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선의 수필집 ‘푸른 외출’을 읽고 / 이동민
(수필계 원로이신 이동민 선생이 대구문인협회 까페에 올린 서평을 전재하였습니다.)
나는 요즘 ‘수필 집담회’ 모임에 열심히 찾아간다. 우리 수필이 너무 구태의연한 형태로 경직되어 있어서 독자로부터 멀어졌다는 자성에서 시작한 공부 모임이 ‘수필 집담회’이다.
벌써 여러 번 모여서 공부를 하였지만 수필이 나아갈 뚜렷한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는 막연히 ‘재미있게 써야 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임에서는 재미보다 글이 주는 ‘의미’를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많았다.
우리에게 재미를 주려면 심리적으로 재미(쾌-快)를 느낄 수 있는 형식에 맞게 써야 한다. 왜냐면 인간 심리도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야기’이다. 수필도 ‘이야기 형식’으로 만들자 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소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 구조이다. 그렇다면 수필과 소설의 차이가 나타나는 수필 형식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 길을 찾지 못하여 헤메고 있다. 수필과 소설의 차이를 드러내면서도 재미를 주는 수필 형식을 찾는 것은 오늘의 우리 수필가들이 떠안아야 할 짐이고 숙제이다.
이야기 형식은 문자가 태어나기 이전의 구전문학(음성문학-운문)부터 기본 형식이다. 수필은 특성상 이야기로 만들기 어려운 형식이라고 말한다. 단편적인 소재를 가지고 작가의 사유로 풀어내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려고 하다보면 허구가 되기 싶기 때문이다. 이야기 구조가 구전문학에서 오늘의 문자 문학에 이르기까지 긴 역사성을 지닌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재미있어 하고, 좋아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 수필화한 소설이 나타나는 것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소설의 긴 이야기를 사람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성석제는 짧은소설이라는 형식의 글로 단편집을 냈다. 소설 한 편의 길이가 3-8페이지 였다. 읽어보니 소설이라기보다는 수필에 가까웠다. 1980년 대에 영국 소설가 줄리안 반스는 ‘플로벨의 앵무새’라는 소설을 발표하면서 ‘에세이적 소설’이라고 했다. 이 소설은 플로벨의 소설에 나오는 ‘앵무새’를 두고 작가의 사유세계를 펼쳐 놓았다. 에세이라는 형식으로 쓴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여러 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프롤베르의 앵무새는 독립된 하나의 소설이다.)
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쓴 밀란 쿤데라의 최근 소설 ‘느림’은 에세이 형식으로 쓴 여러 글들이 모여 전체의 소설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소설 형식으로 쓴 수필을 쓰면 어떨가?
수필은 기본적으로 산문체이다. 산문은 구전문학의 운문체에서 문자가 발명됨으로 나타난다. 문자로 기록함으로 문장의 길이가 길어지고 복잡해진다. 긴 문장에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법칙성과 규범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논리성이고 합리성이다. 산문체 문장의 특성은 논리성이다. 문장이든, 단락이든 ‘왜’에 대한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산문체의 특성이다. 문장이나 단락 자체가 왜에 대한 대답으로 이어지면 구조상으로 이야기이다. 따라서 산문에서는 운문과 다르게 문장의 문법적 구조를 강조한다. 문법적 구조이어야 논리적으로 내용 전달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산문 형식은 운명적으로 이야기 구조가 된다.
수필 작품 하나를 보면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어 보자.
김귀선 수필가는 ‘푸른 귀향’이라는 수필집(그의 말대로라면 창작적 에세이집)을 보내왔다. 책을 읽으면서, ‘이건 소설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 묘사를 바로 곁에서 보듯이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러니까 더 재미가 있었다. 수필에 도입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작품은 아무리 수필로 볼래도 소설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은 작품도 있었다. 그러나 수필을 소설 형식으로, 또는 이야기 구조로 써 보자는 것이 평소의 나의 생각이었으므로 그의 작품을 여기에 옮겨보기로 하겠다.
내가 강조하는 재미란 것이 관념적인 표현보다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표현하는 것에서 더 많이 느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
그의 작품집에서 이 작품이 가장 수필적이고, 또 우리도 이렇게 써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사견이지만, 대구 수필 문단이 구태의연한 작품이지만 문장력이 아름답다는 이유로 좋은 작가로 평하고 문학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한 번은 숙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시도, 문제성이 있는 작품에 관심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구름
김귀선
병실을 나온 아버님이 나무 그늘 벤치에 풀썩 앉았다. 되는대로 몸을 부려놓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본다. 아버님을 따라 나온 나도 옆 벤치에 앉는다. 늦여름 하늘에는 둥그스름함 구름 한덩이가 소나무 위에 떠 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아버님의 모습은 환했다.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내내 우울해하셨던 아버님이다. 당신에게 언제 그런 우울한 일이 있었느냐는 듯 오늘은 이런저런 농담까지 하시며 호탕하게 웃기까지 하셨다. 무엇보다 고모님에게 화해를 하러 가는 길이었으니 마음이 가벼우신 듯했다.
오 년 전 아버님은 사소한 대화 끝에 고모님과 비틀어졌다. 매듭을 풀어주려 주위에서 몇 번을 시도했으나 아버님은 자신의 누님을 완강히 피했다.
“자꾸 둘이 붙일라 카지 마라. 내한테 그렇게 야멸차게 말하는 사람이 무신 누님이고.”
다시는 안 볼 듯 화해의 말을 끄집어내지도 못하게 했다. 고모님의 건강이 안 좋으시다는 말을 듣고도, 큰 동생을 한 번 보고 싶다는 말을 고모님의 간절한 마음을 전해 듣고도 변함 없었다. 쇠심줄 같던 그 마음이 오늘에야 조금 여러졌나 보다.
하지만, 요양원 병실을 들어선 아버님과 난 망부석처럼 서고 말았다. 공간에 맞춰 방향을 달리한 여섯 개의 침대에는 숨을 쉬기에 힘겨운 할머니들이 누워 계셨ᄃᆞ. 낯선 인기척에도 반응은커녕 살아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얇은 이불이 주기적으로 떨리는 것을 보고서야 안도했다. 무거운 시간이 흘렀다. 그것은 이승과의 영원한 이별을 앞두고 모든 미련을 끊게 해달라는 할머니들의 엄숙한 기도 의식 같았다.
가라앉은 이 공기 속에 그토록 활달하신 고모님이 계신다는 것일까. 병실을 잘못 찾아온 것이길 바라며 음료수 박스를 든 체 침대마다 살폈다. 환자가 돌아누운 방향으로 아버님도 몸을 기울이며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고모님은 안 계셨다. 길에서 출발할 때 병실을 확인 했는데 그 사이 다른 곳으로 옮기기라도 했단 말인가. 마지막으로 침대의 이름표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어찌 이럴 수가
맨 처음 본 입구 쪽의 환자가 고모님이실 줄이야. 몇 달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물기를 줄이고도 떨어지지 못한 나뭇잎처럼 시들대로 시든 처량한 모습이었다. 우묵하게 들어간 두 볼은 맙붙을 듯하고 힘없이 놓인 팔다리는 뼈를 그저 이리저리 걸쳐 놓은 듯했다. 큰소리만 질러도 으스러질 것 같았다. 어쩌다 빤히 처다보실 때는 우리를 아시는 듯도 했다. 다시 희멀건 해진 눈동자는 나사 빠진 바퀴처럼 제멋대로 굴렀다.
아버님은 말이 없으셨다. 입담 좋으신 당신도 할 말을 잃으셨다. 고모님의 모습만 눈으로 흝어셨다. 흘러내리지도 않는 안경을 자주 만지면서 연달아 한숨을 쉬셨다. 그러다 조심스레 고모님의 손을 한 번 잡아보셨다. 마른 비늘 같은 손을 잡자마자 못 만질 것을 만진 듯 곧바로 슬며시 놓았다.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한숨만 병실 바닥에 쌓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님요, 저 왔심더. 예?”
절규 섞인 아버님의 목소리가 병실 바닥에 내동댕이처녔다. 연달아 고모님을 불러보지만, 답답한 제 가슴을 두드리듯 병실만 왕왕거릴 뿐이다. 통곡한들 흘러가 버린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까. 아무리 고함쳐 불러도 반가이 맞아줄 줄 알았던 당신의 누님은 목석처럼 누워있으니 보다 못한 아버님을 병실을 훌쩍 나완 것이었다.
아버님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있다. 아버님의 시선 따라 하늘을 올려다 본다. 좀 전 소나무 위 둥그스럼하게 떠 있던 구름이 모양도 없이 흐트러진 체 느티나무 위에 떠있다. 수많은 말을 아래로 보내며 병원 건물 뒤쪽으로 아주 천천히 넘어가고 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가 느낀 것은 병실을 방문한 내용이 너무나 생생하게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누님과 시아버님의 관계가 이야기가 되어서 펼쳐진다. 이야기 구조는 근본적으로 기승전결이다. 누님과 갈등, 그리고 서로 외면하고 살아온 시간이 전개가 되고, 입원과병실 방문이 해결을 위한 전환이 된다. 죽음이라는 문제를 우리 앞에 던져놓으면서 결론을 내린다.
구조상으로는 기승전결이 뚜렷한 이야기 구조이다. 때문에 재미가 있다.
물론 이야기를 서술하는 문장력이 돋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김귀선의 수필집에 실린 다른 글은 소설의 구조를 완전히 갖추었느냐에는 의문이 있지만 소설 형식의 문장이었다. 위의 수필은 현장의 생생한 표현, 기승전결의 형식 등이 소설 형식이라고도(성석재의 짧은 소설에서 보면) 하겠지만, 이것은 분명히 수필이다. 이것도 나의 개인 의견이지만 잘쓴 수필이다.
김귀선씨와 이런 말을 나누었다. 목성균과 김귀선의 수필을 소설 형식의 수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목성균은 짙은 서정성으로 수필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했고, 김귀선의 작품은 우리의 아픈 현실을 보여줌으로 서정성보다는 불편함을 준다. 라고 했다.
어쨌거나 대구 수필 문단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을 좀 더 높이 평가해주고, 새로운 시도를 한 글이 발표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올린다.
첫댓글 축하드려요 수선화 선생님. 소리 한 자락 내이소!!!
지화자 좋다
김귀선샘 보내주신 채 읽으며
이번여름 잘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