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관심사는 소파에 길게 눕다시피 앉아있는 그녀의 친구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의 친구는 발바닥에서 피를 흘리고 있기까지 했다. 물론 그녀의 스웨터 어깨 쪽에도 핏물이 배어있기는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거기까지 닿지 못하니 결국 그녀의 걱정은 오직 그녀의 친구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됐다. 다 필요 없으니 이 깃털 달린 날개 비슷한 빌어먹을 것이나 좀 치워라. 간지럽고 무겁고 무엇보다 보고 싶지가 않아!"
과연, 주희는 위에 엎드려 있다시피 하는 날개 때문에 일어나지를 못하고 계속 불편한 자세로 있었던 것 같다. 지연은 그만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웃을 수 없었다. 주희의 오른손에 피묻은 유리조각이 들려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 유리에 묻은 피는 바로 지연의 피였지만 그것을 그녀가 알 리가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을 터였다.
지연은 얼굴을 살짝 찌푸린 채로 다가와 제일 먼저 주희의 손에 들려 있던 그 유리조각부터 처리했다. 절대 손에 닿지 않을 만한 곳으로 멀찍이 치워놓은 후에야 지연은 주희의 위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은 연둣빛의 날개를 치워냈다. 지연이 날개를 치우며 참고 있던 웃음을 살풋 흘리고 있었다고 굳이 말할 필요까지는 없겠지.
"아아, 저는 물건이 아닙니다. 좀 살살 다뤄주세요. 아, 날갯죽지가 욱신거리니까 좀 배려해 주시겠습니까?"
뭘 살살 다뤄? 지연과 주희는 도끼눈을 뜨고 날개를 노려보았다. 특히 지연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휘청거리는 몸을 끌고 간신히 일으킬 때는 몸에 힘을 쭉 빼고 있다가, 고생고생하며 소파에 편안히 기대 놓으니 그제야 빙긋 웃으며 살살 다뤄달라고?! 지연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가-친구녀석들이 군인 걸음이라고 놀리던 걸음이었다- 연둣빛의 아름다운 깃털들이 가득한 날개를 확! 잡아당겼다!
"아악-!!"
단박에 터져 나오는 비명. 겨우 쿠션하나를 맞고 나가 떨어졌을 만큼 예민한 부위에 또 다시 강한 통증이 왔으니 그 아픔이 오죽 하겠느냐마는, 지연은 동양적으로 생긴 선이 가는 얼굴에 생긋거리는 웃음을 띄우고 더욱 세게 잡아당겼다. 제대로 먹지 못해 하얗게 갈라져 버린 입술이 통쾌함을 담고 쿡쿡 대며 웃고 있었다.
주희는 지연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중에는 날개를 잡아 뽑을 듯 흔들기까지 하는 지연의 행동을 보고 너무하다 싶었는지 가서 말리기 시작했다. 주희가 지연의 뒤로 다가가 뒤에서 목을 확 끌어안자 지연은 날개 흔들기를 멈추었다. 멈추었다기보다는 숨이 막혀 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듯 하지만 말이다.
"너 누구 죽일 일 있어? 시체 치우려고 그래? 아주 그냥 날개를 뽑아라, 뽑아!"
"씹! 내가 자기 들 때는 가만히 힘도 안 주고 있다가 편하게 해주니까 그제야 이것저것 말하는 거 봐! 화 안 나게 생겼어? 죽으려면 죽으라고 그래! 이상한 거 나타났다고 경찰에 신고하면 알아서 수거해 가겠지! 야! 목 놔! 저거 날개 확 뽑아 버릴 거야!"
"참아! 채지연! 참으라고!"
"젠…… 장!!"
정말로 연둣빛의 날개를 뽑을 듯 달려드는 지연의 광기 어린 모습에서 라스엘은 공포를 느끼고 말았다. 끝에만 살짝 쌍꺼풀이 있는 동양적인 눈의 끝이 확 올라간 모습은 무척이나 무서웠다. 멍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는 눈이 아래로 내려가 있어 귀엽더니만, 반원형의 눈을 올려 뜨고 자신을 노려보자 그 얼마나 사나운 얼굴인지.
라스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그 체념한 얼굴에 지연이 더욱 화를 냈음은 말 할 것도 없다. 더불어 그녀를 달래느라 팔자에도 없는 생고생을 한 주희에게 묵념을 보내도록 하자…….
***
라스엘은 목으로 넘어가는 따뜻한 차의 부드러운 향에 감탄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하는 작은 소리가 온화한 공기로 퍼져나갔다. 라스엘은 빙긋거리는 웃음을 머금고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게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칼의 상관이 자신을 향해 어색한 웃음을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그, 웃기지도 않는 생명체를 데리러 가야한다는 것입니까? 그것도, 확실하지도 않은, 그저 가능성만 조금 있을 뿐인 생명체를 데리러 가야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레아엘은 어색하게 웃었다. 라스엘이 자신의 부하이며 보좌관의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역시 균형과 조화를 다스리는 제3천사장이다. 조화의 종족 엘프를 그 권속으로 두고 있는, 엘프들의 신인 것이다. 그녀는 조금은 식어버린 차를 홀짝, 목구멍으로 넘겼다.
"어쩔 수가 없는 걸. 다른 신들을 보내자니 안심이 안되어서 말야. 게다가 라스엘은 전부터 지고신께 무척이나 귀여움을 받았잖아. 그러니 지고신의 파장도 잘 알고 있을 거고……. 솔직히 다른 신들이 가봐야 그 파장이 지고신의 것인지 아닌지 구별이나 할 수 있겠어? 안 그래? 해서……."
"해서, 저 라스엘이 직. 접. 가서 빠져나간 신력을 뒤집어쓴 운 없는 생명체를 찾아내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입니까?"
라스엘이 쥐고 있던 찻잔에서 투명한 갈색의 액체가 풍랑과 어울리는 바다의 파도 마냥 춤을 추다 기어이 찻잔을 넘어 바깥세상으로의 모험을 시도했다. 하얀 탁자보에 갈색의 얼룩이 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아엘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도 자신이 담고 있던 액체를 모두 비우지 못한 채 탁자에 내려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잖아, 라스엘. 라스엘이 가지 않으면 대체 누구를 보낼 생각이지? 지고신의 신력을 뒤집어 쓴 것이 그 어떠한 생명체라 하더라도 무사히 데려올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지닌 존재가 '엘'들과 '넬'들 외에 또 누가 있지? 게다가 지금 '넬'들과는 연락이 되지를 않아. 그렇다고 나나 네이엘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불가능해. 라스엘… 가쉬엘은 당연히 제외야. 알지?"
"……알고는 있습니다만."
"알았으면 잘 부탁해, 라스. 라스라면 꼭 잘해줄 거라고 믿어."
레아엘의 입에서 라스라는 애칭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기억하는 것조차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 속에서나 들려오던 먼 옛날에 불리던 이름이었다.
라스엘은 입맛이 썼다. 레아엘에게는 오랜만에 들어보는 애칭이었지만 저 묘한 미소는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라스엘은 내려놓았던 찻잔을 다시 들었다. 이제 차는 미지근할 정도로 식어 있었다.
"후우……. 보좌관직 사표를 쓰던가 해야지, 원……."
꼴깍, 찻물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내려앉았다.
@@@
-두근! 두근! 두근!
심장박동의 울림에 맞춰 온몸의 신경이 비명을 질러댔다.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에 퍼져 있는 신경줄기를 타고 고통에 떨리는 몸을 거침없이 질주했다. 어깨부근에서 시작된 통증이 한순간 흐릿한 시야를 하얗게 태우며 가느다란 몸을 거칠게 흔들었다.
"지연아! 왜 그래? 야, 어디 아파?"
'주……희?'
하얗던 시야가 새까맣게 변하며 모든 것이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검고 어두운… 암흑!
라스엘은 순간적으로 당황해버렸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이곳에는 지고신 특유의 기분 좋은 파장이 가득했었다. 그런데… 그 파장이 한순간 흔들리더니 싸-하게 굳어버린 것이다. 소름끼칠 만큼 섬뜩하고 공격적으로 변한 파장에 욱신거리던 날갯죽지의 아픔도 더욱 심해졌다.
반사적으로 들어올려진 고개에 시야가 넓어졌다. 넓어진 시야로 길고 검은 머리채가 허공에 아름다운 수를 놓는 광경이 보였다. 단 한번도 어떠한 인위적인 손질-염색이나 파마 등등의 잡다한 손질들-도 가하지 않은 것처럼 깊고 검은 머리카락이 매끄러운 허공에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나풀댔다.
가느다랗고 조그마한 몸이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얼굴을 감싼 손이 하얗게 변했다. 허리를 구부려 둥글게 몸을 말은 채 남은 왼손으로 가슴을 움켜잡는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모든 것이 멀게 느껴진다. 순간 라스엘은 '관조자'의 시선으로 앞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라보나……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
"지연아! 왜 그래? 야, 어디 아파?"
"……희?"
"야, 야! 너 또 왜 그래! 정신 좀 차려! 이거 119를 불러야 하나? 하지만 병원에 가봐야 알지도 못할텐데! 빌어먹을 의사 새끼들 지랄하는 것도 듣기 싫고…… 아아, 어쩌지?"
단발머리의 소녀가 발을 동동 구른다. 긴 머리의 소녀는 쓰러져 가쁜 숨을 토해내지만……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몽롱한 머릿속은 사고(思考)하기를 거부했다. 마치,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날과도 같은 상황. 기억의 저 끄트머리에 묻혀 있던 한 조각을 찾아낸 라스엘은 희미하게 조소했다.
"하! 지고신의 힘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 같군요, 레아엘님……."
그는 누구도 들어주지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물먹은 솜 마냥 묵직해진 몸을 일으키는 일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그저 누워 쉬고만 싶었다. 등뒤에서 펄럭이는 날개조차 거추장스러웠다. 확, 떼어버리고 싶을 정도.
두근두근 박동 하는 소녀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눈을 하얗게 뜨고 입을 벌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한 소녀다. 지고신의 힘을 받은 자라 해도… 그녀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는 따뜻한 자신의 손을 소녀의 이마의 가져다 댔다.
-파아…….
아름다운 연둣빛이 지연의 몸을 감쌌다. 지연의 몸 속에서 날뛰던 지고신의 힘들이 조용히 다독이는 라스엘의 힘에 안정을 찾아갔다. 그 힘들이 안정을 찾으면서 자연히 고요해진 파장에 라스엘은 온몸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이 나른해졌다. 문득 바라본 소녀 역시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듯 했다.
"이봐요? 왜 쓰러지고 지랄이에요? 좀 일어나요!"
'이 아가씨는 이런 상황에서도 욕이 튀어나오는군…….'
괜히 웃음이 났다. 그는 자꾸 아래로 내려 감기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리며 품을 뒤적거렸다. 새하얀 '엘'의 정장 윗도리 안주머니에 '그것'이 들어 있었다. 그는 손끝에 만져지는 빳빳한 종이의 질감을 느끼자 확인조차 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주희에게 던졌다. 당황해 하며 그것을 받아든 주희의 얼굴이 짜증스럽게 찡그려지는 것을 본 그는 쿡, 하는 작은 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관조자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을 보는 것은 무척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라스엘이 잠에 빠져 들어버리자 막상 남아 당혹스러워 하는 이는 주희였다. 갑자기 열을 내며 쓰러져버린 지연이나, 그런 지연을 치료하더니 풀썩 쓰러져 잠을 자기 시작하는 저 연두색 생물체나 주희에게는 모두 골칫덩이들이었다.
<아루스의 세계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하?"
빳빳하고 고급스런 종이에 우아한 글씨가 아름답게 쓰여져 있었다. 정교한 음각의 무늬가 금박으로 씌워져 화려하면서도 품격을 잃지 않은 그런 초대장이었다. 주희는 잠시 그 한 줄의 문구를 노려보다가 미간을 찡그리고 뒤로 그 초대장을 던져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