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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29일 수요일 성녀 마르타 기념일
마르타 성녀는 라자로의 동생이다. 라자로는 4일 동안 무덤에 있었지만 예수님의 기적으로 다시 살아난 인물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집에 자주 머무르셨다. 마르타 성녀는 활동적인 여인이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루카 10,41-42). 이 복음 말씀에 따라 마르타는 활동적인 신앙인의 상징이 되었고, 마리아는 관상 생활의 모범으로 공경받고 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요한 11,19-27)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whoever believes in me,
even if he dies, will live,
and anyone who lives
and believes in me wi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말씀의 초대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사랑을 실천해야 주님을 알 수 있다. 누구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면 그분 안에서 사는 것이 된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제1독서). 마르타는 오빠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오시자, 그녀는 살려 주시기를 청한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약속하신다. 그러자 마르타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한다.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하느님의 메시아로 고백한 것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목욕탕에 갔습니다. 탕이 너무 뜨거웠습니다. 그때 어떤 아이가 물었습니다. “안 뜨거우세요?” “뜨겁단다.” “그런데 참는 거예요?” “그래, 참는단다.” “어떻게 참으세요?” “살다 보면 이보다 더한 것도 참아야 한단다. 이런 것 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앉아서 참아 내는 거야. 너도 한번 해 보렴.” 하지만 아이는 아는 듯 모르는 듯 호기심의 미소만 띠고 머뭇거립니다.
참는 것을 어찌 강요할 수 있을는지요? 살다 보면 ‘참아야 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만납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기에 인내가 몸에 뱁니다. 사랑 역시 ‘참는 행위’입니다. 사랑하기에 참아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요? ‘참는 사랑’이 진정한 의미의 ‘참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투정과 협박이 뒤섞인 청원입니다. 하지만 마르타의 기도를 주님께서는 들어주십니다. 그녀의 마음이 사랑의 마음인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엄청난 협박성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들어주십니다. 믿는 이들은 언제나 어린이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른의 사랑으로 받아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인내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는 행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듯이, 마르타는 라자로의 동생입니다. 오빠의 병이 깊은 것을 알자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오셔서 고쳐 주시기를 청한 것이지요. 평소 가깝게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틀이 지난 뒤에야 움직이십니다.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투정에 가까운 마르타의 청원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리스 철학은 이기적 사랑인 에피튜미아, 성적 사랑인 에로스, 그리고 헌신적 사랑인 아가페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처음엔 대부분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헌신적 사랑으로 완성시켜 나갑니다. 우리는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의 모습에서 헌신적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모님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헌신적 사랑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위하여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기꺼이 희생 제물로 내주신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그분의 사랑은 그분께서 보여 주신 사랑에 견주면 아주 미미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모두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어쩌면 조개껍질로 바닷물을 담으려는 무모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만이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바쁩니다. 고통 앞에서도 바쁩니다. 평소 느긋했던 사람도 사고를 당하면 금방 조급해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조급하다고 주님께서도 그러려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기적은 언제나 천천히 일어납니다. 조건이 갖추어진 뒤에야 주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판단 기준에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라자로’는 이스라엘의 흔한 이름인 엘리아자르(Eleazar)에서 유래합니다. ‘하느님께서 도우셨다.’라는 뜻을 지녔지요. 신약 성경에는 라자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두 명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거지 라자로와 요한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오빠 라자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를 살려 주십니다. 당신의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마르타는 깨달음을 얻고 외칩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역시 마르타의 고백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기적의 힘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옥탑방 천사들
-양승국신부-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옥탑방 천사들>
아이들 틈에서 살아온 지난날들, 돌아보니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인한 축복의 나날이었습니다. 축복 중에서 가장 큰 축복은 무엇보다도 고마운 분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한 분 한 분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지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분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더욱 열심히 아이들을 위해 투신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새벽 두시, 집단으로 가출한 아이들을 찾아 버스터미널로 심야만화방으로 야산으로 정처 없이 함께 헤매 다니던 형제님은 언제까지나 제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잠들어 계신 할아버지께서 차고 계시던 시계-꽤 값나가는 시계-몰래 탈취해서 아이들 위해서 쓰라고 가져오신 할머니 생각만 해도 느닷없이 웃음이 나옵니다. 오랜 세월 정붙여 살던 집을 아이들에게 내어주고 보일러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옥탑방에 전세로 들어가신 한 부부, 사고뭉치 저희 아이들을 셀 수도 없이 자주 집에 데려가셔서 친자식처럼 먹여주고, 재워주고, 놀아주던 가족, 그분들을 떠올릴 때마다 부끄러움만이 고개를 듭니다.
신자들 가운데는 어쩔 수 없는 "마르타 스타일"의 성향을 지닌 분들이 계십니다. 타고난 성향이기에 어쩔 수가 없지요.
비록 이분들이 깊이 있는 기도체험이나 감미로운 주님과의 만남을 통한 충만한 영적 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할지라도 조금도 꿇릴게 없는 신앙입니다. 마르타의 삶 역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삶이고, 교회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스타일의 삶입니다.
이런 분들은 기질 상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기 힘들기에 기도에 몰입하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성서를 좀 공부해보겠다고 성서모임에 등록하지만 도통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없지요. 사순절 특강이다 연수, 피정에 가도 잠만 푹 자다가 돌아오곤 하시죠.
그러다가도 몸으로 때우는 일이다 싶으면 눈이 확 뜨입니다. 잠이 달아납니다. 갑자기 얼굴에 생기가 돕니다.
아무리 굳은 일, 막일, 허리가 휘청거리는 일이라 할지라도 앞뒤를 가리지 않습니다. 즉시 팔을 걷어붙입니다. 이마에 땀방울이 비 오듯이 맺히고 입에서는 단내가 날 정도로 고된 일을 하면서도 얼굴에는 기쁨과 성취감으로 가득 찹니다. 그 모든 노력을 기쁘게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러다 보니 오라는 데가 한 두 군데가 아닙니다. 또 이런 분들이 거절을 잘 못하지요. 하루 온 종일 스케줄이 빡빡합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지만 생각뿐입니다. 어쩔 수 없는 분들이지요.
무척 단순하지만 적극적입니다. 협조적입니다. 구체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타의 신앙이며, 마르타의 신앙은 교회의 신앙 안에 중요한 한 축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마르타의 삶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재주도 많고 부지런한 마르타였습니다. 즉시 팔을 걷어붙이던 마르타, 일거리를 남겨두고는 잠을 못 이루던 마르타,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던 마르타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마르타의 영성(활동)은 마리아의 영성(관상) 못지 않게 중요한 영성입니다. 모두가 다 제칠궁방에 머물며 하루 온종일 기도에만 전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지도자나 설교자, 무슨 무슨 위원으로만 존재하기를 원한다면 교회 안의 구체적인 봉사는 누가 하겠습니까?
마르타의 영성을 지니신 분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여러분의 영성은 바로 교회의 영성이며 교회의 기반이 되는 영성입니다. 단 조금만 욕심을 부린다면 여러분이 매일 행하는 활동이나 봉사를 예수님과 연결시키십시오.
그 방법도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봉사하시기 전에 성모송을 한 번 바치는 겁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봉사에 전념하십시오. 봉사가 끝나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호라도 한번 그으십시오. 여러분의 봉사를 주님의 영광을 위한 봉사로 승화시키십시오. 그것이 바로 활동의 기도화이며, 활동하는 관상가가 되는 길입니다.
사랑과 믿음
-상지종신부-
누군가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여 하나가 되고자 할 때, '사랑한다' '믿는다'라는 말을 씁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 바로 '사랑'과 '믿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사랑과 믿음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사랑하는 대상, 믿음의 대상은 크게 '하느님'과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흔히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나 믿음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나 믿음을 따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고백은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르타가 고백하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곧 오빠인 라자로에 대한 사랑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르타는 오빠의 죽음으로 깊이 상심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의 죽음 앞에서 마르타는 오직 예수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 죽은 오빠를 살려내라고 억지를 부리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오빠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의 고백이고, 바로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사랑하는 오빠와 다시 만나고픈 간절한 염원의 표현입니다.
마르타에게 있어서 오빠의 죽음은 단지 절망적인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드리는 굳은 믿음을 고백하게 하는 신앙 고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에 대한 마르타의 사랑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마르타의 굳은 믿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을 뿐만 아니라, 마르타의 사랑이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결실을 맺게 하셨습니다.
라자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르타와 라자로의 관계는 더 이상 살아있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라자로를 소생시킴으로써 이 관계를 다시금 살아있는 사람 사이의 관계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오빠 라자로에 대한 마르타의 사랑이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즉 마르타의 사랑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인간관계를 맺습니다. 참으로 기쁘고 아름다운 관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관계도 많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에는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상대방을 진실로 사랑하고 있다면, 예수님께서 좋은 관계로 바꿔주신다는 것을 굳게 믿고 인내를 가지고 예수님게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떠올려봅시다. 부모님일수도 있고, 자녀들일수도 있습니다. 친한 친구나 교회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믿음의 벗일수도 있고, 직장 동료나 옆집에 사는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이 사람들이 나에게 준 상처를 뒤로 하고 과연 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는지, 이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는다면 더 이상 아무런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가장 밑바닥부터 다시 짚어보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믿음으로 고백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여전히 갈등을 느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믿기에 마음 한 구석에는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남아 있습니까? 그러면 됐습니다. 예수님께 기도하면 됩니다. 그리고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을 대하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우리에게 아픔을 준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사랑한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우리를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양승국신부-
<깨지고 금간 항아리>
후원회 피정 강사로 오신 신부님께서 하셨던 말씀 하나가 오래도록 제 마음 안에 남아있습니다.
큰 장독대 위에 많은 물 항아리들이 줄지어 서있었습니다. 큰 항아리, 작은 항아리, 투박한 항아리, 맵시 나는 항아리...그리고 ‘깨지고 금간 항아리!’
그런데 주인은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쁘고 성한 항아리들도 많은데, 하필 물 길으러 갈 때 마다 ‘깨지고 금간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한 두 번이면 모르겠는데, 매번 ‘깨지고 금간 항아리’와 함께 하니, ‘깨지고 금간 항아리’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깨지고 금간 항아리’에 물을 가득 담아 돌아오는 주인을 향해 참다 참다 못한 ‘깨지고 금간 항아리’가 따졌습니다.
“주인님, 왜 하필 나입니다. 저 많은 쌩쌩한 항아리들 다 놀고먹는데, 왜 꼭 깨지고 금간 저만 이렇게 부려 먹으십니까?”
그때 주인은 ‘깨지고 금간 항아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야, 뒤를 한번 돌아 보거라!”
깨진 항아리가 뒤를 돌아보니 아주 특별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다른 곳은 다 황무지인데, 주인과 ‘깨지고 금간 항아리’가 늘 물을 흘리며 다니던 그 길에만 예쁘고 앙증맞은 들꽃들이 무수히 피어있었습니다.
주인은 다정한 목소리로 ‘깨지고 금간 항아리’를 향해 이렇게 타일렀습니다.
“애야, 보거라. 깨지고 금간 네 상처 사이로 뿌려진 물들이 저토록 많은 생명들을 싹트게 했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결코 밑진 장사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예인 것 같습니다. 우리도 가끔씩 하느님 앞에 ‘깨지고 금간 항아리’와 똑같은 투정을 늘어놓을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왜 하필 저입니까? 건강하고 능력 많고 훌륭한 사람들 저렇게 많은데, 저 사람들, 저렇게 하루 종일 놀고먹는데, 그 사람들 놔두고 왜 하필 저입니까? 보시다시피 저는 몸도 성치 못하고, 능력도 없습니다. 시간도 부족하고, 자신감도 없습니다. 있는 죄 없는 죄 다 짓고 살고, 도무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저입니까?”
우리의 하느님, 참으로 신비스런 분이십니다. 각자에게 맞는 역할을 부여하십니다. 때로 불공평해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키실 만하니 시키시는 것입니다. 맡길만하니 맡기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서 관상가의 대명사인 마리아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활동가, 언니 마르타의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교회 안에서, 가정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마르타처럼 온몸으로 뛰는 역할을 하고 계시는 분들의 축일이기도 합니다.
사실 그분들이 하시는 ‘작은 일들’, 하느님 앞에 절대로 작은 일들이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무대 위에서 각광과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우아한 주연배우로 존재할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세상과 완벽히 격리된 봉쇄 수도원에서 하루 온종일 거룩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 관상생활에만 전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프 연주자라고 하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신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우아하고 부드럽게 하프 줄을 뜯는 부드러운 손놀림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긴 드레스 자락에 감춰진 발에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관객들이 쉽게 바라볼 수 있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손놀림도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이지는 않지만 치마 밑에서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발동작은 더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발’ 없이 아름다운 하프 연주는 불가능합니다.
정성껏 가족들의 식탁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모습과도 크게 차이나지 않습니다.
때로 귀찮고, 때로 지긋지긋한 일상의 모든 작은 일들이 결국 생명과 사랑, 하느님께로 연결되는 은총의 끈이며, 성화(聖化)의 장이며, 기도 중의 기도임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
-허영업 신부-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작가 박경리 씨의 빈소에서 정의채 몬시뇰이 장례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강론에서 몬시뇰은 고인과의 각별한 인연을 이야기했습니다.
몬시뇰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박경리 씨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죽음 문제”라고 하면서 “모르는 것을 아는 척 쓸 수가 없어서 소설을
쓸 때마다 항상 죽음 문제를 외면하게 된다”며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이에 몬시뇰은 박경리 씨가 세례를 받는 데에
도움을 자청했고 박경리 씨는 교리 공부를 다 마치고 세례를 받게 됐다고 합니다.
죽음에 대한 문제는 인간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의 마지막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깨닫는 것, 가진 것,
그것들만이 결코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인은 죽음을 초월하는
삶이 있음을 믿습니다.
죽음 너머의 삶을 지향하는 삶이야말로 현재의 삶을 더 충실하게 살 수 있게
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은 믿고 있습니까?
생명의 입김
-여상훈-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생명의 원천이자 주인이 예수님이심을 선언하는 오늘 복음을 읽다가, 좋아하는 시편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 모르고 숨을 거두어들이시면 먼지로 돌아가지만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땅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시편 104,29-30)
저는 한 해 전례 가운데 재의 수요일을 가장 좋아합니다. 영혼이 떠나면 우리 몸은 욕망의 찌꺼기까지 모아 담고 한줌 재로 돌아갈 것임을 그날만큼 절절하게 느끼는 경우가 없습니다. 이마와 머리카락 사이에 묻었을 재가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집에 가서 세면대 거울을 봅니다. 희끗한 재의 흔적에서, 머지않아 우리 생명이 남겨놓을 먼지와 재를 미리 봅니다. 살아 있는 기쁨과 죽을 운명의 허망함이 얼마나 가까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지 새삼 깨닫습니다. 태초에 불어넣어 주신 입김에 활력을 얻어 뛰고 있는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그러고 있노라면 볼멘 심정, 미운 마음, 쫓기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로지 두려워할 것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오빠를 잃은 마르타에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미 죽은 오빠는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터이니 걱정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조물주께서 이 세상에 들어와서 우리의 고통을 함께 겪으심으로 우리 생명이 새로워진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 마련됩니다. 생명의 원천을 믿는가 아닌가가 신앙과 불신을 가르고 소생과 파멸을 정하는 기준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입김으로 다시 소생하여 하느님과 한 몸이 되면 우리가 아는 우주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마르타는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요. 창에 찔리신 상처에 손가락을 들이밀어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믿지 못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제가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해마다 이마에 재를 받으면서 육신의 생명이 짧다는 것과 죽음이 조물주께 돌아가는 여정의 시작이라는 것을 배우고 또 깨달으면서도, 의심은 그늘진 숲의 넝쿨처럼 길고도 질깁니다.
주님 공동체의 살림꾼
-김찬선신부-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마르타는
늘 동생 마리아와 함께 얘기되어집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Being) 관상생활을 대표한다면
마르타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는(Doing) 활동생활을 대표하는 것으로.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에 의하면
마리아가 주님으로부터 좋은 몫을 택했다는 칭찬을 들은데 비해
마르타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꾸중을 듣습니다.
마르타는 매우 억울했을 것입니다.
가정이건 공동체건 여러 가지 일을 건사하는 사람이 없으면
공동체가 돌아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를 봐도 여러 가지 일을 도맡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좋은 강사가 와서 특강을 해도 뒷바라지를 하느라
정작 자기는 좋은 얘기를 듣지 못합니다.
집에서 어머니들이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명절이 되어 다른 가족들은 먹고 떠들고, 웃고 즐겨도
어머니만은 음식 뒷바라지 하랴 설거지 하랴 혼자 바쁩니다.
명절 때 뿐이 아니라 어머니의 모든 삶은 가족을 위한 삶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모든 활동을 우리는 살림을 산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어머니의 모든 일은 살림, 즉 가족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러한 살림을 티내지 않고 하십니다.
어느 정도로 티내지 않느냐 하면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야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이토록 많고 큰 일을 일생 티내지 않고 했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는 어느 하나도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는 살림을
일로서 하지 않고 사랑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바로 주님 공동체의 어머니이고 살림꾼입니다.
마르타는 일이 좋아서 공동체의 모든 일을 떠맡은 일꾼이 아니라
주님을 누구보다 사랑하기에
주님 공동체의 모두를 살리는 사랑의 마당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조욱현 신부-
오늘은 성녀 마르타 축일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라자로의 집에 들르셔서 쉬고 계실 때에, 마르타는 부엌에서 열심히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마리아는 예수님 발치에 앉아 예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자기는 부엌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예수님 앞에 앉아서 자기를 도와줄 생각도 않고 있는 마리아에게 자기 일 좀 거들어 주게 하라고 예수님께 말하였던 마르타였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를 보고, "너는 너무나 많은 일로 걱정하며 마음을 쓰고 있는데,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 때문에 마르타는 활동적인 그리스도인의 상징이고 동생 마리아는 관상생활의 모델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성녀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라"(25절)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님께 대해서 고백한 신앙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하시는 중에 여러 번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것을 보았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죽은 과부의 외아들 그리고 오늘 복음에 나오는 라자로를 다시 살리시는 장면을 보고 그분이야말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르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21-22절)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23절) 하시고 라자로를 살려 주시면서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분으로서가 아니라, 구원은 "지금 여기서"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구원은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이 단지, 내가 죽은 다음에, 하느님의 심판을 받은 다음 결정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구원은 이 세상에서부터 체험되고 누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지금 구원을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은 다음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원을 주시는 그분을 믿고, 따르면서, 즉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지금 여기서"부터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을 닮아가기 위해 하느님의 뜻 때문에 나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삶, 죽으려 노력하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 이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기 전에 이미 고통의 신비를 체험하게 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혹은 이웃에게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낳아줄 수 있다. 이 때에 우리도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유명한 모스 전신기 회사에서 사람을 뽑는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워낙 유명한 회사인 동시에 전망 있는 회사이기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면접을 기다렸지요. 그런데 갑자기 한 청년이 벌떡 일어나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리고 몇 분 뒤 그 청년과 그 회사의 사장이 함께 나왔습니다. 사장은 사람들에게 말했지요.
오해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마르타의 신앙 -여성국 신부- 요즘 많은 교우분들이 사제들에게 요구하는 것 중의 하나가 개신교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정원순 신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기고 있는 것을 털어놓는 일은 땀나는 일이다. 아울러 털어놓는 일에 동반하는 가장 공통적인 형태의 감정상태는 불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백하는 데는 불안 심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 불안 심리는 자신의 비밀을 누군가 알게 되었다는 것과 노출에 따른 양심의 부담감이 뒤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백을 하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하다. 마음의 짐을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고백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성인(聖人)의 삶 -이수철신부- 그 공동체 얼마나 활력이 넘칠까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상(理想)입니다만 낮아지기 경쟁, 작아지기 경쟁, 비우기 경쟁, 섬기기 경쟁, 성인되기 경쟁의 공동체가 실현된다면 바로 거기가 천국일 것입니다. 영광을 받으나 수치를 당하나, 비난을 받으나 칭찬을 받으나, 언제든지 하느님의 일꾼답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것 같으나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또 아무리 심한 벌을 받아도 죽지 않으며, 슬픔을 당해도 늘 기뻐하고, 가난하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2코린6,8-10).” 바로 이런 이가 성인입니다. 수도원의 상징과도 같은 노(老) 오동나무가 계속된 폭우에 장엄하게 쓰러졌습니다. 넘어진 나무 밑동을 보니 뿌리가 더 썩어 있었습니다. 순간 연상되는 게 영혼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이 썩으면 육신도 저절로 죽기 마련이겠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도 같은 영혼이 튼튼해야 육신의 고통이나 시련도 능히 견뎌낼 수 있겠다.” 믿음으로 깊이 주님께 뿌리내려야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일꾼답게, 성인되어 삽니다.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사랑 안에서 하느님과 일치된 삶이 영혼의 뿌리를 튼튼하게 합니다. 바로 매일 미사의 은총이기도 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여기서부터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을 삽니다. 또 좋은 믿음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선사하시는 성체성사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아멘.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정녕 견디기 힘든 일 가운데 하나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입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작은 일에 마음 상해 다투기도 하고, 그러다가 화해하고, ‘지지고 볶고’ 티격태격 살아가던, 어쩌면 내 분신 같던 그의 영원한 부재,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 따뜻했던 미소, 부드러운 음성, 함께 했던 좋은 추억들을 더 이상 공유할 수 없다는 것, 참으로 큰 상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미처 준비되지 않은 죽음 앞에서 그리 서글피 통곡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사전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순서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이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주 이런 연습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매일 잠들기 전 사랑하는 사람과 작별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이 이 사람과 보내는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상대방을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사랑하는 오빠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애통해하는 마르타의 모습이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사랑했던 오빠였기에, 아직 갈 길이 창창했던 오빠였기에,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되었던 오빠였기에 마르타는 이 현실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나자로와 절친했던 예수님이셨기에 초상집을 찾아오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마리아는 집안에 그냥 앉아있었던 반면, 열혈여성이었던 마르타는 좀 따져봐야겠다며 집 밖으로 나옵니다. 볼멘 목소리로, 노기가 가득 표정으로 이렇게 외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타의 이 말은 꽤 힐난조의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 당신은 오빠의 친한 친구가 되어가지고, 친구가 죽어가는 데 왜 빨리 오지 않았냐, 아무리 공사다망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며 따지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마르타의 모습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도 많은 경우 이렇게 따지지 않습니까? 도무지 수용하기 힘든 참혹한 현실 앞에서, 난 데 없이 다가온 큰 십자가 앞에서 ‘당신은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면서 어떻게 이런 몹쓸 일을 제게 허락하십니까? 어쩌면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라며 하느님께 따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마르타가 우리와 다른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원망하고 미워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그 어떤 이해하지 못할 일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내 인생에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마르타는 이렇게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마르타의 굳건한 신앙, 단순한 신앙, 어찌 보면 집요하고 지나칠 정도로 강한 주님께 대한 신뢰심에 예수님께서도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십니다.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몇 부류 있습니다. 착해빠진 사람들, 그래서 단순한 사람들,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달려드는 집요한 사람들, 한 마디로 마르타 같은 사람들 무서워하십니다. 그런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실 수 없었습니다. 나자로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며 생각해봅니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우리는 많은 분들과 작별하며 살아갑니다. 가까웠던 친구들도 떠나갑니다. 축의금보다 조의금 액수가 점점 더 늘어가는 것,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수용해야만 하는 슬픈 현실입니다. 그런 죽음을 바라볼 때 마다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내 죽음도 멀지 않았구나, 나도 언젠가 저 관속에 누워있겠구나, 생각하며 더욱 겸손하게, 더욱 하느님 두려워하며, 더욱 성실히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나자로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치유활동을 통해, 기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불치병에서 회복되어 다시 한 번 새 삶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유한한 것입니다. 영원히 기적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의 거처를 떠나야 합니다. 이 세상에 꾸며놓았던 장막을 치워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이승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단 한 가지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빈손이요, 빈 영혼입니다. 그 순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재물도, 명예도, 자식도, 유산도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했던 굳은 신앙심입니다. 비록 부족했지만, 많이 부끄러웠지만 예수님 말씀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던 우리들의 신앙여정입니다. 열렬했던, 확고했던 마르타의 신앙입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영탁신부- 놀이터에서 다섯 살짜리 남자 아이와 아빠가 재미있게 놀고 있습니다. 아빠는 기뻐하며 아이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경규봉신부- 성녀 마르타(‘집안의 안주인’이란 뜻)는 마리아와 라자로의 누이로서 베타니아에서 살았다. 이들은 예수님과 절친한 사이로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무척 사랑하셨으며, 주님께서 가실 때에는 대부분 그들의 집에 머무르시곤 하셨다. 이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나, 루가복음(10,38-42)과 요한복음(11,1-45; 12,1-11)에 기록되어 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마리아와 라자로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에 프랑스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고 한다. 마르타는 요리사의 수호성녀이다.
복음에 따르면 성녀 마르타는 주님께 대한 깊은 믿음을 지닌 분이었다. 그녀는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알았을”(요한 11,22) 정도로 주님께 대한 깊은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었으며”(11,24)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었다”(요한 11,27). 이러한 그녀의 믿음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녀의 믿음은 다른 어떤 사도들에 비해 뒤지지 않는다. 그녀는 진정 예수님을 마음속 깊이 주님으로 모셨으며, 성모님처럼 주님의 종으로 살았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먼저 주님께 말씀드렸다. 오빠 라자로가 앓고 있을 때에도 그 소식을 멀리 떨어진 주님께 가장 먼저 알려드렸다(요한 11,3). 사람이 겪는 모든 문제는 곧 주님께서 해결해주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주님을 찾았던 것이다. 먼저 주님을 찾는 것,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길이다. 자신의 생각과 뜻이나 이웃의 도움을 받기보다 먼저 주님께 말씀드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신앙인의 참된 자세이다. 또한 그녀는 주님을 모시기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주님께서 베타니아에 오셨을 때에 그녀는 주님을 자신의 집에 모시고 정성을 다해 모셨다(루가 10,38-42). 그녀의 마음속에는 온통 주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여 무엇이든지 주님께서 필요하신 것을 해드리고자 분주히 행했다. 그녀는 주님을 위하여 많은 일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주님을 위해 너무 신경을 썼기 때문에 여러 가지 걱정을 할 정도였다(루가 10,41). 그렇지만 바쁜 가운데에서도 틈틈이 발걸음을 멈추고 주님과 말씀을 나누었다(루가 10,40). 기도란 곧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마르타는 바쁜 가운데에서도 주님과 말씀을 나누며 기도하기를 잊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를 잘 가르쳐주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는 주님의 말씀은 그녀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친절하게 가르쳐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즉,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도 소중하지만, 주님과 함께 머무르고 주님의 말씀을 편안히 듣는 것 또한 대단히 소중함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한 걸음 더 주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중심으로 살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사는 그녀를 당신의 친형제요, 자매이며, 가족으로서 사랑하셨다. 라자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그녀의 가족을 그처럼 많이 사랑하셨다. 오늘 마르타 축일을 보내면서 마르타처럼 주님을 진정 나의 주로 모시는 종이 되어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자. 바쁜 가운데에서도 가끔씩 발걸음을 멈출 줄 아는 신앙인이 되자. 내가 겪는 모든 문제를 먼저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인이 되자. 내가 무엇을 행함으로써만 주님께 사랑과 정성을 다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채우며, 주님과 함께 행하는 신앙인, 주님께서 내 안에서 행하시도록 하는 신앙인이 되자. -이차룡 신부-
예수님의 제자 성녀 마르타 -박상대 신부-
새벽을 열며
“이제 모두 돌아가십시오. 저희는 이 업무에 적합한 인재를 찾았습니다.”
사장과의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흥분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도저히 저희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모두에게 면접 볼 기회도 주지 않고 사람을 뽑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사장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모스 부호로 쓴 문구를 안내판에 계속 내보냈습니다. 그 안내판에는 ‘이 문구를 해석한 사람은 즉시 안으로 들어오시오. 우리는 당신을 채용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었지요. 여기에 있는 이 젊은이만이 모스 부호를 알아보고 사무실로 들어왔습니다. 자~~ 더 불만이 있습니까?”
다른 구직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하겠지요?
종종 하느님께서는 불공평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특별한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푸신다고, 그래서 자신은 이제 더 이상 하느님께 의지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님 곁을 떠나는 것을 공공연하게 말씀하시는 분들까지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느님께서는 침묵하셨을까요? 그래서 정말로 불공평하신 하느님일까요?
어쩌면 앞선 그 사장이 안내판을 통해서 표시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몰랐던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의 메시지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주님께 화를 내고 있는 불충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마르타 기념일을 맞이해서 복음에서는 마르타의 강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인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뒤에 나타난 예수님께 화를 내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르타의 입장에서 볼 때, 화를 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까? 더군다나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 남매를 얼마나 예뻐하셨습니까? 따라서 정말로 예뻐하고 사랑한다면 라자로가 죽기 전에 와서 그 병을 고쳐줘야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라고 판정을 받는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 되어서야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보여주는 마르타였습니다.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보내고 있는 구원의 메시지를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에서도 예수님께 실망하지 않고 강한 믿음으로 다가설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주님의 메시지를 얼마나 제대로 보고 있었을까요? 마르타의 그 믿음이 너무나 부러울 뿐입니다.
방송에 나오는 목사들과 같은 설교를 요구합니다. 물론 강론과 설교가
같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신자들이 원하니 도대체 어떻게 설교를
하길래 우리 신자들이 그런 모습을 원할까 싶어 시간이 나면 가끔
개신교 방송을 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유명한 목사님이 하는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신앙을 비교하면서
설교를 하시는데, 그의 오빠 라자로의 죽음과 연관된 오늘 복음을
가지고 풀이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께서
마르타가 처음 마중 나왔을 때 라자로를 살리시지 않고, 마리아가
마중 나온 다음에야 살리신 것은 마리아의 신앙이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마르타의 신앙은 부족한 신앙이라면서 말입니다.
사실 저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마르타의 신앙, 특히나 공동체에 있어서 마르타의 몫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이 마리아와 같은 신앙만을 지니려고 한다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마르타의 오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마르타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마리아와 마르타 그들의 신앙은 우열을 따질 수 없습니다. 다만 그들은
공동체에서 자신들이 하는 일의 몫이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마르타는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고백은 자신의 전존재를 걸고 하는 것이다. 곧 지금까지 지니고 살아온 자신의 가치관으로 살지 아니하고 주님의 가치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다. 마르타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 역시 매일 마르타처럼 고백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뒤돌아보아야겠다.
얼마 전 형제들과 잠시 웃으며 나눈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형제들이 서로 섬기기 경쟁을 한다면
누가 진정 성인이요 크리스천입니까?
오늘 새벽기도 시 감동적인 독서 부분을 길다 싶지만 인용합니다.
“두 손에는 정의의 무기를 들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모든 것을, 하느님을 가진 부자가 성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고 사랑할 때 이런 성인이 됩니다.
그 영혼 주님께 깊이 뿌리 내린 믿음 있을 때 이런 성인입니다.
어제 밤, 수도원 길가에 자리 잡고 있었던
“보이지 않는 뿌리가 썩으면 저절로 나무들 죽듯이,
보이지 않는 영혼,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진정 주님을 믿고 사랑할 때 튼튼한 영혼의 뿌리요, 성인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주님 말씀대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우리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르타 성녀와 함께 주님을 고백합시다.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시며
-양승국신부-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아빠를 향해 뛰어내립니다.
그 순간 아빠는 당황했지만 있는 힘을 다해 아이를 받아냅니다.
아빠는 은근히 기뻤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온몸을 던질 정도로
자기를 신뢰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기분이 좋아진 아빠는 아이가 평소에 갖고 싶어 하던 장난감을 선물합니다.
아빠를 향해 뛰어내리는 아이를 무모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빠를 완전히 믿고 뛰어내리는 아이의 모습은
아빠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은 아빠에게 자신을 완전히 믿고 있는 존재로 다가옵니다.
완전한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아무런 의심 없이 내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길 수 있는 것!
그것이 완전한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마르타의 이야기에서 완전한 믿음을 봅니다.
오빠의 죽음을 위로하러 온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예수님을 마중 나가는 마르타.
부활 때에 오빠가 다시 살아날 것임을 믿는다고 말하는 마르타.
예수님이 메시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마르타.
마르타에게는 오빠의 죽음 때문에 생기는 슬픔과 공허함보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더 컸던 것입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마르타의 고백이라 불리는 이 장엄한 선언은
오빠의 병 치료가 어긋나 사망한 후에 한 것이기에 그 의미는 더 큽니다.
아빠를 믿고 뛰어내리는 아이의 모습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을 발견한
오빠의 치료시기가 어긋났기에 주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넘어서 주님을 향한 완전한 믿음의 고백을 드리는 마르타의 모습은
분명 예수님께 기쁨이었고 그녀에게 하느님 나라에서 함께 하는 선물을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우선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 그 무엇보다 믿음을 우선에 둘 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완전한 믿음.
그 어떤 조건도 따지지 않는 완전한 믿음.
아빠를 믿고 뛰어내리는 아이와 같은 완전한 믿음.
그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예, 주님! 믿습니다”라고 즉시 답할수 있는 저희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온 정성을 다한 성녀 마르타
오늘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 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본문 다음 말씀 에서는 이 말씀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죽음에서 소생시켜 주신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기적은 언제나 죽음을 직면하고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안이며
더없이 반 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살기를 원하면서도 사실상 죽 어야 하는
가련한 신세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주님은 오늘의 복음을 통하여 삶과 죽음을 지배하시고 생사의 대권을 가지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알려 주십니다.
성경 을 보면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신 적이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견하 시고 한탄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으며, 또 한 번은 라자로의 부음을 듣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셨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우신 것을 보면 죽음이란 역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슬프고 비참한 일인 가 봅니다.
그래서 마르타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처음엔 주님을 원망하는 어조로 이렇게 말합 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고
말하면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그의 믿음을 가상하 게 여기시고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 날 것이라고 말하자
마르타는 유대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일반적인 부활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은 그의 부활신앙 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시면서도 한걸음 더 나아가 그 부활신앙이
이미 당신 안에서 성취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인간 부활의 효력이 이미 실현되었고,
부활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서부터 현실화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은총 역시 신앙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주님 은 마르타에게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예, 주님, 주님께서 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하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 는 당신 말씀을 상기시켜 주신 다음, 이미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한
라자로를 소생 시켜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살아가고 그리고 죽어갑니다.
그러 나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잠시 동안 소생시켜 주 신 과부의 외아들이나 야이로의 딸 그리고 라자로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안 겨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동서고금의 많은 성현들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의 수수께끼 를 풀어보려고
노력하였지만 아무도 속 시원한 해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죽은 후 에 전개될 부활과 영생을 제시해 주셨고 죽음의 신비를 명확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친히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이 그처럼 갈망하는 부활과 영생을
실제로 보여주셨으며 심지어 죽음까지 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한다고 해서 부활을 제쳐 놓으 면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결국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불행은 죽음의 문제이고 아무도 이 죽음을 외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심 각한 문제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이 무서운 것은 죽음 그 자체를 모르기 때문이며 죽음의 세계를 다 녀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죽음의 세게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그 캄캄한 어둠의 휘장을 열 어 보이게 하신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 에게 죽음 그 뒤에 하느님 나라가 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 해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 하시어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인류는 이제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었고 영원한 삶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인류에게 참으로 큰 축복을 안겨주신 고마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
삶이 기쁘십니까 ?
행복하십니까 ?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 에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은 우리 인생의 참 의미를 깨닫게 해 줍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지 않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고, 아무리 많은 성공을 거두어들인다 해도 주님 없이 행한 것은
헛 그물질과 같습니다.
우리 삶이 현세에서만 끝나면 인간은 너무나 비참하고 주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과
봉헌생활은 하나의 장식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부활은 나 혼자만 내적으로 간직하고 즐기는 소유 물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웃 형제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선포하 여
그들이 더 이상 죽음의 자리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않도록 부활의 신비를 가르쳐 주며 선포해야 합니 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나 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 ♡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녀 마르타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 출신으로 성서상의 성인이다. 마르타의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16번 언급된다. 그것도 대단히 단편적으로 언급 되고 있는데, 루가복음 10장에 3번(38, 40, 41절), 그리고 요한복음 11장에 12번, 12장에 1번(12,2)이다. 복음서에 언급된 마르타의 이름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은 그의 오빠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리아이다. 베다니아에 살았던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과 각별한 친분을 가지고 있었던 가족이다. 이 가족은 성서상의 문맥을 살펴볼 때 그리 대단한 가문도 아니고 당대에 명성을 떨친 위인도 아니고 재산이 많고 세력도 있는 부호(富豪)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가족, 이스라엘의 대다수 가족이 그랬듯이 평범하다 못해 가난하고 소외된 그런 가족이었다.
그러나 이 가족이 우리 그리스도교 교회사에 미친 영향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단한 것이다. 라자로의 죽음 앞에 하느님의 눈물을 보이신 예수께서 마르타의 청을 받아들여 그를 죽음으로부터 소생(蘇生)시킴으로써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으로 계시하셨다.(요한 11,1-44) 루가복음에서 보듯이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청취하는 일을 즐겨하고, 마르타는 마리아의 행동을 다소 시기했지만 예수님과 그 일행을 시중드는 일을 즐겨하였다.
물론 예수께서는 마르타가 많은 일에 신경을 쓰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으로써 그것을 마리아가 택했다고 하셨다.(루가 10,38-42) 그러나 누구도 하느님의 말씀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듯이 예수께서도 굶주린 군중을 빵의 기적으로 먼저 배불리신 후에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내리지 않으셨는가.(요한 6장)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관상(觀想)과 활동(活動), 이 둘은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덕목(德目)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균형과 조화를 필요로 하는 덕목이다. 그래서 일찍이 베네딕토 성인(470-547)은 “일하며 기도하라!”(ora et labora)고 말했을 것이다.
2,000년 교회사는 마르타의 가정적이며 활동적 태도를 한번도 과소평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성녀 마르타의 마음속에 예수님께 대한 굳센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며(요한 11,27), 그녀 또한 다른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충실한 제자였기 때문이다.
마르타 성녀의 축일에 듣게 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은 대화를 통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말씀(25-26절)과 마르타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고백(27절)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친구로 알려진 라자로가 병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 병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며 이틀씩이나 여유를 부리시다가(11,3-6), 결국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는 날(11,17) 베다니아에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다.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나흘째 되었다는 말은 라자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뜻하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 사흘이 지나면 무덤에 안장하였다.
많은 유다인들이 상가(喪家)를 찾아와 유족을 위로한다는 것은 당시 관례로 이웃사랑의 실천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은 잠시 후에 벌어질 놀라운 기적의 증인들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언니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고, 동생 마리아는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설명은 마르타의 활동적 성격과 마리아의 관상적 성격을 잘 대변하는 대목이라 하겠다.(루가 10,38-42 참조) 요한복음사가는 마르타의 굳센 신앙을 토대로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는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계시한다. 이는 복음의 주제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마르타가 오빠가 소생하기도 전에 예수께 고백한 신앙은 다소 표면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소생(蘇生)시키심으로써 마르타의 부족한 신앙을 넘치게 채워주셨다. 우리의 믿음도 마르타의 그것처럼 표면적인 경우가 많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약점은 인간의 이성(理性)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예수님의 믿음을 언급한다는 것을 ‘어리석은 짓’으로 여기는 것이며, 내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곳에서 예수님의 능력을 언급한다는 것을 ‘무능한 짓’으로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믿음이 머무를 수 있는 자리는 거의 없다. 그들은 죽음을 죽음으로만 받아들인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죽음 다음에도 생명이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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