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남 시집 『슬픔도 졸이면 단맛이 난다』 출간
임영남 시인은 충남 아산에서 출생했고, 1995년《詩와 詩論》(현 문예운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겨울 벗기』(1996), 『들꽃을 위하여』(2002) 등이 있고, 논문집으로 『오장환 시 연구』(1997)가 있다. 청주 신인예술상(1997)과 청하문학 신인상(2002)을 수상했고, 현재 금강여성문학 동인, 풀꽃시문학, 한국문인협회 공주지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슬픔도 졸이면 단맛이 난다』는 임영남 시인의 등단 22년만에 묶는 세 번째 시집이며, [슬픔도 졸이면 단맛이 난다]는 표제시처럼, 이 세상의 삶의 지혜와 그 서정적인 감수성이 진하게 배어 있는 시집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임영남 시인을 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참 극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봉황동 옛 골목길> 같은 작품들을 보면 임시인이 공주교대 시절 은사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듯한데, 아마도 어려서부터의 가정교육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임시인은 대가족의 일원으로 자란 듯한데, 시 <어머니의 된장국>을 보면, 집안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달차근한 햇마늘 줄기처럼 당차게 키워내신 육 남매 고단한 땀방울
고춧대 자작한 아궁이불 슬픔도 졸이면 단맛이 나는지 뚝배기 속 고만고만한 수저가 자란다 <어머니의 된장국> 전문
6남매를 둔 집이다. 어지간 넉넉한 집이 아니라면 기르고 먹이고 교육시키기가 쉬울 리 없다. 어머니는 아궁이에 고춧대로 불을 때어 밥을 짓고, 남은 불에 국을 끓여내신다. “슬픔도 졸이면 단맛이 나는지”라는 구절이 빼어나다. 그 한 구절에는 많은 사연과 의미가 담겨 있다. 어머니의 고단한 노동으로 지탱하는 어려운 형편이고, 뚝배기에 특별한 재료도 넣지 않고 졸여낸 된장국이지만, 가족이 함께 하는 밥상은 꿀처럼 달다. 그 덕분에 6남매는 햇마늘 줄기처럼 쑥쑥, 달차근하고 당차게 자랄 수 있었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시 <앉은뱅이꽃>에서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시다. 들에 핀 앉은뱅이꽃-제비꽃-을 보며 시인은 어머니의 유언을 떠올린다. ‘우애 있게 살어.’라는 말씀이다. 어미새처럼 연신 먹이를 물어다 막둥이 입에 넣어주시던 어머니가 그리워서 시인은 무덤가에 핀 앉은뱅이 꽃에 말을 건다. <어머니의 된장국>과 <앉은뱅이꽃>에서처럼, 자식에게 가장 어머니를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는 것은 역시 밥에 얽힌 추억이다. 시 <밥물>에서 임영남 시인은 밥 뜸들이는 냄새에서 어머니를 떠올린다.
마을 어귀 뉘 집에서 뜸 들이는 구수한 냄새 밥물은 절로 절로 흘러넘쳐도 당신 없는 세상은 솔바람도 스산한 겨울 자식 입에 밥물 들어가는 것만 보아도 배부르다 좋아하시던 어머니 살아생전 뜨신 밥 한 그릇 못 해 드렸는데
꿈결에 비단 안개 두르고 다녀가시니 하늘 끝 처마마다 영산홍 밥물 들겄네 시 <밥물> 전문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작품이다. 주부들은 밥물이 끓어 넘치려 할 때 불을 줄이고 뜸을 들인다. 밥물은 밥을 못 넘기는 환자나 우유를 못 먹는 아기에게 미음, 그러니까 생명수가 되기도 한다. 평생 자식 입에 밥 넣어주시느라 자신의 밥은 챙기지 못하시던 어머니를 잃고, 자식은 후회할 일만 많아진다. 왜 내가 밥하여 어머니를 대접하지 못했을까. 이젠 밥물이 넘쳐흐를 만큼 흔한 세상인데 왜 어머니가 안 계실까. 마지막 연에서 어머니는 비단 안개를 두르고 석양빛에 물들어 계신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늘 끝 처마마다 영산홍 밥물 들것네”라는 구절이 선연하게 아름다운 것은, 시인의 마음에 간직한 어머니의 모습이 마치 선녀처럼, 중생을 살리는 관음보살처럼 성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시집 안에는 어머니 외에도 가족에 관한 시가 많이 눈에 띈다. <아버지 문갑>에는 아버지가, <신혼집>에는 새색시였을 때의 시댁 가족이, <등 붉어진 남자>에는 남편이, <얼렁 댕겨와유>에는 시어머님이 각각 등장한다. 모두 소중한 인연이며 시인의 든든한 지지자들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가족에 대한 시 중에서 <봄 편지>가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웃음이 입술 가득 번질 수 있다는 건 가슴 뿌듯하여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건 혼자 있어도 늘 콧노래가 이어진다는 건
네가 있기 때문이다
자궁 속에 돛을 달고 목표도 없이 출렁이고 있다는 건 나이도 점령할 수 없다는 건
네가 있기 때문이다 - 시 <봄 편지> 전문
시인의 어머니가 자식 입에 밥물만 들어가도 배부르시다던 것처럼, 이제 시인 역시 ‘가슴 뿌듯하여 먹지 않아도 배부른’ 자식을 가지게 되었다. 생각하기만 해도 웃음이 흐르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하물며 늙어가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한다. 자식이란 그렇게 든든한 존재인가 보다. 시 <오월의 빛깔>에서 시인은 오월의 신부가 된 딸의 결혼식 날, 딸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써 피했다고 썼다. 마침 직접 물을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시인에게 왜 그러셨느냐 물으니, 눈을 마주치면 좋은 날 울게 될 것만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빈 둥지 증후군이 느껴지는 이 시의 말미는 다행히 ‘손주들 재롱에 슬픔이 짧아졌다’는 해피엔딩이다. 어머니와 딸, 손녀로 이어지는 인연의 소중함을 강하게 느끼며, 가족이 시인을 치유해주고 지탱하게 해주는 힘인 것을 알게 된다.
입춘立春에게 편지가 왔다 어서 길을 내라고 우체통으로 향한 눈부터 쓸어야겠다 - <눈길> 전문
선운사 동백나무 아랫도리 우는 아이 서 있네 초경을 하고서 부끄러운 듯 - <선운사 동백> 전문
----임영남 시집 『슬픔도 졸이면 단맛이 난다』,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