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고모님들
송 희 제
나에게는 친정으론 고모님이 한 분이시고 시댁에는 세 분의 고모님이 계시다. 나는 '고모님'이란 말만 들어도 포근하고 자애로운 품속에 잠기는 듯하다. 우선 친정으론 아버지 윗분이셨는데 특히 인상이 고결하고 인자하셨다. 어렸을 적에 우리 자매들은 고모만 오시면 집안 분위기가 더 화기애애했다. 아버지는 화통하시며 엄격하시었다. 우리는 물론 조용한 어머니에게는 가장이신 아버지 말씀은 법이었다. 그런 집안에 고모만 오시면 집안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우린 고모 치마폭처럼 보드랍고 섬세한 사랑을 너무 좋아해 그런 고모가 우리 집에 더 머물기를 바랐다.
내가 집에서 학교 다닐 적에도 우리 집에만 오시면 막내인 내 곁에서 꼭 나를 보듬어 주며 주무셨다. 시험 기간에는 난 조금만 눈붙이고 일어나 공부하려고 방 불을 안 끄고 잔다. 그러면 어머닌 오시어 일어나지도 않으며 밤새 헛불만 켜놓고 잔다고 불을 끄고 가셨다. 고모는 내가 공부할 때는 불침번 노릇까지 하시며 맛있는 사탕과 간식으로 내 졸음을 쫓아 주시기도 하셨다. 그렇게 인자하시고 현숙하신 고모는 낮잠 자듯이 팔베개하시고 앓지도 않고 너무 곱게 선종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한 분이신 고모마저 돌아가셨단 말을 듣고 얼마나 내 가슴이 철렁했는지 모른다. 당장 달려가 당시 집에서 병풍 뒤에 누워계신 고인의 머리맡에서 얼마나 울어댔는지 모른다. 그렇게 친정 고모마저 돌아가셨다.
결혼하니 다행히 시댁에는 고모님 세 분이 다 같은 대전에 사셨다. 시부님은 내가 결혼 전에 돌아가셔 뵙지 못했지만, 시부님 얼굴과 오뚝한 콧날이 비슷해 고모님들이 모두 미인이셨다. 거기에 모두 마음씨와 언행까지 곱고 참 사철하며 우애도 좋았다. 홀로 되신 어머님과 함께 살며 맞벌이하는 나에게도 늘 보듬어 주시어 고모님들만 오시면 반갑고 든든했다. 큰고모는 내가 직장 다니며 힘들다고 고모 댁 김장 김치까지 묻어 둔 김장독에서 꺼내 주시곤 했다. 막내 고모는 내 남편이 청년 시절 손을 크게 다쳤을 때, 그 고모가 정성껏 치료해 준 고마운 말을 듣고 나도 잘해 드리려 노력했다.
둘째 고모는 나에게 친정어머니같이 여러 번 내 곁을 지켜주신 분이다. 그 고모는 5남매를 두셨다. 내가 시집와서 보니 그중에 막내딸은 얼굴은 성인 얼굴 같으나 몸집이나 지능은 좀 장애아로 작고 비정상이었다. 그 고모도 시집을 잘 가서 고모부도 좋은 직장 다니셨다. 4남매를 낳았을 때, 모시던 시부모님이 다 같은 해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갑자기 부모님 다 여윈 고모부도 다음 해에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당시 막내딸을 막 임신했을 때였다. 그 옛날에 4남매를 두고 시어른 다 여의어 고모가 충격일 때인 한참 중년에 기둥 같은 남편까지 가시어 얼마나 청천벽력이었을까? 고모는 그래서 그 옛날에 아기를 지우려고 엄동설한에 갯 강을 깨뜨려 거기에 발을 담그기도 했다. 별짓을 다 해가며 태아를 지우려 해도 당시 병원 갈 돈도 없고. 쉽게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러다 낳은 딸이 장애였다. 형제지간도 잘 따르지 않고 엄마 치마꼬리만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았다.
그런 둘째 시고모는 내가 두 아들을 낳을 때마다 산기가 있는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가셨다. 출산할 때까지 곁에 계시어 나의 친정 모친 역할을 해 주셨다. 암 투병 중이신 시모님의 부탁에 단걸음에 오시어 꼬리표 같은 장애 딸을 집에 두고 오신 것이다. 나를 안정시키며 긴 시간을 곁에서 내 손을 잡고 보듬어 주시며 기도와 위로해 주셨다. 그럴 때는 거의 남편이 보호자가 되어 곁에서 지켜주는데, 난 꼭 병원에서 큰 신세를 질 때마다 남편이 불가피한 일로 곁에 없었다. 그렇게 그 고모는 두 번 다 긴 산고 끝에 자연 분만하는 나를 끝까지 지켜주셨다. 나에게는 평생을 두고도 잊지 못할 큰 은인이시다.
그 후부턴 그 고모와 난 더 든든하고 친정 혈육 같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홀로 빈 몸으로 5남매를 키우느라 살림이 그리 넉넉하진 못했다. 자식 키울 적에 너무도 힘들어 둘째 딸은 한동안 남의 집에 입양 보냈던 말씀도 내게 하셨다. 그 후 그 집도 갑자기 어려워져 다시 데려온 말씀까지 하실 때, 난 눈물범벅이 되어 숨죽이며 들었다. 그 천사 같고 고마운 인연으로 난 둘째 시고모를 의지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우려 노력했다. 그러던 그 고모님도 그 힘든 췌장암으로 돌아가셨다. 그 고모님 생각만 해도 나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편찮으신 시모님이 계시고 딸은 직장 근무할 때라, 더구나 더 연로하셔서 차멀미로 막내딸 사는 집을 한 번도 못 오셨다. 하지만 이렇게 친정고모 같은 시고모님들이 계셔 든든한 보살핌에 힘든 고비마다 잘 넘길 수 있었다. 고모님들이 참 그립고 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