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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민소통운동본부(CCCC) 원문보기 글쓴이: 평택 소통 김평탁
7월 24일 오늘의 말씀<역사> : CCCC 국민소통운동본부
7월 24일
오늘의 말씀
① 느헤미야9:1 (7월 24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느헤미야 9장 전문*******
○ 금식하고 회개하는 백성들 | |
1. | 그 달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
2. |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
3. |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
○ 제사장들과 레위 인들의 고백 기도 | |
4. | 레위 사람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
5. | 또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는 이르기를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
6. |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
7. |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
8. | 그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의 땅을 그 씨에게 주리라 하시더니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 |
9. |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
10. | 이적과 기사를 베푸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나라 온 백성을 치셨사오니 이는 저희가 우리의 열조에게 교만히 행함을 아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이 명예를 얻으셨나이다 |
11. | 주께서 또 우리 열조 앞에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사 저희로 바다 가운데를 육지 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쫓아 오는 자를 돌을 큰 물에 던짐 같이 깊은 물에 던지시고 ![]() |
12. |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셨사오며 |
13. | 또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하늘에서부터 저희와 말씀하사 정직한 규례와 진정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저희에게 주시고 ![]() |
14. | 거룩한 안식일을 저희에게 알리시며 주의 종 모세로 계명과 율례와 율법을 저희에게 명하시고 |
15. | 저희의 주림을 인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며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또 주께서 옛적에 손을 들어 맹세하시고 주마 하신 땅을 들어가서 차지하라 명하셨사오나 ![]() |
16. | 저희와 우리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
17. | 거역하며 주께서 저희 가운데 행하신 기사를 생각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하며 패역하여 스스로 한 두목을 세우고 종 되었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사오나 오직 주는 사유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저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 |
18. | 또 저희가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이르기를 이는 곧 너희를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라 하여 크게 설만하게 하였사오나 |
19. | 주께서는 연하여 긍휼을 베푸사 저희를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길을 인도하시며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 행할 길을 비취사 떠나게 아니하셨사오며 |
20. | 또 주의 선한 신을 주사 저희를 가르치시며 주의 만나로 저희 입에 끊어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의 목마름을 인하여 물을 주시사 |
21. | 사십년 동안을 들에서 기르시되 결핍함이 없게 하시므로 그 옷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사오며 ![]() |
22. | 또 나라들과 족속들을 저희에게 각각 나누어 주시매 저희가 시혼의 땅 곧 헤스본 왕의 땅과 바산 왕 옥의 땅을 차지하였나이다 |
23. | 주께서 그 자손을 하늘의 별 같이 많게 하시고 전에 그 열조에게 명하사 들어가서 차지하라고 하신 땅으로 인도하여 이르게 하셨으므로 |
24. | 그 자손이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되 주께서 그 땅 가나안 거민으로 저희 앞에 복종케 하실 때에 가나안 사람과 그 왕들과 본토 여러 족속을 저희 손에 붙여 임의로 행하게 하시매 |
25. | 저희가 견고한 성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고 모든 아름다운 물건을 채운 집과 파서 만든 우물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허다한 과목을 차지하여 배불리 먹어 살찌고 주의 큰 복을 즐겼사오나 |
26. | 저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뒤에 두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크게 설만하게 행하였나이다 |
27. |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구원자들을 주어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
28. | 저희가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버려 두사 대적에게 제어를 받게 하시다가 저희가 돌이켜서 주께 부르짖으매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여러번 긍휼을 발하사 건져내시고 |
29. | 다시 주의 율법을 복종하게 하시려고 경계하셨으나 저희가 교만히 행하여 사람이 준행하면 그 가운데서 삶을 얻는 주의 계명을 듣지 아니하며 주의 규례를 범하여 고집하는 어깨를 내어밀며 목을 굳게 하여 듣지 아니하였나이다 |
30. | 그러나 주께서 여러 해 동안 용서하시고 또 선지자로 말미암아 주의 신으로 저희를 경계하시되 저희가 듣지 아니하므로 열방 사람의 손에 붙이시고도 |
31. | 주의 긍휼이 크시므로 저희를 아주 멸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도 아니하셨사오니 주는 은혜로우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심이니이다 |
32. | 우리 하나님이여 광대하시고 능하시고 두려우시며 언약과 인자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여 우리와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열조와 주의 모든 백성이 앗수르 열왕의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당한바 환난을 이제 작게 여기시지 마옵소서 ![]() |
33. | 그러나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 |
34. | 우리 열왕과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열조가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의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
35. | 저희가 그 나라와 주의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한고로 |
36. | 우리가 오늘날 종이 되었삽는데 곧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사 그 실과를 먹고 그 아름다운 소산을 누리게 하신 땅에서 종이 되었나이다 |
37. |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주께서 우리 위에 세우신 이방 열왕이 이 땅의 많은 소산을 얻고 저희가 우리의 몸과 육축을 임의로 관할하오니 우리의 곤란이 심하오며 |
38. |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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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시편 24편 전문
1. |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
2. |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 |
3.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 |
4. |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
5. |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 |
6. |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
7.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 |
8. |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
9.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 |
10. |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
③ 잠언 24장 전문
1. | 너는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기도 원하지 말찌어다 |
2. |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 입술은 잔해를 말함이니라 |
○ 심사 숙고해야 할 지혜자 | |
3. | 집은 지혜로 말미암아 건축되고 명철로 말미암아 견고히 되며 ![]() |
4. | 또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 |
5. | 지혜 있는 자는 강하고 지식 있는 자는 힘을 더하나니 ![]() |
6. |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 |
7. | 지혜는 너무 높아서 미련한 자의 미치지 못할 것이므로 그는 성문에서 입을 열지 못하느니라 |
8. | 악을 행하기를 꾀하는 자를 일컬어 사특한 자라 하느니라 ![]() |
9. | 미련한 자의 생각은 죄요 거만한 자는 사람의 미움을 받느니라 |
10. | 네가 만일 환난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
11. | 너는 사망으로 끌려가는 자를 건져주며 살륙을 당하게 된 자를 구원하지 아니치 말라 |
12. |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찌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응하시리라 ![]() |
○ 아들에게 주는 충고 | |
13. |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
14. |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
15. |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찌니라 |
16. |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찌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 |
17. |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
18. |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
19. |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
20. | 대저 행악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등불은 꺼지리라 |
21. |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
22. | 대저 그들의 재앙은 속히 임하리니 이 두 자의 멸망을 누가 알랴 |
○ 지혜 있는 자의 거듭된 말 | |
23. | 이것도 지혜로운 자의 말씀이라 재판할 때에 낯을 보아주는 것이 옳지 못하니라 |
24. |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
25. |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받으리라 |
26. | 적당한 말로 대답함은 입맞춤과 같으니라 ![]() |
27. | 네 일을 밖에서 다스리며 밭에서 예비하고 그 후에 네 집을 세울찌니라 |
28. |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찌니라 |
29. |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 행한대로 갚겠다 말하지 말찌니라 |
30. | 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
31. |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
32. |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 |
33. |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
34. |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
오늘의 역사
① 살수 대첩(612) : 고구려 때(영양왕 23) 수나라의 양제(煬帝)군사가 612년 1월에 113만 3800명의 군사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 쳐들어 왔을 때, 그중 30만 5천명이 압록강 건너 살수(지금의 청천강)에 이르렀을 때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우중문(于仲文)・우문술(于文述)의 별동 부대 30만을 맞아 이를 교묘한 유도 작전으로 섬멸하였다.
6세기 끝무렵에 이르러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와 맞서기 위해 동맹을 맺었다.
이 무렵, 오랫동안 나뉘어 있던 중국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이 되었다(589).
고구려의 제26대 영양왕(590~618)은 신라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잃자, 남진 정책을 버리고 공격 방향을 바꾸었다.
즉 서진 정책을 쓰기로 하여 요서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수와 충돌했다.
새로 세워진 수는 수륙군 30만으로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강한 반격과 질병 등이 겹쳐 물러갔다(598).
그 뒤 수 문제의 뒤를 이은 수 양제는 113만 대군으로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했지만 고구려군의 끈질긴 저항으로 이번에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612).
양제는 다시 약 30만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왔지만 을지문덕이 살수(청천강)에서 이들을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여명이었다.
이 승리가 우리 역사상 가장 빛나는 살수(청천강)대첩이다.
신묘한 그대의 작전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그대의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구나.
전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할 줄 알았다면 그만 두기를 원하노라.
수의 별동대 30여 만 명을 평양성까지 유인한 을지문덕이 수의 장군 우중문에게 보낸 '여수장우중문시' 이다.
비로소 속은 것을 깨달은 수의 대군은 급히 최각하다 살수에서 거의 전멸당하였다.
고구려의 승리는 수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지구전을 전개하여 수 대군의 힘을 빼앗았는데, 이는 고구려 국민들이 총화단결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② 정미 7조약(丁未 7條約(1907) : ‘제3차 한일협약’, ‘한일 신협약’이라고도 한다.
헤이그 밀사 사건에 대하여 고종의 퇴위만으로는 일본은 만족치 않고 더욱 노골적인 침략행위를 추진코자 이등박문과 이완용 사이에 한국의 모든 행정은 통감의 지휘를 받을 것과 일본인을 한국관리로 임용할 것 등을 주요 골자로 1907.7.24 체결한 조약이다.
여기서 각종 법령의 제정, 중요 행정사항 등에 일본 통감의 동의를 얻게 하고, 각 부에 일인 차관(日人 次官)을 임명하여 이른바 차관 정치가 실시됨으로써 국정 전면에 걸쳐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8월 1일.
⇨8월 27일.
③ 초대 정․부통령 취임(1948) : 우리나라 초대 정․부통령이 1948년 오늘 취임 !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의 취임식은 서울 중앙청 앞 광장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을 비롯한 많은 국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조국을 만년 반석 위에 올려놓겠다고 다짐한다.
이시영 부통령은 건국흥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소신을 밝힌다.
두 사람은 나흘 전인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제헌의원들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이시영 부통령은 임기 1년을 남긴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항의해 사임한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정치를 펴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하야한다.
④ 제너럴 셔맨호 사건(1866) : 미국 상선 셔맨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경내에 들어와 상품교역을 제의했으나 조선 관원에게 거절 당하자 중군(中軍) 이현익을 잡아 감금하는 등 난동을 부리자 평양성내 관민들이 돌팔매・활・소총으로 대항하고 퇴교(退校).
박춘원은 이현익을 구출하였다.
며칠 계속된 비로 선체가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행동의 자유를 잃게된 셔맨호의 선원들은 더욱 광폭한 행동을 강행, 강도・약탈과 총포격을 가하여 사망 7명, 부상자 5명을 내게되어,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철산부사 백낙연 등과 셔맨호를 불태워버렸고 선원은 타살 혹은 소사 당하였다.
후일 이 사건이 밝혀져 신미양요의 원인이 되었다.
⑤ 유엔군 사령부 설치(1950) : 한국전 발발 이틀만인 1950.6.2
7 유엔 안보 이사회 결의에 따라 한국에서의 군사행동을 허용받은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주일 미점령군 사령관 겸 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군사행동에 필요한 작전권한을 위임.그 해 7월 24일 동경에 유엔군 사령부가 설치됐다(57년 7월 서울로 이동).
이에 따라 영국・프랑스・필리핀・호주・터키・네덜란드 등이 미국과 함께 차례로 참전, 명실공히 유엔군사 예하부대를 형성했으나, 현재 유엔군 사령부 산하에는 한・미 양국의 전투부대 외에 영・비・태 3국만이 약간의 의장병을 파견하고 있을 뿐, 그 박의 병력은 모두 철수했다.
⑥ 부민관 폭탄투척 의거(1945) : 7월 24일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박춘금 등 친일파가 주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에 항거, 조문기의 주도로 유만수(작고), 강윤국(투병중)과 함께 단상에 폭탄을 설치해 폭파시킨 쾌거였다.
'아시아민족분격대회' 는 관동지진대학살 사건의 주범인 박춘금이 국내 친일파를 모아 결성한 대의당 주도로 7월말부터 4단계로 나눠 반일성향의 국내 지식인 30여 만 명을 대학살하기 위한 신호탄으로 연 대회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제의 대학살 음모를 저지할 수 있었다.
부민관에서 개최한 '아시아 민족 격분대회' 란 대회는 1945년 7월 24일 조선총독, 조선군사령관, 친일파 거두인 박춘금 일당이 패전의 기색이 짙어지자 대의당(大義黨)이라는 조직체를 만들어는데, 그 강령으로 일신(一身), 일당(一家)의 소의(小義)를 버리고 진충(盡忠), 애국적 대의를 살려 육탄으로 황국을 지키며 대의에 사는 덕기(德器)를 함양, 대의에 죽을 단결의 확보, 황도적(皇道的)사상 홍보, 반전, 반황국사상의 파쇄 등을 강령으로 삼고 박춘금이 당수로 있었다.
박춘금은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한말에 일본으로 건너가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폭력조직에 가담하여 활동중 일본 낭인(浪人) 계열의 거두 도야마(頭山滿)에게 접근해 그의 지원하에 생활하면서, 1920년에는 동경에서 일선총화(日鮮總和)를 표방하는 노동단체인 상애회(相愛會)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는데, 이 단체는 재일노무자의 사상통제에 목적을 두었다.
이리하여 일본경찰측과 조선총독부의 사주하에 폭력을 휘두르며 재일동포들을 착취했다.
*****“꽝∼ 꽝∼.”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경성부(서울 중구 태평로1가) 부민관에서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사제폭탄 두 개가 잇따라 터졌다.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파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大義黨) 주최로 이곳에서 열리고 있던 친일 어용대회인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는 아수라장이 됐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 대한애국청년단 단원들이 공사장 발파용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해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등의 친일파가 참가한 친일 어용대회를 분쇄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에는 일제의 보도 통제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성 한복판에서 일제와 친일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거로 꼽힌다.
그런데 박춘금은 이 폭파 의거 때 목숨을 건졌고, 1992년에는 한 일본인에 의해 경남 밀양에 송덕비가 세워지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있었다.
한편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은 광복 이후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을 벌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는 2006년 골수종과 혈액암 진단을 받고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2008년 2월 유명을 달리했다.
부민관은 경성부가 1935년 부민들의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건립한 부립극장이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뤄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다목적 회관으로서 1800여 관람석의 대강당을 비롯해 중강당, 소강당 등에서 연극, 음악, 무용 등이 공연됐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뒤 미군이 접수해 임시로 사용하다 1949년 서울시 소유가 됐고 1950년 4월 29일 국립극단이 창단되면서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다.
1950년 서울 수복 뒤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준공되면서 시민회관으로, 1976년 세종문화회관 건립과 동시에 그 별관으로 쓰였고,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문 계단 아래 화단에 ‘부민관 폭파 의거 터’ 비가 세워져 있지만 지나가는 행인 중 눈여겨보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되고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2008).
⑦ 광무 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 제정(1907) : 7월 24일 한국 최초의 언론관계법인 이른바 '광무신문지법'이 제정․공포되었다.
1896년 <독립신문>이 창간되면서 한국의 근대적 신문이 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자 일제는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된 신문을 직접적으로 말살할 수 있는 법령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 법의 기본적인 성격은 내무대신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허가제와 보증금 제도, 납본을 강제한 사전검열제, 엄격한 처벌제도에 있다.
특히 내무대신에게 부여된 행정처분권과 보증금제도는 결국 재정난을 겪던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의 폐간으로 이어졌다.
또한 1908년 4월 20일 개정을 통해 발행인이 외국인 베셀인 <대한매일신보>에까지 그 적용 범위를 넓혔다.
⑧ 타이거 우즈, 24살 최연소 그랜드슬램(2000) : 2000년 오늘 스코틀랜드의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제129회 브리티시오픈 최종 4라운드 !
타이거 우즈가 3언더파 69타를 쳐, 합계 19언더파 269타로 최고의 메이저 골프대회 챔피언 자리에 오른다.
트로피와 상금 50만파운드를 품에 안은 우즈는 이로써 최연소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3대 메이저 타이틀을 동시 보유하게 된 것은 물론 올드코스에서의 최저타 우승 등 골프 역사에 각종 신기록을 세웠다.
우즈는 1997년 마스터스와 1999년 PGA챔피언십, 그리고 2000년 US오픈에 이어 브리티시오픈까지 4대 메이저 타이틀을 만 24살의 나이로 석권함으로써, 잭 니클라우스가 34년 동안 갖고 있던 최연소 그랜드슬램 기록을 2년 앞당겼다.
⑨ 리비아,피랍 일본 여객기 폭파(1973) : 오늘 아프리카 리비아의 벵가지(Benghazi) 공항.
일본인 두 명과 아랍인 세 명으로 구성된 친(親)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일본항공 소속 보잉 747점보여객기를 폭파시킨다.
이들이 나흘 전 납치한 여객기다.
납치범들은 폭파에 앞서 승객과 승무원 등 탑승자 백37명을 모두 석방했다.
이들 가운데 일본인 여성 한 명은 수류탄을 실수로 터뜨려 숨지고 나머지 네 명은 공항에서 체포됐다.
납치범들은 '피점령 지구의 아들'이라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단체 소속이라고 밝혔다.
⑩ 영국 에어쇼, 러시아 전투기 충돌(1993) : 1993년 오늘 !
수많은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국 런던 근교의 판버러(Farnborough)에서 화려한 에어쇼가 펼쳐진다.
그런데 아찔한 사고가 일어난다.
묘기를 보여 주던 러시아의 미그-29 전투기 두 대가 공중에서 충돌한다.
충돌 후 전투기는 폭발하지만 두 조종사는 모두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⑪ 르페브르 대주교, 교황청 명령 불복(1976) : 프랑스의 르페브르 대주교가 1976년 오늘 라틴어로 미사를 올렸다.
미사에서 라틴어보다는 각 나라별로 모국어를 사용하라고 지시한 교황청의 명령을 어긴 것이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황청의 개혁정책에 반발해 이처럼 독자적으로 행동했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후에도 줄곧 보수․전통주의를 고수하다 1988년 6월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당하고 만다.
⑫ 1차대전 비미(Vimy)능선 전몰장병 추모제(1936) : 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지역에 있는 비미(Vimy)능선 !
1936년 오늘 영국 왕 에드워드 7세가 참석한 가운데 1차대전 전몰장병에 대한 추모제가 거행된다.
비미능선 전투는 캐나다 군이 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으로서는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다.
캐나다군은 1917년 부활절 다음날 새벽 독일군의 핵심 방어선인 비미 능선을 뚫는 데 성공하지만 투입된 병력 만5천 명 가운데 3천5백98명이 전사했다.
⑬ 미국 흑인 베트남전 반대 시위(1966) : 1966년 오늘 미국 뉴욕의 유엔빌딩 앞 !
많은 흑인들이 모여 반전 시위를 벌인다.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흑인들은 미국의 베트남 참전을 비난하고 흑인들만이라도 군대에 가지 말자고 다짐한다.
이날 데모는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⑭ 냉전의 해프닝, 닉슨-흐루시초프 <부엌논쟁>(1959) :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와 미국 부통령 닉슨이 1959년 오늘 '부엌' 에서 만난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 무역박람회장에 들른 흐루시초프가 토스터나 식기세척기 등 부엌용품이 진열된 전시장에서 닉슨과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농담을 좋아하는 흐루시초프가 가만있을 리 없어 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미국 노동자들이 모두 이런 사치품을 살 수는 없겠지요?"
"요즘 미국의 철강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는 건 알고 계시지요? 그들도 다 이런 것을 사서 쓰고 있지요."
흐루시초프의 반격차례였다.
"별로 놀랍지 않네요.
곧 완공될 소련의 주택에는 그런 것들이 완비될 것입니다.
앞으로 소련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누구나 그런 집에서 살 수 있습니다."
냉전의 시대에서 볼 수 있는 해프닝이었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이야기 거리였다.
****** 동서 냉전이 한창 무르익어 가던 1950년대 말, 미국과 소련은 체제 경쟁에 열을 올렸다.
소련이 먼저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쏘아 올리면서 우주개발 경쟁에 들어간 것도 이 즈음이다.
이런 와중에 미국과 소련은 각기 상대국에서 우수 상품을 전시하는 무역박람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상대국에 체제 우위를 자랑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던 것.
1959년 7월 24일,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은 모스크바 소콜니키 공원의 미국 박람회장에서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손님으로 맞아 전시장을 안내했다.
뒷날 부엌논쟁(Kitchen Debate)이라 일컬어지는 냉전시대 최대 에피소드가 여기서 벌어졌다.
▽흐루쇼프=미국이 생긴 지 얼마나 됐소?
300년?
▽닉슨=150년이죠.
▽흐루쇼프=소련은 42년이 됐고 앞으로 7년이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오.
추월하면서 따라오라고 손을 흔들 거요.
▽닉슨=경쟁을 하려면 사상의 교류가 있어야 하오.
당신이 모든 것을 알진 못하지 않소.
▽흐루쇼프=당신이야말로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 외엔 공산주의 를 전혀 모르지 않소.
▽닉슨=소련이 앞선 게 있소.
우주탐사 로켓 같은 것 말이오.
우리는 컬러TV 같은 것에서 앞섰소.
TV를 통해 양 국민이 서로를 알아야 합니다.
▽흐루쇼프=좋소. 당신이 우리 국민 앞에 서고 내가 당신 국민 앞 에 섭시다.
당신이 자본주의 변호인이라면 난 공산주의 변호인이 되는 거 요.
▽닉슨=당신은 정력적이라서 훌륭한 변호인이 될 거요.
미 상원에서라면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 행위)로 비난받을 테 지만….
두 사람은 최신 주방시설을 갖춘 모델하우스로 향한다.
▽닉슨=최신 모델이오.
미국인은 여성의 편안한 삶에 관심이 많소.
▽흐루쇼프=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기계는 없소?
미국의 집들은 20년밖에 못 견딘다면서요.
그래야 새 집을 지어 팔 수 있을 테니까.
▽닉슨=그게 아니라 미국인들은 20년쯤 지나면 새 집을 갖고 싶어 하는 거요.
▽흐루쇼프=소련에선 누구나 집을 가질 수 있소.
미국에선 돈이 없으면 도로에서 자야 하지 않소?
▽닉슨=우리에겐 다양성이 매우 중요하오. 우리는 다양한 세탁기 를 만드는 많은 제조업체가 있소.
그래야 주부들이 선택을 하는 것이오.
열정적인 웅변가와 논리적 변론가….
다음 해 흐루쇼프는 유엔총회에서 연설하다 구두를 벗어들고 연단을 두들기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닉슨은 TV토론에서 존 F 케네디의 감성과 이미지에 호소하는 전략에 밀려 대선에서 패배한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2006)
⑮ 로잔강화조약 조인(1923) : 7월 24일 조인된 로잔 조약은 터키 국경의 보존과 완전한 독립을 규정했으며 오스만에 의해 유럽 제국에 부여되었던 모든 특권이 파기되었다.
이로써 케말은 오랫동안 '유럽의 병자' 로 유럽 열강들의 분쟁 대상이었던 오스만 제국을 대신해, 완전히 독립한 터키 민족국가의 창설이라는 그의 꿈을 실현했다.
쿠르드인의 자치와 독립에 관련된 세브르 조약의 조항들은 결국 이행되지 않았다.
많은 이유로 영국은 세브르 조약을 철회했던 것이다.
터키의 무스타파 케말 장군이 지휘하는 독립전쟁으로 사문화 되고 1923년 새로 로잔(Lausanne)조약이 새로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는 아예 쿠르디스탄의 영토적 지위와 쿠르드 민족문제는 언급되지도 못한 채, 영토는 분할되고 쿠르드 문제는 역사의 뒤안으로 잊혀지는 시점이 되었다.
이로써 쿠르드인 지역은 개별국가의 독립에 따라 사분오열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결국 쿠르디스탄은 터키-이란-이라크-시리아-소련 등 5개국에 걸쳐 제멋대로 구획되었다.
이 시점은 오랫동안 잠재해 왔던 쿠르드 민족주의라는 화약고에 불이 붙는 순간이기도 했다.
⑯ 마이다네크 나치 수용소 해방(1944) : 7월 24일 소련군이 폴란드 루블린 시 외곽 남동부에 있던 독일 나치 집단학살수용소인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해방시켰다.
마이다네크 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1940년 11월로 처음에는 소련 전쟁포로들을 수용했다.
그러나 1942년 가을부터 히믈러에 의해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수송된 유대인을 처리하기 위한 사형장으로 개조되었다.
처형도 처음에는 숲속에서 일제사격에 의한 총살이었으나 나중에는 홀로코스트라고 일컬어지는 대량학살을 위해 독성이 강한 시안화수소 가스를 발산하는 치클론-B를 사용해 가스실에서 모아놓고 죽였다.
마이다네크 수용소에서 죽은 총인원은 20만~150만 명으로 추정되며 소련군이 해방시켰을 때는 생존자가 겨우 몇 백 명에 불과했다.
⑰ 마추픽추 유적(Machu Picchu) 발견(1911) : 페루 남부 쿠스코시(市)의 북서쪽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잉카 유적.
1534년 정복자인 에스파냐인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던 만코 2세 이하 사이리 토파크, 티투 쿠시, 토파크 아마르 등의 잉카가 거점으로 삼았던 성채도시로 보인다.
그 시대에 세운 건조물이 주체를 이루고 있으나, 정복 전의 잉카시대에 속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출토된 유물은 후기 잉카의 토기 ․금속기가 대부분이며, 1911년 미국인 하이람 빙엄이 발견하였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목록에 수록되어 있다.
⑱ 재앙(災殃)-더스트 볼(Dust Bowl) : ‘결국 들판도 비어갔다…
거리에는 분노가 영글어갔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을 배경으로 존 스타인벡이 쓴 소설 ‘분노의 포도’에 담긴 구절이다.
왜 들판이 비고 사람들이 거리를 헤맸을까.
더스트 볼 탓이다.
직역하면 ‘먼지 그릇’이라는 뜻의 더스트 볼은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갖고 있다.
1932년부터 약 5년간 미국 중서부 대평원을 휩쓸었던 사막화 현상과 먼지폭풍, 이상기후와 자연재해를 통칭한다.
가장 확실한 것은 옥토가 불모 지대로 변했다는 점이다.
‘씨를 뿌리고 한 없이 나아가 돌아오면서 추수한다’던 대평원이 ‘죽음의 땅’으로 변한 이유는 식량증산을 위한 인간의 탐욕과 가뭄. 영농기계화 바람 속에 1차대전으로 일손이 부족해지자 대거 도입된 ‘들창코 괴물(트랙터)’은 야생 풀을 뿌리째 갈아 엎었다.
처음에는 소출이 늘어났지만 땅은 곧 지력을 잃었다.
재앙은 알곡을 잉태하지 못하는 토지의 사막화, 250만명의 이농에서 끝나지 않았다.
‘거대한 먼지 구덩이’로 변한 대평원에서 이는 모래폭풍이 뉴욕과 워싱턴까지 날아가 사람들의 질식시켰다.
다락에 먼지가 쌓여 천장이 무너지고 겨울이면 붉은 눈이 내렸다. 온도까지 올라갔다.
더스트 볼 지역에서 한참 떨어진 시카고의 1935년 7월24일 낮 온도가 관측 이래 최고치인 섭씨 44도까지 올라갔다.
사막화한 평원에 풀과 나무를 심은 덕분에 더스트 볼은 1940년대부터 사라졌다지만 과연 그럴까.
대평원 지역의 요즘 온도는 섭씨 49도를 웃돌고 작물이 말라간다. 강수량은 더스트 볼 시기의 절반 이하다.
문제는 미국산 밀의 절반, 쇠고기의 60%가 대평원 지역에서 나온다는 점. 국제 곡물 가격 인상이 괜한 게 아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
(서경.2008.인터넷한국일보)
⑲ 기타 오늘의 역사
A.D 79 이탈리아 베스비어스 화산 폭발. 폼베이 묻힘
1798 나폴레옹, 카이로에 입성
1894 고종,갑오경장에 따른 군국기무처 설치
1901 가뭄으로 전국에 방공령 공포
1908 청년터키당 혁명 (익년 황제 폐지)
1915 이스트랜드 증기선 시카고강서 전복, 812명 사망
1923 연합국-터키간에 로잔강화조약 조인 (그리스-터키전쟁 종결)
1929 부전조약(不戰條約) 발효
1934 작가 이상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연재 시작
1935 주일학교수법 발행.저자 배덕영목사,발행자 사우어.발행처 기 독교조선감리회총리원교육국.조선감리회 총리원교육국 지도 자양성부의 교과서중 하나.
1938 연합국-터키간에 로잔 강화조약 조인
1946 미국 최초로 수중 원폭실험
1951 정부, 탄핵재판소 구성
1952 한국복음주의협회(NAE) 결성
1968 서울지검, 동양통신 편집간부 등 기밀누설 4명 반공법 위반으 로 구속
1969 유인우주선 아폴로11호 달착륙 마치고 지구귀환
1974 경향신문, MBC에 흡수 통합
1974 포르투갈, 헌법 제1조를 폐기해 해외영토의 독립을 승인
1977 지탄역서 열차충돌 160여명 사상
1980 신안 해저유물 470점 발굴
1981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잠정휴전 성명발표
1987 쿠웨이트 유조선, 걸프만에서 미군의 엄호중 이란어뢰에 피침
1988 김용강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9 소련 그루지아공화국 수도 트빌리시서 독립요구 시위
1989 미국 엑손사, 알레스카만 누출석유 청소비용 12억8천만달러 추산
1991 농지소유 상한을 20ha로 확대
1993 러시아 중앙은행, 지폐통용 전면 중단하는 강력한 통화개혁조 치 발표
1995 정동년 5.18민중운동연합 의장 등 5.18 고소인 322명이 헌법 소원 제출
1997 국민회의, 이회창 후보 병역 문제 공식 제기
2000 타이거 우즈, 브리티시 오픈 우승(최연소 그랜드슬램 달성)
2000 한인세계선교대회(KWMC2000) 미국 시카고 휫튼대학, 빌리그 래함센터 개막
오늘의 인물
① 이제신(李濟臣 ; 1536.7.24 - 1583.10.6) : 조선 선조 때의 신하.
호는 청강(淸江).
벼슬은 병마 절도사(兵馬 節度使)에 이름.
니탕개(尼湯介)의 난에 경원이 함락된 이유로 의주 인산진(獜山鎭)으로 귀양가서 사망했다.
저서로 <청강집(淸江集)>이 있다.
② 송시열(宋時烈 ; 1607.11.12 - 1689.7.24) : 조선 중기 문신․학자.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
본관은 은진(恩津).
충청북도 옥천(沃川) 출생.
아명은 성뢰(聖賚).
김장생(金長生)․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 경릉참봉(敬陵參奉)을 거쳐 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후의 효종)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잡혀가자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49년 효종의 즉위로 다시 벼슬에 나오다.
당시 집권당인 서인(西人) 중 청서파(淸西派)에 속했던 그는 공서파(攻西派)의 김자점(金子點)이 영의정에 오르자 낙향, 서적편찬 및 후진양성에 몰두하였다.
김자점 몰락 후, 효종의 북벌계획을 도우며 이조판서 등을 지냈는데 효종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북벌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때, 효종의 장례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자 윤휴등 남인의 3년설을 물리치고 자신의 주장대로 1년설을 관철하여 남인이 실각하였는데, 이것은 후일 정쟁(政爭)의 빌미가 되었다(제 1 차 禮訟論爭).
이후 현종의 신임을 얻어 숭록대부(崇錄大夫)․좌참찬 등을 지냈으나 60년(현종 1) 우찬성에 재직 중 남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하였다. 68년 다시 우의정이 되었으나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하였다. 71년 다시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죽음으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재차 논의되자, 예론(禮論)에 따라 대공설(大功說;9개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기년설(朞年說;1년)이 채택됨과 함께 예(禮)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실각하였다(제 2 차 禮訟論爭).
그 뒤 덕원(德源)․웅천(熊川)․거제(巨濟)․청풍(淸風)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귀양에서 풀려나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거쳐 84년 봉조하(奉朝賀)에 올랐다.
그 뒤 제자인 윤증(尹拯)이 윤선거(尹宣擧)의 묘비명을 부탁하였는데 윤휴와의 관계로 인해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하여 사제간의 의가 깨졌다.
이로써 노소분당(老少分黨)이 일어났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하여 청주(淸州)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다가 89년 숙종에게 경종의 왕세자 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고, 같은 해 6월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중 남인의 주장으로 정읍(井邑)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 뒤 신원되었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로,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학통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이황(李滉)의 이원론적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였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였다.
예론에도 밝아 복제(服制)와 중요한 국가전례문제에 깊이 관여하여 2차례의 예송논쟁을 겪기도 하였다.
성격이 독선적이고 강직하여 교우관계가 원만치 못했고 그것이 붕당의 요소가 되기도 했다.
그의 문하에서 권상하(權尙夏)․김창협(金昌協)․이단하(李端夏)․이희조(李喜朝)․정호(鄭澔)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조선 후기 기호학파 성리학을 이끌어갔다.
지은책에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 《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 《논맹문의통고(論孟問義通攷)》 《경례의의(經禮疑義)》 《심경석의(心經釋義)》 《찬정소학언해(纂定小學諺解)》 《주문초선(朱文抄選)》 등이 있다.
문묘(文廟)․효종묘(孝宗廟)에 배향되고, 화양(華陽)․매곡(梅谷)․구봉(龜峰)서원 등 전국 70여 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11월 12일.
③ 알렉산더 피에르 뒤마(Alexandre Dumas ; 1802.7.24 - 1870.1
2.6) : 프랑스의 소설가.극작가.
같은 이름의 아들과 구별하기 위해 ‘큰(大) 뒤마’라고도 불린다.
1829년 희곡 <앙리 3세>를 써서 문학 작가로 첫발을 내 디뎠다.
그의 대표작으로 <몽테 크리스토 백작><삼총사>가 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정식 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방대한 독서를 통해 교양을 쌓았다.
일찍이 연극계에 투신해 1820년대말부터 1830년대초까지 큰 인기를 끌었으나, 그에게 본격적인 성공을 가져다 준 것은 역사소설이었다.
언론검열제가 폐지되고 신문들이 앞다투어 연재소설을 싣기 시작하자, 그는 오노레 드 발자크, 외젠 쉬 등과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연재작가가 되었다.
73명의 조수를 두고 약 250편에 달하는 소설들을 써냈는데, 그의 작품들은 지나치게 장황하고 멜로드라마적이며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삼총사>(1844)․<몽테 크리스토 백작>(1844~45)․<10년 후>(1848~50) 등은 오늘날까지도 전세계적으로 애독되는 작품들이다.
22세 때 사생아로 낳은 아들 소(小)뒤마(Dumas Fils)와 구별하기 위해 흔히 대(大)뒤마(Dumas Pere)라고 불린다.
⇨ 12월 6일.
⇨ 7월 28일.
④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 1892 - 1927,7,24) : 일본 소설가.
그는 정교하고 치밀한 단편소설로 역사소설의 원형을 만들었다. " 단지 막연한 불안... 나는 근 2년동안 죽은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해왔다".
일본 최고의 신인문학상으로 자리매김돼 있는 아쿠타가와상의 장본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가 이같은 유서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도쿄 다바타(田端) 자택에서 음독 자살했다.
향년 35세였다.
용띠 해,
용의 달,
용의 날(辰年辰月辰時)에 태어났다고 하여 류노스케(龍之介)라는 이름이 지어진 그는 생후 8개월경 모친이 정신이상 증세를 보임으로써 외삼촌 댁에 양자로 가게 된다.
이후 생활은 윤택하지 못했으나 문예를 사랑하는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란 아쿠타가와는 감수성 예민한 소년으로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의 광기가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간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1910년 제1고등학교에 입학, 동경제국대학 영문과에 진학해 재학중 '코(鼻)'를 발표함으로써 나츠메소세키(夏目漱石)의 격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1916년 대학을 졸업하고 '라쇼몬(羅生門)'(1915), '고구마죽(芋粥)'(1916)을 발표, 신진(新進)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초기의 그의 작품은 소재를 왕조의 설화에서 구하고 있는데 그후 에도(江戶)시대부터 메이지(明治)시대까지 작품 무대를 넓혀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과 섬세한 서정성을 갖춘 독자적인 소설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의 작품은 정교하고 치밀한 구성과 다채로운 문체로 금새 다이쇼(大正)문단에 확고한 지위를 구축해나갔다.
1921년 경부터 건강이 쇠약해진데다 신경쇠약 등으로 고생하던 그가 죽기 전 2년간에 걸쳐 느꼈던 '막연한 불안'은 개인적인 감정일 뿐만 아니라 당시 지식인 모두가 공감했던 쇼와(昭和)시대에 대한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⑤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 곡기윤일랑 ; 1886.7.24 ~ 1965.7.30) : 일본의 소설가 ․극작가.
도쿄 출생. 일본 소설가
일본 문학에 있어 탐미주의의 선구자.
79세로 사망.
도쿄대 국문학과에 입학했으나 학비 부족으로 중퇴하고 24세 때인 1910년에 와쓰지 데쓰로 등과 함께 제2차 '신사조'를 창간한 후 단편 '문신(文身)'과 '기린'을 발표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에는 '스바루'에 희곡 '신서(信西)', 단편 '소년'을 발표해 문단의 격찬을 받았다.
문신을 한 뒤 갑자기 몸이 변하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문신'은 다니자키 문학을 특징짓는 탐미주의의 신호탄이었다.
그의 작품은 당시 일본에 유행하던 자연주의 테두리를 벗어나 여체를 찬미하고 성의 신비를 응시하여 변태성욕의 세계까지를 파헤쳐 탐미주의․예술지상주의․악마주의의 천재적 신인으로까지 지목됐다.
장편소설 '치인(痴人)의 사랑'에서는 '인습적 정조 관념이 없는 여성의 변태성욕적 연애'를 뜻하는 '나오미즘'이라는 말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후반기에는 고전적인 경향이 강해져서 '장님 이야기' '춘금초(春琴抄)' 등의 원숙한 작품을 발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11세기 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현대어로 번역했다, 전쟁 후에는 '세설(細雪)'로 아사히문화상을 수상했다.
⇨7월 30일.
⑥ 아이작 싱어(Isaac Bashevis Singer ; 1904.7.14 - 1991.7.
24) :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미국 유대계 소설가.
주요수상 노벨문학상(1978)
주요저서 《적, 사랑 이야기 Enemies, A Love Story》(1972)
마이애미에서 작고.
향년 87세.
문학사는 아이작 싱어를 유대계 미국문학의 중요한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싱어의 작품들이 영어로 쓴 문학이라는 의미에서 영문학에 속하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작가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였던 이디시어(헤브라이어.게르만어.슬라브어가 버무려진 중세 이래 유대인 언어)로 먼저 쓰여진 뒤 영어로 번역됐기 때문이다.
체코 출신의 프랑스 작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대부분이 일단 체코어로 쓰여진 뒤 프랑스어로 번역돼 동시 출간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번역에 작가가 꼭 참가했던 것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다.
러시아령 폴란드의 라지민에서 태어난 싱어는 31세 때인 1935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는 하시디즘(18세기 초 이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성과 속의 합일을 내세우며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을 신봉하는 랍비였고, 싱어 역시 바르샤바 유대교 신학교에서 전통적 유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싱어는 랍비보다는 작가가 되기를 원했고,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고레이의 사탄(1955), 루블린의 마술사(1960) 사랑의 미로(1972)를 포함한 많은 소설들에서 싱어는 성과 속, 유대적 가치와 이단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고 동요하고 찢기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싱어는 197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수상 연설에서 그는 이디시어는 지난 500년 동안 고난을 받아왔고, 이 고난은 앞으로도 1000년은 더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뒷부분의 예언은 들어맞지 않을 것 같다. 이제 이디시어 출판이 거의 사라져버린 만큼 이 언어는 앞으로 한두 세기를 더 살아내기 힘들 것이고, 죽은 뒤 고난을 받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고종석,2004).
⇨7월 14일.
⑦ 헨리크 한센(Armauer Gerhard Henrik Hansen ; 1841.7.24
~1912.2.12) : 노르웨이의 의학자.
베르겐 출생.
크리스티아니아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였다.
1868년 베르겐의 제1나병 요양소의 의사가 되어 나병문제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나병을 유전성의 병이라 하던 통설에 의심을 가진 그는 그것이 전염병임을 주장하였으며, 1871년에는 그 병원균을 발견하였다.
노르웨이의 나병박멸운동의 최고지도자로서 공적이 많다.
나병을 한센병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2월 12일.
⑧ 볼리바르(Simón Bolívar ; 1783.7.24 ~ 1830.12.17) : 남아메리카의 독립운동지도자.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에콰도르를 해방시키고 이를 합한 대 콜롬비아공화국과 볼리비아공화국을 수립했다.
에스파냐 계 신생공화국의 유대를 목표로 파나마회의를 개최했고 이는 ‘범 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12월 17일.
⑨ 기타 오늘의 인물
1115 마틸다 사망.교황권 후원자.이탈리아에 있는 상속받은 방대한 소유지로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로마에 이르는 도로를 부설하 였다.
1842 라이더 출생.회중교회 성직자.1888년까지 목회하였다.
1853 분광태양사진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델랑드르 출생
1857 덴마크의 사실주의 작가 폰토피단 출생 - 1917년 노벨문학상
수상
1860 이승규 출생.장로교 장로,독립운동가,육영사업가.호는 남하.시 인 이은상의 부친.가족은 천주교인.오스트리아 아담슨선교사 에 의해 기독교인이 됨.
1884 브린튼 출생.퀘이커교도.1936년 이후로는 펜실베니아 윌링퍼 드에 있는 팬들 힐 대학원 원장을 역임함.
1894 한봉민 출생.장로교 장로,독립운동가.1922,9,24,남장대교회
장로로 장립.명신학교 운영에 헌신.산서노회 회계를 역임.
1898 항공술 개척자 아멜리아 에르하르트 출생
1920 미국 여권운동가-하원의원 벨라 앱저그 출생
1936 코미디언 루스 버씨 출생
1951 미국의 발명가 알버트 반스 사망
1952 진남포 3.1운동 주도한 이하영 목사 별세
1974 영국의 물리학자 채드윅 사망. 중성자 발견으로 193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오늘의 샘터
① 정치인들에게 보내는 독설 : “이승만 대통령이 밥 그릇 하나를 장만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 밥그릇에 밥을 지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막 밥을 먹으려다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밥그릇을 빼앗겼다.
전대통령이 실컷 먹은 밥그릇을 노태우 대통령에게 물려주었다.
노대통령은 누룽지까지 박박 긁어 먹었다.
그런데 이 밥그릇을 김영삼 대통령이 잃어버렸다.
지금 잃어버린 밥그릇을 김대중 대통령이 사방팔방으로 찾아다니고 있는 중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자신의 후계자를 세자 책봉으로 임명하려 했으며 그래야만 자신이 물러나더라도 영향력을 갖고 상왕(上王)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들을 하있었는데 우리 나라 정치의 가장 큰 악순환의 고리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1999.7.24, 중앙일보, 최인호)
② 알렉상드르 뒤마의 말 :1) "그러니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행복하게 살라.
그리고 결코 잊지 말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미래를 열어 보여 주시는 그 날까지, 인간의 모든 지혜는 기다림과 희망이라는 단 두 마디 말로 요약된다는 것을."
2) "모든 것은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든 것을 위해. 그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모든 사건에는 여자가 있다.
사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말한다.
"여자를 찾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