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왕자가 칠불이 된 칠불암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부처가 된 아들들을 위해 지었다는 칠불암의 전설에 따르면, 김수로왕은 왕자를 아홉 명이나 두었다. 그중에 일곱 명이 어머니인 아유타국(인도)의 공주 허황옥과 함께 온 중 장유화상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수로왕과 허황옥은 아들들이 부처가 되었음을 기리려고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 그런데 이는 고구려 소수림왕 4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존의 학설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칠불암연못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 20리 지점에 칠불사가 있다. 칠불암
은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부처가 된 아들들을 위해 지었다는 전설이 있다.
원래 이름이 운수원(雲水院)인 칠불암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아자방(亞字房)일 것이다. 이 방의 원래 이름은 벽안당(碧眼堂)이며, 5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벽을 보고 참선을 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그런데 불을 때서 덥히는 구들이 아(亞) 자 모양이어서 아자방이라고 하였는데, 이 구들은 신라 효공왕 때 구들도사로 불리던 담공선사가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 구들은 불을 한번 지피면 한 달 반쯤이나 온기가 남아 있을 만큼 훌륭한 구들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아자방에 들어가 참선을 시작하는 스님은 세 가지 규칙을 엄격히 지켜야 했다 한다. 첫째로 정좌불와, 즉 눕지 말아야 하고, 둘째로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셋째로 한 끼만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자방에서는 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벙어리 아(啞)’ 자를 써서 아자방(啞字房)이라고 쓰기도 하였다. 엄격히 참선을 했기 때문인지 아자방에서 참선한 스님들 중에는 큰스님이 여럿 배출되었다. 서산, 부휴, 금담, 대운, 초의, 용성, 추월 등이 그들인데, 이 가운데 조선 말기의 추월스님은 계족(鷄足) 정진, 즉 닭처럼 발뒤꿈치를 든 채로 하는 참선 수행을 하여 도를 깨친 것으로 유명하다. 아자방은 한국전쟁 때 다른 건물들과 더불어 불에 타버린 뒤 버려졌다가 1980년대에 한 장인이 조심스레 복원했는데 옛날 같지는 않다.
▲아자방아자방은 5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벽을 보고 참선을 할 수 있는 건물이다.
엄격히 참선했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참선한 스님들 중에 큰스님이 여럿 배출되었다.
화개 아랫자락 악양면의 형제봉 밑에 평사리가 있다. 한국 문학사상 가장 방대한 소설인 『토지』의 주 무대가 되는 평사리의 행정구역상 이름은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다. 조선 말기에서 광복에 이르는 세월 속에 최 참판 댁의 4대에 걸친 가족사가 『토지』의 이름으로 쓰였다. 평사리에서 북간도, 진주, 서울 등을 오가며 펼쳐지는 『토지』에는 동학과 무속, 유가와 기독교적 윤리관이 자연스럽게 얼크러져 있다.칠불암은 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이 부처가 된 아들들을 위해 지었다고 한다. 칠불암 전설에 따르면 김수로왕의 아홉 왕자 중 일곱 명이 아유타국(인도)의 공주인 어머니와 함께 온 중 장유화상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수로왕과 허황옥은 아들들이 부처가 되었음을 기리고자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소수림왕 4년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기존의 학설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의문점으로 남아 있다
출처:(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2024-03-30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