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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추수감사주일 예배 설교
○ 역대상 16장 34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8절 말씀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체를 보면 명령형입니다. “너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라”, “너는 하나님께 쉬지 말고 기도하라”, “너는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24시간 동안 항상 기뻐하고 계십니까? 또 24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 24시간 동안 감사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매일 같이 죄를 범하고 사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보면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말씀은 왠지 우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하나님 앞에서 항상 기뻐하는 것이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과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어떻습니까? 할 만 하십니까? 아니면 ‘도전은 해봤는데 잘 안되네요?’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시키신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잘 모르셔서 무리한 명령을 하셨을까요? 시편 103편 14절을 보면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먼지 뿐임을 아시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지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능력으로 무슨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 이전의 몇 절을 보면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게 됩니다. 시편 104편 11-14절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이렇게 여러분들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신앙생활을 하기 정말로 힘든 이 세상에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왠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너무 모르신다는 생각하시지는 않으십니까? 아니면 그런 생각조차 가져지지도 않으십니까? 여러분들이 진정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살고자 도전하고 있다면 이런 완전한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여러분들이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보다 훨씬 더 신앙생활이 힘든 시대였습니다.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박해를 받기 시작하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날 그날 믿음으로 버티고 살아가기도 힘든 교회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살면서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무리에 가까운 명령을 하시는 의도는 무엇입니까? 완벽한 삶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전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매일같이 여러분들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가면서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삶을 원하십니다. 자칫 잘못하면 마귀의 유혹과 올무에 빠지기 쉬운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너희는 계속해서 쉬지말고 항상 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뻐할 수 없는 일을 만나도 그 상황에서도 기뻐하셨던 예수님처럼, 그 악조건의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 또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이는 상황에서도 감사하셨던 예수님처럼 여러분들 역시 예수님과 함께 성령님이 지시하시는 길을 가면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다가 잘 안되기도 하고, 또 실패하기도 할지라도 넘어진 아이가 얼른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아버지에게 달려가, 아들을 향해 내미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신나게 걷는 것처럼 여러분들 역시 예수님과 함께 신나게 걸으라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신나는 신앙생활의 비결입니다.
그 넘어지고 실패했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분의 역할을 담당하시면서도 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내가 너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니까 너는 할 수 있어!”하고 용기를 주십니다. 여러분 계속 도전하시는 삶을 살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역대상 16장 34절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왕이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 성에 법궤를 모실 곳을 따로 마련한 후에 그곳에 모셔놓고 나서 너무나 좋아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찬송하면서 부른 노래입니다. 다윗은 말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모든 범사에 감사하며 또 이 추수감사주일에 이렇게 하나님께 푸짐하게 드리고 또 기뻐하면서 예배와 감사예물을 드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읽으신 오늘 본문의 다음절인 역대상 16장 35절을 보면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에서 건져내시고 모으사 우리로 주의 거룩한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소서 할지어다”하면서 감사 찬송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만국 가운데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를 모으셔서 주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며 주의 영광을 드높이게 하셨습니다.”하고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만나지 못하셨다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는 그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의 감사는 어쩌면 범사의 감사가 아니라 일시적인 감사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감사는 범사에 감사하면서 지금 역시도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감사 영역을 보면 단순히 개인적인 영역이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라는 공동체적인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내시고”라는 말씀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이스라엘 주변에는 수많은 이스라엘 나라보다 강한 나라들로 둘러 쌓여 있었습니다. 남으로 애굽이 있고, 남서쪽에는 블레셋이 있고, 남동쪽에는 구스가 있고, 서쪽에는 에돔과 모압과 암몬이 있고, 북쪽에는 앗수르와 바벨론과 아람나라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들 모든 나라와 전쟁하는 것은 물론 이들 주변에 한 나라와 전쟁을 해도 승산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작았고 또 약했습니다. 언제나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면 언제나 승리는 그들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가 이겼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와 함께 하셨고 이스라엘 나라의 팔을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승리는 항상 하나님께 있었고 그 승리와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항상 이스라엘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승리는 항상 우리 교회에 있고 또 여러분들에게 있습니다.
우리 교회 주변에도 그렇고 여러분들 주변에도 역시 그렇습니다. 영적으로는 강한 사탄의 권세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속으로 교회가 문닫고 이 곳에서 떠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고 언제나 자기들과 같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사탄은 여러분들이 신앙을 포기하고 세상으로 뛰쳐 나가게 하기 위해 갖은 유혹과 시험과 박해로 어려움을 주면서 곤경에 몰아넣고 있습니다.
마귀는 불신앙의 사람들을 세워서 교회를 공격하기도 하고, 또 여러 모양으로 공격하여 교회를 쓰러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 승리의 하나님께서 교회를 구원하시며 교회의 지체인 여러분들을 지키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만민 중에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송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곳에 모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모으셨습니까?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교회에 모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고 싶어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통해 감사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여러분들을 모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모으심의 구심점으로 삼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몸인 교회는 지체들의 연합으로써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교회 안의 너와 나는 서로에게 있어서 필수적인 연합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부에 대하여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그렇게 만드셨다는 사실을 교회의 성도들이 알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많은 성도들이 모여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이 가치를 알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자신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예수님 안에서 한 교회가 되도록 불러 모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시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바로 교회와의 연합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 나가도 믿음만 잘 지키면 된다구요? 그것은 사탄의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로부터 떨어뜨리기 위해 주는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꿈은 교회를 통해 이루어가십니다.
다음으로 여러분들이 감사를 드리게 되는 이유는 여러분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함을 느끼는 분도 있고 또 지금은 풍요로움을 느끼지 못하지만 앞으로는 느끼게 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두 부류의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길 원하십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을 보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말씀은 지금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앞으로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하시면서 “구하는 자가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는 믿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며 또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왜 그런 약속을 하셨습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욕심으로 구하는 것은 안됩니다. 하나님은 욕심으로 구하는 자들은 후에 하나님을 계속적으로 이용해 먹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응답을 하지 않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거나 아니면 탐욕에 사로 잡힌 사람을 마귀의 손에 넘기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 풍요로운 삶을 인도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적은 것을 받아도 주신 풍요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큰 것을 받아도 항상 부족하게 느껴져 감사가 아니라 불평하며 원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가 받은 가치를 알지 못해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추수감사주일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어떤 것은 하찮게 보이고, 어떤 것은 불만스럽게 보일 수도 있으며, 어떤 것은 여러분들이 도저히 기대하지도 않았고 예측하지도 못했던 어렵고 힘든 일들이 예비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 우주의 모든 것을 경영하시고 이 지구의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지극히 큰 것까지 다 경영하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들을 위해 하시는 일은 언제나 선하시며 인자하시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여러분들은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크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시편 107편과 시편 118편, 그리고 시편 136편을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송하는데 있어 지극히 큰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지극히 작은 일까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또한 깨달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살면서 선하시며 인자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아들을 주시면서 까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며 사랑을 표현하시는 하나님의 그 극진한 사랑을 감사하면서 찬송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아서 가장 적당한 날씨에 가장 적당한 때에 비를 주시면서 여러분들을 농사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수확을 믿고 기대하면서 씨를 뿌립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농사만을 지으시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 뿐 아니라 이 땅에 농사짓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온 세계에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을 공급하시기 위해 이미 농사를 짓기 전부터 미리 땅을 비옥하게 하는 비를 내리시고 날씨를 조성하셨음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로인해 그 농사가 여러분들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가족들에게도 나누어 주지 않으십니까? 그뿐이 아닙니다. 일부는 누군가에게 팔아서 그 사람의 가족들 역시 먹고 삽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농사에 집중할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십억의 인구를 먹여 살리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시며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고 진정으로 감사하며 기뻐하는 사람은 지극히 적은 소수의 사람들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말씀을 통해 일깨움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감사 생활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도 하나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알지 못하며 또한 선하시며 인자하심을 알지 못해 끝없이 자기 중심적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면서 좋은 일이 일어나면 감사하다가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같을 때는 금방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 세상에서 살고 있는 감사치 못하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새인집에 초청을 받으셔서 가시게 되었습니다. 물론 열 두 제자들도 함께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시몬은 나병에 걸렸다가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나병에 걸리는 사람들은 천형의 벌을 받았다고 해서 도저히 나을 수 없는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됩니다. 언제 죽을 지는 모르지만 날마다 점점 심해지면서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나병을 가진 시몬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는데도 으례히 손님들에게 하는 손발을 씻을 물을 내오지도 않았고 씻어주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감사가 없었습니다. 나병을 고쳐주셨으니까 예의상 한 번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이다 보니 예수님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대단히 크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어떤 여자는 예수님이 그 집에 들어올 때부터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머리 카락으로 향유가 뭍은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섬김과 감사의 행동이 가능하겠습니까? 사람들의 이목을 더 신경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눈물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것을 본 시몬이 속으로 말했습니다. “저분이 진정으로 선지자라면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줄을 알 텐데 저런 일을 겪으면서도 그냥 두다니?”
그러자 시몬의 생각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그러자 바리새인이며 나병의 고침을 받고 예수님을 초청했던 시몬이 대답합니다. “선생님 말씀하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이 대답을 합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판단이 옳다” 그리고는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리고 나서 여자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리고 한 가지를 더 확인시키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은 그녀의 죄를 보이지도 않게 멀리 옮기셨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누가 더 큰 은혜를 입은 것같습니까? 시몬입니까 이 여인입니까? 표면적으로 보면 시몬입니다. 그런데 누가 더 크게 감사를 드립니까? 여자입니다. 여자의 마음에는 예수님께 자신이 500데나리온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고 시몬은 자신이 50데나리온의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입니까? 받은 은혜보다 은혜받은 사람의 마음의 크기가 그 사람이 받은 은혜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적게 받고도 크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크게 받고도 적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며, 또한 크고 작게 받는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마음에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적은 은혜를 받아도 크게 느끼지만 교만한 사람은 큰 은혜를 받아도 비한 방울 얼굴에 맞은 것처럼 별거 아니게, 그리고 하찮게 여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크고 작은 풍요에 큰 감사를 범사에 드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감사를 크게 받으시고 크게 칭찬하시며 여러분의 삶을 더욱더 윤택하고 풍요롭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 함께 역대상 16장 34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모든 범사에 감사를 드리는 이 축복이 이 추수감사주일을 시작으로 여러분들 온 생애동안에 넘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