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3. 5
고무신열반경/최길하
來客이라곤 산목련 그림자뿐.
"열반경"처럼 닳은 고무신 하나
온종일 문 밖에 기다리고 있다.
산중 적막이 다 모였는데 텅 비어 있다.
저 북가죽 같은 공허가 되기 까진
얼마나 많은 관음이 쌓였을까.
꽃잎이 날아와 앉기도 하고
가랑잎이 깃을 접고
가랑가랑 잠들기도 했으리라.
밤새 흰눈을 가득 품던 날도
달빛이 흠뻑 안겼다 가던 날도
저렇게 텅 빈, 빈 배였으리라.
그만 가자는 말은 못하고
산목련 그림자만 키운다.
봉오리가 많이 부풀어 올랐다.
(시작에세이)
내가 북한산을 오르는 코스 중에
가마 만한 암자 둘을 지나가야 하는 곳이 있다.
노스님이 홀로 지키는 절이다.
고무신 하나만 언제나 놓여 있었다.
내방객이 없는 것이다.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는데
오늘은 산목련 그림자가 고무신에 일렁인다.
뜰 앞 산목련이 오늘만 거기 서 있었겠나?
내 心象에 그림자가 같이 일렁인 것이지.
암자 이름이 운가사(雲伽寺)
구름 위에 떠 있는 가마란다.
저 구름 같은 고무신 또한 가마 아닌가?
산목련 터질 때가 다 됐다.
(공부하기)
(來客이라곤 산목련 그림자뿐.)
절에 오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에둘러서 적막감을 높힌다.
'찾아오는 사람 없는' 이렇게 표현한다면 바둑 수가 뻔하지 않게느가?
("열반경"처럼 닳은 고무신 하나)
닳은 고무신=노스님=열반이 가까운.
공통분모가 공명하게
(온종일 문 밖에 기다리고 있다.)
'이제 그만 가시죠?' 이말을 침묵의 언어로 한다.
(산중 적막이 다 모였는데 텅 비어 있다.)
고무신과 산목련 그림자는 산의 모든 적막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여기까지는 설명 아닌 묘사 들이다.
(저렇게 큰 공허가 되기 까진
얼마나 많은 묵언이 쌓였을까.)
묘사 아닌 반 설명이다. 다음에 오는 묘사와 연결고리 때문에
판소리에서 창(소리)을 할 때 아니리(말) 같은 것이다.
그래도 설명은 긴장을 떨어트린다. 지금 이렇게 바꿨다.
저 북가죽 같은 공허가 되기 까진
얼마나 많은 관음이 쌓였을까.
(꽃잎이 날아와 앉기도 하고
..........................................
저렇게 텅 빈, 빈 배였으리라.)
(그만 가자는 말은 못하고
산목련 그림자만 키운다.)
스님 그만 가시죠? 차마 그 소리를 못하고
말 대신 산목련 그림자만 큰다. 시간이 갈수록 그림자가 커지는 오후다.
(온종일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 마지막 문장이 시적 긴장을 조금 떨어트린다.
그래서 쓰리쿠션으로 바꿨다.
(봉오리가 많이 부풀어 올랐다.)로.
첫댓글 고무신열반경 잘 읽었습니다.
읽을때면 생각에 잠기다가도, 생각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좋은 날 보내세요, 선생님.
읽고 또 읽고하고 있습니다