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3 때 잠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중간 번호고 그 아이는 앞번호라 친할 만한 동기가 없었는데 그 아이의 눈짓에 친해졌던, 친했지만 지금도 낯선 친구다.
중학교 때와는 달리 고등학교는 한강 다리를 넘어 조금은 중심권으로 옮겨졌기에 그만큼 우리집의
생활 수준도 상대적으로 낙후된 권역이었다. 문화도...
가장 많이 차이나는 문화는 '도시락 반찬' 이었는데 그 아이는 후식으로 싸온 딸기를 내게 건넴으로
잠시 특별한 아이가 되었다. 치아 교정 때문에 가끔씩 종로 쪽의 치과로 향하는 그 애의 길동무가
되어 진료 마친 후 종로 골목 어딘가에서 그애가 사주는 함박스테이크에 입맛을 들이기도 했고
그 애가 가진 초대권으로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관람하기도 했는데 오페라 관람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 지금까지도 다신 맛보지 못하는 귀한 경험으로 남아 있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제대로 나오지 않은 점수로 둘 다 낙심할 무렵 처음으로 그 애의 집에 간 날,
부유한 살림살이보다 더 놀랐던 건, 숨겨둔 담배를 꺼내 보여주며 한 그애의 말이었다.
"난 부모가 해 준 대로 갚을 거야. 부모 신세 진 만큼 갚아야 해."
그 때, 그 애가 한 말은 내가 알고 있던 '갚는다' 라는 의미와는 너무도 다른 세상의 언어로 다가왔다.
'빚진 돈을 갚는 채무자의 의무감' 이 실린 듯한 무게감 있는 언어로...
그 무렵의 내 아버지는 서울서 오산까지 쥐꼬리만한 봉급을 위해 고속버스로 출퇴근을 하셨는데
가끔 폭설로 발이 묶인 버스 대신 아버지가 손들어 잡는 택시를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운 좋은 날은
학교까지 더 얻어 타고 갈 수도 있었다.
그 때 아버지가 택시를 잡으며 하신 말씀, '따블, 따블' (택시 요금을 2배로 낸다는 말) 과 먼저 내리시며
나를 학교까지 부탁한다며 기사에게 건넨 따블의 택시비가 아직도 내 가슴엔 큰 무게로 자리잡고 있는데
그 무게감은 그 친구의 말 속에서 느낀 그 무게감이 아닌, '너무도 멋있고, 너무도 감사해서 나중에 나도
그런 처지가 되면 아빠처럼 해 드리고 싶다' 는 감사의 무게감이다.
쥐꼬리 만한 봉급쟁이 아빠도 그렇게 우리를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셨는데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 내어주신 독생자 예수,
하나님 자신의 생명은 도대체 얼마나 큰 무게일까...
갚을 수 조차 없는 그 크신 은혜의 무게를 나는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