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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1일 수원시 한 다세대주택에서 투병 생활을 하면서 생활고를 겪던 세 모녀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60대인 이 여성과 40대 두 딸은 각각 암과 나치병을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긴급생계지원이나 기초생활수급과 같은 사회복지제도가 있지만, 이 세 모녀는 복지서비스를 신청할 수 없었습니다. 채권자들의 빚 독촉을 피하기 위해서 실제 주거지로 주민등록을 하지 못하고 숨어서 지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경찰이 그들의 신원을 밝혀냈지만, 친척들 중에서도 그들의 장례를 맡아줄 사람이 없어, 행정당국에서 무연고자에 준하여 장례를 진행하고, 유골은 수원의 한 납골원에 봉안했습니다. 그런데 몇 해전에 먼저 희귀병을 앓다가 사망한 아들의 유골이 화성시 추모공원에 안치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지인들이, 이 세 모녀의 유골을 아들이 잠들어있는 화성시 추모공원으로 옮겨 달라고 화성시에 청원을 했습니다. 화성시에서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서, 네 가족이 같은 시설에 함께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유골 안치식은 화성시장과 관계공무원들, 그리고 이웃들이 참석하여 지난 화요일에 조촐하게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빈부격차가 나날이 벌어지고, 소득 양극화 문제는 코로나 이후 더욱 심해지고 있다는 보도입니다. 위정자들은 저마다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정책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가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오늘 이야기 속에는 한 부자와 나사로라 이름하는 거지가 함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짧게 요약하면, 부자는 세상에서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누리다가 지옥에 갔고,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던 나사로라고 하는 거지는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부자들이 많은 교회에서는 설교하기가 좀 조심스런 본문일 수도 있습니다.
먼저, 이 부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 부자는 “생전에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라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이나 평민들이 입는 무채색 계통의 의복과 달리, 자색 옷은 왕이나 귀족들의 옷입니다. 고운 베옷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우 값비싼 옷감입니다. 호화로운 옷을 입고 이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습니다.
거지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그는 지독한 피부병을 앓고 있었고, 헌데 투성이로 그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그곳에 들어다 놓았다’고 공동번역은 번역하였습니다. 그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은 그를 도울 힘이 없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거지를 부자가 사는 집 대문 앞에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아마도 ‘버려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그는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불리려 하였는데,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고 했습니다. ‘심지어’라고 하는 번역이 거지의 비참한 상황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유진 피터슨의 <더 메시지> 성경에 보면, ‘그의 가장 좋은 친구들은 그 상처를 핥아주는 개들이었다’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개들만이 나사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의 곁에 다가왔고, 개들이 그의 헌데를 핥아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개들이 친구가 되어 주었다”는 말은 개들에게 고마워할 일이지만, 이 것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거지의 비참함을 씻어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야기는 곧바로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에” 라고 번역한 희랍어 단어는 ‘데’입니다. 영어로 하면 그저 단순히 ‘and’입니다. “그러다가”라는 의미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거지에게는 하루 하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겠지만, 시간은 흘러갔습니다. 그 거지는 마침내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습니다. 거지만 죽은 것이 아니라 부자도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부자에게 주어진 시간도 덧없이 흘러간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부자는 죽어 장사되었다’고 했는데, 거지는 ‘죽어 장사되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거지에게는 변변한 장례식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버려진 삶을 살았던 나사로는 죽음 이후에 아브라함이 그를 안아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거지가 죽어서라도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니 참 다행이라고 우리는 안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부자는 죽어 장사되었습니다. 살아서 누린 만큼 죽음 또한 격식을 갖춘 호화로운 장례식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 못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입니다. 믿음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41:8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는데,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벗’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밀하게 여기고 신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요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은 낙원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후손들 가운데 죽은 영혼들을 아버지와도 같이 따뜻하게 맞아주고 그 품에 안아줍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지 나사로는 지금 아브라함의 품 안에 안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인데도 불구하고 장사되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음부에 갔습니다. 이 부자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보니 저 멀리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있었습니다. 이 부자는 아브라함을 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괴로워하나이다.”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살아있을 동안, 나사로는 부자의 집 대문 앞에 던져져서, 그 부자의 식탁에서 음식이 떨어지기만 기다렸습니다. 상 위의 음식이 아니라, 식사 중 떨어뜨려 버릴 수밖에 없는 음식 부스러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자는 나사로를 통하여 손가락 끝에 적신 물 한 방울이라도 자신의 혀에 떨어뜨려 주기를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구할 때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불렀습니다. 이 부자도 역시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랑스런 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자비를 베풀어 주리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대답합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구렁텅이’ 말은 땅이 깊게 움푹 팬 곳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헤어나기 어려운 나쁜 환경을 비유할 때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구렁텅이가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 빠지면 옷도 버리고 헤어나오기가 힘이 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도 하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면서 스스로 구렁텅이를 만들기도 합니다. 옛날에 지어진 성들을 보면 성 주위를 둘러서 못을 판 것을 보게 됩니다. 해자라고 부릅니다. 외부에서 적들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공격을 막아주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일종의 구렁텅이입니다. 우리는 부자와 거지, 귀족과 천민, 그 밖에도 혈연이나 지연, 국적이나 인종에 따라 편을 가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삶의 영역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합니다. 구렁텅이 안에 내가 있고, 구렁텅이 밖에는 남이 있습니다. 구렁텅이 건너 그 밖의 세상에 대하여 관심을 두려 하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나만 편하고 나만 피해를 입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대문 앞에 버려져 있던 나사로, 개들만이 찾아와 헌데를 핥아주던 때, 이 부자는 대문 밖 거지 나사로에게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부자는 나사로가 그 구렁텅이를 넘어서 나에게 와 주기를, 조그마한 호의라도 내게 베풀어 주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의 구렁텅이는 누구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 인생의 심판 이후에 사람들은 천국 아니면 지옥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부자는 또 다시 청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직 세상에 살아가는 나의 가족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교훈을 전해 달라는 것입니다. ‘나처럼 자색옷과 고운 베옷과 연락에 취하여, 대문 밖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무관심한 채 살아가지 말라고 교훈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그와 같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나를 대신하여 전해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들에게는 이미 주어진 율법과 예언서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 오직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모세의 오경과 예언자들의 선포된 말씀이 다 가르쳐주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말씀 따라서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말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나서 그들에게로 가야만,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와 전해주어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 말씀을 믿으려 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율법과 예언자를 통해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그 누가 찾아와 말씀을 전한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도 들으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에 빠져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중에는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그러자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이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그 말씀을 사람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교 전통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믿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는다. 건강하고 부자가 된다. 그런데 불순종하면 심판을 받는다” 이것이 유대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오늘 부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인정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죽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니,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누가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의 힘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입니다.
사실 이 비유의 말씀에는 주님이 맡겨주신 은사 중에서 재물에 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호화로운 옷을 입고 사치를 즐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진 것이므로 재물의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잊지 말라는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장 첫머리에 보면 ‘불의한 청지기 비유’가 나옵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인 부자의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주인은 그를 해고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사실을 눈치챈 이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모아서, 그 빚을 제 맘대로 탕감해 주었습니다. 기름 백 말을 빚진 자에게는 그 차용증서에 기름 오십 말이라 쓰고, 밀 밲석을 빚진 자에게는 밀 팔심이라고 쓰게 한 것입니다. 이 청지기는 자신이 청지기 직에서 쫓겨나면 자신이 빚을 탕감해 준 이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주인은 이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시면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섬김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으니, 재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14절에 보면,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15절에,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오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는 한 편으로는 부자에 대한 경고이지만, 그 속에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을 겨냥한 교훈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누구입니까? 스스로 부유한 자입니다. 스스로 구원받을 만큼 충분히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율법에 대한 전문가로서 인정받고 존경받았습니다. 그 권위를 이용하여 아마도 물질적인 혜택도 넉넉히 누렸을 것입니다. 재물은 곧 하나님의 축복이므로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자신들이 재물의 복을 누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즐겼을 것입니다. 스스로 의로우므로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세상에서 인정받고 대접받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은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멸시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곧잘 옳은 체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람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실 때 사람의 이름을 직접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비유 가운데 유일하게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 가난한 거지의 이름이 “나사로”였다고 이름을 밝히셨습니다. 나사로는 참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그가 구원받을 만한 특별한 삶을 살았다고 믿을 수 있는 특별한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단서는 있습니다. 그의 이름입니다. “나사로”라고 하는 그의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면 “엘리에셀”입니다. “나의 하나님은 도움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부자나 바리새인들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능력있고 하나님의 축복받은 사람이고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의 이름을 예수님은 기억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사람들이 기억하기를 원하신 이름은 “나사로”였습니다. 비록 사회적으로 그는 거지와 같은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나의 하나님이 도움이시다’라고 하는 그의 이름은 곧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결코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세상의 어떤 재물이나 명예도 탐하지 않고, 그것들을 자랑하고 스스로 교만하지 않고, 오직 내가 죄인인 것을, 오직 하나님의 도움만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너의 집 대문 밖 나사로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사로와 같이 오직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심을 믿으며 오늘을 살아가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