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1945 일본, 1945-1948 미국
김익렬 중령, 박진경 대령과 문상길 중위
by온기철 James Ohn6시간전
https://youtu.be/hY8aXse5Fw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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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인연 맺은 안동 출신 시인의 특별한 소감 “비록 뭍것이지만…” - 제주의소리
제주4.3 당시 학살 주범으로 손꼽히는 박진경 연대장을 암살한 문상길 중위. 23살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문 중위의 흔적을 찾아 시로 남긴 안상학 시인이 5.18문학상을 수상했다.안동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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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 까치구멍집
안상학
내가 한 일은 다만
1948년 그 사내가 안동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
제주 도민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 지휘관을 암살한,
국군이 국민에게 결코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던
대한민국 제1호 사형수 문상길 중위
고향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던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향년 스물셋 사내, 고향은 안동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내력을 찾아낸 것
임하댐 수몰된 안동 마령리 이식골
남평 문씨 종갓집 막내아들, 그 사내가 살던 곳
그 사내가 떠난 곳,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곳
사내처럼 사라진 마을, 흉흉한 소문 떠도는
쉬쉬대며 살아온 일가붙이들 산기슭에 남은 곳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의 사진 몇 장 찾은 것
소년처럼 해맑은 사내의 마지막 웃음
두 손 철사로 묶인 채 나무 기둥에 결박당한 몸
가슴에는 휘장 대신 표적, 흑백사진 붉은 피는
두 눈 가린 채 목이 꺾인 사내의 최후 진술;
내 비록 미군정 인간의 법정에서는 사형을 받고 사라지나
공평한 하늘나라 법정에 먼저 가서 기다릴 것이다
내가 한 일은 다만 그 사내가 살던 집을 찾아낸 것
당당하게 살아남은 그 사내의 흔적
300년 문화재 기와 까치구멍집 건재한 사내의 생가
수몰을 피해 남후면 검암리로 옮겨 앉은 남평문씨 종가
그를 기다린 40년 고향을 뒤로하고
1988년 옮겨 앉은 낯선 땅 32년, 기다리고 기다린
72년 만에야 불귀 주인 소식 전해들은 까치구멍집
무자년 사내가 가고 72년 만에 내가 한 일은 다만 그의 흔적을 찾은 것일 뿐, 고작 대문간에 막걸리 한 잔 올리고 그의 죽음을 전하는 일이었을 뿐, 그 사이 하늘나라 법정에서 받아놓았을 그 사내의 판결문을 이 집 우체통에 전해주는 일은 그 날 이후 남겨진 모든 사람들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음복주를 마셨다. 경자년 경칩 무렵, 복수초가 까치구멍집 화단에 피어 있는 날이었다.
안상학 시인은 26일 [제주의소리]와의 통화에서 '기와 까치구멍집' 탄생 배경이 이규배 제주4.3연구소 이사장의 제안이라고 밝혔다
출처 :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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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가 언제 역사로 바뀌는 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미군정시대 즉 해방정국에 일어났던 사건들이 역사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제주 4.3사건은 배방후 미군정기 남한의 정세를 정확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 한다. 한국이 약소 국가일 때, 가려졌던 민족의 울부짖음이 선진국 대한민국의 힘을 받아 하나 하나 밝혀 지고 있다.
1910년에서 1945년 까지를 일제강점기라고 한다. 그리고 1945년에서 1948년 까지를 미군정기라고 한다. 1945년8월15일에 해방이 되었고 우리민족은 광복을 찾았다고 하여 이날을 광복절로 기념하고 있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조선을 점령 했고 미국은 조선을 해방 했을 까?
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질 무렵 한반도 남부에는 여운형, 인재홍등을 중심으로 북한에는 조만식등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결성 되어 일본이 나간 후에 새 나라를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에게 1945년8월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사실상 통치권을 넘겼다. 건준은 즉시 수권작업을 시작 했다. 그러나 비교적 중도 적이었던 건준은 한반도 전역에 소련이 들어온다는 소문에 죄경화 되기 시작 했고 우익 세력이었던 김성수, 송진우등은 중경 임시정부를 지지 하고 건준을 인정하지 않았다. 건준은 박헌영등 남로당 세력이 들어 오면서 9월6일 인민위원회로 바뀌었다. 요지음 대한민국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나쁜 성향의 단체로 이해 할 것이지만, 공산주의의 실체를 전혀 모르고 있던 당시의 조선사람들의 분위기를 고려하면 아주 당연한 추세 였다. 소련이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 제안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이유도 한반도를 그냥두면 공산국가가 되라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도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을 그리 나쁘게 생각 하지 않았다. 38선 이북은 인민위원회 중심으로 친일파를 숙청하고 인공 건국 준비가 신속하게 진행 되었다. 다시말하자면 소련은 우리민족 단체가 주도하여 새나라를 건설하게 했다.
9월9일 38선 이남에 들어온 미군은 건준과 인공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까지도 전부 인정하지 않고 미군이 직접 통치하기 시작 했다. 중국 공산당과 모택통을 서방에 적극 홍보한 친공산당 미국 저널리스트 애드거 스노 기자는 해방 후 조선에 와서 2개월간 머무른 적이 있다. 그는 "미국이 아무 준비 없이 미국에 상륙 했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 위원회가 있었다. 미국이 만일 건국준위원회를 살렸더러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 하였을 것이다."라고 회고 하고 있다.(위키 백과)
미군정을 담당한 24사단은 전투병력이었다. 행정능력이 전혀 없었다. 미국정부는 유럽의 전후 처리에 바빠서 동북 아시아는 극동사령관 맥아더에게 맏기고 거의 관여하기 않았다. 맥아더는 일본 문제에 올인했고 한반도는 뒷전이었다.
조선사람들은 해방을 자신들이 일본을 이겨서 나라를 되 찾은 것으로 이해 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보기에는 미국이 일본을 패배 시켜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을 점령한 것이 분명 했다. 38선 이남 땅의 주인은 일본이었고 그 주인을 쫓아 낸 미국이 차지 한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일본이 강점 했던 지역을 미국이 다시 강점 했다.
일제 말엽에는 태평양전쟁 총동원령이 내려져서 조선사람들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일제의 수탈로 전 인구가 기아 선상에 있었다. 조선사람들은 해방이 이것을 해결 해 주리라고 기대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민생을 해결할 만한 경제정책을 시행하지 못 했다.
조선사람들은 철천지 원수 같은 일제 때의 조선사람 관리, 경찰들이 다 감옥으로 들어 갈 것을 기대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와 반대로 이들이 다시 관리가 되었고 경찰이 되었다. 일본군 출신의 군인들이 다시 국군 장교가 되었다.
자연히 미군정은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공산주의에 대한 기대 감도 높아졌다.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반군정 시위를 공삼주의자들은 조직화 하여 대규모 시위로 만들고, 파업을 일으키게 하고, 폭도로 만들었다.
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자체 병력, 경찰, 경찰경비대(군 부대)를 동원 했지만 그외에도 우익 조직 폭력패도 마다 하지 않았다. 더구나 선별적인 진압을 하지 않고 특정지역을 반란군 점령지로 간주하고 무차별 학살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제주 4.3 사건, 여순사건이 가장 큰 사건이었다.
https://youtu.be/Wv6dPn1LYaQ
2차대전이 끝나던 해인 1945년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로 세상이 이분되었던 냉전시대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세계 초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도 1945년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르게 형성 되었다. 이전의 슈퍼 파우어는 영국이었다. 이를 대영제국이라고 했다. 제국은 식민지에 사는 사람들의 주권을 빼앗고 이들을 착취 했다. 이후의 수퍼파우어는 미국이었다. 우선 미국은 영국 처럼 통상적으로 제국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약소국의 주권을 빼앗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약소국에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정부 형태를 요구 했다. 그리고 약소국의 정부는 미국이 원하는 정책을 따라야 했다. 이 조건만 채워주면 미국은 약소국의 방위를 책임 져 주었다. 미국은 자주 우방이라하여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미국 군대를 주둔 시켰다. 옛날 조선과 명, 또는 조선과 청나라의 괸계와 흡사하다. 그래서 진보성향의 미국 학자들은 아메리칸 엠파이어(미제국)이라는 말을 곧잘 쓴다.
1945년은 일본제국이 떠나고 미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제국이 들어온 해라고 할 수 있다. 노골적인 착취를 하던 강대국이 망하고 약소국의 주권을 인정해 주는 제국이 들어 온 것이다. 새로운 수퍼파우어 미국은 세계 방방곡곡에서 미국이 원하는 정부 형태를 가지고 미국의 정책에 따르는 독립국가를 만드는 노력을 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국수주의자(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다.
국수주의자들은 민족의 주권에 외세가 왈가왈부하는 것을 거부 했다. 한마디로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들을리가 없었다. 이차대전 후 여러 나라의 수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알게 모르게 미국에 의해서 제거 되었다. 남한도 예외는 아니었다.
남로당 제주 당 대표였던 김달삼은 미군정에 불만이 많은 제주도민을 선동하여 무장대를 조직,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 했다. 미군정은 경찰경비대(당시의 군대) 9연대를 투입하여 이를 진압 했다. 9연대장 김익렬은, 제주 군정관 맨스필드 대령의 지시가 있기는 했지만, 김달삼을 만나서 동족끼리 죽이는 일은 하지 말자고 제의 하여 잠시 휴전 상태에 들어 갔다. 그러나 5.10 선거가 임박해 지자 미국은 5월 초에 진압을 완료 하려고 일부부러 방화를 하는 등 사태를 키워서 무차별 진압의 꼬투리를 만들었다. 5.5일 조병옥, 안재홍, 딘 군정장관등과 김익렬 중령이 참석한 회의가 난장판으로 끝나고 미국말을 잘듣는 박진경 중령이 김익렬 중령 대신에 9연대장이 되고 무차별 토벌이 시작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문상길 중위는 박진경 중령을 사살 했다.
문상길 중위는 법정에서 군인이 상관을 죽이고 사형을 선고 받는 것은 당연 하다고 진술 했다. 그가 박진경 중령을 피살 했다고 해서 학살이 중단 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는 동족을 자신의 손으로 죽이느니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동족을 학살하는 상관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려고 했을 것이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당시에 우리민족은 이런사람을 보호해줄 나라도 없었다.
김익렬 중령과 문상길 중위는 민족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자 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민족이 서로를 죽이는 동족상잔을 원치 않았다. 초 강대국 미국에게는 미국이 원하는 국가 건설을 방해하는 발에 걸리는 자갈과 같은 존재 였다.
이글을 읽고 다큐멘타리를 본 사람들이 반미 감정을 가질까봐 우려 된다. 38 이남에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한국전쟁에서 적화통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개입이 없었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인정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국가와 국가간에는 인정 대신에 국익이 존재 한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이 한국을 돕는 것으로 인식 되는 것은 인정으로 받아 들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의 우방인 것은 두나라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지 서로 인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제주 4.3 사건은 미국이 한국에 저지른 많은 과오 중에 하나이다. 한국은 당시와는 달리 세계 5위의 국력을 가진 나라이다. 한국이 미국의 과오를 지적하는 것은 그 하나 하나가 미국을 한국의 이익에 맞게 조정 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문상길 중위는 어디에 묻혀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박진경 중령은 대령으로 진급되었고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남해군민동산에 동상 까지 세워 주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얼마나 비겁했는 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안상학 시인의 "기와 까치 구멍집"은 우리의 심금을 울려 준다. 박진경 대령의 동상을 철거 하고 기와까치구멍집 앞게 문상길 중위의 동상을 세워 주면 어떨까?
온기철의 브런치입니다. 역사를 주제로 한 수필을 쓰고 있습니다. 본직은 의사이고 취미는 골프와 역사 공부입니다. 지루한 역사를 재미있게 이해시키기위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