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리 몬테카시노에있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본원이다. 성 베네딕도 성인(480?~547?)은 "베네딕도 규칙서"의 저자로서 서방 수도자의 아버지요, 유럽 전체의 수호성인이고 기술자 건축가 그리고 개간자들의 수호성인이다. 수도원은 해발 519m의 (Monte) 정상에 자리 잡고있다. 세계 제2차 대전때에 독일군 제1선(일명 구스타프라인)으로 설계되어 나폴리에 진격한 연합군의 폭격으로 완전 파손 된 수도원을 다시 재 건축하여 1964년 교황 바오로 6세의 집전으로 10월24일에 봉헌 되었다. 화강석과 흰색 대리석으로 지어진 몬테 카시노 수도원은 그 크기가 가로 100m, 세로 200m가 되는 어머어마한 건물이다. 수도원을 비롯해 대성당, 성 베네딕토와 여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의 무덤, 박물관, 도서관, 문서보관소 등을 갖추고 있으며 방만 100개가 넘는다.
몬테 카시노는 원래 라치오 지방 카시노시에 있는 산(Monte)이란 뜻이다. 평범한 이 산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성 베네딕토가 529년쯤 이곳에 수도원을 세우고, 수도생활의 이상과 목표를 제시한 <수도규칙>(Regula Benedicti)를 저술했기 때문이다. 성 베네딕토가 이곳에 정착했을 때는 그의 나이 50이 다 됐을 무렵이다. 베네딕토는 산 정상에 있는 아폴로 신전 자리에 수도원을 세우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성 베네딕토가 활동하던 시대는 게르만 민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서로마 제국이 패망(476년)해 정치체제가 붕괴되고 윤리적으로 퇴폐의 길을 걷던 불안한 시기였다. 교회 역시 이교 민족의 계속된 침입으로 존립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네딕토는 '순명' '겸손' '침묵'을 중시하면서 공동생활을 하며 '기도'와 '노동'을 하는 수도회를 창설했다. 노동은 노예와 같은 하층민들이나 하는 천한 일로 여겼던 시대였다. 당시 유럽인들의 일반적 사고와 생활방식에서 벗어난 베네딕토의 노동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고, 그가 설립한 수도회는 '중세 초기 암흑기'에 영적 중심지로서뿐 아니라 유럽 사회의 도덕과 윤리, 문화 중심지로도 자리잡았다. (글 출처- http://blog.naver.com/teotokos)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가 연합군 측으로 기울어가던 1944년 5.18. 이탈리아 로마 남동쪽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연합군의 맹공격을 받는다. 연합군의 대공세에 밀린 독일군이 언덕에 자리한 이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퇴각해 사령부를 세웠기 때문이다. 연합군은 지상은 물론 공중에서도 무차별 폭격을 가해 이탈리아 국가기념물인 이 수도원을 완전히 파괴했다. 유럽 수도원의 발상지인 베네딕투스 수도회의 총본산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세계대전이 끝난 후교황 바울 6세에 의해 1964년에 말끔히 복구됐다.
폐허가 된 수도원
폐허가 된 수도원
폐허가 된 수도원
독일 병사 무덤
현재 몬테카시노에 가면 제 2폴란드 병사들의 무덤이 있다. 당시 부대를 이끌던 Anders 장군은 1972년 런던에서 죽기 전에 수도원 근처에 병사들의 무덤을 만들기를 원했고, 얼마 뒤 제 2군단의 생존자들이 수도원 근처에 전쟁 기념관을 건설했다. 이 곳의 입구에는 병사들의 용기에 대해 4개 국어로 적은 기념비가 있다.
수비아코는 로마에서 동쪽으로 약 73km 떨어진 아니에네 강변에 위치한 해발 410m의 마을로 성 베네딕토가 수도생활을 시작한 곳이다. 이탈리아 중부 누르시아의 자유 시민 가정에서 출생한 베네딕토는 청년이 되어 로마로 유학을 떠났다. 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당시 로마에 회의를 느끼고 23살 무렵 이곳 수비아코 산중으로 들어와 가파른 절벽 중앙에 나 있는 동굴에 들어가 3년간 기도와 묵상으로 은수생활을 했다. 이 동굴을 '사크로 스페코'(Sacro Speco) 즉 '거룩한 동굴'이라고 부른다. 절벽을 따라 올라가면서 지은 수도원 건물은 말 그대로 사크로 스페코였다. 성당 안쪽에는 성 베네딕토가 기도하던 동굴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좁은 동굴 안에는 흰 대리석으로 조각한 청년 베네딕토상과 돌로 만든 십자가, 빵 바구니, 그리고 장궤틀 하나가 놓여 있다. 성당 내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성 베네딕토의 일생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로 온통 장식돼 있다. 동굴 밖에는 베네딕토가 이곳에서 은수생활을 하던 중 육정을 이기기 위해 알몸으로 딩굴었던 장미 정원이 그대로 있다.
스콜라스티카 성녀상
수비아코에 있는 성녀 스콜라스티카 수도원 안마당에 세워져 있는 스콜라스티카 성녀상이다. ㅁ자 건물로 둘러싸인 안마당
가운데 세워져 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쌍둥이 누이동생이다. 어릴 때부터 하느님께 봉헌한 사람으로 살아 왔으나 아마도 부모의 집에서 기거한 듯 보인다. 그 후 그녀는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는데, 혼자인지 아니면 공동체 생활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당시에 그녀는 일 년에 한 두 번 정도 성 베네딕투스를 만난 것 같다.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ius I, 9월 3일)가 쓴 “이탈리아 교부들의 생활과 기적에 관한 대화집” 33장에 의하면, 성 베네딕투스가 몬테카시노의 대수도원을 설립한 뒤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8km 정도 떨어진 피우마롤라(Piumarola)에 베네딕토 수녀원을 설립하여 누이동생인 성녀 스콜라스티카에게 맡겼다. 그로 인해 성녀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첫 번째 수녀이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대화집" 33장에는 이들 남매의 유명한 일화가 하나 전해 온다. 성녀 스콜라스티카가 마지막으로 성 베네딕투스를 방문했을 때 성녀는 예년과 같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베네딕투스 성인이 몇몇 수사들을 데리고 나와 수도원에서 약간 떨어진 어느 집에서 만났다. 그들은 만나서 늘 하던 대로 함께 기도하고 영적 담화를 나누었다. 밤이 되자 성녀는 오빠에게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있기를 간청했으나 베네딕투스 성인은 수도회 규칙에 충실해야 한다며 거절하였다. 이에 성녀가 눈물을 흘리며 잠시 기도를 하자 곧 세찬 비바람이 몰아쳐서 베네딕투스 성인과 수사들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대로 머물게 된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야,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너의 뜻을 허락하셨구나. 대체 네가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고, 성녀는 “당신은 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으나, 주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으셨습니다. 자, 이제 나가서 수도원으로 돌아가 보시지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해서 남매는 밤새도록 영적인 생활과 천상 생활의 기쁨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마지막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운명하였다. 베네딕투스 성인은 누이동생의 시신을 자신을 위해 몬테카시노 수도원 내에 마련해 두었던 무덤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몬테카시노가 붕괴된 후 8세기경에 베네딕투스 성인의 유해와 성녀의 유해는 플뢰리(Fleury)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이탈리아 밖의 지역에서 성녀의 공경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8세기 말에는 베네딕토회의 시간전례에 성녀의 축일이 수록되었고, 9세기경에는 전세계 수도원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다. 성녀 스콜라스티카에 대한 공경 예절이 전세계의 교회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11-13세기에 이르러서였지만, 로마 전례력에 정식으로 축일이 수록된 것은 18세기경이었다. 성녀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주보성녀로 공경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