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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역사교사모임의 처음읽는 미국사(2015.2.1.)
인종과 문화의 샐러드, 미국
역사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사의 주요 장면과 인물들을 고스란히 살려 냄으로써 더독자들의 풍부한 감성과 진지한 탐구를 불러일으키는 흥미진진한 역사 체험의 한 마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국역사교사모임
프롤로그 다양성 속에 보편성을 가진 나라, 미국을 만나다
미국을 만든 이들은 토착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민자와 그 후손들이다. 뉴욕 엘리스 섬에는 1892년부터 1954년까지 세계 여러 나라의 이민자가 미국으로 입국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첫 번째 관문, 이민국이 있었다. 미국은 출발부터 신분이나 계급이 존재하지 않았다.
1장 아메리카의 원래 주인
인디언이라고 불리는 아시아계 원주민들은 수만 년 전부터 아메리카 땅에 살고 있었다. 일부는 남아메리카로 발길을 돌려 마야, 아스텍, 잉카 등의 문명을 꽃피우기도 했다.
1 아메리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다
매머드 떼를 쫓아 아메리카 땅에 도착하다
빙하기였던 약 3만 년~1만5천년 전에 시베리아에 살고 있던 아시아인 사냥꾼들이 털북숭이 코끼리 매머드 떼를 쫓아 얼어붙은 베링해 땅을 건너 알래스카로 넘어갔다.
아메리카 땅에 정착하다
그 지역에 맞는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지혜롭게 살아가다
자연에 위대한 강(미시시피), 위대한 호수(미시간), 아름다운 땅(아이오와)이라는 이름을 붙여 경외심을 표했다.
2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다
추운 북쪽 지방에 살던 사람들
사냥감이 많았던 알래스카에는 큰 규모의 마을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여러 가정이 모여 이룬 씨족을 단위로 생활했다.
북서태평양 부근에 살던 사람들
자연스럽게 재산의 많고 적음의 차이가 뚜렷해졌고, 계급이 생겨났다.
서쪽 땅에 살던 사람들
지금의 워싱턴, 오리건 주, 캘리포니아 해안 지방, 네바다 주와 유타 주 대분지 등의 서쪽 지방은 기후는 온화하나 비교적 건조한 지역이다.
대평원에 살던 사람들
대평원에 살던 사람들은 오랫동안 들소 떼를 쫓아다니며 살았다. 그들은 삶을 온통 들소에게 의지했다.
티피-대평원의 원주민들은 들소 떼를 따라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도록 막대 기둥에 들소 가죽을 덮어씌워 만든 원추형의 이동식 가옥이다. 정면의 나무 판으로 닫아 둔 틈이 출입구다.
남서부 지역에 살던 사람들
오늘날의 애리조나, 유타, 콜로라도, 뉴멕시코 등 대평원 서쪽 지역 역시 비교적 건조한 땅이었다.
동부 지역에 살던 사람들
오대호 연안에서 미주리 주, 그리고 대서양 연안에 이르는 동부 지역은 식량 자원이 가장 풍부한 곳이었다.
3 북아메리카에 인디언 문화가 꽃피다
클로비스 석기
1932년 뉴멕시코 클로비스 근처에서 발견된 유물이다. 대략 기원전 1만 년도 더 된 시기부터 만들어진 유물ㄹ 추정되며, 발견된 지명을 따서 클로비스 석기라고 부른다.
오늘날, 애리조나, 뉴멕시코, 콜로라도 남부, 유타 등의 남서부 지역은 아주 오래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곳이다.
코치스 문화와 모고욘 문화
미국 남서부 지역 원주민 문화의 기초가 되었다. 주로 사냥을 통해 먹을 것을 얻던 이전 시기에서 농사를 짓고 토기를 만들며 살던 후기로 옮겨 가던 때였다.
모교욘 문화는 코치스 문화에 다양한 문화의 영향이 더해져서 탄생했다. 모교욘인들은 도기를 만들어 썼는데, 남쪽의 멕시코로부터 그 기술을 전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진흙을 빚어 햇볕에 말린 다음 불에 구워서 만들었다.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200여 년부터 기원 후 13세기까지로 긴 시간 동안 다양한 발전 단계를 보였다.
카호키아 인디언 유적지
일리노이 주 남서부 미시시피 강변에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북아메리카 최대의 원주민 문화유산, 카호키아 유적이 있다. 카호키아는 대략 700~1400년 사이에 형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17세기가지 1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여 살던 도시다. 이곳에는 지금도 주거나 묘소로 사용하던 터인 흙으로 만든 마운드 120여 개가 남아 있다. 마운드는 보통 흙이나 돌, 콘크리트 등으로 쌓은 무덤같이 생긴 둔덕을 말하는데, 카호키아 마운드는 흙으로 쌓아 올렸다.
바위 아래 절벽에 세워진 마을
대략 6세기에서 12세기경에 만들어졌다. 마을마다 조상을 향해 제사를 드리는 키바라는 방이 두세 개씩 있었다. 마을 행사를 열 때면 사람들은 키바에 모여 연기를 피워서 몸을 깨끗하게 했다. 1300년경 마을 사람들은 절벽 마을을 버리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길을 나섰다.
메사베르데 국립공원 절벽 궁전과 키바: 암벽 위에 세워진 마을. 200여 개의 방이 있으며 약 250여명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제사를 드리는 공간인 키바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중요한 일을 의논하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사랑방 구실도 했다.
푸에블로인들의 아파트
1200년경에 지은 푸에블로인의 아파트. 푸에블로인의 아파트는 창이나 출입문을 작게 만들어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다. 계단을 만드는 대신 위층을 오르내릴 때도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사다리를 이용해 오르내렸다.
멕시코 이남 땅에 꽃핀 고대 문명
13세기 멕시코 중서부 지역을 차지했던 아스텍 왕국은 살아 있는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종교의식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5~16세기 페루 안데스 산지에는 잉카 제국이 건설되었다. 그들은 안데스의 높은 산지를 깎아 계단식 경작지를 만들고 논밭에 물을 대는 관개 시설을 갖추어 농사를 지었다.
2장 아메리카에 도착한 유럽인
유럽인들은 다양한 사연을 안고 아메리카 땅에 발을 디뎠고, 자신들의 이상에 따라 마을과 도시, 그리고 나라를 만들었다. 그러난 유럽인들의 이주는 원주민들에게는 재앙의 시작을 의미했다. 유럽인이 원주민을 내쫓고 자신들의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 유럽인들은 동부 해안 지대를 따라 13개의 나라를 세웠다.
1 제임스타운에 최초의 식민지를 세우다
탐험의 선구자들
가장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한유럽인은 약 1000여 년 전 노르웨이인 붉은 머리 에리크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것보다 무려 500여년이나 앞서 일어난 일이다.
1492년 8월, 에스파냐 팔로스 항을 출발한 콜럼버스 일행은 거의 두 달이 지나서야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상륙했다. 그들은 이곳을 인도라고 생각했다.
피렌체 출신의 상인인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남아메리카 해안 여기저기를 몇차례나 탐험했다. 그 뒤 그는 이곳이 인도가 아닌 새로운 대륙이라고 주장했고, 이 말을 들은 한 지도 제작자가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마젤란 일행이 대서양을 지난 남아메리카 남쪽 바다를 돈 다음, 태평양을 건너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제로 증명했다. 이것이 세계 최초의 세계 일주였다.
사라진 식민지 로어노크
1585년 로어노크 섬 정착에 실패했던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한 영국인이 그린 데생을 바탕으로 테오도르 드브리가 1590년에 영국에서 발표한 판화이다. 이주민들을 태운 작은 유럽배들이 다가가고 있는 곳이 로어노크 섬이다. 난파된 채 바다 멀리 밀려난 큰 배들을 통해 항해의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1583년 영국 길버트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새로 발견할 땅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지원받고 식민지를 건설할 적당한 장소를 찾아 탐험대를 이끌고 나섰다.
이때 그들이 도착한 지역에는 엘리자베스스 여왕의 별명(처녀 여왕)을 따서 버지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힘겨운 출발
1607년 영국 왕 제임스 1세에게서 신대륙의 식민지 건설에 관한 특허장을 받은 런던 회사가 104명의 영국인 남성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시켰다. 일찍이 탐험가 월터 롤리가 도착해서 버지니아라고 이름 붙였던 플로리다 북쪽의 체서피크 만 근처였다.
제임스타운의 실험
제임스타운은 영국인 이주민이 아메리카 땅에 건설한 최초의 식민지였다. 이들은 남아메리카에 자리잡은 에스파냐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제임스 강 하구로부터 약 50킬로미터를 거슬러 올라가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들었다.
2 이주민들, 저마다의 도시를 만들다
필그림 파더스, 메이플라워호에 몸을 싣고
1620년9월, 메이플라워호가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희망의 닻을 올리고 출발한 지 50여 일, 여전히 망망대해만 펼쳐질 뿐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는 새로운 땅은 사방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새로운 땅에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를 건설하겠다는 꿈을 안고 배에 올랐다. 미국인들은 이 필그림 파더스를 자랑스러운 선조로 여기고 있다.
청교도: 가톨릭과 비슷한 영국 국교회에 반항해서 생긴 개신교의 한 교파. 이들은 진정한 프로테스탄트가 되기 위해서는 칼뱅주의의 교리로 정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초의 추수감사절
청교도가 처음 도착한 곳은 북쪽의 매사추세츠 지방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항구 이름을 따서 그곳을 플리머스라고 불렀다.
메이플라워 서약: 메이플라워호에 타고 있던 성인 남자들은 배에서 내리기 전, 새로운 땅에서 자치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협약인 메이플라워 서약에 서명했다. 메이플라워 서약은 아메리카 최초의 자치헌법으로 여겨진다.
첫 추수 감사절: 아메리카로 건너온 필그림 파더스는 고생 끝에 한 해 농작물을 수확한다. 그동안 친절을 베풀어 준 원주민을 초대해 새로운 땅에서 얻은 결실을 함께 나눴다. 추수 감사절은 여기서 유래했다.
해마다 11월 넷째 주 목요일의 추수감사절이면, 미국에서는 저마다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날 미국인들의 식탁에는 지금도 변함없이 칠면조 요리가 오른다.
청교도들의 매세추세츠 식민지 건설
필그림 파더스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처음 새로운 땅에 도착한 지 20여 년 만에 매사추세츠는 행정을 책임지는 지사와 의회를 갖춘 자치정부의 모습을 갖추었다. 뉴잉글랜드 식민지는 종교의 자유를 찾아 떠나온 청교도들이 다른 사람의 종교적 자유는 인정하지 않는 모순을 보이기도 했던 철저한 청교도 사회였다.
우애와 평화의 도시,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와 정치적 권리가 주어지는 평화의 땅, 펜실베이니아는 윌리엄 펜의 거룩한 실험으로 건설되었다.
아버지 펜의 이름을 딴 펜의 숲이 있는 지방이라는 뜻을 지닌 펜실베이니아는 이후 점차 번성했다. 온화한 기후, 비옥한 토양에다 지리적으로도 초기 아메리카 식민지의 중심이었다.
뉴암스테르담에서 뉴욕으로
오늘날 뉴욕의 맨해튼과 허드슨강 유역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은 네덜란드인이었다. 1609년 헨리 허드슨이 이곳에 도착한 이래 강은 그의 이름을 따서 허드슨 강이라고 불렀고, 이곳의 소유권은 네덜란드에 있음을 선언했다. 맨해튼 일대를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렀다. 뉴잉글랜드에 인구가 늘어나자 새로운 토지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던 영국인들은 이 풍요로운 도시에 눈길을 돌렸다. 두 나라 사이에 짧은 전쟁이 일어난 뒤 뉴암스테르담은 영국이 차지하게 되었다. 영국 왕 찰스 2세는 이 식민지를 동생인 요크공에서 선물로 주었다. 이후 뉴암스테르담은 요크공의 이름을 따서 뉴욕이라고 불렀다.
3 원주민과 이주민이 충돌하다
필립 왕의 전쟁
17세기 뉴잉글랜드 지방의 영국계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에 벌어졌던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다. 필립 왕(메타콤)의 전쟁을 끝으로 자신들의 땅을 지키기 위한 원주민들의 대규모 저항은 사실상 끝이 났다
추장 메타콤이 유럽식 복장과 관습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영국인들은 그를 필립왕이라고 불렀다.
베이컨의 반란
베이컨의 반란이 일어난 뒤 새로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원주민들을 내쫓은 정책은 더 적극적으로 펼쳐졌다.
13개의 영국 식민지
초기 영국인 이주민들에 의해 건설된 대서양 연안의 13개 식민지는 정착지의 환경이나 정착민들의 부류에 따라 생활 모습이 조금씩 달랐다.
백인과 원주민의 비극적인 역사의 상징, 포카혼타스
포우하탄 인디언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는 존 스미스등 백인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착한 원주민의 표상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3장 독립혁명과 미국의 탄생
식민지인들은 드디어 식민지 독립의 깃발을 들고 전쟁을 시작했다. 세계 최강 영국을 상대로 한 절대적으로 불리한, 이길 가능성이 없는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승리했다. 미국이 탄생한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근대적인 의미의 민주 공화국이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1 아메리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싹트다
교역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던 프랑스인
미시시피 강과 그 일대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국왕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이 지역을 루이지애나라고 불렀다. 이들이 건설한 뉴올리언스는 다른 대서양 연안의 도시 못지 않은 대도시로 성장했다. 이처럼 프랑스가 미국 서부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을 동쪽 대서양 해안에서부터 점점 정착지를 확대해 가고 있던 영국이 달가워 할 리가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서로 으르렁거리며 수시로 전쟁을 치러왔던 전통적인 라이벌, 영국과 프랑스, 북아메리카를 둘러싼 두 나라의 대결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결
1760년 몬트리올에서 프랑스 군대가 영국군에 공식적으로 항복하면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1763년 파리강화회담이 열려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한 대가로 서인도 제도의 섬들, 인도 및 캐나다에 있는 대부분의 식민지, 미시시피 강 동쪽의 프랑스 영토 대부분을 영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아메리카도 대영 제국의 일부
전쟁으로 지친 영국 정부가 원주민들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식민지인들이 더 이상 서쪽으로 진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영국의회는 식민지에 관세를 비롯한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우리는 아메리카인
하버드대학, 예일대학, 프린스턴대학 등의 이름 있는 대학에서 수많은 아메리카인이 배출되었다. 영국과는 다른 독립된 하나의 새로운 세계가 아메리카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2 독립의 길로 나아가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
설탕법, 인지세법, 타운센드 법 제정 -식민지의 저항으로 인지세법 폐지
영국정부는 저항하는 식민지 의회를 해산
보스턴 학살 사건이 있은 후 타운센드 법(영국으로부터 수입하는 유리, 종이, 잉크, 차 등에 관세를 부과하고, 그 수입의 일부로 식민지 총독과 관리들의 월급을 지불한다) 폐지
차 세법-영국 정부가 파산 직전의 동인도 회사를 구하려고 식민지 안의 차 판매에 대한 독점권을 동인도 회사가 갖도록 한 조치였다.
보스턴 학살사건: 1770년 3월 5일 보스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과 식민지인이 충돌한 끝에 영국군이 무장하지 않은 군중을 향해 총을 쏴 다섯명의 식민지인이 사망한 사건. 독립을 준비하던 이들은 이를 보스턴 학살이라 부르며 사람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보스턴 차 사건
1773년12월16일 저녁 국왕과 영국 의회, 영국 정부, 동인도 회사를 규탄하는 집회를 가진 후 파티를 즐기던 청년 수십 명이 인디언으로 변장하고 보스턴 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배로 몰려갔다. 미국 독립 혁명의 신호탄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774년9월 필라델피아에서 각 식민지 대표 55인이 참석한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이 대표들은 기존 식민지 의회의 대표들이 아니라 식민지인들이 자발적으로 뽑은 사람들이었다. 존 애덤스(제2대 대통령), 패트릭 헨리(버지니아 주 주지사), 조지 워싱턴(초대 대통령), 새뮤얼 애덤스(매사추세츠 주 주지사), 존 제이(초대 연방 대법원장) 등이 그들이다.
전 세계에 울린 한 발의 총성
1774년10월, 콩코드에서 매세추세츠 식민지 협의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식민지인들은 스스로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주민 각자가 무장할 것을 결의했다.
1분 대기조라는 민병대가 창설되었다.
렉싱턴 전투: 콩코드에 있는 식민지 민병대의 화약고를 습격하기 위해 출동한 영국군은 렉싱턴에서 민병대와 마주쳤다. 민병대는 전령 폴 리비어 등의 경보로 영국군의 출현을 이미 알고 있었다. 렉싱턴에서 울린 총성은 독립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독립을 선포하다
1775년 5월10일 필라델피아에서 제2차 대륙회의가 소집되었다.
1776년 펜실베이니아가 독립의 물고를 텄다. 가장 먼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주 정부를 수립했다. 나머지 대부분의 식민지가 뒤를 이었다.
미국 독립선언서: 천부인권, 인민의 저항권, 평등 등 민주주의의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 최초의 문서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했다.
1776년7월4일 식민지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으로서 아메리카의 독립을 만천하에 선언했다. 이날을 기려 미국은 해마다 7월4일을 독립기념일로 축하하고 있다. 독립선언서는 프랑스 인권선언서와 함께 근대 민주주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서로 평가받는다.
3 전쟁 그리고 독립을 쟁취하다
크리스마스 날 밤의 승리
크리스마스 날 밤 워싱턴군은 기습작전을 펼쳤다. 영국군 사령부를 갑자기 공격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 식민지군을 지원하다
사라토 전투에서의 승리가 프랑스 정부를 움직였다. 식민지군을 지원하면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메리카를 공식적인 주권 국가로 인정한다. 두 나라는 아메리카가 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 1778년 식민지군을 은밀히 지원하던 프랑스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영국과 경쟁관계에 있던 에스파냐와 네널란드도 식민지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하다
1781년10월 콘윌리스 장군은 마침내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연합군의 대승이었다.
1783년 파리에서 열린 평화 회담에서 영국과 미국 대표들의 파리조약에 서명함으로써 아메리카인들은 대영제국의 구성원이 아닌 새로운 아메리카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제 아메리카인들 앞에서는 자신들의 정부를 세워야 하는 새로운 역사적 과제가 놓여 있었다.
4 미국을 건설하다
최초의 민주 공화국이 아메리카 땅에 세워지다
군주가 없는 나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 이런 민주 공화국은 이상사회를 꿈꾸던 사상가들의 주장에서나 등장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이제 그 이상이 현실이 되었다. 최초의 민주 공화국! 그래서 미국의 탄생은 영국으로부터의 단순한 독립이 아니라 혁명이라고 불린다.
독립된 주 정부의 연방, 미국
연방 정부 의회는 상원과 하원의 양원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이때 상원은 큰 주가 작은 주에 양보해서 인구수에 관계없이 모든 주에 똑같이 2개의 의석을, 하원은 작은 주가 큰 주에 양보해서 인구 비례로 의석수를 나누기로 정한 것이다.
노예는 세금을 낼 때나 대표 수를 정할 때 모두 자유인의 3/5로 계산하기로 정했다.
권력의 분산, 견제와 균형의 원리
견제와 균형의 원리에 바탕해서 권력을 분산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균형을 이루도록 하는 것, 이것이 미국 정치 제도의 기본 원칙이었다.
하원은 국민들에 의해 직접 선출된 대표자들로 주당 의원 의석수는 인구비례에 따라 정해진다. 상원의원은 인구수에 상관없이 각 주마다 동등하게 2명씩을 선출한다. 대통령은 직접 뽑는 것이 아니라 각주 하원.상원의원을 합친 수만큼의 선거인들이 선출한다.
헌법 비준을 위한 진통
1789년 거행된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취임식- 1776년7월4일 미국이 독립을 선언한 날로부터 12년이나 흐른 뒤였다.
연방과 주 사이의 균형 맞추기, 미 대통령 선거 제도
미국에서는 일단 각 당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면 국민이 대통령 선거인단을 뽑는다. 각주는 인구 비례에 따라 적게는 3석, 많게는 55석까지 선거인단 수를 배정받는다. 주별 선거인단 수는 인구 비례와 상관없이 모든 주에 똑같이 주어지는 2명의 상원의원 의석수에다, 인구비례에 따른 하원의원수를 합한 것이다. 연방정부는 선거인단의 선출 방식은 각 주의 생각과 판단에 맡겼다.
4장 넓어지는 미국
1 연방을 둘러싸고 파당이 형성되다
민주공화파와 연방파로 나뉘다
해밀턴 측이 귀족적이고 부패한 정부를 만들려고 한다며 무리를 지어 스스로를 민주공화파라 불렀다. 그런가 하면 해밀턴과 그 무리들은 제퍼슨 측이 연방정부를 파괴하려 한다고 비난하며 스스로를 연방파라고 불렀다.
워싱턴에 수도를 정하다
워싱턴 컬럼비아 특별구(워싱턴 D.C)-1800년 수도 워싱턴은 인구 3200명에 불과한 황량하고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연방은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1796년, 초대 대통령 워싱턴은 파당의 대립이 미국의 단결을 해치지 않기를 바라는 감동적인 고별사를 남기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2 미국이 점점 커지다
두 배로 넓어진 미국
1800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파인 제퍼슨이 미국의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미국 땅을 크게 넓혔다는 점이다.
나폴레옹을 방문한 미국의 대표단이 뉴올리언스를 팔라며 흥정을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차라리 루이지애나땅 전부를 사는 건 어떻소?라고 제안했다. 그 넓은 땅은 1500만 달러에 협상 -한반도의 열 배나 되는 넓은 땅 루이지애나는 이제 미국 땅이 되었다.
다시 영국과 전쟁, 결속력이 높아진 미국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캐나다를 공격했다. 영국군의 공격을 받아 불에 그슬렸던 대통령 관저는 하얀 페인트를 칠해 백악관으로 거듭났다.
아메리카 전체를 미국의 영향권으로
1823년 먼로 독트린 발표: 아메리카는 아메리카인들이 알아서 할 테니 유럽은 끼어들지 말라는 뜻이었다,
3 대중 민주주의 시대가 열리다
서민 대통령 잭슨의 당선
1828년 앤드류 잭슨이 현직 대통령이던 존 퀸시애덤스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첫 서민출신 대통령으로 사우스캐롤라이나 개척지 출신이었는데, 잭슨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고, 어머니마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그는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하지만 갖은 고생 끝에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다.
대중 민주주의의 시작
1828년경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제외한 모든 주가 주민 투표로 대통령선거인단을 선출하게 되었다.
두 정당의 출현
휘그당: 앤드류 잭슨의 정책에 반대하여 조직되었다. 상공업 세력을 기반으로 왕정에 반대한 영국 휘그당과 정치적으로 유사하다.
잭슨 대통령 재임 기간에 일어난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미국 내에서 정당이 당연하고 민주적인 정치 과정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4 인디언, 서부로 쫓겨나다
눈물의 길
미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발전했던 서민 대통령 앤드류 잭슨 시대는 원주민들에게는 고통과 눈물, 추방의 시대였다.
백인들은 더 넓고 기름진 땅을 찾아 서부로 서부로 향했다. 그 땅은 수천 년, 수백 년 동안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들의 땅이었다. 1830년, 잭슨 정부는 인디언 추방법을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인디언 보호 구역을 만들고 모든 원주민은 고향을 더나 이 지역으로 옮길 것을 법으로 정한 것이다.
알라모를 기억하라
텍사스는 멕시코 땅이었지만 많은 미국인이 이주해 와서 살고 있었다. 이주해 온 미국인의 수가 점점 늘어나 어느새 멕시코인의 숫자보다 훨씬 많아지자 멕시코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서 미국인의 이주를 막는 한편, 멕시코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텍사스에 살고 있던 미국인들은 텍사스의 독립을 선언했다.
서부로 몰려드는 사람들
골드러시: 세계 곳곳에서 금을 발견해 한몫 잡아 보려는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몰려들었다. 샌프란시스코가 대도시로 성장한 것도 이때였다.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자 캘리포니아도 주로 승격되어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제국적 본성의 시발, 명백한 운명
1845년 존 오설리번은 신문 사설에서 이를 명백한 운명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했다. 명백한 운명론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종교적, 인종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정복할 임무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이 명백한 운명론은 이후 미국 외교정책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5장 남북 전쟁과 노예 해방
공업이 성장하고 있는 북부와 목화를 생산하는 대농장이 발달한 남부, 이 두 지역의 차이는 노예자를 둘러싼 갈등으로 이어졌다. 값싼 임금 노동자가 필요했던 북부와 흑인 노예가 필요했던 남부, 결국 노예제를 둘러싼 대립은 링컨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남북전쟁으로 폭발했다. 노예 해방 선언, 그 역사적인 의의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직 이름뿐인 자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 남과 북 사이에 남은 전쟁의 상처는 쉽게 극복되지 않았고, 흑인들이 겪을 시련의 세월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1 남과 북, 다르게 발전하다
넓어진 땅을 연결한 운하와 철도
1825년 이리 호와 허드슨 강을 연결하는 총 길이 584킬로미터의 이리 운하가 만들어졌다.
1830년 볼티모어~오하이오 회사가 건설한 노선이 철도 최초였다.
주식회사와 공장
공업의 발전은 뉴잉글랜드 지역만이 아니라 북동부 전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오대호 주변은 운송이 편리한 지리적 이점까지 더해져 디트로이트, 클리브랜드, 버펄로, 시카고 등이 새로운 공업 도시로 빠르게 성장했다.
발명과 기술 혁신
발명 특허는 쉬지 않고 이어졌다. 시계와 자물쇠가 큰 인기를 끌었고, 무선 전신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공업은 점점 더 발전했으며, 공업의 발달은 주로 북부에서 이루어졌다.
남부 목화 농장의 노예들
조면기가 발명되면서 목화 생산은 훨씬 더 늘어났다.
대농장과 노예제, 둘은 남부의 상징이었다. 남부의 풍요는 이들 흑인 노예들의 고통스런 노동의 대가였다.
2 노예제를 둘러싸고 남북이 갈등을 빚다
당신과 나는 똑같은 인간입니다
북부에는 노예제 폐지를 위해 활동하는 단체들이 여럿 있었다. 양심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겼던 퀘이커교도도 다수 참여했다. 도망친 노예 출신이거나 자유민이었던 북부의 흑인들이 참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노예주와 자유주
1619년 처음 아프리카에서 백인들에게 사냥 당해 미국 담배 농장의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 담배농장이 목화농장으로 바뀌고, 목화농장이 더 넓어질수록 노예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북부의 주는 자유주, 노예제를 채택하는 남부의 주는 노예주라고 불렀다.
두 세력의 대립이 심각해진 것은 1819년 미주리 주가 새로 연방에 가입할 때부터였다.
도망친 노예를 송환하라!
도망노예법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붙잡혀 남부로 되돌려보내진 노예는 그리 많지 않았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 오두막』에서 스토 부인은 그들의 삶을 통해 노예제가 너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제도라는 것을 고발한다. 또한 흑인 노예도 슬픔과 고통, 아픔을 느끼는,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호소한다.
유혈의 캔자스
캔자스-네브래스카법
결국 200명이 넘는 사람이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은 노예제 찬성이냐 폐지냐를 두고 양측의 대립이 더 이상 화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3 링컨이 당선되고 전쟁이 발발하다
링컨의 등장
링컨의 관심은 노예 문제 자체보다는 그로 말미암아 연방이 분열되는 사태를 막는 것이었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 그리고 분열
사우스캘로라이나 주 의회가 투표를 통해 연방을 탈퇴하겠다고 결의한 것이다. 그 뒤 링컨의 취임식이 열리기도 전에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 등 남부 6개 주의 탈퇴가 이어졌다. 탈퇴한 남부 주의 대표들은 새로운 국가인 남부연합 건설을 선포하고, 새로 제퍼슨 데이비스를 자신들의 대통령으로 뽑았다.
섬터 요새의 포격, 전쟁의 시작
1861년4월, 사우스케롤라이나의 찰스턴 항에 자리잡고 있던 섬터요새에 포성이 울렸다. 남북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섬터요새: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중부에 있는 요새로, 남북 전쟁 당시 연방군의 요새 가운데 하나였다. 남북 전쟁을 촉발시킨 요새로 알려졌다.
공화당의 출발
미국 공화당의 로고인 코끼리는 1874년 정치 풍자만화가 토마스 네스트가 《하퍼》라는 잡지에 공화당을 미련한 코끼리에 비유해서 그린 삽화에서 유래한다.
4 남북 전쟁, 참담한 내전으로 번지다
초기의 전황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져, 양측 모두 군대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현대식 무기가 총동원되면서 이전의 어떤 전쟁보다 엄청나게 많은 희생자를 냈다.
노예 해방 선언
영국과 프랑스는 남북 전쟁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링컨의 입장에서는 이들 영국과 프랑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일이 아주 중요했다.
1863년1월1일 링컨은 남부연합에 속한 주의 모든 노예는 바로 지금, 그리고 이후로도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임을 선포한다. 미 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켜 줄 것이다.
수많은 남부의 흑인들이 주인집을 도망쳐 나와 북군에 입대했다.
분수령이 된 게티즈버그 전투
북부의 주지사들은 게티즈버그에서 전사한 장병들을 기리기 위해 그곳에 국립묘지를 세웠다.
1863년 7월1일부터 3일가지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 인근에서 벌어진, 남북 전쟁에서 가장 참혹하고 중요한 전투다. 남군과 북군 모두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연방군이 승리하면서 남북 전쟁의 대세는 연방 측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흔히 남북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전쟁의 끝
전쟁은 끝났다. 이제 반란군은 다시 우리 국민이 되었다.
5 재건을 위해 힘쓰다
분열된 집안을 다시 세우려는 노력
폐허가 된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 섬터 요새 공격 사건 이후 북부에서는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로 진격하라는 외침이 날로 높아졌다. 이후 리치먼드는 연방군의 최대 공격 목표가 되었고, 1865년4월 드디어 북군의 그랜트 장군이 리치먼드를 점령하였다. 번화했던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는 전쟁이 끝난 뒤 폐허의 도시로 변했다.
1865년4월14일 저녁, 워싱턴 시내의 포드 극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연극을 관람하던 링컨이 그 자리에 앉은 채 쓰러졌다. 암살자는 무대 위로 뛰어올라 관중들을 향해 외쳤다. 폭군의 최후는 이런 것이다. 암살자는 극장의 배우였고, 노예제도와 남부연합을 열렬하게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다음날 아침, 링컨은 숨을 거두었다.
남부 재건 계획의 어려움
남부의 주들이 잇따라 연방에 복귀했다. 이때 보다 급진적인 공화당원들은 흑인들에게도 시민권을 보장해 주자고 주장했다.
해방 노예, 이름뿐인 자유
1866년 테네시에서 조직된 KKK(Ku Klux Klan)단은 특히 흑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백인우월주의자인 그들은 밤이 되면 흰옷을 입은 채 흰말을 타고 전쟁에서 희생되었던 남부 병사들의 유령으로 분장했다. KKK단은 192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그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이후 1960년대에 흑인 민권 운동에 대한 반발로 다시 등장하기도 했다. 아직도 일부 보수적인 백인층을 중심으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지하철도 차장, 해리엇 터브먼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는 1840년부터 1861년까지 수천 명의 흑인을 남부 노예주에서 캐나다 북부의 자유주로 탈출하도록 도와준 비밀 조직의 이름이다.
1908년 88세가 된 해리엇 터브먼은 그동안 자서전을 쓰고 노동을 해서 번 돈을 모아 가난한 흑인을 돕고자 해리엇 터브먼의 집을 만들어 활동을 계속했다.
6장 산업화와 대중 사회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의 공업은 빠른 속도로 발달해, 이제 미국은 산업사회로 접어들었다. 미국은 넓은 국토와 풍부한 자원, 발달된 기술 등 공업이 발달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민자는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이에 힘입어 카네기, 록펠러, 포드 같은 독점 기업들이 성장했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과 8시간 노동제를 걸고 투쟁했다. 정치개혁과 공정한 거래를 위한 노력, 여성 참정권 운동 등 더 살기 좋은 미국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산업의 발달은 새로운 원료 공급자와 상품 시장을 필요로 했다. 미국 역시 하와이로, 쿠바로, 필리핀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었다.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싸움, 참혹했던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전쟁 후 미국은 세계 최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 서부를 개척하다
대륙 횡단 철도
골든 스파이크: 철도 건설에서 쓰는 큰 못을 스파이크라고 부른다. 센트럴 퍼시픽 철도 회사와 유니언 퍼시픽 철도 회사 철로가 만나는 지점의 마지막 못을 금으로 만들어 박았기 때문에, 이를 골든 스파이크라고 한다.
대륙횡단철도 개통식: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와 네브래스카의 오마하를 잇는 길이 2800킬로미터의 철도가 드디어 완성되자 1869년5월10일, 드디어 대륙횡단 철도 개통식이 열렸다.
쿨리라고 불렀던 중국인 노동자들은 백인들보다 훨씬 낮은 임금을 받고 이 철도 건설에 동원되었다. 쿨리들이 모여서 자신들의 마을과 시장을 만든 것이 바로 차이나타운이었다.
카우보이와 자작농지법
철도는 서부지역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왔다. 백인들의 서쪽을 향한 이주는 점점 더 늘어났다. 카우보이뿐만 아니라 가난한 농민들에게도 서부는 꿈의 땅이었다. 1862년 자작농지법이 만들어진 덕분이었다. 법에 따르면 서부로 이주한 농민이 5년간 그곳에 살며 농사를 지으면 아주 싼값에 넓은 땅을 살 수 있었다.
운 디드니의 비극
우리 추장들은 소망이 하나 있습니다. 원주민들도 백인들처럼 위대한 영웅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백인들이 알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은 크레이지 호스(성난 말)입니다.
미국 건국 100년이 되던 해인 1876년 커스터 부대가 전멸당한 이 전투를 역사는 리틀빅혼 전투라고 기록한다. 백인들에게 이 전투는 잔인한 인디언들이 백인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전해졌다.
러시모어 산의 미국 대통령: 미국의 건강, 성장, 보존, 발전을 상징하는 조지 워싱턴(초대), 토머스 제퍼슨(제3대), 시어도어 루스벨트(제26대), 에이브러햄 링컨(제16대)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미국이 블랙힐스의 정복자라는 것을 확인시키는 상징물인 셈이다.
크레이지 호스 기념 조각상: 지금 현재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원주민들의 영웅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이다.
높은 언덕에 올라보니 학살당한 여인네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굽이도는 계곡을 따라 겹겹이 쌓이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게 보인다. 나는 또 한 가지가 그 피 묻은 진흙 속에 죽어서 눈보라 속에 묻혀 있는 걸 본다. 한민족의 꿈이 거기 죽어 있다. 그건 아름다운 꿈이었다.
2 산업이 발달하고 대량 소비 사회로 들어서다
기술혁신과 새로운 발명
1900년, 전 세계 공업 제품의 1/3이 미국의 공장에서 만들어졌다. 남북 전쟁 후 약 30여년 간 미국의 산업은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그 원동력은 수많은 새로운 발명과 기술 혁신이었다.
1879년 에디슨이 전기발명
1876년 벨이 전화기 발명
미국의 공업은 더욱 빠른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이후 1890년대 중반, 미국은 드디어공업 생산액에 있어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을 제치고 세계 최고에 이르렀다.
교육을 통해 산업발전을 이끌다
모릴법: 정부가 각 주의 상원,하원 의원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국유지를 주어, 그 토지로 학굘르 설립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법을 행함으로써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현재도 미국 각 주는 주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경비를 교육 예산으로 지출하고 있다. 물론 부자들도 자신의 재산을 아끼지 많고 교육에 지원한다. 오늘날 세계 일류대학이라고 손꼽히는 대학 20개 중 반 이상이 미국에 있는 대학이다.
다윈주의와 프래그머티즘
실용주의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과학기술과 산업의 눈부신 발달이라는 시대 상황속에서 나타난, 지극히 미국적인 철학이었다. 이후 프래그머티즘은 사회의 진보를 위한 수많은 사회 개혁운동의 근거가 되기도 했다.
독점 기업의 성장
산업이 발달하면 할수록 기업들은 덩치를 키웠다. 그리고 덩치가 커진 기업은 시장을 지배하는 독점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런데 이런 독점에 대한 규제는 거의 없었다. 정부는 기업가들 편이었다. 오히려 기업가들이 정치를 지배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
자본 투자가 늘어나고 공업이 발전하는 만큼 노동자의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외국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이나 남부의 농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 나선 흑인 노동자들은 대부분 하루 12~16시간의 고된 노동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싸우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만든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의 운동은 미국 도시 곳곳에서 8시간 노동제 확보를 목표로 널리 퍼져 나갔다.
1886년5월1일 미국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시작했다. 전세계 노동자들은 1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날을 그리고 그들을 기억한다. 우리가 기념하는 메이데이 즉 노동절이 바로 이날이다.
대량소비 사회의 도래
전 지구적 이민 행렬
미국은 흔히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불린다. 원주민부터 초기 미국에 정착한 백인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온 흑인들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이민자들이 섞여 살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3 보다 민주적인 미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다
어두운 곳에 주목하기
1800년대 말, 이처럼 어두운 면에 주목하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각 분야의 노력을 혁신주의 운동이라고 부른다.
정치 개혁 운동
주민소환제도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리스시에서 처음 채택되었다. 이 제도로 시 정치에 참여하는 주민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1902년 주민발의제 채택 , 주민투표제
공정한 거래 정책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역사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두 명 있다. 한 사람은 제26대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이고, 또 한 사람은 제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다.
여성 참정권 운동
1920년 여성은 남성과 똑같은 참정권을 갖게 되었다. 1869년 와이오밍 주에서 여성의 참정권을 처음으로 인정한 후, 1890년에는 워싱턴, 캘리포니아, 캔자스, 오리건 주 등이, 1893년에는 콜로라도 주가, 1896년에는 아이다호, 유타주 등이 차례로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4 제국주의 국가가 되다
식민지를 찾아라
미국도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어 원료 공급지나 상품 시장으로 삼으려는 제국주의 국가의 충실한 일원이 되었다. 미국은 하와이로, 쿠바로, 필리핀으로 그 세력을 뻗어 나갔다.
하와이, 미국 땅이 되다
1867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였다. 1894년 하와이는 공화국이 되었다. 하와이 공화국은 미국에 합병을 요청했다. 미국은 합병 조약을 받아들였고, 1900년 하와이는 미국의 준주가 되었다. 그뒤 1959년에 미국의 50번째 주가 되었다.
에스파냐와의 전쟁
1898년4월 미국은 에스파냐에 전쟁을 선포했다. 필리핀은 에스파냐의 식민지였다. 전쟁은 필리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에스파냐는 쿠바의 독립을 받아들인다. 푸레르토리코와 괌은 미국에게 넘겨준다. 2000만 달러를 받고 필리핀도 미국에 넘긴다.
쿠바와 필리핀에서의 미국
미국은 쿠바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마다 미 국민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투입해 이를 진압했다.
미국을 등에 업은 바티스타 정권은 1959년 쿠바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1946년7월4일 드디어 그 오랜 외세의 지배를 벗고 필리핀이 독립했다.
5 결국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참혹한 세계대전이 시작되다
1914년6월8일 발칸반도의 도시 사라예보 거리,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몇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처가 세르비아 청년이 쏜 총에 맞아 쓰러졌다. 7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가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했다. 7월29일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쏜 포탄이 떨어졌다.
미국의 중립 선언
미국은 연합국이 필요로 하는 전쟁 물자를 대는 창고역할을 했다. 시간이지나면서 미국의 여론도 점차 연합국 측으로 기울고 있었다.
참전을 선언하다
1915년 5월7일, 1200여명의 승객과 탄약, 식량을 싣고 뉴욕을 떠나 영국으로 향하던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사망자 중에는 미국인도 128명이나 있었다. 독일이 멕시코에 보내는 비밀 전문이 영국 첩고 기관을 거쳐 미국에 전달된 것이다.
멕시코가 독일과 동맹을 맺고 미국에 대항한다면 독일은 예전에 미국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도록 멕시코를 돕겠다.
미국의 참전은 제1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갈랐다. 미국의 엄청난 물적, 인적자원이 보태짐으로써 전쟁은 연합국 측에 유리해지고 있었다.
전쟁, 그 후
전쟁중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탄생시켰다.
온몸을 다해 전쟁에 반대합니다
나는 살아 있는 생명을 파괴하고 인간의 정신을 말살하는 그 모든 야만적인 힘에 맞서기 위해 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최초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수잔B.앤터니
수잔은 노예 해방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했고, 1865년 드디어 노예제도가 폐지되었다. 여성의 참정권을 담은 이 조항을 수잔B.엔터니 조항이라고 부르며 그녀의 뜨거운 노력과 치열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7장 대공황과 전쟁
전쟁 후의 번영,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올 기미였다. 검은 목요일, 미국을 강타한 위기는 곧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사상 유래가 없는 경제 위기, 대공황을 맞은 것이다. 시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게 한다는 자유방임주의는 포기되었다. 대신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일자리를 만들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혼합 경제 체제가 새로운 경제 체제로 등장했다. 또 한편으로 경제 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으로 이어졌다.
1 1920년대, 번영과 위기의 징후가 보이다
자동차 시대
모던 타임즈는 1936년에 개봉한 영화로 찰리채플린이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는 당시 미국의 산업혁명을 풍자하는 영화로, 인간을 도구로 여기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풍자했다.
1920년대 미국경제는 눈부신 번영의 시대였다. 10년 사이에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무려 40퍼센트의 증가율을 보였다. 또한 산업 생산은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
1920년대 말 미국에서는 무려 3천만여대의 자동차가 도로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잃어버린 세대, 그 자유분방함
어니스트 헤밍웨이, 시드니 플랭클린, 요리스 이벤스, 존 더스패서스. 이들은 선배 세대에게는 능력 발휘의 기회를 빼앗겼다는 상실감과 동료 및 후배 세대와는 생존을 건 쟁쟁을 벌여야 한다는 중압감으로 전쟁 후유증에 비유할만한 정신적인 공황을 겪었다.
대중문화가 보급되다
연극과 뮤지컬, 대중매체로 신문, 라디오 발전
금주법과 마피아
금주법은 보수적인 경향을 가진 남부의 주에서 제정되었다. 술의 제조, 수입, 판매가 금지된 것이다. 1920년1월 연방의회가 같은 내용의 법을 통과시켰다.
다가오는 위기
주식투자 열풍, 부동산 투기 의 피해
가장 미국적인 음악, 재즈
재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뉴올리언스에서 시작되었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의 노동요와 종교 음악, 서인도의 리듬, 유럽인들의 음악 등 다양한 성격의 음악이 섞이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재즈라는 새로운 양식의 음악에 녹아들었다.
2 대공황으로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지다
검은 목요일
1929년10월24일 검은 목요일, 주가가 곤두박질쳤다. 팔겠다는 주문은 쏟아졌지만 사겠다는 주문은 사라졌다. 그날 하루 1400만 달러가 공중으로 날아갔다. 1년사이에 1300여개, 3년 동안 5000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1932년 말ㅇ 미국 전체 노동자의 25퍼센트가 일자리를 잃었다.미국발 공황은 곧 미국을 넘어 세계로 퍼져 나갔다. 1930년 여름 즈음, 세계 대부분의 산업 국가가 역사상 최악의 불경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루스벨트의 당선
유럽과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경제 정책에서 국가는 전혀 간섭할 필요 없이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자유방임주의가 대세를 이루었다. 대공황의 혼란 속에서도 공화당 후버정권은 여전히 국가가 끼어드는 것을 꺼렸다. 이와같은 대공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치러진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가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가 내세웠던 새로운 처방, 즉 뉴딜정책이다. 그것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국가가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나 아니라, 국가의 보이는 손이 경기를 조정해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이었다.
뉴딜의 첫 번째 정책은 바로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테네시 강 유역 개발 공사였다. 8개의 남부 주가 포함되는 테네시강 유역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추진된 사업이었다. 뉴딜정책은 그 경제적인 효과 못지 않게 절망과 좌절에 빠져 있던 미국 사회에 희망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컸다.
사회보장제도
캘리포니아 의사였던 프랜시스 타운센드는 어느날 남루한 옷차림을 한 할머니 세 명이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충격을 받은 타운센드는 고민 끝에 타운센드 플랜을 짜서 제출했다. 이는 60세 이상의 모든 퇴직한 노인에게 연방 정부가 매달 200달러씩을 지급해 주자는 주장을 담은 것이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운센드 플랜이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다양한 방법의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뒤 1935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사회보장법에 서명함으로서 결국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사회보장제도를 갖춘 복지 국가 건설을 목표로 제2차 뉴딜이 닻을 올린 것이다.
뉴딜, 혼합 경제 체제 건설
뉴딜은 자본주의에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결합한 혼합 경제 체제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 체제를 등장시켰다. 이제 정부의 힘은 국민의 삶과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다
유럽에 드리운 전쟁의 먹구름
미국발 공황은 전 세계의 대공황으로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의 고통은 더욱 컸다. 600만 명 실업자 시대라는 위기 상황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이 권력을 잡았다.
독일의 침공
1939년9월1일 독일이 폴란드를 기습 침공했다. 이틀 뒤,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수많은 사람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1940년 봄, 독일은 드디어 파리를 점령했다. 유럽의 절반이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나치 독일에 맞서 버티고 있는 나라는 영국 뿐이었다.
독일은 공군기를 동원해 영국에 엄청난 양의 폭탄을 퍼부어댔다. 영국 수상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에게 도구를 주십시오, 그러면 우린 일할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무기대여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전쟁이 끝난 뒤 되돌려 주겠다는 약속만 하면 탱크나 전투기, 함선을 빌려 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의 중립 포기
1941년6월, 나치군은 소련을 침공했다. 독일군의 기세로 보아 소련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소련의 저항은 끈질겼다. 미국은 소련에도 무기를 대여해 줄 수 있도록 의회를 설득했다. 1941년8월14일 영국 수상 처칠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대서양 뉴펀들랜드 앞바다의 선상(영국 군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호)에서 회담을 갖고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흔히 대서양 헌장이라고 불리는 성명으로 미국의 공식적인 중립 포기 선언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일본은 1937년부터 중국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중국에 재정 지원을 하는 한편, 일본이 전쟁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석유나 고철 등의 수출을 금지해 일본을 압박했다. 1941년 일본은 프랑스가 장악하고 있던 베트남의 수도를 차지하고, 석유가 풍부한 동인도 제도를 넘보았다. 이에 미국은 미국에 있는 모든 일본 자산을 사용하거나 이동시키지 못하도록 했다. 또한 일본이 중국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1941년12월7일 일본의 폭격기들이 하와이의 진주만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폭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상원원 만장일치로, 하원도 388대1로 일본에 대한 선전 포고를 승인했다. 12월11일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제 미국도 전쟁의 불길 한가운데로 뛰어든 것이다. 그들은 외쳤다. 진주만을 기억하라!
4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 끝나다
미국의 참전
재2차 세계대전,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이 미국을 공황으로부터 탈출시킨 가장 큰 공로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많은 여성이 군대에 들어가 군인이 되거나 전쟁터에 나간 남성들을대신해 가정에서 벗어나 공장에 나와 일을 했다. 1941년6월22일 히틀러는 불가침 조약을 깨고 갑자기 소련을 침공했다. 워낙 공산주의를 싫어했던데다가,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흑해의 석유와 우크라이나의 밀 같은 소련의 풍부한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43년 연합군이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자 무솔리니가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제 히틀러는 강력한 동맹을 잃어버렸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독일의 항복
1944년 여름 무렵 소련은 드디어 독일군을 소련 영토에서 완전히 몰아냈다. 그러고는 달아나는 독일군을 쫓아 유럽 쪽으로 추격을 계속했다. 그해 6월6일이 공격 개시일, 결전의 날이었다. 이날 새벽, 수많은 함선과 항공기, 특수 장갑차로 구성된 15만명이 넘는 연합군 부대가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으로 몰려들었다. 연합군의 작전은 치밀했다. 드디어 그해 8월, 연합군은 프랑스와 벨기에를 도로 찾았다. 미군과 영국군은 서쪽에서, 소련은 동쪽에서 히틀러의 독일군을 몰아붙였다. 그러자 독일 부대의 대열은 빠른 속도로 무너졌다. 1945년5월8일 독일은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태평양 전쟁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은 순식간에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미얀마를 점령했고, 이듬해에 필리핀까지 함락했다. 일본군의 침략은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에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이 전쟁이 서양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동아시아 민족을 해방시키려는 전쟁이며 동아시아 각 민족의 생존과 번영, 즉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선전했다.
미국의 반겨은 1942년4월부터 일본의 심장부 도쿄를 직접 공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해 6월, 태평양 전쟁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미드웨이 군도를 일본이 공격한 것이다. 1945년 1월, 미국은 필리핀 루손 섬을 수중에 넣었고, 1945년 4월 드디어 일본 오키나와 섬을 점령했다.
원자폭탄과 일본의 항복
1945년8월6일, 미국 B-29 폭격기가 일본의 산업 중심 도시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떨어뜨렸다. 길이가 3미터인 단 하나의 폭탄이었다. 폭탄은 공중에서 폭발했다. 거대한 불덩이가 솟구쳤고,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히로시마 시 중심부 주변 12킬로미터가 초토화되었다. 8만여명의 민간인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멀리서 빛나는 섬광을 바라본 사람들은 눈이 멀었다. 그후에도 화상과 방사능 피해를 입은 희생자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라고 명령했다. 히로시마에 첫 원자탄이 떨어진 지 사흘 뒤인 8월9일 또 한 발의 원자탄인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 엄청난 살상과 파괴가 이어졌다. 8월14일, 일본 정부는 마침내 항복을 발표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아울러 전 세계에서 무려 40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인류의 재앙, 핵무기
지구상에는 인류를 멸망키시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핵무기가 있으며, 인류는 핵무기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터 시티 디트로이트의 쇠퇴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는 미국 경제의 현주소를 생생히 보여 준다.
8장 세계 최강국 미국의 시대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두 축으로 하는 냉전 체제로 다시 편성되었다. 이념이 지배하는 시대였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치욕을 당하지만, 반전 평화 운동과 흑인 민권 운동의 물결 속에서 보다 전진하고 있었다. 데탕트의 시대를 거치고, 드디어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미국은 라이벌이 없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미국 앞에 놓인 과제 또한 만만치 않다. 이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과연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1 냉전시대, 양극으로 치닫다
사회주의의 확산과 트루먼 독트린
미국이 아직 태평양에서 일본과 전쟁을 벌이고 있을 즈음, 히틀러가 사라진 유럽에서는 소련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을 전후해서,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과 간섭 아래 동유럽 각 나라에 잇따라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한편, 1947년3월에는 그리스에서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켜 친서방정부가 무너질 위험에 처했다. 미국은 이처럼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았다. 미국 대통령 투루먼은 트루먼 독트린이라는 중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나는 미국이 소수의 무장된 (공산) 세력이나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투쟁하는 자유민들의 노력을 지원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자유민들이 그들 자신의 방법으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트루먼 독트린은 이후 30여 년 간 미국 외교 정책의 기본 방향이 되었다.
마셜 플랜과 나토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은 사회 변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가 자라기에 좋은 토양이었다.
1947년6월,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조지 마셜이 유럽의 경제부흥계획, 마셜 플랜을 발표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에게 미국이 경제적 지원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미국은 북서부 유렵에 막대한 원조를 제공해 주었다. 불과 몇 년만에 유럽의 산업 생산은 크게 증가하였고 서유럽에서의 사회주의 세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미국의 소련과 사회주의 세력의 위협에 공동대처하기 위해 서유럽 동맹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라고 하는 군사동맹을 맺었다. 소련도 이에 질세라 동유럽 동맹국들과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했다. 이 기구는 나토에 대항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제 유럽은 자본주의 세계와 사회주의 세계로 나누어졌고, 세계는 미국과 소련, 두 나라를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성되었다.
군비경쟁과 냉전
1949년 가을, 소련이 마침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아시아의 거대 제국 중국에서는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를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은 더욱 치열해졌다. 이러한 대립을 직접 서로를 향해 총을 쏘지는 않았지만 전쟁이나 다름없다는 뜻으로 냉전이라고 한다.
1950년, 냉전이 격렬해지면서 마침내 한국에서 실제 전쟁으로 발전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일다공포와 놀라움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현대판 마녀사냥: 중세 말기부터 근대까지 유럽에서 과부나 사회적 약자였던 수많은 여성이 아무 증거도 없이 마녀라는 혐의를 쓰고 고문, 재판, 형벌을 받았던 사건들, 식민지 시대 미국에서도 벌어졌다.
이스라엘과 미국
수천 년 동안 나라 없이 세계를 떠돌던 유대인들이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웠다. 그러나 그곳에는 과거 수천 년 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웃 아랍 국가들과 힘을 합쳐 이스라엘과 싸웠다. 이런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미국은 이스라엘 편을 들어 많은 아랍인들의 분노를 샀다. 미국의 일방적인 이스라엘 지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아랍인들의 반미 감정이 매우 높다.
2 치욕과 저항, 미국을 강타하다
쿠바에서의 위기
1959년,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를 지도자로 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부패,독재정권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미국은 쿠바와 모든 경제 관계를 중단함으로써 보복을 했다. 쿠바로부터 설탕 수입을 95퍼센트나 줄인 것이다. 설탕 수출이 주된 수입원이었던 쿠바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베트남과 전쟁을 벌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베트남은 60여 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의 지배를 받았다.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을 대부터 오랜 시간 끈질기게 독립운동을 벌여 온 베트남의 지도자는 호치민이었고, 사회주의자들이 독립운동의 중심 세력이었다. 일본군이 물러가지 프랑스가 다시 돌아왔다. 프랑스와 베트남이 전쟁을 벌이자 미국은 프랑슬르 적극 지원했다.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8년에 걸친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군은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이후 북베트남은 베트민(베트남 독립 전쟁)이라 불리는 사회주의자들이 차지했고, 남쪽에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고딘디엠 정권이 들어섰다. 1964년, 미국은 북베트남이 베트남 통킹 만에 있더 미 함정을 공격했다는 구실로 북베트남에 전쟁을 선포했다. 1968년에는 무려 53만명의 미군이 베트남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 군인도 무려 32만 명이 베트남에 파견되었고, 이중 5천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미군은 밀림을 없애기 위해 비행기를 이용해서 풀과 나무를 말라죽게 만드는 고엽제를 뿌렸다.
반전 운동이 휩쓸다
반전 시위의 중심에 선 것은 젊은 대학생들이었다. 이들은 군대에 가야 할 나이였고, 베트남으로 파견될 가능성이 컸다. 1973년 미군이 애초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베트남을 완전히 떠났다. 1975년4월, 북베트남 군대가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을 점령했다. 10년 동안 계속 베트남 전쟁에서 5만 명의 미군 병사가 목숨을 잃었고, 300만 명의 베트남인이 죽었다. 이중 200만 명이 민간인이었다. 미국이 최초로 겪어야 했던 패배였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반전 운동과 흑인 민권 운동이 세상을 바꿔 가고 있었다.
1955년 12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에서 흑인 여성 로자 팍스가 버스를 탔다. 여는 버스처럼 앞쪽에는 백인 전용이라는 글자가 붙어 있어서 그녀는 뒤쪽 자리에 앉았다. 그 뒤 몇 정류장을 지나면서 백인들이 버스를 탔다. 백인 전용석에 자리가 없자 버스 기사는 뒤쪽의 흑인 전용 좌석에 앉아 있던 흑인들에게 자리를 비켜 줄 것을 요구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말에 따랐으나 하루 종일 일하느라 피곤했던 로자 팍스는 이를 거부했다. 이 일로 그녀는 결국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1년이 지나자 연방 대법원은 버스에서의 인종 차별은 헌법 위반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1964년 미국내에서 흑인에 대한 모든 차별을 철폐할 것을 정한 민권법이 통과되었다.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앞에서 버락 오버마가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에 취임하던 날, 오랜 차별 속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던 흑인들과 차별을 없애기 위해 애써 왔던 민권운동가들의 눈에서는 뜨거운 감격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
1963년11월22일 케네디 대통령은 부인 재클린 여사와 함께 오픈 카를 타고 텍사스의 댈러스 중심가를 천천히 지나고 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고, 대통령이 두 발의 총탄에 맞았다. 황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바로 사망했다.
3 미국의 권위가 흔들리다
데탕트 시대
1972년 2월, 닉슨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사회주의 국가 중국 땅에 발을 디뎠다. 냉전시대에서 데탕트(긴장완화)의 시대로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1975년 유럽 대부분의 나라 정상들과 미국, 캐나다까지 포함된 유럽안보협력회의 35개국 정상회담에서 상호 인정, 불가침 원칙을 선언함으로써 데탕트 시대는 활짝 꽃을 피웠다.
오일 쇼크와 경제 위기
석유의 공급 부족과 가격 폭등으로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오일 쇼크라는 미국의 영향력이 아랍 세계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73년, 이스라엘과 아릅 국가 간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벌써 네 번째였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1960년 바그다드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베네수엘라의 5대 석유수출국이 중심이 되어 국제 석유 자본에 대한 발언권을 강화하기 위해 결성한 기구로, 주로 석유 생산량을 조절해서 가격을 결정한다.
작은 정부를 내세운 레이건 시대
워터게이트 사건: 닉슨 대통령(공화당)의 재선을 노리는 인물들이 민주당 선거 운동 본부인 워터게이트 호텔 사무실에 몰래 숨어 들어가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된 사건. 워싱턴포스트의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닉슨의 권력남용과 부정도 함께 드러나, 1974년 결국 닉슨은 임기도 끝나기 전에 사임하고 말았다.
4 탈냉전, 미국이 새로운 세계를 주도하다
미국, 소련의 해체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다
1989년11월9일 동독과 서독을 나누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28년만이었다. 1989년12월2일, 레이건에 이어 미국 대통령에 오른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지중해의 말타섬에서 냉전 종식을 선언한 지 2년이 지난 뒤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즉 소련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러시아 공화국을 중심으로 독립국가연합이라는 느슨한 형태의 연합체를 구성하지만, 이미 미국의 적수는 못 되었다.
걸프전을 일으키다
1990년8월2일 이라크군이 쿠웨이트를 전격 침공했다. 쿠웨이트는 20세기 초까지도 이라크 남부 바스라 주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막대한 석유가 묻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라크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영국이 자기들이 통제하기 쉽도록 일방적으로 국경선을 긋고, 그 지방의 토호 가문을 왕가로 내세워 쿠웨이트 왕국을 독립시켰다. 하지만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초강대국 미국이 세계의 경찰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듬해 1월, 미국은 32개국의 다국적군을 이끌고 이라크를 공격했다, 사막의 폭풍 작전이었다. 6주 남짓한 기간 동안 최첨단 무기를 이용해 이라크의 주요 시설에 대규모 공습을 퍼부었다. 폭격으로 이라크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자 드디어 대규모 지상군을 투입했고, 이라크를 쿠웨이트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2월28일 이라크는 연합국의 휴전 조건을 받아들였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다
2001년9월11일, 세계가 경악했다. 전 세계인은 사람들을 가득 태운 여객기 두 대가 연인어 미국 부의 상징,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빌딩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을 대중 언론을 통해 지켜보았다. 사건의 범인들이 아랍 출신의 테러리스트였다. 2003년3월20일,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미군은 한 달도 안되어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경제 위기를 맞다
대공황 이후 최대 경제 위기였다. 도산한 금융 기관에서, 더 이상 집도 건물도 짓지 못하게 된 건설업체에서 실업자가 쏟아져 나왔다. 소비도 대폭 줄어들었고, 소비 감소는 또다시 경기 침체로, 고용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세계화 시대, 위기는 더욱 빠르게 전 세계로 퍼져 갔다.
미국의 새로운 선택, 오바마
2008년11월4일, 미국인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링컨의 노예해방 선언과 남북 전쟁, 1960년대의 그 치열했던 흑인 민권 운동을 거치면서 조금씩 무너지던 인종주의가 마지막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2009년1월20일 오바마는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블루 아메리카, 레드 아메리카
미국은 지역별로 정치적인 성향이 뚜렷한 편이다.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에서 민주당 후보가 이간 지역은 파란색, 공화당 후보가 이긴 지역은 붉은색으로 표시하 데서 유래한 것이 블루 스테이트, 레드 스테이드 또는 블루 아메리카, 레드 아메리카 라는 말이다.
블루 아메리카에 해당하는 지역은 뉴욕, 보스턴, LA,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디트로이트 등의 주로 북부와 동서부 해안 지역의 대도시들이다. 반면 레드 아메리카는 주로 남부와 중부 지역이며, 대체로 농촌이나 부유한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근현대사 속 미국과 우리나라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재미동포수는 약 200만 명이 넘는다. 1882년 조선은 미국과 서양 세력 최초로 통상 조약을 맺었다.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1945년9월9일 서울에 도착한 미군은 이날 일본 국기를 대신하여 미국 국기를 조선 총독부 건물에 게양하였다.
에필로그 이민자의 나라, 미국의 내일을 묻다
최고의 과학 기술 대국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이민자, 혹은 이민 2세대들이었다. 유니버설 픽쳐스, 콜럼비아 픽쳐스, 파라마운트 픽쳐스, 20세기 폭스, 워너브라더스 등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이 영화사들은 모두 유대계 이민자들이었다. 스티븐 스필버그, 제리 브룩하이머, 시드니 폴락, 우디 앨런 등의 감독 역시 유대계 이민자이거나 그 후손들이다.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 낸 건 다양한 곳에서 온 이들 이민자들이었다.
최초의 민주 공화국, 당시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사상가들이 머릿속에서나 그려보던 나라를 현실에 만들어 낸 곳이 바로 미국이다.
연표
미국의 역대 대통령 연보
찾아보기
편찬위원 윤종배(온곡중 교사) 이강무(인창중 교사) 전형준(휘경여중 교사) 권오경(삼정중 교사) 박인숙(을지중 교사) 김육훈(신현고 교사) 이지현(경기여고 교사)
책임 집필 권오경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구산중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몇몇 학교를 거쳐 지금은 서울 삼정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다. 지금 가르치고 있는 중학생 아이들, 그리고 중학생 딸과 함께 역사의 현장 속에서 좀 더 생생하고 재미있는 역사 공부를 하길 꿈꾸고 있다. 10년 후에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전국역사교사모임
1988년에 결성된 역사 교사들의 단체이다. 전국에서 2000명의 교사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생생함과 감동이 있는 살아있는 역사수업을 위하여 다양한 연구 활동을 전개하고 이를 학교 현장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해 왔다.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2년에 한국사 대안 교과서인 『살아 있는 한국사 교과서』를 펴냈고, 2005년에 세계사 대안 교과서인『살아있는 세계사 교과서』를 펴냈고, 2010년 초등학생을 위한 한국사 대안교과서인 『행복한 한국사 초등학교』를 완간했다. 역사를 왜 가르치는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교사들의 경험을 토대로 2002년 『우리 아이들에게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2008년 『역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를 펴냈다.
처음 읽는 미국사
지은이 전국역사교사모임
1판1쇄 발행일 2010년11월15일
1판2쇄 발행일 2011년 1월18일
발행인 김학원
발행처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출판등록 제313-2007-000007호(2007년1월5일)
주소 121-869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64-10
전화 02-335-4422
17,000원
다양성 속에 보편성을 품은 이민자의 나라 미국을 만나다
이 책은 신선하다. 기존에 보아오던 사건 중심의 지루한 역사서가 아니다. 읽기 수월한 문체에, 어려운 내용은 사료를 바탕으로 한 대화체 이야기로 풀어가니 쉽고 생생하게 전달된다. 현장감 있고 재미있다고 해서 결코 내용이 가볍지 않은 것 또한 이 책의 미덕이다. 게다가 균형잡힌 시각으로 쓰인 책이기에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히기를, 그리하여 미국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한다.-황혜성(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교수, 한국아메리카학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