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학산(鶴山) 금광평(金光坪)<5>
<8> 금광평 개척대(開拓隊) 조직과 수리조합(水利組合) 공사
불도저 / 덤프트럭 / 포크레인
금광평은 지형적으로 보면 굉장히 좋은 곳이지만 역사가 유구(悠久)한 학산 본동, 금광리 및 주변 다른 동네에서는 마을 취급도 하지 않았던 가난뱅이 마을이었다. 당시 소가 있는 집은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았지만 우리 금광평은 소가 없으니 사람이 끄는 흙젱이나 보구래(쟁기)로 땅을 일구었다. 6.25 사변 후,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이 몰려오자 정부에서 허허벌판으로 쓸모없는 잡목들만 들어차 있던 이곳 금광평의 개간(開墾) 사업을 시작하였고 개척대(開拓隊)를 발대하였다.
벌판 한가운데 작은 실개천 주변에 기다란 늘레집이 들어섰고, 소문을 듣고 몰려온 피란민들에게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씩을 무상으로 배정해 주었다. 당시 늘레집은 10여 호가 함께 붙은 기다란 집이었다.
마을이 너무나 가난했을 뿐더러 땅은 온통 시뻘건 진흙땅으로 곡식도 제대로 자라지 않다보니 이웃 마을에서는 이곳을 삼팔따라지(3.8선을 넘어온 피란민을 비하하는 말) 동네, 개발대(맨발대)라고 깔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다 곧바로 정부가 보리암(삼덕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막는 금광리 제2공구 수리조합(第二工區水利組合) 공사와 칠성암(법왕사)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막는 어단리 제3공구 수리조합(第三工區水利組合) 공사를 시작하자 피란민(避亂民)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품팔이꾼(노동자)들이 모여들어 흥청거리기 시작했다.
우리동네 금광평은 그 중간쯤으로 양쪽 수리조합 공사장이 그다지 멀지 않았다.
공사장 옆에는 숙소도 있었고 밥집인 함바(飯場)도 있었지만 품팔이꾼들이 모여들다 보니 숙소가 모자라 우리집은 건넌방을 경상도에서 온 총각에게 전세(傳貰)를 놓았고 어머니와 누님들도 새벽이면 공사장으로 품팔이를 가시곤 했다.
우리 마을 행길(한길) 옆에 제법 솟은 언덕도 있었는데 그 언덕을 송두리째 파내 트럭으로 흙을 실어 나르느라 동네는 항상 흙먼지가 자욱했다.
정부에서는 2공구, 3공구 수리조합공사가 끝난 후, 이곳에 살던 10여호의 선주민들이 손으로 일구었던 몇뙈기 되지도 않는 밭을 정부에서 거의 무상에 가까운 값만 받고 분양해 주었는데 우리집도 1200평 정도였다.
위 사진은 요즘 사진인데 당시는 불도저도 작고 덤프트럭도 훨씬 작았다. 요즘 같으면 저 포크레인으로 차에 흙을 퍼담지만 당시는 포크레인이 없었으니 장정들이 삽으로 흙을 퍼담았다. 덤프트럭은 자동으로 흙을 쏟지만 일반 트럭은 삽으로 흙을 퍼 올리고, 퍼 내려야만 했다.
당시는 우차(牛車), 마차(Wagon), 달구지(牛車/馬車)만 있던 시절이라 도락구(Truck)를 보는 것만도 신기했다.
수리조합 공사가 시작되면서 금광평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이 넘쳐나는 곳이 되었다.
제방 둑을 만들 때 남자 장정들은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레일을 깔고 구루마(밀차)를 탔다. 어느 정도 높아진 둑 위에다 레일을 깔고는 산 쪽에서 구루마에 흙을 퍼 담아 올라타고 브레이크 역할을 하는 막대기를 잡고 호기 있게 레일을 달려 내려온다.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소리가 요란한데 끝부분에 오면 막대기를 뒤로 힘껏 당겨 구루마를 멈춘 다음, 위에 얹은 거푸집 모양의 나무상자를 벗기고 삽질로 흙을 반쯤 퍼낸 다음 나머지 흙은 브레이크 막대기를 뽑아 지렛대 모양으로 구루마 옆구리에 대고 밀어서 옆으로 전복시켜 흙을 부었다. 그리고는 다시 거푸집과 막대기를 올려놓고 둘이 콧노래를 부르며 달려내려온 길을 되짚어 오고 가기를 반복한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하꼬(箱)떼기를 했는데 제방 둑 위에 밑이 뚫린 커다란 나무상자(하꼬/箱)를 놓고 그 속에 저수지 바닥에서 흙을 파서 이고 지고 올라와 하꼬를 가득 채우면 도장을 받은 후 하꼬를 옆에 옮겨 놓고 다시 흙을 채운다.
저녁이 되면 도장 갯수를 세어 전표(錢票)를 받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지만 나중에 둑이 제법 높아지면서 바닥에서 흙을 퍼담아 가파른 비탈을 올라와 둑 위에 놓은 하꼬에다 붓노라면 물 먹은 흙은 다져지면서 부어도 부어도 하꼬를 채우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함바 옆에 있던 숙소는 나무 판대기로 벽을 만든 집으로 하꼬방이라고 불렀다.
6.25 전쟁 직후 시작된 저수지 공사는 1962년에 완공되는데 2공구는 동막저수지(東幕池), 3공구는 칠성저수지(七星池)가 되었다. 곧이어 저수지 밑 황량하던 벌판을 불도저로 밀어 논을 만들었고, 흙을 실어나르는 트럭(도락꾸)과 불도저의 굉음으로 마을은 항상 시끄럽고 흙먼지로 자욱했다.
논밭이 정리된 후 마을 가운데에 시멘트로 좁다란 봇도랑(직선 시멘트 물길)까지 만들었으니 우리 금광평은 살기 좋은 마을로 탈바꿈하게 된 셈이다. 그 봇도랑이 바로 우리 논 옆을 지나가서 눈에 물대기도 편했다.
불도저(Bull-Dozer)는 ‘막 밀어붙인다’는 의미였다는데 캐터필러(Caterpillar)라고도 하였다.
<9> 과수원 동네 금광평(金光坪)
금광평은 논밭으로 개척되기 전, 이곳에 과수원이 많아 과수원 동네라고도 했다.
학산지역에 남씨 과수원, 우리 고모네 과수원, 이씨 과수원(현 임마누엘 과수원)이 잇닿아 있었고, 어단리 쪽에 만평과수원, 금광리 쪽에 작은 남씨 과수원이 있었으니 모두 5개였다.
우리 집은 울타리가 과수원 울타리로, 과수원 주인은 강릉읍에서 양조장을 하여 돈을 좀 벌어서는 우리 동네로 와서 과수원을 샀고, 벌써 십여 년이 넘었다고 한다.
과수원 주인 영감님은 몸집이 제법 뚱뚱하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으며, 항상 쇠 지팡이를 절렁거리고 짚고 다녔는데 큰소리도 잘 치고 우스갯소리도 잘해서 점잖은 동네 어른들은 ‘읍엣집 영감님’이라고 불렀지만 조금 허풍이 세다고 하여 사람들이 ‘대포영감’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렀다. 그런데 과수원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사람들은
‘그기 풀밭이지 어디 과수원인가? 그 풀밭에 호랭이가 새끼를 쳐도 모르겠더라... ’ 하면서 수근거리기도 했다.
1955년인가, 대포 영감님 며느리가 야학(夜學)을 연다고 해서 동네가 술렁거렸다.
당시, 대부분 학교에 다니지 않았기에 한글을 아는 사람은 국민학교에 다니는 우리 또래들 뿐이었다.
대포영감네 행랑채 제일 큰 방이 글방으로 꾸며졌고 칠판도 달고 백묵도 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모두 신기한 것들뿐이었다. 물론 무료였을 뿐만 아니라 종이와 연필도 공짜로 나누어 주었다. 몰려오는 사람들 대부분은 동네 아주머니들과 처녀들이었고, 학교에 다니지 않는 조무래기 계집아이들도 많았다. 저녁마다 호롱불을 앞세우고 깔깔거리며 모여들면 2, 30명씩이나 되었는데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느라 솜처럼 피곤하련마는 어두컴컴한 남포(램프)불 밑에서 방바닥에 엎드려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읽고, 쓰고 하면서 한글을 익히느라 여념(餘念)이 없었다.
한글의 기역(ㄱ) 자도 모르던 우리 어머니도 한글을 익히셨고 학교 문턱도 못 가본 우리 누님들도 모두 한글을 익혔으니 대포영감 며느님은 정말 고마운 분이셨다. 내가 어머이 손을 잡고 야학방에 갔는데 벽에 있는 책꽂이에 책이 가득 꽂혀있었다. 그때, 시집(詩集)이 있었는데 너무나 감동적이었던 싯귀와 귀퉁이에 그려있던 삽화(揷畫)가 아직도 기억난다.
대포영감은 밭 가나 논두렁에서 마을 사람들을 보면 일도 못하게 아무나 붙잡아 놓고는 며느리 자랑을 하느라 입에서 침을 튀기곤 했다.
‘그러기에 옛사람들이 뭐라고 했는가? 남자나 여자나 사람은 그저 배워야 하는 게여. 지랄병 빼놓고는 뭐든지 배우라고 안했는가? 무식(無識)이 고질병이여, 흠 흠...’
그러나 정작 대포영감은 한글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