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 송진련
장녀가 과학고 신문에 실을 원고 부탁을 받았다며 숙제를 나에게 던진다. 애들 둘을 과학고에 보낸 엄마가 하실 말이 많을 것 같다는 부연 설명과 함께였다. 인생을 먼저 살아 본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어 허둥대다가 펜을 든다.
나뭇잎의 사연은 단풍으로 물들고, 사람의 사연은 글이나 말이 되어 사람들 마음을 움직인다고 하는데 과연 내 글도 그리 될 수 있을까. 조심스럽지만 애써 용기를 내서 추억 앨범을 넘겨본다.
장녀는 ‘과학고’란 말도 들어본 적이 없던 어느 날, 선배가 찾아와서 진학을 권유한다는 것이다. 운이 좋게도 과학고에 합격해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도시락도 안 싸고 등하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 효녀가 따로 없어 대견하던 것도 잠시, 심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과학고 진학을 부추긴 것을 후회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던가. 몸에 좋다는 약을 먹어 가며 2학년 때 카이스트에 조기 합격을 했다.
장녀가 입학할 당시는 정부가 과학인재 조기 발굴 차원에서 과학고와 카이스트를 연계하는 교육 시스템이 도입 된지 9년 차였다. 개인과외나 학원 수업 없이 힘들게 공부한 장녀 하나로 족하건만, 누나를 따라 둘째도 과학고로 진학하겠다는 것이다. 남자는 큰 학교를 나와야 선후배들이 많아 사회생활 하기도 좋을 텐데 싶어 만류 했다. 3년을 공부해서 의과대학에 진학하겠다며 각서까지 썼다. 2학년이 되자, 꽉 짜여진 생활에 염증을 느낀다며 카이스트로 진로를 결정하니 모른 척 눈 감았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더니만.
장녀는 그림을 좋아했다. 전국대회에 입상할 정도로 실력도 있고 예술적 끼도 있었다. 담임께서는 “학교 성적도 좋으니 전자과나 뜨는 분야를 전공해라. 화학경시대회까지 나갔던 네가 그림이나 그리는 산업디자인과냐.” 디자인은 그림 그리기가 아니라며 고집을 피우더니 지금은 대학에서 제자들 교육에 애쓰고 있다. 요즘도 자식 교육, 산학 프로젝트 등 하늘 한 번 쳐다 볼 여유도 없이 바쁘지만 좋아하는 일이라 행복하단다.
둘째는 유년시절 양곡동 계곡에서 개구리헤엄을 즐기던 아이. 땅거미가 지고 나서야 귀가하는 운동 마니아다. 카이스트에 입학해 단순한 기숙사 생활에 활력을 불어 넣기 위해 시작한 수영으로 전국대회에 은상까지 받았다. 지금도 주말이면 각종 스포츠에 심취하며 업무로 쌓인 피로를 푼다고 한다. 어떤 분야든 뛰어 들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확신이 이 때 생긴 것 같다.
꼬박 4년, 주말마다 과학고 왕래를 했으니 진주 지리와 동네 골목길까지 훤하다. 외출이 가능한 주말이면 남강다리 아래 유명한 장어집도 드나들었고, 유원지 가는 길목에서 좋아하는 튀긴 닭다리도 보약삼아 먹었다. 여학생들의 즐거움은 교문 근처 과학 슈퍼에서 컵라면 사 먹는 일이고, 남학생들은 축구만이 유일한 여가생활이었다. 지금은 학교가 진성으로 이사를 해서 후배들이 편히 공부하는 것 같은데, 우리 애들이 다닐 때는 학교 환경이 열악해 불편한 점이 많았다. 침대도 없는 작은 방에 4명이 밤늦게까지 스탠드를 켜도 눈치가 보였고, 보이지 않은 치열한 경쟁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단다.
막내도 과학고에 도전한다고 학원까지 다니며 극성을 떨더니 낙방하고 평범한 여고에 입학했다. 과외비, 학원비, 점심과 저녁 도시락에, 등하교 승용차로 모시기는 기본이었다. 한 번 밖에 없는 수능 실수로 대학 이름이 달라지는 험악한 모습을 보고 나니 두 아이들이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후 20년이 훌쩍 지나갔다.
길고 짧은 건 대어보아야 안다고 했던가. 장녀는 독일 유학 중에 심리학을, 둘째는 미국 유학 중에 금융으로 진로를 변경하고 취업 문제로 고민했다. 유학만 다녀오면 탄탄대로가 기다린다는 것이 착각이라는 걸 알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부대껴 마음의 병이 깊어갈 때 내가 해 줄 수 것은 기도 밖에 없었다. 작은 들꽃들도 사계절을 보내며 뜨거운 열기와 싸늘한 추위를 견디어 내지 않았는가. 때로는 천둥과 태풍과 궂은 비바람을 맞았으리라며 내 맘을 다잡는 동안 막내는 과학교사로 발령이 나고 결혼도 제일 먼저 했다.
조석으로 서늘한 공기가 책을 안내한다. 존경하는 문우가 추천한 책 《라틴어 수업》 정독 중 아차, ‘베아티투도’. 행복을 뜻하는 단어다. 베오beo는복되게 하다라는 의미고, 아티투도attitudo는 태도나 마음가짐, 즉 마음가짐에 따라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인생이 평탄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시련은 항상 틈을 노리고 달려드니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자랑스러운 과학고 학생 여러분, 요즘은 취업문턱이 더 높아져 취업준비생들이 누적되고 많은 부모들의 애간장을 녹인답니다. 여러분들은 큰 고개를 하나는 넘었잖습니까. 지금부터는 본인의 적성과 체력과 시대 조류에 맞는 전공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 합니다. 전문서적도 찾아보고 부모님과 주위의 전문가들과도 깊이 상의해 보세요. 부모님의 기대나 타인에게 비춰지는 성공보다 내 행복이 최우선이라는 것도 명심하세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혼을 불어 넣는 간절한 마음으로 매진하다 보면 행복은 뒤따라 올 것입니다.
첫댓글 참 빛나는 가족이네예.
송샘 축하드립니더.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