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我心中的寶石箱子. 스크랩 김두수 `보헤미안`. 귀촉도/ 세상을 바꾼 노래
isunamana 추천 0 조회 15 13.09.03 11: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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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수 '보헤미안' (1991)

 

신비롭고도 모호한 1분여의 도입부를 지나 듣게 되는 저 목소리, 긴장 가득한 기타 스트로크의 뒤를 이어 듣게 되는 저 목소리, “저 허무의 기슭으로 나는 가네/ 이 자유로운 영혼 강물로 흘러”는 너무도 강렬하다.

제 아무리 최신 유행가만 쫓는 사람일지라도 이 목소리를 듣고 뭔가를 느끼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단박에 사람을 홀려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노래는 1절 마지막에 붙은 “우-후-후-후”에서 정점을 찍는다. ‘보헤미안’의 허무와 고독과 달관과 사상이 푸념과도 같은 이 한 마디에 응축되어 있다. 2절로 진입한 노래는 베이스와 드럼과 신디사이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세계를 더 견고히 하고, 마침내 소스라치듯 튀어나오는 하모니카가 뒤를 잇는다. 그리고는 결국 떠난다.

 

“어디로 가나 내 이대로 지친 육신으로/ 천국의 문을 열어다오 저 하늘로 간다.”

 

김두수 최고의 명곡이자 한국 포크 최고의 명곡 중 하나인 ‘보헤미안’은 1991년에 발표됐다. 그에게는 단순히 3년 만에 발표한 차기작이었을 테지만, 공교롭게도 그 해는 과도기였다. 언더그라운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 시대를 마감해버렸다. 어떤날과 시인과 촌장은 이미 두 장씩의 앨범을 내고 활동을 접었고, 신촌블루스의 마지막 걸작은 1990년에서 멈췄으며, 조동진도 같은 해에 네 번째 앨범을 내고 다음 5년을 기약 중이었다. 전인권의 포효도 사그라지고 없었다. ‘보헤미안’이 나온 이듬해에 봄여름가을겨울과 한영애는 80년대와는 다른 색감의 앨범을 들고 나타났다. 세상은 그렇게 은근슬쩍 바뀌었다. 서태지가 세상을 휘저었고, 신해철과 정석원과 김현철과 윤상과 유영석과 이승환이 음악계를 이끌어나갔다.

 

 

아직까지도 인생의 답을 얻지 못한 듯 늘 그렇게 우리 곁을 배회하는 보헤미안.그런 그가 치열한 삶의 의지로 되찾은 작은 마음의 평화로 그려낸 그의 통산 세번째 작품이자 한국 언더그라운드 포크의 걸작. 이 시대의 가인(歌人)으로 ..

 

 

이미지정보

 

 

김두수는 그야말로 중간계에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없게 되었을 때에 홀로 그런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두 번째 앨범을 낸 후 경추 결핵이라는 병 때문에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 못했고 원래부터 동료 뮤지션들과의 교류도 드물었던, 그런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병과 싸우며 음악계가 어떻게 변하려 하는 지도 모른 채 세 번째 앨범을 만들었다. 1991년에 이런 음반이 만들어진 건 기적이었다. 기타와 플루트의 반주 위에서 낮은 곡조와 내레이션을 번갈아 들려주는 10분이 넘는 대곡 ‘청보리밭의 비밀’은 ‘보헤미안’의 명성에 버금가는 곡이며, 트로트풍의 2박자 기타 리듬에 고결한 목소리를 얹어 피안을 노래하는 ‘강’도 그에 못지않다.

 좀 더 부드럽고 평화롭게 들을 수 있는 ‘강변마을 사람들’과 ‘자유로운 마음’에 이르기까지 김두수의 세 번째 앨범은 그의 정신세계가 추구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깃든 완벽한 구현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만들어 보여준 적 없는 이 신비롭고도 독자적인 섬을 당대의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외면했다. 1986년에 데뷔했지만 그는 계속 인기 없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었고, 이 앨범 이후 결국 그는 기나긴 은둔에 들어간다.

 

 

2002년 11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자유혼]에 이르러서야 평단은 김두수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보헤미안’은 예전의 기타 스트로크와 하모니카에 현악 세션을 더한 새로운 편곡으로 재수록되었고, 곧장 마니아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2004년 세 번째 앨범이 복각되었고 최근 1집과 2집이 마저 복각되면서 이제는 그의 옛 음악을 손쉽게 들을 수 있게 됐고, 그의 음악에 매료된 사람들은 그를 견고하게 지지하고 있다.

“철탑 위에 앉아있는 저 작은 새”라고 시작하는 데뷔 앨범의 첫 곡 ‘작은 새의 꿈’부터 김두수는 응당 대접받고 평가 받아아 했다. 3집까지의 그의 노래 여기저기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을 비롯한 해외 뮤지션들의 영향이 엿보이고, 70년대 한국 통기타 음악의 분위기도 일정 부분 계승했지만, 그는 언제나 자기만의 노래를 만들어왔다.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인 1집의 ‘귀촉도’, 2집 후반부의 ‘내 영혼은 그저 길에 핀 꽃이려니’―’황혼’?‘신비주의자의 노래’ 3연작이 선사하는 거대한 정신적 스케일, 그리고 3집의 ‘청보리밭의 비밀’까지 그는 포크라는 음악 양식으로 가장 깊고도 높은 영역에 올라서 있었다.

영혼, 피안, 명상, 신비, 전원, 토속, 평화, 자유 등등 우리가 들먹일 수 있는 정신 영역의 모든 개념들을 그의 음악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있다. 이건 결코 뜬구름 잡는 허황된 수사도, 뻔한 칭찬도 아니다. 그의 음악은 정말로 그런 것들을 몸소 체험케 한다.

 

오래도록 방랑하고 은둔했던 것은 김두수의 선택이었다. 그의 기질과 사상이 그런 음악을 만들어냈고, 그런 음악이어서 외면을 받았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임은 언제나 쌍방에게 있다. 데뷔 앨범의 심의 반려와 자켓 교체 때부터 그는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2007년 발표한 다섯 번 째 앨범 [열흘나비]가 일본 자본으로 만들어지면서 복귀한 후에도 세상은 그를 아프게 했다. 아직 모자라다. 김두수는 앞으로 더 많이 알려지고 평가 받아야 한다. 발표한 정규 앨범 모두가 걸작인 포크 뮤지션은 한국에서 조동진과 김두수 단 2명뿐이다. 그의 바이브레이션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그는 80년대에 이미 김광석이었고, 김광석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길을 유유히 걸었던 사람이다.

 

/ 다음 뮤직

 

 

 

 

 

 

 

 

 

 

 

1986년부터 91년까지 세 장의 비범한 포크음반을 발표한 후 종적이 묘현했던 대중가수 김두수. 가요 마니아들에게 "꽃묘", "귀촉도", "약속의 땅", "보헤미안"등 아주 신비스런 분위기를 내뿜는 독특한 한국적 포크가락과 고품격의 에고이즘으로 무장한 노랫말로 곽성삼, 이성원과 더불어 80년대 3대 언더포크 가수로 추앙 받는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그의 이름과 모든 노래들은 낯설고 다소 난해할 만큼 진지하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노래 가락 외에는 멋들어지게 소개할 ‘거리’가 별로 없다. 자신의 이야기나 음악에 대해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고 대중들의 반응이나 인기에도 관심이 없다.

 

아내와 함께 강원도 대관령 아래 산골짜기의 돔 모양 콘테이너에 묻혀 자연의 소리에 취해 사는 별난 사람이다. 기괴한 도사나 기인처럼 여겨질 법 하지만 실은 강 가나 들에 핀 이름 모를 꽃과 바람에도 정신을 잃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이다.

 

몽유병을 앓듯 자신의 음악 유토피아를 노래 가락으로 표현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온 김두수. 그가 10여년 만에 네 번째 음반 <자유혼>을 들고 세상에 나타났다. 온통 컴퓨터 음향으로 꾸며진 인공의 소리바다에 자연의 소리를 담아 LP와 CD를 발표, 화제가 되고 있다. 365장 한정판으로 발표된 더블 재킷 LP는 벌써 희귀음반으로 대접 받고 있다. 김두수는 세상 사람들과의 낯설은 대면을 위해 스스로 걸어둔 삶의 빗장을 잠시 열어 제쳤다.

 

1959년 8월 4일 대구 신천동에서 은행원이었던 부친 지재형과 중학교 교사였던 모친 김미성의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김두수. 네 살 때 잠시 마산에 살았지만 서울로 유학오기 전 까지 줄곧 대구에 머물렀다. 부친은 ‘노래하는 것은 광대짓’이라며 반대했지만 어머니만은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즐겨 불렀다. 김두수는 ‘어머니의 노래는 내 음악의 DNA였다’며 이내 그리움에 잠긴다. 모교인 대구 삼덕초등학교는 한국 야구계의 스타들인 장효조, 양준혁, 이승엽을 배출한 야구명문. 2학년 때 담임 선생이 지도한 음악반에 참여, 동요를 작곡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담임 선생이 이 동요를 대필하여 등사로 찍어 작곡집을 발표해 주었다. 음악공부가 재미났다. 어떤 노래건 한번 들으면 계명을 쉽게 그릴 만큼 소질을 보였다. 담임 선생은 김두수의 부모를 찾아가 체계적인 음악 공부를 권유했지만 부친의 반대는 완강했다.

 

대구 오성 중학교에 진학하자 사춘기가 찾아왔다. 말수가 줄어들고 집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가출을 생각할 만큼 증세는 심했다. 노래만이 자유로움을 안겨주었다. 친구들과 그룹을 결성해 여대생 누나에게 통기타를 한달간 배웠다. 당시 집안 분위기는 기타 연습은커녕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전축이 있는 친구집에 놀러가 인기 절정이던 존 덴버, 송창식의 노래를 들으며 점점 더 음악에 빠져들었다. 능인 고교에 진학하자 학교가 싫어졌다. 초등 학교 때부터 줄곧 반장을 해온 우등생이었지만 빈둥대다 등교를 했을 만큼 방황의 시절이었다.음악을 반대하는 부친에 대한 반항은 공부에도 관심을 잃게 했다. 학교 보다는 시냇가에 앉아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는 이상한 아이로 변해갔다.

 

1978년 경북대에 진학했지만 견디기 힘들어 자퇴했다. 외진 시골길을 정처 없이 걷는 도보여행을 시작했다. ‘도보여행 때 얻은 정서는 내 음악적 토양이자 밭이다. 세상이 싫어지고 삶에 대한 허무감이 꽉 차 매일 술에 취해 살았다. 1집은 이때의 정서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고백한다.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대학은 꼭 졸업해 다오’라는 어머니의 유언은 거역할 수 없었다.

 

1981년 고려대 농경제학과에 재입학했지만 휴학을 거듭 졸업까지는 6년이 걸렸다. 휴학 중 삿갓에 고무신을 신고 가야산의 한 암자를 찾았다. 50년 된 대나무 피리를 구해 밤낮으로 호숫가와 산중 바위에서 구성진 우리가락을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 어느날 예쁜 나비 한 마리가 피리 끝에 날아와 앉자 자연과 교감이 느껴지는 큰 감동을 받았다. 이때의 영감은 <나비야>의 노래가락으로 이어졌다.

 

서울로 돌아온 뒤 82년부터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 명동의 PJ살롱, 쉘브르 등에서 무명 통기타 가수로 노래생활을 시작했다. 밤업소에서 지서종이란 본명이 못마땅해 근사한 예명을 요구해 왔다. 감명깊게 읽었던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 나오는 천하의 악당 <김두수>가 불현듯 떠올랐다. 장난끼가 발동해 정해버린 기막힌 예명이었다.

 

 

 

 

<2>

김두수 아니 지서종을 기억하는 대학동창생은 아무도 없다. 학교보다는 무명 통기타 가수와 방랑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이다. 김삿갓 행세를 했던 당시를 김두수는 ‘어설픈 치기였다’며 쓴 웃음을 머금는다.

 

생활비의 95%가 술값이었을 만큼 삶의 허무감에 비틀거렸던 그에게도 어머니는 늘 그리운 대상이었다. 집에서 15리 길이었던 어머니 묘소를 오가며 품었던 애절한 그리움은 조곡 ‘꽃묘(시오리길2)’로 생명력을 얻었다. 창작의 첫 발자국이었다. 1985년 만든 이 곡은 음악활동을 반대했던 아버지의 마음도 돌려 놓았다. 아들이 당신을 위해 만든 곡이라며 어머님 묘 앞에서 녹음기를 틀며 눈물을 흘리던 아버님’을 생각하는 김두수의 눈가에는 어느덧 이슬이 맺혔다.

 

대학 졸업 후 남미대륙 여행을 꿈꾸며 조양 상선에 입사를 했지만 넥타이를 매자 숨이 막혀와 퇴사했다. 집안에 박혀 시집을 읽던 중 노래 가락들이마구 떠올랐다. 즐겨 마시던 술도 멀리하고 창작의 물꼬를 텄다. 그의 마음을사로잡았던 시는 미당 서정주의 <귀촉도>. 허락을 받으려 미당의 자택을 찾았다.

 

노래를 들은 서정주는 ‘좋군.부르게’하며 흡족해 했다. 용기가 생겨나자 킹 프로덕션을 찾아가 즉석 오디션을 받았다. <시오리길>의 네 소절만 듣고서 킹 박은 ‘그만 됐다. 판 내자’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장충동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이던 신중현은 데뷔 앨범녹음에 열심인 김두수를 격려하며 용도폐기 직전의 마틴 기타를 선물로 주었다.녹음을 마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온통 시위정국으로 뒤숭숭한 세상은 고려대 출신 가수의 비탄조의 가사가 영 못마땅했다.심의불가 철퇴가 내려졌다. 대박을 꿈꾸던 킹 박은 발 빠르게 사무실 미스 리의 제안대로 문제 곡 <철탑>을 <작은 새의 꿈>으로 제목을 변경하고 가사도 일부 수정하여 심의를 통과시켰다. 재킷도 내정된 윤해남 화백의 추상화를 김두수 얼굴 사진으로 슬그머니 교체시켜 버렸다.

 

김두수는 데뷔음반 <김두수.귀촉도서라벌SBK0059,86년4월>을 보고 절망했다. 또한 미당 서정주의 시 <귀촉도>를 주력 홍보 곡으로 삼으려 하자 시인에게 누가 될까 반항했다. ‘아마도 히트를 시키려는 홍보를 막았던 나를 정신 이상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전량 폐기하고 싶은 음반이 10만원도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니 황당할 뿐’이라며 씁쓸해 한다.

 

1집은 습작 같은 곡들이었지만 한국적 서정성이 물씬 배여 있는 독특한 가락이었다. 가녀린 듯 떠는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폭발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묘한 신비감을 자아내며 비수처럼 듣는 이의 가슴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나 자취방으로 들이닥친 수사관들의 무차별 방 수색은 노래에 염증을 느끼게 했다.

 

1년 후 <동아기획>에서 음반제작을 의뢰해 했다. 사지 절단된 <작은 새의 꿈>을 <철탑 위에 앉은 새>로 부활시키고 진흙을 박차고 솟아나는 새순의 이미지를 담은 윤해남의 새로운 그림을 2집 <김두수-서라벌VIP20055,88년> 재킷으로 삼으며 응어리 졌던 한을 풀었다. 첫 방송 출연도 했다.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박남정 다음 순서였는데 "열광하던 소녀 팬들이 왠 이상한 가수가 나왔냐는 표정으로 어찌나 냉랭한 반응을 보이던지...’라며 김두수는 껄껄 웃는다.

 

오랜 객지생활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렸고 경추 결핵으로 악화되며 김두수를 쓰러뜨렸다. 활동을 중단하고 양평으로 요양을 떠나자 제작사는 허망했지만 조동진은 ‘뛰어난 노래만큼이나 재킷도 세계적’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2집의 <약속의 땅>은 자신의 음악적 유토피아를 그려낸 명곡이었다. 이미 결핵 3기로 발전한 몹쓸 병은 3년간 병원 신세를 지게 했다. 비틀거리면서도 3집<김두수-현대HDP159,91년>제작을 마쳤다. 명곡 <보헤미안>이 탄생했다. ‘부산의 한 여성 팬이 이 노래를 듣고 자살을 기도했다’는 소식과 ‘주문진으로 자살하러 갔던 어떤 사람은 우연히 이 노래를 듣고 자살을 포기했다’는 장문의 감사편지를 보내왔다. 극단적인 반응에 음악적 혼란이 느껴지자 강원도 산골 속으로 잠적해 버렸다.

 

4집<자유혼>은 열성 팬의 사랑으로 탄생했다. 자비를 들여 앨범 제작비를 댄 그의 정성은 10여년 만에 김두수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다. 김두수는 음악적으로 모자람을 느껴오던 <보헤미안><나비>를 새롭게 완성시켰다. 김두수는 ‘절망의 끝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고 싶었다’며 밝은 표정을 짓는다. <추상> 등 새로운 곡들은 고품격으로 심오하게 변신한 그의 새로운 음악세계를 보여준다.

 

다소 난해한 아방가르드적인 향기가 풍기지만 사랑타령과 편향적인 R&B로만 치닫는 대중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 들으면 좋은 음악이 되기를 바란다’는 작은 소망과 더불어 직업가수가 되었음을 처음으로 인정하는 김두수. 그의 음악적 유토피아 탐험은 이제 결실을 맺고 있다.

 

/ 2007. 11.

 

 

 

 

 

 

 

 

 

 

보헤미안 / 김두수

 

저 허무의 기슭으로 나는 가네
이 자유로운 영혼 강물로 흘러
내 들꽃으로 피어 바람에 흩날려도
서러워 않으리 우후

아무도 오지 않는 길에 저 외로운 새야
저문 서편 하늘 끝까지 휘이 날아가렴

외쳐부르던 기쁨의 노래 간 곳 없고
다시 혼자가 되어 나는 가네

새벽은 찾아오리니
불멸의 이름으로
덧없는 방랑의 별이 뜨고 또, 사라져갈 뿐

머언 지평에 아침이 크고,
염원(念願)의 새가 울면
천국 길을 열어다오
저 하늘로 간다.

 

 

 

 

 

 

 

귀촉도 /  김두수. 서정주 詩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꽃묘 (시오리길Ⅱ) / 김두수 

 

노란꽃 하얀꽃
노란꽃 하얀꽃

 

고개 너머 가실 님
시오리길 멀고 먼데
비가 오네 산에는
온 산이 비꽃이네

 

노란꽃 하얀꽃
노란꽃 하얀꽃

 

염주 한 알 남기시고
떡잎 한 손 남기시고
앞 산에 뒷 산에
거여거여 가셨네

 

노란꽃 하얀꽃
노란꽃 하얀꽃

노란꽃 하얀꽃

 

님은 혼자 계시고
고래등 산 혼자 계시고
님은 혼자 계시고
고래등 산 혼자 계시고

 

노란꽃 하얀꽃
노란꽃 하얀꽃

노란꽃 하얀꽃
노란꽃 하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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