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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7월 8일, 새벽 별세 하셨다.
안재구: 끝나지 않은 길 1: 가짜 해방 / 끝나지 않은 길 2: 찢어진 산하 (2013)
마실에서 천이틀밤의 글이지만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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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길 1: 가짜 해방 통일운동가 수학자 안재구의 어떤 현대사,
끝나지 않은 길 2: 찢어진 산하 통일운동가 수학자 안재구의 어떤 현대사,
안재구, 내일을여는책, 2013, 제1권(500), 제2권(434)
- 안재구(安在求, 1933) 경북대 수학과 교수, 숙명대 교수. 남민전 중앙위원.
안 선생은 친가와 외가 모두가 명문가이다. 친가는 밀양에서 항일운동 투사이고, 외가는 대구 부근의 구지에서 사는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후손이다. 해방 정국에서 친가는 좌파의 지역 지도자이고 외가는 우파로서 대구지역 중심인물이었다. 가족사 자체가 역사의 경과와 맞물려가는 과정이라, 민족통일 운동가로서 성장하였고, 남조민족민주해방전선에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서 행동하는 토양이 내재해 있었다. 나는 안 선생이 일찍이 수학에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여 혼자서 공부했다는 점에 놀랐다. 가족사에 비추어 선생의 삶에 숙명과 같은 것이 내재해 있으며, 그래서 민족 민중 해방으로 길로 가야할 운명으로 보인다. 그 길을 회피하지 않고 감내하면서 갈 수 있다는 용기와 투지는 본받을 만하다.
이 책은 부제가 알려주듯이 1945년 해방은 우리의 해방이 아니라 가짜 해방이며, 미군정이 우리를 그들의 그물에 옭아매는 과정이다. 그 과정이 서툴렀으면서 집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서툰 수를 받아칠 수 있는데도, 우리의 인재들은 그것을 잘 해독하지 못했다. 이익에 눈먼 자들이 많았고, 게다가 일제 부역(부일) 잔제들이 살려고 발버둥 치면서 미국의 이익과 맞아 들어간 것이다. 결국 통일을 염원한 인민들의 요구는 이권정치의 야바위놀음에 휩쓸렸다. 정의도 자유도 미제국주의 형상논리에 말려들었다. 미제의 등을 엎은 종교가 우리 문화를 잠식하고 갈아엎고 자본주의 식민지 토양으로 바꾸어 놓았다. (46W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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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폭압으로 산으로 들어간 저항자들의 이야기는 이병주의 지리산에 나와 있다. 이 지리산이 3년 전쟁 동안에 유격대의 활동이 있었다. 이 유격대를 이현상(남도부)의 남부군이기도 하다. 알려진 바로는 박현채 선생이 1950년(16살)의 나이로 빨치산 소년돌격부대 문화부 중대장으로서 지리산과 백아산 일대를 활동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안재구 선생은 경남 천황산(天皇山)을 중심으로 가지산(伽智山)가 운문산(雲門山)에서 야산대(野山隊) 훈련을 하고 군당과 면당을 잇는 레포활동을 하였다. 두 분다, 우여곡절 끝에, 한분은 경제학으로 다른 한분은 수학으로 학문의 한분야를 성취하기도 했다. 현대사의 소용돌이에서 전자는 일차인혁당에 후자는 남민전에 연관 있다.
두 권으로 된 이 책 끝나지 않은 길 1, 2는 1945년 8.15에서부터 195년 전쟁에 이르기까지 가족사와 더불어 서술했다. 친가의 항일운동경력으로 좌파로, 외가의 오랜 전통의 가문으로 우파로 나설 수 밖에 없는 가족사는 현대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현실적으로는 인민자치의 역량을 짓밟은 미군정의 행태가 인민의 공분을 일으키나, 권력의 부나비들이 일제보다더 교활해져 자기 인민들 찢고 부순다. 밀양이라는 작은 도시를 중심으로 서술하면서도 한반도의 전체를 아우르는 조망을 할 수 있게 한다.
8.15 해방,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 1945년 인민대회, 1946년 대구 시월항쟁, 어린 나이에 1947(14살) 5월 1일 노동절 대회 참여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구금, 1947 7월 19일 여운형은 백의사에 의해 저격, 1948(15살) 밀양에서 2.7구국투쟁(단선반대투쟁)에 참가, 1948년 2월말 신덕생이란 이름으로 야산대 훈련, 1948년 제주도 4.3항쟁, 1948년 7월부터 최덕출이란 이름으로 레포활동,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사건(麗水順天事件)은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으로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 1949년 4월 8일 조직선이 끊어지고 외가로, 1949(16살)년 6월 초등교원 준교사 시험에 합격, 1949년 6월 보도연맹(保導聯盟)은 비극의 서막,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 살해 사건,. 1950(17살) 6.25 남북 전쟁, 1950년 7월 4일 불문곡직 검거당함과 풀림, 그리고 나서 도피와 교원으로 복직, 그리고 1952년 9월 1일 경북대학교 수학과 입학으로 학문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다가 1960년 3.15부정선거로 일어난 청년학생들의 의거에 다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남민전 중앙위원으로, 그리고 그는 이 나이(여든살)에도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이 책의 출판 기념은 서강대에서 열렸다. (46WMC)
# 내용 *** *** *** *** *** *** *
끝나지 않은 길 1: 가짜 해방 / 끝나지 않은 길 2: 찢어진 산하
안재구, 내일을여는책, 2013, 제1권(500), 제2권(434)
- 안재구(安在求, 1933)
목차
제1권 (500쪽)
여는 글 | 팔순의 나이에 돌아보는 끝나지 않은 현대사 4
* 하나, 석 달 동안의 해방 12
친일파는 다시 돌아오고 14 / 짧았던 해방의 기쁨 18 / 고향 동네의 해방 잔치 23 /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히다 33 / ‘할로’들의 행태 37 / 테러 당한 유천 할아버지 41 / 조손간의 토론 45 / ‘국부’이승만의 등장 50 / 귀환동포 55 / 얌생이와 모리배 60 / 모스크바 3상회의 63 / 해방 후 맞은 첫 새해 69 / 미·소 공위 축하 밀양군 인민대회 74 / 찬탁과 반탁 소동 82 / 대탄압의 신호탄, 예비검속 86 / 입학시험 90
그러나 이러한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해방된 그해의 연말이 가까워 오자 조선의 남반부에 진주한 미군은 군정청을 설치해 점령군으로 행세하고, 일제 통치의 주구들을 다시 불러들여 군정통치의 하수인으로 고용했다. 일제 때 하부 관공서의 관리쯤 했던 자들은 면장도되고 군수도 되었다. 경찰서에서 순사질 하던 자들은 간부로 올랐으며, 부장쯤 했던 자들은 모자에 금테를 두르고 서장이나 도 경찰부의 높은 자리에 올랐다. 이들은 일제를 대신해 다시 해방된 조선 사람을 지배하는 미제의 앞잡이가 되었다. (15)
‘3.7제 소작료를 지지한다!’ / ‘친일파, 민족반역자들 처단하자! / ... (29-30)
“안병희, 너는 뱃속에 칼이 안들어나가!”../.. [유천 할아버지] “오냐, 이놈. 왜놈도 내 뱃속에 칼을 못 넣었다. 친일파 놈의 칼 맛을 한번 보자”(43)
[1945] 10월 16일 오후 2시 이승만이 맥아더가 내어준 미군용 비행기를 얻어 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51)
김구 선생과 더불어 김규식, 엄항섭, 이시영 등 15명이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52)
하지만 이승만은 김구선생, 안재홍 선생 등과 한민당을 중심으로 상해 임시정부에 가담한 반공적인, 이른바 민족주의자라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신탁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회의’를 조직하고 나섰다.((82)
* 둘, 아버지의 귀환 94
남양에서 살아 돌아온 아버지 96 / 장기 포로수용소 104 / 죽음의 밀림에 버려지다 112 / 전쟁범죄자 조사위원회 119 / ‘지스 이즈 아 도꾸’ 122 / 밀양중학교에 입학하다 126 / 일제의 묵은 몽둥이와 갈퀴 128 / 북부 조국의 민주개혁 소식 137
나중에 아버지가 <콰이강의 다리>라는 영화를 보고 일본 놈이 무슨 인간성을 말하고 있는데 정말 가소롭다고 했다. 그들의 눈 밖에 나면 그것은 바로 죽음이지 무슨 처벌이냐고 하면서 웃으셨다.(105) [영화 기획된 그리고 의도된 작업이다. 누구의 침을 발랐는지를 보라 (46WMC) ]
1946년 9월 달에 들자 나는 밀양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126)
[1946년] 6월초 당국에서 물가지수란 것을 발표했는데, 3월말 기준리라고 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을 100으로 할 때 524라고 했다. 불과 반년 사이에 5배나 오른 셈이다. 실제 물가는 이보다 더했고 쌀값은 이보다 훨씬 더했다. (130) [대구 시월항쟁이 났을 때는 거의 열배나 올랐다는데 그것은 미군정이 일제가 찍은 돈을 마구 풀었기 때문이란다. 보다 앞서 5월 정판사 사건을 터뜨리고 나서 미군정이 푼 돈의 영향이 아니라 공산당이 지폐를 퍼뜨렸다고 했단다. 사실은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미군정복자는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이다. (46WLE)]
[1946년 2월 9일] 김일성 장군은 당시 30대의 청년 장군으로 해방 직후 북조선 사회의 혼란을 정리하고 북조선인민위워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37)
당시에 남부의 사회에서 많이 읽힌 책으로 김일성 장군의 유격전술이라는 것이 있었다. (140)
* 셋, 첫 모임과 첫 투쟁 142
독서회 첫 모임 144 / 10월 인민항쟁 156 / 첫 투쟁 163 / 3당 합당 170 / 드롭스와 비료 176 / 교장의 독선에 맞서다 183 / 김병환 선생의 영면 198 / 마침내 자치회를 결성하다 203
[동진(同塵) 이진화(李鎭華)] 선생은 스스로 낮추어 호를 동진이라 했다. 노자(老子)의 삶을 말하면서 ‘빛에 화답하고 티끌과 함께 한다(和其光同其塵, 화기광동기진)’라고 했는데, 이는 ‘진리에 화합하고 민중과 함께 한다’는 뜻이다. (152)
[정판사사건(精版社事件): 1946년 5월]
[1946년 9월 30일] 서울시내에서는 ... 저녁때 100여명의 우익 청년단체원들이 완장을 차고 몇 대의 트럭을 타고 와서 자유신문사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편집국장과 간부 세사람을 붙잡아 인사불성이 되도록 흠신 두들겨 패고 문선활자들 뒤엎고 유리항과 편집실의 책상을 부수었다. / 이들은 또 남대문 앞에 있는 조선공산당 본부에 쳐들어가서 건물 옥상에 있는 붉은 기를 찢어버리고 간판을 부수었다. 그 다음날에는 안국동에 있는 민전 사무국, 중앙인민위원회 회관, 민청 회관을 무장경찰이 경비하고 있는 중인데도 거침없이 들어와 사무실 집기를 부수고 간판과 깃발을 파괴했다. (158)
마침내 10월 1일 부녀자들이 대구시청 앞에 모여들어 “쌀을 달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를 선두로 해서 대구 시내 400여개소 공장 파업 노동자들과 청년학생들, 이에 합세한 일반 도시민들이 약 1만 명의 군중을 이루어 대구역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158)
마침내 9월 4일, 3당에서 합당을 추진하는 세력들이 모여 3당 합당 준비위원회 연석회의를 열었다. .. //.. 그런데 9월 4일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한다고 발표한 결정서를 반대하고 나섰던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신민당의 백남운, 조선공산당의 반간부파이 대회파인 강진이 10월 15일 공동으로 ‘3당합당 결정서’라는 것을 발표해 ‘사회노동당’의 발기를 선언하고, 그 이튿날 3당 합당으로 사회노동당 발족을 선언하고 나섰다. (173-174)
김병환 선생은 1889년 2월 19일 의열의 땅 밀양에서 출생하셨다. 1919년 3.1독립만세 봉기때 윤세주 윤치형이 고종황제 인산에 참례하고 올 때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제시하고 밀양에서도 봉기할 것을 제의했다. ... (198) [김병환(1889-1947) 1920년대 의열단과 연결되어 있었다. / 의열단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로, 단원으로는 김원봉(金元鳳), 윤세주(尹世胄),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강세우(姜世宇), 이종암(李鐘岩), 한봉근(韓鳳根), 한봉인(韓鳳仁), 김상윤(金相潤), 신철휴(申喆休), 배동선(裵東宣), 서상락(徐相洛), 권준(權俊)의 13명이었다. 단장은 김원봉이 맡았다.(46WLE)]
* 넷, 퇴학과 구금 210
메이데이 축전 212 / 퇴학 처분과 농성 투쟁 223 / 부딪치는 장애 233 / 말수 형의 어머니와 누이 241 / 벽보투쟁과 함화투쟁 248 / 첫 유치장 살이 252 / 회유와 욕설 259 / 비행기 고문 265 / 김정애 형수님 271
[1947년 5월 1일 노동절]
[감방에서] “선생님, 박희병(朴熙秉)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셨다. / “허 이사람, 우정(于正) 선생 손자 아니가? 네가 웬일이고?” (255)
나는 감방 한 가운데 완전히 해파리처럼 퍼졌다. /../“이놈의 손들, 아이를 완전히 걸레로 만들었네!”/../“선생님, 괜찮습니다. 비행기를 하도 많이 타서 걸을 수 없지만 자고 나면 낫겠지요. 걱정하지 마이소.” (269-270)
* 다섯, 도동의 외갓집 278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후손 280 / 대구의 이모집 286 / 한민당 도당 위원장 외가 큰집 할배 292 / 복란이 아지매와 시청 새아재 298 / 구지면장 외할아버지 303 / 구지행 버스길 풍경 308 / 서외할매와 정업이 아재 314 / 그림 같은 외갓집 320 / 다시 투쟁의 길로 가야 한다 328 / 밀양으로 돌아오는 길 335
나는 내 고향 밀양에서 120리 정도 떨어진 외갓집에서 출생했다. 지금의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求智面) 도동(道洞)이라는 동네가 내 외갓집 동네다. .. 도동은 조선왕조 시대 해동오현(海東五賢)이라 일컫는 사림 중의 한분인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사액서원이 있다. 나의 외가는 김굉필 선생의 후손이다. .. / 도동의 서흥(瑞興) 김씨들은 낙동강 가에 서운을 지어 나라에서 사액을 받고 이를 기회로 명문으로 인정받았다. (280) [김굉필(金宏弼, 1454-1504) 한훤당(寒喧堂).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50세 무오사화(1498)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 1482-1519)[16살]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는 갑자사회로 죽다. 『한훤당집(寒喧堂集)』, 저서에 『경현록(景賢錄)』, 『가범(家範)』//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5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46WLE)]
일본 사회주의 경제학자인 가와가미 하지무(河上肇, 하상조) 교토대학 정치경제학 교수가 쓴 <<가난뱅이의 이야기(貧乏物語, 빈핍물어)>>도 있다. .. 맑스의 <<공산당 선언문>> ..(291)
대구에는 나의 외가 친척들이 많이 와서 산다. 특히 나의 외가 큰 집할배는 한민당 도당 감찰위원장이면서 도당 위원장이다. 그야말로 대구에서 우익정치인으로는 가장 으뜸인 셈이다. (192-293).
그 할아버지의 함자는 김우식(金禹植)인데 호는 석당(石堂)으로 글씨가 명필이었다. 하지만 남에게 주기 위한 글을 쓰지 않았다. (297)
외할아버지는 이 딸이 두 분의 금슬을 이어주어서 “쾌한”일을 보았다 해서 아명을 ‘쾌야’라고 지었다. (326)
[외할아버지 함자는 이 곳에서 찾을 수 없었다(46WMC)]
* 여섯, 소년선전대 활동 344
다시 만난 밀양의 동무들 346 / 몽양 여운형 선생의 서거 352 / 여위띠 고개를 넘으며 357 / 수산의원의 강봉질 선생 364 / 선전선동의 원칙과 방안 371 / 수산 장날의 ‘아지프로’ 376 / 귀명동 마을에서의 현지학습 387 / 고된 논매기 경험 393 / 고향 마을에서의 현지학습 402 / 고향 할배와 아재들의 환대 409 / 윤수선 선생 댁에 계신 할아버지 417 / 7·27 밀양군 인민대회 423
몽양 여운형 선생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 폭력테러 단체인 백의사(白衣社)의 성원인 19세 청년 한지근(韓智根)[본명: 이필형, 李弼炯, 1929년- ?)]에 의해 암살되었다. (352) [비밀결사 백의사의 고문은 김두한이었다. 김두환은 한지근에게 전알 권총을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설에 의하면 김구(임정쪽), 이승만, 또는 한민당 중의 하나일 것이라 한단다. 내가 듣기로는 한민당(이승마 추종세력)이라 들었는데...//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1885-1947) 경기도 양평. 1920년 고려 공산당 가입, 1944년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 (46WLE)]
계엄 아재는 이름이 안경환(安景煥)인데 나의 삼종숙이다. 조선말 고종에게 시사책(時事策)이란 책문을 내놓은 성호학파의 학통을 이은 학자이면서 그 시대에 청렴한 관리로 훌륭한 일생을 사셨던 석하(石荷) 안종덕(安鍾悳) 선생의 증장손(曾長孫)이다. (389)
드디어 7월 27일 밀양읍 장날이 왔다. (423)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 축하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촉구를 위한 밀양군 인민대회’(424)
이젠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다 운동장 가운데에 나와 산을 넘어오는 군중의 흐름을 보고 있다. 마침 한여름이 되어 백의민족 특생의 횐 옷으로 해서 진록색의 산비탈 바탕에 그 군중으로 된 하얀 실이 더욱 분명한 줄로 되어 흐른다. 나의 고향 사람들이여! 아, 백의민족이여! 하나의 실로 한올 한올 엮어 오는 구나. (426)
맨 먼저 나의 할아버지가 사회자의 소개를 받아 연단에 나오셔서 대회사를 하셨다. 당시 나의 할아버지는 남조선노동당 밀양군당 위원장이셨고,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 밀양지부 의장단의 수석 의장이셨다. (431)
* 일곱, 대탄압의 서곡
아버지의 퇴출 434 / 검거와 테러, 그리고 도망 441 / 구지중학교 설립 사업 449 / 손기용 선생을 모시다 458 / 외아재는 책걸상을 만들고 466 / 다시 1학년이 되다 474 / 100일로 끝난 학생 생활 482 / 성호 동무와의 재회 488 / 분단과 반분단의 시초 494
1950년대 후반에 일본의 소설가 마츠모도 세이초(송본청장 松本淸張)가 시사 문예 월간지 문예춘추에 연재한 실화소설 북의 시인에서 많은 근거를 들면서 이승엽, 임화, 설정식, 이원조, 안영달, 박헌영 등의 이야기가 나온다. 거기에도 박잔목씨의 이야기가 나와있다. 거기에는 박진목 씨가 미군 정보기관의 일로 전선을 두 번이나 넘어 이북을 갔다왔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452)
이승만은 당장 그 경쟁자를 제거해야 했다. 그자가 바로 장덕수(張德秀 1895-1947) 였다. 장덕수는 1947년 12월 2일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朴光玉)과 배희범(裵熙範)에게 암살당했다. (485)
나는 내 가방에서 지금 막 보기 시작한 구면삼각 책을 내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수학공부는 언제나 종이와 연필이 필수적이다. (499) [1947년이면 14살인데 혼자서 구면삼각함수를 보았다니... 천재 끼가 있기는 있을 것 같아.... / 철학의 세계 과학의 세계(죽산, 1990), 수학문화사(일월서각, 1990)이외에도 수학에 관한 교양서적이 다수 있다고 한다. (46WLE)].
(lu 46WKA)
제2권 (434쪽)
* 여덟-밀양의 2·7 구국투쟁 II 8
다시 밀양으로 가자 10 / 갈등을 접고 감상을 버리고 17 / 얼음 구덩이에 들어가도 살겠다 25 / 똑같은 인식에서 똑같은 결의로 31 / 밀양고등공민학교에 편입하다 38 / 할머니의 젖가슴 45 / 봉기는 코앞까지 왔다 51 / 빈틈없는 투쟁 준비 56 / 밀양의 2·7 구국투쟁 62 / 연행과 석방 69 / 다시 모진 세월을 피해 77
... 책상이다. 거기에는 밀양중학교 1학년 때 배운 국어독본이 있고, 최현배 선생이 쓰신 조선말본도 있다. 먼저 국어독본을 펴보았다. 카프의 시인 임화(林和)의 「우리 오빠와 화로」라는 시가 나왔다. 이 시를 가르치던 하성호(河聖護)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50)
그날 우리는 국어책에 나오는 김소월(金素月)의 시 「산유화」를 배웠다. 작곡은 김순남(金順南) 선생의 것이다. (52) [법정의 제자, 실상사 덕현(德賢)이 물러나고 덕운(德耘)이 있다. 법정제자: 덕조, 덕인, 덕문, 덕현, 덕운, 덕진, 덕일. 박헌영 임헌영 영자 돌림이다.(46WLG)]
* 아홉-야산대 II 82
봉화투쟁 84 / 방동 마을의 그믐날 92 / 동지와 헤어지고, 새 동지와 만나고 99 / 새로운 이름, 신덕생 105 / 초당의 첫 밤 112 / 간부 양성 학습반 119
밀양 군당은 동북주 산악지대와 서남부의 평야지대의 차이로 인해 당의 조직 구조가 다르다. 서남부는 인구가 많아 군중투쟁이 주되고, 동부부는 인구가 적어 군중투쟁이 어렵고 유격투쟁이 적합하다. 밀양군의 이러한 특생으로 당의 조직도 자연 이원화되고 있었다. 양 지역은 밀양읍이 가운데 있어서 조직적 연결이 또한 어렵다. 그래서 군당은 이 두 지역을 나누어 독자적인 조직으로 꾸렸다. 조직선으로 만 군당과 결합하는 조직으로 했고, 이들 사이의 연게를 될수록 적게 해 조직선의 노출을 적극 피해왔다. / 1948년 7월부터 이 조직선의 레포를 내가 담당함으로써 밀양군당의 이러한 특수성을 잘 인식할 수 있었다. (80)
우리 겨레는 옛날부터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덕담을 했다. 그런데 그 덕담이 좀 이상했다. ‘살아서 건강하게 만나서 반갑다’는 덕담을 해야 하는 데, ‘이 사람 안죽고 살았네’라고 한다. 마치 ‘죽을 놈이 살았다’는 식이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진짜 마음은 ‘살아서 정말 반갑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엇조’다. (85) [말투의 ‘엇조’와 박자의 ‘엇박자’는 생명의 방향이다. 고른 방식 또는 범생의 방식은 사회의 순응이다. (46WMC)]
“지금부터 밀양읍 어느 곳에서든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이곳 종남산 정상에서 2.7구국애국투쟁의 불길을 지펴 올리는 모임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들의 투쟁의의를 이곳 초동면 당책 동지께서 간단히 말씀해 주시겠습니다.”(89)
2.7구국투쟁[1948년]은 1946년의 ‘10월항쟁’과는 달리 처음부터 사전에 계획한 조직적이며 무력에 대한 최소한의 폭력적[전투적]인 준비를 갖춘 투쟁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남의 운동은 무장투쟁으로 점차 전환해 갔다. 이때부터 각 지방에는 폭력[전투]을 상비하는 유격소조가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생겨났다. 이는 곧 제주도에서는 [1948]‘4.3민중항쟁’으로 이어나갔고, ‘5.10 선거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남조전인민유격대’로 발전해 나갔다. (91-92)
트(아지트). 원주6) 비합법적 운동이나 노동재의 등의 근거지로 사용하는 집회 장소나 지도본부, 비밀본부를 말하는데, 원래 agitation point에서 나온 말이다. 비밀아지트를 줄여서 ‘비트’라고도 한다. (106)
“그럼 내 이름이 서공생이니 날 생자를 하나 따서, 성은 평산 신씨로 하고 큰 덕 자를 붙여서 신덕생(申德生)으로 합시다. ..”(106)
사자평으로 갑시다. 거기에 가면 대초원이 펼쳐져 있고, 1,000미터가 넘는 재약산(載藥山), 천황산(天皇山), 능동산(陵洞山)이 동네 야산처럼 솟아 있답니다. (116-117)
천황산을 중심으로 해서 북으로 보이는 봉우리들 중 가장 높은 가지산(伽智山), 북서쪽에 운문산(雲門山), 억산(億山), 복동쪽에 고헌산(高獻山), 남동쪽에는 간월산(肝月山), 신불산(神佛山), 영취산(靈鷲山) 등이 빙 둘러져있다. 이 일대는 옛 봉건왕조때도, 일제 식민지때도, 어떤 권력도 못 들어갔던 곳이었다. (118-119)
* 열-산사람의 삶 126
산악 행군 훈련 128 / 민주집중제와 중앙집권제 135 / 불침번의 원칙 142 / 박철환 지도원 동지 149 / 무장투쟁의 기본 156 / 총기 학습 163 / 3·1절 봉기투쟁의 후과 167 / 소환과 이별 173 / 상호 존댓말의 ‘동지어’ 182 / 자유주의 배격 11훈 190 / 군당 연락부의 레포가 되다 197
우리들 다섯 청년은 박철환 동지의 지도로 산 생활의 기본적인 문제인 불침번의 조직과 학습과정을 정하고 .. (128)
구체적인 과목은 변증법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 모순론, 실천론, 연합정부론, 볼셰비키당사이다. (143)
지도원 동지는 또한, “연습은 ‘처음은 천천히, 차차 빠르게’”, 다음은 ‘시작은 원리대로, 나중에는 원리가 무의식적으로“라는 두 가지 구호를 일어주었다. (153) [뭄의 단련에 관한 것이다.]
[야산대 훈련 중에] 나는 모처럼 입체기하학에 과한 문제집을 펴고 공부하다가 잤다. (163) [어느 전투에서도 전공의 책을 읽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 감동이다.]
‘강동정치학원’은 조선인민유격대의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948년 1월 1일 개교한 학교다. 남조선에서 올라간 수많은 청년들이 이곳에서 유격대 간부 훈련과 학습을 받고 남조선 유격전을 위해 내려왔다. 그러나 박헌영, 이승엽 종파분자 일당에 스며든 대한민국 치안국 분실장 백형복과 전 남로당 경북도당책이었던 배신자 배철(裵哲)이 이들의 침투로를 무전으로 밀고하여, 그 침투로에서 대기 배치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거의 다 사살되었다고 한다. 전쟁 전후 모두 10여 회에 걸쳐 침투한 빨치산들이 모조리 사살되었는데, 그 숫자는 3,000명이 훨씬 넘는다고 한다. (172)
1948년 4월 중순 어느 날 저녁에 지도원 동지는 간부훈련생 5명을 자신의 방으로 모이라고 했다. 지도원 동지는 말했다. “오늘 노당과, 여러분이 소속된 군당에서 여러분을 소환하는 지령이 내려 왔소. 이제 여러 동무들과는 이별해야 할 것 같소. 군당 조직지도원과 만나는 방법과 암호 등은 각자에게 드리겠소. 접선장소와 암호를 잘 숙지하고 차질없이 접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오. 이상” (173)
“빨치산은 흥분하면 안 됩니다. 언제나 조용하고 냉철해야 합니다. 적에게 자기 속이 안 드러나도록 얼굴 붉어지는 일은 절대 금물입니다.” (174)
‘자유주의 배격 11훈’ ... 김남식 선생이 엮으신 남로당 연구(돌베개) 원주 10) 모택동의 ‘자유주의 배격 11훈’ / 1. 동창, 친지, 부하, 동료의 잘못을 알면서 책하지 않고 화평의 수단으로 방임하는 것. 2. 전면에서 말하지 않고 배후에서, 회의에서 말하지 않고 후에 난의(亂義)하는 것. 3. 타인의 잘못을 책하지 않고 말하지 않음이 명석한 보신술이라고 침묵하는 것. 4. 간부라고 자기 의견만 고집하는 것. 5. 개인 공격을 주로 삼으며 보복하려는 것. 6. 반혁명준자의 말을 듣고도 보고하지 않는 것. 7. 선동 선전하지 않고 당원의 임무를 망각하는 것. 8. 군중의 이익에 해를 주는 행동을 보고도 격분하지 않는 것. 9. 사무에 충실하지 않고 하루를 되는 대로 지내는 것. 10. 노선배 연하여 대사(大事)는 할 능력이 없고 소사(小事)는 하기 싫어하는 것. 11. 자기의 착오와 과오를 알면서 개정하지 않고 또는 자기를 책하되 비관 실망에 그치고 마는 것. (196) [김남식 1925년 충남 논산군에서 태어남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전임연구원..]
비상연락은 나를 활성리 살내 마을에 있는 나의 어머니의 고모이신 할머니의 집에서 일하는 작은 머슴으로 상정하고 단장면 미촌리의 귀미 마을에 있는 ‘트’로 가는 것으로 정했다. 그래서 접선 암호는 다음과 같다. / “여보세요, 살내 마을의 도동댁에서 씨나락을 가지고 왔습니다.” / “그래요 무슨 나락이고, 몇되를 가지고 왔소?” / “예, 찹쌀 2되하고 멥쌀 6된덴데요” (204)
* 열 하나-밀양군당 레포 204
‘최덕출’이란 새 이름 208 / 첫 레포 과업 215 / 군당 연락체계를 완비하다 224 / 세상을 떠난 김정애 형수님 233 / 5·10 단선 반대운동 242 / 남북조선 제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248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선포 252 / 폭력적 탄압과 처절한 저항 258
“.. 이제부터 동무는 이 집 작은 머슴으로, 어제 저녁만난 이 집의 상머슴인 최씨 아저씨의 먼 일가 총각으로 행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름도 걸맞게 붙여야지요. 가명의 성은 최씨하고 일가이기에 최가로 하고, 이름은 덕생이보다 덕출이라고 합시다. 그래서 이 집 사람들은 모두 동무를 보고 ‘덕출아!’라고 부르며 하대를 하게 될 겁니다. ..”(208)
“두 분 동지, 그래도 저는 산에서 빨치산의 세 가지 각오를 했습니다. 맞아 죽을 각오, 얼어 죽을 각오, 굶어죽을 각오, 다른 각오는 어금니를 꽉 악물고 했는데, 굶어 죽을 각오하라고 할 때는 눈물이 콱 나던걸요.” (228)
“나, 술 냄새만 맡아도 얼굴이 빨개지는 데, 나중에 아재가 업고 갈라꼬요?”(237) [맞어, 선생님은 술을 거의 안 마시는 것 같다]
1948년 5월 10일 당일에는 거의 전국적으로 투표소와 경찰파출소 등의 수류탄, 사제폭탄으로 파괴되었고, 경찰, 선거위원 등이 테러를 당했으며, 무기 탈취와 봉화시위 등이 일어났다. (247)
통칭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정식 이름 ‘전 조선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는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렸다. . 대표자수는 모두 695명으로, ... 이때 보고자는 주영하(朱寧河)였다. (250)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는 먼저 전 조선의 남북 인구의 비례에 따라 대의원 수를 남조선에 360명, 북조선에 212명을 할당했다. (252)
8월 20일[]1948] 하루 동안만 하더라도 남조선 전역에서 1,370명이 검거됐다. 연판장 선거의 전 기간을 통해서는 수만 명이 체포 투옥 당했으며, 수천명이 테러로 살상당했다. 이로써 많은 역량이 손실되었고, 그에 따른 조직선의 노출도 생겨 운동조직에는 많은 허점도 드러났다. (258)
5.10 선거 이후 남조선의 정세는 미제의 신식민지 예속과정을 창출해나가는 과정에서 ... 특히 대동청년단과 서북청년단 등을 비롯해서 김두한, 시라소니 이성순, ‘양호단’ 등이 살인적인 폭력을 휘둘러댔고 온 남조선 사회를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었다. (261)
* 열 둘-파국와 이탈 264
사상전향서와 탈당성명서 266 / 당원 배가운동의 후유증 272 / 50만 당원은 뻥튀기인가, 실재인가 279 / 와해되는 군당 조직 288 / ‘트’의 안전을 확인하라 295 / 파국과 이탈 300 / 총을 버리고 살길을 찾다 310
나는 내리면서 차장 아가씨에게 인사를 했다. / “고맙습니다” / ‘아차 또 잘 못!’하고 깨달았지만, 과오 다음 후회는 바로 ‘사후약방문’격이다. 조직원은 남에게 인상을 남게하는 행위, 행동은 절대 금물이다.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둑으로 올라갔다. (282)
박헌영이 이북에 가서 50만 당원을 자랑했는데 그 50만 당원은 바로 당원 배가, 5배가, 10배가라면서 뻥튀기 한 것인가. 당원명부에 실재(實在)로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1948년 12월 1일 발포한 ‘국가보안법’으로 몰려 국방경비대로 들어가거나, 도망다니다 끝내 자수하고 도리어 동지를 밀고하도록 만들고 말았으니, 그런 50만 당원 만들기 위해 뻥튀기한 것인가. (284)
이런 와중에 상부의 지도방침이 내려온 것은 [1949년]1월 중순경이었다. 그 지도방침이라는 것이 ‘당원을 정리해 당을 정예화한다’는 것이다. (289)
이리하여 ‘당원을 정리해 당을 정예화한다’라는 지도방침은 동지를 적의 수중으로 그대로 밀어 넣는 꼴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지지대중의 기반은 말라버리고 말았다. (290)
'마 그만 가라카이까네, 허 참. 그냥 가란 말이욧‘ / 그 낯익은 목소리의 임자가 서공생 동지라는 생각이 이때서야 났다. (312)
“고게 나서 복도 지지리도 없이 오라비도 못 보고 그만 가버렸지. 삼신할매가 무슨 용렬로 도로 데려갔는가. 그래 고게 너를 불러오려고 가버렸구나. 불쌍한 것!” .. 안재정(안在貞 1948-1949) ... (318)
* 열 셋-아기 선생 320
새로운 살길을 찾아 322 / 선생이 되는 손자 331 / 할배의 평양 이야기 339 / 아재와 아지매들의 사랑 349 / 열일곱 살 아기 선생 357 / 천직이었던 교사 생활 366
지금 한창 읽고 있는 미분적분학 책에 머리를 처박았다. (327)
응시자격 시험이 1949년 6월 하순 어느 날이었고, 본 시험은 7월 상순의 어느 날이었다. 장소는 대구시 봉산동에 있는 대구국민학교였다. 나는 이 시험에 두 번을 모두 합격해서 초동학교 준교사 자격을 얻었다. (331)
나는 제일 궁금한 것으로 두 가지를 제기했다. 그중 한 가지는 공산주의라면 가장 싫어하시는 ‘김구선생의 평양에서의 태도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반일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의 실현으로 이북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가’였다. (345)
해방 전 임정 때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테러를 서슴지 않았다. .../ 김구 선생이 공산주의들을 미워하는 중요한 이유인즉,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은 안중에도 없고 소련을 거리낌 없이 ‘조국’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또 자기들의 주장과 다르면 다 ‘보수반동’으로 몰아붙이면서 민족의 이익을 해친다는 것이다. (346)
연석회의가 끝나고 김구 선생은 평양을 떠나기에 앞서 김일성 수상과 단독회담을 가졌다. 단독회담이 끝나자 김구 선생은 숙연히 자세를 바로잡고 자신의 소청이라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인장을 내놓고 그것을 받아달라고 김일성 수상께 요청했다고 한다. (347-348) [1948년 9월 9일 이후인데... 수상이라는 칭호]
이승만은 1949년 1월 12일에 기자회견을 가지고 ‘북진 통일’의 방침을 내놓았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정면에다 내 건 것이다. ..//. 이리하여 1949년 한해 동안, 2,600여회 충돌이 일어났다. (360)
원주20) 보도연맹은 1949년 6월, 좌익운동을 하다가 체포되거나 자수해 변절하고 전향을 한 사라들을 별도로 관리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일제 식민지 친일전향 단체인 대화숙(大和塾)을 본떠 만든 것으로, 당시 반공사상 검사로 이름을 떨친 선우종원(鮮于宗源)과 오제도(吳制道)가 주도해서 만들었다. 보도연맹의 초대 간사장은 그러한 단체답게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성(민전)의 조직부장을 하다가 변절한 박우천(朴우천)이었고, 초대 회장은 8.15직후 제일 먼저 조선공산당 간판을 장안빌딩에다 내걸었던, 이런바 ‘장안파’의 공산주의 운동가라고 하는 정백(鄭栢)이 맡았다. (361) [1949년 6월 보도연맹(保導聯盟)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1949년 조직된 단체. 반공교화단체. / 일제강점기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체제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당시 보도연맹은 1948년 12월 공포한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좌익사범이라는 대상자를, 말은 보도하기 위한다지만 앞으로 있을 전쟁이나 정권이 불안한 사태가 생길 때 몽땅 잡아 처분하려는 모략적 계책이었다. 니는 6.25전쟁에서 이들을 몽땅 학살한 사실로 명백하게 증명된 셈이다.(361-362)
낙동강변의 모래땅 밭에는 낙화생이 특산물이다.(368)
막내 안재주(安在宙)
1949년 6월 남북 민전이 하나의 민전으로 통합된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에서 평화적 통일 방책을 제의한 바 있었다. (371)
이승만 정권은 1950년 5월 30일 총선거에서 대패함으로써 민심이반의 절정을 맛보았다. 선거는 이승만이 직접적인 감독 밑에 30명의 반대파 입후보자를 가두어 놓고 테러를 감행하는 공포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의 지지자는 210석 가운데 겨우 47석밖에 당선되지 못했고,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이승만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372)
* 열 넷-헐뜯기는 조국 374
7월, 대학살의 달 376 / 전쟁과 피난, 헐뜯기는 조국 387 / 불타버린 교사를 다시 세우고 397 / 변절과 순절의 갈림길 406 / 이제 대학으로 가자 418
1950년 7월 4일, .. 학교는 무기휴교되었다. .. [불문곡직 유치장에 갇히다] 376 .
“이 사람아 내가 우째 우리 집안 외손을 죽을 곳에 보내겠노. 내보내 줄테니 도망가라. 본서에는 못 잡았다고 할 테니.” / “할배요! 고맙구마.” (377) -
지서장은 내가 월급 받은 돈으로 어머니가 사 모은 금붙이와 아버지의 최신형 시계를 받고 내준 것이다. (378)
이 불천위 할배는 나의 13대조 할아버지의 장조(丈祖) 어른이시다. 이 집안에서는 불천위 감사공 할아버지로 부르고 있는 신위는, 성이 현풍(玄風) 곽(郭)씨이고, 휘(諱)는 월(越)이며, 감사 벼슬을 했다. .. 이 할아버지의 ... 둘째 아들이 이민 전쟁때 의병장으로 조국을 지킨 유명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장군 이시다. 그러니 나의 13대 조모는 바로 망우당의 질녀이시다. 나는 외존고모의 보호로 꼭 한 달을 숨어 살 수 있게 되었다. (379)
우리들은 백곡(栢谷) 마을의 김해 김씨 종갓집으로 찾아갔다. 백곡은 무오사화로 점필재 선생이 부관참시를 당할 때, 그의 제로 참형을 당한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동네다.(386)
[보도연맹으로] 이렇게 죽은 할배, 아재들이 30만이라고도 하고 50만 이라고도 했다. (388) [어느 글에서 그 당시의 인구표에 의하면 50만이 감소되었고, 실재로 30만이 넘을 것이라 한다. 킬링필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46WMA)]
특히 1950년 가을에 이북으로 침략해 들어간 미군은 이북 인민들의 굽힐 줄 모르는 저항에 부딪히자 침략자의 포학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북 천지를 지옥의 피바다로 만들었다. 황해도 신천에서만도 3만 5천여명의 인민을 살해했다. 이는 당시 신천군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수다. 이런 사실들은 전쟁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나서 외국 기자들의 기사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389)
가을 시제(時祭)는 대종묘사(大宗墓祀)를 음력 시월 보름날에 봉산(蓬山)에 있는 봉산제(蓬山齊) 설단(設壇)에서 지내고, 그 이튿날 16일에는 성만의 파종묘사(派宗墓祀)가 창녕에서 있으며, 그 다음날 17일에는 우리 집안의 시제가 있다. (407)
이승만 일당은 처음부터 보도연맹에 든 사람은 전원, 그밖에 눈엣가시처럼 박힌 자들도 검속 명단에 집어넣어 차제에 몽땅 없애려고 들었다. 밀양의 피검자들은 밀양 읍내에 있는 ‘가타구라 공장(片倉工場 편창공장) 창고에 가두었다. 여기에서 군경은 여러 급으로 분류해 즉결처분했다. (409-710)
[할배가 막내할배에게] “이놈아, 네가 보도연맹에 들어갔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조용히 있을 것이지, 이놈, 그래 조카가 박영세에게 갖다 주라는 솥값, 비누값을 떼먹고 밀양으로 가서 그 돈으로 한판 벌리다가 그만 붙잡혀? 이놈 허리뼈가 부러지도록 맞고 전향했다면서? 이놈, 여기서 당장 나가라! 우리 집이 어떤 집이라고, 윗대 할아버지 중에 지조 팔아먹고 살았던 사람 있더냐. 이 놈, 네가 내 아우라니, 세상 부끄러워 못 살겠다! 이놈, 여기에서 시방 당장 나갓!” (411)
[이종항교수] “.. 요즘은 가짜 졸업장이나 재학증명서들 만들어 바라는 학년에 들어가고 졸업하기도 한다네. 안 군은 실력이 있으니 그 실력으로 인정을 받아 졸업을 하라는 것이야. 어떤 고등학교든 들어가서 졸업만 하면 되는 것이야. .. 남들은 아무 실력도 없으면서 중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온단 말일세,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의과대학에도 들어가고, 의사도 되고 있거든, 아무튼 내가 안 군 자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뿐이네 ”(423)
1952년 1월에 나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에 지망했고, 장차 졸업해서는 수학을 가르치는 교원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430)
1952년 9월 1일, 대학에 입학만으로써 나는 이 분단된 나라의 남쪽 사회에서 출세의 끄나풀을 일단은 잡게 되었다. 그러면서 분단을 반대하는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의 투쟁의 깃발을 내려버리고 만 것이다. (431)
* 닫는 글 432
1952년 수학이라는 학문에 입문했고, 1956년에는 사범대학을 졸없해 사람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전문인이 되었다. (433)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도발된 청년학생들의 의거였다. / 그것은 내게는 호된 채찍이었다. 정말 정신이 뻔쩍들도록 하는 채찍이었다. 미국 놈이 만들어준 권좌에서 영구히 권력을 휘둘러대는 무소불위의 주인인줄 알았던 이승만이 4월 봉기로, 그 어린 학생들의 나라와 겨레에 대한 헌신으로 그 권좌에서 들려 나가고 만 것이다. (433) (lu 46WMA)
# 안재구(1933-) : 해방 이후 년표
- 끝나지 않은 길 1, 2에서
1933년 10월 24일 아버지 안의환(安義煥), 어머니 김태숙(金兌淑)의 장남으로 달성군 구지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항일혁명가인 우정 안병희(安秉禧) 슬하에서 성장했다.
1943 카이로선언(Cairo Declaration)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측의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蔣介石]가 카이로회담의 결과로 채택한 대일전(對日戰)의 기본목적에 대한 공동 코뮤니케(발표 12월 1일).
1945 포츠담선언(Potsdam Declaration)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영국·중국 3개국 수뇌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공동선언
1945(12살) 08 15 해방
1945 9월 6일 -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대표자회의,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발표. / 여운형 조선건국준비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부주석(副主席)이 되었으며, 김구․이승만․안재홍․송진우 등과 만나 국가건설 방안 등을 협의하였다.
1945 09 07 - 미국 극동사령부, 38선 이남에 대한 군정을 선포.
1945 09 08 -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국군, 인천에 상륙. 이날 상륙한 부대는 7사단 예하 육군 선발대였다.
1945 09 16 / 소련 정치국, 한반도38선 이북 군정실시 공포. / 민족주의 보수세력으로 구성된 한국민주당(한민당) 창당.
1945 10 10 - 김일성,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설치(46년 7월 북조선노동당으로 개편한 뒤 49년 6월 남조선노동당을 흡수해 조선노동당으로 확대).
1945 10월 16일, 이승만이 맥아더가 내어준 미군용 비행기를 얻어타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1945년 11월 19일 김일성 장군은 해방후 지방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를 정비 강화하고 북조선 행정 10국을 설치하여 치안을 확보하고 행정을 실시했다.
1945 11월 23일 [임정요인 귀국] 김구 선생과 더불어 김규식, 엄항섭, 이시영 등 15명이 11월 23일 개인자격으로 귀국했다.
1945 11 여운형은 11월에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을 결성하여 당수직에 맡았으며, 미군정 장관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1945 12 16-25 모스크바삼상회의(The Moscow Conference of Foreign Ministers, ─三相會議) 1945년 12월 16일 /종결 일시: 1945년 12월 25일 / 관련장소: 소련 모스크바 / 관련인물·단체: 번스(Byrnes), 몰로토프(Molotov), 베빈(Bevin)
<1945 12 19 미군정은 1945년 12월 19일 일반고시를 발표해 미곡의 소매가격을 통제했고, 1946년 1월 25일에는 식량난의 해결을 위해 농촌의 쌀을 강제로 징수하는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였다.>
1945 12 30 송진우 암살. 1945년12월 30일 새벽 6시 15분에 6명의 행동대원을 이끌고 서울 원서동 송진우를 찾아가 암살했다. 그들이 쏜 탄환 13발 중 6발이 명중하였다. 한현우(韓賢宇, 19? 9-2004)은 한국의 우익단체 활동가인 송진우를 저격, 암살한 범죄자이다. 암살 당시 미군정청에서는 송진우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하고 1946년1월 1일 다시 김구를 미군정청으로 소환하여 경고를 주었다. / 한현우(韓賢宇)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1946 1946년 연초부터 실시된 자유곡가제 폐지와 식량의 강제 수집은 일제 때의 무자비한 식량공출제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식량의 강제 수집은 농민들의 가장 큰 원성과 저항을 야기했다.>
1946 02 여운형은 46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曺晩植)과 김일성(金日成)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1946년 4월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에서 1946년 6월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개편
1946 05 정판사사건(精版社事件): 1946년 5월 8·15광복 후 혼란기를 틈타 남한의 경제를 교란하고, 또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조선공산당이 일으킨 지폐위조사건. [일제말기 화폐 남발과 군정의 남발로 인한 인플레이의 책임을 조선공산당에 책임을 넘기기 위한 조작 사건?]
1946 05 1946년 5월 콜레라가 유행하여 경상북도에서만 4천명이 사망하자 미군정은 전염을 막는다며 차량은 물론 사람도 시 경계를 넘지 못하게 교통을 차단하였다. 하지만 이 조치로 대구 시민들은 농작물과 생필품의 공급이 끊겨 쌀 부족으로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기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1946 6월 3일 - 이승만 정읍 발언 (단정 가능 제시)
1946 6월 19일 미군정 경성대학(京城大學), 구 경성의전 ·치전(齒專) ·법전(法專), 경성고공(高工), 경성고상(高商), 경성고농(高農) 등을 통합하는 국립대학안을 발표, 일부 학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8월 23일 군정령(軍政令)으로 국립서울대학교 신설을 강행하였다 - 국립대학안반대운동 [國立大學案反對運動]
1946(13살) 7월 27일 밀양읍 장날. ‘미,소 공동위원회 속개 축하와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촉구를 위한 밀양군 인민대회’
1946년 9월 달에 들자 나는 밀양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I: 126)
1946 09 여운형은 9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1946 09 17 9월 17일 - 한국군정기: 수도경찰청 발족(청장 장택상)
1946 9월 총파업 ... 1946 [대구 총파업] 윤장혁은 9월27일 미군정 경북지사 헤론 대령과 회담하나 협상은 결렬되고, 이에 9월30일 무려 5천여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 윤장혁(예천, 1911- 1968), 김일식, 최문식, / 3공시절 활약한 김성곤이 당시 인공 산하 경북 도인민위원회 재정부장으로 있었고 역시 훗날 대한변협 회장과 유정회 국회의원을 지낸 홍승만은 이때에 투쟁기금을 헌납하겠다며 쓰고 있던 금테안경을 냈다고 합니다 또한 훗날 공화당 당의장서리까지 지낸 백남억은 이 당시 부산철도노조 파업의 지도자였다. / 대구고보: 공산당 대구시당위원장이 되는 장적우, 김일식, 염필수, 서혁수]
1946 10.1 [대구 시월항쟁] 대구시민들이 ‘쌀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기아행진을 하고 있다. <10월항쟁유족회 제공>
1946년 10월 대구 시월항쟁 : 미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에 항의하던 대구 시민들의 시위에 대해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가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고,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며 무력으로 개입하면서 1946년 말까지 남한의 거의 모든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1946 11 여운형은 11월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과 합동을 제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은퇴를 선언하였다./ 1946년 11월 23일 창당된 남로당.
1947 01 여운형 정계복귀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였다.
<1947 03 01 제주도 3.1절 행사 경찰의 발포, 4.3의 비극의 발단>
1947(14살) 05 01 노동절 대회 참여 사건으로 안재구 학생은 퇴학을 당하다.
1947 05 여운형 근로인민당 창당 / 여운형 3월 신당 결성을 위한 준비 활동에 착수하여 5월에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김규식․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1947년 5월 12일 동맹휴학생 4,956명(총수의 절반)이 제적되고, 교수 380여 명(총수의 3분의 2)이 해임되었다. 5월 말 미군정 당국이 국립대학안에 관한 수정법령을 공포함으로써 반대운동은 가라앉기 시작하였으며, 8월 14일 제적학생 중 3,518명에 대한 복적이 허용되어 국대안 반대분규는 1년만에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국립대학안반대운동 [國立大學案反對運動]
1947 07 19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 [본명: 이필형, 李弼炯, 1929- ?) 18세, 백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1947 12 02 장덕수(張德秀 1895-1947)는 1947년 12월 2일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朴光玉)과 배희범(裵熙範)에게 암살당했다.
1948 ‘강동정치학원’은 조선인민유격대의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948년 1월 1일 개교한 학교다.
1948(15살) 2월 7일 안재구 2.7구국투쟁에 참가하였다. (단선반대투쟁)
1948 02 10(13?) 김구는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단독정부수립 반대 성명을 발표.
1948 03 01 제주도 3․1투쟁기념준비위원회(위원장 安世勳) 결성, 발포: 장택상.
1948 3월 각 지방에는 전투를 운영할 수 있는 유격소조가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생겨났다. (안재구, 15살로 야산대(野山隊)에 들어가다) [박현채는 1950(16살)에서 1952년사이 빨치산 소년돌격부대 문화부 중대장으로 지리산,백아산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46WMC)
1948 04 03 제주도 4·3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4·28평화회담이 성사되면서 평화로운 해결이 기대되고 있었다 /
1948 04 19 ‘전 조선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는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렸다. . 대표자수는 모두 695명으로, ... 이때 보고자는 주영하(朱寧河)였다.
1948 05 제주도 5월 초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발하면서 그는 다시 무력 진압을 강경하게 고수하였고 이 때문에 4·3의 희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통킹만 조작사건,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유조구사건(柳條溝事件) 조작과 마찬가지이다. 김현희 칼기 사건, 천안함 사건의 왜곡 .. ]
5월 3일(?) 서울대 문리과 대학 학생들은 동맹 휴학. [단선반대 확장의 예]
1948 05 10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선거 반대투쟁..- 198명 국회의원 선출
1948년 7월부터 이 조직선의 레포를 내가 담당함으로써 밀양군당의 이러한 특수성을 잘 인식할 수 있었다. (80)
1948 09 09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257) / 김일성 수상...
공화국기 게양 투쟁 ... 그것은 별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259)
1948 10 19 여수·순천사건(麗水順天事件)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에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일으킨 사건. 제주도 4·3사건 진압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정부를 저지하려고. 이승만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강력한 반공국가를 구축하였다.
1948 11월2일 대구 국방경비대 제6연대 군인반란(1차-11.2) 이 군인은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공포... ‘사상전향서’... ‘탈당성명서’...
1948년 12월30일 대구 주둔 6연대에서도 공산분자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재빨리 진압됐다.
1949년 1월 12일 이승만 기자회견 ‘북진 통일’의 방침을 내놓았다.
1949년 1월 30일 대구제6연대 군인반란(3차-1.30)
1949(16살) 3월 1일 이쯤에서 밀양군당과 하부면당 사이의 반이 거의 와해되었다. [국가보안법으로]
1949년 4월 8일 북부면당도 잡혀갔다. 다원에서도 청도샌님, 덕실 아재 등도 잡혀가다. - 모든 선이 끊어지다.
1949(16살)년 6월 초등교원 준교사 시험에 합격
1949년 6월 보도연맹(保導聯盟) 좌익인사 교화 및 전향을 목적으로 1949년 조직된 단체. 반공교화단체. 설립일 1949년 6월 / 일제강점기 사상탄압에 앞장섰던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체제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1949년 6월 남북 민전이 하나의 민전으로 통합된 ‘조국통일민주주의 전선’에서 평화적 통일 방책을 제의한 바 있었다. (371)
1949년 6월 26일 한국독립당 당수 김구가 육군포병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권총으로 살해된 사건.
1949년 9월 - 1951년 6월 대구시 달성군 구지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1950(17살) 6. 25 남북 전쟁.
1950 10 3일 “10월 4일 복귀하라‘ 학교로 다시오다.
1951(18살) 8월 20일 남산동 영남중학교 가교사. 고등학교 3학년 편입
1952(19살) 1월에 나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에 지망했다, 장차 졸업해서는 수학을 가르치는 교원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430)
1952 빨치산 박종근 (1920-1952) 경북 의성, 합법시 경북도당위원장, 부인 이숙의(李淑義, 1926-2000)
1956(23살) 사범대학을 졸업해 사람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전문인이 되었다.
1960년 4월 9일 그리고 이승만 하와이로 도주하다.
1976(43살) 9월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79(46살) 10월 체포되다. 1심에서 사형 1988년 12월 가석방.
1994(61살) 6월 14일 구국전위 조직사건으로 무기징역.
1999(66살) 8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2013(80살) 11월 끝나지 않은 길 1, 2 출판기념회
(4:39, 46WMC)
#### 책속의 인물들 년표
강성호 밀양
강양욱 김일성 수상의 외숙인 목사.
강진(姜進, 1905- ?) 함경북도 회령 사회주의 운동가. 일명 강(姜)나후렌치, 권성만(權成萬), 김용칠(金龍七), 김(金)와시리, 백인석(白仁錫), 술리모프로 등으로 불렸다.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다가,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강창덕(姜昌德) 개명 강복수(姜馥樹) 청구대 영남대교수가 되었다.
곽룡암(郭龍岩) 구지 초등학교 선생님
곽월(郭越 1518-1586) 호 정재(定齋), 1518년(중종 13)~1586년(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망우당(忘憂堂) 경남 의령 1592년(선조 25) 의병장
구정식(具貞植) 민청지도원 그의 스승은 이진화이다. 동진학교 교사.
김굉필(金宏弼 1454-1504) 한훤당(寒喧堂)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50세 무오사화(1498)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갑자사회로 죽다.
김구(김창수, 1876-1949)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 1944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1928 한국독립당 총재.
김규식(金奎植 1881(고종 18)∼1950) 부산 동래 우사(尤史) 항일독립운동가, 정치가, 학자.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김기화(金基華) 밀양중하교 수학 선생님
김남식(金南植, 1925-2005) 충남논산. 대한민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문가이며 통일 운동가이다. 본명은 김동만(金東滿)이다.
김동원(金東元, 1884-1951) 평남 대동, 일제강점기 교육인. 구한말기 교사로 지내면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투신하여 활동. 납북. 평양부호 김대윤(金大潤)의 맏.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형
김병환(金騈煥 1889-1947) 경남 밀양, 의열단. 1919년 3월 밀양에서 시위운동으로 6개월 간 복역. 1920년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에 관련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의열단). 해방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밀양군 지부 위원장. 부위원장 안병희(安秉禧), 김희지(김熙祉), 박고지(朴高知), 정운(鄭雲), 김형달(金炯達).
김용우(金容佑) 당시 경북도 학무과 장학사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인촌(仁村) 전북 고창. 교육가, 언론인, 정치가. 본관은 울산(蔚山). 호남의 거부였던 경중(暻中)의 넷째 아들로 경성방직회사 창설,《동아일보》창간, 보성학교 인수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1951년 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사임하였다.
김우식(金禹植 1886-) 석당(石堂), 대구. 인재구 외가 큰집 할배, 베이징 대학졸, 제헌 국회의원(경북 달성) 한민당 도당 감찰위원장이면서 도당 위원장이다. 그야말로 대구에서 우익정치인으로는 가장 으뜸인 셈이다. (192-293)
김원봉(金元鳳 1898-1958), 약산(若山) 독립운동가, 의열단(義烈團). 경남밀양, 경력 1957.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56북한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2 북한 노동상,
김일성(金日成, 1912-1994) 공산주의 혁명가. 평남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 출생, 본명 김성주(金成柱).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 어머니는 강반석(康盤石)
김일손(金馹孫 1464-1498) 1464(세조 10)∼1498(연산군 4).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김해(金海).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무오사화(戊午士禍)
김정구(金貞九) 구지경찰서장 평안도 출신.
김정애(金貞愛 -1948) 여성운동가, 박말수의 형수
김종원(金宗元 1922-1964) 경북경산, 만주 일본군 헌병하사. 자칭 백두산호랑이, 내무부 치안국장, 장면부통령저격사건의 서대문형무소.
김진식(金瑨植) 구지면 부면장 그의 동생 김봉식(金琫植)
김채영(金彩永) 영남중 서무과
김팔용(金八龍) 평안도 대구사범 졸업반 수학선생
도상록(都相祿, 1903-1990) 함흥, 만주의 신경공업대학 교수,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물리학자. 핵물리학 연구. 2000년 대한민국 통일부 보고서는 그를 ‘북한의 핵 과학 아버지’에 근접한 인물로 묘사했다. 국대안 반대로 해임
박말수(1931- 안재구 친구. 아명 만쇠(晩釗) 맏형 박정쇠(朴丁釗) 월북작가.
박봉섬(1932-) 말수의 여동생
박상업 밀양중학교 학생자치회장 안재구 선배
박석정(朴石丁) 말수의 형님 일제하 샛별 소년잡지 창간
박순희
박시목(朴時穆) 의열단 애국열사, 북경에서 붙잡아, 부자 서대문형무소에 살았다. 동생은 박진목, 준목(俊穆) 중목(重穆)
박시제(朴時濟) 안재구의 존고모
박진목(朴進穆) 남로당 도당 조직책. 대구에서 요정 경영. 미군정기의 정보기관과 줄이 닿아 한동안 양다리 놀음 했다.
박찬현(朴瓚鉉 1917-1991) 경남 청도, 1941 일본 메이지대학 법문학부, 1955 미국 미주리대학 정치학과, 1981 한국외국어 대학교 대학원 교수, 1990 세종대학 이사장. 전형적인 일제 부역자, 미제 앞잡이
박철환 야산대 지도원, 연안 해방구에서 ‘항일군정대학’에서 학습
박헌영(朴憲永 1900-1955) 공산주의 운동가. 충청남도 예산 태생. 본관은 영해(寧海).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현주(鉉柱)와 소실인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현채(朴玄埰, 1934-1995) 경제학자. 전남화순. 빨치산(1950 16살) 서울대 경제학과, 1964인혁당, 1989 조선대교수]
박희병(朴熙秉) 밀양의 인민운동가.
백남운(白南雲 1895-1974) 역사학자, 경제학자, 정치가. 전라북도 고창 출생. 수원고등농림학교와 일본의 동경상과대학을 졸업.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한국사회경제사 연구. ≪조선사회경제사≫.
백형복 : 박헌영 종파의 한놈인 치안국 대공분실장 백형복의 모략적 배신으로 거의 모두 희생되고 말았다.
서공생 당명 (안: 덕생)
선우종원(鮮于宗源, 1918-) 주암(周巖) 평안남도 대동 법조인, 본관은 태원(太原)이고 반공검사. 경성제국대학교 법학과 졸업
손기용 1950 6 밀양에서 구지로 온 화학 선생님 “백골대”에 의해 사망
손소출 1931? 초등학교 동기동창
손주헌(孫朱憲) 손기용의 부친, 통일운동, 평양'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
송진우(宋鎭禹 1890(고종 27)∼1945) 고하(古下). 전남 담양.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신응철(申應哲) 구지초등학교 교장선생님
안경환(安景煥 1916-1949) 경찰과 교전중 사망, 안재구의 아재.
안병제(安秉濟) 유천할아버지 안재구 종조부(셋째)
안병희(安秉禧 1890-1953) 우정(于正) 밀양, 안재구 할아버지(맏). 항일독립운동가. 통일운동, 평양'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
안영달(安永達) 솔례(率禮)할아버지. 노동운동 나중에 박헌영 이승엽과 더불어 죽었다.
안재구(安재구 1933-) 1933년 10월 24일 아버지 안의환(安義煥), 어머니 김태숙(金兌淑)의 장남으로 달성군 구지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항일혁명가인 우정 안병희(安秉禧) 슬하에서 성장. 경북대 교수. 남민전 중앙위원. 덕생 덕출
안재홍(安在鴻, 1891(고종 28)-1965). 정치가, 사학자. 본관 순흥(順興). 호는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 출신. 윤섭의 아들로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일제 식민지시기 시대일보 이사, 조선일보 사장
엄항섭(嚴恒燮, 1898-1962) 독립운동가 경기도 여주,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 경력1944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 1940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1935 한국국민당 이사, 선전부장, 1926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개정기초위원
여운형(呂運亨 1886-1947)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 독립운동가, 정치가. 본관은 함양(咸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
염응택(廉應澤 1902) 염동진, 대동단을 조직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의사 총사령. 현준혁 암살, 여운형 암살에 관여, 최용건 집, 김책, 강량욱 ... 테러를 저질렀다. ,
오제도(吳制道 1917-2001) 평남 안주, 법조인, 1950년대초 반공검사로 이름을 떨쳤다. 좌익 전력자를 전향하도록 한 보도연맹 결성 주도(선우종원(鮮于宗源, 1918-)과 함께 .
윤청길(尹淸吉) 구지경찰서장
이석기(李錫基) 통일운동, 평양'남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 정치가, 독립운동가,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4선 후, 4․19 혁명으로 하와이로 도망.
이승엽(李承燁, 1905-1953) 경기도 부천, 공산주의운동가. 아버지는 뱃사공으로, 그가 태어난 뒤 인천으로 이주하여 여인숙을 경영. 1919년 인천상업학교에 재학중 3·1운동에 참가. 1930년 부산에서〈전조선 피압박 ·피착취 계급에 격(檄)함〉이라는 전단을 제작 배포.
이언적(李彦迪, 1491-1553)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조선 중기의 문신. 경주 양동 『구인록』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주요작품 <일강십목소> - 을사사화(1545) 유배.
이영세(李永世) 대구문리과대학 학생 <영남일보>기자.
이종항(李鍾恒) 대구대학 정치학교수
이진화(李鎭華) 호 동진(同塵), 동진학교 설립
이협우(李協雨, 1921-1987년 8월 11일) 정치인. 제2대-제4대 국회의원을 역임.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대동청년단” 내남면 오단부단장, 자유당 월성군당 위원장
장덕수(張德秀 1895-1947) 1947년 12월 2일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朴光玉)과 배희범(裵熙範)에게 암살당했다.
조만식(曹晩植 1882-1950) 민족주의자, 교인
조병옥(趙炳玉 1894-1960) 유석(維石), 충남 천안, 독립 운동가 겸 정치가. 1909년 평양 숭실 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 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 흥사단 등의 단체에
조우재 1946년 4월 조선민주청년동맹(민청) .. 1946년 6월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민애청) 이를 체포하고 고문한 자는 김종원이다. 자유당 말기 내부부 치안국장을 했다.
주승도(朱勝道) 군당 지도원 동지 가명.
주영하(朱寧河, 1908년-?)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가. 1930년 12월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직공으로서 정달헌(鄭達憲)을 고문으로 하고 김인덕(金仁德)·한주교(韓柱敎) 등과 함께 좌익이론을 연구하는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최달현 청도샌님 밀양 군당조직책 변절 사찰계 형사가 되었다. [당명: 주승도 청도 샌님 지도원 동지]
최종대(崔鍾大) 구지면장 구지고등공민학교
허헌(許憲, 1885-1951) 함경북도 명천, 변호사·독립운동가·정치가. 보성전문학교를 졸업. 일본에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대학 총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딸 여성정치가 허정숙(許貞淑 -1991).
현준혁(玄俊爀 1906-1945) 평안남도 개천 출생,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 대구사범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는 독서회사건. 8·15 해방 전후 평안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대동단 단원 백관옥에게 암살
황용주 대구사범, 조도전 대학에서 불문학.
#### 해방 이후 년대순
1454 김굉필(金宏弼, 1454-1504) 한훤당(寒喧堂)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50세 무오사화(1498)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 그곳에서 조광조(趙光祖)를 만나 학문을 전수하였다. 갑자사회로 죽다.
1464 김일손(金馹孫 1464-1498) (세조 10)-(연산군 4). 탁영(濯纓) 소미산인(少微山人), 조선 전기의 학자. 본관은 김해(金海). 대대로 청도에서 살았다.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
1491 이언적(李彦迪, 1491-1553)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 조선 중기의 문신. 경주 양동 『구인록』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일강십목소> - 을사사화(1545) 유배.
1518 곽월(郭越 1518-1586) 호 정재(定齋), 1518년(중종 13)-1586년(선조 19) 조선 중기의 문신.
1552 곽재우(郭再祐 1552-1617) 망우당(忘憂堂) 경남 의령 1592년(선조 25) 의병장(홍의장군)
할아버지 우정(于正) 안병희(安秉禧) 종조부 유천 할아버지
아버지 안의환(安義煥)
어머니 김태숙(金兌淑)
안재구 재두 용아 향아 재주(在宙)
1875 이승만(李承晩, 1875-1965) 우남(雩南) 황해도 평산. 정치가, 독립운동가, 우익 민주진영 지도자. 1948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4선 후, 4․19 혁명으로 하와이로 도망.
1876 김구(김창수, 1876-1949) 독립운동가 (황해도 해주) 1944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1928 한국독립당 총재.
1881 김규식(金奎植 1881(고종 18)∼1950) 부산 동래 우사(尤史) 항일독립운동가, 정치가, 학자. 본관은 청풍(淸風). 교명(敎名)은 요한(Johann),
1882 조만식(曹晩植 1882-1950) 민족주의자, 교인
1884 김동원(金東元, 1884-1951) 평남 대동, 일제강점기 교육인. 구한말기 교사로 지내면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 투신하여 활동. 납북. 평양부호 김대윤(金大潤)의 맏. 소설가 김동인(金東仁)의 형
1885 허헌(許憲, 1885-1951) 함경북도 명천, 변호사·독립운동가·정치가. 보성전문학교 졸.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일성대학 총장,
1886 여운형(呂運亨 1886-1947) 몽양(夢陽) 경기도 양평, 독립운동가, 정치가. 본관은 함양(咸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
1886 김우식(金禹植 1886-) 석당(石堂), 대구. 인재구 외가 큰집 할배, 베이징 대학졸, 제헌 국회의원(경북 달성) 한민당 도당 감찰위원장이면서 도당 위원장이다. 그야말로 대구에서 우익정치인으로는 가장 으뜸인 셈이다. (192-293)
1889 김병환(金騈煥 1889-1947) 경남 밀양, 의열단. 1919년 3월 밀양에서 시위운동으로 6개월 간 복역. 1920년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에 관련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의열단 관련). 해방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밀양군 지부 위원장. 부위원장 안병희(安秉禧), 김희지(김熙祉), 박고지(朴高知), 정운(鄭雲), 김형달(金炯達).
1890 안병희(安秉禧 1890-1953) 우정(于正) 밀양, 안재구 할아버지. 항일독립운동가.
1890 송진우(宋鎭禹 1890(고종 27)∼1945) 고하(古下). 전남 담양.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1891 안재홍(安在鴻, 1891(고종 28)-1965). 민세(民世) 경기도 평택. 정치가, 사학자. 본관 순흥(順興). 윤섭의 아들로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일제 식민지기 시대일보 이사와 조선일보 사장.
1891 김성수(金性洙, 1891-1955) 인촌(仁村) 전북 고창. 교육가, 언론인, 정치가. 본관은 울산(蔚山). 호남의 거부였던 경중(暻中)의 넷째 아들로 경성방직회사 창설,《동아일보》창간, 보성학교 인수 등 활발히 활동하였다. 1951년 2대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사임하였다.
1894 조병옥(趙炳玉 1894-1960) 유석(維石), 충남 천안, 독립 운동가 겸 정치가. 1909년 평양 숭실 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 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 흥사단 등의 단체에
1895 백남운(白南雲 1895-1974) 역사학자, 경제학자, 정치가. 전라북도 고창 출생. 수원고등농림학교와 일본의 동경상과대학을 졸업.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한국사회경제사 연구. ≪조선사회경제사≫.
1895 장덕수(張德秀 1895-1947) 1947년 12월 2일 종로경찰서 경사 박광옥(朴光玉)과 배희범(裵熙範)에게 암살당했다.
1898 김원봉(金元鳳 1898-1958), 약산(若山) 독립운동가, 의열단(義烈團). 경남밀양, 경력 1957.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56북한 공산당 중앙위원회 중앙위원. 1952 북한 노동상,
1898 엄항섭(嚴恒燮, 1898-1962) 독립운동가 경기도 여주,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 경력1944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 1940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 1935 한국국민당 이사, 선전부장, 1926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개정기초위원
1900 박헌영(朴憲永 1900-1955) 공산주의 운동가. 충청남도 예산 태생. 본관은 영해(寧海).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현주(鉉柱)와 소실인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2 염응택(廉應澤 1902) 염동진, 대동단을 조직하고 남쪽으로 내려와 백의사 총사령. 현준혁 암살, 여운형 암살에 관여, 최용건 집, 김책, 강량욱 ... 테러를 저질렀다. ,
1903 도상록(都相祿, 1903-1990) 함흥, 만주의 신경공업대학 교수, 김일성종합대학 물리수학부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물리학자. 핵물리학 연구. 2000년 대한민국 통일부 보고서는 그를 ‘북한의 핵 과학 아버지’에 근접한 인물로 묘사했다. 국대안 반대로 해임
1905 이승엽(李承燁, 1905-1953) 경기도 부천, 공산주의운동가. 아버지는 뱃사공으로, 그가 태어난 뒤 인천으로 이주 여인숙을 경영. 1919년 인천상업학교에 재학중 3·1운동에 참가. 1930년 부산에서〈전조선 피압박 ·피착취 계급에 격(檄)함〉이라는 전단을 제작 배포.
1905 강진(姜進, 1905- ?) 함경북도 회령 사회주의 운동가. 일명 강(姜)나후렌치, 권성만(權成萬), 김용칠(金龍七), 김(金)와시리, 백인석(白仁錫), 술리모프로 등으로 불렸다.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1906 현준혁(玄俊爀 1906-1945) 평남 개천 출생, 연희전문 문과를 거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대구사범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맑스주의를 연구하는 독서회사건. 8·15 해방 전후 평안남도 지역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대동단 단원 백관옥에게 암살
1908 주영하(朱寧河, 1908년-?)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가. 1930년 12월 조선질소비료회사의 직공으로서 정달헌(鄭達憲)을 고문으로 하고 김인덕(金仁德)·한주교(韓柱敎) 등과 함께 좌익이론을 연구하는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 ‘전 조선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는 4월 19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렸다. . 대표자수는 모두 695명으로, ... 이때 보고자는 주영하(朱寧河)였다.
1912 김일성(金日成, 1912-1994) 공산주의 혁명가. 평남 대동군 고평면(古平面) 남리(南里) 출생,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아버지는 김형직(金亨稷), 어머니는 강반석(康盤石)
1916 안경환(安景煥 1916-1949) 경찰과 교전중 사망, 안재구의 아재.
1917 박찬현(朴瓚鉉 1917-1991) 경남청도, 1941 일본 메이지대학 법문학부, 1955 미국 미주리대학 정치학과, 1981 한국외국어 대학교 대학원 교수, 1990 세종대학 이사장. 전형적인 일제 부역자, 미제 앞잡이
1917 오제도(吳制道 1917-2001) 평남 안주, 법조인, 1950년대초 반공검사로 이름을 떨쳤다. 좌익 전력자를 전향하도록 한 보도연맹 결성 주도(선우종원(鮮于宗源, 1918-)과 함께 .
1918 선우종원(鮮于宗源, 1918-) 주암(周巖) 평안남도 대동 법조인, 본관은 태원(太原)이고 반공검사. 경성제국대학교 법학과 졸업
1921 이협우(李協雨, 1921-1987년 8월 11일) 정치인. 제2대-제4대 국회의원을 역임. 대구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대동청년단” 내남면 오단부단장, 자유당 월성군당 위원장
1922 김종원(金宗元 1922-1964) 경북경산, 만주 일본군 헌병하사. 자칭 백두산호랑이, 내무부 치안국장, 장면부통령저격사건의 서대문형무소.
1925 김남식(金南植, 1925-2005) 충남논산. 대한민국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문가이며 통일 운동가이다. 본명은 김동만(金東滿)이다.
1933년 10월 24일 안재구, 부 안의환(安義煥), 모 김태숙(金兌淑)의 장남. 달성군 구지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조부 항일혁명가인 우정 안병희(安秉禧) 슬하에서 성장했다.
[박현채(朴玄埰, 1934-1995) 경제학자. 전남화순. 빨치산(1950 16살) 서울대 경제학과, 1964인혁당, 1989 조선대교수]
첫댓글 안선생님의 어린 시절이야기로
안재구: 할배 왜놈소는 조선소랑 우는 것도 다른강?(1997)
{마실에서 천하흘밤}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