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유명 사찰이 위치한 곳은 모두 터가 좋다. 신라 때 풍수에 밝았다는 도선 국사의 영향이 크지 싶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도처는 신성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육신과 영혼이 함께 머무는 공간이 절이고 교회다. 나는 신앙을 가지지 않아 종교 영역에 아는 것이 없다. 그래도 산을 찾아가다보니 골마다 있는 절은 더러 들러 보았다.
어느 봄날 산불로 사라진 낙산사 꽃담이 아름다웠다. 비오는 여름날 석남사 비구니의 처연한 독경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선운사 동백 숲은 인물도 좋지만 배경이 더 빼어난 사진과 같았다. 식도락가가 아닌 주제에 산문 밖 먹을거리도 관심사다. 젊은 날 운문사 민박집에서 맛본 막걸리는 기가 막혔다. 표충사 산장 표고버섯전골이 일품이었다. 송광사 식당가는 산채정식 상차림이 그득했다.
나는 절간에서 공양을 받은 적도 없다보니 제대로 된 사찰음식을 먹어보질 못했다. 대신에 여러 절 아래 식당에서 요기를 한 적은 있다. 그럴 때마다 나온 밑반찬 정도는 알고 있다. 취나물과 다래나무순이 흔하고 매실장아찌나 더덕구이가 나온다. 이 취나물은 봄철 채집해서 삶아 말린 묵나물로 연중 상차림에 오른다. 그만큼 우리 야산에서 흔하게 장만할 수 있는 나물이 취나물이다.
언젠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난 수학여행에서 단양 고수동굴을 찾았다. 주차장 기념품 가게에서 소백산자락 지역특산물로 취나물을 말려 팔았다. 가게 주인은 내 인상착의를 보더니만 마수걸이는 하겠다싶었는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내가보니 취나물을 말린 것인데 색깔이 달랐다. 주인은 하나는 야생 취고 하나는 재배 취라고 했다. 거칠고 갈색인 야생 취가 재배 취보다 곱절 비쌌다.
사월이 가는 마지막 주 일요일이었다. 최근 두 차례 내린 봄비로 거리의 가로수 잎이 싱그러웠다. 대기는 미세먼지를 씻어가서 한층 투명했다. 나는 북면 화천리에서 감계 개울 따라 갔다. 중방 마을 감나무 밭을 지나 소나무 숲으로 들었다. 숲이 보내오는 음이온을 받으며 부엽토를 밟으니 마음이 평온했다. 오리나무와 졸참나무는 큰 키로 자라고 낮은 곳에는 찔레나 개가죽이 보였다.
나는 양미재 고개 마루에서 작대산으로 향했다. 작대산은 행정구역으론 함안 칠원으로 청룡산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이 산에는 제대로 된 등산로가 아니었다. 겨울에서 봄까지 생겨났던 등산로가 여름이면 무성한 수풀로 희미해졌다. 요즘은 다른 지역 산악회에서 관광버스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러다보니 등산로가 반질반질해져 사철 내내 뚜렷하다.
산속에 드니 하루가 다르게 짙어가는 녹음이었다. 아랫마을 산정이나 무기에서 올라온 아주머니 셋이 나보다 먼저 있었다. 작은 칼로 취나물 줄기를 자르는 솜씨가 익숙했다. 아마 취나물을 채집해서 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그 중 한 아낙이 취나물을 뜯고 있는 나를 보고 “산나물을 잘 아시는가 봐요?”라고 물어왔다. 나는 “취나물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내가 마련하는 취나물은 한두 끼 찬거리로 족하다. 아까 만났던 아주머니들은 산등선을 넘어가서 취나물을 계속 채집하지 싶었다. 준비해온 세 개 비닐봉지에 취나물이 제법 채워졌다. 나는 너럭바위에 앉아 가져온 도시락을 비우고 나서 취나물이 담긴 배낭을 메고 산을 내려왔다. 두 봉지는 예전 같은 학교 근무했던 분과 나누려고 전화를 넣었다. 한 분은 정년이후도 연락이 오간다.
“많은 사람들이 전원생활을 꿈꾸고 있다. 삭막해진 정서를 흙에서 되살리고자 한다. 그러나 텃밭을 일구어 푸성귀 가꾸는 일도 쉽지는 않다. 먼저 몇 평이라도 씨앗을 뿌릴 땅이 있어야 한다. 꽃을 가꾸듯 식물을 사랑해야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나는 한 뼘 땅 가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내가 가꾸는 남새밭은 내가 다리품 팔아 걸어가는 곳까지다. 봄이 오면 내가 제일 부자다. 마음만은.” 09.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