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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背叛)의 여름
박 완 서
그때가 아마 내 나이 일곱 살 때였을 게다. 연년생의 누이동생이 다섯 살 나던 해 여름 마을 앞을 흐르는 강이랄 것도 없는 개천에 빠져 죽은 다음해 여름이었으니까.
지금은 신흥주택가가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돼지우리와 돼지우리 비슷하게 생긴 인가가 지독한 똥냄새를 풍기는 채소밭 사이에 띄엄띄엄 흩어져 있는 시골이면서, 인심과 주소만은 서울인 변두리에 우리는 살고 있었다.
마을 앞엔 개천이 있었는데 채소밭에서 나는 것과 같은 진한 똥냄새를 풍기며 어디서 어디로 흐르는지 모르게 질펀히 고여서 무수한 장구벌레를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비가 오면 흐름이 빨라지면서 어른 한 길도 넘게 물이 불어나는 수도 있었다.
누이동생은 장마가 개고 불볕이 나는 칠월의 어느 날 거기에 빠져 죽었다.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게 성가셔서 감쪽같이 따돌리고 나서 불과 한 시간도 안 돼서 그 일은 일어났던 것이다.
칠월의 불볕 밑에 마을의 온갖 쓰레기가 버려져 왕벌만한 쉬파리가 붕붕대는 개천가 둔덕 위에 죽은 누이는 내다버린 커다란 스펀지 인형처럼 누워 있었고, 사람의 목소리 같지도 않은 기성을 지르며 울부짖는 엄마의 얼굴에선 땀과 눈물과 머리카락이 뒤범벅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고, 삥 둘러선 마을 사람들은 복날 힘을 모아 개를 두들겨잡을 때처럼 무시무시하게 무표정했다.
나는 어디로든지 무작정 달아나야지 싶으면서도 한 발짝도 못 움직이고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내가 저 스펀지 인형처럼 생명 없는 것의 오빠란 사실이 무서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이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엄마가 깜짝 놀랄 만큼의 돈을 들여 나를 어린이 수영강습회나 하계 캠프 같은 데 참가시켜주며 수영을 배우기를 바랐지만 나는 막무가내 뺑소니를 쳤다. 물 밑에는 어느 물 밑에고 내 누이동생의 원혼이 있어 나를 잡아당겨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도 내가 수영을 배우게 하는 것을 단념한 것 같았다.
다음해 여름 아버지는 해질녘이면 내 손목을 잡고 언덕 너머에 새로 생긴 사립 국민학교로 산보를 가는 일이 잦았다. 언덕 너머는 우리 동네보다 한 발 앞서 아름다운 주택가가 형성되고 사립 국민학교까지 들어서고 그 사립 국민학교 수위하고 아버지는 친구였다.
학교 교정에는 별별 놀이틀이 다 있어 나는 세상 만난 듯이 놀이틀에서 장난을 치고 아버지는 수위실에서 잡담을 했다.
그 학교엔 놀이틀 말고도 풀이 있었다. 여름방학에도 풀장만은 개방을 하는 모양으로 늘 물이 충충하게 고여 있었다. 해질 무렵의 풀 속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짙푸른 색을 하고 있었고, 귀신의 감은 머리가 휘감겨오는 것처럼 음습하고도 냉랭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풀가에는 가지를 않았다. 그 헤아릴 수없이 충충한 깊이에서 나를 끌어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유난히 무더운 어느 날이었다. 거의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수위실에서 잡담을 하던 아버지가 미끄럼틀까지 나를 데리러 왔다. 심한 장난을 한 뒤라 온몸이 땀으로 끈적끈적했다.
아버지는 등에 찰싹 달라붙은 내 티셔츠를 들추고 통풍을 시켜주며, 짜아식 집에 가서 목욕하고 자야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 손목을 잡고 풀장이 있는 데로 갔다. 아버지와 같이라면 풀도 조금쯤은 덜 무서웠다. 아버지는 건장한 몸집과 솥뚜껑 같은 손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가 풀가로 걷고 나는 안측으로 걸으면서도 겁이 나서 아버지에게 꼭 매달렸다.
별안간 내 몸이 공중으로 붕 떴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아버지에게 엉겨붙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가볍게 털어냈다. 나는 물 속으로 조약돌처럼 풍덩 빠지며 낄낄낄 하는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얼마 동안을 물 속에서 죽을 기를 쓰고 허우적뎄는지 모른다. 가까스로 풀장가의 손잡이를 붙잡고 보니, 어처구니없게도 목 위가 물 밖에 나왔는데도 발이 땅에 닿는 게 아닌가.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허리를 비틀고 낄낄대고 있었다. 마치 웃음이 사레가 들린 것처럼 격렬하고 괴롭게 아버지는 낄낄댔다.
순간 나는 아버지가 나를 물에 빠뜨려 죽이려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나보다 죽은 누이동생을 더 사랑했고, 그래서 내가 살아남은 게 미워서 나도 누이동생처럼 물에 빠져 죽기를 바랄 수도 있다고 나는 내 추측에다 제법 논리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것은 지독한 배신감이었다. 아버지뿐 아니라 풀도 나를 배신했다. 늘 헤아릴 길 없이 충충한 깊이로 나를 겁주던 풀이 내 한 길도 안 되는 깊이일 줄이야.
배신당한 충격과 분노가 도리어 나에게 수영을 배울 용기가 되었다. 그해 여름 처음 나는 자진해서 동네 교회당에서 가는 하계 캠프에 참가해서 수영을 익혔다. 처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물에 대한 공포감에 도전하다가 어느 틈에 물개처럼 자연스럽게 물과 친해졌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와 앙심도 저절로 풀렸다.
국민학교 이학년 때 우리 집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우리 동네도 언덕 너머 동네처럼 새로운 주택지로 개발이 된다고 땅값이 오른 것이다. 아버지는 옳다구나 남보다 첫밗에 돼지우리보다 조금 더 큰 집과 채마밭을 팔더니 서울 시내의 벽에 타일이 붙은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변소와 부엌에까지 타일이 붙은 집은 너무 으리으리해서 꼭 꿈만 같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취직을 했다. 아아 아버지는 얼마나 훌륭하고 늠름해진 것일까. 내가 아는 어떤 애의 아버지도 나의 아버지처럼 훌륭하지 않았다. 자기 아버지가 사장이라고 대령이라고 교수라고 으스대는 애 아버지도 봐봤지만 나의 아버지에 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에겐 어떤 딴 아버지하고도 안 닮은 훌륭함이 있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 아닌 딴 아버지를 볼 때 하나같이 한마디로 쪼오다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렇게 세상의 아버지란 아버지는 허약하고 비굴하고 비실비실해 뵈는 쪼오다일까.
나의 아버지만 아니었다면 나는 아예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는 일을 면할 수 있는 방법에 공부 대신 몰두했을 것이다. 나에겐 나의 아버지가 있었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훌륭함을 사랑했고 자랑스러워했고 거기 황홀했다.
채마밭을 가꾸며 과수원으로 품팔이를 다니던 아버지는 단단하고 장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든든한 목과 정직한 눈과 완강한 턱과 넓은 가슴과 대들보 같은 허리와 길고 날렵하고 건강한 다리는 아무하고도 안 닮은 아버지만의 것이었다. 제아무리 보디빌딩으로 단련된 훌륭한 육체도 아버지의 것과 견주면 생귤과 플라스틱 귤을 견주는 것만큼이나 뚜렷한 차이가 났다.
게다가 아버지는 아무하고도 안 닮은 아버지만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취직하고 나서 하루도 안 빼고 입는 옷으로 아버지의 늠름함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재단된 아버지같이 잘난 사람에게만 허락된 특별한 옷이었다.
그 옷은 여름이나 겨울이나 까마귀처럼 윤택하게 새까맣고 찬란한 금빛 단추가 필요 이상으로 여러 개 달렸고 소맷부리와 모자에 굵은 금줄을 두른 비상식적이리만큼 화려한 옷이었다. 그런 옷에 의해 압도되지 않고 돋보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버지밖에 없을 것 같았다.
세상에 검은빛과 황금빛의 대비처럼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대비가 또 있을까. 그 옷엔 넥타이 따위는 필요 없었다. 넥타이란 넥타이 빼면 남성으로서 헛것인 쪼오다들이나 맬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그 옷만 보면 저절로 났다.
그 옷을 입은 아버지는 나에게 힘과 권위의 상징처럼 보였다. 그때 내 밑에는 사내동생이 둘이 있어서 우리는 아들만 삼형제였다. 아침에 아버지가 그 옷을 입고 막내동생의 몸통만한 새까만 구두를 신고 출근을 할 때면 우리 삼형제는 일렬로 정렬을 했다. 그리고 내가 늠름하고 훌륭한 우리 아버지에 대한 벅찬 경의와 감동으로써 ‘차렷’ ‘경롓’ 을 호령하면 동생들은 엄숙하고도 진지한 내 동작을 그대로 흉내내 두 발을 모으고, 꼿꼿이 서서 오른손을 눈썹 위로 올려붙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걸음나비가 넓은 특이한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걸어나갔다. 그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고집스러운 턱의 선이 약간 부드러워지는 정도의 미소에 나는 얼마나 매혹됐던가.
나의 아버지는 자식들이나 아내의 낯간지러운 “빠이빠이” “일찍 들어오셔야 돼요” 따위 소리를 들으며 출근하는 쪼오다 아버지가 아니었다. 나의 아버지는 백만 대군을 사열하는 장군처럼 장엄하게 출근해야 했다.
동생들은 어른들이 커서 뭐 될래 하고 물으면 하나같이 아버지가 될래라고 대답했다. 대통령이나 장군이나 사장이나 그런 게 되겠다는 대답을 기다렸던 어른은 실망을 했고, 그 실망을 이상한 잡소리로 위로하려 들었다. “오메, 요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쪼오그만 녀석 하는 소리 좀 봐. 뭔 노릇 해서 밥벌이할 것인가가 급하잖구 아새끼 만드는 게 더 급한 줄 아나베.”
동생들이 되겠다는 아버지가, 결코 남자가 여자 만나서 애 낳게 하면 되는 생리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아버지같이 뛰어나게 훌륭한 인격이라는 걸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도 여름이었다. 방학한 지 며칠 안 되는 어느 날 아버지는 느닷없이 나를 데리고 출근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 금빛 찬란한 옷을 입고 수행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남자다운 훌륭한 일의 현장에 있을 수 있다는 흥분으로 몸도 마음도 마구 뛰었다.
뜻밖에도 엄마가 그건 안 된다고 내 몸을 꽉 붙들었다. 아버지는 왜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야 하면서 나를 빼앗았다. 워낙 힘의 대결에 있어서 엄마는 아버지의 적수가 못 되었는데다 아버지에게로 가겠다는 내 힘까지 작용하고 보니 엄마는 검부락지처럼 무력하게 나를 아버지에게 빼앗겼다.
엄마는 나를 빼앗기고 나서도 몇 빈 더 안 된다고 부르짖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나는 아버지에게 손목을 잡힌 채 껑충껑충 신바람이 나서 뛰고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버스를 탔다. 버스가 달릴수록 우리 동네보다 길도 넓어지고 집도 커지고 차와 사람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우리 동네가 서울 시내인 줄 알았는데 아버지는 넋을 잃고 창밖을 내다보는 나한테 “정신이 없지? 여기가 시내란다” 하고 말을 걸었다. 내가 대답을 안 하자 “짜아식 촌놈이라 별수 없구나. 질려서 얼이 쑥 빠져버렸잖아” 하기도 했다.
무지무지하게 높은 집만 있는 동네에서 버스를 내렸다. 사람이 너무 많아 여기서 아버지를 잃으면 생전 못 찾을 것 같아서 나는 아버지의 손을 더욱 꼭 붙들었다. 문득 아버지를 따라나온 게 후회스러워졌다. 몇 년 전 나를 뿌리쳐 풀 속에 팽개쳤듯이 이 엄청난 인파 속에 아버지가 나를 팽개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물 속에선 헤엄이라는 거라도 칠 수 있지만 인파에 빠진 촌놈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아버지는 나를 뿌리치지 않았을뿐더러 더욱 꼭 붙들어주었다.
칠층인가 팔층인가 되는 회색 빛깔의 집 앞에서 아버지는 멎었다.
“여기가 아빠 직장이란다.”
큰 집이었지만 그 근처엔 십층도 넘는 집이 수두룩해서 나는 가법게 실망했다.
아버지와 내가 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나는 아버지를 위해 문을 열어준 시중꾼을 찾아내려고 두리번거렸으나 아무도 찾지를 못했다.
저절로 열리는 문을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있는 방으로 아버지가 들어섰다. 그 방은 드나드는 사람을 빤히 살펴볼 수 있는 유리창이 달려 있고 딱딱한 비닐의자가 서너 개, 회색빛 호마이카 테이블과 전화가 있을 뿐인 좁고 살벌한 방이었다.
게 좀 앉았거라, 하면서 아버지는 모자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았다. 나는 처음으로 이 여름에 아버지는 저 검은 양복으로 얼마나 더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동문 밖에 새까만 차가 멎더니 대머리가 까진 키가 작고 넥타이를 맨 쪼오다 티가 더럭더럭 나는 남자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질겁을 해서 뛰어나갔다. 그러더니 꼿꼿이 서서 우리 삼형제가 메일 아침 아버지한테 하는 것 같은 ‘경롓’을 그 쪼오다한테 엄숙하게 올려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그 쪼오다가 아버지를 거들떠봤는지 안 봤는지 그것을 살필 겨를도 없었다. 승용차는 연달아 자동문 밖에 와서 멎고, 아버지와는 너무도 딴판인, 억수같이 퍼붓는 소나기 속을 물 한 방울 안 맞고 십 리도 가게 생긴 새앙쥐 같은사내들이 그 속에서 내렸고 그때마다 아버지는 경의를 과장한 ‘경롓’을 올려붙였다.
넥타이 맨 새앙쥐 같은 사내들은 하나같이 아버지의 존재를 무시하고 점잖게 걸어들어 갔지만 실은 아버지의 존재를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알 수가 있었다.
아버지의 당당한 거구와 비상식적인 화려한 옷은 실은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넥타이 맨 새앙쥐들의 우월감과 권위 의식을 충족시키기 위한 어릿광대의 의상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아버지의 방 유리창에 ‘수위실’ 이라고 써 있는 걸 읽을 수가 있었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왜 나에게 자기의 어릿 광대질을 보여주려고 했을까. 높은 분의 아침마중을 끝낸 아버지가 수위실로 들어왔다. 그리고 별안간 낄낄댔다. 웃음이 사레가 들려 더 지독한 웃음이 되어, 아버지의 웃음은 좀체 멎지를 못했다. 그것은 질자배기 깨지는 소리였으며, 동시에 나의 우상이 깨지는 소리였다.
나는 수위실을 뛰어나왔다. 내 앞을 가로막는 문이 다시 스르르 열렸다. 나는 어느 틈에 건물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붙들지 않았다. 아니 또 한번 팽개쳤던 것이다. 나는 도시의 인파 속에서 몇 년 전 풀 속에서 허위적대듯 허위적댔다. 그리고 풀 속에서 듣던 것과 똑같은 아버지의 웃음소리를 들었고, 풀 속에서처럼 고독했고 풀 속에서처럼 이를 갈며 아버지에게 앙심을 먹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도 많이 늙었다. 나는 그 나이가 되도록 그런 어릿광대스러운 양복을 입고 수위 노릇을 해야 하는 아버지에게 연민을 느낄지언정 앙심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우상처럼 섬기는 대신 사랑했고, 대신 새로운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새로운 우상은 전구라 선생이었다. 내 방에는 전구라 선생의 다섯 권 전질의 전구라 사상전집이 있었고, 일곱 권 전질의 전구라 수필집이 있었고, 여섯 권 전질의 전구라 문학전집이 있었고, 열 번도 넘어 읽어 종이가 풀솜처럼 부드러워진 『청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는 전구라 선생의 청소년을 위한 문집이 있었고 액자 속엔 전구라 선생의 사진이 있었다.
전구라 선생이야말로 내 흠모와 동경을 아무리 바쳐도 아깝지 않은 인격이었다. 그는 뛰어난 사상가요 문필가였을 뿐 아니라, 명교수였고, 정치에도 깊은 관심이 있어 높은 관직을 여러 번 거쳤고, 현재도 모 고위층의 막후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간혹 그런 걸 갖고 그분의 인격의 옥의 티로 삼으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것으로 더 그분을 존경했다. 이론과 행동을 한 몸에 갖춘다는 것,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론과 행동뿐 아니라 한 몸에 지(知), 정(情), 의(意)가 원만히 조화된 전인이었다.
그는 『청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의 서두에서 그의 생애를 지배해온 세 가지의 정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동경과, 지식의 탐구와, 고통받고 박해받는 약하고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참을 수 없을 연민이라는 거였다. 그 대목은 늘 내 정결한 피를 끓게 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죽는 날까지 정열을 바칠 가치가 있는 거였다.
나의 이런 감동을 마음에 맞는찐 친구에게 나누려고 했을 때 그 친구는 시들하니 말했다. “야, 야, 웃기지 마라. 그 소리는 전구라가 하기 전에 이미 러셀이 써먹은 소리야.”
나는 그 순간부터 그 친구를 경멸했다. 그 소리를 먼저 했느냐 나중 했느냐가 무슨 그리 큰 문젠가. 누가 정말 온몸으로 그렇게 살았나가 문제지. 나는 그의 그 소리가 결코 러셀의 메아리가 아닌 그의 육성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나는 그의 생애를 지배해왔다는 세 가지 정열 중 특히 버림받고 약한 이웃에 대한 연민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노년으로 접어든 근래의 그를 지배하는 것 역시 그 세번째 정열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빼놓지 않고 읽은 그의 글 도처에 이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과 이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악에 대한 분노의 괴로움이 진땀처럼 끈끈하게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저서와 그의 사진이 있는 옹색한 내 방에서 그의 인격을 흠모하며 원대한 꿈을 키웠고, 그의 사상과 이념을 정신의 지주로 삼아 면학에 힘썼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나는 더위를 무릅쓰고 교과서와 씨름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산으로 바다로 바캉스를 떠났지만 나는 조금도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친구들이 살을 태우고 기타를 치고 고고를 추고, 여학생을 꼬드길 동안 나는 내 내면에 보화를 축적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아버지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비좁은 방을 아버지의 거구가 가득 채우니까 숨이 막혔다. 나는 아버지가 빨리 나가주길 바랐다.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마치 벽에 걸린 전구라 선생의 사진에 이끌려서 들어온 것처럼 그것만 바라보면서 나갈 척도 안 했고, 나는 아무리 내 아버지지만 전구라 선생을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아마 그 사진이 내 또래의 고등학생이 흔히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의 사진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럴 법도 했다. 내가 걸어놓고 있는 사진은 전구라 선생의 저서에서 떼어낸 사진으로 근영이 아니라 젊었을 적의 사진으로 상당한 미남이었으니까.
아버지는 배우 가수를 통틀어 딴따라라 불렀고, 무슨 근거로 그러는지 딴따라를 자기만 못한 유일한 직업으로 알고 경멸하는 버릇이 있었다. 젊은 애들 생각을 거의 무조건 추종하는 아버지였지만 그 낡은 생각만은 못 버리고 있었다.
틀림없었다. 아버지는 전구라 선생을 딴따라로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다지도 심한 경멸과 천대의 시선으로 바라볼 까닭이 없었다.
나는 그 사진이 딴따라 사진이 아니란 걸 설명하기 전에 우선
그 사진을 모독으로부터 지키고 싶었다. 나는 그 사진과 아버지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비켜 인석아, 신성한 공부방에 저따위 사진을 붙여놓고 공부가 될 성싶으냐, 인석아.”
“아버지 이분은 딴따라가 아네요.”
“알아 인석아, 지 작자가 딴따라만도 못한 작자라는 걸.”
딴따라만도 못한 작자라니, 나는 화끈한 분노를 느꼈고 아버지 역시 나만 못지않은 분노에 떨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나 그 분노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말조심 하세요. 이분은…….”
“알아. 그 작자 전구라 아니냐?”
“아니 아버지가 어떻게 이분을…….”
“왜 아버진 그 작자 좀 알면 안 되냐? 한땐 그 작자가 아버지 발밑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싹싹 빈 적이 있었느니라.”
아버지는 어느 틈에 분노를 가라앉히고 있었고, 싱글싱글 입가에 웃음마저 감돌고 있었고, 길게 얘기하고 싶은 모양으로 이불 개켜놓은 걸 의자 삼아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예감으로 가슴이 고통스럽게 죄어왔다. 그건 아버지가 또 한번 낄낄거릴 것 같은 예감이었다. 나를 풀 속으로 팽개치고 나서, 또 자동문 밖으로 팽개치고 나서 낄낄대던 그 기분 나쁜 웃음을 뱃속 가득히 품고 있는 얼굴로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그럴 리가요. 아버진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나는 허위적 대듯이 가까스로 말했다.
“인석아, 서둘지 말고 남의 말을 좀 들어봐.”
아버지는 밉살머리스럼도록 유들유들했다.
“너도 알지? 우리가 저 녹번리 지나 구파발 살 때 놀러 다니던 사립 국민학교 수위아저씨 말야. 그 사람 좋은 장씨 아저씨 생각 나지? 우리가 지금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몇 년 있다 일어난 일인데 어느 날 그 아저씨가 얼굴이 사색이 돼가지고 우리집으로 돈을 꾸러 왔지 않겠니. 그 아저씨 장가든 지 십 년이 넘도록 애가 없어서 이제 영 못 낳겠거니 하고 있던 차에 마누라가 애를 배게 되어 세상에 자기 혼자서만 애아범 되는 것처럼 열 달 내내 싱글벙글 입을 헤벌리고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막상 달이 차고 나서도 배만 들입다 아프지 그 빌어먹을 놈의 아새끼가 나와야 말이지. 산모, 장모, 애아범이 합세를 해서 이빨이 다 근덩근덩하도록 안간힘을 써도 이놈의 아새끼는 안 나오고 산모는 그만 숨이 넘어가려고 하더란 말이야. 그제서야 부랴부랴 병원으로 데리고 갔더니 한시바삐 수술을 안 하면 산모고 아기고 다 가망없다고 하더라지 뭐냐. 이 친구 어서 수술을 해달라고 의사한테 애걸을 하고는 나한테 수술비를 꾸러 달려왔더라. 나도 온 집 안에 있는 돈을 다 긁어모아봐도 택도 없고, 생각다 못해 구파발 땅 판 돈에서 집 사고 남은 걸 장사하는 친구한테 주어갖고 이자 몇 푼씩 받는 돈이라도 달래볼까 해서 장씨 아저씨를 앞세우고 나섰지 뮈냐. 그런데 그때만 해도 택시 요금이 어찌나 싼지 어중이떠중이 택시 아니면 요기서 조기도 못 가는 줄 알던 때라 엥간한 재주 갖곤 당최 택시를 잡을 수 있어야지. 참 환장하겠더라. 어쩌다 빈 택시가 오면 열 명 스무 명 달려드는데 하여튼 그땐 재빨리 손잡이를 잡고 뛰는 놈이 임자였으니까. 별수 있니, 내가 차도로 나섰지. 손님이 내릴 듯이 속도를 늦추기 시작하는 택시 손잡이를 잡고 무작정 뛰었지. 거진 버스 한 정거장 거리는 되게 뛰고 나서 정말 택시가 서고 손님이 내리더라. 나는 우선 장씨 아저씨를 찾았다. 이 친구 고꾸라질 듯 고꾸라질 듯하면서도 잘 뛰어오더군. 근데 그사이에 어떤 작자가 그야말로 꼭 새 앙쥐같이 내 겨드랑 밑으로 쏙 빠지더니 택시 속에 들어앉는 거야. 그러더니 운전사 갑시다, 하며 제법 점잔을 떨잖아. 나나 장씨 아저씨나 눈에서 불이 안 나게 생겼냐 말이다. 그래도 우린 애걸을 했다. 통사정을 하면서 말이다. 근데 이 새앙쥐 같은 작자가 뭐랬는 줄 아니. 우리한테는 아예 대꾸도 안 하고 운적사한테, 어서 가잖구 뭘 하고 있어, 택시는 먼저 타는 게 임자야, 글쎄 이러더란 말야. 나는 암말 안 하고 이 새앙쥐 같은 작자를 내 이 단 두 손가락으로 끄집어냈지. 젓가락으로 간장 종지에 빠진 파리 집어내기보다 더 쉽더라니까. 근데 이 작자가 별안간 계집이나 지를 것 같은 비명을 지르더니 길바닥에 나자빠지는 거야. 그러더니 어디 대령하고 있었다는 듯이 순경이 달려오고 우린 어느 틈에 폭력사범이 되어 있더란 말야. 장씨 아저씨가 자기가 쳤다고 순순히 폭력 사실을 인정해서 난 곧 풀려났지. 뭐 인석아, 내가 비겁하다구? 원 녀석도 눈치가 그렇게 없냐. 내가 우선 풀려나야 돈을 돌려다가 수술을 시켜서 산모고 아이고 살릴 거 아냐. 나는 그까짓 장씨 아저씨야 어찌 되든 간에 걸음아 날 살려라 그 자리를 비켜나 장사하는 친구네로 가서 돈을 마련해갖고 병원으
로 갔지. 그래도 병원 하나는 잘 만나 수술비도 내기 전에 수술을 해서 산모와 아기가 다 목숨을 건졌더라. 게다가 아이가 아들이야. 한숨 돌리고 경찰서로 달려갔더니 맙소사 그 생쥐한테 삼 주일의 상해진단서가 떨어지고 장씨 아저씬 유치장이야. 그 새앙쥐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는 한 재판받고 실형이 선고되기가 십중팔구라지 뭐니. 그 녀석 지지리도 복도 없는 놈이지, 장가가고 십사 년 만에 첫아들 보는 날 유치장엘 들어가다니 별수 없더구나. 그래서 솔직히 털어놓았지. 실상은 내가 그 새앙쥐에게 상해를 입힌 장본인이라구. 그러나 이미 장씨 아저씨가 범인이 되어 있는 게 엿장수 마음대로 번복될 수 있는 게 아니더라. 방법은 딱 하나 그 새앙쥐가 고소를 취하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야. 나는 거의 매일같이 그 새앙쥐네를 드나들며 갖은 구차한 통사정을 다 하고 제발 우리 불쌍한 친구를 위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걸을 했다. 그 새앙쥐 해놓고 살기도 으리으리하게 해놓고 살더라만 거만하긴 또 어찌나 거만한지. 나는 그때서야 그가 만만치 않은 세도가인 걸 알았지. 그는 내 애걸을 듣는 즉시 나를 거들떠도 안 보고 경찰서 누구누구, 검찰청 누구누구에다 대고 전화를 거는 거야. 여보게, 내 차가 볼링하러 간 사이 생전 처음 택시를 이용하려다 내가 이만저만한 봉변을 당했으니 그놈은 중벌로 다스려줘야겠네, 추상같은 법의 맛을 보여줘야겠네, 이런 따위 전화 말야.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더라. 그런데 사람이 아주 죽으란 법은 없다구, 내가 그놈에게 고소를 취하시키든지, 그놈을 쳐죽이든지 둘 중 안에 하나를 해야겠다는 비상한 각오로 간 날, 실로 요절복통한 일로 사건이 거꾸로 됐지 뭐냐. 나는 어떡하든 살인죄는 안 범하려고 덮어놓고 그 새앙쥐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지. 새앙쥐는 끄덕도 안 하더군. 그러다가 나는 별안간 그 집 재떨이를 내 주머니에다 털어넣고 가가대소를 하며 일어섰지. 그놈이 새파랗게 질리면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더군. 재떨이에 뭐가 있었냐구? 인석아, 재떨이에 뭐가 있긴, 꽁초가 있었지. 그 새앙쥐는 그때 켄트를 피우고 있었고, 그때 한창 양담배 단속이 심할 때였거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양담배를 피는 걸 들키면 오백만원의 벌금을 물린다고 엄포를 놓을 때였으니까. 세상에 그 거만하던 새앙쥐가 일 초 간격으로 그렇게 비굴해질 수 있을까. 알고 보니 거만과 비굴은 종이 한 겹 사이도 안 되더라. 그 새앙쥐 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뭐라더라. 응, 빠다제로 합시다, 이러더군. 빠다제가 뭔 소린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나는 아암 켄트 피는 양반이니까 미제 빠다도 잡수셨겠지 어쩌구 하며 방바닥에 있는 그 작자의 켄트갑까지 얼른 내 호주머니에 집어넣었지. 그 작자 떨리는 음성으로 그게 아니구 켄트 꽁초하고 고소 취하장하고 맞바꾸자고 하더군. 나는 얼씨구 고소 취하장에 도장 받고,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아 전화로 높은 사람한테 고소 취하의 뜻까지 밝히게 하고 그제서야 주머니를 뒤집어 꽁초를 훌훌 털어내고 나왔지. 꽁초도 미제 꽁초가 참 좋긴 좋더구나. 말이 꽁초지 끝만 조금씩 그슬린 장대 같은 꽁초였지만 말이다. 그후 장씨 아저씨는 제꺼덕 풀려나서 아들 생면하고 마누라 붙들고 울먹이고 그랬지 뭐. 그 새앙쥐가 누구냐구? 원, 녀석도 그걸 몰라서 물어? 바로 전구라였다, 이 말야.”
그러더니 아버지는 허리를 비틀면서 낄낄 대기 시작했다. 낄낄낄, 낄낄낄, 낄낄은 연방 사레가 들리면서 새로운 낄낄낄을 불러일으켜 격렬하고 고통스러운 웃음은 좀체 끝나지를 않았다.
나는 한꺼번에 여러 개의 질자배기가 깨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서 있는 땅이 자꾸 어디로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허전해진 채 허우적댔다.
아버지가 나를 풀 속으로 팽개쳤을 때 허우적대다 땅바닥을 딛기까지는 순식간이었고, 아버지가 자신의 우상을 스스로 깨뜨리고 나를 자동문 밖으로 팽개쳤을 때 허우적대다가 설 자리를 찾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 허우적거림에서 설 자리를 찾고 바로 서기까지는 좀더 오랜 시일이 걸릴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외부에서 찾던 진정한 늠름함, 진정한 남아다움을 앞으론 내 내부에서 키우지 않는 한 그건 영원히 불가능한 채 다만 허우적거림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홀로 늠름해지기란, 아, 아 그간 얼마나 고되고도 고독한 작업이 될 것인가.
나는 고독했다. 아버지의 낄낄낄이 내 고독을 더욱 모질게 채찍질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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