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윤우일이 출근했을 때는 조윤경 혼자 뿐이었다. 조윤경이 눈웃음을 쳤다.
[의원님은 제주도에 감사 가셨구요, 소 비서는 출장, 이 보좌관은 연구소.]
[나한테 지시하신 일은?]
[이거.]
테이블 옆에 놓인 검정색 가죽가방을 턱으로 가리킨 조윤경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걸 경명 씨한테 주고 영수증을 받아 오랬어요.]
돈이다. 아마 추적이 어려운 헌 소액권 수표로 3억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대충 보니까 몇 억 되겠는데, 도대체 뭐에다 쓰려고 딸한테 주는 거지?]
조윤경이 잔뜩 샘이난 얼굴로 윤우일을 보았다. 김은배와 김경명과의 사연을 모르는 것이다. 이틀간
휴가를 보내고 나온 터라 윤우일이 물었다.
[그동안 별일 없었어?]
[별일 없어요.]
그러다가 조윤경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오빠, 소 비서가 어제 깡패 같은 사람을 의원님한테 데려왔어.]
몸을 섞은 후부터 조윤경은 반말과 존댓말을 번갈아 썼다. 아직 입장이 굳혀지지 않은 때문이다.
[어떤 놈인데?]
[소 비서가 몇 번 전화를 하는 걸 들었는데 박 회장이라고 했어.]
[그런데?]
[꽤 거물인가 봐, 모레 저녁에 의원님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꽤 큰 건 같았어.]
[그걸 어떻게 알아?]
[오래 있으면 눈치로 알게 돼.]
조윤경이 다시 눈웃음을 쳤다.
[첫째, 휴대폰으로만 연락을 하고 절대로 일 내용은 전화상으로도 말하지 않거든, 그러면 그건 큰 건
수야.]
머리를 끄덕인 윤우일이 가방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그럼 내막을 알아 봐.]
[잘 되면 한몫 떼어줄 거지?]
[당연하지.]
다가선 윤우일이 손을 뻗어 조윤경의 블라우스 안의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손 안에 가득 젖가슴이 쥐
어졌다. 눌려졌던 젖꼭지가 금방 팽팽하게 일어섰다.
[며칠만 기다려봐.]
[그때는 알 수 있을지 몰라.]
[딱 3억이네.]
수표를 반쯤 세다가 나머지 뭉치를 흘겨본 김경명이 허리를 폈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은 김경명
은 가운 차림이어서 한쪽 허벅지가 다 드러나 보였다. 청담동의 20평형 원룸 빌라 안이었다. 오후 2시
였는데 김경명은 이제야 일어나 샤워를 마친 것이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김경명이 해맑은 얼굴로 창
가에 선 윤우일을 보았다.
[조금 떼줄까?]
[관둬.]
[주고 싶어, 얼마 필요해?]
[영수증이나 써.]
차갑게 말한 윤우일이 옆에 놓인 등나무 흔들의자에 앉았다가 뒤로 젖혀지는 바람에 황급히 일어섰
다. 그러자 김경명이 키득 웃었다. 맨얼굴이어서 눈썹이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피부는 얼음 표면처럼
단단하고 매끄럽게 보였다.
[어젯밤 내가 뭘 했는지 알아?]
김경명이 두 다리를 굽히더니 턱을 무릎 위에 놓고 윤우일을 보았다. 그러자 가운 사이로 엉덩이의 곡
선까지 다 드러났다. 머리를 저은 윤우일이 벽 쪽 소파에 앉았다.
[네가 무슨 짓을 했건 관심 없어.]
[어젯밤 나이트에 갔어.]
[---]
[그래서 한 놈을 골라 호텔에 갔어.]
[---]
[그놈이 샤워를 하는 사이에 지갑을 훔쳐 가지고 도망 나왔어.]
김경명이 눈으로 탁자 위에 놓인 남자 지갑을 가리켰다.
[돈이 250만원에다 카드가 일곱 개나 있어. 저걸 어떻게 하지?]
[자알 한다.]
벌떡 일어선 윤우일이 지갑을 쥐고는 펼쳐 보았다. 그리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비닐봉지를 집어 지
갑을 넣었다.
[명함이 있으니까 돌려보내겠어. 이제 곧 강도 짓도 하겠군 그래.]
[나 안아줘.]
김경명이 갑자기 가운을 벗어버렸다. 그러자 알몸이 환하게 드러났다. 알몸에 가운만 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바보야, 온다는 연락을 받고 나서 이러고 있으면 안아달라는 표시 아냐? 꼭 내가 이래야 돼?]
[제멋대로 노는구나.]
쓴웃음을 지은 윤우일이 저고리를 벗어 던졌다.
함부로 내뱉고 있었지만 김경명의 말투는 거슬리지 않았다. 지금 김경명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
가 자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둘의 몸이 하나가 되고 나서 김경명이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는 증거가 나타났다. 윤우일의 리드에 몸
을 맡긴 김경명은 다소곳했으며 달아올랐을 때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몸이 풀린
후에 담배를 피워 문 윤우일이 엎드린 채 김경명을 보았다.
[네 집안을 이해할 수가 없어 아버지의 비자금을 빼내려는 너도 정상이 아니지만 그런 딸을 정신이상
자 수용소에 격리시키려는 네 아버지도 비정상이야.]
천장을 바라본 채 숨을 고르고 있던 김경명이 갑자기 풀석 웃었다.
[자기도 당해봐야 이해할 거야.]
[자기? 그렇게 부르지 마, 낯 뜨겁다.]
[자기야.]
몸을 돌린 김경명이 한쪽 다리를 윤우일의 몸 위로 올려놓았다. 상기된 얼굴에 웃음기가 띄워져 있었
다.
[난 사춘기 때부터 아버지의 이중성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봐왔어.]
[그 덕분에 잘 먹고 잘 살았잖아?]
윤우일이 찌푸린 얼굴로 김경명을 보았다.
[네 아버지만 그런 게 아냐, 세상 남자들 대부분이 그렇고 가족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어.]
몸에 걸쳐진 김경명의 다리를 걷어낸 윤우일이 담배연기를 길게 품었다.
[네가 사이코란 이유밖에 설명될 것이 없어.]
[그 사람은 돈밖에 몰라.]
김경명이 정색하고는 윤우일의 손에서 담배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여자문제를 일으켰지. 지금도 서른다섯 살짜리 여자한테 살림을 차려주고 있어.]
연기를 내품은 김경명이 윤우일의 굳어진 얼굴을 보더니 살짝 웃었다.
[어머니는 지쳐서 아예 말도 꺼내지 않고 오히려 소문이 날까봐 쉬쉬하고 있지. 병신 같은 언니는 그
작자한테 돈 좀 더 타내려고 그년을 사촌언니 대접을 하고 있어.]
[그럼 집안에서 아무도 모르나?]
[엄마하고 언니, 나, 셋만 알지. 운전사도, 가정부도 몰라. 그 사기꾼 삼촌은 당연하고, 그 작자에게 들
키면 아마 상당히 뜯길걸?]
김경명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어때? 조금 이해가 가? 그 작자가 내 입을 막으려고 했던 것 말이야. 아마 돈은 줬지만 지금도 안절부
절하고 있을 거야.]
[부채가 4천 3백 5십억입니다, 그리고 --]
김남진이 서류의 한쪽을 손끝으로 짚었다.
[지난달 18일에 사채 2천 1백억을 끌어들였는데 만기는 5개월입니다.]
김남진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남유통은 희생 가능성이 없습니다. 업계의 소문으로는 반 년을 버티지 못한다는 겁니다.]
김남진은 신흥건설의 이사로 회사 재정관리 전문가였다. 10여 년간 은행감사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
는 터라 김남진의 판단은 거의 틀리지 않았다. 회장실 안은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최재석이
머리를 끄덕였다.
[서류는 놔두고 나가봐요.]
[예, 회장님.]
오랜만에 회장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은 터라 흥분한 김남진이 활기차게 일어섰다. 그는 한남유통과
의 관계를 모르고 있었다. 김남진이 방을 나갔을 때 최재석은 머리를 돌려 최성철을 보았다.
[우리가 7백억 보증을 서주기로 했지?]
[예, 그랬다가 4천 3백억하고 2천 1백억까지 다 물릴 뻔했습니다.]
쓴웃음을 지은 최성철이 서류에서 시선을 떼었다.
[하마터면 사기를 당할 뻔했습니다. 한남유통은 지금 부도 일보직전입니다.]
[우리가 보증을 섰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냐?]
그러자 최성철이 정색하고 최재석을 보았다. 경영을 물려받은 지 햇수로 3년째였으나 최성철은 아직
자금관계는 아버지 최재석으로부터 결제를 받고 있었다. 최성철이 입을 열었다.
[우리 부동산과 현금, 아파트 아파트 중도금까지 모두 한남유통의 채무에 연결되어 우리까지 넘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한남유통은 우리한테 사주 일가의 주식 전체를 담보로 넘긴다고 했어.]
[지분율은 52퍼센트지만 현재 시가는 3백억도 안 됩니다.]
[미국계 기업인수 회사가 그것을 1천 5백억에 인수하려고 했다지 않으냐?]
[그때는 작년 초였습니다, 아버님.]
얼굴을 굳힌 최성철이 최재석이 똑바로 보았다.
[한남은 이 사실을 우리한테 솔직히 알려줘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부채나 사채 빌린 것도 숨기고 은행
부채가 7백억 정도라고 속였습니다.]
최성철이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더구나 영채의 혼사가 결정되고 나서 부탁을 해온 겁니다. 어쩌면 담보를 얻기 위한 정략 결혼을 하
려고 했는지도 --]
[그만해라.]
입맛을 다신 최재석이 머리를 저었다.
[한남의 박 회장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 일을 추진한 사람은 박 사장이었습니다.]
최성철이 굽히지 않고 말했다.
[박동진이 경영을 맡은 후로 과도한 매장 확장으로 부채가 급격히 늘어난 것입니다, 아버님.]
저녁을 마친 최영채가 막 식탁에서 일어섰을 때 최재석이 시선을 들었다.
[너, 응접실에서 기다려라.]
오늘은 최재석이 바깥 살림을 하는 최성철과 같이 들어와 모처럼 같이 저녁을 먹었다.응접실에서 TV
를 보며 앉아 있던 최영채는 최재석과 최성철이 나란히 들어서자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중대 발표가 있어요?]
그러나 둘은 잠자코 소파에 앉았고 최성철이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무거운 분위기를 브낀 최영채
가 눈만 깜박였다. 최재석이 입을 열었다.
[너, 이번에 한남유통 박 사장하고의 혼사는 없는 것으로 해라. 내가 내일 사람 시켜서 통보할 테니
까.]
자르듯 말한 최재석이 최영채를 쏘아보았다.
[결혼식 한 달을 앞두고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 부끄럽다만 할 수 없다. 하지만 박 사장이 우릴 이용하
려고 했어.]
그러나 이번에는 최성철이말을 받았다.
[저쪽이 결혼을 서둔 이유가 있었다. 다음달 15일까지 보증을 서줘야 대출이 일어나게 되어 있더구나.
그리고 우리가 한남에게 7백억 보증을 서주기로 되었지만 결국 부채 6천억까지 물리게끔 되어 있어.]
시선을 내린 최영채가 커피잔을 들었다. 박동진과의 결혼은 다음달 말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이쪽은
결혼을 내년 봄으로 잡았다가 박동진 측이 서두는 바람에 다음달로 결정했었다. 최재석이 헛기침을
했다. 외동딸 최영채의 반응이 불안했기 때문이다.
[영채야, 네가 충격이 클 줄 안다만 --]
[아녜요, 아버지.]
머리를 든 최영채가 얼굴을 펴고 웃었다.
[잘됐어요. 저도 어쩐지 찜찜했거든요.]
이태원의 룸살롱 미정은 김은배가 처음 가보는 곳이었지만 첫눈에 특급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부장식이 고급스러울 뿐만 아니라 로비에서 맞아들이는 지배인의 품격에서도 드러나 있는 것이다. 제
돈 안 대고 접대만 받아왔어도 김은배는 로비에서 오늘 밤의 그림이 좋을 것인가 아닌가를 알아낼 수
있었다. 밀실로 안내된 김은배는 박태홍과 함께 일어서는 세 아가씨를 보고는 자신의 예상이 맞은 것
이 기뻤다. 세 아가씨 모두 그의 기호에 맞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여전히 허리를 90도로 꺾어 절을 한 박태홍이 그를 맞았다. 테이블 위에는 이미 술과 안주가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소병호를 포함한 그들 셋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의원님, 어느 애를 고르시겠습니까?]
박태홍의 앞쪽에 나란히 서 있는 아가씨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 아무나 합시다.]
그러면서 스치는 김은배의 시선을 잡은 박태홍이 왼쪽 아가씨를 골랐다.
[네가 모셔라.]
첫댓글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ㅈ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