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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문지기
구봉서 장로 간증 ◇약력:△1926년 평양생△45년 태평양가극단에서 '사흘’만 해주기로 한 악사생활을 인연으로 무대인생 시작△56년 ‘애정파도’로 영화에 데뷔△69년 MBC TV 개국때 선보인 ‘웃으면 복이와요’에 출연 △예능교회 장로△2000년 MBC TV 명예의 전당 헌당 인물로 선정 1)30대 곽규석씨와 만남…끈끈했던 우정 “아니 곽규석 목사가 소천 하다니…” 99년 8월.70년대의 명코미디언이었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목사가 미국 뉴욕 자택에서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친동생처럼 그를 아꼈고 또 목사로는 존경했던 터여서 그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울음을 그치지 않게 했다.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안식처로 갔는데 난 왜 그렇게 슬펐을까.아마 형제같은 우정을 오래 나누었기 때문이었으리라.특히 신앙인으로서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곽목사가 암에 걸린 것을 우리 부부가 제일 먼저 알았다.그는 소천하기 전에 딸꾹질을 자주 했다. “야,너 병이 있는 것 같아.병원에 가서 정밀진단 한번 받아봐.딸꾹질이 그렇게 멈추지 않는데 왜 병원엘 안가니” “형님,걱정마세요.병은 무슨 병이 있겠어요.설교하면서 딸꾹질이 멈추지 않으면 나를 초청한 교회 담임목사님이 내 등을 두들겨 놀라게 해요.그러면 멈춰요” 곽목사는 70년대에 CBS의 ‘다이얼 Y를 돌려라’,TBC의 ‘쇼쇼쇼’ 등에서 활약하다 81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기독교TV 방송국장으로 일했다.그는 3년 뒤 침례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으며 한마음침례교회를 개척했다.그리고 목회자로 사역하다 92년 은퇴해 교민들을 상대로 전도활동을 펼쳤다. 곽목사가 소천한 그해 서울 논현동 차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게 했다.내과원장은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내렸고 본인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다.그러나 그는 그 병원을 나선 뒤 뭔가 심상치 않은 병에 걸렸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다.그래서인지 그는 불광동 어머니 집에서 보름 가까이 쉬며 모자간의 정을 마음껏 나누었다. 곽목사 모친은 올해 96세인데 아직 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하나님 품으로 간 것을 모르고 있다.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고 있다.새해들어 곽목사 부인이 시어머니를 뵈러 서울에 와 있지만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다.아들의 비보를 차마 아직까지 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곽목사의 마지막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서울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뒤 미국으로 돌아가 몸이 갑자기 쇠약해졌다.그 소식을 듣고 국제전화를 했다.한두달만에 그렇게 건강이 악화될 줄 몰랐다.그의 목소리는 쇠잔해 있었다. “형님,날 위해 기도해 주세요” 30대에 우린 만났다.서울 미도파백화점 부근 ‘은성싸롱’이란 클럽에서 한 젊은이가 기차소리,총쏘는 소리 등의 흉내를 정말 잘내 손님을 끌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호기심이 발동해 한번 찾아가봤다.입으로 총쏘는 소리를 내는데 신기할 정도였다.흥행사 관계자들이 나하고 같이 일하도록 주선했지만 곽목사는 단호히 거절했다.혼자서 흥행에 자신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자 우리와 같이 일하겠다고 찾아왔다.그는 약속을 정말 잘 지켰다.그게 마음이 들었다.연예계에서 나와 곽목사만큼 약속을 잘 지킨 사람은 드물 것이다.오죽했으며 구봉서 스케줄은 ‘금스케줄’이라고 했겠는가.그 뒤 그는 내가 서대문으로 이사가면 서대문으로,돈암동으로 이사가면 돈암동으로 이사왔다.우린 정말 형제 이상이었다. 2)뜻밖 추락사고…예비된 그의 음성 바쁜 희극배우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약속한 사회봉사와 전도활동을 소홀히 한 것 같아 죄스럽기만 하다.그래서 몇년 전부터 농어촌 미자립교회 무료 간증집회와 동남아 집회 인도 및 아프리카 우간다 청소년교육 후원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고아원과 재활원 등 사회복지시설 후원도 계속하고 있다. 관절 통증으로 여러 번 수술받은 왼쪽 다리가 최근 다시 심하게 아파 쇠핀 제거수술을 받았다.이로 인해 집회 인도에 차질이 생겼지만 하나님께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역사해주실 줄 믿는다. 특히 우간다 사역은 한국연예인선교단 사무국장인 서영호 집사가 현장을 방문한 뒤 국제기아대책기구에서 파송한 류형렬 선교사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현재 그곳에는 연예인들의 후원으로 청소년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계속 건축되고 있다.우간다를 방문해 현장을 둘러보고 싶지만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못가고 있다.배를 타야 하는 국내 섬지방 집회인도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하지만 류선교사와 그의 부인 이민자 선교사가 사역상황을 그때그때 편지로 상세히 보내와 마치 내가 그곳에서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우리가 보내준 성금으로 1차로 중학교와 기도실을 지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어린이처럼 기뻐했다.새 교실에서 우간다의 미래인 500여 학생이 공부한다고 생각해보라.얼마나 가슴이 설레겠는가. 앞으로도 후배 연예인들과 함께 우간다 사역에 집중하고 싶다.돌이켜보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내 인생을 행복하게 했다.그분과의 만남이 지속되는 한 남은 인생도 아름다울 것으로 확신한다. 하나님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복을 주셨다.신앙선배인 아내에게는 튼실한 믿음과 넉넉한 마음,건강을 주셨다.마흔일곱살이 된 큰아들은 미국에서 한인 방송회사의 보도국장으로 선교에 열심이다.특히 나와 절친했던 곽규석 목사의 아들(미국 지구촌교회 음악전도사)과 음악선교사인 박민씨 등과 함께 사역하고 있어 자랑스럽고 든든하다. 차남과 막내는 대기업에 근무하며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셋째는 서울 을지로1가에서 디노항공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다.아들을 넷 두었는데 모두 집사로 봉직하고 있다.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그러나 주님을 구주로 모시는데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했다.인생의 불혹이라는 40이 넘어서야 달고 오묘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그전에 누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면 성경에 나오는 도마처럼 하나님을 보여달라며 의심했다. 교회가면 무엇보다 몰려드는 잠을 참기 힘들었다.목사님 설교는 자장가였다.찬송가를 4,5절까지 부르는 것도 정말 지루했다.특히 여성도들이 기도하면 남자보다 배가 더 걸려 싫었다.이제 끝나려나 생각하면 또 “원하옵건대…”가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날 영화 ‘광야의 결사대’를 찍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병상에 누워있을 때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의 연로한 목사님이 병문안을 오셨다.그분은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나를 붙잡고 그냥 우셨다.그리고 깁스한 다리에 입을 맞추고 시작한 기도는 그날부터 40일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됐다.처음에는 5분,10분씩 계속되는 그 기도소리가 처음에는 지루하고 귀찮기도 해서 시큰둥하게 대했다. 3)기적적인 완쾌…나도 모르게 “감사” 매일 기도해 주시는 목사님의 정성에 감복됐다. “내가 뭐 대단한 인물도 아닌데 저 노인네가 날마다 와서 날 위해 기도하실까.하나님이 없어도 저분 정성으로 내 다리가 낫겠다”첫 수술을 받은 뒤 40일 만에 다시 엑스레이를 찍었다.그런데 의사가 필름을 들고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그러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 다.“구선생,내가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아무래도 다리를 잘라야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셨다.나 또한 마치 사형선고라도 받은 듯 절망감에 빠져 가슴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그러자 의사가 “진정하세요.어렵겠지만 다시 한번 시도를 해봅시다”라고 말했다.수술에 성공할 확률은 30%밖에 되지 않았다.7시간이나 걸리는 대수술을 받았다. 수술결과를 알기까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그동안 교회신도들이 교대로 드나들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었다.때로는 성가대가 와서 찬송을 불렀다.그들의 정성이 지극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하나님이 계시다면 1차수술에서 성공했어야 했다. 한 달 뒤 엑스레이를 찍었다.이번에도 의사는 필름을 들고 선 채 아무 말이 없었다.겁이 덜컥났다.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봐 어떠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한참 머뭇거리다가 의사가 말했다. “구선생,주님이 도우셨습니다.다리를 안 잘라도 되겠습니다” 그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이불을 뒤집어쓰고 “하나님 아버지,감사합니다”라며 기도했다.이게 나의 첫 기도이다. 당시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누군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어머니는 “봐라.하나님이 목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신거야”라며 나의 손을 꼭 잡았다.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그때 그 순간 뿐이었다. 거의 열 달 가까이 입원해 있다가 퇴원하는 날이 마침 주일이었다.어머니는 싫다는 나를 끌고 교회로 가셨다.목발을 짚고 성전에 들어서니 1000명쯤 되는 신도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성가대는 찬송을 불렀다.마치 내가 예수님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강단에 올라가니 목사님이 신도들에게 인사를 하라며 이렇게 말했다. “저 신도들의 기도로 당신이 나았으니 감사하다는 말씀 한마디 하셔야죠” 시키는대로 했다.“여러분 감사합니다.여러분의 기도 덕분에 제가 나았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나를 쿡 찌르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여러분 덕분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나았다고 해야죠” 다시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실례했습니다.여러분 덕분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덕분이랍니다” 그렇게 무례한 인사를 하고 내려오니 어머니가 마구 화를 내셨다.“그냥 그러고 내려오면 어떡하니.헌금을 한다고 해야지” 나는 몇십만원이면 될 줄 알았다.당시 몇십만원이면 웬만한 전셋방을 얻을 만한 돈이었다.그런데 어머니가 기대한 헌금액은 작은 교회를 하나 지을 만큼 큰 돈이었다.난 너무 놀랐다.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너 지금 누구하고 흥정하니” 할 수 없이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겨 돈을 내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마음 속으로 투덜댔다. “뭘 예수가 고쳐줘,의사가 고쳐주었지.예수가 고쳐줬으면 공짜로 고쳐줘야지,돈 다 받으면서…”그 일이 있고나서 더욱 더 교회를 등한시하게 됐다.그러나 모자지간의 정을 끊을 순 없어 어머니가 교회에 가실 때는 언제나 차로 모셔다 드리곤 했다. 4)갑작스런 양친 작고에 ‘원망’ 그런데 하루는 어머니가 교회에 가면서 내 차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어머니,그러지 마시고 제 차 타고 가세요” “흔해 빠진 게 전차다.전차 타고 갈테다.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네 신세 안 질테니 그리 알아라” 그날 아침도 들지 않고 나가신 어머니는 밤이 늦어서야 눈이 퀭해서 들어오셨다. “어머니,왜 이제 들어오세요.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얼른 진지 드세요” “내일부터는 나 혼자서 밥 먹을란다” “어머니,도대체 왜 그러세요” “에라,이 유다 같은 녀석아” 어머니는 그로부터 석달 뒤에 세상을 뜨셨다.어머니를 잃고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뭐하냐는 생각에 술을 많이 마셨다.더 사실 수 있는 어머니를 데려간 예수님이 원망스러웠다. ‘예수가 도대체 뭐길래 어머니는 살아계실 때 그토록 그에게 가고 싶어 했을까’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면 더욱 화가 치밀어올랐다.어머니의 신앙서적을 모조리 찢어버리기까지 했다.그래도 슬픔은 가시지 않았다.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29일 만에 병상에 누워계시던 아버지도 위독해졌다.그때 무슨 마음에서 그랬을까.임종을 앞둔 아버지께 예수님 을 믿으라고 말씀드렸다. “아버님,예수님을 믿으세요.그래야 천당에 가셔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어요.어버지께서 거기 가 계시면 저도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천당 가겠어요” 아버지가 예수를 믿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시길래 염치를 무릅쓰고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에 가서 목사님께 와달라고 부탁드렸다.그런데 목사님이 오셔서 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기도를 하시는 중에 아버지는 숨을 거두시고 말았다.슬그머니 약이 올랐다. ‘아니,기도를 하는 동안은 살아계셔야지.천당을 가셨는지,가다가 도로 떨어졌는지 알게 뭐야.예수가 없는 게 확실해’ 이같이 철없는 아이처럼 조그만 꼬투리도 물고 늘어지며 한결같이 하나님을 부인했다.나와 예수님의 만남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넉달 뒤에 사업이 망했다.집을 날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빠졌다.후라이보이 곽규석씨는 나보다 먼저 비슷한 처지가 됐다.그의 부인이 낙담해 앓아 눕고 말았다.그런데 어찌어찌 하다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게 됐고 한달 만에 병이 말끔히 치유됐다. 곽씨 부부는 한 동네에 살면서 식구처럼 가깝게 지냈던 내 아내에게 전도를 했고,그들에게 감화된 아내는 본격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기에 이르렀다.그즈음 서울 정동에 있는 MBC 방송국에 녹화를 하기 위해 들어가니 웬 젊은이가 반색을 하며 나를 맞았다.엉겁결에 인사를 받은 나는 누구냐고 물었다. “교회 전도사인 하용조라고 합니다.예수를 믿으십시오” “예끼 여보쇼.그런 소리 하려거든 얼른 가시오” 그는 허리를 굽히곤 돌아가는 듯했다.그런데 녹화를 끝내고 나오니 그가 문간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그는 끈질기게 예수를 믿으라고 권했고 나는 나대로 계속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아무튼 예수 믿는 사람의 끈기는 대단한 것 같다. 그후 어느날,일이 일찍 끝나서 집에 들어갔는데 현관에 처음보는 신발들이 여러 켤레 놓여 있었다.반사적으로 빚쟁이가 왔다고 생각하며 주춤주춤하며 마루로 올라서려는데 안방에서 찬송소리가 흘러나왔다.곽씨 부부와 아내,그리고 바로 하전도사가 모여 성경공부를 하고 있었다.공부를 시작한지 벌써 다섯달이 넘었다고 했다.나는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5)병 재발…그것은 ‘사랑의 매’였다 집에서 성경공부하는 것이 보기 싫어 뛰쳐나올 정도로 완악했던 나를 주님은 사랑하셨다.‘사랑의 매’를 드신 것이다.그것은 두번이나 수술을 해서 간신히 걷게된 다리가 재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병원에 찾아가도 수술을 다시 하자거나 진통제주사를 놓아주는 것이 전부였다. 임시방편인 진통제주사도 점점 횟수가 늘어나니 만성이 됐고 결국 스케줄을 최대한 줄이며 집에 누워있는 신세가 되었다.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내 다리를 고쳐주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나 거의 엉터리였다. 이렇게 집에 누워있는 어느 겨울날, 하용조 전도사가 인도하는 성경공부팀이 안방에 들어와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었다.그래서 나는 거실로 피해버렸다.당시 돈암동 우리집은 저택이라고 할 만큼 컸다.사용하는 기름이 엄청났기에 방만 난방을 해 거실이 너무 추웠다.그러자 내 방을 두고 내가 왜 거실에서 떨어야 하는지 은근히 화가 났다.안방문을 다시 열고 들어갔다. “미안하지만 내가 좀 누워야겠소” “네 그러시죠.괜찮습니다” 사실 한쪽에서 은혜롭게 공부하는데 누워 있으려니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조금 지나니 다시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기도하면서 방바닥을 치는데 머리가 울렸고 시끄러워 잘 수가 없었다,그러나 여기서 일어나 앉으면 내가 항복하는 것이 아닌가.이어 성경공부가 시작됐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만 먹으며 예수님을 증거했습니다.헐벗고 굶주리면서 말입니다” 속이 뒤틀려 있던 나는 이 말을 받아 누운 채로 이렇게 말해 버렸다. “쳇,메뚜기와 석청이라.그야말로 고단백 영양식에 로열젤리만 자셨는데 뭐가 헐벗고 굶주린거야” 내 말을 들은 성경공부팀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잔다고 누워있으면서 설교는 다 들은 셈이 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심통을 내던 나는 다리고통이 더 심해져 강한 진통제를 쓰지 않으면 안됐다.아내는 안수기도를 받자고 했다.나는 이말에 들은 척도 안했으나 나 모르게 부탁을 한 것 같았다.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성경공부 시간에 기도를 받는데 며칠간 잠을 못잔 내가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꿈 속에서 나는 찬송가 405장을 듣고 있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찬양 가운데 안개가 자욱하고 한 분이 내게로 걸어오고 있었다.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더 가까이 오길 기다렸는데 그 사람은 내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그런데 그 표정과 미소가 그렇게 편안하고 은혜로울 수 없었다.나는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기도가 끝나는 것과 때를 같이해 잠이 깼는데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베개가 흠뻑 젖어 있었다. 기적은 이 일이 있은 사흘 뒤 정확히 일어났다.늘 망치로 때리던 것 같던 아픔이 점차 누그러지는 것 같았는데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주님께 가까이 가길 거부했던 내게 분명한 사건을 만들어 주신 것이다.그러나 나는 완전히 함락된 것이 아니었다.단지 기도로 다리가 나은 것 같아 성경공부에는 합류했으나 이것은 그렇게 안하면 다리가 다시 아플 수 있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내가 마음문을 열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
첫댓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하려면 더큰 시련이 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