다. 이것을 지키는 것이 국민의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의 임무는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은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복음'입니다. 전도해서 30명, 100명 예수님 믿게 했든지 10,000명 예수님 믿게 했든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해서는 안될 일이 있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대학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과목이 있는가 하면, 안 하면 안 되는 필수 과목이 있습니다. 필수과목은 공부하기가 어렵고 힘들어도 부득불 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로서 복음 전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러한 사역이 아니라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절대적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하지 아니하면 안 될 일을 하면서 자랑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할 일 해놓고 자랑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세계 기독교 역사가운데 하늘에 무수한별들처럼 빛나는 전도자와 선교사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만큼 빛나는 전도자는 없습니다. 그는 아시아와 유럽의 복음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기의 전도 업적에 대해서 자랑한 적이 없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전도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운 마음만 있었을 뿐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전도하는 것을 빚을 갚는 것과 같은 부득불한 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남의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으면서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제 갚아서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땅한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때 반드시 전도라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그 전도 때문에 저도 구원 받았고 우리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전도는 쉽습니다. 예수님만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내가 믿고 증거 하면 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주일에는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듯이, 전도 역시 예수님을 믿는 성도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마땅히 자연스럽게 해야만 하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5장42절에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전도는 특별히 날을 잡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밥을 먹고 직장에 가서 일을 하는 것처럼 전도는 날마다 나의 일상 삶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 대상이나 환경을 가리지 않고 힘써서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복음 전하는 자 된 것은 자기 임의로 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강권적인 소명과 명령으로 이방인의 사도가 되고 복음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또 자신이 자원하여 복음 전도자가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령 때문에 복음 전파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많이 했어도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입장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입장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도 스스로 복음 전파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당연히 전도에 힘쓸 뿐 아니라 전도를 많이 한다 하여도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2.복음을 전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19-22)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바울은 19절에서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하였습니다.
여기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모든 사람에게 또 종이 되었다는 아주 역설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의 역설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목회자의 길이 어떠해야 한가를 보여주는 불변의 진리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유인으로 태어났고, 로마의 시민권까지 갖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의미하는 자유는 이 같은 정치적 육체적 자유가 아니고, 도덕적이고 영적인 자유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죄와 율법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한 분께만 종이 되고, 모든 것에 대해서 자유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사탄의 종이고, 죄의 종, 일의 종, 사업의 종, 사람의 종, 물질의 종, 정욕의 종, 쾌락의 종 등등 모든 것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은 하나님께만 종이 되고, 모든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자유인이었지만, 그러나 스스로 자원하여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구령의 열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19절에서 종 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 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여기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종 된 삶, 즉 섬김의 명료한 한 초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섬김으로 우리 이웃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사명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하나님께로 사람을 얻고자 해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서 유죄판결로부터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구출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놀라운 은혜의 소식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사람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 사도 바울 자신의 사람을 만들기 위함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것도 오로지 하나님의 백성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한 일이어야지 자기 사람들을 만들기 위한 일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보면 자기 사람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자기 패거리를 늘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자기 부하, 자기 파벌을 만들어 권력을 휘두르려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고 시험 드는 이들이 생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들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사람들을 포섭하고, 포섭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은 항존직에 선출되지 못하게 막는 일도 하며, 자기들에의 눈에 가시 같이 여겨지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하여 사람을 부추겨 거짓 증언도 시키고 대리 비난과 공격을 하게 하는가 하면, 무슨 구실을 만들어서라도 치리를 받게 일을 꾸미고, 심지어는 자기들 뜻대로 따르지 않는 목사는 모함하여 내쫓는 일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만인 위에 군림하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끄러운 교회가 한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음과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에로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본문 20-22절에서 복음을 위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스스로 나와 전혀 다른 성향의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연세드신 분들의 입장이 되고, 어르신들은 젊은이의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약한 사람의 입장이 되어 함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섬기는 훈련, 낮아지는 훈련, 내려놓는 훈련을 하는 것이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때에는 유대인들이 율법 아래에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관점에서 접근하였고. 율법 아래 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도 율법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의 핵심이 사라졌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복음의 열정이 모든 것을 내려놓도록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영혼과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값비싼 대가라도 치루어야 합니다. 성질과 감정을 죽여야 합니다. 위신과 체면을 벗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종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종과 같이 섬기는 자세로 그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더 많이 만들기 위한 일입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기울여 많은 사람을 얻기를 바랍니다.
3.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을 듣는 자에게만 복이 아니라 전하는 자신에게도 복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하게 됩니다. 겸손하게 됩니다. 친절하고 사랑을 베풀게 됩니다. 자기유익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믿음의 첫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새로 믿는 사람이 회개하고 뜨겁게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처음 믿을 때 예수님을 사랑하던 뜨거운 사랑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복음전하면서 하나님께 절대 의지하고 그 뜻에 복종하기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복음의 최종적인 열매인 하나님의 축복과 약속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여러 모양의 삶을 산 것은 그가 줏대가 없어서도 아니요, 의지가 약해서도 아닙니다. 그의 여러 가지 다양한 전도하는 삶으로 각계각층에서 몇몇 사람이라도 얻어 많은 사람을 믿게 하여 구원하고 자기 자신도 복음에 참예하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이 복음에 참예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여러 모양의 삶을 살았습니다. .
바울에게 있어 유일한 소망은 영혼 구원입니다. 영혼을 구원한다면 무엇이든지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자존심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율법 없는 자처럼 산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지만, 섬기는 심정으로 살았습니다. 영혼구원은 최선이요, 나머지는 차선에 불과하기에 유보할 수 있고, 잠시 보류할 수도 있고, 양보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한 번이라도 안면식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길이건, 시장이건, 어디서라도 그냥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안부를 묻고,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약속하시고, 다시 만나자고 하시고, 그의 장점을 찾아보시고, 칭찬하시고, 그의 아픈 부분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물어보시고, 한 영혼을 생각하시면서 만나야 합니다. 사람을 기피하면 전도하지 못합니다.
전도는 복입니다. 유명한 무디 목사님에게 어떤 청년이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라고 안타까움을 실토 하였습니다. 그 때 무디 선생님은 잠시 기도를 하더니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바로 가서 성경을 덮어두고 밖에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도를 해 보십시오 힘들게 끌고 가는 손수레도 밀어주고 넘어 저서 우는 아이를 일으켜주고, 무거운 물건을 들고 가는 자가 있으면 들어 다 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전하세요. 그리고 집으로 가서 성경을 읽으십시오. ! 라고 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무디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밖으로 나가서 전도도하고, 손수레도 밀어주고,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도 주고, 무거운 짐을 든 자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짐으로 돌아와 성경을 읽었습니다. 아 !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성경이 믿어집니다. 은혜가 충만합니다. 그리고 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불이듯 생겨났습니다. 그는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가 막 소리를 지르며 전도하였습니다. 복음 전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은혜도 주시고, 믿음도 주시고, 형통함도 주시고 힘도 주시는 것입니다. 전도는 복입니다. 이 땅에서도 북이요 하나님 앞에서도 상 받는 복입니다.
오늘 본문23절에 바울은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하였습니다.
여기서 '참여하다'라고 하는 헬라어의 뜻이 '공유하다' '나누어 가지다'라는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나만 가지고 있는 복음을 너에게 전해 주었더니 이 복음이 너의 것도 되고 나의 것도 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나누어 가지어 공유하다' 즉 '복음을 전하다'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내 복음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은혜를 나눈다고 해서 내 은혜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풍성해집니다.
심지어 우리는 다른 사람을 구제하기 위하여 재물로 도와준다 라고 할 때 손해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나 성경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구제하는 돈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돈을 떼어먹지 않으십니다.
구제를 하고 내 주머니 끈을 풀어 나누어준다고 하여도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채워 주셔도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나누어주고 복음을 나누어 줄 때 그 사람도 은혜 받고 그 사람도 복음에 참여하고 같이 구원 얻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동시에 보람 있는 삶이 됩니다.
오직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은 내가 값없이 받은 이 구원을 전함으로 은혜로 받은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요, 구원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며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좋은 소리입니다. 세상에서 복음은 예수님입니다.
교회의 사회에 대한 봉사는 그 목표가 복음에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업으로 봉사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제하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봉사는 영혼구원입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일수 있지만 최종목표는 영혼구원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하여 일할 사람은 그가 먼저 영혼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 참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된 우리가 부득불 할 일은 전도입니다.
1.복음을 전하는 것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16-18)
2.복음을 전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19-22)
3.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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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왕 할일 기쁨으로 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