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5월 26일 입적
15세 나이에 자경문 강설
평생 청빈한 삶 일관
어린이-노인 포교 주춧돌
혜옥 스님은 근대한국불교에서 금룡, 수옥 스님과 함께 비구니 3대 강백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15세의 나이에 법상에 올라 사부대중을 향해 『초발심자경문』을 강설했는가하면 수많은 후학들을 양성해 사라져 가던 비구니 법맥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1901년 경북 금릉군의 한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부분의 농촌 살림이 그러했듯 스님의 속가(俗家) 역시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했다. 그러던 중 스님의 나이 3세 되던 해 아버지 마저 세상을 등지면서 가세가 더욱 기울자 스님의 어머니는 그를 해인사 삼선암으로 출가 시켰다.
이후 동자승으로 밀양 심상 소학교를 마친 스님은 1914년에서 문오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 했다. 또 『초발심자경문』과 『구시화문』을 교훈 삼아 김천 청암사에서 사미과를, 해인사 국일암에서 사집과, 법주사 수정암에서 대교과를 마치는 등 스님은 후대 대강백으로서 성장하는 밑거름을 다졌다.
특히 스님은 비록 어린 나이에 출가했지만 학업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물자가 귀한 시대였던 만큼 풍족한 여건 속에서 배움의 장을 마련하지 못하자, 칡 잎이나 모래 위에 글을 써가며 공부에 대한 의욕을 불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청암사가 원인 모를 화재로 소실되자 주지 대운 스님이 사찰을 중창하려한다며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다. 이에 아직 공부가 덜 됐다며 거듭 사양했지만 청암사 대중들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법상에 올라 대중들에게 『초발심자경문』을 강설했다. 이때 스님의 나이 15세였다.
이후에도 계속해 공부에 매진하던 스님은 29세 되던 1929년 해인사에서 용성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고 ‘정암당’이란 당호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어린이 포교라는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던 1947년 대구 불교부인연합회의 도움으로 실달사에 유치원을 개설해 어린이 포교의 기틀을 다졌다. 이와 함께 스님은 양로원을 개설해 노인 복지에도 남다른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1956년 청암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에도 스님은 김천 수도사(修道寺), 대구 부인사(符仁寺), 경산 포교당 등지에서 자신의 공부와 불자들을 위한 포교에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스님은 새벽 예불을 놓치는 일이 없었으며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교도소, 양로원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법문을 설하는 등 전법활동에 전념했다. 이후 스님은 1968년 김천 대휴사 주지로 부임하기도 했다.
평생을 청빈한 생활로 일관하면서 전법활동을 통해 포교와 후학을 양성하는 일에 앞장 섰던 혜옥 스님은 1969년 5월 26일 김천 대휴사에서 세납 69세, 법랍 66세로 입적했다. 제자로는 인완, 정헌, 정봉 스님 등이 있다.
첫댓글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