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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 무림대회
수많은 풍문을 뿌리던 무림대회가 드디어 영주에서 그 막을 올렸다. 천하에서 이름이 난 영웅호걸들을 무림대회라른 명목으로 영주로 모이게 한 것은 금나라 군대를 물리칠 방책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금에게 반벽강산을 빼앗긴 지금 강남의 나머지 땅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이었다. 이런 위기감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기에 천하 호걸들을 불러 대책을 강구하기에 이른 것이다.
영주는 뱀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유종원(柳宗元)이 그의 유명한 글에서 밝혔다시피 영주 땅에는 속살이 검고 겉이 흰 특이한 뱀이 많이 났다. 그 뱀은 사람이 한번 물리면 즉사할 정도로 강한 독성을 지니고 있다.
무림대회를 영주에 정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임안과 멀리 떨어진 입지적인 조건으로 남의 이목을 피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가 그것이다. 또한 뱀이 많은 곳이기에 뱀을 잡아 죽이지 못하면 곧 물려 죽고 만다는 이치를 은연중 깨닫게 해주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껏 한적했던 영주는 며칠째 분주한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때를 같이하여 천하의 창기(娼妓)들도 이 영주에 구름떼로 몰려들었다. 녹림호걸들이란 일이 없어 한가해지면 술독에 빠지거나 여색을 즐기는 게 보통이었다. 녹림호걸들 뒤에는 영락없이 여인들이 따라다니는 법이요 여인이 없으면 녹림호걸들도 없다는 식이었다.
경성 회모루의 명기들을 미롯해 소흥(紹興)이나 평강(平江)의 명기들까지 제 몸뚱이 하나로 돈을 벌기 위해 꾸역꾸역 몰려온 것이다. 영주는 며칠 사이에 모인 기녀들로 꽃밭을 이룬 듯 현란했다. 무림대회는 아직 사흘이 남아 있었지만 벌써부터 술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아 규모 있는 대회가 될 듯싶었다. 또한 이번 대회는 개방에서 소집을 하였기에 영주에는 난데없는 거지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했다. 이곳 영주의 중심가인 사가(蛇街) 곁에 판자로 지어진 집들이
새로 늘어서서 또 하나의 거리를 만들었는데 바로 이번 무림대회의 영향으로 생겨난 화가(花街)였다.
오후로 접어들자 화가는 더욱 분주해졌다. 화장을 마친 기녀들이 거리로 나와 손님을 부르는 소리, 간장을 녹일 듯한 웃음 소리, 노랫소리와 술 취한 사내들이 지껄이는 온갖 욕설……, 칼끝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 온몸이 쑤셔 한시라도 견디지 못하는 호걸들이 모였기에 더욱 여인들의 웃음 소리가 커졌다. 이들은 여인에게 사랑이니 순정이니 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내들이기도 했다.
화가 저쪽 끝에서 공자차림의 사내가 걸오고 있었다. 다름아닌 왕중양이었다. 그가 검을 등에 지고 이 기녀 골목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몰렸다. 먼 여행길 뒤라 의복은 지저분하고 지쳐 보였지만 키도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라 기녀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분을 진하게 처바른 몇몇 기녀들이 그의 앞으로 뛰어나가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나으리, 저와 함께 살방아를 찧어 가며 술을 마셔 보시지 않으시겠어요?"
기녀가 노골적으로 왕중양을 유혹하자 다른 한 기녀가 잘록한 허리를 흔들며 콧소리를 냈다.
"난 첫눈에 벌써 나으리가 견식이 넓고 즐거움을 아는 풍류남아라는 것을 알아보았답니다. 나으리, 그리고 회모루에 있는 어여쁜 소녀아이들이 이곳에 와 있는데 같이 가지 않으시겠어요?"
회모루라는 말에 왕중양의 귀가 번쩍 뜨였다. 경성의 회모루라면 임조영을 만났던 장소가 아니던가? 왕중양은 기녀가 일깨워 준 기억으로 새삼 그와 둘째 모용준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그들로 무림대회가 이곳에서 열리는 것을 안다면 분명 올 것이라 생각되었다. 기녀들은 잠시 머뭇대며 서 있는 왕중양은 기녀들은 마음이 있어 그러는 줄 알고 한 판자로 된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겉보기와 달리 안은 제법 꾸며 놓은 흔적이 엿보였다. 침대 주위는 다양한 꽃들로 장식해 놓고 탁자 위에도 향기로운 곡주가 놓여져 있어 보기만 해도 흥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얘들아, 귀빈이 찾아오셨다!"
왕중양을 팔을 잡아끈 그 기녀의 소리에 향내가 물씬 풍기는 기녀 몇이 몰려나왔다. 그중에서도 애띠고 정말 막 피어난 꽃과 같은 기녀 하나가 애교스럽게 왕중양을 향해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누가 마음에 드시나요? 어서 골라 보세요."
왕중양은 약간 야릇한 생각이 들어 이들을 둘러보았다. 기녀들이라면 먼저 재물에 대한 눈치가 빨라야 하는데 왕중양이 보기에는 전혀 그런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왕중양 앞에서 진정한 여인으로 뽑히기를 바라는 것처럼 갖은 교태를 마다하지 않았다.
"회모루에서 잃어버렸다던 그 여인들은 모두 찾았소?"
이처럼 엉뚱한 왕중양의 물음에 기녀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곧 왕중양에게 질문을 던졌던 그 기녀가 살짝 보조개를 피우며 입을 열었다.
"찾기는요? 듣자하니 강호에서도 악명이 높은 유운장에서 모두 데려갔다고 하던데 어떻게 찾아요? 다시 와서 해꼬지를 하지 않는 게 다행인데."
기녀가 조금 침통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려고 하는데 웬 사내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해꼬지를 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구? 그건 내가 시간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하하하!"
이윽고 한 사내가 문발을 사납게 들치고는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첫눈에 그가 난쟁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아니었다.
"이제 보니 반화대회 때 만난 공자시구먼. 그런데 여긴 또 무엇을 하러 왔지?"
이 난쟁이는 왕중양에게 처음부터 무례하게 굴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난 친구를 찾으러 왔소이다. 그러는 당신은 이곳엔 웬일이오?"
무뚝뚝한 왕중양의 대꾸에 사내가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콧등을 가리키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 이 사자우를 보고도 큰소린가!"
왕중양은 씁쓰름한 표정을 내보였다.
"알겠소. 그러고보니 악명 높으신 분을 만난 것 같은데 반갑소. 모두들 당신 같은 악한을 없애지 않으면 천하에는 사람이 살 길조차 없을 거라 말하던데 그런 소문은 들어 보았소?"
사자우가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당당하게 받아쳤다.
"물론이지. 그럼 넓은 곳으로 가 그동안 그대의 재간이 얼마나 늘었나 한번 볼까?"
이들이 밖으로 나오자 구경꾼들이 어디서 알고 몰려들었는지 거리를 온통 메우다시피 했다. 무림대회에 참가하러 온 고수들 중 누군가가 싸움을 벌인다는 소식은 거리를 또 다른 열기로 들뜨게 했다.
"왕중양, 그래, 네 놈이 나와 겨뤄 보겠다는 거냐?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꼬리를 감추고 사라지지 그러나?"
구양봉이 사람들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떠벌렸다. 일단 왕중양의 심기를 건드려볼 요량이었다.
"사자우! 네 이놈, 네 죄가 하늘에 닿았는데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단 말이오?"
왕중양도 만만하지가 않았다.
"좋다. 네 놈이 나를 천하의 제일 가는 악인으로 대접해 주겠다는데 고맙구나!"
구경을 하러 모인 사람들 중에는 사자우를 알아보고는 벌써부터 피냄새를 맡은 듯이 치를 떠는 이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사자우의 무예가 대단하다는 것은 이미 강호에 널리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또한 이들의 눈에 긴장감이 더해지고 있는 이유는 왕중양 때문이기도 했다. 이들은 왕중양에 대해 조금도 알지를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곧 벌어질 혈전을 앞두고 가슴을 조이었다. 필시 대단한 고수일 게 분명하리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자우와 맞서겠다고 나섰
겠는가, 하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먼저 검을 뽑아든 것은 왕중양이었다.
"자, 간다!"
왕중양이 검을 모아 쥐고는 사자우를 향해 타타타탁 하는 발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반출룡사(盤出龍蛇)' 초수였다. 사람들은 왕중양의 보법에 혀를 내두르며 잔뜩 긴장을 했다. 왕중양의 검이 사자우를 향해 약간 사선으로 그어졌다.
"쨍!"
그러나 사자우가 급히 검을 내뻗어 왕중양의 검을 맞추었다. 왕중양은 검을 잡고 있는 손으로 엄청난 울림이 전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내심 놀랬다.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왕중양이 옆걸음질 치며 사자우의 빈틈을 노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왕중양이 타타타탁 하는 소리를 내며 덮쳐 들었다. 이번에도 사자우가 검으로 막아냈다. 두 사람이 맞붙었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질 때는 강풍이 휘몰아치듯 거리에 흙먼지를 일으켰다. 사람들은 간혹 흙먼지
가 눈에 들어갔는지 손으로 비벼대면서도 연신 두 사람의 신기한 동작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동안 강호를 돌아다니면서 왕중양은 자신의 무공을 더욱 더 견고하게 다졌었다. 또한 선천신공을 검술에까지 도입시켜 그의 검끝에서는 무서운 기가 뻗어 나왔다.
사자우는 왕중양의 이같은 검술에 적이 당황하고 있었다. 반화대회 때의 왕중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지니고 있지 못한 기이한 초수와 보법에 속으로 감탄할 지경이었다.
"역시 한판 붙어 볼 만한 실력이군! 자, 이번엔 내 차례다!"
사자우도 자신의 기이한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국자와 방망이 그리고 갈고리가 달려 있는 요상한 것이었다. 그것을 휘둘러대는 사자우의 양쪽 눈에서 불꽃이 일었다. 그는 그것을 어깨와 가슴 그리고 팔을 이용해 아주 가볍게 돌리는 듯한 동작을 펼쳤다.
"이야아앗!"
왕중양이 사자우의 병장기를 머리 위로 스쳐 보내며 무서운 고함을 토했다. 사자우의 공격이 머리를 비껴 가는 것과 동시에 그는 검으로 그의 옆구리를 겨냥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자우는 쉽사리 헛점을 보이지 않았다. 빙빙 돌던 국자에 검이 부딪치면서 튕겨 나왔다.
두 사람은 벌써 백여 합이 넘게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어느 쪽도 기울어지지 않는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너만 소리를 낼 줄 아느냐?"
사자우가 돌리던 독사장을 우뚝 멈추며 웅 웅 하는 저음의 소리를 땅을 향해 내뱉었다. 그 소리는 무수한 원귀들이 지옥의 문을 열고 나오며 울부짖는 소리 같아서 사람들의 머리칼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성력(聲力) 또한 대단하여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력(內力)을 한 번 겨루어 볼까?"
사자우가 제의하자 왕중양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무기들을 거두었다. 왕중양이 가슴 위로 올린 양손을 교차하며 묘한 동작을 취하다가 곧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터억! 하는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사람들은 또 한 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단한 힘이었다.
겨우 몸을 피한 사자우가 자기만의 동작을 취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저기서 웅성웅성 하는 말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의 눈에 그의 동작이 괴사하게 비친 모양이었다. 사자우의 손에서 내력이 휘몰아치자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그의 내력 역시 그 동작처럼 비웃을 게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얍!"
왕중양이 손을 내밀 때마다 사자우는 아래서 위로 뛰어오르면서 방어를 하고 또 공격을 이어 나갔다. 왕중양은 사자우의 실력을 얕잡아본 탓에 약간 밀리는 추세였다. 그러나 일단 선천신공만 쓰려 했다. 극렇게 되면 그 역도(力道)가 증가되어 엄청난 힘을 내뿜을 것이다.
"야아앗!"
왕중양이 힘을 써 머리로 온몸의 피를 다 끌어 모았다.
"어이쿠!"
그러자 사자우가 뒤로 나자빠지더니 데굴데굴 나뒹굴었다. 그런데 정도 이상으로 몸을 굴리던 사자우는 벌떡 일어나더니 쏜살같이 어디론가 달아났다. 일단 왕중양의 승리로 일단락된 셈이었다.
새로운 고수를 칭송하듯 구경꾼들이 왕중양에게로 몰려들어 허리를 숙이는가 하면 슬쩍 그의 손을 만져보는 이도 있었다. 왕중양은 계속 따라붙는 그들을 억지로 떼어놓고는 몸을 돌렸다.
왕중양이 거리를 벗어나 꽤 멀리 걸어왔을 때였다. 한 무리의 그림자가 길을 막고 선 채 비켜주지를 않았다. 왕중양은 이들이 누구인지 몰라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귀에 익은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헤헤헤,. 무공이 정말 대단하시던데?"
무심의 목소리였다. 그의 옆에는 챵바의 모습도 보였다. 이들이 왕중양에게로 가까이 접근해오며 징그렇게 낄낄거렸다. 왕중양은 말없이 이들의 하는 양을 지켜 보았다. 왜 이들이 무림대회까지 그 모습을 나타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혹시 대회를 훼방이라도 놓으려고 온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무심이 헤헤 하는 기분 나쁜 웃음을 앞에 달며 입을 벌렸다.
"왕 공자, 여기선 함부로 날뛰지 말고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의 실력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무림대회가 무엇을 하는 대회인지 알고나 날뛰는 거요?"
"그래, 이번 무림대회는 무엇을 하려는 대회요?"
왕중양이 굳굳한 자세로 받아치자 무심이 또 낄낄거렸다.
"이번 대회는 개방놈들이 소집을 한 건데 뭐 금나라를 치겠다는 논의를 벌인다나. 정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울 줄 모른다더니. 금나라는 우리에겐 어버이나 다름없는데 왜 우리가 금나라를 친단 말인가? 금나라가 없으면 우린 죽사발도 못 얻어먹는데……."
왕중양의 입꼬리가 매섭게 찢어졌다.
"이 무식하고도 비열한 놈아! 닥치지 못하겠느냐?"
"왕 공자, 웃기는 소리 말라구. 너 역시 금나라 덕분으로 밥술을 뜨는 주제에 그따위 소리야. 네가 사는 곳과 밥 처먹는 곳은 누구 관할이더냐? 금나라가 아니더냐? 그런데도 헛소리를 늘어놓을 셈이냐?"
"정말 개만도 못한 놈이로군! 중원 사람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다스리며 살아왔어. 그래도 잘 살아왔다. 그런데 금나라 오랑캐들이 침범을 한 다음부터 강산이 두 쪽으로 양분되고 백성은 도탄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이다. 넌 그같은 도적 놈들에 불과한 무리의 앞잡이 노릇이 좋단 말이더냐?"
쿵! 하며 왕중양이 발을 구르자 무심이 깜짝 놀랬다. 그 여파가 자기의 두 다리로 전해져 후들후들 떨리는 게 아닌가.
"잔소리 말아랏!"
이렇게 지껄인 무심이 황금부채를 휘릭 앞으로 내젓자 누군가 수레 한 대를 밀고 나왔다. 풍막으로 가려진 수레 안은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왕중양은 무심이 잔꾀를 쓰려는 것으로 여기고는 선수를 쳤다.
"허튼수작 그만하고 어서 목이나 내놓거라!"
"헤헤, 나는 무심한 사람이지만 왕 공자께서는 정이 넘쳐나는 사람이 아니오. 자, 한 번 보시오, 이 안에 누가 있는지를."
풍막이 젖혀지자 곧 한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왕중양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아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수레 위에는 유일민이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왕중양을 본 유일민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 분명 임조영과 함께 그곳을 피한 것으로 알고 있는 유일민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그것도 무심의 손아귀에 들어간 채로. 왕중양은 울고 있는 유일민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소리를 내지 못했는데 모르긴 해도 무심이 손을 썼을 거라 왕중양은 추측했다. 그러니 더욱 치가 떨렸다.
"왕 공자, 듣자하니 그대가 이 아이를 구해줬다고 하던데 한 번으로 끝나면 재미가 없지 않소? 흐흐흐, 이 아이가 그대를 생각하는 마음에 난 질투가 다 날 지경이요."
무심이 유일민에게로 다가가 부채 끝으로 그녀의 턱을 올렸다.
"무심, 그 아이에게 손을 댔다가는 요절을 내고 말 것이다!"
왕중양이 덤벼들 자세를 취하자 무심이 비웃었다.
"헤헤, 난 이 아이에게 손만 대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갖다 댈 생각이다."
유일민의 턱을 어루만지던 무심이 슬쩍 그녀의 아혈을 열어놓았다.
"왕 공자님!"
겨우 말문이 트인 유일민이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왕중양이 무심에게로 달려들어 목을 조를 순간이었다.
"잠깐! 무심의 말로는 내가 당신보다 못하다고 하던데 어디 한 번 확인시켜 주겠는가?"
챵바였다. 그가 씩씩대더니 얼른 기를 모아 왕중양의 가슴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한 손으로 챵바의 주먹을 쳐 옆으로 빗나게 만든 왕중양이 훌쩍 몸을 날려 공중으로 떠올랐다. 챵바가 위를 올려다보는 찰나 눈앞으로 검은 물체가 쏟아졌다.
"욱!"
챵바의 면상으로 왕중양의 발바닥이 내리꽂혔다. 땅으로 박힐 듯 주저앉은 챵바가 벌떡 일어서며 자세를 다졌다. 그는 기를 모으더니 왕중양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챵바는 몽골에서 알아주는 장사였다. 왕중양은 그리고도 몇 번을 더 치명타라고 여길 만한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그는 끄덕하지 않았다.
"왕 공자, 내가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이 아이는 내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난 원래 이런 겁많고 경험 없는 여인은 질색이거든. 그래서 네 놈에게 던져 줄 마음인데 어떤가?"
무심이 떠벌리는 말에 왕중양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유일민이 다급하게 외쳤다.
"공자님, 이 사람 말을 듣지 마세요!"
유일민의 말 속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예상이 되었지만 왕중양은 어쩔 수 없었다. 일단 유일민을 되찾고 나서 뒷일에 대해 처신할 생각이었다.
"좋다. 네 놈 말을 따르겠다."
"헌데 한 가지 조건이 있소이다."
"조건이라니?"
"간단해. 이번 무림대회 때 우리에게 접근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야 한다. 알겠나?"
무심의 야심을 알아버린 왕중양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이들은 무림대회에 참가하여 중원 무림의 패권을 거머쥐려고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왕중양을 비롯해 고수들이 이에 대해 반기를 들고 나설 거라 판단하고 먼저 손을 쓰려는 속셈이었다. 왕중양은 일단 내친 일이라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좋소. 그렇게 하리다."
그런데 무심은 간괴한 수를 쓰려 했다.
"하지만 이 아이를 지금 넘겨주지는 않겠소이다. 나중에 그대가 딴 마음을 먹으면 어찌하겠소? 행여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무심이 갑자기 화살 하나를 쥐고는 작신 반으로 부러뜨렸다.
"이렇게 될 것이다!"
무심이 신호를 보내자 다시 수레가 사라졌다.
무림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아침부터 영주 벌판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가히 대단한 대회임을 입증해 주고도 남았다. 수 천을 헤아리는 무림 사람들이 앉아서 개회를 기다렸다. 흙으로 쌓아올린 단상 위로 한 젊은이가 가볍게 뛰어오르더니 두 손을 가슴 앞으로 올리고는 정중히 인사를 했다.
"전 개방의 홍칠이라는 사람올시다. 우리 무림 사람들이 이렇게 오늘 모이게 된 것도 인연인가 합니다. 여러분들을 이곳에 모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금나라에 대한 방책을 의논하기 위함입니다. 우리 무림의 인사들은 대부분 중원 사람들이 아닙니까? 금나라 오랑캐들이 우리 강산을 마음대로 짓밞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는 노릇입니다."
"지당한 말이오!"
"그말에 대찬성이오!"
홍칠의 말에 여기저기서 뜻을 모으려는 함성 소리가 터졌다.
약간 흥분을 듯한 홍칠이 사람들을 넓게 둘러보았다. 그는 강한 내력을 지니고 있어 보통으로 말하고 있는데도 그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우리 개방은 여러분들과 마음과 힘을 합쳐 금나라를 쳐부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잃었던 대송(大宋) 강산을 수복하려 하는 것입니다."
다시 사람들의 피끓는 절규가 영주 벌판을 메아리쳤다.
"금나라 오랑캐를 내몰자!"
"잃어버린 강산을 다시 찾자!"
"아예 놈들의 씨를 말려야 한다!"
홍칠과 사람들의 힘있는 외침을 보고 있는 왕중양의 가슴도 서서히 불이 붙어 갔다.
'나 왕중양만 뜨거운 피를 갖고 있는 게 아니었구나. 오늘 보니 저 홍칠의 가슴은 더욱 뜨거운 피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무공만이 뛰어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우국지심도 대단해. 홍칠이 말대로 무림 인사들이 모두 항금(抗金)의 깃발 아래 하나로 묶어진다면 금나라쯤은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개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는 사기를 다지는데 갑자기 껄껄껄 대는 냉소가 터졌다. 그 소리는 보통의 웃음과는 달리 몹시 귀에 거슬렸고 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누구얏! 어느 놈이 비웃고 나서겠다는 거야?"
누군가 소리치자 웃음 소리가 뚝 멈췄다. 그리곤 한 사내가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더니 빠른 속도로 수천이나 되는 큰 무리의 주변을 서너 바퀴 쯤 돌고 나서 홍칠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 무공은 실로 기이한 것이라 사람들의 눈은 찢어질듯 커졌다. 빠른 속도로 무리의 주변을 돌던 그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면서 홍칠 앞으로 어느 틈엔가 당도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러나 이같은 경공을 처음 보기 때문에 그가 모르긴 해도 대단한 고수일 거라 추측들을 하는 눈치였
다. 그가 홍칠이 서있는 곳으로 훌쩍 몸을 날려 올랐다. 체구가 우람한 것이 홍칠보다 머리 하나는 모자란 난쟁이, 다름아닌 사자우였다.
"너희들이 모두 중원 사람들이 맞는가? 중원이고 나발이고 자기 일들이나 할 것이지 대송이 어떻고 금나라가 어떻고 웬 말들이 이리도 많으냐!"
사자우는 무림대회를 무산시키려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수근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 왔다.
"사자우 이놈아! 그럼 넌 어버이의 일에도 고개를 돌리겠다는 말이더냐?"
누군가 이렇게 받아치자 우와와 하는 폭소가 뒤를 이었다. 화끈 달아오른 사자우가 가슴을 부풀렸다.
"어느 놈이 주둥이를 함부로 놀려!"
사자우가 목줄기로 툭툭 힘줄을 새기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다시 그가 으르릉거렸다.
"어느 놈이든 또 아가리를 놀려댔다가는 확 찢어 버릴 것이다!"
창끝 같은 눈초리로 사자우가 욱박지르자 코앞에 있던 몇몇은 기가 죽어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래, 어디 한 번 찢어보시지."
누군가 이렇게 반발을 했지만 자신이 없는지 들릴락말락한 작은 소리로 겨우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거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구. 아 제 먹고 살길 찾으면 그만이지, 송나라가 어떻고 금나라가 어떻고 왜 이다지도 말들이 많아? 어느 나라가 세워지든 백성은 백성이라고. 백성들은 그저 배부르게 먹여주면 그만이야. 그런데 따지고 보면 금나라가 더 좋은 세상일지도 모르지."
사자우가 제 멋에 빠져서 혼자 뇌까리고 있는데 누군가 찬물을 확 끼얹졌다.
"이 더러운 놈아! 냉큼 내려오지 못하겠어?"
이렇게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른 것은 산서(山西) 연풍표국(連風표局)의 국주인 연천성(連天城)이었다. 연씨네 쌍필(雙筆)의 계승자이기도 한 그는 붓자루 두개로 백여 명을 물리친다는 유명한 고수에 속했다.
사자우의 안면 근육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다. 연천성과 한동안 눈싸움을 벌이던 사자우가 몸을 훌쩍 날리며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는 사람들의 머리를 마치 돌다리인 양 밟으며 그에게로 달려갔다. 작은 체구인데다가 날렵하기 그지없어 그의 동작은 수면을 스치는 새 같았다. 머리를 밟힌 사람들이 전혀 움직이지를 않았다.
연천성이 막 사자우의 돌진을 막아 서려고 할 때였다.
"우욱!"
어느새 날렸는지 연천성은 사자우의 장을 맞고는 뒤로 나가떨어졌다.
"으…… 부, 분하다……."
치명타였다. 연천성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사자우의 일격에 그만 숨통이 끊어졌다. 그의 제자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수습을 하려 했지만 이미 절명을 한 뒤였다. 그의 아들인 연성(連城)이 연설대 위로 뛰어올랐다. 그 역시도 연천성 못지않게 붓을 잘 쓰는 고수였다.
"이 난쟁아! 우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쓰러진 연천성 곁에 있던 두 명의 제자들이 쌍필을 꺼내 들며 합세했다. 사자우가 코웃음을 쳤다.
"흠, 이 미련한 놈들아, 내가 그만큼 살아갈 이치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는데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이냐?"
왕중양은 주먹을 불끈 쥐며 천하의 악인이 되려고 자청한 사자우를 응시했다.
'그의 무예 역시 하찮게 볼 것은 아니다. 어쩌면 연씨네 세 사람의 목숨도 바람 앞에 등불의 신세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서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 사자우의 악랄함에 사람들의 피해가 늘어날 테니까…….'
왕중양이 막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허, 왕 공자께서는 어디를 가시려나?"
무심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유유작작한 품으로 왕중양을 노려보았다. 그의 곁에는 유일민의 모습도 보였기에 왕중양은 그만 주춤하고 말았다.
연단 위에서는 사자우와 연씨네 세 사람이 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연단 아래에 자리잡고 있던 사람들이 연씨네를 향해 기필코 물리치라는 말을 던지며 응원을 했다.
"간다!"
연성이 두 개의 붓을 나누어 쥔 채로 사자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사자우의 눈과 사타구니를 겨냥해 붓을 찔렀다. 연천성의 제자들도 각각 붓을 세우고는 사자우의 측면을 노렸다. 이같은 싸움은 사실 무림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긴 했다. 하지만 사자우가 보인 태도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은 오히려 열이 아니라 백이라도 나서 그를 굴복시켜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사자우의 무공은 생김새와는 딴판이었다.
연성과 제자들의 붓끝은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강력한 장벽에 부딪쳤다. 연성이 있는 힘을 다해 붓 끝에 기를 모았지만 더는 들어가지가 않았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사자우가 양손을 내저으며 이들의 붓을 옆으로 쳐냈다.
그런데 느닷없이 홍칠의 손이 불쑥 사자우에게로 날아들었다.
"넌 또 뭐냐?"
홍칠의 손에서 엄청난 기를 감지한 사자우가 내심 놀라 옆으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홍칠의 손이 몸에 닿기만 하면 뼈도 못 추릴 것이라 판단한 사자우는 어쩔 도리가 없는지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연씨네 세 사람은 홍칠의 출현으로 일단 목숨은 구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엉뚱하게도 자신들을 겁내는 줄로만 안 모양이었다.
"사자우, 도망치는 꼴이 우습구나?"
기고만장해진 이들이 사자우에게로 덮쳐 들려고 하자 재빨리 홍칠이 가로막았다.
"복수는 일단 회의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저 사자우란 작자는 아주 도망치지는 않을 위인이니 그때까지 기다리시지요?"
잠시 앞뒤를 재보던 연성이 황급히 연단 아래를 향해 사람들에게 따져 물었다.
"이게 무슨 무림대회요? 내 아버님이 악인의 손에 죽어 갔는데도 당신들은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소. 당신들은 영웅으로 대접받을 수 없소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홍칠의 덕분으로 목숨을 구한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연성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 사태를 얼른 수습하려는 의도로 홍칠이 사자우를 향해 큰소리로 경고했다.
"사자우, 사람을 죽이고도 살아 남을 생각은 못할 것이다. 넌 오늘 이곳에 모인 천하의 영웅들 앞에서 네 죄를 빌게 될 것이다!"
그러자 사자우의 콧에서 무서운 바람이 뿜어졌다. 어찌나 콧바람이 센지 발밑의 땅이 움푹 파일 정도였다.
"흥,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어진 백성이라 자부하는 것 같은데 흰소리 말아라! 저기에 있는 연씨네만 해도 양민들의 땅을 빼앗고 약탈을 놀이삼았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이제는 우리 가문에 대해 도전을 하겠다는 거냐?"
연성이 이를 부득 갈며 사자우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흐흐, 넌 사람들의 피를 뽑아 주둥이만 살찌운 모양이구나. 여기 모인 사람들도 잘 들어라. 자신이 죄가 없는 깨끗한 사람이라고 어느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이냐? 어디 있으면 나에게 덤벼봐라!"
그러나 사자우를 향해 선뜻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연단 위로 날아들며 소리쳤다.
"하하핫! 그렇다면 내가 과연 무슨 죄를 지었는지 한 번 말해 보시지?"
그는 유생 차림에 자색 옷을 걸친 선비였다. 사람들은 이 선비가 자신들의 틈을 비집고 연단을 향해 빠르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입을 떠억 벌렸다. 괴상한 보법이었는데 사자우가 부린 것과는 또 다른 아주 날쌘 동작이었다. 사자우는 그러나 이 사람을 쉽게 알아보았다. 그의 눈매가 심하게 떨렸다.
"황약사(黃藥師)……!"
그러자 연단 아래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이어졌다. 차츰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도화도 도주 황약사란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잔뜩 긴장했다.
"황약사, 내가 너 따위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정당한 이유를 댈 줄 알아야 하는 법!"
"훈계를 하려거든 네 놈의 제자들 앞에서나 씨부려라."
"어허, 네 놈이 제법이로구나!"
이들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로 서로를 노려보다가 곧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지막 걸음을 막 내딛은 황약사가 얼른 장을 날렸다. 낙영빈분(落英빈紛)이란 초수였다. 이 황약사의 무공은 모두 동해 도화도에서 스스로가 개발해낸 것이었다. 그런데 황약사는 한 가지 풍류적인 것을 좋아해 그의 초수들은 내력은 강하면서도 겉으로는 매끄러운 멋도 지녔다. 어찌보면 천상의 선녀가 내려와 소맷자락을 나풀대며 우아한 춤이라도 추는 것과도 흡사했다. 그러나 그렇게
부드러운 초수 속에는 예리한 기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사자우는 잘 알고 있었다.
사자우의 동작도 다른 때와는 달리 더욱 날렵해졌다. 연거푸 장을 날리며 돌진해 들어오는 황약사를 피해 공중으로 솟구친 사자우가 비웃음을 흩뿌리며 사뿐히 내려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살기가 맴돌았다. 사람들은 숨을 죽여가며 이들의 초수에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이놈, 네 놈은 지금껏 사람을 해치지 않았단 말이더냐? 대력(大力) 허패(許覇)도 네가 붙잡아갔지 않았느냐? 말도 못 하게 혀를 잘라버리고 도화도로 잡아간 것이 네 놈이 아니면 누구였느냐?"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자우의 말에 사람들의 안색이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일시에 굳어졌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대력 허패를 기억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였을 뿐 아무도 그 행방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동정호 기슭에서도 그를 찾아볼 수가 없었고 남경성 밖에서도 그를 본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사자우의 말이 사실이라면 황약사가 잡아갔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막상 황약사의 표정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그렇다. 네 말대로 그는 지금 도화도에 있지. 난 앞으로 어떤 놈이든 허패와 같이 악한 짓을 일삼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혀를 잘라버리고 도화도로 끌고 갈 생각이다. 한 가지 네 놈에게 알려줄 말이 있다. 그 허패는 지금 도화도에서 매일 꽃밭이나 가꾸며 편하게 지내고 있다. 하하핫!"
황약사의 말은 계속되었다.
"입으로는 항상 정의로운 소리를 떠들지만 속에는 온통 망나니 근성이 들어 있는 놈들은 내 말을 잘 듣거라! 너희들도 어느 날 갑자기 강호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도화도에 끌려가 나무를 심고 섬을 지키며 한평생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감히 황약사를 향해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끝까지 황약사와 대적하고 나선 것은 사자우였다.
"그건 너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너 또한 사람을 해쳤거늘 감히 누구를 향해 꾸짖는단 말이냐?"
"글쎄, 우하하핫!"
웃음이 채 멎기도 전에 사자우의 손이 날아왔다. 타탁! 뼈가 으스러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손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이들은 싸움닭이 상대를 향해 날갯짓을 하듯 서로의 몸을 날렵하게 던졌다.
"황약사, 나하고 경공(輕功)을 겨뤄보지 않겠나?"
순식간에 몇십 합을 대결하고 나서 갑자기 사자우가 실실 웃어가며 황약사에게 제의를 해왔다. 그 표정에는 감히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조소가 깃들어 있었다.
"네 놈이 산꼭대기로 오른다 해도 난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다!"
사자우가 먼저 해라도 만질듯 높이 몸을 높이 공중으로 띄웠다. 그러자 황약사도 소맷자락을 나비의 날개처럼 퍼득이며 그의 뒤를 쫓아 올랐다. 이들은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갔다.
이들이 차츰 하나의 점으로 사라지자 홍칠이 시선을 거두며 사람들을 향해 섰다. 그리곤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게 한 후 입을 떼었다.
"자, 이젠 우리의 대사를 위해 다시 의견들을 나눕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서 아직도 탄성이 끊이질 않았다. 크게 나누어 두 종류의 탄식이었는데 하나는 사자우와 황약사의 싸움을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아쉬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무공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을 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 때문에 그같은 우쭐거림이 일시에 허물어졌다는 허탈함이었다. 그래서였는지 홍칠이 다시 무림대회의 열기를 북돋우려고 하는데도 모두들 열적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홍칠이 연단에 서서 계속 사람들의 술렁임을 바로 잡고 회의를 진행하려 하자 누군가 시비를 걸어 왔다.
"너 홍칠은 개방의 방주 노릇도 못하면서 천하 무림의 맹주로 나서겠다는 거냐?"
둘러보니 차림새를 보아서는 황약사 못지않은 풍류남아로 비쳤는데 어딘가 위엄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무심 공자……, 무심 공자다!"
그를 알아본 사람이 외쳐댔다. 무심은 어깨가 으쓱해져서 거만한 걸음으로 사람들의 사이를 헤쳐 나갔다. 곧 연단 위로 올라와 홍칠 앞에 선 그가 건성으로 읍하며 말을 건넸다.
"홍방주님, 나도 이 위에 올라서 보니 누구 못지않은 대장부처럼 여겨지는데 그래. 나를 꺾을 자신이 있소?"
무심이 거들먹거리며 홍칠과 아래의 사람들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 개방은 맹주가 되려는 마음으로 이 무림대회를 연 것은 아니오. 무림대회를 통해 우리를 이끌 수 있을 만한 분을 세워 놓고 금나라를 치자는 것이오."
"건방진 소리. 너 홍칠은 전임 방주 소씨 거렁뱅이보다 공을 더 세워 그 자리에 오른 치사한 놈이 아니더냐?"
소씨거렁뱅이로 말하자면 홍칠의 사부인데 어찌 그를 넘볼 수 있단 말인가? 사람들은 고개를 저으면서도 행여 어떤 근거가 있으니 저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품었다. 아무리 침착한 홍칠이라도 무심의 이같은 망발에는 인내심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네 놈의 눈알에는 내가 사부님을 해치는 사람으로밖에는 보이지 않느냐?"
"글쎄, 그런 일은 나보다는 네 놈이 더 잘 알고 있겠지. 그러나 한 가지만은 명백하다. 네가 이번 무림대회를 소집한 목적이 무림의 맹주가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자 함이 아니더냐?"
유들유들 기름칠을 한 듯한 무심의 말재간에는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그와 언쟁을 하는 것은 괜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한 홍칠이 자세를 낮추며 기를 모으려고 하자 무심이 사람들을 향해 지껄여 댔다.
"저 보시오. 내가 저놈의 비밀을 까발기려 하자 날 죽이려는 게 틀림없지 않소? 그러나 저놈이 날 죽이면 자기의 죄를 만천하에 대고 인정하는 꼴이 될 테니 난 두렵지 않소!"
사실 무심의 술수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게 홍칠의 속마음이었다. 괜한 일을 벌여 사람들에게 나쁜 인식을 심어 주게 된다면 앞으로 있을 대사에도 지장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좋다. 그럼 네 놈이 밝히겠다는 그 비밀이 무엇인지 어서 말해 보아라?"
홍칠이 자신의 계산대로 쉽게 꼬리를 내리자 무심의 배포는 두둑해졌다.
"네 놈이 저지를 죄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런데도 넌 계속 시치미를 뗄 셈이냐?"
그런데 무심은 상세하게 밝히지는 않고 이렇듯 모호한 말로 질질 끌어가려 했다. 그러나 아직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의혹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무심은 그런 궁중심리를 십분 이용하려는 심보였는지 다시 입을 놀려댔다.
"나 역시 죄를 짓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보다는 네 놈이 더 독하고 살떨리는 짓거리를 많이 저질렀을 게다."
그는 계속 양팔을 어지럽게 휘저으며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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