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부루나 칼럼 >
요양원의 두 끝
글 |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나 윌리엄은 길을 가다 지갑 하나를 주웠다. 지갑 안에는 아무 것도 없고 오래 된 낡은 봉투 속의 편지 한 장과 1달러짜리 종이돈 석 장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주인을 찾아볼 양으로 그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앤 조운즈가 보낸 그 편지는 마이클 앤더슨으로 판독되는 어느 남자 앞으로 보낸 이별편지였다. ‘사랑하는 마이클, 이 편지가 당신에게 보내는 저의 마지막 메시지에요. 도저히 현실의 이 장벽을 넘을 수가 없어요. 나의 영원한 사랑 마이클에게’로 끝나는 편지지는 접힌 가장자리가 이미 가무스름하게 탄화가 되어 구멍이 나려 하고 있었다.
그냥 버리기에는 지갑의 주인공에게는 아주 소중한 물품 임이 끼쳐 왔다. 그래서 나는 우선 편지를 보낸 앤의 주소에서부터 연고를 더듬어 보기로 했다. 봉투 겉장의 마이클의 주소는 길 이름과 시티 이름 등 전체적으로 물기에 글자가 번지고 이지러져 있었다.
몇 단계의 좀 귀찮고 시간 걸리는 절차를 거쳐 앤의 주소에 살고 있는 사람과 전화 연락이 되었다. 주운 지갑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고 앤을 찾고 싶다고 하자 지금 그 집에 살고 있는 여자가 말하기를 앤은 세 해 전에 이 집을 팔고 요양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어느 요양원이냐니까 자기가 들은 기억이 있지만 그건 함부로 알려 줄 수가 없고 우선 자기가 먼저 앤과 통화를 해 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며칠 후 삼자 통화가 걸려왔다.
앤은 그 편지가 66년 전에 자기가 쓴 게 맞는다고 하였다.
마이클은 자기가 너무나 사랑했던 사람이라면서 나의 요양원 방문을 허용해 주었다.
요양원 건물의 텅 빈 3층 휴게실 한 가운데에 의자를 놓고 어느 백발의 노파가 앉아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제가 통화했던 윌리엄입니다.’ 노파는 고개를 돌려 연푸른 빛이 남아 있는 두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고마워요. 당신은 마이클을 닮았군요. 그땐 당신보다 젊었었지요. 내 82년 평생에 그런 미남자는 여태 두 번 다시 본 적이 없어요.’
앤의 어머니는 열여섯 살의 딸이 남자를 사귀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여 엄한 금족령을 내렸었다. 앤이 끝내 그 울타리를 뛰쳐나오지 못하던 몇 해 후 다섯 살 많은 마이클도 군대를 지원하여 떠나가고 그 집 가족 모두 타지로 이사를 가는 등 몇 가지 일이 꼬이면서 영영 서로 끈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이가 좀 더 들어 가족을 떠나 직장을 잡은 앤은 이럭 저럭 한평생을 독신으로 보내다 은퇴 후 세 해 전에 이 요양원으로 들어왔단다.
‘이 지갑과 편지를 가지실래요?’ ‘아니요, 이젠 내 물건도 이곳 사람들이 다 챙기고 간수해요. 부탁인데 젊은이가 그 지갑을 갖고 있다가 가끔 나를 찾아와 줄래요? 얼마 안 남은 생애, 정말 필요할 때만 부를 테니까. 보답은 하리다. 부담 갖지 마시고.’ ‘염려 마시고 연락을 하세요. 보답은 괜찮아요. 그럼 늘 평안하시길.’
승강기 앞에서 한 손에 지갑을 든 내가 흑인 관리원에게 눈인사를 했다. ‘앤 할머니 잘 좀 부탁해요. 이 지갑 때문에 또 들릴 지도 모르겠군요.’ 그러자 관리원이 손뼉을 쳤다.
‘그 지갑, 빨간 테두리가 있는 그것 마이클 영감 것 같은데요? 이리 좀 봐요. 맞아요, 낡은 편지와 3달라. 맞아요! 그 영감 만날 흘리고 다녀요. 얼마 전에 외출하고 와선 또 없어졌다더니…. 지금 8층으로 가 봅시다.’
관리원과 함께 올라간 8층의 어느 방 창가에 앞이마가 높게 벗겨진 늙은이 하나가 돋보기를 끼고 책을 읽고 있었다.
‘영감님, 이 지갑은 결국 없어지지가 않는군요. 앞으로는 뒷주머니에 넣지 말고 옆주머니에 깊숙이 넣어요.’ ‘오, 맞네. 이 젊은이가 주웠다고? 정말 고맙네.’ ‘그런데 영감님, 저희들과 아래층에 좀 가봐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팔걸이에 걸쳐진 영감님의 한 손을 이끌자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서던 그가 관리원에게 물었다. ‘내가 이것 말고 또 흘리고 다닌 일이 있소?’
‘저기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저 마나님, 혹시 앤이라고, 앤 조운즈라고 아세요?’ 천천히 다가가던 우리 세 사람의 기척에 고개를 돌리는 앤에게 관리원이 말했다. ‘이 분은 8층에 계시는 마이클 앤더슨이라고, 마나님이 아실 것 같아서….’ 내가 말을 맞받았다. ‘맞아요, 할머님 금방 다시 뵙네요. 이 분이 편지의 주인공 마이클 앤더슨님이랍니다. 이제 저를 다시 부르실 필요가 없어졌네요.’
‘오 마이 갓, 내 사랑 마이클! 당신이 그 마이클이라고요? 맞네요, 마이클! 왜 이리 늦게 왔나요!’
‘앤!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당신! 당신의 눈을 보니 그대로군요. 여전히 아름다운 이 두 눈을 내 한 평생 잊을 수 없었다오.’
‘그래요, 당신도 나를 두고 영영 떠나질 못했군요, 마이클.’
‘그래요 앤, 이 순간을 위하여 나는 이때도록 홀로 살아왔다오.’
밝은 창밖을 배경으로 얼싸안는 두 사람을 실루엣을 훔쳐보다 나는 슬그머니 홀로 승강기 단추를 눌렀다. 그리고 한 달후에 한 통의 꽃봉투가 배달되었는데 87살의 마이클 앤더슨과 82살의 앤 조운즈가 한 달 뒤에 요양원 앞뜰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터이니 주빈으로 꼭 참석해 달라는 예쁘고도 간곡한 청첩의 편지였다.
재미있으신가? 이런 걸 보고는 세상을 낙원이라고 해야 하나 고해라고 해야 하나? 이게 미국이니까 있을 법한 이야기일 뿐일까? 한국이라면 어땠을까? 당사자 둘 다 능력이 있는데도 결혼도 않고 자식도 없이 한 평생을 살다 죽게 가족이나 주위에서 간섭도 안 하고 내버려 뒀을까? 하기야 거기도 요샌 좀 많이 변하고 있다지?
위의 앤과 마이클 얘기는 얼마 전에 누가 사회관계망에 올린 건데 다시 찾아보려니 숨어 버리고 눈에 안 띈다. 그래서 기억에 기대어 다시 풀어 본 건데 정말 실화일까? 요새 하도 인터넷 상에 그럴듯한 거짓말과 거짓말 같은 참말들이 수도 없이 떠돌아서 그야말로 리얼한 이야기인지 누가 꾸민 허
구인지는 각자 판단에 맡기겠지만 어떻게 아름답게 포장됐든 그 사연이 애절하든 어떻든 우리 삶의 밑바탕이란 본래 슬픔과 괴로움의 색조로 물들어 있음이 맞다는 생각이다. 아니라고요? 얼마나 멋있냐고요? 역시 서양 것이 세련되고 품위가 있다고요? 그렇담 좀더 리얼한 이야기 하나를 더 해 드려야겠다. 세상이 고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시도록. 태평양 너머 어느 작은 반도로, 앤이 마이클과 나란히 드넓은 중서부 교외의 들꽃 흐드러진 언덕에서 확 트인 아스라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던 그때를 얼추 즈음하여.
아래 이야기는 얼마 전에 고국의 어느 기자가 취재한 것을 간추린 것인데 흔하면서도 드문 이야기이다. 세상은 정말 고해일까 낙원일까? 사람이 배우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탐진치에서도 벗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욕심, 성냄, 어리석음에 더욱 찌들며 남이야 어찌 되건 말건 겉신선 속야차가 되어 가면서 구제불능이 되는 것일까?
외식을 좋아해서 이름이 외식이 아니고 아마도 그 옛날 외가에서 낳아서이겠지만 아흔두 살의 이외식은 우리 엄마 이름이다. 그런데 엄마는 예순 해 동안이나 나에게 안 해 준 이야기가 있는데 배다른 오빠 정도곤이라는 남자가 내 눈앞에 나타나서야 우리는 엄마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같은 여자지만 어찌 사람이 그리 모질고 독할 수가 있을까?
우리 엄마는 지금 충북 영동군에 있는 요양원에 있는데 어느 날 배다른 오빠 정도곤과 나 강영숙은 엄마를 보러 갔다.
아들딸을 눈앞에 두고 엄마는 천천히 옛날 일을 풀어내었는데 사연은 이랬다.
1928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엄마는 열다섯 살에 다섯살 위의 동네 총각 정재식에게 서둘러 시집을 갔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정신대로 마구잡이 처녀공출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꽃다운 조선 처녀들의 정신대 참여가 자발적이었다고 헛소리하는 수구 먹물들이 간혹 있기는 하다마는 각설하고…. 아무튼 한글도 못 깨친 엄마는 시집가서 그 동네에서 남편과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해방되기 전 해에 첫아들 병곤이가 태어나 그냥 ‘곤’이라고 불렀는데 다음은 딸이면 좋겠다 했는데 48년에 둘째도 아들로 태어나자 또 ‘곤’이가 나왔네 해서 둘째는 ‘또곤’이가 되었고 호적에는 ‘도곤’으로 올려졌다. 때는 바야흐로 해방정국에다 미군정에다 좌우익 대결로 세상이 어지러웠다. 잠시 숨죽이고 있던 친일 인사들이 다시 관리로 뽑혀 거들먹거리기 시작하고 부정부패는 만연한데다 당국에서 강압적으로 식량공출을 하자 대구 경북 사람들은 이에 항의하였고 항의가 시위로 이어지다 마침내 폭동으로 번진 대구 시월사건이 터졌다.
1949년 초여름 어느 날, 경북 왜관경찰서 소속 순경들이 빨갱이를 잡아낸다며 마을로 찾아와 전에 식량 공출에 항의하여 대든 적이 있는 정재식을 끌고 갔다. 엄마는 첫돌 지난 젖먹이 또곤이를 업고 이십 리 길을 걸어서 왜관 경찰서로 갔지만 면회를 허락하지 않아서 다시 이십 리 길을 되돌아 걸어왔다. 다음 날에도 또곤이를 업고 찾아갔으나 또 헛일, 그 다음날에도 또곤이를 업고 다시 찾아가 얼굴이라도 보게 해 달라고 울부짖으니 한 경찰이 슬쩍 귀띔하기를 수감된 사람은 어젯밤 저쪽 골짜기로 끌고 갔으니까 그리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경찰이 가리킨 유학산 골짜기로 찾아 들어갔지만 아무도 보이지가 않는데 우연히 마주친 두메 사람이 어젯밤 저쪽 골짜기에서 총소리가 났으니 그리 가보라고 했다. 그곳은 칠곡군 성곡리 절골이었다.
절골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은 빠르게 뛰고 세상 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저쪽 기슭에 거적으로 덮인 사람들의 손발이 보였다. 다가가 하나씩 들추기 시작했다. 주검의 부릅뜬 두 눈을 봐도 남편이 아니었기에 무섭지 않았고 묘한 안도감이 들었지만 다 부질없는 일이었다. 몇 번째 거적이었을까, 거기 숨이 끊긴 남편이 누워 있었다.
아비가 죽었는데도 등에 매달린 또곤이는 배가 고파 칭얼대었다. 엄마는 주저앉아 아들을 앞으로 당겨 안고 젖을 물렸다. 또곤이는 죽은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아귀같이 젖을 빨았다.
이윽고 동네에 내려온 엄마에게 누군가가 물을 주었다.
이튿날 마을 사람들에게 남편이 죽었다고 겨우 말을 했으나 모두 묵묵부답이었다. 이렇듯 모두 죽은 듯이 있다가 세 해 뒤에 분위기가 조금 나아지고 숨통이 트여 뼈를 찾아내어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이듬해에 육이오가 터졌다. 그 후론 ‘빨갱이 아내’라는 손가락질 때문에 더욱이나 아무 소리도 못하고 목숨을 이어갔다.
국민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된 첫아들 병곤이가 어느 날 냇가에서 놀다가 불발탄에 목숨을 잃었다. 신식 병원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헛소문을 믿고 피냄새 나는 병곤이를 업고 대구의 큰 병원으로 달려갔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 살려요?
얼른 데려가 묻어 주세요.’ 의사가 타박을 했다. 죽은 아들을 업고 다시 마을에 들어서니 빨갱이 아내는 팔자가 사납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마을 총각 하나가 나무를 해 주고 물도 길어다 주면서 엄마에게 선심을 베풀었다. 엄마는 열한 살의 또곤이를 시부모에게 맡기고 그 총각과 마을을 떠났다. 또곤이는 엄마가 미웠다. 중학교를 그만두고 대구에 가서 도넛 공장에서 일을 했다.
열다섯 살 무렵 어찌 어찌 물어 엄마를 찾아 경북 상주의 산골로 가 보니 누추한 단칸방에 세 살, 한 살의 남매가 누워 있었다. 왜 날 버리고 갔느냐고, 이 아이들 아버지는 또곤이도 얼굴을 아는 동네 사람인데 어디 있느냐고 따져 들었다. 엄마가 말했다. 탄광에서 일하다가 땅속에서 죽었다고.
엄마는 덧붙였다. 이제 엄마 찾아오지 말라고. 엄마는 팔자가 사나우니 너는 그냥 너대로 잘 살아야 한다고. 나하고 있으면 너도 팔자가 사나워질거라고. 또곤이는 더욱 엄마에게서 정나미가 떨어졌다. 또곤이 정도곤은 부산에서 부두 노동자가 되었고 초량 시장에서 꽈배기 장사도 했다. 결혼해서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지만 엄마하고는 쉰 해를 끊고 살았는데 이제 자신도 환갑을 넘겼다. 그러던 2009년, 나라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대구시월사건’을 조사했다. 그리고 정도 곤의 아버지 정재식이 거론된 ‘진실규명결정서’를 발표했다. ‘이 사건의 일차적 책임은 법적 절차 없이 민간인을 임의로 살해한 현지의 경찰에게 있으므로 위원회는 대구 시월 사건관련 민간인 희생자 및 그 유족들의 위령추모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정정, 역사기록 수정 및 등재, 평화인권교육 강화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결정서는 권고했다.
이를 근거로 정도곤은 2011년 4월 부산지법에 국가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담당 변호사는 아버지 사망 당시의 어머니인 이외식도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먼 친척을 통해 어머니가 아직 살아 계심을 알았다. 연락을 받은 엄마는 소송을 거부했으나 아들의 우회적인 설득으로 한 해 뒤에 엄마도 소송을 제기했다. 2013년 1월 지방법원이 두 소송 건에 대해 선고를 했는데 국가는 정재식의 아내에게 3억 3천만원, 아들 정도곤에게는 2억 6천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이었다.
국가는 돈을 줄 수가 없다고 항소했다. 부산고등법원에서 2013년부터 2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동일한 사건이니 같은 재판부가 맡았지만 한국 역사상 천 년 만에 처음이라는 여자 대통령으로 정권이 바뀌자 사법부는 기대와는 달리 과거사 사건을 이전과 다르게 판단하기 시작했다. 금해진 정도곤은 엄마에게 달려갔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엄마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아흔 살이 다된 엄마는 잘 걷지도 못하면서 지팡이를 짚고 아들을 기다렸다. 배다른 두 동생도 중년이 되어 나타났다.
정도곤은 엄마를 차에 태워 부산으로 향했다. 한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다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또곤아, 니 깡패 안 되고 이렇게 살아 줘서 고맙데이….
엄마가 니 하루도 안 잊어뿌고 니 잘 살아라꼬 기도했데이….
엄마가 고맙데이…’
‘엄마도 그 동안 고생 많았십니더. 나도 인자 엄마 안 미워 합니더. 시절이 험악해서 그렇지 엄마가 뭐 잘못했능교. 엄마 잘못한 거 없으니까 맘고생 고만하시이소.’
정도곤은 부산에 도착해서 엄마에게 전복죽을 대접했다.
이가 성치 않은 엄마라고 해도 태어나 처음으로 대접한 음식이 죽이라니…, 또곤이의 눈에서는 또 눈물이 흘렀다.
다음날 이외식은 법정 증인석에 섰다. 판사가 증인 선서를 요구하자 정도곤이 요청하기를 자기 엄마는 한글을 모르니 달리 선서를 해 주도록 허락해 주십사 했다. 그러자 이외식이 말했다. ‘됐다. 니 살아 있으면 기별이라도 할라꼬 엄마가 국문 배워 놨다.’ 그러고는 놀라운 기억력으로 70년 전의 진
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재판 끝 무렵 판사가 엄마에게 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시라고 했다.
‘자식 보기도 마안하고 서울에도 남매가 있심더. 사주가 안 좋아 거기서도 남편이 먼저 죽어뿌렸십니더. 고향이고 뭐고 자식을 안 볼라 캤십니더. 어린 것을 두고 50년이나 안 내려갔으니꺼내 볼 면목이 없고요…, 어미가 돼서 증언이라도 한 번 해 주자고 거동도 못 하는데 왔십니더. 판사님요, 울 아들 잘 부탁합니데이…’
하지만 부산고법은 손해배상금을 대폭 삭감하여 이외식에게 8천 8백만원, 정도곤에게는 5천만원만 지급하라고 판결을 했다. 하지만 이건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놀라운 반전은 곧 이어 대법원에서 일어난다.
2014년 5월 16일, 대법원 제2부는 이외식의 2심 판결을 그대로 인정했다. 그리고 1년 5개월 뒤, 대법원 제3부가 판결하기를 국가는 정도곤에게 단 한 푼의 돈도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손해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이 지났다는 논리를 댔는데 아들 정도곤은 엄마보다 1년 4개월 일찍 소송을 제
기했었는데도 엄마는 인정되고 아들은 기각된 것이다. 논리고 법리고 뭐고도 없는 황당 그 자체였다. 엄마에 대한 판결이난 후 아들 판결이 나는 사이에 제3의 무슨 일이 있었다는 얘긴데 최근에 드러난 흔적을 보면 이 추측이 맞아떨어진다. 법원행정처가 2015년 7월 31일에 작성한 ‘정부운영에 대한사법부의 협력사례’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다. ‘(대법원은)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 왔다. 부당하거나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그 요건을 정립했다.’ 지금은 은퇴한 대법원장과 대법관, 그때 그 시절의 판사들은 엄마의 60년 비밀을 대통령과의 거래 물품으로 써먹은 것이다. 초등학생도 아는 삼권분립도 육법전서를 달달 외었다는 이들에겐 한 가지 장식품일 뿐이었단 말인가? 그리곤 그 수장이 퇴임하려 하자 미리 알아서 쓰던 컴퓨터까지도 영구히 망가뜨리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한두 해 사이에 세상은 놀랄 만치 바뀌었다지만 아직도 자리를 지키는 열세 명의 대법관들은 봄이 온 줄을 아는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자동응답기처럼 입을 모은다. 항간에 떠도는 재판 거래 의혹은 사실무근이라고.
아흔 둘의 이외식은 영동의 그 요양원에서 삶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들을 위해 부지깽이로 마당에 가, 나, 다, 라를 쓰고 익히며 안감힘으로 증언을 섰는데 만사 헛일이 되고 말았다. 모든 게 다 자신이 팔자가 사나워 그렇다고 자책을 하는데 배지밀을 사들고 온 아들이 엄마 잘못 아니라며 애써 위로를 하고 엄마에게 드시라고 하나를 건넨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손에 들고 떠나려 하는데 엄마가 가까스로 부른다.
‘또곤아…, 여그 앉아서 꿀꺽꿀꺽 다 먹고 가거라…, 세상에 제일 좋은 소리가 니 목구멍에 밥 넘어가는 소리다, 또곤아….’
(2018.7.7)
|
첫댓글 독신으로 혼자 사는 것도
늙으막에 결혼하는 것도
여자가 자식 놔두고 재가 하는 것도
생과부를 되풀이 하는 것도
자식을 생전에 저 세상으로 보내는 것도
다 팔자소관이란 말인가?
樂이 결국은 苦로 끝나니 一切皆苦인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