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계략 計略
희뿌연 흙먼지가 점차 가까이 다가온다.
몇 마리의 말들이 먼지를 날리며, 이쪽 방향으로 급히 달려오는 것이다.
달려오는 속도가 빠르다. 가까이 다가오는 걸 보니 말 세필이다.
마상의 기수들은 약관의 청년처럼 보인다. 소년들과 비교하면 성인들이다.
세 명이 모두 어깨가 떡 벌어진 모습이 상당한 완력의 소유자로 보인다.
세 명의 장정이 나타나자 어느새, 저 멀리서 불을 쬐던 소년들도 가까이 다가왔다.
“형님 오셨습니까?” 청년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주 공손하다.
마상 위의 청년들은 소년들의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중부와 한준을 노려 보고는
“네 놈들은 어디서 온 놈들이냐?” 다짜고짜 욕설로 말문을 여는 모양이 시비조다.
‘아차’
이중부와 한준은 그제야 소년들의 계략에 빠졌다는 것을 알아챈다.
얻어맞고도 땔감을 해주겠다는 선심 善心과
나뭇단을 보통 단보다 크게 묶은 것과
칡 줄기에 낫질로 흠집을 낸 것이며,
불을 피운 이유가 드러났다.
땔감 나무를 대신해 준다며 사람을 현혹 眩惑시켜 현장에 붙잡아두고,
나뭇단을 유난히 크게 묶은 것과 칡 줄기에 낫질한 것은 나뭇단을 터지게 하여 시간을 끌기 위한 시간 연장책이며,
젖은 옷을 말리려고 불을 피운 것이 아니라, 연기를 피워 올려 지원군을 요청한 것이었다.
두 군데의 파란색 연기는 ‘상황이 아주 급하다’는 긴급 緊急 신호였다.
이제서야 생각해보니
"하다 보면 말을 놓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라는 족제비의 말도 의미심장 意味深長한 소리 같다.
나타난 청년들은 소년들의 얘기를 들어보지 않아도, 두 줄기 파란색 연기만으로 벌써 현장의 분위기를 파악하였으니, 먼저 힘으로 본-대를 보여주기로 이미 결심한 모양이다.
중간의 검은 말을 탄 갈색 머리가 아마 무리 중의 우두머리 같아 보였다.
검은 말 양쪽에서 청년 둘이 말에서 뛰어 내리더니, 이중부와 한준에게 손가락을 까닥이며 오라는 손짓을 한다.
중부와 한준은 말에서 뛰어 내리는 청년들의 몸놀림이 예사 솜씨가 아님을 직감한다.
처음으로 강적 强敵을 만났다는 느낌이 든다.
청년들의 표정이나 몸놀림이 일반적인 말을 타고 양 떼를 모는 목동 牧童 출신의 장정들이 아니라, 무사 武士로서의 기질이 은근하게 배어난다.
중부와 한준도 이에 질세라, 역시 품새를 갖춘다.
청년들도 섣불리 공격을 가하지는 않는다. 다섯 명의 동생들이 나름 완력을 쓴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두 명이 그 다섯 명을 패퇴시켰다면 보통 솜씨는 아니라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다.
어려 보여도 눈빛이나 자세에서 고수의 냄새가 난다.
오른편, 이중부의 상대는 살짝 곰보다, 아마 천연두가 가볍게 스쳐 간 모양이다.
넓은 얼굴에 작은 눈, 거기에 천연두 흉터까지 있으니 더 우악스럽게 보인다.
왼쪽 한준의 상대는 키가 크며 매부리코다.
오른 팔뚝에 푸른 늑대의 머리 문신을 정교하게 새긴 것이 눈에 띈다.
곰보 청년의 왼손이 중부의 오른쪽 광대뼈를 향해 가볍게 내지른다.
허초 虛招다.
중부도 이를 눈치채고 슬쩍 왼편으로 피하며 왼쪽을 경계한다.
과연, 곰보 청년의 오른발이 중부의 왼 어깨를 노리고 발차기를 시도한다. 이중부는 왼팔을 들어 좌측 방향으로 상단 막기를 한다. 그러나 그것도 허초다.
발차기를 시도할 것처럼 들어 올린 후, 이중부의 왼손이 가로막기 하고자 마중 나오길 기다려, 오른발을 왼쪽으로 슬쩍 돌려 땅을 딛으며 그 반동으로 빙글 반 바퀴를 회전하며, 왼 다리로 이중부의 열린 가슴을 향해 돌려차기를 시도한다.
아주 신속하면서도 부드럽다.
중부의 왼손이 하릴없이 허공에 떠 있으니, 순간적으로 몸 중심이 흐트러진다.
얼른 뒤쪽으로 두 걸음 후퇴한다.
그러나,
곰보는 이것까지 이미 예측하였다는 듯이 다시, 오른발로 돌려차기를 한다. 마치 팽이가 돌 듯이 연이어 돌려차기 공격을 퍼붓는다. 곰보 청년의 주특기다. 그래서 별명도 팽이다
이중부는 이리저리 피하기에 정신이 없다. 팔이나 다리를 들어 막기를 하면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겠는데, 상대의 신체 크기가 머리만큼이나 더 커, 몸과 몸이 맞부딪치는 정면 대결은 자신이 없다. 더구나 그 빠른 돌려차기 위력의 기세에 억눌려 감히 막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한편,
한준은 늑대 머리 문신 청년과 서로 간에 발차기를 두어 번 시도 하더니, 서로가 허리와 옆구리를 부여잡고, 엉킨 채로 몸싸움하고 있는데 한준이 덩치 차이로 인하여 뒤쪽으로 조금씩 밀리고 있다.
그래서 한준은 이리저리 좌우로 방향을 바꾸어 가며, 상대의 완력을 분산시키고자 애를 쓴다.
이중부는 위기다.
벌써 상대의 돌려차기가 다섯 초식을 넘기고 육 초식을 시전한다.
그런데 공격하는 상대방, 팽이 청년도 초조해진다.
지금까지 자신의 특기인 돌려차기 팽이 초식을 오 초식 이상 넘기는 적수를 아직 몇 명 보질 못했다.
보통 힘쓴다고 소문이 난 장정이라 하더라도 삼, 사 초식 내에 끝장이 난다.
그런데 아직 조그만 꼬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이중부도 나름으로 정신이 없다.
기선을 제압당하여 반격을 가할 틈이 없다.
팽이 청년의 위맹스런 돌려차기 칠 초식에 대책 없이 또다시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뒤로 물러나는데, 돌부리에 발뒤축이 걸리면서 뒤로 넘어진다.
‘아~ 졌다’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상대방도 이중부가 갑자기 보이질 않자 순간 주춤거린다.
자기 다리에 맞지도 않았는데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질 않으니, 다음 공격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이상하다.
뒤로 넘어지던 이중부는 찰나적으로 상대가 주춤거리는 것을 포착한다.
넘어지는 순간에도 몸을 옆으로 비틀며, 양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임기응변으로 오른 다리로 전력을 다해 상대의 발목을 낮게 돌려 차버린다.
돌려차기 공격 자세로 인하여, 홍학 紅鶴처럼 왼다리 한발로 땅을 딛고 있던 팽이는
왼 발목 복숭아뼈에 큰 타격을 받고 ‘억’하며 비명을 지르며 몸이 허공에 떠오른다.
‘꽈당’ 큰 소리를 내며 청년의 몸이 땅바닥에 넘어진다.
둘 다 바닥에 쓰러진 상황이다.
그러나 이중부는 바로 벌떡 일어난다.
그러나 팽이 청년은 누운 상태로 꼼짝을 못한다. 상당한 타격을 입은 모양이다.
이중부는 위기일발 危機一髮에서 가까스로 벗어난다.
좌중의 모든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관중들 눈에는 이중부가 먼저 쓰러지고 다음 순간, 팽이가 넘어졌으니 당연히 팽이가 승리한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팽이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있고, 먼저 넘어진 이중부는 멀쩡하게 일어나니 귀신이 조화를 부린 것만 같다.
그런데 가만히 돌이켜보니 이중부는 가볍게 넘어졌고, 팽이는 강한 타격을 받아 넘어졌다.
이중부의 기술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도 아주 강하게,
대체 저게 무슨 무술이지, 금시초문 今始初聞이다.
무술을 제법 한다는 관중들의 눈에도 여태, 보지도 듣지도 못한 괴초식이다.
서서 보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가령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앉아서 큰 눈을 뜨고 본다고 하더라도, 바닥의 흙먼지 때문에 자세히 볼 수가 없는 괴초식 怪招式이다.
마상 馬上의 갈색 머리 장정은 더욱더 어리둥절할 뿐이다.
기선을 제압한 팽이가 지는 격투기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
조금 전, 상황도 여느 때처럼 순조롭게 팽이의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다만, 삼, 사 초식 만에 끝난 것이 아니라 조금 더 시간이 흘렀고,
상대하던 꼬마는 쓰러졌으니, 끝이 난 결투라는 느낌이 들어 눈을 돌려,
늑대가리와 한준 간의 사지 四肢가 서로 얽힌 싸움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 팽이와 꼬마의 싸움 결과를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마치, 속임수 높은 기이한 마술 魔術을 보는 느낌이다.
한편,
한준과 늑대 문신 청년의 대결은 치열하다.
서서 하던 몸싸움에서 이제는 땅바닥을 뒹굴면서 흙먼지를 일으키고 있다.
이전투구 泥田鬪狗다.
늑대 머리 문신은 문신 모양대로 ‘늑대 대가리’가 별명이다. 키가 크고 매부리코다. 포악스럽게 보인다. 이를 줄여서 ‘늑 대가리’라고 부른다.
* 대가리와 탱그리
‘대가리’라는 단어가 현재로서는 ‘머리’의 비속어로 전락 轉落되어 있다.
동물이나 물고기의 머리를 하대 下待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고대 古代에서는 극 존칭어 極尊稱語 였다.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즉, 왕 王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대가리’란 단어가 흉노족을 통해 중앙아시아로 흘러 들어가서 현재는,
“탱그리(tangri : 단군)"로 변천되어 현재도 살아있는 극존칭 極尊稱 단어다.
‘마누라’란 ‘마노라’라는 몽골어가 고려와 이조시대에는 왕궁에서 사용되던 극 존칭어였는데, 이조 말에는 사대부가 사용했고, 현재는 ‘아내’란 호칭보다 더 못한 속어로 전락 轉落 된 것과 같은 흐름이다. 영감(令監), 사모(師母)님 같은 단어도 비슷한 맥락이다.
* 지역별 단군의 호칭
몽골, 중앙아시아. : 탱리, 탱그리, 탕그리.
몽골, 만주, 투르크. : 탁리.
만주, 퉁구스. : 탕구르.
티베트. : 탕라, 삼바라.
중국. : 티엔즈(천자. 天子)
동유럽, 불가리아. : 탕그라.
‘늑,대가리’란 말도 늑대의 우두머리라는 존칭어다.
신체가 큰 만큼 완력이 세니, 근접한 몸싸움에 유리한 늑대가리는 한준을 밑에 깔고 짓누르려고 한다. 곁으로 보기로는 덩치가 큰 늑대가리가 상당히 우세해 보인다.
그러나 한준도 만만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다.
뒹구는 순간순간 틈만 나면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늑대가리의 옆구리나 허리 등의 급소를 골라 찌르고, 머리는 상대의 안면을 가격한다.
그러니 늑대가리도 함부로 마음대로 마구 하질 못한다.
덩치로 힘으로 상대를 밀어붙이고 있지만, 한준의 날카로운 손속이 급소를 찌를때마다 순간순간 마비가 되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고, 한준의 머리 박치기가 광대뼈나 턱을 스쳐 갈 때는 아찔하다.
한준의 양 무릎도 가만히 있질 않는다.
계속 허벅지 앞쪽의 기문혈과 허벅지 뒤편의 은문혈을 번갈아 가며 찍어댄다.
이건, 사람을 안고 뒹구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시덤불을 안고 있는 기분이다.
아니, 무시무시한 가시를 자랑하는 시무나무나 탱자나무를 안고 뒹구는 느낌이다.
단단하기로는 박달나무가 최고라 하지만 시무나무도 박달나무 못잖게 야물고 인장력도 휼륭하다.
마른 시무나무는 못이 아예 들어가질 못한다. 억지로 망치질을 계속하면 커다란 대못이 굽어버린다. 탱자 가시보다 배 이상 큰 시무나무 가시는 사람의 맨손으로는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단단하다.
그러니 한준과의 몸싸움은 마치 고슴도치를 안고 싸우는 것과 다름없다.
늑대가리는 이럴 바에는 차라리 거리를 두고, 상대방과 떨어져 긴 사지를 이용하여, 타격할 수 있는 입식 立式격투기로 승부를 거는 편이 훨씬 유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양팔을 굽혀, 자신과 한준의 가슴과 허리 사이에 끼워 넣어, 한준을 자신의 몸에서 떨어지게 하고자 밀어낸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일어나려 한다.
밑에 깔린 한준도 늑대가리의 의중을 알아채고, 늑대가리가 굽힌 왼 팔꿈치의 곡지혈을 오른손으로 잡고는 엄지로 힘껏 눌려버린다.
팔을 바로 편 상태에서도 곡지혈 曲池穴을 누르면, 곡지혈은 팔의 중요 혈도 穴道이기에 물론 무척 아프고 힘을 쓰기 어렵다. 그런데 팔꿈치를 굽힌 상태의 ‘ㄱ’자 위쪽 중심부의 곡지혈을 위아래로 누르면, 아픈 것은 둘째 문제고 바로 마비가 되며, 힘을 전혀 쓸 수가 없다.
느끼는 그 고통이 배가 倍加 된다.
순간 “으악” 늑대가리의 비명이 터져 나온다. 스스로 자기 몸과 상대의 가슴 사이에 끼워 넣은 팔이 야속하다. 자승자박 自繩自縛의 형국이다.
팔꿈치의 혈도를 찍혀 버렸으니 꼼짝을 못한다.
한준의 왼손은 늑대가리의 등을 부여잡고 상대가 팔을 뺄 수 없도록 오히려, 몸을 더욱 밀착시키고 있다.
늑대가리는 팔이 긴 것이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빼도 박도 못하는 진퇴양난 進退兩難의 위기다.
늑대가리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이를 바라보는 족제비를 비롯한 소년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해간다.
‘하늘처럼 믿던 형님들마저 저놈들에게 어이없게 당하다니’
팽이 형님은 이미 중부에게 패하여 땅바닥에 누워있고, 늑대가리 형도 쬐그만 녀석에게 고신 拷訊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다.
여러 가지 권모술수 權謀術數를 짜내어 저놈들을 붙잡아 놓고, 형님들을 급히 이곳까지 지원 나오게 하였는데...
- 52
첫댓글 대가리에 이렇게 깊은 뜻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