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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한국의 불교학자 <3> 심재룡 / 조은수 | ||||||
불교철학 연구방법론 정립에 헌신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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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무현(无見) 심재룡(沈在龍) 선생은 1943년 인천에서 출생하여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평생 헌신적으로 3남매를 길러낸 편모슬하에서 성장하면서 어려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서울대 3대 천재의 하나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남다른 재치와 총명으로 많은 화제를 남기기도 했다. 졸업 후 잠깐 기자 생활을 거친 후, 학창 시절에 특별히 흥미를 갖던 언어분석철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자 하와이대학교 동서문화센터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을 들고 1969년 하와이대학교 철학과로 유학길에 올랐다. 석사 학위를 마친 후, 당시 하와이대에 재직하던 동양철학의 두 거장 칼루파하나 선생과 장종원 선생을 만난 인연으로 전공을 불교철학으로 바꾸어 연구하였다. 1979년, The Philosophical Foundation of Korean Zen Buddhism–The Integration of Sŏn and Kyo by Chinul(1158-1210)(한국 선불교의 철학적 기초−지눌의 선교통합)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1980년 모교인 서울대 철학과에 부임한 이후 25년간 후학을 지도하면서 연구 작업을 통해 한국의 철학계와 불교 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2. 서양철학 교육의 전통 속에 불교철학 세우기 심재룡 교수가 서울대에 부임할 당시만 해도 한국의 철학계는 식민지 시대 때부터 그래 왔듯이 서양철학을 주로 연구하고 가르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경우는 박종홍 교수가 1958년에 〈한국사상 연구에 관한 서론적인 구상〉이라는 논문으로 한국사상 연구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 한국철학사 강의를 처음 개설하였고, 그 뒤를 이어 대만에서 수학한 이남영 교수가 유가철학을 중심으로 동양철학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교철학은 새로운 분야였고 그 방법론이나 지향점에 대한 인식도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귀국하여 서울대학교에 부임한 후 첫 과제는 불교철학 교과를 정립시키는 것이었다. 철학과 내에서 불교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불교학적 지식이나 교리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종립대학이 아닌 일반 대학에서 불교학이 아닌 일반 교양과목으로서 불교철학에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할까에 대해 늘 고민했다. 선생은 한문 불교뿐만 아니라 미국 유학 시절 익힌 산스크리트어로 인도불교에 걸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모였지만 어려움도 많았을 것이다. 한 명의 교수 인력으로 광범위한 불교의 여러 다양한 영역을 망라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필자가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81년 봄, 대학 4학년 때로 선생께서 서울대에 부임한 지 이태 되는 해였다. 대학에서 자연과학을 전공하던 필자가 어느 날 갑자기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불교를 철학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때였다. 이후 지금까지 여러 동학들과 함께 공부를 계속하고 있지만 심재룡 교수라는 기둥이 있었기에 같이 모일 수 있었고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선생께서는 이전에 자신이 다른 스승들에게 받았던 격려와 사랑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독어 선생님이었던 이상철 교수가 학생들을 집으로 불러서 사모님이 차려주신 따뜻한 밥상에 둘러앉아 나눈 대화들이 철학과로 진학하게 한 동기가 되었다고 했다. 학풍이나 학문의 전통은 단지 학문적인 계승뿐만 아니라, 오랜 세월을 통해 쌓여온 사제 간의 신뢰와 존경이 기반이 되어 이루어지는 것 같다. 3. 동양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 : 방법론적 고민을 시작하다 철학과 내에서 불교철학은 단순히 불교를 옹호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었다. 철학적 지평과 역사 속에서 공유되고 전승되어온 철학 내의 여러 분야들, 예를 들어 인식론, 존재론, 윤리학 등의 개별 주제와의 소통을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했다. 더구나 서양철학 중에서도 대륙철학적 훈련이 되어 있느냐, 영미분석철학 전통의 시각을 가졌느냐에 따라 철학의 본령과 방법론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 선생이 한국에 돌아와서 첫 작업으로 ‘동양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화두를 제기하게 된 것도 그런 문제의식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는 동양철학이라는 학문의 토대와 방법론을 문제로 삼는, 즉 동양철학 또는 한국철학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고 어떤 외연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누구도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제기하였다. 더구나 당시 한국의 동양철학 연구 풍토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 입장을 취했기에 큰 용기를 요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물음은 큰 반향을 일으켜 여러 다른 학자들의 호응이 뒤따랐다. 이들 여러 저자의 글을 묶어 출판한 책이 《한국에서 철학하는 자세들: 철학 연구 방법론의 한국적 모색》(집문당, 1986)이다. 이 책의 서문 격인 〈묶은 이가 읽는 이에게 드리는 글〉에서 선생은 이 책을 출간하게 된 문제의식과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철학은 당연히 해방 및 대한민국의 수립과 더불어 정식으로 문제가 되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태는 해방 직후의 이데올로기 싸움과 연이은 전쟁의 참화로 세 끼니가 간데없는 정황에서 한갓지게 철학을 논의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전쟁의 참화가 가시고 찢어진 책들을 다시 헤집어 볼 여유가 조금 생겼을 1950년대 말에야 겨우 한국사상연구회가 발족되고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현대사회에 접목시켜 보려는 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중략) 뭐니 뭐니 해도 60년대에서 70년대에 이르는 한국은 절대빈곤을 타파하려는 눈물겨운 노력과 병행하여 그 문화적 정체성 내지 주체성을 찾으려는 열띤 분위기가 그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은 바로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전반적인 문화계의 풍토를 반영하는 철학의 연구방법론을 둘러싼 쟁점을 일반 독자와 뜻있는 대학생들에게 알리고 그 토론 속에 동참하시도록 모아 놓은 것입니다. (중략) 이 책을 연구의 자료나 역사적 유물로 선반에 얹어 놓지 마시고, 늘 대화의 상대로, 토론의 적으로 여기고 이용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이 책의 백미는 선생이 1985년에 발표한 〈동양철학을 하는 태도〉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그는 동양철학을 하는 두 가지 유형을 ‘선교사’형과 ‘훈장’형이라는 아주 시니컬한 용어로 부르면서 당시 동양철학계의 관행과 학문하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선교사형이란 서구문화의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그 문화에 중독, 잠식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동양철학을 하는 학자치고 이렇게 편벽된 태도를 보이는 사람은 드물다. 선생의 동양철학 방법론에 대한 반성은 오히려 “동양문화의 독존을 주장하는 경우−훈장형”을 겨냥한 것이다. 문화는 생성변화한다는 사실과 새로운 문화는 늘 생겨나며 또 동양문화에도 어느 문화와 마찬가지로 그 한계가 있음을 망각한 훈장형, 그러나 오늘에도 이런 훈장형의 유아독존적 학자는 없는가? (중략) 경로사상으로 노인문제를 해결(?)한다는 어느 유학 전공 교수의 발언이나, 평화 문제는 불교의 개인 수양으로 만사형통하리라는 어느 스님의 설법이나 충, 효, 예를 국민윤리 덕목에 집어넣고 애국애족을 식은 죽 먹듯 쉽게 생각하는 우국지사형 국민윤리 학자나 모두 문화의 역동적 변화를 무시한 언행이 아닌가? 선교사형과 훈장형은 구분되는 것 같지만 인식의 구조 측면에서는 동일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는 “진정한 문화 사이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은 바로 ‘동양철학’을 낭만적인 것으로 이상화하거나, 다른 것들과 바꿀 수 없는 어떤 특수한 ‘것’으로 대상화하려는 ‘서양’의 독특한 지배양식이다. 이때 서양은 반드시 서양 사람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묘하게도 동양철학자, 동양학자임을 자임하는 동양의 학자, 관료 역시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동양’을 해부하여 다시 구성하는 권리를 행사하려 드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했다. 참으로 날카로운 분석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이 문제를 접근하는 선생의 방법은 분석철학적이고 현정보다 파사의 방법이었다. 동양철학은 한 가지라거나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데 참된 방법은 이것이라고 하는 태도 자체가 비철학적이며 비학문적인 태도이다. “실상 무엇이든 ‘사실’ 또는 ‘객관적 대상’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그것을 ‘사실’로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을 떠나 그 ‘사실’의 의미는 알아차릴 수가 없게 된다. (중략) 이 세상 어디엔가 객체로서의 독특한 ‘동양적 사유 방식’이 있다는 편견을 깨뜨리는 것이 동양철학을 학문으로서 해방시키는 길이다.”라고 했다. 즉 동양철학의 학문적 공부의 길은 독특한 방법론의 개발에 있기보다는 우리가 지닌 뿌리 깊은 태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이라는 하나의 덩어리가 있다거나, 동양만의 독특한 세계와 방법론이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동양의 고전적 철학 전통을 과거의 유물로 만드는 길이며 동양철학의 학문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무시하는 일이다. 이것을 현재에 살아 있는 것으로 흡수하여 학문적 대열에 놓기 위해서는 동양이라는 별명을 버리고 철학으로서 당당히 대접을 받을 길을 모색하자고 했다. “‘동양’을 없앤 ‘철학’ 자체로”라는 주장이었다. 선생은 우리가 《중론》을 읽는 것은 역사적 의미의 천착이나 그 본래의 뜻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하자는 것이 아니고, 용수가 《중론》을 썼을 때 가졌던 관심에 동참하자는 것이며, 그를 인간의 사유와 언어의 구조를 설명하고 분석하고 비판하는 사색가로서 우리와 함께 철학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동양철학적 문헌과 고전을 자료로 철학하는 사람들은 두루뭉수리로 ‘동양철학은 이렇다’는 식의 총론적 발언을 삼가야 한다고 커다란 목소리로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가 지닌 역사적, 개념적, 문헌적 영역을 극소화하면서 되도록 어떤 구체적 문제를 세밀하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4. 회통불교론에 문제를 제기하다 선생은 사물을 일반화하여(generalization) 규정하는 것을 경계하고 항상 첨예한 비판의식을 유지할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비판적 태도란 마치 그의 학문을 관통하는 일종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선생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했고, 학계의 관행이나 기존 학설에 대해 맹종하는 태도를 보이면 어떨 때는 거칠다 싶을 정도의 언어를 써서 날카롭게 지적했다. 일종의 결벽증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선생의 이 같은 비판적 학문 태도의 정점이 1985년에 제기된 회통불교 비판론이다. 이 논의는 당시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필자를 비롯한 많은 젊은 학자들에게 불교연구방법론과 한국불교 성격규정에 커다란 각성을 가져왔다. 당시 회통불교란 한국불교사에서 나타나는 여러 종교적, 교리적 체계를 규정하고 그 지향점을 밝히는 당위적 명제로서, 또는 불교사를 통시적으로 접근하여 한국불교의 두드러진 성격으로 정의하고 규정하는 해석적 개념으로서 불교계에서 널리 쓰여 오던 개념이었다. 그는 강의와 학술 발표를 통해 회통이라는 개념으로 한국불교의 성격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오직 20세기 초의 일이고, 당시의 식민지 상황에 따른 민족주의적 요구로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학문적 성격 규정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그 한 가지 개념으로 1,600년이 넘는 한국불교의 오랜 전통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양하는 것은 대단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주장했다. 회통불교로 한국불교를 하나로 뭉뚱그리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이데올로기라는 이 비판은 한국 불교학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선생은 1985년 논문 〈한국불교는 회통적인가〉를 통하여 다음 세 가지 점을 지적했다. 첫째, ‘회통불교’라는 담론의 기원은 최남선(1890~1957)이 1930년 《불교》 74호에 발표한 〈조선불교: 동방 문화사상에 있는 그 지위〉에서 한국불교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특히 원효의 불교 교학을 통불교라고 지칭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둘째로 ‘회통불교론’이 당시 한국 현대 불교교학의 지향점을 규정하고 동시에 과거 한국의 불교사를 해석하는 지배적 담론으로 사용되어 왔다. 셋째, 불교계의 내적 발전과 논의의 차원에서 과연 한국불교가 회통불교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었다. 더 나아가 한국불교는 역사적으로 과연 회통불교였는가 하는 질문도 제기하고 이 모두에 대해 부정적 진단을 내렸다. 특히 선생은 회통불교라는 말의 기원이 된 최남선의 ‘통불교’라는 개념은 당시 한국의 불교계가 일제의 식민 지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점차 상실해 가고, 나아가 한국의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자부심마저도 함몰해가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며, 한국 문화의 오랜 역사와 뛰어난 문화적 성취를 증명하고 다시 드러내기 위해 제시된 개념임을 확인했다. 다시 말해서, 최남선이 한국불교 전통을 ‘통불교’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는 그 시대적 상황적 이유, 즉 민족적 자존감을 부양하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수식적이고 웅변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지, 이것을 확대 해석해서 학문적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한국불교의 성격을 정의하는 학술적 개념으로 써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일본 강점기의 민족주의적 감성에서 나온 용어가 그 역사적 맥락은 무시된 채 일제가 끝난 현재에도 불교계 내에서 학문적 용어로 채택됨으로써 한국 불교학계에 민족주의적 정서가 강화되고 부가되었음도 지적했다. 선생의 이와 같은 이론은 그 후 로버트 버스웰, 존 조르겐센, 그리고 필자를 포함한 많은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5. 한국 선불교 전통의 정체성을 밝히다 또한 수행법의 측면에서는 중국의 대혜종고의 간화선법을 수행의 근간으로 받아들여 정혜쌍수, 돈오점수로 요약되는 지눌의 선불교의 이론적 체계가 정립되었음을 광범위한 자료 분석과 명쾌한 논증을 들어 밝혔다. 즉 지눌은 깨달음의 본질을 이론적으로 파악한 후 실천적 수행에 들어가 정진하여야 한다는 돈오점수의 방법론을 정립하였고 이것이 그 후 한국 선불교의 수행관으로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 선 전통에 대한 이론화 작업은 이후 조계종 종정이었던 성철 스님에 의해 지눌의 선사상이 비판됨으로써 큰 전기를 맞게 된다. 성철 스님은 조계종의 이념적 기원이 보조 스님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태고보우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였고, 또한 한국불교의 전통 수행 방법론도 돈오점수가 아닌 돈오돈수라고 선언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불교계는 새로운 학문적 논변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소위 ‘돈오점수 대 돈오돈수’ 또는 ‘돈점논쟁’이라는 것으로, 결국에는 한국불교의 정통, 이단 논쟁으로까지 비화하여 한국불교는 격렬한 논쟁의 와중에 휩싸였다. 이후 20년간 한국 선불교계는 이 논쟁을 둘러싸고 문중 간의 반목이 심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학문적 입장에서는 전통과 과거 속에 묻혀 있던 한국 선불교가 이 논쟁을 통해 20세기에 되살아나 활기를 띠게 된 계기가 되었고, 불교의 이념이 현재에 살아 있는 관심으로서 대중에게 재등장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조계종단의 종조를 둘러싼 여러 논쟁이 있지만−즉 역사적 종조는 구산선문의 가지산문의 도의 선사요, 제도적 통합을 이룬 종조는 고려 말의 태고보우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한국 조계종의 사상적 기초를 수립한 중흥조가 지눌이란 사실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생의 관점이 그 이후 논쟁의 방향을 정립하는 데 큰 기둥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선생의 평생에 걸친 지눌과 한국 선 전통에 관한 연구는 《지눌 연구−보조선과 한국불교》라는 이름으로 2004년 여름 서울대 출판부에서 발간되어, 선생의 유작이 되어버렸다. 이 저작은 제23회 열암학술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으며, 수상 소식은 선생을 아끼고 그 학덕을 흠모하는 많은 사람에게 더없는 기쁨을 준 동시에 그분의 빈자리를 더욱 애통하게 하였다. 선생은 서문에서 “이 책은 지난 연구의 결과이자 앞으로 남은 연구를 위한 중간보고서”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중간보고서가 최종보고서가 되고 말았다. 한 불교 조계종의 철학적·제도적 기초를 마련한 고려시대의 보조국사 목우자 지눌 스님(1158~1210)을 새로이 조명하는 학술 전문 연구서이다. 이 책에서는 지눌 스님을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첫째, 그는 ‘목우자’라는 자호(自號)가 가리키듯이 평생 스스로 불성을 계발하고 수행인을 키우는 데 진력한 종교적 성인(聖人)이다. 그가 조계종의 종조 내지 중흥조로 지칭되는 이유를 밝힌다. 그의 인간적 면모를 아울러 기술하여 한국불교 성인의 모델의 그려 본다. 둘째, 그는 단지 수행승−성인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 선수행의 기초를 단단히 마련한 철학자이다. 참선 수행과 《화엄경》의 묘리를 조화시켜 한국 화엄선맥의 기틀을 잡은 분이다. 더구나 이언절려(離言絶慮)−말과 생각의 세계를 뛰어넘는다는 화두참구의 길까지 그 수행법의 이치를 궁구해 놓았다. 셋째, 그는 한국만의 불승임에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분이다. 이 연구서의 특징은 바로 지눌을 한국 조계종에서 그 위치를 넓혀 동아시아 불교계에서 그의 위상을 바로 밝혀보는 데 있다. 동아시아, 특히 중국형 대승 불교 그 중에도 선종의 뿌리와 원형을 찾는 사람들은 한국이 낳은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생애와 사상에 접하지 않고서는 중국 불교, 한국 불교, 일본 불교, 특히 요즘 서양인의 인기를 사로잡은 젠(Zen) 불교의 실상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서문에서 선생은 자신의 작업 의미에 대해서 자평하기를 “한국불교의 형성에 관하여 적어도 한 가지는 언급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한국불교 전통은 고려시대에 형성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그 틀을 바꾸지 않고 내려왔다는 것이며, 그 고려불교를 형성한 인물 가운데 보조지눌의 위치가 독보적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결론은 그 저술에 함장된 학문적 성과를 상고할 때 너무나 겸손한 요약이 아닐 수 없다. 이 작업이 한 세대의 분분한 이론들에 하나의 준거가 되어 한국불교 학계가 대체적으로 따르고 있는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 6. 여운으로 남는 이야기 학자로서 비판적 정신을 견지하는 것은 모든 일상 속의 타협적인 태도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혐오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예를 들어 “내 새끼 냠냠”이라고 표현하면서 끼리끼리 편을 가르거나 자기 학생만을 편애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학문적으로 타협하고 ‘두루뭉수리로’ 넘어가는 것을 싫어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던 그분의 다정한 면모가 있었다. 필자가 철학과 대학원을 처음 들어왔을 때 서양철학을 비롯하여 유학, 불교 모두 공부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학과 공부는 힘들었지만, 여러 선배 동료들과 함께 대학원 연구실에서 보낸 시간은 즐거웠다. 그러던 중에 우리는 알게 되었다. 선생님들도 우리만큼 그런 우정을 그리워하신다는 것을. 우리 불교 전공자들은 토요 스터디그룹을 만들었다. 토요일 오후 늦게까지 연구서를 읽고 경전을 강독하는 그룹이었다. 선생님께서는 곧 그 모임의 정식 멤버가 되었다. 당시 우리 멤버들로는 정영근 선배를 필두로 하여, 석사 과정의 박해당, 아직 학부에 있던 당시 정원 스님과 서정형 선생 등이 있었다. 그러다 어쩌다 우연히 세미나를 끝내고 신림동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때 신림극장인가에서 시시한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고 우리는 모두, 영화 보러 가자, 하고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그날 그 삼류 영화관에서 우리는 한 줄로 죽 앉아서 키득거리며 영화를 같이 보았다. 이후 토요일 세미나마다 애프터를 하는 것이 우리의 관례로 되었다. 우리는 공부와 오락을 겸하는 토요일 모임에 점점 재미를 들이게 되었고, 결국 야심적으로 며칠간 지방에 놀러 갈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첫 번째 여행은 필자가 준비를 맡아 멀리 영암, 강진, 해남을 다녀오기로 했다. 지금은 유홍준 씨 책 덕분에 많은 사람에게 남도 일대가 알려졌지만, 그때 그곳은 정말 우리만 아는 숨어 있는 보물 같은 곳이었다. 자가용이라는 것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고속버스, 직행버스, 완행버스 등을 갈아타면서 저 남쪽 끝까지 갔다. 정영근 선생이 제일 선두에 서고 나는 부지런히 차부에서 시간표를 알아보고 차표를 끊고, 오징어와 간식거리를 대합실에서 사오고, 이리저리 아는 스님들의 전화를 돌려서 하루 묵을 곳을 알아보곤 했다.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그때의 여행이 평생의 어떤 여행보다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영암의 일출봉 꼭대기 위에 올라 사방에 넓게 펼쳐져 있는 갈대숲 속에서 얼굴을 비켜 스쳐가는 바람을 들이마시기도 하고, 달밤에 택시로 영암 시내를 일주하면서 달빛 속에 선연히 드러나는 월출산과 그 섬세한 봉우리들의 신비한 자태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강진의 다산 초당에 올라서서 저 발아래 짙은 회색으로 펼쳐진 부동의 바다, 움직임 없는 적정 속에 깊이 들어가 보기도 했다. 다산 초당 앞의 인적 없는 시골 버스정거장에서 다음 버스를 기다리며 가게 앞에 놓인 긴 나무 의자에 나란히 앉아 길목에 붉게 핀 한 그루 동백을 쳐다보던 기억도 난다. 우리는 문경도 가고, 설악산도 가며 점점 함께 추억을 쌓아갔다. 내가 지금도 정영근 선배나 김재성(당시 정원 스님) 동학에 대해 특별한 정을 느끼는 것은 아마 그때 다닌 여행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시절을 통해 가장 많이 정을 쌓게 된 것은 역시 심재룡 선생님이었다. 여행을 다니며 학교에서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았고 더욱 가깝게 느끼게 되었다. 몇 년 후 내가 미국 유학 중 한국에 들렀을 때, 선생님께서는 농담처럼 “요즘은 재미가 없어, 학생들이 나랑 같이 안 놀아줘, 내가 늙어서 재미가 없나 봐.” 하셨다. 아마 그때 학생들은 영화 파트너로서, 여행 파트너로서 선생님의 가치를 채 몰랐던 모양이다. 선생님은 여행의 동반자로 최상의 분이었다. 여행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 음식, 숙소 등에 대해 전혀 까다로움이 없으시고, 불편함에 대한 참을성이 남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 우리가 인생에서 무수히 만나는 여느 많은 사람들과 선생님을 구별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같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고 애쓰는 그 배려의 마음인 것 같다. 혹시 준비가 잘못되어 버스를 놓쳐서 시골 터미널에서 하릴없이 몇 시간을 기다리게 되어도 선생님은 옛날이야기들을 들려주면서 우리가 심심치 않도록 무진 애를 썼고, 기발한 아이디어로 뜻하지 않는 행선지를 찾게 하여 우리에게 짜인 계획을 넘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해 가는 즐거움을 안겨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여행은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한 사랑과 너그러운 마음의 선물이었다. 선생께서는 학문적 작업 중 틈틈이 수필류의 글을 종종 써서 여러 매체를 통해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철학적 삶을 일깨우는 이야기,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역할,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고민 등 각종 다양한 주제였다. 글이 유려하고 힘이 있어 많은 사람이 흠모하고 명문이라 부러워했지만, 탈고할 때마다 “깔끔하게 좋은 글 한 편 쓰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표”라고 하면서 아쉬워했다. 그중 1981년 〈선에서 본 사람됨의 뜻〉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글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 무심한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다. 과거의 인연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 사람이다. 무심한 사람은 창조적인 사람이다. 자연에 그대로 맡김으로써 생생한 현재가 그대로 드러난다. 무심한 사람은 자비로운 사람이다. 남에게 나를 온전히 열어 둔다. 무심한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아무 생각이 없으므로 항상 마음이 맑고 흔들리지 않는다. 그분의 많은 글은 그동안 단행본으로 수차례 묶여 나왔다. 《끈기와 슬기의 사람들》(계몽사, 1980), 《동양의 지혜와 선(禪)》(세계사, 1990), 《부처님이 올 수 없는 땅》(세계사, 1990), 《삶이여 번뇌의 바다여》(철학과 현실사, 1994) 등이다. 이제 선생께서 다져 놓은 한국불교 정체성에 대한 보편적 이해의 틀에서 출발하여,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되는 한국불교의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은 우리 후학들의 몫일 것이다. 선생이 그려놓은 한국불교라는 거대한 지도 위에 한국불교의 다양한 성격을 산맥과 강으로 그려 넣음으로써 하나의 완결된 지도를 지향해 나가는 일이 그것이라 생각한다. ■
조은수 / 서울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박사과정 수료, 미국 버클리대학교 박사. 불교철학 전공. 미국 미시간대학교 아시아 언어문화학과 조교수,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소장 등 역임. 현재 한국불교학회 회장. 주요 논문으로 〈원효에 있어서 진리의 존재론적 지위〉 〈불교의 경전 주해 전통과 그 방법론적 특징〉 〈종교적 신앙심과 마술적 영험−삼국유사의 불교적 읽기〉 등과 저서로 Korean Buddhist Nuns and Laywomen: Hidden Histories, Enduring Vitality(SUNY Press, 2011), Jikji simgyeong(《직지심경》 2인 공동 영역) 등이 있다. | ||||||
첫댓글 감사합니다 지심귀명 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